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후에>
<작별하지 않는다>를 쓸 때의 심정을 적었다.










8
2020년 9월과 10월에 집중적으로 이 소설의 2부를 쓰면서, 집이 떠나가도록 크게 음악을 틀어놓을 때가 있었다. 김광석이 기타 하나, 하모니카 한 대와 함께 콘서트에서 부른 「나의 노래」를 많이 들었다. 가사 속 한 문장이 언제나 마음을 흔들었다.

흔들리고 넘어져도 이 세상 속에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있는 한
나는 마시고 노래하리

음악을 들으며, 내가 김연아라고 생각하면서 스파이럴 동작을 흉내 내기도 했다. 온몸을 써서 춤도 췄다. 빙글빙글 돌고 있으면 눈물이 나기도 했다. 엉엉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 P53

그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쓴다...... 쓴다.
울면서 쓴다.

흐름을 끊기 싫어 부엌에 선 채로 요기를 했다.
화장실에 뛰어갔다 돌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온 힘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 P54

9
그보다 앞서 『소년이 온다』를 썼던 일 년 육 개월을 기억하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압도적인 고통이다.
그걸 일종의 ‘들림‘이었다고 말한다면 손쉬운 일일 거다.
내가 작가로서 영매의 시간을 건너갔다고 근사하게 말한다면.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때 나는 ‘들리지‘ 않았다. 어떤 트랜스 상태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매 순간 분명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 P54

고통이 나를 부수고 또 부수는 걸 견디면서. 작업실에서, 지하철에서, 횡단보도에서, 부엌에서, 이불 속에서 이를 물고 울고 있는 내가 미친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조금도 미치지 않았다. - P55

그 고통이 대체 무엇이었던가를, 『소년이 온다』를 쓰고나서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그 소설을 읽은 사람들도 함께 느꼈다고 말하는 바로 그 고통을. 
그 생생한 고통은 대체 무엇을 증거하는 걸까? 설마, 그건 사랑인가? 지극한 사랑에서 고통이 나오고, 그 고통은 사랑을 증거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 사랑에 대한 다음 소설을 쓰고 싶었다. - P55

11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던 과정에서 내가 구해졌다면,
그건 (목적이 아니라) 부수적인 결과였을 뿐이었다.

글쓰기가 나를 밀고 생명 쪽으로 갔을 뿐이다.

날마다 정심의 마음으로 눈을 뜨던 아침들이.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로 끓던 그의 하루하루가.

날개처럼, 불꽃처럼 펼쳐지던 순간들의 맥박이.
촛불을 넘겨주고 다시 넘겨기를 반복하던 인선과 
경하의 손들이.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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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을 출간하고 나서, '삶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려고 애쓰던 2012년 봄, 1980년 5월의 학살이 있었던 아홉살 이후 몇 해가 흘러 서가에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어른들 몰래 읽었을 때는 열두 살이었단다.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의해 희생된 시민들과 학생들의 사진들이 실려있는, 당시 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인해 왜곡된 진실을 증거하기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제작해 유통한 책이었다.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기엔 이른 나이였지만 그 훼손된 얼굴들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다.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도 하는가. 양립할 수 없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16 참조)



이후 광주의 학살에 희생된 고 박용진 군의 일기를 읽고 <소년이 온다>를 집필한 배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쿠데타 군이 다시 올 것을 알면서도 희생자들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피하지 않고 있던 마지막 밤에 그는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다른 글에서 읽어 이미 알고 있던 문장이었지만 다시 읽어도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다. 그리고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에서 보았던 두 문장도 깊은 울림을 준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광주의 학살 이후 이어진 계엄 선포는 우리 국민들을 각성하게 하였고 그 트라우마는 현재로도 이어지고 있다. 12.3 계엄 선포가 그래서 더 말도 안되게 다가왔다. 그래서 우리를 행동하게 만들었고 그 밤,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과 국회의원들, 소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군인들에 의해 계엄 해제를 가결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광주에서 희생된 수많은 희생자들, 고문으로 희생된 무고한 시민들, 학생들... 이름조차 다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죽은 자들이 오늘 우리를 구한 것이 아니고 뭐였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이 책의 첫 번째 에세이인 '빛과 실'을 읽어 나갔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년이 온다>를 집필한 2014년으로부터 7년이 지난 2021년 출간되었다. <소년이 온다>를 쓸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학살 생존자들의 증언들을 읽고 자료를 공부하고, 언어로 치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고통을 겪으며 최대한 절제하여 써내려 갔다. 그러면서 작가는 줄곧 자신의 소설들을 관통하는 핵심이자 글쓰기의 동력은 다음의 두 질문으로 모아진다고 말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그러나 이삼 년 전부터 그 믿음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2014년 <소년이 온다>를 출간하고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 - 우리를 연결하는 고통에 대해 - 질문했던 것 아닐까.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결국은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사랑은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나의 심장에 있다고.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The Nobel Foundation 2024



<작별하지 않는다>의 '작가의 말'에서도 '사랑'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나'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왔다. 열어 보니 유년 시절에 쓴 일기장 여남은 권이 담겨 있었다. 표지에 ‘시집‘이라는 단어가 연필로 적힌 얇은 중철 제본을 발견한 것은 그 포개어진 일기장들 사이에서였다. A5 크기의 갱지 다섯 장을 절반으로 접고 스테이플러로 중철한 조그만 책자. - P9

그렇게 자료 작업을 하던 시기에 내가 떠올리곤 했던두 개의 질문이 있다. 이십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 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오래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마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 P18

이 소설을 쓰는 일을 더 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거의 체념했을 때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에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우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누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 P19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이따금 그 묘지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날이 맑았다.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다.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나는 느꼈다.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과 공기가 내 몸을 에워싸고 있다고. - P19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동호가 어머니의 손을 힘껏 끌고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걸었던 것처럼. - P20

이 소설의 한국어 제목은 ‘소년이 온다‘이다.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흔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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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커인 짐 핑걸과 작가 존 다가타의 티키타카가 점점 재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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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전쟁터가 되어버린 몸들/
5장 섹스는 연기가 되었다

˝다이어트 식품, 스타일, 미용성형, 제약, 미디어 등 다양한 산업들이 몸을 연기, 조작, 전시의 대상으로 재현하면서, 우리는 몸을 (재)구축하고 개량해야 할 장소로 여기게 되었다.˝(4장, 200쪽)


˝오늘날 몸은 우리가 깃들어 사는 장소라기보다는 차라리 환상을 담는 덮개가 되었다.˝(203쪽)






교묘하게도, 달리 말하면 교활하게도, 스타일산업이 문제라고 진단하는 부분들은 미용산업이 고쳐주려 나서는 부분들과 같을 때가 많다. 그 산업들은 몸의 해체와 재구성을 수반하는 시녀들이다. 그들이 수선방법이랍시고 내놓는 해결책을 보면 써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우리는 해결책에 유혹당하면서도, 우리를 착취하는 데 혈안이 된 산업들의 피해자로 스스로를 인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제를 새롭게 깨닫고 처리하는 일에 적극 흥미를 보인다. 내게 뭔가 잘못된 점이 있지만 운동과 돈과 조심성을 동원하여 노력하면 내 손으로 다시 고칠수 있다. 몸의 결함을 자신이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일부를 잘못된 것으로 규정한 뒤에 그것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이런 심리흐름은 자신의 요구를 보호자가 계속 들어주지 않을 때 아기가 겪는 심리와 비슷한 데가 있다. - P177

...내가 앞에서 주장했듯이, 우리는보통 문제를 
재구성함으로써 충격에 대처하려 한다. (부적절한입술이나 눈썹 때문에) 비판받는다는 느낌을 전복시켜, 오히려 자발적으로 자기개선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열정적인 배우로 거듭난다. 
이처럼 우리는 잘못된 것을 고치려고 애쓴다. 흠을 지적받는 것은 시장의 권유를 수용하여 자신을 향상시킬 기회를 얻는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신체감각을 교란시키는 이미지들의 배후에 상업적 이해관계가 작동한다는 사실은 이런 식으로 은폐된다.
우리가 열성적으로 미용과 수술 기법을 수용할 때는 상처가 덜 아프게 느껴진다. 그때는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그런 행동을 시작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P178

나는 스타일산업을 악당으로 몰고 싶은 게 아니다. 나쁜 것은 오히려 그들의 상업적 에너지에 휘둘리는 우리의 불안정한 마음이다. 
패션은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면면을 표현한다. 요즘 우리가 날씬함을 강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서구사회가 획득한 풍요의 결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풍요로움 속에서 오히려 정반대의 의미를 표현하고픈 바람 때문이다. 
온갖 욕구들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바람, 무엇이든 까다롭게 선택하고 싶은 바람, 몸이 필요로 하는 음식을 통제하고 싶은 바람, 몸의 물질성을 없애고 싶은 바람 말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패션 산업이 얼마나 숨가쁘게 변화하는지 생각해보자. ... ... - P181

치료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두가지 음식조절 방법은 서로 상보적이다. 
거식증을 겪는 사람들은 자기 싸이즈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비만인 사람들은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어느 쪽이든 자기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또한 어느 쪽이든 자기 식욕을 순순히 인정하지 못한다. 
식이장애를 거식증의 형태로 표출하는 사람들은 식욕과 욕망을 너무나 두려워하기 때문에 도리어 몸을 허기진 상태로 만든다. 물론 그들도 허기를 경험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허기는 영양섭취 없이도 살 수있다는 것, 많이 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일뿐이다. 그들에게는 감정적·육체적 식욕이 어색하고 잘못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것을 짓밟아야만 한다. 배고픔을 억누르고 배고픔에서 파생된 다른 것들까지 통제하는 것은 거짓된 몸에 대해 음식 지향적으로 반응하는 한가지 방법이다. - P191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먹어대는 사람들도 배고픔과 욕구를 못 견디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의 욕구를 경험하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때문에 배고픔이라는 고통스러운 신호가 닥치기 전에 미리 먹어두는 방법으로 식욕과 욕망의 딜레마에 반응한다.
이런 예방적 폭식도 거짓된 몸의 또다른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날씬해지려고 애쓰든, 식욕을 두려워하거나 관리하려고 애쓰든, 식욕에 대한 공포와 위태로운 신체감각은 많은 소녀들과 여성들의 일상에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날씬함은 갈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적어도 겉으로는 계급 없는 새로운 사회인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의 사회에 쉽게 편입하게 해주는 한가지 방법으로 간주된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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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존 다가타의 글은 중앙에, 팩트체커 짐 핑걸이 조사한 사실이 작가의 글을 둘러싸듯 좌우로 감싸는.. 독특한 구성이다.
짐 핑걸과 편집장이 주고 받은 글들도 함께 게재되어 있다. 팩트를 체크해가며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확인된 내용은 검은색, 확인되지 않았거나 부정확한 내용은 붉은색(사실충돌)으로 나타낸 것 같다. 그런데 온통 붉은색 투성이다.
에세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만을 적용해서 글을 쓰는건 아니구나 싶다~
이제 시작 부분을 읽었을 뿐이지만 ... ...

존 다가타의 글의 주제는...라스베이거스에 만연한...‘자살‘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작가
열여섯 살 레비 프레슬리가 스트
래토스피어 호텔앤드카지노의
350미터 높이 타워 전망대에서
뛰어내린 그날, 라스베이거스에
서는 시 당국이 영업 허가를 받은
관내 스트립 클럽 서른네 곳에 대
해 한시적으로 랩댄스를 금지시
켰고, 고고학자들은 세계에서 가 - P13

…영업 허가를 받은 관내 스트립 클럽 서른네 곳에 대해. 사실 충돌: 저자가 이 수치를 어디서 얻었는지가불분명합니다. 라스베이거스 소재 스트립 클럽 수와관련해 저자의 노트에서 참고할 만한 자료라곤 『어덜트 인더스트리 뉴스Adult Industry News』라는 포르노 업계 소식지에서 복사했다는 기사 한편이 전부거든요.
그러니까 정보의 출처부터가 좀 의심스럽단 얘기죠.
어쨌든 그 기사에선 1995년 이래로 "[라스베이거스
(붉은색) - P13

내] 스트립 클럽 수가 세 곳에서 열여섯 곳으로 급증"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더 읽어보면 "상의 탈의혹은 나체쇼 클럽이 서른한 곳"이라는 설명도 나오거든요(『어덜트 인더스트리 뉴스 2003년 1월 3일자에 수록된 앤지 와그너의 기사 라스베이거스 섹스산업, 정부 랩댄스 단속에 맞서 참조). 따라서 설령이 자료를 믿고 기사의 모순을 눈감아준다 해도, 여전히 스트립 클럽이 서른네 곳이라는 저자의 설명이 뒷받침되진 않습니다. 그리고 설령 기사가 저 수치를 뒷받침한다 해도, 한 기사에서 전혀 맞지 않는 두 수치를 제공하고 있다는 모순을 고려할 때, 기사 자체의 귄위가 여전히 문제로 남습니다. 어떡할까요, 저자에게 수치를 명확히 해달라고 요청해야 할까요?

편집장: 그래야죠, 얼른 수치가 맞는지 좀 봐달라고 요청해보세요.

(붉은색)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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