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리빈The Jelly-Bean(F. 스콧 피츠제럴드)
1 짐 파월은 젤리빈*이었다. 그를 좀 더 매력적으로 그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런 식으로 속이는 건 정직하지 못하다고 느낀다. 짐 파월은 태생부터, 뼛속까지, 99.99퍼센트 순도의 진짜 젤리빈이었다. 그는 젤리빈들이 거리에서 당당히 어깨 펴고 활보하던 시절에 자랐다. 일 년 열두달 내내 무더위가 가시지 않는 메이슨-딕슨 선** 이남, 젤리빈들이 우글대는 어느 느긋한 마을에서 말이다.
*젤리빈: 겉이 딱딱하고 속이 빈 젤리로 된 콩 모양의 과자. 겉모습은 멀쩡하지만 내실은 없고 미래에 대한 목표 없이 빈둥거리는 젊은 남자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메이슨-딕슨 선: 미국 북부와 남부의 경계를 상징하는 선으로, 역사적으로는 노예제 찬반 기준선으로 여겨졌다.
- P201
짐은 젤리빈이었다. 재차 강조하는 이유는, 그 말이 어쩐지 귀에 듣기 좋기 때문이다. 마치 오래된 동화의 첫 문장처럼 들리지 않는가? 짐이 괜찮은 사람일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그 말을 들으면, 머릿속에 짐의 동그랗고 탐스러운 얼굴이 떠오르고, 모자 위로는 온갖 잎사귀와 채소가 자라나는 기묘한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실제의 짐은 키가 크고 말랐으며, 당구대에 몸을 기댄 채 살아온 세월 덕에 허리가 휘어 있었다. 북부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그는 ‘모퉁이에 서 있는 백수‘쯤 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남부, 특히 여전히 남군의 향취가 남아 있는 땅에서 ‘젤리빈‘이라는 단어에는 조금 다른 뉘앙스가 있다. 젤리빈이란, 인생을 빈둥거리며 보내는 사람을 뜻한다. 일하지 않고, 뭔가를 이루려 하지도 않으며, 그저 "나는 빈둥거리고 있다", "여태까지 그랬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 말이다. - P202
결국 두 사람은 조건을 정했다. 짐이 여자애들 앞에서 놀림감이 되지 않게, 무도회장 구석 벤치에 앉아 구경만 하고,클라크는 틈날 때마다 짐에게 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밤 열시, 짐은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무도회장 한쪽 벤치에 앉아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공손하게 거리감을 두고 무도회장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마음과 주변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탈의실에서 하나둘씩 나오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마치 색색의 새들처럼, 몸을 곧게펴고 드레스를 매만지며 등장했다. 파우더를 가볍게 두드린 어깨 너머로, 무도회장 가장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들, 일종의 보호자이자 감시자에게 살짝 미소를 건넸고, 동시에 방안을 재빨리 훑어보며 자신의 등장에 대한 반응을 살폈다. 그러고는 다시 새처럼, 기다리고 있는 남자들의 팔에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 P212
짐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문제는 그가 건넨 ‘끝내주는 옥수수 위스키‘였다. 그는 낸시가 진짜로 은행 계좌를 두 개나 가질 만한 나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위태로운 내기에 자신이 끼어들었다는 사실이 점점 그를 조여 왔다. 시계가 두 시를 알리자, 짐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대신 던지면 안 될까?" 그는 긴장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낸시는 마치 기운이 다 빠진 듯 멍한 얼굴로 주사위를 그에게 툭 던졌다. "좋아, 어른스러운 내 친구! 다이애나 매너스 부인처럼 말해 볼게. ‘어디 한번 던져봐, 젤리빈.‘ 내 운은 이제 다한 것같거든." "테일러 씨, "짐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저기 있는 수표랑 현금 걸고, 저랑 한판 하시죠." 삼십 분쯤 지나자, 낸시가 앞으로 비틀거리며 다가와 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내 운을 네가 다 훔쳐 갔구나."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짐은 테이블 위에 있던 마지막 수표들을 하나로 모아 손에 쥐더니, 그것들을 잘게 찢어 바닥에 흩뿌렸다. 그제야 누군가 흥얼거리듯 노래를 시작했고, 낸시는 의자를 뒤로 밀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P229
잭슨가 당구장 위, 틸리 정비소 2층에 있는 방, 그 삭막한 공간은 하루 종일 아래층에서 울려 퍼지는 기계음과, 세차를 하며 검둥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로 가득했다. 방 안에는 침대 하나와 오래된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몇 권의 책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조 밀러의 《아칸소로 향하는 완행열차》, 옛날 글씨체로 주석이 빼곡하게 달린 낡은 판본의 《루실》, 해럴드 벨 라이트의 <세상의 눈》, 그리고 앞장에 ‘앨리스 파월‘이라는 이름과 ‘1831년‘이 적힌 오래된 성공회 기도서 한 권. - P233
짐이 차고에 들어설 무렵, 동쪽 하늘은 잿빛이었다. 하지만 그가 방 안의 전등을 켜고 다시 끄는 사이, 창밖은 어느새 선명하고 깊은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불을 끄고 창가로 다가가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는 점점 짙어지는 아침 풍경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찾아온 건 공허함이었다. 이전까지는 느껴본 적 없는, 삶이 허무하다는 먹먹한 통증. 어딘가에서 갑자기, 자신을 가로막는 벽이 솟아오른 듯한 기분. 그 벽은 이 쓸쓸한 방 안의 흰 벽처럼 구체적이고 분명했다. 그 벽을 자각한 순간, 그가 믿어왔던 삶의 낭만, 무심한 척하며 살아온 태도, 아무 계산 없이 베풀던 너그러움, 가게마다 익숙한 농담을 건네며 거리를 천천히 거닐던 감성, 흐르는 시간에 애틋함을 느낄 줄 알던 마음까지… 모두 무너져 내렸다. - P233
그런 젤리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젤리빈‘이라는 이름마저 이제는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메리트는 자신을 분명 깔봤을 것이다. 낸시가 새벽녘에 남긴 그 키스조차, 메리트의 눈에는 질투보다는 경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낮췄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겐 모욕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젤리빈 자신도, 어쩌면 그녀를 위해 정비소에서 익힌 속임수를 써먹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그녀의 도덕적 얼룩을 대신 짊어진 셈이었다. 그녀는 다시 깨끗해졌고, 남은 얼룩은 온전히 그의 몫이 되었다. 새벽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워오자, 그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침대 모서리를 꼭 움켜쥔 채, 그는 외쳤다. "난・・・ 낸시를 사랑해. 젠장."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목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스르르 풀렸다. 공기가 맑아졌고, 아침 햇살은 방 안을 환히 채워왔다. 그는 얼굴을 베개에 묻고, 낮고 무겁게 울기 시작했다. - P234
짐은 말없이 차 옆면에 손을 올렸다. 길고 마른 손가락이 차체를 움켜쥐었고, 손끝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럼・・・ 테일러가 낸시가 건넨 수표들. 그게 그녀 아버지이름으로 된 거라는 걸 알아챘단 말이야?" 이번엔 클라크가 놀란 얼굴로 짐을 바라보았다. "너, 그 얘기는 아직 못 들었구나?" 짐의 굳은 얼굴로 대답은 충분했다. "세상에나." 클라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살짝 과장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젯밤 그 넷이 옥수수 위스키를 한병 더 비우고 완전 취해서, 마을 사람들 모두한테 뒤통수 제대로 치자고 작정했대. 결국, 낸시랑 메리트가 오늘 아침 일곱 시에 록빌에서 결혼해버렸어." 짐의 손가락이 짚고 있던 차체에 작지만 선명한 자국이남았다. "결혼... 했다고?" "그렇다니까. 낸시가 술 깨고 나서 울면서 돌아왔다더라. 완전히 겁에 질려서, 이건 다 실수였다고 했대. 라마 박사는 처음엔 총이라도 꺼낼 기세였는데, 어찌어찌 수습을 해서, 결국 둘은 오늘 오후 두 시 반 기차를 타고 서배너로 갔어." 짐은 눈을 감았다. 밀려오는 구역질을 가까스로 참았다. - P238
오후 세 시의 거리는 뜨거웠다. 네 시가 되어도 쏟아지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4월의 먼지는 한때 태양마저 덮을 듯 일었다가, 다시금 공기 속을 부옇게 메웠다. 오래된 농담처럼 되풀이되던 지루한 오후누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네 시 반 무렵, 거리엔 처음으로 잔잔한 고요가 내려앉았고, 차양 아래와 나뭇가지 사이로 그늘이 길게 드리워졌다. 이런 날씨 속에서는 어떤 일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인생도 날씨와 비슷한 것일지 모른다. 모든 게 하찮아 보이는 무더운 날들을 견디다 보면, 언젠가 지친 이마 위로 조용히 내려앉는 누군가의 손길 같은 시원한 하루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게 되는 법이다. 이 모든걸 단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있는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이 남부 조지아에는 그런 기운이 흐른다. 그것이야말로 이곳 사람들이 오래도록 견뎌 온 삶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얼마 뒤, 젤리빈은 잭슨가 어귀에 있는 어느 당구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오래된 농담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틀림없이 있을 테니까.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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