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드의 여왕
무르와 안나 표도로브나의 나이 차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이 세상 시계 장치의 톱니바퀴가 낡은 것인지,
삭아버린 것인지, 시간은 점점 빠르게 굴러가고 심방세동을 겪기도 하는데, 이렇게 기울어가는 시간의 움직임을 따르는 삼십 년이 예순과 아흔 사이에 자리잡은 것이라고 한다면, 이제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안나 표도로브나는 빠르게 했던 일들을 점점 느리게 하고 있고,
그 대신에 잠을 자는 데 더 적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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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면 흔히 갖게 되는 믿음은, 소냐의 경우 그
한계를 몰랐다. 남편의 재능은 어느새 믿음이 되었고 그녀는 숭고한 기쁨으로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공간과 관련한 복잡한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우아하고 섬세한 해법들과도 거리가 멀었지만 남편의 이상한 장난감들 속에서 그의 개성과 재능 있는 손놀림을 느끼고는 행복에 겨워 혼잣말로 소중하게 숨겨놓은 문구를 중얼거리곤 했다.
"하느님, 하느님, 제게 왜 이런 행복을 주십니까.." - P38

로베르트 빅토로비치는 말하자면 그림 그리는 일을 때려치웠다. 타네치카와 함께 했던 예전 놀이들이 새로운 수공예를 탄생시켰다. 이런일에는 항상 우연이 겹치기 마련이다. 알렉산드로프의 전차에서 그는파리 시절의 지인으로 모스크바에 돌아온 이후 체포되기 이전까지 관계를 유지했던 유명한 예술가 티믈러를 만났다. 당시 허풍쟁이나 재능없는 이들을 부르는 말이었던 형식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던 이 예술가는 불안한 시기를 피해 한동안 극장에 숨어 있었다. 로베르트 빅토로비치를 방문한 그는 한 시간 반 동안, 판자로 만든 헛간에서 아라비아숫자와 유대 알파벳이 쓰인 몇몇 작품들 앞에 서 있었다. 유대 학교에서 고작해야 이 년간 교육받은 이 지방 목수의 아들은 로베르트 빅토로비치 작품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했지만 이 이상하게 생긴 글자의 뜻을 선뜻 묻지는 못했고, 로베르트 빅토로비치 또한 자신에게는 너무나 그 관련성이 명확한 카발라 글자(그가 젊은 시절 유대교에 심취한 것에 대한 증거물)들과 공간을 분할하고 뒤집어놓는 과감한 유희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 P38

티믈러는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셨고 떠나기 바로 전 어둠게 말했다.
"여긴 너무 습하지 않나. 로베르트, 자네 작품들을 내 공방으로 옮기도록 하지."
로베르트 빅토로비치의 작품에 대한 인정인 
동시에 고마운 배려였지만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연히 나타난 이름 없는 작품들은 수차례의 이사를 견디지 못하고 한 헛간에서 썩어 사라졌다.
바로 이 헛간에서 유명 예술가 티믈러가 로베르트 빅토로비치에게 연극 무대 모형을 만들어달라는 첫 주문을 넣었다. 얼마 후, 그가 만든 무대 모형은 모스크바 극장계 전체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고 주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는 반미터쯤 되는 무대에 고리키의 밤 주막이나 톨스토이의 상속자 없는 고인의 서재, 혹은 오스트롭스키의 불멸의 헛간도 만들었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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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 풍요의 바다 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윤상인 외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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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미시마 유키오를 읽으며 드는 일말의 망설임과 죄책감을 상쇄하고도 남는, 너무 아름다워서 시린 문장들 앞에서 이번에도 나는 넋이 나가 버렸다. ˝방금 꿈을 꿨어. 또 만날 거야. 분명히 만나게 돼. 폭포 밑에서.˝ 꿈과 윤회로 이어지는 기요아키의 마지막 말. 기억하고 있어! 돌아와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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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치카
소네치카는 유아기를 갓 벗어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독서광이었다.
집안의 독설가인 오빠 예프렘은 그가 태어났을 무렵에도 이미 구닥다리였던 농담을 계속 해댔다.
"끝도 없이 책만 읽는 소네치카, 의자 꼴 엉덩이에 코주부가 됐다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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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야마토(大和) 평야의 노란 억새밭에는
 바람에 실려멀리서 날아온 눈송이들이 나풀나풀 흩날리고 있었다. 봄눈이라기에는 너무 여려서, 마치 날벌레가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하늘이 흐려지면 하늘빛에 섞여 들었지만, 아렴풋이 약한빛이 비치면 그제야 포슬포슬 떨어지는 가루눈을 알아볼 수있었다. 제대로 눈이 내리는 날보다도 한기는 훨씬 매서웠다. - P480

기요아키는 베개에 얼굴을 내맡긴 채 사토코에게 자신이보여 줄 수 있는 가장 큰 정성에 대해 생각했다. 어젯밤 결국 혼다에게 도움을 청했으니 혼다는 오늘이라도 달려와 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혼다의 우정에 큰스님도 마음을 움직일지 몰랐다. - P480

 그러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해 볼 수 있는일이 남아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빌리지 않고 자기 혼자만의 마지막 정성을 표하는 일. 생각해 보면 기요아키는 여태 한 번도 그 정도의 정성을 사토코에게 내보일 기회가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약함 탓에, 그는 지금껏 그럴 기회를 피해 왔다. - P481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병이 위독하면 위독할수록 병을 무릅쓴 수행의 의미도 힘도 커질 터였다. 그의정성에 사토코가 마음을 움직여 줄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설사 사토코의 감응을 기대할수 없다 해도 제 자신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지경에 도달해 있었다. 처음에는 사토코의 얼굴을 꼭한번 보고 싶다는 갈망이 그의 온 영혼을 점령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 영혼이 애초의 소원과 목적마저 모두 초월한 것 같았다. - P481

남포등이 뿌옇게 그려 내는 노란빛의 둥근 테두리 속에서, 두 젊은이가 가슴에 품은 대조적인 세계의 그림자는 날카로운 첨탑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사랑으로 앓고 있는데, 한 사람은 견고한 현실을 위해 공부하고 있었다. 기요아키는 비몽사몽간에 발에 엉겨붙은 해초에 버둥대면서 혼돈한 사랑의 바다를 건너고 있었고, 혼다는 지상에 확고히 세워진 정연한 이지의 건축물을 꿈꾸고 있었다.이른 봄의 추운 밤, 낡은여관방 한 칸 속에서 두 젊은이의 너무도 다른 두 머리는 바싹붙어 있었다. 열에 신음하는 젊은 머리와 냉철한 젊은 머리는 닥쳐오는 자기 세계의 종국적 시간에 제각기 붙들려 있었다. - P489

혼다가 기요아키의 머릿속에 든 것을 이렇게까지 통절히, 결단코 제 것으로 만들 수 없으리라 느낀 적은 없었다. 기요아키의 몸은 눈앞에 누워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질주하고 있었다. 때때로 꿈결에 사토코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발그레한 얼굴은 초췌해 보이기는커녕 평소보다도 생기가 넘쳤고, 상아
안쪽에 불을 넣어 둔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자신은 그 내부에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다는 것을 혼다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해도 자신은 그런 정념의 화신이 될 수 없었다. 아니, 그는 어떤 정념의 화신도 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에게는 자기 안으로 정념의 침투를 허락하는 
자질이 없었다. 우정이라면 넉넉했고 눈물도 알았지만, 진짜로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왜 자신은 정연한 질서를 안팎으로 지켜 내는 일에만 전념하는가. 어째서 기요아키처럼 불, 바람, 물, 흙과 같이 끊임없이 변모하는 만물의 근원을 제 몸 안에 품을 수 없는 것일까. - P490

그러나 괴로움에 일그러진 얼굴은 아름다웠다.
고통이 얼굴에 정기를 불어넣고 청동처럼 엄숙한 선
을 그렸다. 눈물에 젖은 아름다운 눈이 험상궂게 찌
푸린 눈썹 쪽으로 바싹 당겨 올라가 있었다. 위로 잔뜩 휘어 있어 한층 씩씩해 보이는 눈썹 탓에, 눈동자에 맺힌 눈물방울은 더욱 검고 비창하게 빛났다. 잘생긴 콧방울은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허공을 향해 버둥댔고, 열에 마른 입술 새로 드러난 앞니는 진주조개 같은 광택을 뿜어냈다. - P503

잠깐 잠에 빠진 듯했던 기요아키는 갑자기 눈을 뜨고 혼다의 손을 찾았다. 친구의 손을 꽉 쥐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방금 꿈을 꿨어. 또 만날 거야. 분명히 만나게 돼. 폭포 밑에서."
혼다는 마쓰가에가의 정원을 떠돌아다니던 기요아키의 꿈이, 광대한 뜰 한구석의 9단 폭포를 그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 P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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