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에 꼭 가고 싶다 생각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에세이... 실제로 갈지는 미지수지만...
내년 2월 결혼을 앞둔 딸램은 처음 신혼여행으로 이탈리아를 간대더니 뉴질랜드를 거쳐 급기야 이 책을 읽고 나서는 핀란드로 바뀌어 버렸다.
딸램이 먼저 읽고 내게 빌려 주었는데 얼른 읽고 돌려주면 자기 남자친구에게도 꼭 읽혀야겠다고 말했다. 자기처럼 생각이 바뀔 거라 자신한다나~~~^^
딸이나 나는 작가인 장류진의 감정에 깊이 동화되어 버린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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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작가 천쉐陳雪의 《악녀서》를 읽는다.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 어제 받아왔다.

천쉐 작가는 1995년 데뷔작 《악녀서》가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중화권의 대표적인 퀴어 문학 소설가로 자리매김했다. 이 작품을 처음 발표한 30 년 전부터
자신의 성적취향을 숨긴 적이 없는 동성애자이다.
성소수자 인권향상과 대만의 동성결혼 법제화를 위한 사회운동에 앞장서며, 자신의 삶과 목소리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산문집 등을 통해 공유해왔다.


지난 22일 막을 내린 서울국제도서전 참석을 계기로 처음 한국을 찾은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볼 수 있었다.









1. 천사가 잃어버린 날개를 찾아서

처음 아쑤阿蘇를 만났을 때, 그녀와 내가 같은
유형이라는 것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둘 다 날개 잃은 천사였다. 우리 눈은 비상을 갈망했다.
그래야 일정한 고도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맨발은 뜨겁고 단단한 대지 위를 걸었지만 인간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방향을 잃어버렸다. - P21

그런데 왜 10년 전에 출간된 책을 다시 출판하는 걸까?
이 책은 일찌감치 절판되어, 시중에 돌아다니는 것은 대부분 복사판이고 더 많은 각종 동성애 혹은 비동성애 소설집이 약속이나 한듯이 내가 가장 먼저 발표한 「천사가 잃어버린 날개를 찾아서」를 선정하여 수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무상의 소홀함 탓에 나는 영문으로 가득한 그 빽빽한 계약서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고 서로 다른 두 권의 영문 선집에는 서로 다른 번역으로 이 작품을 수록하고 있었다. 독자들은 수시로 내게 편지를 보내 악녀서와 절판된 나의 또 다른 작품들을 사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징징서고晶晶書庫서점 주인인 아저阿哲는 내게 "적지 않은 독자가 서점으로 직접 돈을 보내오면서 책 좀 구해달라는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일부 젠더 연구 학자들은 다른 나라에서 ‘합법적인‘ 『악녀서 원고를 살 수 없느냐고 물어오기도했다. 나의 충실하고 열정적인 독자들은 헌책방을 뒤지기도 하고 친구에게서 빌려 읽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도서관에 가서
‘훔치기도‘ 했다. - P15

긴 시간의 세례를 거치면서 나는 악녀서』가 나 자신에게, 내가 존재하는 사회와 1990년대의 전 지구적인 젠더 연구에 여전히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악녀서」에 대한 관심과 논쟁은 내게 개인적으로 초조감을 유발하긴 했지만 글을 계속 써나가도록 엄청난 힘을 주기도 했다. - P15

한 소설가의 첫 번째 작품이 이처럼 선명한 기치를 
내걸었던 것에 대해서는 분명 애증이 교차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더 많은 작품으로 더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하여 출판사와 내가 받은 신호는 수많은 독자가 어떻게든 이 책을 읽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독자들의 열정과 성의를 우리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재출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신판자서 소설의 운명 중에서 - P16

얼마나 많은 날이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낮에는 항상 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모든 사람의 몸에서 아쑤의 그림자를 찾다가 밤이 오면 침대 위에서 아쑤의 호흡을 복습했다.
그러나, 점점. 내 기억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정말로 존재했는지 아니면 한바탕 꿈이었는지조차 확정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 있을 거야."
아쑤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답은 이 한마디에 담겨 있었다.
그곳이 어디일까?
반드시 찾아야 했다. 그곳을 찾기 위해 나는 수없이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탔다. 심지어 비행기를 탈 수도 있었다. 어떤 방법들을 써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어떤 목소리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나는 점점 그곳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 P50

문득 내가 어느 묘지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덤인가? 알고 보니 내가 찾으려 애쓴 것은 무덤이었다.
우리 아빠의 무덤 옆에 또 다른 무덤이 조성되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똑바로 서서 대리석 묘비에 새겨져 있는 글자들을 살펴보았다.
"쑤칭위蘇靑玉...."
쑤칭위, 그건 우리 엄마 이름이었다.
엄마, 내가 돌아왔어요. 여러 해 엄마를 떠났다가 결국 돌아왔어요.
나는 엄마의 무덤 앞에 누워 엄마의 자궁 속인 것처럼 몸을 말았다. 그러고는 중얼중얼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감정을 쏟아냈다.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말이 너무 느리고 힘들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떠돌고 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땅이 충분히 의지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엄마에 대한 내 감정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 P51

"엄마 사랑해요. 더없이 확실하게 진심으로 사랑해요."
희미하게 아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늘 끝에서 들려오는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 위의 구름이 점점 뭉쳐 익숙한 형상을 만들고는 좌우로 흔들렸다. 그렇게 흔들리는 것은……………

한쌍의 날개였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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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 작가의 작품은 《다른 사람》을 읽었다.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았다고 기억하는데
4 년만의 신작이라길래...

요즘은 소설이 눈에 안들어오고
스토리에 집중이 안된다. ㅠㅠ
6개월째 매일 수영을 다녔는데 내 욕심이었나 싶다.
체력을 키우고 싶은 욕심과 주 이틀로는 아무래도 늘지 않는 수영실력에 지쳐 열심히 매일 가면 좀 늘거 같은 생각에 그리했던건데... 아니었다!
체력은 안 늘고 - 아 수영은 평영빼고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 - 근육도 안 늘었고 오히려 몸무게만 줄었다. 그래서 더 힘든거 아닌가 싶어 다음 분기엔 주 3일만 등록했다. 조금 여유를 가져보기로 했다. 시간적으로도 그리고 체력소모도 줄여보자는 목적으로 ~~
일단 빠진 체중을 좀 늘려야하는데 꾸역꾸역 한숟가락 더 먹는게 진짜 힘들다.

근데... 수영을 하면 키가 크나?
처음 들었다 ㅎㅎ








프롤로그

교복 이야기부터 하고 싶다.

열다섯 가을, 살이 찌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센티미터 넘게 자랐다. 지금 생각해도 꽤나 황당한 일인데, 정말로 단 몇 달만에 그렇게 됐다. 조짐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래. 분명히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가슴에 멍울이 지며 통증이 일었고, 밤마다 종아리가 저렸다. 무릎과 허리가 아팠다. 그러더니 어느날 갑자기 눈높이가 달라졌다. 어른들을 볼 때 더 이상 고개를 들어올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그냥 내 앞에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작았던 것처럼. - P11

첫눈이 왔다. 나는 초경을 했다.
그날부터였다. 급속도로 살이 찌기 시작했다. 몸의 부피 자체가 달라졌다. 두툼하고 풍만하게, 길고 거대하게. 이전까지나는 149센티미터 언저리를 겨우 웃돌던 빼빼 마른 여자아이였다. 그래서인지 보는 사람마다 걱정 아닌 걱정을 내비치며부모님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했다. "저렇게 작아서 어쩌려고 그래? 한약이라도 먹여야 하는 거 아냐?" 그 말들이 신경쓰였던 건지, 아니면 본인들도 걱정이 되기는 했던 건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마자 부모님은 갑자기 나를 수영 강습에 보냈다. 성장판을 자극하는 데는 수영만 한 운동이 없다는 조언을 들은 모양이었다. 우리 집 형편치고는 꽤 큰 투자였는데, 불행히도 효과가 없었다. 나는 1센티미터도 자라지 않았다. ... - P12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그렇지만, 사실 내 부모님, 이수지와 박이환은 마음이 잘 맞는 부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주 싸웠고, 무슨 일이 생기면 아주 쉽게 서로를 탓했다. 나를수영장에 보낼 때도 그랬다. 엄마는 돈을 더 들여서 개인강습을 시켜보자고 말했고, 아빠는 운동은 단체로 함께 배우는 거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두 사람은 옥신각신거리다 짜증을 내며 거의 동시에 서로에게 이렇게 외쳤다.
"그래서 쟤 키 안 크면 누가 책임질 거야. 네가?"
하지만 그해 어느 주말 아침, 내가 곰처럼 거대한 몸을 이끌고 거실로 나갔을 때, 나는 이수지와 박이환에게서 처음으로똑같은 표정을 봤다. 그래. 단 한 번도 마음이 일치해본 적 없는 두 사람에게서 같은 얼굴을 봤다. 질린다는 표정. 조금 무섭다는 얼굴.

이렇게.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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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연수>,<달까지 가자>에 이어 네번째 만나는, 장류진의 에세이 작품이다.

이달 초 엄마와 튀르키예 여행을 다녀오고 단단히 병이 나서 몸이 너무 많이 축나 버렸다. 기력을 회복하는 동안 책읽기에 대한 동력을 상실해 버린 느낌으로 지낸 시간이었다. 책도 사고 빌려다 놓았는데 당최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집중을 할 수가 없어 차라리 대놓고 딴짓에 열중했다.

그 딴짓이란...
잔디밭 사이와 정원의 꽃과 나무들 사이 잡초도 열심히 제거하고 꽃이 지고나서 훌쩍 커버린 연산홍들 대거 전지작업하고 나니 작은 정원이 아주 깔끔하고 시원해져서 보기에 좋다.
몇 그루 되진 않지만 수국이 만개했다. 6월은 수국의 계절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작년에 심었던 수국이 키도 두 배 이상 자랐고, 퉁퉁한 아들 얼굴보다 더 크게 꽃을 피웠다. 지금 우리 마당의 대표 얼굴이다. 오며가며 매일 들여다보고 사진 찍어 기록을 남긴다. 소소한 즐거움이지만 한편으론 하얀 수국 얼굴이 어찌나 크고 탐스러운지... 뿌듯함을 만끽하기에 알맞게 몹시 어여쁘다고 매번 생각한다.

작년에 만들었던 작은 화단들에 꽃은 빈약하고 듬성듬성 빈자리가 많아 잡초가 무성해지려했는데 지피식물을 심으면 잡초번식을 막을 수 있다며 수영장 친구에게 나눔받은 보라색 아주가를 3-4포기 심었었다. 처음에 어이없을 정도로 빈약하던 녀석들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번식을 해서 오히려 솎아내주기까지 했다. 어찌나 세력확장을 잘하는지 아주 깜짝 놀랐지 뭔가... 무서울 정도다. 덕분에 잡초는 확실히 잡은 거 같다.^^

아주가, 돌나물을 솎아내어 올 봄 조성한 대문 옆 화단으로 몇 포기 옮겨 심어 주었다. 내년에 얼마나 세력을 확장하게 될지 ... 기대해 본다.

엄마와의 튀르키예 여행은 고난 그 자체였다.
여행을 누구와 가느냐 하는 문제가 더없이 중요한단걸 실감했다. 친구들과 다시 여행가고 싶다.
친구들과 온 여행이었다면 지금 얼마나 즐겁고 신났을지 매번 생각한 여행이었다. 그럼에도 다시 새로운 여행을 꿈꾸는 나여~~
이번엔 핀란드?
그건 아니지만... 언젠간 나도 갈수 있으려나
꿈꾸면 이루어지지 않으려나...^^
대학시절, 핀란드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를 보내고 들아왔고, 그 후 핀란드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품고 또다시 그때 그 시절의 친구와 리유니언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아직은 초반이지만... 핀란드라는 다소 생소한 이 나라가 왜 그리 좋고 자꾸 가고 싶은 곳이 된 건지
너무 궁금하다.


2023년 7월 13일 오후 5시. 나는 새로 장만한 새하얀 캐리어를 끌고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인천공항 출국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귓가에 흘러나오는 노래는나의 오랜 친구 예진이가 보내준 ‘2000년대 추억의 팝‘ 유튜브 재생목록이었다. 레이디 가가의 <Poker Face〉<Paparazzi>,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Piece of Me〉<Gimme More>, 리한나의 <Umbrella> 등을 연달아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였고 발걸음도 까불대며 리드미컬해졌다. - P20

이 노래들의 공통점은 2008년경 미국에서 발매되어 널리 사랑받은 노래라는 것이다. 그전까지의 나는 팝에 대해 잘 몰랐지만 그 무렵 유행한 곡들만큼은 너무나 익숙했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2008년 당시 내가해외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게 미국인 건 아니었고…………… 좀 생뚱맞지만 핀란드였다. - P21

그 후로 15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 핀란드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온 내 친구 예진이와 열흘간의 여행을앞두고 있었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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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빈The Jelly-Bean(F. 스콧 피츠제럴드)

1
짐 파월은 젤리빈*이었다. 그를 좀 더 매력적으로 그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런 식으로 속이는 건 정직하지 못하다고 느낀다. 짐 파월은 태생부터, 뼛속까지, 99.99퍼센트 순도의 진짜 젤리빈이었다. 그는 젤리빈들이 거리에서 당당히 어깨 펴고 활보하던 시절에 자랐다. 일 년 열두달 내내 무더위가 가시지 않는 메이슨-딕슨 선** 이남, 젤리빈들이 우글대는 어느 느긋한 마을에서 말이다.


*젤리빈: 겉이 딱딱하고 속이 빈 젤리로 된 콩 모양의 과자. 겉모습은 멀쩡하지만 내실은 없고 미래에 대한 목표 없이 빈둥거리는 젊은 남자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메이슨-딕슨 선: 미국 북부와 남부의 경계를 상징하는 선으로, 역사적으로는 노예제 찬반 기준선으로 여겨졌다.

- P201

짐은 젤리빈이었다. 재차 강조하는 이유는, 그 말이 어쩐지 귀에 듣기 좋기 때문이다. 마치 오래된 동화의 첫 문장처럼 들리지 않는가? 짐이 괜찮은 사람일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그 말을 들으면, 머릿속에 짐의 동그랗고 탐스러운 얼굴이 떠오르고, 모자 위로는 온갖 잎사귀와 채소가 자라나는 기묘한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실제의 짐은 키가 크고 말랐으며, 당구대에 몸을 기댄 채 살아온 세월 덕에 허리가 휘어 있었다. 북부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그는 ‘모퉁이에 서 있는 백수‘쯤 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남부, 특히 여전히 남군의 향취가 남아 있는 땅에서 ‘젤리빈‘이라는 단어에는 조금 다른 뉘앙스가 있다. 젤리빈이란, 인생을 빈둥거리며 보내는 사람을 뜻한다. 일하지 않고, 뭔가를 이루려 하지도 않으며, 그저 "나는 빈둥거리고 있다", "여태까지 그랬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 말이다. - P202

결국 두 사람은 조건을 정했다. 짐이 여자애들 앞에서 놀림감이 되지 않게, 무도회장 구석 벤치에 앉아 구경만 하고,클라크는 틈날 때마다 짐에게 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밤 열시, 짐은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무도회장 한쪽 벤치에 앉아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공손하게 거리감을 두고 무도회장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마음과 주변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탈의실에서 하나둘씩 나오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마치 색색의 새들처럼, 몸을 곧게펴고 드레스를 매만지며 등장했다. 파우더를 가볍게 두드린 어깨 너머로, 무도회장 가장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들, 일종의 보호자이자 감시자에게 살짝 미소를 건넸고, 동시에 방안을 재빨리 훑어보며 자신의 등장에 대한 반응을 살폈다.
그러고는 다시 새처럼, 기다리고 있는 남자들의 팔에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 P212

짐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문제는 그가 건넨 ‘끝내주는 옥수수 위스키‘였다. 그는 낸시가 진짜로 은행 계좌를 두 개나 가질 만한 나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위태로운 내기에 자신이 끼어들었다는 사실이 점점 그를 조여 왔다. 시계가 두 시를 알리자, 짐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대신 던지면 안 될까?" 그는 긴장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낸시는 마치 기운이 다 빠진 듯 멍한 얼굴로 주사위를 그에게 툭 던졌다.
"좋아, 어른스러운 내 친구! 다이애나 매너스 부인처럼 말해 볼게. ‘어디 한번 던져봐, 젤리빈.‘ 내 운은 이제 다한 것같거든."
"테일러 씨, "짐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저기 있는 수표랑 현금 걸고, 저랑 한판 하시죠."
삼십 분쯤 지나자, 낸시가 앞으로 비틀거리며 다가와 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내 운을 네가 다 훔쳐 갔구나."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짐은 테이블 위에 있던 마지막 수표들을 하나로 모아 손에 쥐더니, 그것들을 잘게 찢어 바닥에 흩뿌렸다. 그제야 누군가 흥얼거리듯 노래를 시작했고, 낸시는 의자를 뒤로 밀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P229

잭슨가 당구장 위, 틸리 정비소 2층에 있는 방, 그 삭막한 공간은 하루 종일 아래층에서 울려 퍼지는 기계음과, 세차를 하며 검둥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로 가득했다. 방 안에는 침대 하나와 오래된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몇 권의 책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조 밀러의 《아칸소로 향하는 완행열차》, 옛날 글씨체로 주석이 빼곡하게 달린 낡은 판본의 《루실》, 해럴드 벨 라이트의 <세상의 눈》, 그리고 앞장에 ‘앨리스 파월‘이라는 이름과 ‘1831년‘이 적힌 오래된 성공회 기도서 한 권. - P233

짐이 차고에 들어설 무렵, 동쪽 하늘은 잿빛이었다. 하지만 그가 방 안의 전등을 켜고 다시 끄는 사이, 창밖은 어느새 선명하고 깊은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불을 끄고 창가로 다가가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는 점점 짙어지는 아침 풍경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찾아온 건 공허함이었다. 이전까지는 느껴본 적 없는, 삶이 허무하다는 먹먹한 통증. 어딘가에서 갑자기, 자신을 가로막는 벽이 솟아오른 듯한 기분. 그 벽은 이 쓸쓸한 방 안의 흰 벽처럼 구체적이고 분명했다. 그 벽을 자각한 순간, 그가 믿어왔던 삶의 낭만, 무심한 척하며 살아온 태도, 아무 계산 없이 베풀던 너그러움, 가게마다 익숙한 농담을 건네며 거리를 천천히 거닐던 감성, 흐르는 시간에 애틋함을 느낄 줄 알던 마음까지… 모두 무너져 내렸다. - P233

그런 젤리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젤리빈‘이라는 이름마저 이제는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메리트는 자신을 분명 깔봤을 것이다. 낸시가 새벽녘에 남긴 그 키스조차, 메리트의 눈에는 질투보다는 경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낮췄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겐 모욕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젤리빈 자신도, 어쩌면 그녀를 위해 정비소에서 익힌 속임수를 써먹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그녀의 도덕적 얼룩을 대신 짊어진 셈이었다. 그녀는 다시 깨끗해졌고, 남은 얼룩은 온전히 그의 몫이 되었다.
새벽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워오자, 그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침대 모서리를 꼭 움켜쥔 채, 그는 외쳤다.
"난・・・ 낸시를 사랑해. 젠장."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목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스르르 풀렸다. 공기가 맑아졌고, 아침 햇살은 방 안을 환히 채워왔다. 그는 얼굴을 베개에 묻고, 낮고 무겁게 울기 시작했다. - P234

짐은 말없이 차 옆면에 손을 올렸다. 
길고 마른 손가락이 차체를 움켜쥐었고, 손끝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럼・・・ 테일러가 낸시가 건넨 수표들. 그게 그녀 아버지이름으로 된 거라는 걸 알아챘단 말이야?"
이번엔 클라크가 놀란 얼굴로 짐을 바라보았다.
"너, 그 얘기는 아직 못 들었구나?"
짐의 굳은 얼굴로 대답은 충분했다.
"세상에나." 클라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살짝 과장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젯밤 그 넷이 옥수수 위스키를 한병 더 비우고 완전 취해서, 마을 사람들 모두한테 뒤통수 제대로 치자고 작정했대. 결국, 낸시랑 메리트가 오늘 아침 일곱 시에 록빌에서 결혼해버렸어."
짐의 손가락이 짚고 있던 차체에 작지만 선명한 자국이남았다. 
"결혼... 했다고?"
"그렇다니까. 낸시가 술 깨고 나서 울면서 돌아왔다더라. 완전히 겁에 질려서, 이건 다 실수였다고 했대. 라마 박사는 처음엔 총이라도 꺼낼 기세였는데, 어찌어찌 수습을 해서, 결국 둘은 오늘 오후 두 시 반 기차를 타고 서배너로 갔어."
짐은 눈을 감았다. 밀려오는 구역질을 가까스로 참았다. - P238

오후 세 시의 거리는 뜨거웠다. 네 시가 되어도
쏟아지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4월의 먼지는 한때 태양마저 덮을 듯 일었다가, 다시금 공기 속을 부옇게 메웠다. 오래된 농담처럼 되풀이되던 지루한 오후누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네 시 반 무렵, 거리엔 처음으로 잔잔한 고요가 내려앉았고, 차양 아래와 나뭇가지 사이로 그늘이 길게 드리워졌다. 이런 날씨 속에서는 어떤 일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인생도 날씨와 비슷한 것일지 모른다. 모든 게 하찮아 보이는 무더운 날들을 견디다 보면, 언젠가 지친 이마 위로 조용히 내려앉는 누군가의 손길 같은 시원한 하루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게 되는 법이다. 이 모든걸 단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있는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이 남부 조지아에는 그런 기운이 흐른다. 그것이야말로 이곳 사람들이 오래도록 
견뎌 온 삶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얼마 뒤, 젤리빈은 잭슨가 어귀에 있는 어느 당구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오래된 농담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틀림없이 있을 테니까.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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