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을 출간하고 나서, '삶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려고 애쓰던 2012년 봄, 1980년 5월의 학살이 있었던 아홉살 이후 몇 해가 흘러 서가에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어른들 몰래 읽었을 때는 열두 살이었단다.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의해 희생된 시민들과 학생들의 사진들이 실려있는, 당시 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인해 왜곡된 진실을 증거하기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제작해 유통한 책이었다.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기엔 이른 나이였지만 그 훼손된 얼굴들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다.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도 하는가. 양립할 수 없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16 참조)
이후 광주의 학살에 희생된 고 박용진 군의 일기를 읽고 <소년이 온다>를 집필한 배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쿠데타 군이 다시 올 것을 알면서도 희생자들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피하지 않고 있던 마지막 밤에 그는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다른 글에서 읽어 이미 알고 있던 문장이었지만 다시 읽어도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다. 그리고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에서 보았던 두 문장도 깊은 울림을 준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광주의 학살 이후 이어진 계엄 선포는 우리 국민들을 각성하게 하였고 그 트라우마는 현재로도 이어지고 있다. 12.3 계엄 선포가 그래서 더 말도 안되게 다가왔다. 그래서 우리를 행동하게 만들었고 그 밤,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과 국회의원들, 소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군인들에 의해 계엄 해제를 가결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광주에서 희생된 수많은 희생자들, 고문으로 희생된 무고한 시민들, 학생들... 이름조차 다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죽은 자들이 오늘 우리를 구한 것이 아니고 뭐였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이 책의 첫 번째 에세이인 '빛과 실'을 읽어 나갔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년이 온다>를 집필한 2014년으로부터 7년이 지난 2021년 출간되었다. <소년이 온다>를 쓸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학살 생존자들의 증언들을 읽고 자료를 공부하고, 언어로 치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고통을 겪으며 최대한 절제하여 써내려 갔다. 그러면서 작가는 줄곧 자신의 소설들을 관통하는 핵심이자 글쓰기의 동력은 다음의 두 질문으로 모아진다고 말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그러나 이삼 년 전부터 그 믿음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2014년 <소년이 온다>를 출간하고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 - 우리를 연결하는 고통에 대해 - 질문했던 것 아닐까.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결국은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사랑은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나의 심장에 있다고.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The Nobel Foundation 2024
<작별하지 않는다>의 '작가의 말'에서도 '사랑'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나'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왔다. 열어 보니 유년 시절에 쓴 일기장 여남은 권이 담겨 있었다. 표지에 ‘시집‘이라는 단어가 연필로 적힌 얇은 중철 제본을 발견한 것은 그 포개어진 일기장들 사이에서였다. A5 크기의 갱지 다섯 장을 절반으로 접고 스테이플러로 중철한 조그만 책자. - P9
그렇게 자료 작업을 하던 시기에 내가 떠올리곤 했던두 개의 질문이 있다. 이십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 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오래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마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 P18
이 소설을 쓰는 일을 더 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거의 체념했을 때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에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우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누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 P19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이따금 그 묘지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날이 맑았다.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다.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나는 느꼈다.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과 공기가 내 몸을 에워싸고 있다고. - P19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동호가 어머니의 손을 힘껏 끌고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걸었던 것처럼. - P20
이 소설의 한국어 제목은 ‘소년이 온다‘이다.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흔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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