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
유디트 바니스텐달 지음, 김주경 옮김 / 바람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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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주중행사가 된 도서관 방문을 해서 발자크의 책들을 빌렸다. 기대하지 않았던 발자크의 <사촌 베트>를 만날 수가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프랑스 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에서 보니 그래픽노블이 한 권 보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책가방에 넣어서 대출했다. 제목은 집에 와서야 비로소 읽었다. 유디트 바니스텐달이라는 작가의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라는 책이었다.

 

그래픽노블의 주인공들은 단출하다. 미리암과 타마르라는 두 딸을 둔 노년의 다비드가 후두안에 걸렸다. 타마르는 이제 고작 9살이다. 전처 줄리아가 서쪽(돌아가셨나?)으로 간 다음에 만난 폴라와 만나 낳은 딸이다. 그리고 사진작가로 다 큰 딸 미리암이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순례길에 만난 남자와 낳은 아이가 루이즈다. 소설의 배경이 독일 베를린이라고 했던가.

 

다비드와 미리암이라는 이름을 보니 아마 이 가족들은 유대계가 아닐까 싶다. 주인공 다비드의 암투병 과정이 리얼하게 그려진다. 아직 어린 타마르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실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21g짜리 영혼을 담기 위해 작은 병을 준비하고, 이웃친구 막스와 함께 아버지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그를 미이라로 만들 계획을 짜기도 한다. 당돌하지 않은가. 아이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다비드는 마지막으로 타마르를 데리고 항상 가곤 하던 호수를 방문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타마르를 풍선에 편지를 매달아 막스에게 보내는 아버지를 지켜보기도 한다. ,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신선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와중에도 다비드의 병환은 깊어가고, 아니 매순간 그가 죽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호수에서 타마르는 인어아가씨를 만나기도 한다. 죽음의 공포가 언제라도 방문할 수 있는 순간에 불쑥 등장한 판타지에 어안이 벙벙했다.

 


사진작가 미리암이 사는 공간들은 후두암, 종양이 전이되어 죽어가는 아버지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아니 가끔은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아버지가 이미 죽어 해골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디트 바니스텐달 작가는 상실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이 그래픽노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미리암이 다비드의 전신에 퍼진 종양 사진으로 구성된 아버지의 시신과 같이 누워 있는 장면이었다. 자신의 창조자가 맞이할 죽음, 그리고 또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불멸의 사실을 담담하게 알려주는 작가의 의도가 참...

 

11월의 월요일밤에 휘리릭 넘겨 본 이 그래픽노블의 가격이 무려 32,000원이었다. 물론 원작자의 채색을 구현하고, 큰 판형의 책을 제작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 것이다. 아마 어지간한 그래픽노블 마니아가 아니라면 선뜻 지갑을 열기 쉽지 않은 그런 비용이 아닐까. 나는 그나마 도서관에서 빌려다 볼 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같은 작가의 책으로 작년에 나온 <페넬로페>가 있는데, 이 책도 빌려서 봐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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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1-08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32000원 후덜덜한 가격이긴 하네요. 아무래도 컬러에 종이질을 더 좋은 걸 써야 할테니 그런 것이겠지만.
이미지가 굉장히 강렬하네요. 아버지의 시신과 같이 누워있는 장면이라니~ 21g짜리 영혼을 담기 위해 병을 준비하는 아이의 모습이 상상 속에 그려집니다.

레삭매냐 2022-11-08 10:53   좋아요 1 | URL
다른 리뷰들 보니, 개정판으로
나오면서 책값이 무지 뛴
모양이네요 ㅠㅠ

국내 웹툰과는 다른 스타일
의 그래픽노블이라 흥미롭
게 만났습니다.

북프리쿠키 2022-11-08 1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픽 노블은 무조건 빌려봅니다!! 후덜 ㅠ

레삭매냐 2022-11-08 10:58   좋아요 1 | URL
가격 때문에라도 그럴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가격이 아주 -

바람돌이 2022-11-08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 2개인데 레삭매냐님 리뷰를 보면 별 4개는 충분할듯한 느낌? 그래서 저는 볼까 말까 알쏭달쏭??? ^^

레삭매냐 2022-11-09 11:00   좋아요 1 | URL
그런가요 ㅋㅋ

리뷰는 잘 써놓고서 별점은 짜게?

도서관에서 한 번 빌려서 읽어보
셔도 좋으실 것 같습니다. 금방 읽
으니까요.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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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두 번째 책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읽었다. 위키피디아로 검색해 보니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은 찾을 수가 없었고, 대신 1차 세계대전에서 한쪽 팔을 잃은 피아니스트이자 그의 형 파울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가 있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간은 1967, 가슴을 절개하고 폐의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화자 베른하르트(아마도 저자로 추정된다)는 빈 서쪽에 위치한 바움가르트너회에 종합병원의 헤르만 병동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논리철학논고>로 그 유명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이자 자신의 친구인 파울이 정신병동인 루트비히 병동에 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기제조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유대계 비트겐슈타인 가문 출신의 파울은 정신병으로 병원을 드나 들어야 했다. 정신분석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 출신 의사들도 파울이 앓는 정확한 병명을 진단하지는 못했노라고 저자는 의사들의 무능함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삼촌이 자신의 사유를 출판해서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었다면, 조카는 광기를 실천에 옮기면서 미치광이가 되었다고 했던가. 베른하르트는 자신의 친구 파울이 천재 삼촌보다 더 천재적이었다고 기술한다.

 

그 많은 재산을 자선사업으로 탕진한 파울은 오페라광이자 경주용 자동차광이었다. 날이 갈수록 건강이 안좋아지고, 가난한 상황에서도 트리스탄 공연에 가서 6시간 동안이나 오페라 관람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오페라에 대한 사랑의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저자는 카라얀의 천재성을 인정했지만, 친구 파울은 나치 당원이었던 베를린 필의 독재자를 좋지 않게 생각했다. 나 역시 라벨의 <볼레로>로 클래식 음악에 입문시켜 준 그런 지휘자였지만 파울의 생각에 동조한다. 파울은 누구보다 칼 슈리히트를 높이 평가했는데, 클래식 음악 좀 들었노라고 자부하지만 또 새로운 지휘자여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기도 했다. 오토 클렘페러나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까지는 따라 갈 수 있었지만 슈리히트는 정말 넘사벽이었다.

 

자전적 소설 <비트게슈타인의 조카>의 후반부에서 베른하르트가 고백하고 있듯이, 이 소설은 파울이 죽기 전까지 장장 12년에 걸친 저자의 회고록이다. 소설에는 자신이 혐오하는 조국 오스트리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한가득이다. 장정일 작가가 비판한 대로, 문학상을 받는다는 의미에 대한 냉소는 정말 최고였다. 신문 한 부를 사기 위해 오스트리아 국토를 절반이나 종횡으로 누비는 장면도 인상적이었고,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 같인 선구자들이 조국에서 예외 없이 푸대접 받는 현실에 대해서도 저자는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호텔 자허를 중심으로 한 오스트리아 상류 사회에 대한 에피소드도 한 가득이다. 병자에서 정상적인 인간으로 복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분석도 주목할 만하다. 군대 시절에 수도병원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다가 자대에 복귀해서 정상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해괴한 짓을 벌였던 고참들이 바로 연상됐다.

 

저자에게 루트비히 병동에서 남작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파울은 삼촌을 능가할 만한 그런 재능과 열정을 겸비한 인재였다. 비록 만성적 신경과민에 시달리긴 했지만 철학적 사색은 물론이고, 능숙한 관찰자로서 음악 특히 오페라에 대해서라면 전문가를 능가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페라 가수 애인을 좇아 전 세계를 누빈 에피소드는 천재적 재능과 광기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선보인 기인에 대한 다양한 에피소드는 정말 흥미진진했다.

 

지난번에 읽은 베른하르트의 <몰락하는 자>를 읽으면서 글렌 굴드를 재발견하게 되었다면, 이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에서는 또다른 연주자와 지휘자들을 배우게 되었다. 특히 칼 슈리히트는 한 번 들어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보니 좀처럼 구하기가 쉽지 않구나. 미켈란젤리는 운좋게 만날 수가 있었고, 오래 전부터 듣고 싶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모노로 레코딩된 전중녹음도 들을 수가 있었다. 호텔 자허의 그 유명한 자허토르테까지는 아니지만, 치즈케익으로 아쉬움을 달래보련다. 언제고 빈에 다시 한 번 가게 되면 꼭 먹어 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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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11-07 2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오! 제가 베른하르트를 좋아하는데요.... 번역한 분이 배 선생이네요. 배수아한테 억하심정이 있는 게 아니라 소설가 출신 번역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참, 거 고민됩니다.

페넬로페 2022-11-07 22:04   좋아요 1 | URL
한국어로 쓰인 배수아작가의 소설도 어려워요~~

레삭매냐 2022-11-08 11:00   좋아요 1 | URL
저도 베른하르트 작가를 좋아해서
또 한 시절 구해서 열심으로 읽고
했던 기억입니다.

배 선생의 글들은 저도 잘 이해가.
중역 책들은 더 어렵더라구요.

레삭매냐 2022-11-08 11:00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 저도 배 선생의 책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

페넬로페 2022-11-07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으로 봐서 철학서인지 소설인지 잠시 헷갈렸어요. 소설의 내용은 흥미롭습니다^^

레삭매냐 2022-11-08 10:59   좋아요 1 | URL
그렇죠 :>

말씀해 주신 대로, 내용은
아주 흥미진진했답니다.

새파랑 2022-11-08 06: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비트겐슈타인 가문에는 천재의 피가 흐르나 보네요. 누구는 철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누구는 미치광이가 되긴 했지만~ 소설같은 실화 군요

레삭매냐 2022-11-08 11:14   좋아요 1 | URL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에 빗댄
소설이랍니다.

천재와 광인의 대조가 더 강
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라로 2022-11-08 1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책을 벌써 읽으셨어요!!!!@@

레삭매냐 2022-11-08 15:56   좋아요 0 | URL
같은 저자 같은 역자의 책, 리뷰 울궈먹기입니다 ㅋㅋ

Falstaff 2024-04-02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 댓글을 쓴다는 것이 벌써 해를 두 번 넘겼습니다.
유튜브에 ˝Carl Schuricht˝ 검색하시면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젊은 시절에 깡다구가 있어서 나치 치하임에도 말러 전곡 연주 같은 걸 시도하다 도망쳤던 적이 있다고 하는데, 말러는 넘 장황해 유튜브로 듣기 무리더라고요. 브람스 4번이 좋았습니다만, 감정 분비가 조금 심하지 않나 싶은데 제가 뭐 알겠습니까.
 
사촌 퐁스 을유세계문학전집 9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정예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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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하고 읽기 시작하면 못 읽을 책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년 전에 빌렸다가 못 다 읽고 반납한 소설기계라는 별명의 오노레 드 발자크의 <사촌 퐁스>를 다 읽었다.

 

왕당파 출신으로 프랑스 역사상 가장 격동의 시절을 보낸 발자크는 마치 현장에 대한 르포르타주를 보여 주듯이 독자들을 1844년으로 인도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쇠락한 음악가 실뱅 퐁스다. 얼추 나이 육십의 노총각 퐁스 아재는 선량하고 겸손한 사람이다. 젊어서 부모에게 받은 유산들은 유럽의 각지에서 사들인 골동품 구입으로 날려 먹었다. 아니 퐁스 아재는 훗날 부르주아지 사회에서 예술품이 한몫하는 재산으로 둔갑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단 말인가? 사실주의 작가 발자크는 그때 이미 혁명과 전쟁 통에 갑자기 졸부가 된 부르주아지들이 고상한 취미로 회화와 조각 같은 고상한 예술품 수집에 열을 낼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주인공 퐁스 아재에게는 아주 나쁜 취미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식도락이었다. 발자크는 그런 이유 때문에 소설에서 그를 식충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는 잘 사는 주변의 지인들의 집을 찾아가 식사를 하는 악습을 버릴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 시절에 이미 프랑스 부르주아지들은 세상에서 진귀한 음식들을 자신들의 상에 올리면서, 소위 아랫것들 그러니까 하루 벌어먹고 사는 이들과의 자본에 의핸 변별력을 키우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가 사촌행세를 하며 들락거리는 법원장 댁의 마르빌 부인 등은 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물론 퐁스 아재가 그들에게 귀중한 골동품을 수집해서 제공하긴 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그저 귀찮은 식객이었을 따름이다. 결별의 결정적 원인은 퐁스 아재가 마르빌 부인의 영애 세실을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보내려다가 어그러지면서 발생했다. 마르빌 부인과 세실은 퐁스 아재가 자신들에게 앙심을 품고 골탕 먹이려고 했다는 이유로 그를 사교계에서 영원히 추방시키는 그야말로 파멸적 결정을 내린다. 이런 충격과 더불어 간염으로 우리의 주인공 퐁스 아재의 건강은 급속하게 악화된다.

 

이 부분까지가 소설의 절반 정도에 해당되는 이야기의 구성이다. , 퐁스 아재에게는 독일 출신 피아노 교사 빌헬름 슈뮈크가 있었다. 그야말로 슈뮈크는 부인도 자식도 없는 퐁스 아재에게 소울메이트 같은 존재였다. 문제는 슈뮈크 씨 역시 퐁스 아재와 비슷한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 이제부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퐁스 아재가 그동안 모은 골동품들과 회화들이 어마어마한 재산 가치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수위 시보댁(소설에서 최고의 악당으로 그려진다)은 퐁스 아재와 슈뮈크를 돌본다는 핑계로 그들로부터 돈을 착취하고, 퐁스 아재가 애지중지하는 골동품들을 강탈한 프로젝트를 돌린다. 여기에 협력하는 이들이 제각각 딴 생각을 하는 의사 풀랭과 변호사 프레지에다. 의사는 환자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고, 법률적 대리인 역시 의뢰인의 이익 대신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니까 병석에서 죽어가고 있는 인간 퐁스는 그저 그들에게는 성공과 출세 그리고 금전적 이익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따름이다. 사회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전문직들까지 이런 파렴치한 악덕에 가담하는 상황이 가히 막장드라마답다는 생각이다.

 

지금 시점으로 본다면 아주 진부할 지도 모르겠지만, 200여 년 전 프랑스혁명의 여진이 여전한 가운데 혁명으로부터 가장 이익을 본 집단인 전문직 부르주아지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소설기계 발자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금의 상황에 대입해 봐도,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다. 이른바 법기술자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기존의 도덕적 가치들은 땅에 떨어졌으며 오직 자본만이 모든 가치를 대신하는 세상이 1845년의 4월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우리의 퐁스 아재가 결국 자신의 재산을 노리는 시보댁의 앙큼한 음모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공증인들까지 동원해서 가짜 유서로 시보댁과 악당들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하지만, 순진한 두 노친네들을 옭죄고 있는 거미줄 같이 촘촘한 그물망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왜 이 악당들은 공모해서 자신들의 것이 아닌 타인의 재산을 노렸던 것일까? 그건 아마도 평범하고 정직하게 살아서는 이번 생에 그들이 부러워하는 부르주아지들과 같은 삶을 누릴 수 없다는 절망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양심을 팔고 악덕을 행하는 이들의 꿈은 야무졌다. 시보댁은 막대한 종신연금을 꿈꾸었다. 시보댁의 공동정범들은 수중에 퐁스 아재의 막대한 재산이 들어오면 그 자본과 연줄을 바탕으로 해서 병원장 그리고 치안파사라는 출세의 고속도로를 질주할 꿈에 젖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 시절부터 사람들이 종신연금에 목매달았다는 정황에 그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국가가 보장하는 노후대책이 있었단 말이지.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시스템이 아니었나 싶다.

 


퐁스 아재와 그의 절친 슈뮈크 씨는 사람들이 너무 물렀다. 조금이라도 세상물정을 알았다면 그렇게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죽고 나면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할 골동품을 죽을 때까지 끌어안고 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퐁스 아재가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 슈뮈크를 생각했다면 좀 더 세밀하게 유언장을 작성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긴 사촌들로부터 버림받고 간염으로 죽어가는 마당에 타인을 배려할 겨를이 없었겠지. 이 불쌍한 인생들인 퐁스와 슈뮈크를 돕겠다고 나선 이들은 너무 적고, 사회적 영향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는 그런 이들 뿐이다. 그러니 악덕의 번성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지금도 자본과 결탁한 악덕이 횡행하고 있지만, 19세기 세계의 수도라는 파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사람 사는 건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비슷하다는 교훈을 소설기계 작가는 세상에 전파하고 싶었나 보다. 동시에 우리를 노리는 악덕과 그의 실행자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점도.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사촌 퐁스>와 자매작이라는 <사촌 베트>에서는 이런 악덕에 대한 처절한 복수극이 시전된다고 하던데, 그 작품도 한 번 만나보고 싶다. 발자크, 읽을수록 매력적인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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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05 17: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왜 저는 마지막에 사촌 베트도 있다는 문장에 빵 터지는걸까요? ㅎㅎ
이 시절의 소설들은 또 당대의 사회상을 찾아보기에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레삭매냐님 글 뒷부분은 흐린눈으로 지나갑니다. 저도 이 책 보고싶어서요. ^^

레삭매냐 2022-11-05 19:08   좋아요 1 | URL
왠지 제 느낌에는 사촌 시리즈
가운데 <사촌 베트>가 더 재미
지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절로 프랑스 혁명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해보게 되더라구요.

1830년 7월 혁명 그리고 영광
의 3일에 대해서 말이죠.

바람돌이님의 발작 독서를 응원
하는 바입니다.

라로 2022-11-05 18: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츠바이크의 발자크의 평전을 엄청 좋아했어서 그의 책 <고리오 영감>을 집었는데 읽다 말았어요,, 다시 시도 해봐야 하는데,, 이젠 의욕이 없어요. 번역의 문제라고 해야 할까요??
번역 때문에 읽기 힘든 책을 만나면 그냥 내려놓게 되네요... 주절주절;;;;

레삭매냐 2022-11-05 19:11   좋아요 1 | URL
15년 전에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역에서 발작 묘지를 찾는 미
쿡 아줌마를 만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발작에
대해서는 1도 모를 때였지요.

그리고 휴먼 코미디아에 대해
알게 되었네요.

아무래도 고전 읽기는 쉽지 않
은 것 같습니다. 저도 <고리오
영감> 읽을 적에 내가 왜 이걸
읽고 있나 싶을 때가 있었거든요.
지금은 발작적으로 그의 책을
찾게 되었네요 ㅋㅋㅋ

그래서 번역이 반역이라고도
하는가 봅니다. 고저 빠이팅.

blanca 2022-11-05 19: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어서 깜놀했잖아요. 소장 중이랍니다. 발자크는 정말이지 천재 같아요.

레삭매냐 2022-11-05 19:14   좋아요 0 | URL
그러쵸 그러쵸 !!!
넘나 잼난 것~

발작은 진정 천재입니다.

전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답니다. 중고책으
로 살라구요.

Falstaff 2022-11-05 1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흠. 저는 책 깨나 읽는 분은 다 아실 유명한 불문 역자가 <사촌 베트>를 별로 좋지 않게 이야기 하는 바람에 아직 읽지 않았는데요, 퐁스 다음 이야기라면 그것 참, 뒤통수 때리는 반전이 있을 것도 같고 그렇군요. 아 참. 그걸 스크린 캡처 해놓을 걸 그랬습니다. 제가 구라친 거 아니라는 증거로 말이죠. ㅋㅋㅋㅋ 퐁스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간해 믿을 사람 읎잖어유? ㅋㅋㅋㅋㅋㅋㅋ

레삭매냐 2022-11-06 18:22   좋아요 2 | URL
오늘 <사촌 베트>를 수배해서
바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자료를 더 찾아 보니, <사촌 베트>
가 <퐁스>보다 먼저 나왔다고 하
네요.

발작의 전작들과 달리 19세기 빠리
에 대한 상세한 설명 없이 바로 본
론으로 들어가는 상황이 아주 흥미
진진하네요.

11월에는 발작을 읽습니다.

Falstaff 2022-11-06 19:15   좋아요 2 | URL
오오오..... 사촌베트를 낸 출판사는 2013년에 문을 닫았.... 지 않나 싶습니다. 정말 의심이 가는 건, 물론 의심입니다,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거 아닙니다!!! 불어 직역이 아니라 일어 중역인 것 같더라고요. 그리하야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하느냐를 알고 싶은 독자는 읽되, 발자크의 맛을 알려면 기다려라, 하는 게 제가 들었던 충고였습니다. 그냥 읽으면 발작을 할 수도 있다는...... ㅋㅋㅋㅋㅋㅋ

mini74 2022-11-07 15: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꼭 윌리엄 호가스의 판화연작을 책으로 보는 느낌이네요. ㅎㅎ 막장인데 매냐님이 너무 찰지게 내용을 소개해서인지 저도 자꾸만 웃음이 납니다. 자매작엔 복수가 담겨있다니 ㅎㅎ 재미있게 읽었어요 ~

레삭매냐 2022-11-08 11:17   좋아요 1 | URL
발자크의 소설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 중의 하나가 19세기
파리에 대한 너무나 사실주의적
묘사인데, <사촌 베트>에서는 그런
부분은 몽땅 제거해 버리고 아주
빡시게 진행이 되네요.

<사촌 퐁스>보다 훨씬 더 매운
맛이네요.
 
사이버리아드 - 심너울의 사이버리아드 다시 쓰기 FoP Classic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송경아 옮김 / 알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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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코로나로 중단되었지만, 맹렬하게 책을 읽고 모여서 가열차게 토론 그리고 음주(아니 어쩌면 음주와 수다에 더 방점이 찍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를 즐기던 시절에 만난 SF 소설이다. 사실 폴란드 출신 SF 대가 스타니스와프 렘의 <사이버리아드>는 해당 모임을 위한 책도 아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로 일환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오멜라스였는데 이번에는 알마에서 새롭게 단장해서 나왔다.

 

사실 솔직하게 말해서 전통적 SF팬이 아니다 보니 거장이 구사하는 언어유희 혹은 현란한 말장난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영어는 물론이고 라틴어를 종횡무진하게 구사하며 벌이는 과학용어들을 따라가다 보니 정말 자주 문맥을 잃곤 했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저자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 제목 <사이버리아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다양한 이야기들을 이끌어 가는 스타니스와프 렘의 문학적 노예들은 바로 생계형 로봇 창조자 트루를과 클라파우치우시라는 특이한 캐릭터들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로봇이 창조자라니, 이거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게다가 두 로봇 창조자들은 라이벌이기까지 하다. 서로 다투고 아웅다웅하면서도 기발한 창조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점에서는 인간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아니 그렇게 위대한 창조자라면 금붙이들도 직접 만들 수 있는데 왜 그러냐는 보상을 치러야 할 피조물들이 물었을 때, 자신이 만들어낸 것과 타인에게 얻어낸 게 같으냐는 우문현답 스타일로 우리의 창조자들은 재치 있게 대답한다. 하긴 내가 만든 음식보다 남이 만든 음식이 자고로 더 맛있는 법이지. 저명한 셰프들이 자신들이 먹겠다고 그렇게 현란한 솜씨로 요리를 하고 플레이팅을 하지는 않겠지. 당연한 말씀이시다.

 

뭐 여러 각도에서 거장의 글을 평가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인공지능 알파고 시대지만 창조자도 어쩔 수 없는 개개인의 들끓는 욕망에 대한 저격이라고 <사이버리아드>를 총평하고 싶다. 아니 어쩌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창조의 능력에까지 도전하는 인공지능의 가공할 만한 능력에 대한 경고로도 볼 수 있으려나. 특히 괴짜 창조자 트루를이 만들어낸 전자 시인의 경우를 보라. 물론 처음부터 완벽한 발명품은 존재할 수 없었다. 수차례 시행착오 끝에 도달한 우리의 전자 시인은 자신을 테스트하는 과정에서 점차 자가발전하고 스스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지점에서 궁금한 점은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주제와 캐릭터들을 프로그래밍해주면 걸출한 소설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운율과 자구를 설정한 시구도 만들어내는 전자 시인이 전자 소설가로도 진화한다면... 그런 시절에는 인간은 무엇을 하게 될지 자못 궁금해졌다. 혹자의 표현대로 오로지 소비만 하는 호모 컨슈머티쿠스같은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창조자들을 능가할 정도로 뛰어난 지능을 가진 폭군들은 창조자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협박해서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교묘한 두뇌플레이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트루를과 클라파우치우시 역시 그런 위험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정해진 시간 내에 의뢰인들이 요구하는 발명품들을 무리 없이 창조해낸다. 때로 그것은 난폭하고 교묘하면서 사냥꾼을 지루하게 하지 않을 정도로 사나운 사냥감이 되기도 하고, 마이크로미니월드의 신민들이 되기도 한다. 어떤 시절에는 현자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고, 말도 안되는 괴물 스타일의 창백얼굴로 분해서 구애에 성공하기도 한다. 자신을 옭아매려는 전자 마법사의 흉계를 교묘하게 회피하는 호색한 군주의 모습에서는 절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다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흔하게 등장하는 어휘들일진 몰라도 SF팬이 아닌 일반독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단어들의 선택 그리고 그런 단어들을 비비 꼬고 거기에 라틴어까지 가세한 언어유희의 속도감 넘치는 전개는 쉽게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런 말장난에 더해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야기야말로 스타니스와프 렘 작가가 목표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동시에 같이 읽기 시작한 같은 작가의 생각하는 바다 <솔라리스>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소설이라 좀 당황스러웠다. 후자가 진중하고 무게감 있는 전개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전자 <사이버리아드>는 그야말로 사이버키네틱 혹은 사이버펑크 시대에 걸맞는 셰헤라자드가 들려주는 B급정서가 가득한 일렉트로닉 천일야화라고나 할까. 종종 길을 잃고, 문맥도 잡지 못한 채 꾸역꾸역 읽어내기도 했지만 뭐 이 정도면 낯선 SF작가와의 첫 번째 만남으로서는 만족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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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2-11-04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멜라스의 <사이버리아드>를 갖고 있어요. 그 때도 송경아님 번역이었던 것 같네요. 제가 B급 정서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라 좀 당황했던 기억이 나네요. 오랫만에 꺼내봐야겠습니다 :)

레삭매냐 2022-11-04 10:21   좋아요 1 | URL
저도 오멜라스 버전 읽었습니다 :>

거의 비슷한 시기에 <솔라리스>도
읽었는데, 같은 작가가 이렇게 다른
스타일의 작품을 발표했다는 점에
좀 충격 먹었답니다.

역자는 같은 분이시네요.

라로 2022-11-04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타니스와프 렘의 책을 3권이나 갖고 있는데 겨우 하나 읽다 말았어요.^^;;
다른 책에 더 끌려서.
그 책도 다시 읽어야 하는데... 매냐님의 글을 보니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제일지는... 마음이 가고 손에 잡히는 대로..^^;

레삭매냐 2022-11-04 14:44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 하고 <솔라리스>를 읽었습니다.

계속해서 관심이 가는 책들이 생기다 보니
완독이 나날이 어려워집니다. 집중해서 읽고
다른 책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

렘 선생의 민음사판 책도 사두긴 했는데
구간이 되어 버리고야 말았습니다.

책은 모름지기 손가는 대로 읽어야 합니다.
고럼요.

바람돌이 2022-11-04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사이버리아드가 새 책으로 나왔네요. 에고 좋아라.... ^^
이 책은 또 어떤 세상을 펼쳐줄지 막막 기대됩니다. 저는 스타니스와프 램의 팬! ^^

레삭매냐 2022-11-05 10:52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

저도 SF 책들을 한 동안 죽어라
있었던 시절이 있네요.

스타니스와프 렘 작가의 판권이
여기저기 나뉜 모양이네요.
다양한 출판사에서 나오는 걸
보면 말이죠.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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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허명은 없었다.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려고 했으나, 나에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주문장을 날렸고, 책이 도착하기 전에 기다릴 수가 없어서 미리보기로 몸풀기를 끝냈다. 어제 집에 돌아가 보니 책이 도착해 있었다. 바로 다 읽어 버렸다.

 

아버지가 죽었다로 시작되는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기>에는 질곡진 한국 현대사의 그 무엇이 오롯하게 담겨져 있었다. 누가 봐도 그 엄혹한 시절을 체험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을 그런 이야기들을 작가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소멸의 시간을 통해 독자들에게 자신이 맹근 시그널을 날린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왜 자꾸 오래 전에 만났던 영화 <학생부군신위>와 소설 <녹슬은 해방구>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혈육보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꾼 고아리 박사님의 아버지 고상욱 씨는 뼈속까지 투철한 유물론자이자 혁명가였다. 그를 원수로 생각하는 진영에서는 빨치산 혹은 빨갱이로 불렀다. 그런 고인이 노동절에 죽음을 맞으면서부터 소설의 서사가 굴러간다. 서울에서 보따리 장사(강사)를 하던 상주 고아리 박사는 고향 구례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의 장례식장에서 죽음이라는 삶의 엔딩이 선물한 시대의 화해 혹은 자신이 몰랐던 구빨치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만나게 된다.

 

소설에서는 고상하고 순화된 사회주의자라는 표현을 쓰지만, 아마 고인은 사회주의자라기 보다 공산주의자에 더 가깝지 않았나 싶다. 우익의 세상에서 전향한 공산주의자는 불가촉천민 같은 존재였으리라. 그리고 자신 말고도 다른 가족들까지 모두 연좌제로 몰아 정상적 사회생활을 하는데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산사람으로 사선을 누비며 동지들이 숱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고상욱 할배는 산에서 내려와 새농민으로 평범한 삶을 살고자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산에서 죽고 살던 동지에게는 위장 자수한 인사에 불과했고, 세상은 그를 전향한 빨치산이자 요주의 인물이라는 낙인을 찍어 버렸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치매를 앓던 고인은 어느 날 갑자기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먼 길을 떠나 버렸다. 그리고 유물론자답게 자신의 시원이 먼지이니, 굳이 묘를 쓸 것도 없이 상주 아리에게 타고 남은 재를 뿌리고 싶은 곳에 뿌리라는 말을 남긴다. 진짜 뿌리 깊은 유물론자가 아닌가 말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진행은 클리셰이다. 망자와의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작은아버지와 갈등, 연좌제로 숱한 고초를 겪은 사촌형제들의 이야기 그리고 죽음 앞에 다시 뭉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 그리고 제각각 고인과의 소중한 인연을 지닌 이들이 문상에 나서게 되고, 상주와 마주하게 되면서 펼쳐지는 그동안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이야기들은 참 사무치기도 하고 또 하염없기도 했다.

 

굳이 저자는 늙은 혁명가의 소싯적 행적을 신원하고자 하지 않는다. 자본의 힘이 모든 걸 삼켜 버린 마당에 철지난 이데올로기 타령을 무엇이 중요하다는 말인가. 우리들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은 자신들이 소중하게 생각한 평등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걸고 투쟁에 나섰지만, 체제와 자본에 순치된 우리 후손들은 그저 자신들의 일상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타협과 화해의 시간이 장례라는 생로병사의 마지막 이벤트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 아마도 나에게 영화 <학생부군신위>를 연상시킨 게 아니었을까. 그 위에 한국 현대사의 이데올로기 갈등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토핑으로 얹고, 다소 무거울 수 있는 분위기를 고인의 장례식 준비에 나선 사촌들의 몸을 내던지는 애도와 품앗이 그리고 다양한 인연을 지닌 이들의 등장으로 상쇄시키는 일련의 과정들은 일품이었다.

 

빨치산의 딸이 반동 신문이 주최한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 활동에 나섰다는 점은 우리 현대사가 가진 구조적 모순을 대변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평생 유물론자였던 혁명가가 말했다시피, 우리 모두는 저만의 사정이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오죽하면 말이지. 작년에 발표된 소설집 <자본주의의 적>이라는 책도 있다고 하는데,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작가의 전작들을 한 번 만나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의 문턱에 선 이번 가을, 간만에 수작을 만나 기분 좋은 독서의 시간이었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뱀다리] 노동자 농민이 평등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자신의 하나 뿐인 목숨을 걸고 투쟁에 나섰던 혁명가들이 정작 노동의 현장에서, 우리 보통 사람들이 하는 노동을 버거워 하는 장면은 정말 그들이 지닌 구조적 모순에 대한 신랄한 저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혁명이란, 노동의 현장이 아닌 오직 그들의 머리와 판타지 속에서만 가능했단 말인가?

 

해방정국에서 피 끓는 청년들을 사로잡았던 이데올로기 투쟁이 정작 당장 눈앞에 닥친 먹고사니즘 앞에서는 어떤 위력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그들은 정작 몰랐단 말인가. 어쩌면 모든 가치와 사회적 정의조차 집어삼키는 21세기 무시무시한 자본의 위력과 그에 따른 선전선동 앞에 무력해진 개인의 무력함에 대한 경종일 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담즙 같은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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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 2022-11-03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학생부군신위> 추억 돋네요. 레샥메냐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2-11-03 16:26   좋아요 0 | URL
그렇죠, 책 보는 내내
그 영화 생각이 났습니다.

감사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11-03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한민국처럼 세대 간의 화해가 필요한 나라도 드물 듯합니다. 작가가 이 과정을 아주 잘 그려낸 모양이네요.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싶은데 흠... 최신작이라 경쟁률이 치열한가봅니다ㅠㅠ

레삭매냐 2022-11-03 16:32   좋아요 1 | URL
공감하는 바입니다.

산업화 세대의 공로에 대해
현 세대들이 인정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많이 섭섭해
하신다는 느낌입니다.

그 부분을 정치인들이 파고
들어 갈등을 확산시키고 있
기도 하구요.

항상 대출 중 그리고 예약
중이라 결국 사서 읽었네요.

독서괭 2022-11-03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최근에 북플에서 많이 보이던데요. ‘허명은 없다‘라며 별 5개 주시고 수작이라 칭하시는 걸 보니 읽어봐야지 싶습니다.

레삭매냐 2022-11-03 16:32   좋아요 1 | URL
아주 가독성이 뛰어나서
금방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달 독서 슬럼프였었
는데 이달에는 쫌 달려
보렵니다.

새파랑 2022-11-03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왠지 첫문장에서 <이방인>이 떠오르네요 ㅋ
이번달에 달리시는 레삭매냐님을 기대하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11-03 17:47   좋아요 1 | URL
월초 출발이 산뜻하네요.

오늘 도착 예정인 로베르토 아를트
의 <미친 장난감> 그리고 발자쿠
선생의 <사촌 퐁스> 마무리하고
읽던 책들 다시 돌아갈 계획입니다.

라로 2022-11-04 01:26   좋아요 1 | URL
저도 지난 달은 정말 미적거렸는데이번 달은 좀 다를 것 같아요!!! 매냐님 따라쟁이 라로..😅😅😅

라로 2022-11-04 0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군요!!! 이 책 정말 재밌었어요!!!

레삭매냐 2022-11-04 09:40   좋아요 0 | URL
그러니깐요...

예전에 32년 전 <빨치산의 딸> 시
절에는 책이 나오자마자 판금되고
저자는 국보법 위반으로 불구속기
소되었었다고 하네요.

이 책의 모태가 되는 <빨치산의 딸>
이 25살에 쓴 책이라니 놀라울 따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