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야마토(大和) 평야의 노란 억새밭에는 바람에 실려멀리서 날아온 눈송이들이 나풀나풀 흩날리고 있었다. 봄눈이라기에는 너무 여려서, 마치 날벌레가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하늘이 흐려지면 하늘빛에 섞여 들었지만, 아렴풋이 약한빛이 비치면 그제야 포슬포슬 떨어지는 가루눈을 알아볼 수있었다. 제대로 눈이 내리는 날보다도 한기는 훨씬 매서웠다. - P480
기요아키는 베개에 얼굴을 내맡긴 채 사토코에게 자신이보여 줄 수 있는 가장 큰 정성에 대해 생각했다. 어젯밤 결국 혼다에게 도움을 청했으니 혼다는 오늘이라도 달려와 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혼다의 우정에 큰스님도 마음을 움직일지 몰랐다. - P480
그러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해 볼 수 있는일이 남아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빌리지 않고 자기 혼자만의 마지막 정성을 표하는 일. 생각해 보면 기요아키는 여태 한 번도 그 정도의 정성을 사토코에게 내보일 기회가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약함 탓에, 그는 지금껏 그럴 기회를 피해 왔다. - P481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병이 위독하면 위독할수록 병을 무릅쓴 수행의 의미도 힘도 커질 터였다. 그의정성에 사토코가 마음을 움직여 줄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설사 사토코의 감응을 기대할수 없다 해도 제 자신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지경에 도달해 있었다. 처음에는 사토코의 얼굴을 꼭한번 보고 싶다는 갈망이 그의 온 영혼을 점령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 영혼이 애초의 소원과 목적마저 모두 초월한 것 같았다. - P481
남포등이 뿌옇게 그려 내는 노란빛의 둥근 테두리 속에서, 두 젊은이가 가슴에 품은 대조적인 세계의 그림자는 날카로운 첨탑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사랑으로 앓고 있는데, 한 사람은 견고한 현실을 위해 공부하고 있었다. 기요아키는 비몽사몽간에 발에 엉겨붙은 해초에 버둥대면서 혼돈한 사랑의 바다를 건너고 있었고, 혼다는 지상에 확고히 세워진 정연한 이지의 건축물을 꿈꾸고 있었다.이른 봄의 추운 밤, 낡은여관방 한 칸 속에서 두 젊은이의 너무도 다른 두 머리는 바싹붙어 있었다. 열에 신음하는 젊은 머리와 냉철한 젊은 머리는 닥쳐오는 자기 세계의 종국적 시간에 제각기 붙들려 있었다. - P489
혼다가 기요아키의 머릿속에 든 것을 이렇게까지 통절히, 결단코 제 것으로 만들 수 없으리라 느낀 적은 없었다. 기요아키의 몸은 눈앞에 누워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질주하고 있었다. 때때로 꿈결에 사토코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발그레한 얼굴은 초췌해 보이기는커녕 평소보다도 생기가 넘쳤고, 상아 안쪽에 불을 넣어 둔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자신은 그 내부에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다는 것을 혼다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해도 자신은 그런 정념의 화신이 될 수 없었다. 아니, 그는 어떤 정념의 화신도 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에게는 자기 안으로 정념의 침투를 허락하는 자질이 없었다. 우정이라면 넉넉했고 눈물도 알았지만, 진짜로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왜 자신은 정연한 질서를 안팎으로 지켜 내는 일에만 전념하는가. 어째서 기요아키처럼 불, 바람, 물, 흙과 같이 끊임없이 변모하는 만물의 근원을 제 몸 안에 품을 수 없는 것일까. - P490
그러나 괴로움에 일그러진 얼굴은 아름다웠다. 고통이 얼굴에 정기를 불어넣고 청동처럼 엄숙한 선 을 그렸다. 눈물에 젖은 아름다운 눈이 험상궂게 찌 푸린 눈썹 쪽으로 바싹 당겨 올라가 있었다. 위로 잔뜩 휘어 있어 한층 씩씩해 보이는 눈썹 탓에, 눈동자에 맺힌 눈물방울은 더욱 검고 비창하게 빛났다. 잘생긴 콧방울은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허공을 향해 버둥댔고, 열에 마른 입술 새로 드러난 앞니는 진주조개 같은 광택을 뿜어냈다. - P503
잠깐 잠에 빠진 듯했던 기요아키는 갑자기 눈을 뜨고 혼다의 손을 찾았다. 친구의 손을 꽉 쥐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방금 꿈을 꿨어. 또 만날 거야. 분명히 만나게 돼. 폭포 밑에서." 혼다는 마쓰가에가의 정원을 떠돌아다니던 기요아키의 꿈이, 광대한 뜰 한구석의 9단 폭포를 그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 P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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