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잘치르세요종단‘
이 짧은 문장은 기억될 가치가 있다. 이 문장은 몇 가지 사실을시사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 하나는 이 너무나 평범하고 지극히일상적인 것 같은 인사말이 그때로서는 가장 시급한 통신수단이었던 전보용지에 적혀 배달되었다는 점에 있다. 그는 무슨 큰 시험을 치를 일이 있었던가. 이를테면 사법고시나 외무고시 같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이 전보를 받은 것은 2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앞두고 있을 때였다. 그는 그때 도서관에서 반납받은 도서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전보가 왔다고 알려준 사람은 룸메이트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그는 그 전갈을 받고 무의식적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보았는데, 시간은 저녁 여덟시를 지나고 있었다. - P246

요즘은 축하 전보라는 것도 생기고 하여 사정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전보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뜻밖의 변고나 불길함의 사신처럼 인식되었다. 전보로 알려야 할 정도의 시급한 일은 대개 좋지 않은 일인 경우가 많았다. 박부길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보가 왔다는 소식은 그를 당황하게 했다. 문득 그는 누군가 구체적으로는 어머니의 변고를 예감했었다. 설마하니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가 자신에게 그런 식의 장난기가 묻어나는 전보를 보내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너무나 뜻밖이어서 전보용지를 받아 읽으면서도 잘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 P247

믿어지지 않음, 이야말로 감격의 조건이다. 믿어지지 않았다는것은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기대하지 않았던 일의 뜻밖의 실현은 사람을 감격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붙이기에 충분하다. 감격의 요인은 실현된 일의 내용(크거나 중요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실현된 형식에 있다. 갑작스러움과 의외성이 우리를 감격시킨다. 결코 경망스러운 편이 아닌 그녀가 그런 식의 사사로운 인사말을 전보라는 수단을 동원해서 알린 이 의외의 사건은 무엇을시사하는가. 그녀는 그를 감격시키려고 했던 것일까?음.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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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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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천국》 정유정
역시 정유정.. 가독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구나
감탄하며 읽었다.
인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서사를 쌓아나가는 과정이 탄탄하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전개가 되어서 책장이 넘어가는게 아깝게 느껴졌다.

‘롤라‘라고 하는 가상의 공간에서 체험하는 세상이
영원한 천국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회의적이다. 하지만 그곳이 천국은 아닐지라도 삶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고 싶은 사람들에게 가상의 공간으로서의 천국은 일상화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완전한 행복》에 이은 욕망 3부작의 두번째 작품이니 마지막 완결편도 빠른 시일 내에 출간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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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가 나가던 날, 큰아버지는 그를 앞장세웠다. 그는 다른 친척들과 함께 상여 뒤를 따라 장지까지 갔다. 모두들 숙연한 얼굴이었고, 이상스럽게 조용했다. 곡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슬픈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없었다. - P80

큰아버지가 그의 손에 삽을 쥐여주었다. 그는 처음 겪는 일이었고, 당연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흙을 퍼서 관 위에 뿌리라는 주문을 받고 나서 그는 조금 멈칫거렸다. 사람들은 삥 둘러서서 그가 행동하기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야릇한 눈길들 속에서그는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자신이, 적어도 그 순간, 거기 모인 사람들에 의해서, 매우 특별한 존재로 구별되고 있다는 인식이 그것이었다. 그는 그들과 달랐다. 그들은 그와 달랐다. 적어도 그들의
표정은 그렇게 선언하고 있었다. 너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네가 아니다...... 살아가면서 그가 종종 경험하곤 했던, 세계로부터 이탈되어 나가는 듯한 걷잡을 길 없는 소외감이 그때 처음으로 그를 찾아왔다. - P80

그는 온몸을 빠르게 관통하는 전율에 사로잡혀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했는데, 그것은 세계를 상대로 맞서 있는 한 왜소한 개체의 외로움이 그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에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조용히 떨어졌다. 그 한 방울의 눈물을 타고 몸속의 기가 모조리 순식간에 빠져나가버렸다. 그는 맥없이 자리에 쓰러졌다. 필시 사람들은 오해했다.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고, 감정을 누르며 코를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또 애써 소리 죽인 이런 말도 들렸다.
"불쌍한 것...... 다 알고 있었던가보지………
"그러게나. 이제 저 아이를 어쩔꼬......" - P81

물론 오만이다. 모든 오만의 기본적인 정서는 슬픔과 울분, 또는 슬픈 울분이고 그 뿌리는 좌절감임을 나는 안다. 키가 작아 포도를 따먹을 수 없을 때 어떤 여우는 ‘저 포도는 시다‘라고 말하며 돌아선다. 다른 여우는 ‘포도 따위는 저열한 족속들이나 따먹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돌아선다. 돌아서는 행위는 같지만, 두 경우의 동기는 미묘하게 다르다. - P131

아마도 나는 후자의 여우 편이었으리라. 세상과 나는 맞지 않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너무 추월해버렸기 때문이라는 편집증적인 생각의 한가운데서 좌절감과 울분이 뒤섞인 오만의 안쓰러운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증거도 있다. 가난과 외로움과 근거 없는 적대감의 나날. 그것들은 그 시절 내 삶의 목록이었다. 내 삶의 전부였다. 그것 말고는 달리 가진 것이 없었다. 
아, 빚도 재산이라고 한다면 그런 뜻에서 그것들은 나의 재산이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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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너무 흔하고 친근했다. 어느 집에서 초상이 나면 마을전체가 떠들썩했다. 따라 죽지 못한 후손들의 육체에 씌워진 성긴 의상과 그들의 곡소리만 아니라면, 분주하고 왁자지껄한 모습이 흡사 잔칫집이나 한가지였다. 실제로 어린아이들 눈에는 혼인집과 초상집이 잘 구별되지 않았다. 상여가 마을을 빠져나갈 때 그긴 만장과 사람의 행렬은 아이들을 매혹시켰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야단맞으면서도 그 상여의 행렬을 따라가곤 했다. 죽음은 어떤 걱정도 주지 않았다. 어린 박부길에겐 더욱 그랬다. 삶이 그런것처럼 죽음도 그를 자극하지 않았다. - P68

뒤란의 남자가 마침내 죽었다. 감나무가 밤새 내린 서리를 맞고빨갛게 익은 감을 서너 개씩 떨어뜨리던 가을날 아침이었다. 어느날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난 박부길이 가만가만 뒤뜰로 돌아갈 때만 해도, 그는 떨어진 감을 주울 생각만 했고, 뒤란에 무슨 일이 벌어져 있으리라는 상상 같은 것은 할 수가 없었다. 박부길씨는 그날의 기억을 더듬는 대목에서 또 몹시 망설였다. - P68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겁니다. 뒤채의 방문이 열려 있고, 몸이 반쯤 문지방을 넘어온 채로 그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땅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습니다. 피는 땅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서로 엉겨붙어 웅크리고 있었지요. 나는 보았습니다. 피는 그의 오른쪽 손목에서 나오고있었습니다. 그의 다른 쪽 손에 들린 것은 어이없게도 손톱깎이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숨막히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손톱깎이는.......
왜냐하면 그 손톱깎이는 큰아버지의 책상서랍에 넣어져 있었는데, 그가 그 전날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부길이는 참 착하구나."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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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지 - 정규 4집 EL GRAN ASTOR PIAZZOLLA [디지팩]
피아졸라 (Astor Piazzolla) 작곡, 고상지 (Sang Ji Koh) 연주 / 워너뮤직(WEA)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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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토르 피아졸라와 고상지를 다 좋아해서 고상지의 반도네온으로 연주하는 피아졸라의 탱고 음악을 즐겨 듣고 콘서트도 가끔 간다. 코로나 이전에 콘서트 간 게 마지막이니 꽤 오래전이 되어 버렸다. 가끔 *튜브로 짧은 연주 영상을 보고 듣긴 하지만 아쉬울 때가 많다.


이번 앨범은 피아졸라의 탱고 음악에 경쾌한 팝의 리듬, 드럼과 스트링 오케스트라와 주고 받는 재지(Jazzy)한 느낌의 곡, 피아노와 반도네온, 일렉 기타와 신디사이저로 다양한 사운드를 입힌 편곡이 빛을 발한다.


정통 탱고 리듬이 아니었지만 이번 앨범은 전 곡이 경쾌하고 신나서 가볍게 듣다 보니 시간이 굉장히 짧게 느껴졌고 어느 새 마지막 곡이 끝나버렸다. 고개도 어깨도 살짝씩 흔들며 들을 수 있었다.


악마의 악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고상지의 열정적인 연주 모습을 좋아하는데 이번 앨범도 콘서트장에서 들었다면 아마 훨씬 더 즐겁고 신나게 들을 수 있었을 거 같다. 그래서 더 콘서트 가서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10/12(토) ~ 10/13(일) 서울숲 재즈 패스티벌 2024 라인업에 고상지(마리아 킴 X 고상지)도 이름을 올렸던데 하필 그날은 친구들과 1박 2일 안동 여행 가기로 한 날이지 뭔가.... 아쉽지만 콘서트 직관은 다음 기회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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