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고 - 대항해 시대와 우연의 역사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4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육혜원 옮김 / 이화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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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로운 타이밍에 다른 출판사에서 같은 책이 출간됐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아메리고>가 하나는 이화북스에서, 또 다른 하나는 이글루라는 출판사에서 나왔다. 나의 픽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꾸준하게 내고 있는 이화북스였다. 문득 슈테판 츠바이크의 저작권이 소멸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50쪽 남짓한 <아메리고>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 아니 인식자로 알려진 피렌체 출신의 항해사이자 지리학자, 사실은 상인이었지만,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대한 이야기다. 궁금하지 않은가? 모두가 인류의 네 번째 대륙으로 알려진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아메리카 대륙이 콜럼비아가 아닌 아메리고 베스투피의 이름을 딴 아메리카란 말인가.

 

역시 서양 인문학에 조예가 깊은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 연원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사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을 아시아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항해 시대, 콜럼버스가 이끈 선단의 최종 목표는 아시아로 가는 최단 거리의 항로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콜럼버스는 자신이 발견한 대륙이 아시아라고 죽는 날까지 믿었다고 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겠지. 대항해 시대 모든 탐험가들의 목표는 항료가 넘쳐나는 말루쿠 제도에 가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달랐다. 콜럼버스에 비해 후발주자였던 베스푸치는 15세기 말 경, 아메리카 대륙의 남반부인 브라질에 상륙하면서 그곳이 아시아의 목적지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파악했다. 바로 이런 명징한 인식이 그를 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베스푸치는 계속되는 오해와 우연의 작동으로 문두스 노부스(Mundus Novus, 신세계)를 발견한 레전드가 되었다.

 

츠바이크는 베스푸치가 그럴만한 업적을 이룬 위인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논증한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작동하는 법이라고 전설적 전기작가는 말한다.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이룬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무명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가 하면 바로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경우처럼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주변의 조건과 상황들 덕분에 역사적 인물이 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참 다이내믹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공평하지만 동시에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를 전설로 만든 일련의 저작들이 당시 인쇄업자들의 농간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츠바이크는 지적한다. 1497년의 항해는 1499년의 실제 항해기록에서 파생된 왜곡된 저작이라는 점이다. 그런 모순들 때문에 베스푸치는 당대 저명한 라스 카사스 사제 같은 이들에게 신랄한 비판과 공격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베스푸치가 직접 나서서 콜럼버스의 성공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깎아 내렸던가? 그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그 둘은 서로를 인정하는 사이였다는 점이 서간을 통해 밝혀졌다.

 

신대륙 발견 이래, 콜럼버스를 필두로 한 스페인 정복자들이 현지에서 저지른 악행들과 수탈의 역사들이 용서되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해 강탈(?)된 대륙 이름의 어쩌면 원주인일 수도 있는 콜럼버스에 대한 재평가의 과정을 거치고, 이번에는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역습을 당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속도감 있게 다루어진다.

 

내가 주관적으로 판단해 볼 때,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역사의 무대에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자리에 오해와 우연 그리고 타의에 의해 올라간 대표적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룬 업적에 비해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대륙에 이름을 붙일 정도는 아니었단 말이다. 물론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콜럼버스가 하지 못한, 새로운 대륙에 대한 인식은 탁월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모든 것을 고치겠다고 아메리카 대륙을 콜럼비아라고 부르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을까. 잘못된 것도 역사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광기와의 우연의 역사> 시리즈에서 츠바이크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자신의 놀라운 관찰력과 분석력을 보여준 바 있다. 이번 <아메리고>에서도 오해와 우연이 빚어내는 놀라운 역사의 드라마에 대한 자신의 접근 방식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내가 이래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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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7-22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광기와 우연의 역사와는 다른 책이네요?!
같은 책인가 했어요

레삭매냐 2025-07-22 21:57   좋아요 1 | URL
비스무레하지만 아주 다른
책이랍니다.

정말 오래 전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 읽
은 생각이 나네요.
다시 한 번 읽어봐야지 싶
습니다.

카스피 2025-07-23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광기와 우연의 역사 읽은 기억이 나네요^^

레삭매냐 2025-07-23 11:08   좋아요 0 | URL
츠바이크 선생의 저작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
 
특이한 베네딕토회 : 캐드펠 수사의 등장 캐드펠 수사 시리즈 21
엘리스 피터스 지음, 박슬라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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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희망도서로 신청한 엘리스 피터스의 <특이한 베네딕토회 : 캐드펠 수사의 등장>이 도서관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제 바로 대출하러 달려갔다. 전국에 폭우로 비가 그야말로 양동이로 퍼붓고 있었어도 나의 강렬한 독서욕을 꺾을 수는 없었다.

 

대망의 TCBC 21권의 마지막 책이다. 사실 나는 11권부터 20권까지 읽지는 못했다. 그저 외전 성격의 마지막 권이 궁금했을 따름이다. 나머지 열권은 시간적 여유가 많으니 천천히 읽어도 되겠지 뭐. 부디 도서관들이 엘리스 피터스 작가의 책들을 신속하게 수급해 주길 바랄 뿐.

 

<특이한 베네딕토회>에는 모두 세 개의 짧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확실히 기존의 구성과는 전혀 다르다. 보통 그전의 시리즈들에서는 하나의 이야기에 살을 붙이는 방식의 서사로 진행되었으니까. 우선 <우드스톡으로 가는 길에 만난 빛>에서는 동방 십자군 전사 출신의 캐드펠 압 메일리르 압 다비드가 자신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어떻게 해서 슈루즈베리 수도원의 수사로 변신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는 법이다. 노르만 왕조의 3대 국앙 헨리 1세의 가신 로제 모뒤를 따라 노르망디 정복에 종군했던 서기 알라드와 캐드펠은 잉글랜드에 도착하는 대로 하나의 재판을 마친 뒤, 모뒤에 대한 봉사를 마치고 제 갈 길을 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캐드펠은 훗날 슈루즈베리 수도원장이 되는 헤리버트 부수도원장을 고난에서 구해내고 그의 뒤를 따라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의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권에 안착하 게 된다.

 

11201125, 노르망디의 바르플뢰르 항을 떠난 헨리 1세의 적장자 윌리엄 애설링과 친구들 그리고 다수의 귀족들을 태운 블랑슈 네프호가 거센 강풍에 좌초되었다. 그리고 그 배에 승선한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헨리 1세 사후, 잉글랜드 전역을 수십년 동안 내전으로 몰아넣은 암흑기가 도래했다.

 

다음 에피소드인 <빛의 가치>에서도 엘리스 피터스는 중세나 지금이나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기득권의 탐욕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안위와 사적 이익을 구하는 부자나 권력자들의 욕심은 끝이 없다. 문득 그런 탐욕의 근원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일신의 영달과 안락한 삶에 대한 끝없는 욕심 때문일까. 자기가 가진 것에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를 발전하게 만든 원동력이라고들 하는데, 그걸 위한 무한 경쟁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는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목격자>에서는 엘리스 피터스 특유의 미스터리 기법과 도대체 누가 범인인가를 추적하는 기술이 잘 드러나 있다. 임대료 징수인 윌리엄 리드가 피습을 당하고, 수금한 임대료를 강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단 유력한 용의자로 그를 세 번 강에서 구한 죽음의 뱃사공마독이 지목된다. 하지만 그의 알리바이는 충분하다. 그 다음에는 그의 망나니 아들 에디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다.

 

하지만 우리의 캐드펠 수사는 그를 용의선상에서 바로 제외한다. 일종의 촉이 발동했다고 해야 할까? 그에게는 갚아야 할 상당한 금액의 벌금이 있지만, 캐드펠은 에디가 아버지를 해치면서까지 그럴 만한 위인은 아니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수도원에 실연당하고 새롭게 유입된 유트로피우스 수도사가 현장에서 목격되었다는 증언에 힘입어 용의자 물망에 오른다. 캐드펠 수사는 그 역시 리드를 피습한 강도 용의자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캐드펠 수사는 행정관과 더불어 범임을 잡기 위한 치밀한 덫을 놓는다. 리드가 피습당하는 장면을 직접 본 목격자가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용의자가 그를 해치우기 위해 야심한 밤에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한 캐드펠 수사와 에디 그리고 행정관은 범인을 기다린다. 과학수사가 일반화된 현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TCBC 시리즈가 13세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너무 짧아서 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요즘 독서가 너무 지지부진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읽을 책들은 항상 차고 넘치지만 나의 독서 속도는 너무 더디다는 게 문제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를 읽다 보니 왠지 중세 영국 역사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이걸 또 책으로 해결해야 하나 싶다. 너튜브 동영상으로 안되나. 결국 돌고 돌아 너튜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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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7-20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날씨 더울 때는 이런 책이 딱일 듯 하네요^^
저도 도서관을 한번 다녀올까봐요^^

레삭매냐 2025-07-20 18:52   좋아요 1 | URL
문득 도서관이라는 시스템은
누가 처음에 만들었는지 궁금
해지네요.

정말 인류에게 꼭 필요한 시설
이라는 생각이...

카스피 2025-07-21 0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 저는 구판으로 캐드펠 수사 시리즈 20권을 갖고 있는데 외전 성격의 1권이 새롭게 출간되었나 보네요.전집의 경우 항상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데 구판과 신판을 섞어 놓으면 조화가 안되서 참 말썽입니다.그렇다고 신판을 20권 새로 사기도 거시기 하고요ㅜ.ㅜ

레삭매냐 2025-07-21 07:40   좋아요 0 | URL
오오 그러시군요!
저도 구판 중고서점에서 봤답니다.
이번에 같은 출판사에서 신판으로
때깔 좋게 나왔더라구요.

지적해 주신 대로, 그런 문제점이
있더라구요. 무려 20권이나 돼서
이걸 다시 사는 것도 그렇고 말이
죠.
 
퇴근길엔 카프카를 - 일상이 여행이 되는 패스포트툰
의외의사실 지음 / 민음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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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일주일 전에 눈여겨보고 있다가 <삼국지>부터 읽고 나서 오늘 결국 읽을 수가 있었다. 결국 읽게 될 책들은 읽게 되는구나. 오늘 아침에는 도서관에 가서 빌려서 읽지 못한 책들을 다 반납하고 왔다. 그리고 다시 빌린 책들도 있고 말이지. 책에 대한 욕심이 끝이 없구나 싶다.

 

의외의사실 작가가 소개하는 책들을 보니 참 다양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춘수 쌤의 <노르웨이의 숲>은 독서모임 책으로까지 읽었는데 왜 기억이 나질 않는 거지. 그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을 적에는 센세이션 그 자체였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읽어 보니 그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춘수 쌤 특유의 허세 그런 느낌 때문일까.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글을 쓰기 위해, 매일 같이 하루에 10KM를 뛰신다고 하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졸업하고 나서는 재즈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고. 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하면서 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인이 바로 춘수 쌤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식의 흐름으로 유명한 버니지아 울프의 <등대로>는 다른 버전으로 두 권이나 사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호기롭게 읽어 보겠다고 도전장을 던졌으나... 결국 읽지 못한 것으로. 그런데 또 의외의사실 작가의 액기스를 읽어 보니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다. 그전에 <등대로>가 책무더기 어디에 끼어 있는지 찾아야 하는 건 아니고. 그리고 보니 <댈러웨이 부인>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맨 끝에 실린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의 <나를 보내지 마>는 항상 영화의 애절한 장면들이 계속해서 생각나게 만들어 준다. 물론 책도 읽었다. 내가 책을 먼저 읽었던가? 아니면 영화를 먼저 보았던가. 어쩌면 이시구로 작가의 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을 꼽으라고 한다면, 헤일셤 출신 복제인간들의 삶에 대한 책인 <나를 보내지 마>를 꼽을 지도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 우리 인간이나 복제인간들이나 유한하다는 점에서 같으면서도 동시에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살아간다는 결정적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가. 영화의 스산한 엔딩은 다시 생각해도 참 슬프고 뭐 그렇다.

 

도끼 선생의 <죄와 벌>은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두 번 읽었다. 처음에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으로. 그리고 두 번째는 문동판으로. 처음에는 여러 개의 다른 이름을 가진 라스콜니코프 때문에 좀 헷갈렸지 아마. 그리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전당포 자매를 참혹하게 살해한 주인공의 행동에 충격을 먹었지. 살면서 모든 이들의 행동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걸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문득 어디서 일러스트로 그린 예의 장면을 보고 따라서 그려본 기억이 난다. 지금이라면 AI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물론 바로 제한 조치를 받았겠지만 말이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이야기도 재밌었다. 이아고라는 악당이 불러일으킨 데스데모나에 대한 오셀로의 의심이 결국 모든 이들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17세기 막장 드라마라고 불러야 하나.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이 그의 생전에 책의 형태로 있지 않았고, 사후에 기억과 배우들에게 주어진 대본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거라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기억의 왜곡과 편집의 오류 같은 건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런 이유로 그의 작품들이 더 흥미진진하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무려 2,500년 전에 소포클레스에 의해 쓰인 막장 오브 막장 드라마인 <오이디푸스> 서사가 여전히 건재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되고 있다는 점도 놀랍지 아니한가.

 

인상 깊게 읽은 어떤 책들은 의외의사실 작가의 도움으로 생생하게 기억이 나기도 하고 또 언젠가 읽어봐야지 하는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반대로 분명히 읽고 리뷰까지 써서 기록해 두었지만, 지금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 책들도 있고 말이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굳이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비용을 동원해서 책을 읽는 건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가질 수가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어쨌든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책들에서 엑기스만 쪽쪽 뽑아내는 기술? 실력에 그저 놀랄 뿐이다. 그렇게 얻은 경이가 새로운 독서나 재독으로 이어진다면 아마 더 바랄 게 없겠지. 그중에 가장 관심이 가는 책은 바로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었다. 가까운 중고서점에 있다고 하기에 사러 가야 하나 싶어서, 혹시나 하고 주문도서들을 검색해 보니 2년 전에 이미 산 책이다. 그런데 그 책은 어디에 가 있나 그래. <보이지 않는 도시들>도 찾게 되면 한 번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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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7-20 1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이지 않는 도시들, 생각할 지점이 많았어요.

레삭매냐 2025-07-20 18:53   좋아요 1 | URL
구매 기록을 보니 샀다고 해서
찾아 보려고 하는데... 책탑 속
에서 찾을 길이 없네요 ㅠㅠ

그렇다면 도서관에 가서 빌려
봐야 하나요.

그레이스 2025-07-20 21:21   좋아요 1 | URL
ㅋㅋ
완전 공감!
 
이문열 삼국지 1 - 도원(桃園)에 피는 의(義)
나관중 지음, 이문열 평역, 정문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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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폭염의 계절이다. 이럴 적에는 그저 시원한 곳에 가서 책 읽는 게 상책이다. 계곡이나 이런 데 가서 시원하게 흐르는 말에 발을 담그고 원없이 책이나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대신 근처 카페에 가서 저렴이 팥빙수를 한 그릇 먹고 나서 자리를 옮겨 독서삼매에 빠져 본다.

 

어려서부터 중국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이런저런 책들을 많이 읽었다. 나관중의 역사소설 <삼국지연의>도 아마 읽었지 싶다. 그런데, 정작 정본(?)으로 해서 읽었나 싶다. 마침 진흥원 서가에 <삼국지> 시리즈가 있어서 이번 여름에는 이걸 한 번 읽어봐야지 하는 마음에 책을 펼쳐 들었다.

 

거의 모든 역사 소설들이 그렇듯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을 가지고 가공한 소설이야말로 서사의 원천이 아닌가 싶다. 워낙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니, 다채로운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고 또 무엇보다 중국 특유의 허풍까지 곁들인다면 인기를 끌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또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여러 비유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 역시 동양의 고전으로 불릴만한 이유가 있겠지.

 

각설하고 본론에 들어가 보자. 한나라 영제 시절, 무려 400여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고조가 세운 한나라는 외척의 발호와 환관의 국정농단 그리고 제국의 무능과 부패가 겹치면서 한 마디로 망해 나라가 망조가 들었다.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다. 그나마 한실에 충성하는 다수의 충신지사들의 활약으로 당장의 위기와 파고들을 넘으며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중이다.

 

보통 중국 역사에서 보면 이럴 때, 항상 반군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태평도에서 출발한 황건적이 난이 바로 한나라 망조에 결정타가 아니었을까. 아 그전에, 일단 나관중 선생은 이야기를 이끌어갈 일단의 주인공들을 소개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유비나 조조 손견 같은 인물이 아닌 바로 유비의 스승 노식이었다. 이 또한 사제관계를 무척이나 중시하는 고대 중국 특유의 설정이 아닌가 싶다.

 

노식에 배운 유비는 한실 중산정왕의 후예로... 사실 그 당시 DNA 조사를 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중이 떠중이가 종실 행세를 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유비 역시 과연 한실의 후예인지에 대해서는 알 도리가 없다. 어쨌든 그의 주장대로, 어느 정도 연관성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대신 누구라도 품을 수 있는 유비의 인품과 인덕을 가진 마성의 남자라고나 할까. 그리하여, 연인 장비와 중죄를 짓고 숨어 살던 관우와 더불어 복사꽃밭에서 결의를 맺는 이른바 도원결의(184)로 삼국지 무대의 시작을 알린다. 물론 도원결의는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로, 이런 출발점 정도는 있어야 서사의 힘이 실리니 꼭 필요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음 등장인물은 삼국지의 실질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패국 초현 사람 맹덕 조조다. 환관 계열의 조상을 둔 조조는 아버지 조숭이 억만금을 써서 태위를 자리를 매수했다고 했던가. 어쨌든 후한 말기 일상이 된 벼슬자리를 금전을 주고 사서 중앙 관계에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유비가 첫 등장 이후, 고향 탁군에서 7년 정도 유협 생활을 하며 대인관계를 쌓은 데 비해 조조는 수도 낙양에서 서슬퍼런 십상시의 아재를 사소한 법위반으로 냉정하게 처리하면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런 것조차 선전활동을 위한 조조의 도박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언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은 시절, 적어도 이 정도의 도발은 해주어야 자신의 방명을 날릴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위촉오로 불리는 삼국시대의 마지막 파트를 담당하게 될 강동의 호랑이 문대 손견도 빼놓을 수가 없다. 연의에서 사실, 초반에 무력으로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한 선수는 바로 손권의 아버지 손문대였다. 오와 회계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지역에서 탄탄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비슷한 또래의 한당을 필두로 해서 황개, 정보 그리고 조무 같은 장수들과 함께 도적들을 정벌하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그 결과, 중앙 조정에서 황건적의 반란이 발생했을 때, 노식-황보숭-주준으로 토벌군을 조직했을 때에도 손문대를 선봉으로 세웠지 아마.

 

한나라를 상징하는 황천이 쇠하고 창천을 타령을 하면서 무서운 기세로 기의한 황건적은 각지에서 종이호랑이 같은 신세로 전락해 버린 관군들을 차례로 격파했다. 이에 지방 토호들을 중심으로 적도로부터 자신의 고장을 지키기 위해 의군들, 그러니까 사병집단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지점이 후한 말기 군벌의 등장을 예고하는 그런 장면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초야에 묻혀 있던 유관장 삼형제 역시 자신들의 무명을 만방에 떨칠 수 있는 난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이런 난세야말로 호시탐탐 천하의 주인 자리를 노리는 영웅호걸들이 바라던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유관장 트리오는 당장 탁현에서 의군 500을 소집해서 병장기를 갖추고, 소쌍과 장세평에게 군마와 군자금까지 얻어 의용대 비슷한 조직으로 황건적과의 전투에 투입된다.

 

500의 군세로 초전부터 100백에 달하는 5만 군세를 자랑하는 황건적을 무찌르는 엄청난 전과를 올리는데 성공한다. 물론 전세를 읽는 유비의 전략과 만인부당의 무용을 자랑하는 관우/장비가 선봉에 서서 그야말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면서 상승군으로서의 모습을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

 

각지에서 기의한 의군들과 관군들의 활약으로 황건적의 반란은 오래가지 않아 진압되었다. 문제는 논공행상 과정에서 유비처럼 관군 소속도 아니면서 맹활약한 의군들에 대한 평가가 환관들의 농락으로 무시되었다는 점이다. 유비도 결국 조그마한 현의 수령 자리가 하나 주어지긴 하지만, 나중에 복이 아니라 화가 되고 말았다.

 

유관장 삼형제의 이야기는 그 정도로 마무리되고, 나머지는 영제가 죽고 아들 소제 변을 미는 하태후와 훗날 헌제가 되는 진류왕 협의 후견자 동태후가 맞붙은 치열한 권력 투쟁 그리고 그 와중에 하태후의 오빠 대장군 하진의 십상시들의 농간으로 죽고 서량의 이리 동탁이 하진의 밀서를 받고 중앙무대로 진출하는 과정들이 이어진다. 나중에 조조와 더불어 중원에서 맞대결을 펼치게 되는 사세오공 집안 출신의 본초 원소는 자신의 주군 하진이 죽자 병사들을 동원해서 한실을 위기로 몰아넣은 환관집단들을 몰살시키는데 성공한다.

 

문제는 서량 자사 동탁이 그 때 마침 등장해서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황건군 진압에서는 별다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유관장 삼형제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코너에 몰렸던 동탁이 모사 이유를 필두로 해서 이각-곽사-번조-장제 4총사를 이끌고 대병을 몰아 한나라의 수도 낙양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내친 김에 소제 변을 폐위시키고, 허수아비 같은 어린 황제 진류왕 변을 헌제로 옹립했다.

 

황제를 포로로 삼고 중앙정부의 실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동탁의 전횡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자신에게 반항하는 한실의 충신들을 가차 없이 처형하고, 황제 버금가는 행세를 하면서 갖은 악행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기 시작했다. 이에 한줌도 채 남지 않은 한조의 충신들이 사도 왕윤을 중심으로 결집해서 조정의 역도 동탁 토벌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호응해서 삼십대의 조맹덕이 사도 왕윤이 소장하고 있던 보검을 빌려 동탁 암살 시도에 나섰다가 그림자 경호를 하던 여포의 등장으로 실패하고, 그대로 도주해 버렸다.

 

도주하던 조조는 중모 현령 진궁의 도움으로 동탁의 마수를 벗어나는데 성공하지만, 오해로 여백사 집안 식구들을 몰살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에 놀란 진궁은 조조의 곁을 떠나는 장면으로 삼국지 1권이 끝난다.

 

처음에 조조는 한실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의지를 품은 한조 충신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황건적 소탕과 엉망으로 돌아가는 조정의 모습을 보고서 한실 부흥의 꿈을 완전히 접어 버렸다. 그리고 난세를 대비해서 고향 패군 초현 그리고 다음에는 진류를 거점으로 삼아 무력의 근원이 되는 사병집단 양성에 나선다. 조조는 결국 무력이 모든 것을 말하게 되는 군벌이 난립하게 되는 시절을 정확하게 예상했던 것이다.

 

유비도 마찬가지였다. 한실에 대한 희망을 버린 조조와 달리, 처음부터 자신의 슬로건이었던 한실 부흥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한중왕을 거쳐 신하들의 추대 속에 촉한의 황제에 자리에 오르지 않았던가. 물론 말년의 그런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아무런 기반도 없이 맨주먹으로 전장의 누빈 유협 집단의 수장 노릇을 해야만 했다. 아마 유비가 제갈 공명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저 그런 이류 군벌집단의 두목으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까.

 

이번에 다시 읽는 <삼국지>는 마치 예전에 한 번 읽었던 내용을 복습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관중이 연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유비 중심의 촉한 정통론의 실체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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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7-14 08: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삼국지는 참 여러가지 번역본이 있는데,실제 나관중의 원본 삼국지연의에는 우리가 읽은 내용과는 달리 너무 간단하고 빠르게 묘사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에서는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가 길게 묘사된 것으로 기억합니다.아무래도 이는 번역을 할 때 원본에 없던 것을 구성하여 넣거나 있는 것을 삭제하는 등 번역자가 자신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평역의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레삭매냐 2025-07-14 09:04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나관중 선생의 원전에 평역를 맡은
분의 주관적 해석과 견해가 다수
반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차 창작이라고나 할까요.

고양이라디오 2025-07-15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권에 생각보다 많은 내용이 있군요. 작년에 <삼국지>를 재밌게 읽었던 터라 반갑네요^^

레삭매냐 2025-07-20 10:37   좋아요 1 | URL
속도를 내서 읽어야 하는데,
날도 덥고 그래서 진도를 빼
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발해야겠습니다.
 
울지 마, 아이야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황가한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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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가 가고 있다. 우연히 응구기 와 티옹오(1938.1.5.~2025.5.28.) 작가가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소식을 인스타를 통해 알게 됐다. 기록을 찾아보니, 응구기 선생의 책은 <한 톨의 밀알> 읽은 게 전부인가 보다. 그래서 그를 추념하는 의미에서 역시 책쟁이는 고인의 책을 읽는 방식을 선택했다. 응구기 선생은 총 8편의 소설을 썼는데, 그의 첫 작품이 바로 <울지 마, 아이야>였다. 어제 퇴근길에 도서관에 들러 이 책을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피의 꽃잎들><십자가 위의 악마>가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 이달에는 그의 작품들을 좀 읽어봐야지 싶다.

 

소설 <울지 마, 아이야>의 주인공은 학교에 다니길 간절하게 소망하는 십대 소년 은조로게와 그의 가족들이다. 은조로게의 아버지 소작농 출신 응고토는 첫 번째 큰 전쟁(1차 세계대전)에 참가해서 영국 식민주의자들을 위해 짐을 나르고, 길을 닦는 일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 오니 땅을 빼앗기고 소작농 신세가 되었다.

 

두 번째 큰 전쟁에는 응고토의 장성한 아들 둘이 참전했다. 흑인들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백인 히틀러와 싸우다가 므왕기는 전사했고, 보로는 고향으로 돌아와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이들은 번듯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응고토는 아들 은조로게에게 기대를 걸고, 없는 살림에 은조로게를 학교에 보낸다. 배움에 대한 열의가 누구보다 강렬했던 은조로게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행복할 따름이다. 모름지기 배움은 이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오늘날의 현실이 좀 갑갑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응구기 작가는 백인 지주 미스터 하울랜즈 수하에서 일하는 응고토의 고단한 삶을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보여준다. 케냐 땅의 진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응고토들은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이 되는 땅이 없어 고통받는다. 응고토의 아들들은 백인 지주의 하수인 역할을 아버지에게 반발한다. 또 한편에서는 같은 흑인들에게 배신자 취급받는 매판자본가 자코보와의 갈등에도 방점을 찍는다.

 

두 번째 '큰 전쟁'이 끝난 뒤, 1950년대 초반 전세계적으로 민족해방운동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케냐와 키쿠유족들의 세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검은 모세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조모 케냐타의 등장과 마우마우단의 활동은 응고토의 아들들인 보로와 코리의 뜨거운 가슴에 불을 질렀다.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오랜 억압과 착취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이들은 대대적인 파업을 조직했다가, 자코보를 앞세운 지배계급의 강력한 진압에 무릎을 꿇게 된다. 어쩌면 이런 실패는 뒤에 도래할 더 큰 도약을 위한 준비단계가 아니었을까.

 

1부에서 이런 다양한 위기들이 조성되었다면, 2부에서는 파국으로 치닫는 어둠의 시기에 대한 서사가 이어진다. 검은 모세가 19521021일 체포되었고, 재판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지방관이 된 하울랜즈와 치프이자 시민군의 대장이 된 자코보는 키쿠유랜드의 사람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한다. 특히 하울랜즈는 이른바 이이제이 전술로 치프를 앞세워 응고토들을 괴롭힌다. 자코보는 같은 흑인들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민족의 배신자라는 굴레를 쓰게 된다.

 

서로 증오하고 분열한 이들을 기다리는 건 파국 뿐이었다. 통금이 선언되고, 응고토 식구들이 잡혀갔다가 벌금을 내고 풀려나는 일이 벌어진다. 가부장으로서 응고토의 권위는 바닥으로 추락한다. 결국 숲을 기반으로 한 마우마우단의 저항과 발호가 시작된다. 파업이나 항의 같은 방식으로는 키쿠유 사람들이 원하는 자유와 잃어버린 유산 그리고 땅을 되찾을 수 없다는 절망에 도달한 것이다. “큰 전쟁에서 전쟁기술을 배운 보로는 숲 사람들의 두목이 되어 자코보를 없앨 것을 다짐한다. 결국 피를 피로 씻는 복수가 시작된다.

 

서로에 대한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교육을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은조로게의 꿈마저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어쩌면 이 과정들은 19631212일 케냐의 독립까지 계속될 키쿠유 사람들 투쟁의 역사를 직접 보고 느낀 응구기 선생의 체험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두 번이나 협박을 받던 자코보가 살해되고, 범인으로 지목된 응고토의 아들들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는 기꺼이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한다. 무장 순찰대원을 동원한 지방관 하울랜즈는 응고토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고문한다. 이런 가운데 은조로게는 집안 원수의 딸인 므위하키와의 사랑을 키워 나간다. 물론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아버지 응고토는 결국 죽고, 보로는 사형을 앞두고 있고, 카마우는 종신형 그리고 코리는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됐다. 한 마디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 버렸다. 어찌어찌해서 간신히 살아남은 은조로게의 내일에 과연 태양이 떠오를 것인가.

 

응구기 선생이 이 책을 발표한 19627월은 아직 케냐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이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가장 어두운 그런 시기가 아니었을까. 응고토와 그의 아들들은 식민제국주의자들을 위해 큰 전쟁에 나가 죽고 다쳤지만,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가지고 있던 땅마저 빼앗기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그들에게 교육을 통한 성공은 너무나 요원한 기대일 뿐이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각성한 보로와 카마우 그리고 코리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와 상실한 유산을 되찾기 위해 투쟁에 나선다. 그 누가 이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할 것인가.

 

사랑하는 므위하키마저 잃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은조로게를 마지막 순간에 구한 것은 이제는 해체된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삶의 터전을 구하고 가족들을 위해 싸움을 불사한 응고토는 어쩌면 아들들의 비난을 받을 만큼 겁쟁이는 아니었다. 은조로게 역시 자책하는 것만큼의 겁쟁이는 아니었노라고 위로해 주고 싶다.

 

이제야 응구기 선생의 책을 두 권 읽었다. 기회가 된다면 <피의 꽃잎들><십자가 위의 악마>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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