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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20 - 1910 망국 ㅣ 본격 한중일 세계사 20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8월
평점 :

무려 8년이라는 대장정 끝에 결국 굽시니스트 작가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가 작년 여름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난 그리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지난 다음에 마지막 <망국>편을 만날 수가 있었다.
1904년 8월 1일에 시작된 일본군의 뤼순 포위전은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낸 다음인 1905년 1월 1일 마침내 러시아군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일본에서는 군신이라는 노기 마레스케의 3군은 별다른 전략 없이 오로지 물량공세를 펼쳐 결국 승리를 얻었지만, 너무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전에 러시아 내부에서는 극동에서 그동안 동양의 약소국이라 깔봐 오던 일본군에 연전연패한 차르 정부에 대한 불신과 염증으로 민중의 소요가 발생했다. 1905년 1월 22일 <피의 일요일>로 알려지게 된 사건으로 러시아 제국은 외부의 적 뿐 아니라 내부의 적들과도 싸워야 했다. 주러시아 일본 공사관의 주재 무관 아카시 모토시로라는 문제적 인물이 주도한 공작이 과연 1905년 러시아 혁명에 일조했을까라는 지적에 대해 좀 더 알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무대는 나폴레옹 전쟁 이래 최대의 결전이라는 봉천 회전이었다. 일본군은 거의 20만에 달하는 육군을 동원해서 봉천에 포진한 러시아군 주력을 일거에 격파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쿠로팟킨이 지휘하는 극동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성동격서식 기동에 농락당해 우왕좌왕하는 등 초전부터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그런 전투였다. 러시아는 한수 아래로 평가한 일본군에 연전연패하면서 극동 러시아군의 사기는 추락했고, 내부 혁명으로 장기전에 대한 피로도가 쌓이고 있었다.
일본 역시 러일전쟁 개전 1년이 지나면서 전쟁물자 생산에 한계점에 달해 있었다. 1903년 일본 국가의 총예산이 2억 6천만 엔이었다. 군부는 총 전비로 4억 4천만 엔을 예상했지만, 최종적으로 19억의 예산이 소요되었다. 사상자 역시 10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 상태도 일본이 과연을 전쟁 수행을 계속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어쨌든 국운을 건 봉천회전에서 일본은 러시아군을 패퇴시키고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다. 물론 상처 뿐인 승리긴 했지만. 전세가 기울자, 러시아군 수뇌는 총퇴각을 선언하고 무의미한 희생을 피하고 후방의 톄링을 지나 시핑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아마 일본군 역시 공세종말점에 도달하지 않았나 싶다.
러일전쟁의 최종 무대는 역시 동해였다.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의 태평양함대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추가 증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뤼순 전투에서 만신창이가 된 일본 연합함대가 본국으로 돌아가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그냥 넘겨주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허송세월할 게 아니라 바로 출격에 나서서 일본 연합함대와 대결을 벌이던가 아니면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훗날을 도모해야 하지 않았을까. 결국 진해에서 출격한 연합함대는 1905년 5월 27일 쓰시마 근방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요격하기 시작했다. 총 38척으로 구성된 러시아 함대가 일본군의 공격으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면서 러일전쟁은 일본의 완성으로 끝났다.
일본의 조야는 청일전쟁처럼 전후 러시아로부터 막대한 전쟁배상금과 영토 할양을 기대했다. 하지만 미국의 중재로 1905년 8월 29일 포츠머스에서 맺어진 조약에서 일본은 남만주 철도에 대한 이권, 조선의 일본 세력권 인정, 뤼순-다롄 할양과 남부 사할린으로 만족해야 한다. 무려 4년치 국가예산과 23만명에 달하는 전사상자에도 불구하고 외교전의 실패로 일본은 청일전쟁처럼 국가 재건을 위한 비용 마련에는 실패했다. 그것은 아마 미국을 필두로 한 서구 세력들이 극동아시아에서 일본이 너무 과하게 성장하는 것에 대해 이미 견제가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본격적인 대한제국의 망국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기에 앞서 어쩌면 고리타분하고 어려운 근현대사에 “Why so serious?" 같은 걸그룹 노래 제목까지 곁들이고 언 듯 보면 약간 유치해 보이는 라임까지 집어넣으면서 헛웃음을 유발하는 굽시니스트 작가의 창작력에 박수를 보낸다. 짝짝짝. 역사가 반드시 엄숙하고 진지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내가 예전에 <국사>를 배우던 시절에 이렇게 재밌는 교보재가 있었다면, 어렵고 외울 거 천지였던 한국의 근현대사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의 망테크 과정은 박시백 작가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고통의 연장선이었다. 동학과 독립협회의 잔당 세력을 규합해서 만들어진 일진회의 비상으로부터 시작해서, 훗날 공화정과 독립운동 세력의 핵심이 되는 상동교회 출신들을 중심으로 했던 이른바 ‘상동파’, 친일 관료들에게 포위된 무능력의 끝판왕 고종은 이렇다 할 저항 없이 자주 국가의 외교권을 넘겨주는 을사늑약(2차 한일협약)을 체결하면서 한국은 결국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해 버렸다.
어쩌면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 순간, 망국의 숙명은 결정이 난 게 아니었을까. 그후에도 고종은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과 이준 그리고 이위종을 파견해서 만국에 일본이 한국에서 벌이고 있는 만행을 고발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외교권을 상실한 한국의 호소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일제는 대한제국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고종 퇴위와 이어지는 정미칠조약으로 한국의 군대가 해산되고 내정권마저 상실해 버렸다. 해산된 군대가 기존의 의병 조직에 가담하면서 의병들의 무장투쟁의 차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어 1908년 1월 서울 진격에 나섰지만, 일제는 정규군까지 동원해서 전국의 의병활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일본군은 특히 4천명에 달하는 조선인 헌병 보조원들을 동원해서 의병 색출에 나섰다. 그 결과 1908년부터 1909년까지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장인환-전명운 의사들의 더럼 스티븐스 저격을 필두로 한 수많은 의거들과 저항들이 있었지만, 망국의 수레바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본격 한중일 세계사>는 배드엔딩으로 끝나고 말았다.
지난 8년 동안, 굽시니스트 선생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를 통해 미처 모르고 있던 역사의 많은 부분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최근 읽고 있는 <태평천국>에 대해서도 그가 이미 다룬 부분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20권이나 되는 대작을 마침내 완성한 굽시니스트 작가에게 경의를. 리스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