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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 스타킹 한 켤레 - 19, 20세기 영미 여성 작가 단편선
세라 오언 주잇 외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3월
평점 :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의 삶을 그려낸 11 명의 여성 작가와 13 편의 뛰어난 단편을 읽는 즐거움에 한껏 빠져들 수 있는 단편집이다. 진정으로 좀 부족하다 싶은 작품이 하나도 없을 만큼 뛰어나다. 케이트 쇼팽의 '아카디아 무도회에서', '폭풍우', 그리고 표제작인 '실크 스타킹 한 켤레', 캐서린 맨스필드의 '작고한 대령의 딸들'은 『셀레스틴 부인의 이혼』(케이트 쇼팽, 푸른사상, 2019년)과 『가든파티』(캐서린 맨스필드, 강, 2010년) 등의 작품집을 통하여 이미 읽었지만 다른 역자의 문장으로 다시 읽어봐도 역시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들이다..
급속한 도시화, 자본화로의 발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혼란과 과도기의 사회상, 인식의 변화를 포착하여 작품으로 구현한 여성 작가들의 단편들을 다양하게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이디스 워튼의 「다른 두 사람」과 메리 E. 윌킨스 프리먼의 「뉴잉글랜드 수녀」는 "결혼의 신성함이나 결혼 관계에 대한 기존의 관념이 흐려지면서 그와 함께 결혼을 대하는 여성의 태도에 나타난 변화를 보여"주었던 단편이다. 이디스 워튼의 단편이 주로 뉴욕 중상류층의 결혼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다른 두 사람」도 동일하다.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여성과 결혼한 남성의 결혼 생활에서 두 명의 전 남편과 엮이는 상황이 예기치 못하게 자주 발생하게 되고 이야기는 남성의 시각에서 서술이 되는데 상황은 묘하게도 여성이 주도를 하게 되는 그 상황들이 뭔지 모를 긴장감을 형성한다. 메리 E. 윌킨스 프리먼의 「뉴잉글랜드 수녀」의 여성 주인공도 '미혼' 대신 '비혼'이라는 새로운 선택을 함으로써 남성에게 종속되지 않는 자신의 삶을 독자적으로 이어나가려 한다.
특히 기억에 남을 작품은 여성의 히스테리를 다룬 유명한 단편이면서 그 주제 뿐만 아니라 서술 방식에서도 획기적인 방식으로 평가받았던 샬럿 퍼킨스 길먼의 「누런 벽지」였다. 뛰어난 자질을 갖추었지만 아직은 성숙하지 못한 사회적 분위기로 인하여 억압받고 좌절한데서 비롯한 여성들의 히스테리는 이 시대를 다룬 남성 작가들에게 있어 여성들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여성의 히스테리를 억압된 감정의 표출로 보지 않고 여성의 태생적 연약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치부했다. 이 단편의 여성 화자도 작가가 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지만 끊임없이 억압하고 비하하면서 보호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남편의 정신적 폭력으로 인하여 좌절한다. 그러한 감정의 억압을 겪으면서 서서히 발현되는 히스테리 증상을 개성적인 문장으로 창조해 내는 과정은 실로 뛰어난 것이어서 작가가 이룬 성과를 찬양하게 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막는 사회를 비판하고 그러한 사회를 그려낸 여성 작가의 뛰어난 심리 묘사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남성, 특히 고압적이고 폭력적이며 잔인하기까지 한 남편의 억압에 피해자로서 가해자에게 행한 복수를 다룬 세 작품도 기억에 남을 듯하다. 수전 글래드펠의 「여성 배심원단」, 엘런 글래스고의 「제3의 그림자 인물」, 조라 닐 허스턴의 「땀」 세 작품인데 조라 닐 허스턴의 「땀」은 같은 인종. 동일한 계층 내에서도 오랜 시간 침묵을 강요당하는 '흑인' 여성이라는 성별 억압의 구조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 복수의 성공이 더욱 당연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반면에 엘런 글래스고의 「제3의 그림자 인물」에는 숨진 딸 아이의 막대한 유산을 차지하기 위하여 아내를 정신병자로 몰아 감금하고 죽게 만든 남편을 단죄하기 위하여 고딕 양식을 차용한다. 매력적이면서 의사라는 신분을 가진 남편의 힘에 맞서기에는 너무 약한 아내의 처지를 상쇄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고자 '죽은 딸'이 영혼의 모습으로 등장할 뿐 아니라 결국 복수를 이루게 되는 장치로서 고딕 양식은 적절한 수단이 된다 할 수 있다.
수전 글래드펠의 「여성 배심원단」은 살인 사건의 진상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억압 당한 채 살아낸 한 여성의 결혼 생활의 모습을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풀어낸다. 남편을 살해한 살인 사건의 피의자로서 수감된 여성을 위하여 옷가지를 챙기러 온 이웃의 두 여성이 피의자인 친구의 부엌에서 그녀의 삶을 재구성해 나가는 과정은 한편으론 눈물겹다. 가장으로서 경제적으로 무능하면서 아내에게 가난을 강요하였고 폭력을 일삼았던 남편은 이제 살해됨으로써 아무 죄가 없는 피해자가 되었다. 여성은 극도로 가난한 삶을, 폭력적인 남편을 감내하면서 온갖 나쁜 소문에 시달렸는데 어떠한 이해도 받지 못하고 수감되었고 사건을 조사하는 남성 보안관과 검사는 그녀의 부업을 보며 살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여자라고 끊임없이 비판을 한다. 그럴 권리는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다. 두 여성은 가난과 폭력이라는 굴레를 감내한 삶에 같은 여성으로서의 인식을 공유함으로써 그녀의 삶에 무죄라는 판결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녀가 살인을 했든 안 했든 두 여성은 깊은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데 같은 여성이라면 아마도 충분히 공감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편으론 너무 속이 시원해서 위의 세 작품을 읽으며 오랜만에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도 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전환기에 발표된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현실 속에서 여성들이 처한 여러가지 시대적 고민들과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작품으로 표현하려 하였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처한 상황이나 처지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남기려 애썼던 작가들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그야말로 주옥같은 단편들을 많은 독자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들이 제시한 삶의 단면을 통하여 현재 우리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되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책을 덮었을 때 기꺼이 '공감'하게 된다면 소설이 추구하는 '보편성'이라는 명제는 충분히 획득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