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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반생기
양주동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문주반생기/양주동/최측의 농간/글 쓰고 술 마시며 보낸 양주동 일대기~
1
산길을 간다. 말없이
호올로 산길을 간다.
해는 져서 새소리 그치고,
짐승의 발자취 그윽히 들리는
산길을 간다. 말없이
밤에 호올로 산길을 간다.
2
고요한 밤,
어두운 수풀.
가도 가도 험한 수풀,
별 안 보이는 어두운 수풀.
산길은 험하다,
산길은 멀다. -p. 236~237 <산길>중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즐겨 부르던 노래다. 이 서정적인 노래가 양주동 선생이 지은 노래였다니. 일제강점기에 나온 시인 줄 몰랐는데, 일제 강점기를 노래한 것은 알고 나니 서정적이지만은 않다. 글자 속에 함축된 의미가 암울했음을 말하기에. 양주동 선생은 일제강점기를 지낸 이의 어두웠던 마음을 얌전하고 해사한 시로 표현했다. 험하고 험한 산길엔 그 흔한 별조차 보이지 않아 까마득한 험한 길이었다.
최측의농간 출판사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
양주동 선생이 직접 쓴 책이다. 그는 1903년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이 책에는 국어국문학자, 시인, 비평가로서 그가 유년 시절 문학을 배우고 한학을 익혔던 이야기, 신문학을 익히고 <금성>에 관여한 이야기, 술과 문학으로 친구들과 문기를 다투던 취중문답, 가난했던 청춘의 연애담, 도련님의 옷을 벗고 무일푼의 신세가 된 학창기, 교단 10년의 세월 등이 녹록치 않은 글발로 들어 있다.
"내'가 1인칭, '네'가 2인칭, '나'와 '너'외엔 우수, 마발(쇠오줌, 말똥)이 다 3인칭야라
고등학교 때 국어책에도 나왔던 이야기인데, 그가 중학교에 들어가 영어를 배울 때 1, 2, 3인칭을 구분하던 재치가 놀랍다. 지금에야 어렵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 당시엔 40리 길을 걸어서 일본인 선생에게 다짜고짜 물어서 '3인칭'이라는 난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저녁도 먹지 않고 다시 1, 2, 3,인칭을 메모를 했다. 무엇을 깨치고 무엇을 익혔는 지를 자주 메모했던 선생의 지식 습관도 놀랍고, 독학으로 익힌 영어 공부의 깊이에 거듭 놀라움을 표하게 된다.
창밖에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고즈넉한 봄밤에 소리없이 내리는 비단실 같은 비다. 우수, 경칩이 지난지도 하마 오래어 춘분을 바라보는 철이니, 이 비에 땅은 완전히 풀리고 깊숙이 젖어 이윽고 풀싹도 돋아나오고 버들가지의 새움도 차츰 부풀어 오를 상 싶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철, 시렁 위에 앉혀 있는 해묵은 낡은 북도 다시금 저절로 소리를 내는 때라 한다. 더구나 이 밤은 조용한 비가 시름없이 자꾸 내리고......어느 젊은 시인은 비오는 밤이면 인생의 여권(旅券)이 함초롬히 젖음을 느낀다 한다. p.448-449 <춘소초(春宵抄)>의 일부
문학이란 워낙 단순한 '문자의 놀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대단한 그 무엇, 야무진 생각이 있어야 한다는데, 이 글이 과연 얼마나 그렇게 풍요로운 채 진지하고 얄팍한 양 깊숙한 '삶'의 기록, 내지는 그 '반성'과 '해석'이었는지 그것은 내사 모르겠다. 처음부터의 의도가 무슨 광장한 '입언'이 아닌 단순한 '희문'이었고 따라서 글이 사실보다도 우위였음이 나의 구구한 핑계요 해조라 할까. 어떻든 이런 글도 혹시 '문학'이라면, 이런 것은 대체 어떤 시대, 어떤 장르의 그것인지....... - <후기>중에서
3살에 배운 술과 10살의 술의 정, 나도향, 염상섭, 이은상과 술벗으로, 글벗으로 교우하던 모습, 헤밍웨이와 까뮈, 엘리엇, 릴케, 발레리 등의 이야기 등을 알 수 있었다. 육당 최남선의 민족주의와 김명식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선생의 웅변, <개벽>의 '프로문학'에 대한 논쟁 등 신문학을 하며 접한 그의 문장과 술에 대한 이야기에서 우리의 문학사조의 초창기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개인적인 연애와 술꾼들의 비화를 담은 글을 보며 그 당시의 시대상도 알 수 있었다.
문주반생기. 술과 글을 좋아했던 양주동 선생의 호쾌한 인생기다. 그의 문학 사랑과 술 사랑을 알 수 있는 한 편의 글이었다. 올 한해의 마무리를 문주반생기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뿌듯했다고 할까.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본 계기가 된 글이기도 했다. 문학소녀를 꿈꾸던 소시적의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