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퀴나하크에서

세계 지도를 가져다가(지구본이 더 좋다) 위도 60도선을 찾고 서쪽으로 이동해보라. 셰틀랜드 제도에서 시작하면 바로 북대서양 상공을 날 수 있다. 그린란드 페어웰 곶의 끄트머리 몇 킬로미터를 스쳐가고, 캐나다의 래브라도에 이어 허드슨 밀이 나타날 것이다. 계속 간다. 60도선은 캐나다 매니토바 주, 서스캐처원 주, 앨버타 주,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북쪽 국경을 이룬다. 계속 서쪽으로 가면 알래스카 주가 나온다. 계속 더 가다가 마침내 베링해에 이르면 거기서 멈춘다. 바다를 건너면 러시아고 이제 긴 귀향길이 시작된다.
이 선은 알래스카의 마지막 15킬로미터 지역에서 쿠스코큄-유콘 삼각주를 지난다. 지도를 보면 도로는 없고 녹색 물길과 얼음 녹은 웅덩이들만 보일 것이다. ‘퀴나하크 마을‘은 바로 이 해안, 60도선 바로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다. 카네토크 강이 베링해로 쏟아지는 곳이다. 여름에는 그렇다. 겨울에는 강이 얼고 눈이 높이 쌓인다.
마을 주민은 7백명 가량이고 대부분 유피크Yupik족이다. 이들의 강인 카네토크 강은 유명한 연어 회귀천이다. 카네토크는 ‘새로운 강물 길‘이라는 뜻이다. 이 물기 넘치는 세계에서 강들은 쉽게 경로를 바꾼다. (75쪽)

어느 날 아침, 다른 사람들이 모두 현장으로 떠나고 뒤에 남아있던 내가 어슬렁어슬렁 2층에 올라갔더니 워런이 서류와 청구서가 쌓인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2층에는 창문이 있었고 사각의 창밖으로 고요한 툰드라가 내다보였다. - P95

나는 스스로를 작가라고 소개하고 가능하면 유피크 생활에 대해 배우고 싶다고 했지만, 나 자신도 그 말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유피크 생활은 주변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강과 땅, 허름한 오두막, 끝없는 쿼드바이크, 새와 베리, 그리고 불그죽죽한 쿠스푸크를 입고 휴대폰으로 통화 ㅡ"하지만 가족이잖아. 가족을 모른 척하면 안 돼."
ㅡ하던 위엄 있는 노부인.
워런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전에도 이런 말을 
들었나? 물론 그랬을 것이다. 유럽인들은 긴 세월 동안 이곳을 식민지로 삼고 이들의 ‘야만적 삶‘을 질타하더니 갑자기 간곡한 자세가 되어 이들이 수렵채집인으로서 자연과 맺은 관계에 감탄을 바치고 있었다. - P95

"우리가 이글루에 안 산다고 말해 주세요."
"네, 그럴게요."
"라스베이거스 사람들은 그랬어요. ‘어? 이글루에 안 산다고?"
"그렇게 말할게요. 겨울이 온화했다고 
들었는데요."
"어떤 겨울 말인가요? 작년에는 강 얼음이 두 번만 치면 깨졌어요. 우리는 아무 데도 못 갔죠."
워런은 발굴 작업에 대해 말했다. "우리가 어르신들께 탄원을 했어요. 젊은 세대를 위한 거라고요. 아이들이 우리 문화를 어떻게 알겠어요. 우리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가 자랄 때 우리한테는 교회뿐이었고 우리 문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발굴이 효과가 있나요?"
그러자 워런의 말투가 누그러들었다.
"결정적이었죠. 작년에는 전통 춤 잔치를 했어요. 
발굴 작업으로 촉발된 거죠. 그거 아셨나요? 
거기서 조상들의 무용 가면들이 발굴되고 있어요. 선교사들은 우리 춤이 악마 숭배라고 했죠! 우리를 세뇌했어요! 백 년 동안 마을에는 전통 의례였던 춤 잔치가 없었어요.
한 교사가 어르신들의 기억을 모으고 다른 마을의 사례를 조합해서춤을 재구성했고 젊은이들이 공연을 했죠." - P96

그는 반항적으로 말했다. "처음 북소리가 울릴 때 목덜미의 털이 쭈뼛 일어섰어요. ‘이걸 되찾았어!‘ 하는 생각이었죠. 저는 요새 사냥꾼들에게 순록 앞가슴 털을 버리지 말라고 해요. 그걸로 여자들이 춤 잔치에서 쓰는 부채를 만들거든요. 백 년 만에 처음으로 그게 다시 필요해졌어요." - P96

한 시간 뒤에도 내 감각은 계속 선명해져 갔다. 아마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아비새 한 마리가 환한 구름 아래를 날아갔다. 
부리에는 가늘고 긴 물고기가 물고 있었다.
그런 뒤 멜리아가 두루미를 보고 나를 불렀다. 우리는 함께 일고 여덟마리의 캐나다두루미가 천천히 날아와서 차례로 땅에 내린뒤 긴 다리로 풀을 헤치고 걷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쯤이면 풀들의 모습이 너무 생생해서 나는 거의 그 맛이 느껴질 정도였다. 겨우 한 시간 동안의 관찰로 이렇게 되었다면 1년, 평생, 천 년은 어떨까? 사람이 한 집단 전체가 얼마나 자연에 조율될 수 있을 것인가? - P128

화자들의 감각이 이렇게 예리한데 어떤 이야기가 ‘진실‘이고 어떤 이야기가 그렇지 않은지 어떻게 알겠는가? 릭은 만약 누날라크 주민들이 여기 돌아온다면-방한 점퍼와 베리 바구니, 피어싱, 문신을 새긴 모습 그대로 자신들의 풍경을 금세 알아볼 거라고 말했다. 풍경이 그렇게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 P128

생일 파티 이틀 후 나는 저녁을 먹고 빨간 건물 밖으로 산책을나갔다. 그렇게 아름답고 차분한 저녁에 실내의 전등 빛 아래만 있을 수가 없었다.
밖에는 아이들 대여섯 명이 버려진 창고 같은 건물의 지붕에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갔다. 버려진 창고 같다고 했지만 게으른 표현이다. 나는 이제 그 마을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떤 창고에는 어구들이 있었다. 작은 것들은 연어를 훈연하는 훈연장이었다. - P1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과거 요법 클리닉

그래서, 테마는 기억이다. 템포는 안단테에서 안단테 모데라토. (절제된) 소스테누토. 서두로는 너무 과하지 않게 엄숙하고 두번째 박자가 긴사라반드가 좋을지도 모른다. 바흐보다는 헨델에 가깝게. 엄격하게 반복하면서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도록. 서두에 어울리게끔 절제되고 엄숙하게.
그다음에는 모든 것이 허물어져도 좋다 ㅡ 허물어져야 한다.

1.
언젠가 사람들은 시간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지구가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를 계산하려고 했다. 17세기 중반 아일랜드의 주교 어셔는 정확한 연도뿐만 아니라 지구가 시작된 날짜까지 계산했다. 기원전 4004년 10월 22일. 그날은 토요일이었다(당연하게도). 어셔가 정확한 시간까지 오후 6시경제시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토요일 오후, 그건 완전히 신빙성 있는 말 같다. 무료한 창조자가 세상을 건설해 곁에 둘동반자들을 만들겠다고 나서기에 토요일 오후만큼 적당한 시간이 또 있겠는가? 어셔는 이 일에 오랜 세월을 바쳤고 라틴어로 쓴 그의 저작은 이천 페이지에 달했다. 애써 글 전체를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 P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장 유리에 비친 모습~~

북극의 여름 저녁 하늘에 나타난 뒤집힌 배 한척!
그 배는 당시에 수평선 너머에 있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끔 이렇게 기이하고 재밌는 글들을 만날 때
너무 행복하다.
캐슬린 제이미의 에세이..
그래서 더 좋아한다.




한쪽은 바다, 한쪽은 들판.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니 반짝이는 바다가 내 창문에 떠올라서 검누런 들판에 겹쳐져 있었다. 그 광경은 금세 사라졌지만 잠시 후 다시 번쩍 나타났다. 땅 위에 은색으로 뻗은 바다. 하지만 몇 초 만에 다시 사라졌다. 나는이 현상이 신기해서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왼쪽의 들판이 소나무숲으로 바뀌었는데, 기차가 약간 기울자 바다가 다시 유리에 비쳤고
이번에는 나무들 위쪽에 상이 맺혔다. 눈에 힘을 주면 바다와 나무가 동시에 보였다. 그리고 배도 있었다! 창백한 유조선이 소나무 숲 위쪽을 유유히 항해했다. - P161

<가짜 신부>도 있지만, 하늘에 뜬 배는 나에게 다른 것을 연상시켰다. 윌리엄 스코스비의 글이다. 스코스비는 포경선 선장이자, 포경선 선장의 아들이었다. 그는 열두 살 때부터 여름마다 아버지와 함께 북쪽으로 갔고, 스물한 살에 자신의 배 ‘배핀 호‘를 지휘했다. 하지만 스코스비에게 고래 살육은 지루한 허드렛일이었고, 그가 더 큰 관심을 가진 것은 과학과 발견이었다. 그는 1822년에 북쪽을 항해하면서 여러 지도를 만들고 그린란드 동쪽 해안에서 마주친 이상한 현상들을 자세히 기록했다. 눈송이, 굴절, 무지개, 
신기루에 대한 글이었다. - P162

7월의 어느 화창한 날, 바람이 가볍고 대기의 굴절률이 높을 때 스코스비와 선원들은 놀라운 광경을 맞닥뜨렸다. 하늘에 배 두 척이 뒤집힌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그 배들을 알았고, 그것들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15킬로미터 너머의 거리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로부터 2주일 뒤에 그 현상이 다시 나타났다. 북극 여름 저녁의 투명한 하늘에 배 한 척이 나타났다. 뒤집혀 있었지만 그 모양이 너무도 선명해서 돛 하나하나가 뚜렷이 보였다. 그는 그 배에 아버지의 배 이름을 따서 ‘페임 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배는 당시에 수평선 너머에 있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수평선 너머를 볼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나의 배는 뒤집히지 않고 나무들 위를 항해했다. - P162

메리 스코스비는 남편이 그린란드를 탐험할 때 죽었다. 그가 하늘에 뜬 배를 목격한 그 항해였다. 그는 9월에 배핀 호를 이끌고 머지 강에 들어선 
뒤에야 그 소식을 들었다. 작은 보트가 그의 배로 다가올 때 이미 심상치 않은 기미가 있었다. 배가 가까워지자 보트는 돛을 내리고 승선한 친구들이 모두 침묵했다. - P164

이제 오른쪽에 다시 북해가 나타나고 정박해 
있는 배들이 보였다. 수평선 너머의 석유 굴착 시설과 관련된 배들이었다. 나는 그 배들도 비쳤으려나 얼른 창문을 보았지만 때는 정오였고 빛은 바뀌어있었다. - P1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기 퍼가기 시대 - 미국의 미혼모, 신생아 입양, 강요된 선택 서구 미혼모 잔혹사 1
캐런 윌슨-부터바우 지음, 권희정 옮김 / 안토니아스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기 퍼가기 시대'라는 이 생경하고도 이상한 용어는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 아일랜드 등의 세계 유수의 국가에서 자행된, 비공개 영아 입양이 대규모로 시행되던 시기를 말한다. 대체로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1973 년까지의 기간이며 이 책을 저술한 미국의 작가 캐런 윌슨-부터바우도 어린 나이에 아기를 낳았고 아기를 빼앗긴 어머니이다. 책의 표지에 인쇄된 사진을 참조하시라. 아기를 안고 사진을 찍는 어머니라면 결코 저런 표정일 수가 없다. 아기를 낳고 잠시 안아본 게 다인데 바로 아기를 빼앗기고 원하지 않는 입양을 강요 당했다. 미국에서 150만 명 이상의 미혼모가 강제 입양으로 아기를 빼앗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대는 미국에서 낙태가 합법화된 그 유명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난 해를 즈음하여 공식적으로 끝난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상 이토록 많은 미혼모가 갓 낳은 아이를 입양 보낸 전례는 없다(38쪽)"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미혼의 엄마들이 단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기를 빼앗겼다. 대부분의 엄마들의 나이는 만 16 ~ 18세였다. 그들은 피임약을 구할 길이 없어 배란기에 맺은 성관계가 임신으로 이어졌고 임신 사실을 알아도 밝힐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어떤 엄마는 남자와 성 관계를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고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아기를 낳을 때조차 어떠한 안내도 받지 못했다. 통증을 경감시켜주는 어떠한 처방도 받지 못했다. 미혼의 여성의 성행위는 금기였기에(그런데 왜 미혼의 남성에게는 금기가 아닌 것이죠?) 임신을 한 여성들은 "문제 있는 여자애들"이란 시각으로 보았다. 정말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친절하게도 캐런 윌슨-부터바우 이 작가는 처음 시작하는 1장부터 마지막 26장의 내용을 스스로 요약을 해 놓았다. 읽다 보면 전혀 생소한 내용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접한 영미 문학에서, 영화에서, 그리고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작년 하반기, 아일랜드의 작가 클레어 키건의 <푸른 들판을 걷다>를 읽다 알게 된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음침하고 끔찍했던 그곳도 바로 미혼모 수용시설이지 않았던가. 아무튼 거두절미하고 이 시기 미혼 임신을 한 여성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문제의 여자애'는 아이 아빠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지만, 그는 곧 타지에 있는 대학에 가기 위해 마을을 떠나거나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아니면, 임신한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회피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고 베트남으로 떠난다. 아이 아빠로부터 거절 당한 후 미혼의 임산부는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한다. 이 반갑지 않은 소식에 충격을 받은 부모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후 "전문가"에게 도움을 구한다. 그러면 의사나 목회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딸을 미혼모 시설에 보내고 아기를 낳으면 입양 보내라고 조언한다.


<감금>

   2차 세계대전 이전 모자 위탁 가정forest home은 엄마들이 아기를 기를 수 있도록 돕던 곳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모자 위탁가정은 유급 위탁 가정wage home으로 전환되는 역사적 변화를 거쳤다. 유급 위탁 가정에 머물던 미혼 임산부는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면 미혼모 시설로 옮겨졌고, 거기서 별다른 대안없이 입양을 선택했다. 이러한 변화는 미혼모 시설을 제도화하는데 앞장서고 입양 산업화를 위해 시설을 활용한 입양 조사 복지사들에 의해 촉진되었다. 유급 위탁 가정과 미혼모 시설은 입양 기관과 관련 변호사들의 협력을 얻으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던 미혼모를 포획하는 그물을 완성했다. 그물은 미혼모들을 꼼짝할 수 없이 가두었고 사람들은 그 안에 있는 아기라는 사냥감을 얻었다(Kunzel 1993: 169).


   미혼모 시설에 입소하기 위해서는 "혼외관계" 임신이어야 했는데 이때 "혼외 관계"란 무조건 "잘못된 행동"을 의미했다(Vincent 1962: 10). 어린 나이에 임신하게 되면 대부분 부모의 손에 이끌려 입양 기관에 오고, 입양 기관에 오면 복지사의 안내로 유급 위탁 가정(결혼한 부부의 가정)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임신 7개월이 될 때까지 숨어지내며 임금을 받고 집안일과 육아(자신의 아이는 돌보지 못하는데 육아를 한다? 어불성설이죠?)를 돕는다. 유급 위탁 가정은 미혼모 시설로 옮겨갈 때까지 머무는 단기적인 해결책이었다. 유급이라 했지만, 임금은 거의 지급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한 대가는 숙박비와 식비로 이미 빚을 질 만큼 충분히 받았고, 망신당하지 않도록 숨을 장소를 제공했으니 감사하라는 식이었다. 이 관행은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및 뉴질랜드를 포함한 서방 국가에 널리 퍼졌다. 흔히 가사 도우미 같은 일을 했는데 이것은 당시 사회 정책이었다(Child Welfare League of America 1978: 28)


   유급 위탁 가정의 안주인은 미혼모에게 어머니 같은 멘토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부끄러운 짓을 한 어린 임산부가 산달이 다가와 미혼모 시설로 옮겨갈 자격이 될 때까지 숨겨 준 대가로 몇 달 동안 무료(또는 저렴한 임금을 받는) 입주 가정부를 들이는 정도로 생각하는 "정숙한", 즉 기혼 여성이었다(Pinson 1964: 21-22). 이러한 유급 위탁 가정은 미혼모 시설 및 입양 기관과 연계되어 있었다. 미혼모 시설에는 보육 시설이 없었다. 과거 복음주의 기독교에 기초해 미혼모들을 돕던 여성  종사자들과 달리 미혼모 시설은 엄마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 아이와 자립하여 살 수 있도록 돈과 음식, 옷 등을 친절하게 나누어주는 복지사들은 없었다. '아기 퍼가기 시대'에는 미혼모와 아기의 애착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아기를 가지려는 자의식에 가득 찬 결혼한 부부(불임이거나 또는 다른 이유가 있는)에게 필요한 것, 그들이 원하고 요구하는 것, 그것을 충족시켜 줄 미혼모가 낳은 신생아에게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었다. 특히 입양이 아동 복지의 한 분야로서 인정받고, 그 분야에서 일하는 입양 종사자들이 '미혼모 전문가'로 존중받도록 하고, 새로운 학문으로 등장한 사회 복지 분야에서 자신들의 전문성을 키워나가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엄마와 아기를 분리하여 결국 엄마들이 입양으로 아이를 상실하게 하는 전략을 통해 자신들의 경력을 쌓아 나갔다(Kunzel 1993: 169). 


   물론 모든 미혼모들이 시설로 보내진 것은 아니다. 어떤 미혼모는 자기 집에서 격리된 생활을 했다. 가령 지하,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거나 먼 친척 집에 보내진 후 아기를 낳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드문 경우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혼자 지내기도 했다. 이들의 거주 형태는 달랐지만 '아기 퍼가기 시대'의 모든 백인 미혼모는 사회복지사와의 만남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아기를 포기하라는 세뇌를 피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입양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Marshall & McDonald 2001:4: Carp 1998: 116).


   미혼모 시설에 입소한 후 오리엔테이션 기간이 끝나면 일주일에 2시간 외출을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보호자가 따라붙었으며 장부에 외출과 귀가 시간을 적어야 한다. 그 밖에 기상 시간, 식사시간, 취침 시간 등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매일 밤에는 취침 점검이 있다. 식단표에 있는 음식 외에는 먹을 수 없고, 사전 허락 없이 방문객은 찾아올 수 없다. 전화는 걸 수도 받을 수도 없다. 간호사 소견이 없는 한, 낮 동안 방에 들어가 있으면 안된다. 시설 '입소자'인데 청소나 허드렛일도 해야 한다. 출입문에는 자물쇠도 달려 있다. 담장 너머 저편에 있는 친구들의 얼굴을 담장 안에서 볼 뿐이다.


   담장 안에서, 감옥에 갇힌 것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미혼모는 세상과 가족과 친구들과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아이 아빠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 있다. 아이 아빠는 이미 그녀를 버리고 떠났겠지만. 설사 떠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시설에 있는 임신한 여자친구를 만날 수 없었다. 아이 아빠와 전화 통화도, 면회도, 편지도 어떤 형태의 연락도 허용되지 않았다. 남자 친구가 연락하고 싶어 한들, 여자친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전화나 편지로 연락할 방법도 알아낼 길이 없었다. 어느 날 그녀는 그냥 없어져 버린 것이다. (254~258쪽) 




미혼모는 "사고를 개조"한다는 의미의 세뇌를 당하고 아기 포기와 입양을 하겠다고 결정을 강요 당했다. 아이를 입양 보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면서 매일매일 밤이고 낮이고 똑같은 메세지가 끊임없이 반복된다.선택의 여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여기에 깊이 관여한 사람이 입양 복지사들, 입양 종사자들 - 입양 기관 종사자들, 변호사, 판사, 입법에 관련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입양 종사자들이다 - 인데 이들의 임무는 미국 시민을 돕는 것이다. 미혼모가 양육 보조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아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야 하며, 양육 수당과 부모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또한 직업 훈련을 받고 고용과 주거지원을 도와야 한다. 입양 종사자들은 또 미혼모의 임신. 진통, 분만에 관여한 일에서도 도움을 제공하여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모든 과정에서 그들은 직무를 유기하였고 최후의 선택으로 남겨져야 할 입양만을 최선의 선택으로 강요하였다. 왜 그랬을까? 입양을 담당했던 사회복지사들은 어린 미혼모들 위에 군림하면서 권능을 행사하고 돈을 챙겼다. 물론 변호사, 판사, 입양 기관도 입양 부부들에게서 막대한 돈을 챙겼다. '아기 퍼가기 시대'가 끝난 2000년 입양 산업은 연간 총 15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관련된 어떤 사람이든 입양 산업은 돈이 된다고 생각한다. 역시 '아기 퍼가기 시대' 엄마와 아기의 분리는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고, 오늘날은 더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돈의 권력 관계에서 친모와 아기는 철저히 배제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이익이란 말인가.


미혼모들에게는 '죄', '신경증', '일탈적 행위'를 했다는 프레임을 씌워놓고 '치료'를 강요하면서 감금했다. 또 아기를 키우려는 미혼모들은 판사 앞에서 꾸중을 듣고 죄인처럼 서서 입양 서류에 서명할 때까지 정신병동에 집어 넣겠다는 둥, 소년원에 가둬 두겠다는 둥의 협박을 들어야 했다. 단지 자신의 아이를 키우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말이다. 뿐만 아니라 엄마는 아기를 뺏겼다는, 아기는 버려졌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반인들보다 훨씬 높은 빈도로 외상 후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정서적 무감각, 수면 장애, 우울증, 불안, 과민성, 분노 및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하루에도 몇 번 씩 감금되는 생생한 플레시백을 경험한다", "다시 내 인생이 어느 순간 갑자기 비참하게 중단될까 봐 두려워 장래에 대한 계획도 세우지 못한다", "밤은 최악이었다. 나를 파멸시킬 듯 위협적으로 몰아치는 회오리바람 한가운데 있는 거 같은 고통을 느꼈다", "몸 속에 쇠파이프가 있는 것처럼 그 안으로 통증을 밀어 넣고, 뚜껑을 덮고, 다시 나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용접해 버리는 상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일상적인 일도, 아이를 돌보는 일도, 직장에 가는 일도 전혀 할 수 없는 절대 무능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매 순간 죽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며 몇 주를 보냈다" .... ...


이와 같은 방식이 합법적인가? 이러한 방식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가? 정말 미혼모들에게 선택할 권리가 있었나? 충분히 숙고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나? 이러한 질문은 이미 오래전에 했어야 한다고 작가인 캐런 윌슨-부터바우는 말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도 '아기 퍼가기 시대'를 살았던 미혼 엄마들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지금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입양 당시에 ... 올바른 정보를 받은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듣거나 거짓 정보를 받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누가 진실의 축복을 받았고 누가 거짓 정보를 받았는지에 어떤 규칙이나 원인은 없어 보입니다. 입양 실천 방향이 바뀌고, 입양 후 서비스가 확대되면서 입양 과정 중에 거짓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기만 당한 친부모들은 정신적 외상을 입고 분노(했습니다)... 거짓말을 정당화할 방법은 없습니다. 비공개 입양은 얼마든지 비밀리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일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안됩니다. ... 가장 건설적인 길은 정한 뒤에 마무리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고, 과거의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한 뒤에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 입양 과정에 거짓 정보가 있었음을 아는 순간 친부모는 아이의 또 다른 부분을 도둑맞는 느낌을 갖습니다. 건설적인 길로 나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들을 지지하고 공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Dorner 1997). (280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25-02-13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기장사’는 참 오래도록 어떤 뒷힘과 뒷손이 저지른 끔찍한 짓입니다. 우리나라도 ‘홀트’라는 곳이 쉰 해 남짓 이 짓을 했습니다. 외톨이(고아)가 아닌데 무턱대고 길에서 아이들을 붙잡아서 미국·유럽·호주로 팔아치웠는데, 독재정권이 뒤를 봐주지 않았다면 할 수 없던 짓이지요.

여러모로 보면 ‘미혼모’란 이름은 조금더 안 어울리지 싶습니다. 어느 누구도 ‘미혼부’란 이름을 안 쓰거든요. 그저 ‘아기엄마’인 사람을 사랑하는 길을 배운 바도 없고 배우려고 하지 않던 ‘철없는 아기아빠이되 아기아빠 자리에서 달아낸 사내’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배운 적이 없을 테지요.

멍든 어제를 사랑으로 달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순이와 돌이 모두, 아기를 참사랑으로 맞이하는 새길을 차근차근 배우고 가르치는 자리를 부드러이 열 수 있기를 빌 뿐입니다.

은하수 2025-02-13 18:31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잘 짚어주셨어요.
사실 우리 홀트복지회 이야기도 넘 하고싶었는데
그럼 글이 너무 길어지더라구요!
그것에 대해서도 할말이 너무 많죠!
학교 다니던 시절 합정동 홀트아동 복지회 앞에서 버스 타고 다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더군요. 아동복지란 말이 무색하게요.
이런 이야기는 번역자의 서문에 또 자세히 나와 있어요.
많은 분들이 읽고 되새기는 기회가 되면 좋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아기엄마에 대한 용어에 대해서는 미국에서도 여러차례 논의가 있었더라구요.
친모‘라는 용어를 쓰자고도 했는데 이 말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구요.
용어를 확정하기 참 어려운 문제란 생각이 듭니다.

단발머리 2025-02-13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기 퍼가기 시대‘ 이전에 미혼모들이 ‘엄마가 되는 과정‘을 도와주었던 여성들, 대부분 복음주의를 신봉하는 기독교 여성들이 직업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 입양 전문 사회복지사들에게 ‘쫓겨 나는‘ 과정에 관심이 많이 갔어요. 마녀 사냥과 더불어 산파들이 출산 현장에서 쫓겨나고 남성 의사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 기억나더라구요.
은하수님이 정리해 주신 내용 보니 제가 지금 읽고 있는 내용과 겹쳐져서 더 쉽게 이해하면서 쭉쭉 읽어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완독 축하드립니다! 현재 스코어, 1등이신걸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은하수 2025-02-13 23:08   좋아요 1 | URL
심지어 그 복지사란 사람들이 대부분 교육을 받은 미혼의 여성이란 것이 저도 무척 안타까웠어요. ㅠㅠ
사실 이 책도 어느 쪽이든 할말이 너무 많죠. 우리 여성들에게는요.
다른분들께서 많이 읽으시고 다른 리뷰 올려주시면 좋겠어요.
또 다른 관점을 볼수 있을거 같아 기대되네요.
리뷰 기다릴게요^^
 

20장 | 조각내기 ~~

˝강요된 입양˝이 비단 아기를 포기한 미혼모 어머니들에게서만이 아니라 입양 보내진 아기들에게서도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 여러 결과를 통해 증명된다.

모든 것을 잊고 살 것이라고 확신했던 사회복지사들의 말과 달리 친생부모는 상실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미혼모들은 입양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해 줄 것이라는 복지사들의 말을 믿었지만, 입양 경험은 상처를 남겼고,
아기를 포기했다는 사실은 미혼모들이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문제로 남았다.
입양 보내진 아기들은 여전히 어머니들 마음 속에 슬픔으로 남아 있고, 미혼부모가 느끼는 죄책감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Penny 1988)




2014년, 심리학 교수 히진스 박사는 "강요된 입양"으로 인해서 친생모와 입양된 아기들이 평생 그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연구를 근거로 과거 입양 관행을 비판했다. 입양 연구에 참여한 미혼모 중에는 더 심한 경험, 즉 의료 전문가들에게 성폭행이나 의료적 학대를 당하거나 방치되기도 했다(침대에 묶이거나, 강압적으로 제지당하거나, 베개로 얼굴 부위를 눌리거나, 침대 시트를 말아서 아기와 산모 사이에 세워 놓고 산모가 아기를 보지 못하게 한 일도 있었다). 그 밖에도 더 많은 비윤리적관행이 있었고 이는 미혼모들에게 심리적 외상을 남겼다.
- P207

충분한 정보를 참조하며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약물을 투여하여 훼손시키거나, 출산한 아기가 
죽었다고 친생부모를 속이거나,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으로 입양 동의를 받아내거나(또는 아무 동의 없이 입양을 보내거나), 의료 실험에 입양될 아기를 사용하거나, 학대적인 부모에게 입양 보내거나, 입양 보내진 상황과 경위에 대해 입양인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강요된 입양은 심리적·정서적 영향과 관계가 있는데 가령 감정조절 장애, 슬픔과 상실감, 외상 후 스트레스, 정체성과 애착 장애, 인격 장애 등 ... 
미혼모들이 정신질환으로 고통받은 확률은 평균보다 높았다. (Higgins 2014) - P208

입양이 장기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상당히 높은 비율의 입양인들이 성장 후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치료 센터에 입원하는 사례가 증명한다.

상당히 많은 청소년 및 성인 입양인이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치료를 목적으로 치료 센터에 입원한다. 예일대학 정신과 병원 및 여러 다른 병원의 의사들로부터 치료 중인 성인 중의 3분의 1에서 4분의 1 정도가 입양인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Lifton 1988[1979]:45) - P2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