5장 ㅡ 임신중지의 해법

캐나다에서 임신중지는 임신기간 내내 합법이다. 하지만 캐나다의 상황은 임신중지를 완벽하게 보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돌봄에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이 많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임신중지 진료를 받을 수 있지만 외딴 지역이나 농초ㆍ지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또 12~16주 이후에는 시술을 받을 수 없는 주도 있다. 20주 이후에 임신종결이 필요한 사람들은 이 시기에 임신중지가 가능한 도시로 이동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미국으로 이동해야 하기도 한다.
이렇게 접근성이 부족한 상황과 때로는 사람들이 여행을 하거나 임신중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문제가 있다고 보여진다.

어떤 일에 대해 ‘법적권리‘란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다. 즉 권리에 의미가 있으려면 실제로 사람들이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자원과 지원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5장 ㅡ임신중지의 해법
문제는 인공자궁이 아니다. 오히려 일부 국가에서는 애초부터 임신중지를 법적으로 방어해야 할 일로 계속해서 규정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 법들이 기초하고 있는 가부장적 간섭주의의 잔재,
여성들이 자기 몸에 대해 권한을 갖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문제이다. 재생산의 자유를 위해 협소한 영역을 조금씩 계속 개척하거나 임신중지를 형법 사안으로 간주하는 제한된 법적 해결책은 필요치 않다. 재생산과 관련된 삶을 통치하는 법은 우리에게 필요치 않다. 대신 임신중지를 비범죄화하고, 필수 보건의료 서비스로 취급하고, 세계 어느 곳에서나 지역과 문화에 적합한 안전한 임신 종결 방식에 접근하도록 보장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임신중지를 인정하는 곳에서만이 부모가 원해서 낳은 미숙아를 돕기위해 설계된 인공자궁 같은 기술이 재생산권을 위협할 일은 없을 것이다. - P206

유용한 예를 캐나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캐나다에도 강경한임신중지 반대 단체들이 잔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성이 제한된 지역이 많지만, 임신중지는 임신 기간 내내 합법이다. 연방 정부 차원에서는 태아에게 있는 생명으로써의 잠재력을 임신한 사람의 권리와 견줄 만한 이해 사안이라고 표현한 적이 결코 없다. 캐나다에서 임신중지권을 확립한 여왕대 모겐탤러r.v.Morgentaler 사건은 1988년 대법원에 상고되었다. - P206

모겐텔러는 이미 한차례 법정에 선 적이 있었다. 로우 사례의 법률팀이 법정에서 임신중지 범죄화에 이의를 제기했듯이, 모겐탤러와 그의 동료들은 사건을 대법원까지 끌고 가 임신중지 금지가 부당하다는 판결을 얻어낼 수 있기를 바랐다. 결국 법원은 ‘모든 사람에게는 개인의 생명, 자유, 안전에 대한 권리가 있으며 기본적 정의의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한,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는다‘라는 <권리와 자유에 관한 캐나다 헌장 Canadian Charter of Rights andFreedoms> 7조에 근거하여 병원 위원회의 승인을 요구하는 조항이 여성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데 동의했다.  - P207

윌슨 판사는 "재생산을 하거나 하지 않을 권리는 현대 여성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성과 가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251조 4항에서] 실제로 여성들은 수단으로, 즉 자신이 바라는 일이 아님에도 통제할 수 없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우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모겐탤러 판결은 임신중지 보호를 개인의 안전(즉,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온전성‘)과 자유를 모두 보호하는 데 필요한 권리로 인정했다. 정부가 ‘개인의 선택을 가능한 한 최대한 존중해야 하며,
좋은 삶에 대한 하나의 관념에 비추어 그 선택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의미였다. 캐나다 법에서 임신 기간 내내 임신중지가 합법이라는 사실은 인공자궁이 임신중지 보호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임신중지권에 대한 해석이 자유의 문제로 확장되었다는 점은 임신중지 반대 단체들이 인공자궁 기술이 도입됨에 따라 임신중지 반대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법정에서 고전하게 된다는 의미라고 전망할 수 있다. 태아를 지우는 대신 인공자궁으로 이전하라는 요구가 임신한 사람의안전을 크게 해치지 않는 사례를 상정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임신을 종결하는 대신, 인공자궁을 사용하라고 요구하는 일이야말로 ‘좋은 삶에 대한 하나의 관념‘에 비추어 이들의 선택을 판단하고, 임신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위협함으로써 자유를 보장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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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3장ㅡ멋진 신세계로 향하는 체외발생>을 읽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 3장의 제목... 역시 헉슬리의 작품이 중요 소재로 등장한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를 출간했을 때는 아직 우생학이 등장하지 않았었지만 ‘체외발생‘을 말할 때 미국과 영국, 독일 등지에서 만행이라고 할만한 일들이 흑인, 유색인, 원주민, 장애인, 라틴계, LGBTQ,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계층, 유대인... 들에게 일어났다.
요근래 읽었던 책들에서 ‘우생학‘이 너무 자주 보여 정말 읽다가 화가 치민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었던 20대 이후 이 작품의 제목이 가진 상징성 때문에 나는 이후 유토피아, 신세계라고 하는 단어에 대해 트라우마가 생겼다.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에 더 가까운 세계관의 설정은 무섭고도 기괴하다. 
이 책의 제목에도 ‘유토피아‘가 ...

‘체외생산‘과 ‘인공자궁‘을 말하면서 현재와 앞으로의 세상이 결코 ‘유토피아‘일수는 없을 거란 걸 실감하게 되는 사례와 역사적 사실들 앞에서 우리는 깊은 고민을 해야만 할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어떠한 경우라도 국가가 재생산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성의 자궁을 도구화해서는 안된다. 
 ˝임신 중 무책임한 행동 및 부모의 ‘적합성‘에 대한 이른바 국가의 염려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우생학의 인종차별주의 전통이다.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 미래의 아이들에게 ‘위험‘하다고 생각될 때 인공자궁 기술을 이용하여 임신을 인계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중립적인 프로젝트가 아니다.(132~133쪽)˝

그들은 대체 무슨 근거로 무엇을 떠올리며 엄마의 행동 때문에 ‘위험‘에 처한 태아를 보호할 목적으로 인공자궁을 사용할, 수용가능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체외발생이 임신한 엄마의 몸보다 ‘더 안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우생학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부모 중 한 사람이 건강하지 않다면 태어날 아이의 이익을 위해 일시적 또는 영구적으로 부모가 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을 것‘이라거나 ‘자녀가 일부 부모에게서는 아예 태어나지 않는 편이 ‘최선의 이익‘임을 국가가 공정하게 결정할 수 있다는˝ 우생학이 주장했던, 무서운 생각들이 지금도 여전히, 암암리에 남아있다.



1990년대는 미국에 근거를 둔 흑인 페미니스트 단체가 임신 중지 합법화 회의에서 재생산을 정의하는 틀을 도출해 내면서, 백인 여성의 이익에만 오랫동안 초점을 두었던 재생산권 운동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풀뿌리 운동이 시작되었다. 재생산 정의라는 개념을 만든 사람들, 활동가들, 의료인들, 법률가들, 교육자들이 이 틀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면서 알게 된 것은 재생산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이 진정 포용적인 운동이 되려면, 임신을 종결하거나 예방할 권리를 보호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출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재생산 정의는 '아이를 가질 권리, 아이를 갖지 않을 권리, 자녀를 양육하고 출산 방식을 통제할 권리', 그리고 '이런 권리들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얻기 위해 싸우는 일도 똑같이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접근이라 할 수 있다.(135~136쪽)  


사람들이 아이를 갖지 못하게 국가가 기관이 막는 것을 용인할 수 있는 윤리적 방법은 없다. 나치가 주도하든 좌파 활동가가 주도하든, 이런 일은 인권 침해이자 재생산에 대한 사람들의 자율성을 박탈하는 행위이다. 그런데도 이런 행위가 계속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문제가 파시스트의 손에 있는 우생학만이 위험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헉슬리뿐 아니라 모든 국가들이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을 분류하고 서열화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생각이다. 사람들을 더 또는 덜 가치 있는 생명으로 분류하는 그 어떤 시스템의 존재도 마찬가지이다.(136~137쪽)


... 베라 브리튼Vera Brittain은 <태평성대 또는 일부일처제의 미래Halcyon, or the Future of Monogamy>에서 박식한 미네르바 헉스터윈 교수가 2050년대까지 이어지는 과학 발전에 대해 이야기한다. 헉스터윈은 할데인의 이야기와는 다른 계보를 풀어낸다. 보편적인 체외발생이 가능해졌음에도 사회가 결국 이를 널리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즉 양 부모가 모두 제공할 수 있는 '엄마mothering'돌봄 유형이 국가와 기계가 제공할 수 있는 돌봄보다 크게 앞섰다. 헉스터윈은 과학적이고 특정 가능한 돌봄의 가치가 밝혀질 것이라고 상상한다. '체외발생주의자'는 인공자궁으로 가장 '적합한' 형질을 번식할 수 있게 해준 방식을 찬양하겠지만, 그들이 유전자 결정론에 치중한 것은 잘못으로 판명된다. 즉 사람들은 우생학이라는 '과학'을 완성할 목적으로 체외발생을 사용하려 하지만, 아이의 미래는 유전 형질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과 보살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이라고, 헉스터윈은 시사한다. 그녀는 인공자궁으로 임신할 수 있는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인공자궁이 있어야 임신할 수 있는 경우에만 이 기술을 사용한다. 헉스터윈의 미래가 베라 브리튼의 미래와 다른 이유는 주로 아기를 체외발생 방식으로 기르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부모가 자기 자신과 자녀를 돌보고 스스로의 재생산과 관련된 삶을 관리할 수 있도록 자원을 충분히 공급받기 때문이다.(137~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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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5-20 0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작가가 중간중간 질문을 던져주기 때문에 너무 좋더라고요. 그 질문에 저 역시도 ‘나는 어떤가‘라는 답을 해보며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우생학에 대해서도 글을 써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화이팅 입니다!

은하수 2025-05-20 10:34   좋아요 0 | URL
작가의 질문들이 저도 갖고 있던 의문점들이라 작가의 논지들을 따라 읽으며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더라구요. 사실 쓰고 싶고 생각을 유도하는 글을 던지고 남기고 싶은 부분이 많았어요. 특히 우생학은 자꾸 보게되니 ... 지난번 읽었던 <아기퍼가기 시대>에서도 만났고..
이게 제국주의, 가부장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단 생각이 자꾸 드는 거예요. 너무 부당하다 생각하는데 이런 우생학의 논리가 현대에도 변용되고 있다는게 더 큰 문제잖아요. ...
다음주 여행가기 전에 다 읽고 가려고 아주 맘이 바쁩니다~~^^
끝까지 읽고 가고 싶어요.
우생학에 관련한 글도 꼭 써주세요~~~!
 

*배신자들
번역가들은 왜 배신자일까? 신이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살지 못하게 언어를 흩어놓았는데도 갈라진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해서, 니므롯처럼 신의 뜻에 반한 배신자가 되었나?
서로 다른 언어 사이를 오갈 때는 손실이 불가피하므로 원저자든 독자든 누군가를 배신하게 되기 때문일까?
여기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바벨 이전에는 정말 언어로 인한 혼란이나 소통 과정의 손실이 없었느냐는 것이다. - P45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보자. 하나님이 만든각종 들짐승과 새에 아담이 이름을 붙인다.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사물과 이름이 명징하게 일치하는 행복한 나날이다. 여기에는 혼란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 P46

그런데 문제는 나무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하신다. 그런데 뱀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그런데 하나님도 나중에 뱀의 말을 인정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라고 되어 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필멸의 존재가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이 사실이 되었지만, 뱀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런데도 태초에는 말이 뜻하는 바가 자명했다고 할 것인가? 아담과 하와가 헷갈릴 만도 하지 않았나? - P46

그렇다면 우리가 언어를 서로 주고받으며 일어나는 혼란과 어긋남과 손실은 언어가 여러 갈래로 나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언어 자체가 혼란이다. 사물과 이름 사이에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결속도 없다. - P46

번역이 배신인 까닭은, 혼란스러운 언어를, 부유하는 기의를 일시적으로나마 고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번역은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를 한순간이라도 고정하려고 애쓰는 덧없지만 불가피한 시도다.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 대부분 저버리는 일이다. 누구나 알듯이 어떤 번역도 원문을 있는 그대로 거울에 비추듯 재현하지 못한다. 
역설적이지만, 나보코프가 쌓아 올린 무한한 주석의 탑은 번역이 놓친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비다(나보코프가 열거한 것만 들자면 우아함, 좋은 소리, 명료함, 취향, 현대적 용례, 문법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주석의 탑이 뻗으며 여백도 손실되었다. 상상의 여지도, 모호함의 가능성도). 나보코프는 축어역 (word-for-word)만이 진정한 번역이라고 주장하면서 **, 텍스트의 축어적 의미가 아닌 텍스트의 정신을 번역한다는 자유로운 번역은 작가를 ‘중상하는(traduce)‘ 일이라고 혹독하게 비난했다. - P47

*나는 내가 의미하는 걸 말해
 "직역(直譯)이냐 의역(意譯)이냐의 논쟁, 번역학계 용어로는 충실성과 가독성의 논쟁이다. 원문에 최대한 가깝게 번역하느냐, 아니면 독자가 최대한 편하게 읽을수 있도록 옮기느냐의 차이다."
직역과 의역, 축어역과 의미역 대립 항에 충실성과 가독성 개념이 연결되었다. 담론상 스펙트럼에서 직역에 가까운 글은 부정적으로는 ‘번역 투‘라거나 ‘어색하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긍정적으로는 ‘표현이 새롭고 신선하다‘거나 ‘원문에 충실하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의역에 가까운 글은 긍정적으로는 ‘한국어로 쓴 글처럼 읽힌다‘,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구사했다‘ 등의 평을 받는 한편 부정적으로 말하면 ‘밋밋하고 진부하다‘, ‘충실하지 못하고 번역가가 지나치게 개입했다‘고 느껴질 수 있다. 이와 별개로, 원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면 오역이라고 본다.

... 간단한 문장이지만 문맥에 따라, 글의 종류와 어조에 따라,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따라, 화자의 성격이나 태도, 말투에 따라, 수십 가지 다른 번역이 가능하다. 그런데 한국어로 수십 가지 번역을 해놓은 다음에 다시 영어로 역번역 (back-translation)을 하면 결과물이 그만큼 다양하지 않고 대략 서너 가지 정도의 표현으로 수렴된다.
한국어는 어미와 조사가 발달해서 미묘하고 섬세한 뉘앙스를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어의 특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면 좋은 번역이 될 수 없다.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최선의 어조와 뉘앙스를 선택하지 못한다면 분명한 오역은 아닐지라도 뭔가 흐름이 원활하지 않거나 삐걱거린다거나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 번역이 될 수 있다. 이런 미묘한 차이를 다루는 번역은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 P75

실제로 번역을 할 때는 ‘단어‘를 번역(직역)하거나 ‘단어의 의미‘를 번역(의역)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제3의 무언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What do you think?‘ 같은 간단한 문장이 수십 가지로 번역되는 것이다. 행간을, 침묵을, 여백을 번역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간에는 참 많은 것이 있다. 맥락, 어조, 정서, 분위기, 성격, 암시, 어감, 문화적 인유, 의도.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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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의 인공자궁은 인큐베이터를 말한다.
한 세기 전의 코니 아일랜드와 만국박람회 등에서 자행되었던 일명 ‘아기쇼‘를 보면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런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지 상상하기 힘들다.
아무런 법적 규제도 없이 무방비로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였던 엄마와 아기들의 사례를 보면서 미혼모와 그 아기들을 입양했던 미국이 떠올랐다. 마틴 쿠니는 아기 쇼를 완전히 다른 경지에 올려놓은 인물이다.그는 이탈리아의 토리노,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1901년 '버팔로 범미박람회',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의 놀이동산 전시를 거쳐 마침내 상설전시를 하기에 이르는데, 바로 1943년까지 계속해서 전시를 열었던 코니 아일랜드 루나 파크에서였다. 아기들은 입원비를 지불하지 못해서 대신 쿠니를 찾아온 엄마, 아빠에게 안겨 코니 아일랜드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기 쇼에 전시되고 제대로 돌봄과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게 방치한 인간 이하의 사실들을 읽느라 지친다.
1904년 루이지애나 매입 박람회에서는 백인 연구자들이 필리핀 토착민들을 전시했다. 토착민과 미숙아를 구경거리로 삼는 일은 제국주의 지배를 과시하는 행위였는데, 말하자면 정복을 당해 상품화된 사람들을 연구할 수 있고 그냥 놔두면 결국 죽게 될 아기들을 대상으로 실험할 수 있는 백인 제국의 힘을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사실 이런 사례는 비일비재해서 예를 들어 말하는 것도 의미 없게 느껴진다. 루이지애나 매입 박람회 당시 경험이 없는 의사를 고용하여 자신을 보조하게 했던 사기꾼이자 기회주의자 에드워드 베일리스는 인큐베이터를 무덥고 불결하게 관리하였고, 미숙아들에게 우유와 시리얼, 달걀을 먹여 결국 장염으로 45명 중 39명의 아기들을 사망하게 만들었다. 이 아기들이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살았을지 알 수 없지만 이 아기들의 죽음은 티켓을 판매하기 위한 미끼로만 이용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다르지만 마틴 쿠니도 의사 자격을 취득한 적이 없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기들의 안전을 뒤로 미루었던 베일리스와 달리, 자신의 아기 환자들을 최우선 순위에 놓았고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탁월한 수준의 치료에 전념했고 숙련된 간호사들을 고용했다. 두 사람 모두 공식적인 의사 자격증이 없었지만 한 사람은 수천 명이나 되는 미숙아들의 생명을 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본인에게 맡겨진 미숙아들을 소홀히 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사례를 놓고 볼 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서 관리, 감독이 윤리적인 면에서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를 시사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인간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시하는 마틴 쿠니의 만국박람회는 알량한 권력을 남용하고 행사하는 수단으로, 또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봐야하는 역사적 유산이다. 






아주 극단적인 사례지만, 1900년대 초 의료계의 다른 사람들도 일찍 태어나거나 힘들게 태어난 아기들은 본래부터 튼튼하게 태어난 아이들만큼 가치 있는 생명이 아니라는 견해를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아기를 인큐베이터에 넣어 전시하는 일이 부수적인 여흥거리가 됐다며 몇몇 언론에서도 비판기사를 냈다. 하지만 이 아기들을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교대근무를 하며 그들의 수 많은 동료와 다른 행보를 걷고 있었다. - P42

오늘날에는 조산아를 살리는 치료가 근본적으로 좋은 일이라고 여기며, 이런 의미에서 신생아 치료에 도움이 되는 인공자궁은 널리 환영받아 왔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걸렸다. 다운 라펠Dawn Raffel이 자신의 책에서 쿠니에 대해 언급했듯이, 그가 조산아들을 데려간 많은 축제장에서는 우생학 전시도 함께 열렸다. - P43

그곳에서는 결혼에도 ‘적합‘한 결혼과 ‘부적합‘한결혼이 있고, 사회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결혼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고취시켰다. 3장에서는 이런 우생학의 역사가 지금까지도 불가피하게 인공자궁 기술에 대한 논의와 엮이는 양상을 살펴본다. 
작고, 연약하며, 계속 돌봐주어야 하는 인큐베이터아기들은 부모들이 잘 맞지 않아 건강하지 못하다거나, 작다거나, 장애가 있는 아기로 태어난다는 선전이 난무하는 시대에 자랐다. 코니아일랜드의 기적 《Miracle at Coney Island》을 쓴 클레어 프렌티스Claire Prentice에 따르면 쿠니와 그의 팀은 수년간 8천 명의 아기를
받아들여 6천5백 명을 살려냈다.
- P43

이르게는 6주나 일찍 태어난 미숙아들을 맡아 생존율이 81퍼센트였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상황과 비교해 보자면, 영국의 수준 높은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치료받는 27주의 신생아 생존율은 89퍼센트이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안고 달려가려면 전시장에 충분히 가까운 곳에 있어야 했겠지만, 쿠니는 모든 인종 및 사회계층과 무관하게 아기들을 받아들이고 부모들에게서 돈을 전혀 받지 않았다. 쿠니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언제까지나 박람회의 소재로 내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1903년 루나 파크에 상설 전시장을 설치한 후에도 병원들에게 인큐베이터를 도입하라고 계속해서 촉구했다. 그럼에도 1930년대까지 갈 곳이 없던 뉴욕시의 미숙아 부모들은 쿠니를 찾아갈 수 있었다. - P43

한 세기가 지나 2020년대가 된 지금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을 관리하기 위한 책임 절차를 갖추고 있다. 부분적인 이유로는 절박하고 다른 선택지가 없어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를적용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동물실험에서 21주에서 22주 사이에 태어난 태아의 건강을 인공자궁이 유의미하게 개선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연구진들이 출산 직후 부모들에게 이 치료법을 제안하면서 다른 선택지와 위험성에 대해 명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을 경우 여전히 비윤리적인 일이 될 것이다. 쿠니는 아기들을 무료로 치료했지만, 아무런 규제가 없는 실험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행위를 저지하는 법이나 윤리위원회도 없었다. 하지만 1890년대 아기 쇼 전성기에도 이 전시에 기괴한 면이 있다고 주장하는 의료계와 언론들은 있었다. 1911년 엄청난 화재가 쿠니의 전시장을 휩쓸고 지나갈 때 아기들은 겨우 구했지만, 그 이후에서야 뉴욕주의 아동학대방지협회는 쿠니가하던 일을 병원으로 이관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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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여성주의‘ 도서인 클레어 혼의 <재생산 유토피아>를 읽기 시작했다.
이번 5월을 마지막으로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 프로젝트는 잠시(?) 잠정 중단이라시는 다락방 님 글 읽었을 때 참 많이 아쉬웠다. 매월 참여하지는 못했고 느즈막히 참여하기 시작한 터라 꽤 오랜시간 동안 계속하고 있었단 걸 알았을 때 부러웠다. 이미 오래 전에 참여해서 꾸준히 책을 읽어오신 그분들이...
혼자서 계속 읽어나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을 거란 걸 안다~~~헤~~
언제 돌아오시려나...

1장
온실,화초, 인공자궁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여러분이 한 사람이 될 때까지 몸 안에 품어주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낳아 주었다.

*온실: ‘화초‘ 비유와 관련성을 드러내고자 ‘인큐베이터‘를 ‘온실‘로 옮김. - P8

이 문장을 쓰는 지금, 내 자궁 안에서는 아기가 움직인다. 여러분을 임신했던 사람이 지금의 어머니든 아니든, 틀림없이 여러분의 어머니도 자신의 살갗 아래에서 여러분의 팔다리가 움직이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에 여러분을 임신했던 어머니의 몸은 여러분이 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심지어 아기의 모습을 갖추기도 전에 여러분의 고향이었다.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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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5-11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년에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고 하시대요~~
내년 기약 댓글 부탁드립니다 ㅋㅋㅋㅋㅋㅋ

은하수 2025-05-12 07:16   좋아요 1 | URL
내년에 꼭 다시 시작해 주세요. 기다리고 있어요. 그동안 계속 시동걸고 기다리겠습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