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사가 너무 느리게 흘러갑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다큐멘터리를 봤는지 모르겠는데, 단약이 진행되는 상태에서 콘서트를 끝낸 후 그녀는 절망감에 고통스러워합니다. "약 없이는 아무런 즐거움도 느낄 수 없어." 그 말을 정확히 이해합니다. 촬영할 때 나는 약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카메라 앞에서는 모든 게 보이고, 그러다가 결코 사용할 수 없는 컷이 나오기도 하니까요. 아무리 대기하며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할지라도 촬영은 엄청나게 밀도 있는 유일한 순간입니다. 전혀 권태를 느끼지 못해요. 하지만 그 외의 시간은 마약 없이는 전혀 즐겁지 않습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에요. 퇴역 군인이나 매춘부 중에도 마약중독자가 많습니다. - P131

중독. 단어의 어원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봤습니다. "중세시대에 ‘addictus(‘바친, 헌신한‘이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라는 단어는 맹세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약속을 어긴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주인에게 속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주인에게 속한 존재는 여성 혹은 노예, 타인의 선한 의지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시민의 단계까지 지위가 강등되었다는 뜻으로, 자신의 이익은 고려하지 않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는 의미였습니다.  - P131

그러므로 중독된다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전적인 권력을 포기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의 우선권을 망가뜨리기. 약속을 지키거나 갚을 수 없는 상태로 스스로 몰아가기.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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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사냥꾼

1917년
하늘은 하얗고 땅은 검었다. 처음으로 해가 떠오르기 전 태초의 시간 같았다. 구름은 그들이 속해 있던 영역을 떠나 나지막이 내려와, 마치 땅에 맞닿은 듯 보였다. 거대한 소나무들이 창공을 둘러싸고 어렴풋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흔들림도 소리도 없었다. - P17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려나? 그는 생각했다. 갑자기 남자는 극심하게 피로해졌고, 지금껏 그를 떠받쳐 온 모든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그는 쌓인 눈의 모습이 마치 갓 지어 또거운 김이 솔솔 피어오르는 흰 쌀밥 한 그릇 같다고 상상했다. 그렇게 뜨끈한 쌀밥을 먹어본 건 평생을 살면서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남자는 분노하는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여윈 몸을 무심하게 관통하며 불어가는 바람 같은 웃음이었다. 죽기 전에 그는 먹고 싶었던 음식 몇 가지를 더 떠올려 보고 싶었다. 간장과 파를 끼얹어 푹 고아낸 갈비찜이나, 걸쭉하게 녹은 골수가 입천장에 쩍쩍 들러붙을 정도로 진한 꼬리곰탕 같은 것들. 딱 한 번, 어느 명절 잔치에서 먹어본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환상도 지금 그를 향해 다시금 떠밀려 오는 또 다른 기억보다는 강렬하거나 유혹적이지는 못했다. - P24

남자가 순영을 처음 보았을 때, 순영은 자매들과 나란히 팔짱을 끼고 골짜기에 쑥과 나물을 캐러 가던 참이었다. 순영은 열세 살이었고, 남자는 열다섯 살이었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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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 길을 만든다 - 오지랖이 만든 브랜드의 기적
원경아 지음 / 글의온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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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 원이의 픈 피부를 위한 션에서 시작한 시아로!


건강한 화장품, 진짜 천연 화장품 Siaro, 믿을 수 있는 온 가족 케어 시아로.


이름도 생소한 화장품 브랜드라서 일단 '시아로' 화장품을 검색해 들어가니 '시아로'라는 브랜드 네이밍에 대한 의문이 해결이 된다. '시아로' 브랜드도 처음, 성공담을 담은 책을 읽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원경아 대표의 사업 철학에는 별 다섯 개가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변치 않기를 바란다.




'시아로' 화장품은 내 아이의 아토피를 낫게 하고 싶은 간절한 바람으로 단 한 명, 시원이를 위한 화장품을 만들었고, 방부제와 유화제가 들어가지 않은 진짜 천연 원료로 만든 보습제로 아이의 피부가 건강해진 것을 계기로, 혹은 아픈 피부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오지랖으로 만들어진 브랜드이다. 

'시아로' 화장품은 정상적인 피부 상태를 위한 화장품이라기보다 문제성 피부 질환 치료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화장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토피로 고통받던 아이로부터 "다른 이들이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오지랖'에서 시작한 일"(52쪽)이었다고 원경아 대표는 말한다. 

"당신이 피부과 의사냐"라면서 제품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거나, 혹은 스테로이드 사용을 중단하게 해서 상태가 악화됐다는 원망을 듣기도 했고, 시아로 제품 사용 중에 증세가 악화되는 과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악성 댓글을 달거나 제품 환불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불만도 원경아 대표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심각한 피부 질환으로 평범한 일상조차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는 것에 깊은 보람을 느낀다. 여기서 말하는 피부질환은 가벼운 트러블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피부 질환으로 양방과 한방을 넘나드는 치료를 시도했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는 깊은 염증성 질환을 말한다. 

스테로이드 사용을 중단하고 '시아로' 제품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탈스테로이드', 탈스는 다양한 부작용을 낳는다. 발적, 부종을 동반하면서 증세가 악화하고 그 과정에서 피부 질환자들과 그 가족이 겪는 고통은 아마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경일 것이다. 원경아 대표는 이러한 고객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전화로 상담을 하였고 이렇게 신뢰와 친밀감을 바탕으로 라포(Rapport)가 형성되면, 의심하던 고객의 마음을 열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조언을 하려고 노력한다. 무방부제 찐 천연 화장품의 효과를 입증한 고객들의 입소문을 탄 제품은 피부질환으로 절망하던 2 천여명에게 희망을 선물하였다. 시아로 제품은 2023년도에 네이버에 입점하였는데 효과를 입증하는 고객들의 후기들이 넘쳐난다. 




책을 읽다가 기억나는 부분이 있었다. 피부 질환으로 고민하는 분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주변의 시선이다. 보는 사람마다 피부가 왜 이러냐, 병원은 갔느냐, 하며 물어보고 관심을 가지는데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병원을 안 갔겠냐고, 왜 그런지 나도 알고 싶다고... 이럴 때 원경아 대표는 우리가 평소에 남 걱정을 깊이 하며 살진 않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치유에 집중해 보자고, 우리 화장품은 사용량이 많을수록 피부가 빠르게 개선되기 때문에 수시로 사용하라고 조언한다. 실제로 마트에서 하얗게 로션을 바르며 장을 보는 사진을 올려준 고객은 몇 개월 후 건강해진 피부로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고 한다. 

또 하나는 피부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주변에서 관리를 소홀히 한다고 오해받는 것이다. 병원 치료 대신 자연치료를 선택해서 관리하다보면 부모가 병원 치료를 안한다고 무책임하다고 하고 선의의 조언을 해주기도 하면서 부모의 양육 방식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고 비판을 하곤 한다. 무지하고 무책임한 엄마로 비치기도 하고, 심지어 의사로부터도 스테로이드를 안 쓴다고 친엄마가 맞냐는 비난을 받는다고 한다. 이러한 오해와 편견 때문에 자신의 노력이 헛된 것으로 치부되어서는 안되며 자신이 선택한 방법과 관리 방식을 꾸준히 실천하는 노력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고 한다. 

세 번째로는 피부 질환을 가진 분들이 자주 느끼는 깊은 죄의식이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는. 특히 피부질환이 있는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신을 자책하며 무거운 죄책감을 안고 산다. 충분히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원인을 찾아 헤매고 그러다 결국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누구를 탓해봐야 마음이 편치 않지만 아이를 보면서 미안해 하고 죄책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된다. 

"피부질환을 겪으며 얻은 진정한 공감과 이해는 고객과의 신뢰를 쌓는데 큰 힘이 되었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공감은 오랜 유대와 깊은 신뢰로 이어진다. 결국, 고객의 마음을 이해하고 진실된 경험을 나누는 것이 서로 간의 믿음을 키우는 핵심이라는 점을 꼭 전하고 싶다"(181쪽)는 원경아 대표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은 '시아로' 화장품의 오늘에 밑거름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시아로 화장품은 아토피(심한 가려움증을 동반하고 만성적으로 재발하는 피부 습진 질환), 주사피부염(로사세아: 얼굴의 중앙 부위를 침범하는 만성 충혈성 질환), 건선(은백색의 비늘로 덮여 있고, 경계가 뚜렷하며 크기가 다양한 붉은색의 구진이나 판으로 주로 구성된 발진이 전신의 피부에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만성 염증성 피부질환), 화폐상 습진(동전과 같은 동그라미 형태의 습진), 지루성 피부염(장기간 지속되는 습진의 일종으로, 주로 피지샘의 활동이 증가되어 피지 분비가 왕성한 두피와 얼굴, 그 중에서도 눈썹, 코, 입술 주위, 귀, 겨드랑이, 가슴, 서혜부 등에 발생하는 만성 염증성 피부질환), 한포진(손바닥과 발바닥에 피부내의 작은 물집(수포)를 형성하는 재발성 습진성 피부질환), 여드름 등의 7가지 피부 질환의 개선 효과를 인정받아 2020년 3월에 특허를 취득하였고, 세계 여성 발명 대회에서 '2등 세미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 

지속적인 연구와 투자로 현재는 피부장벽 강화 효과를 강조한 '단단 크림', 매실액을 활용하였고 항산화 효과가 피부 진정에 탁월하다는 '시아로 비누', 그리고 한방에서 배운 미백이나 탈모에 좋은 성분들로 만든 탈모 개선 제품을 출시할 날을 기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원경아 대표의 또 하나의 꿈이 있다. 바로 '시아로' 제품으로 한센병(나병) 환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어린 시절 보았던 한센병 환자들의 고통을 기억해내고 한센병 환자들의 피부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제품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진 원경아 대표가 꼭 목표를 이루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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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윌리엄 트레버 -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5
윌리엄 트레버 지음, 이선혜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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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버의 단편엔 모든 군더더기를 발라 내고 뼈대만 오롯이 남은, 그 자리에 저마다의 상처를 안은 사람들이 남는다. 외롭거나 상처입은 사람들, 정상을 벗어난 사람들, 무시당하거나 오해받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 버림받거나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무심히 보여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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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비힐의 기념물Mulvihill`s Memorial>,
<육체적 비밀Bodily Secret>,
<또 다른 두 건달Two more Gallants>,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츠바이크의 단편이 생각나게 하는 <산피에트로의 안개 나무>,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작품인 <삼인조A Trinity>를 끝으로 작년부터 읽기 시작한 세계문학단편선 《윌리엄 트레버》를 마침내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너무 오래 붙들고 있어서 처음에 읽었던 작품들은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라 아쉽다. 귀찮더라도 짧은 기록을 남겨놓았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은 늘 한다.
오늘의 이 문장들을 읽는다면 작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멀비힐의 기념물>

윌킨스키는 다른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된 일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트럼펫 메이저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성질 고약한 스미스슨이 이그니스 앤드 이그니스를 무너뜨리겠노라고 맹세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윌킨스키를비롯해 그 어느 누구도 스미스슨이 그토록 분노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로위나 스미스슨의 전 약혼자인, 시장조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남자 직원이 좀처럼 드나들지 않던 트럼펫 메이저에 나타났다. 그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칼스버그 맥주를 두 병 더 마셨다.
그는 바 앞에 서서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팁 데인티에게 반드시 비밀을 지켜 달라고 당부하면서, 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윔블던에 있는 스미스슨의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는 로위나를 집에 바래다준 뒤 막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그때 성질 고약한 스미스슨이 정말로 황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씩씩대면서 거실로 들이닥쳤다. 스미스슨 부인은 오벌틴을 마시던 중이었고, 로위나는 외투도 벗지 않은 상태였다. "넌 더러운 창녀야!" 성질 고약한 스미스슨이 로위나에게 소리쳤다. "이 싸구려 매춘부 같은 년!" 그는 딸의 약혼자가 보고 있는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 P496

이튿날 오전 10시 반이 되자 숨겨졌던 사실이 이그니스 앤드 이그니스 직원 모두에게 알려졌다. 옥스밴험과 로위나 스미스슨이 옥스밴험의 사무실 바닥에서 나눈 정사를 멀비힐이 촬영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사무실에 커튼을 쳐 두었던 것은 당연했고, 멀비힐은 그 기다란 파란색 드랄론 커튼 뒤에 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무실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고, 두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 P496

그날 점심시간에 이그니스 앤드 이그니스 직원들은 드넓은 세련된 로비를 지나가면서도 벽에 걸린 사진들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사진들이 속삭이며 전하는 메시지는 성적 암시로 넘쳐 났지만 고인이 된포르노물 제작자를 둘러싼 이야기가 적어도 지금은 그들의 마음을 더 사로잡았다. "멀비힐!" 누군가가 어색하게 멀비힐에게 존경을 표시했다. 멀비힐이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했다고 생각하는 직원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이 믿는, 멀비힐의 양심에 따른 행동은 로비의 벽을 메운 사진들의 황홀한 매력과 그 사진들이 전하던 메시지를 조금은 더럽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윌킨스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멀비힐의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회사에서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대신에 그는 그녀가 요청한 일에 대해서 이렇게 늦게 답변해서 미안하다는 내용과 그녀가 말한 필름이 실수로 폐기되었다는 내용을 담아서 편지를 썼다. - P497

<육체적 비밀>

애그뉴는 단 한 번도 결혼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의 청혼을 바라는 오닐 부인의 마음을 몰랐더라면 고인이 된 고용주의 미망인에게 청혼을 했을 리도 없었다. 오닐 부인은 결혼이 두 사람 모두를 구원할거라고 굳게 믿었다. 결혼과 함께 그녀는 아르칸젤로 하우스에서 느끼던 고독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애그뉴는 실직을 당하는 불편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오닐 부인은 애그뉴에게 공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사과 농장을 꾸미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그가 감독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과 농장 조성은 캐설과 전혀 관계없이 그녀가 새로이 벌이는 사업이었다. - P526

"이제 다 끝났어요." 그는 어느 일요일 밤, 더블린에서 돌아온 뒤 텔레비전을 끄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담뱃갑을 내민 채 그녀 앞으로 걸어가면서 몸을 조금 휘청거렸다. 결혼하기 전에 그는 더블린에서 주말을 보낼 때면 취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친구들을 만나서 술집을 옮겨 다녔다. 그들은 모두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즐겼다. 이따금 혼자 남겨지거나 새로 만난 남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그는 더블린 부둣가를 헤매고 다니면서 배 안에 있을 선원들을 생각했다. 그는 라스파런의 바닷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얼굴을 돌려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데시 피츠피니와 스위트먼 역시 남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고, 그녀의 남편 역시 생전에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물론 두 가지는 같은 경우가 아니었다. - P530

두 사람은 함께 아르칸젤로 하우스를 가로질러 각자의 방을 향해서 계단을 올라갔다. 그들은 헤어지기 전에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얼근하게 취한 상태에서 어렴풋이 서로를 안심시켰다. 내일이 되면 그들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일상으로 돌아온 월요일 아침에 그들은 공통의 영역에 더 이상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이다. 침실 밖 층계참에서 두 사람은 장난감 공장이 있던 자리에 들어설 과수원과 그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게 될 나무들에 대해서 잠시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 P532

<또 다른 두 건달>

플랙스 교수님과 저는 그 나이 든 여자분의 이야기를 같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여자분이 처음부터 끝까지 꾸며 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교수님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신 줄만 알았습니다."
"아, 하지만 헤퍼넌 씨, 그 여자분은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습니다."
"노스프레더릭 가에서 치과를 운영한 오리어던이라는 이름의 의사는 없습니다. 교수님. 그 정도는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헤퍼넌이 자리에 앉았다. 강연장에는 거북한 침묵이 내려앉았고, 청중의 눈은 플랙스 교수를 향했다. 플랙스 교수가 쉰 목소리로 힘없이말했다. "하지만 헤퍼넌 씨, 그 여자분이 무슨 이유로 이야기를 꾸며냈겠습니까? 게다가 그런 직종에 종사하는 여자분이라면 조이스의 작품을 읽었을 리 없습니다. 「두 건달」의 내용을 알 리가 없......"

*<또 다른 두 건달>은 제임스 조이스의 <두 건달Two Gallants>에 등장하는 ‘레너헌과 코얼리‘라는 두 건달의 이야기를 토대로 시작된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오마쥬했다고 할 수 있다. - P546

어색해하면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청중들은 웅얼거리면서 통로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피츠패트릭은 매긴 부인의 부엌에서 이루어진 만남과 헤퍼넌이 조종하는 줄 끝에 매달린 두나이 든 인형 그리고 무화과 쿠키와 차를 떠올렸다. 가정부의 목소리도 떠올랐다. 가정부는 헤퍼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피츠패트릭이 처음 들을 때부터 단 한 마디도 믿지 않았던 바로 그 이야기를 플랙스 교수에게 들려주었다. 
피츠패트릭은 플렉스 교수를 찾아가서 가정부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님을 알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강연장을 메운 사람들 사이로, 포리지색 트위드 정장 차림으로 외롭게 앉아 있는 플랙스 교수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치욕스러운 망신에 자살이 뒤따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유감스럽게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강연장 밖으로 나온 뒤 헤퍼넌은 앤 가에 있는 술집에 가서 한잔하자고 제안했지만 피츠패트릭은 지옥에나 가라고 대답했다. 헤퍼넌은 이런 말을 한 피츠패트릭을 영원히 용서하지 않았다. - P547

"사람이 어쩜 그렇게 옹졸할 수 있을까?"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대학 경기장에 함께 앉아 있었고 피츠패트릭은 이렇게 말했다. "늙고 가엾은 플랙스 교수가 헤퍼넌한테 한 말이라고는 ‘아직도 여기 있군요‘가 전부였어."

나는 무언가 대꾸를 했다. 플랙스 교수는 「두 건달」을 주제로 강연을 한 뒤 1년이 지나서 자연사했다. 그는 헤퍼넌이 이야기한 것과 달리, 젊은 시절에 아내와 여자 형제 두 명을 돌아 버리게 만든 적이 없었다. 《아이리시 타임스》에 실린 부고에는 플랙스 교수가 외자식이었으며 미혼남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플랙스 교수가 저지른 실수는 제법 널리 알려졌고 더블린 사람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그런 그의 부고를 접하는 것은 낯설기만 했다. - P548

피츠패트릭과 나는 대학 경기장에서 크리켓 게임을 구경하면서 플랙스 교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는 플랙스 교수가 장난삼아 건넨 농담에 대해서 말했고, 그 농담이 헤퍼넌의 자존심을 얼마나 크게 상하게 했는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는 이야기 속의 젊은 여자를 도둑질로 이끈 사랑에 감탄했고, 나이 든 여자를 속임수에 가담하게 만든 욕심에 놀라움을 드러냈다. 
피츠패트릭은 자신의 지나친 나태함을 짧게 언급하면서 이 역시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인간의 나약함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 P548

<산피에트로의 안개나무>

내 어린 시절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에들런드 박사가 스스로도믿지 못하면서 화통하게 장담한 날이 마침내 찾아와서 내가 산피에트로 알 마레에서 보낸 여름날들을, 특히 그해 여름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니 사람 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법이다. 나는 물론 휴양지에서 돌아와 린빅에서 보낸 날들도 기억한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내 허약한 체질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하나로 묶어 주었음을 알지 못했다. 공정하게 대하고 싶다면 얼마 못 살 아이에게 다른 모든 괴로움은 물론이고 가정 붕괴의 고통을 안겨주어서는 안 되었다. - P573

"릴에는 10월에 벌써 눈이 왔어요." 파이예 씨가 말했다. 그날 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밤에도 대화는 내가 있는 탓에 이런 식으로 이어졌다. 시간은 흘렀고, 어머니는 린빅으로 돌아가면 파이예 씨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부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괜한 어리석은 소리를 다시 할 필요가 없음을 아셨다.
내가 열여섯 살이 되고 뒤이어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산피에트로에 갔다. 허약한 자식을 유럽을 가로질러 햇볕이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는 것은 하나의 의무로 시작된 이 일은 이제 어머니의 삶에 숨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되었다.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진 한참 뒤에도 우리는 여행을 계속했다. 역할이 뒤바뀌어서 나는 이제 동정심을 느끼는 입장이 되었다. 파이예 씨가 한때 연민의 정으로 찾아가던 미친 아내는 죽었다. 그런데도 파이예 씨는 빌라 파르코에 오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식당에서 종업원들이 호텔에 새로 고용된 신참들에게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가르쳐 주어야 할 내용들을 설명하는 모습을 보고는 했다. 나는 나이를 먹어 가면서 더 이상 어머니와 이웃한 방에 묵지 않았다. - P574

내게 덤으로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나는 흑단 상자에 담아 두었던 얼룩진 그림들을 꺼내 본다. 나는 산피에트로의 안개 나무를 그린 습작들을 보면서 내게 재능이 없었음을 깨닫는다. 안개 나무의 그 특별한 나뭇잎이 지닌 포착하기 어려운 특징을 그림에 담으려고 그토록 열심히 애썼다니, 이제야 그 노력이 어리석게만 느껴진다. - P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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