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아프리카누스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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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민 말루프의 <레오 아프리카누스>가 드디어 출간됐다. 세상에 이 책이 나왔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그리고 바로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지만, 정작 다 읽는 데는 두달여가 걸렸다. 사실 집중해서 읽는다면 많이 걸려도 일주일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상관없다. 드디어 다 읽었고, 독서는 역시나 대만족스러웠다.

15세기 말, 서방에는 그라나다로 알려진 알 안달루스의 가르나타 출신의 알 하산 무함마드 알와잔이 바로 이 책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주인공이다. 무슬림 가정에서 자란 하산은 카스티야 왕국의 레콩키스타로 나스르 왕조가 가르나타를 잃은 뒤, 마그레브의 페스로 이주했다. 이 부분은 왠지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타리크 알리의 <석류 나무 그늘 아래>의 후속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수한 그라나다 시절을 뒤로 하고, 실향민이 된 하산 가족은 전혀 새로운 환경의 페스에서 적응해야 했다. 그라나다에서 검량관으로 활동하던 하산의 아버지는 페스에서 애증의 관계를 엮어간다. 어려서부터 책과 학문을 사랑한 주인공 하산(미래의 조반니 레오)은 페스에서 착실하게 학업을 쌓아 가면서 미래의 자산을 쌓아간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는 외숙부와 함께 말리 왕국의 팀북투로 외교 사절로 출동하기도 한다. 사막을 가로 지르는 카라반의 일원으로 하산을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평생의 친구가 될 하룬과의 관계도 페스에서 시작된다. 하룬은 하산의 누이 마리암과 사랑에 빠지지만, 타향에서의 삶은 하산 가족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하산에게도 대운이 터서 재물을 쌓아 상인으로 성공하는 입지전적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여인 복도 많아서 가는 곳마다 애인들이 끊이지 않는다. 외숙부가 죽고 난 뒤, 그의 딸인 파티마와 결혼해서 딸 사르와트를 낳기도 한다. 하지만 누이 마리암을 괴롭히던 자르왈리를 하룬이 암살하면서, 페스에서 하산은 추방당하는 신세가 된다.

여기까지가 역사 소설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가르나타와 페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다음 하산의 무대는 맘무르 왕조의 술탄 칸수가 지배하는 카이로다. 당시 하산 같이 가르나타에서 쫓겨난 무슬림들은 동방에서 한창 부상 중이던 오스만 제국이 가르나타를 다시 카스티야 왕국의 손에서 해방시켜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지금은 포르투갈 세력과 카스티야 왕국의 도전으로 마그레브 상당 부분이 기독교도 진영에 떨어졌지만, 맘루크 왕조와 오스만 제국이 힘을 합쳐 서진을 개시한다면 무슬림 제국의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부활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카이로에서도 하산은 누르라는 오스만 제국 술탄 조카 미망인 누르와 만나 로맨스를 꽃피운다. 하산이야말로 16세기판 '펠릭스'가 아닐까 싶다.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오랜 친구 하룬에게 발탁되어 하산은 이번에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가게 된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여러 제국을 오가면서, 16세기에 이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인사가 얼마나 되었을까 과연 의문이 든다. 다양한 언어에 능통한 하산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외교 사절로 유감 없는 활약을 펼친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오스만 제국이 사실은 맘루크 왕조와 동맹을 맺을 생각이 아니라, 맘루크가 다스리는 이집트를 복속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온 하산은 이집트 공략에 나선 오스만 제국과의 치열한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술탄 칸수에 이어 맘루크 왕조의 마지막 술탄의 자리에 오른 투만베이는 월등한 군세를 자랑하는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지만, 결국 게릴라전 끝에 배신당하고 포로가 되어 처형당한다. 한 명의 문제적 인간이 이 모든 아수라장 속에서 생존에 성공하고 삶을 영위해갈 수 있다는 상황이 너무 신기하게 다가왔다.

이것만으로도 하산의 파란만장한 삶은 충분히 후대에 기억할 만한 그런 서사였다. 하지만 주인공의 간난신고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 무대인 로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성지 메카 순례를 마치고 어머니와 가족이 기다리는 튀니스로 가던 제르바에서 하산은 기독교 해적에게 납치당하고 만다. 그렇게 기독교 노예 신세로 전락한 무슬림 지식인 하산은 로마 교황 레오 10세가 다스리는 로마의 산탄젤로성으로 끌려간다.

그 누구보다도 세속적이었던 메디치 가문 출신의 레오 10세에게 가르나타-아프리카 출신 지식인이자 외교관이었던 하산은 소중한 존재였다. 동방의 오스만 제국은 술레이만 대제가 지휘하는 정복 사업으로 로도스를 함락시키고, 서방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부다페스트와 빈이 다음 목표였다. 서방에서는 카스티야와 신성로마제국을 아우른 칼 5세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면서 이탈리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레오 10세 그리고 그의 조카 줄리오 추기경(훗날 클레멘스 7세)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교황령 확대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목표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등장한 하산은 그야말로 신이 보내준 사자가 아니었을까. 이에 레오 10세는 하산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키고, 조반니 레오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양자로 삼을 정도의 절대적 신임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레오 10세는 줄리오 추기경의 유대계 정부 마달레나를 이제 레오 아프리카누스가 된 하산의 부인으로 삼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마달레나는 레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그가 바라던 아들 주세페를 안겨 준다.

로마에서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기념비적인 저술 <아프리카 지리지>을 쓸 준비하는 동시에, 로마 지식인들에게 아랍어를 가르키는 교사의 역할도 맡게 된다. 물론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라틴어와 기독교 교리 그리고 복음서를 배우는 학생이기도 했다. 그의 제자 중에 작센 출신으로 한스라는 이름의 사제가 있었는데 훗날 한스 사제가 그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

로마에서 계속해서 꽃길을 걸을 것만 같았던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운명은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던 레오 10세가 선종하고, 하드리아노 6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운명이 다시 꼬이기 시작한다. 산탈젤로성의 죄수 같은 신세로 유폐되어 있던 그는 개혁적 성향의 하드리아노 6세가 선종하고 줄리오 추기경이 클레멘스 7세가 되면서 다시 한 번 인생역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고난이 끝난 건 아니었다.

클레멘스 7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칼 5세 대신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를 자신의 전략적 파트너로 삼았고, 1525년 2월 24일 파비아 전투에서 코냑 동맹군이 칼 5세의 제국군에게 대패하고 포로로 잡히면서 교황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같은 신세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1527년 5월 6일 란츠크네이트 용병대가 주축이 된 제국군이 로마에 진입하면서 비극의 서막이 올랐다. 이 사건은 훗날 "사코 디 로마(로마 약탈)'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우리의 주인공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이 대살륙전 속에서도 신의 가호와 옛 제자 한스 사제의 도움으로 살아남는 무쌍의 정수를 보여준다.

우선 격변의 16세기를 살아낸 문제적 실존인물 레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는 마치 "포레스트 검프"처럼 가르나타 함락에서부터 시작해서, 페스로의 강제 이주, 마그레브 일대를 주유하고 맘루크 제국의 멸망을 지근거리에서 직접 목격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1세를 알현하기도 했다. 로마에서는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의 비호를 받기도 했다. 로마 약탈은 레오 아프리카누스 일생에 방점을 찍는 대사건이었다. 그는 정말 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을 체험한 몇 세기에 나올까 말까한 그런 인물이 아니었던가.

아민 말루프는 이 방대한 대서사시의 신화적 주인공 레오 아프리카누스를 역사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현대에 소환하는데 성공했다. 영국 BBC에서는 이미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고 한다. 무슬림과 기독교 세계를 경험하고, 명멸하는 제국들의 흥망성쇠를 직접 목격한 매력적인 인물 레오 아프리카누스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를 기대해 본다면 너무 과도한 기대일까. 대가의 작품은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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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25 2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읽고싶어지게 만드는 리뷰입니다

레삭매냐 2025-07-25 20:56   좋아요 0 | URL
리뷰어에게 최고의 상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의 제철은 지금
섬멍 지음 / 창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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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토 파실린나의 절판책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만나 앉은 자리에서 읽은 책이다. 모두 8개의 이야기들로 구성된 웹툰이다. 우리네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단 말이지.

 

어라, 맨 처음 이야기가 뭐였더라. 무당산에서 장삼봉 태사부에게 태극권을 연마하던 장무기처럼 그새 까먹은 모양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바로 도루묵이다. 임금님이 피란 시절에 하도 맛나게 자셔서 은어라고 하다가, 나중에 먹어 보니 별 맛이 없어 도루 묵이라고 부르라고 했던가.

 

벼는 보통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데 이 녀석 도루묵은 익을수록 고개를 빳빳이 쳐든다고. 그 이유는 알배기가 한 녀석들이 익으면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던가. 톡톡 터지는 알맛에 도루묵을 먹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네 먹거리에는 그런 재미도 있어야 또 맛도 배가가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비린내 나는 녀석들을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리.

 

마라샹궈에서 발전한 게 마라탕이라고 했던가. 고수도 그렇지만, 향신료 특유의 향과 맛 때문에 잘 찾지 않는 음식이지 싶다. 그 이야기에 같은 동네에 사시면서 호구조사하시는 아저씨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었던가. 너무 금방 후루룩 읽다 보니 이야기들이 뒤죽박죽된 그런 느낌이랄까. 그냥 스몰톡 정도로 하고 넘어가도 좋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어디 가시나라고 묻는다면 네 어디가요라고... 대답하면 너무 버릇 없어 보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답답형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진다면 그 또한 낭패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물경 하루에 1미터씩 자랄 수도 있다는 죽순, 죽피에 대한 이야기도 재밌다. 그리고 보니 얼마 전에 들른 쭈꾸미 전문점에서 대나무를 왕창 베어 버렸는데 그 뒤에 얼마 안 있다가 방문해 보니 훤하던 대밭에 대나무들이 그새 자라 있더라. 그 정도란 말이지. 문득 그 때 자른 대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좀 궁금해졌다.

 

음식을 해서 먹는 즐거움도 있지만, 식재료를 준비하는 과정도 재밌단 말이지. 물론 음식 만들기라는 노동에 들어가는 수고를 빼놓고 또 이야기할 순 없겠지만. 남이 해주는 건, 라면도 맛있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라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주인공과 함께 사는 망토가 장을 보러 갔다가 체크카드에 잔액이 없어서 낭패를 당한 이야기도 재밌었다. 가끔 그렇게 체크카드 한 장 달랑 들고 무언가 사러 갔다가 펑크가 나면 참 난감할 것 같다.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항상 마트에서 준비된 자세로 계산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는 사람으로서 또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는 보통 집에서 음식 준비보다는 뒤처리를 담당하는 역할을 자처한다. 우리 동생은 설거지가 그렇게 하기 싫다고 하는데, 예전에 룸메이트랑 같이 살던 시절부터 설거지를 해와서 그런지 나는 설거지에 대한 그런 거부감은 1도 없다. 밥 먹는 대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설거지 작전에 투입하는 편이다. 그리고 개수대에 설거지가 쌓여 있는 꼴도 보지 못한다. 누가 먹었던 간에 바로 설거지부터 한다. 밥을 먹었으니 그 다음에 내 차례가 아닌가. 망토가 초반에 상을 펴라고 했더니만 정말 상만 펴는 장면을 보고는... 그게 상차림 끝은 아니지 않은가. 이 양반 너무 센스가 없으신 건 아니고. 하긴 그런 이야기가 먹거리 차림새에 들어가야 또 이야기가 다채로워질테니까.

 

참 그리고 보니 원제가 제철음식에 관한 것이었지. 누가 모르는가. 다들 제철에 나는 식재료를 이용해서 무언가 한 끼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걸. 아 그리고 보니 마지막 에피소드가 냉면에 대한 이야기 아니었나. 사실 냉면이 무슨 영양가 있는 음식이라고. 순전히 여름에 시원하게 즐기는 맛으로 먹는 게 아닌가. 요즘에는 냉면값도 하도 올라서 선뜻 먹게 되질 않는다. 만화에서는 다시다를 이용한 육수내기 기법을 보여주는 것 같던데 말이지. 마트에 들렀다가 다시마를 보고는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요즘에는 밀키트 냉면으로도 괜찮은 녀석들이 많아서 간단하게 먹기 부담이 없지 싶다. 고기 한 점 들어가지 않은 냉면 12,000원은 솔직히 너무 비싼 거 아니구.

 

닐이 너무 덥다 보니, 한 끼 챙기기가 쉽지 않다. 더위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부디 여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이 더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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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고 - 대항해 시대와 우연의 역사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4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육혜원 옮김 / 이화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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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로운 타이밍에 다른 출판사에서 같은 책이 출간됐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아메리고>가 하나는 이화북스에서, 또 다른 하나는 이글루라는 출판사에서 나왔다. 나의 픽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꾸준하게 내고 있는 이화북스였다. 문득 슈테판 츠바이크의 저작권이 소멸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50쪽 남짓한 <아메리고>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 아니 인식자로 알려진 피렌체 출신의 항해사이자 지리학자, 사실은 상인이었지만,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대한 이야기다. 궁금하지 않은가? 모두가 인류의 네 번째 대륙으로 알려진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아메리카 대륙이 콜럼비아가 아닌 아메리고 베스투피의 이름을 딴 아메리카란 말인가.

 

역시 서양 인문학에 조예가 깊은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 연원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사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을 아시아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항해 시대, 콜럼버스가 이끈 선단의 최종 목표는 아시아로 가는 최단 거리의 항로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콜럼버스는 자신이 발견한 대륙이 아시아라고 죽는 날까지 믿었다고 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겠지. 대항해 시대 모든 탐험가들의 목표는 항료가 넘쳐나는 말루쿠 제도에 가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달랐다. 콜럼버스에 비해 후발주자였던 베스푸치는 15세기 말 경, 아메리카 대륙의 남반부인 브라질에 상륙하면서 그곳이 아시아의 목적지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파악했다. 바로 이런 명징한 인식이 그를 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베스푸치는 계속되는 오해와 우연의 작동으로 문두스 노부스(Mundus Novus, 신세계)를 발견한 레전드가 되었다.

 

츠바이크는 베스푸치가 그럴만한 업적을 이룬 위인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논증한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작동하는 법이라고 전설적 전기작가는 말한다.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이룬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무명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가 하면 바로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경우처럼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주변의 조건과 상황들 덕분에 역사적 인물이 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참 다이내믹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공평하지만 동시에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를 전설로 만든 일련의 저작들이 당시 인쇄업자들의 농간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츠바이크는 지적한다. 1497년의 항해는 1499년의 실제 항해기록에서 파생된 왜곡된 저작이라는 점이다. 그런 모순들 때문에 베스푸치는 당대 저명한 라스 카사스 사제 같은 이들에게 신랄한 비판과 공격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베스푸치가 직접 나서서 콜럼버스의 성공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깎아 내렸던가? 그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그 둘은 서로를 인정하는 사이였다는 점이 서간을 통해 밝혀졌다.

 

신대륙 발견 이래, 콜럼버스를 필두로 한 스페인 정복자들이 현지에서 저지른 악행들과 수탈의 역사들이 용서되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해 강탈(?)된 대륙 이름의 어쩌면 원주인일 수도 있는 콜럼버스에 대한 재평가의 과정을 거치고, 이번에는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역습을 당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속도감 있게 다루어진다.

 

내가 주관적으로 판단해 볼 때,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역사의 무대에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자리에 오해와 우연 그리고 타의에 의해 올라간 대표적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룬 업적에 비해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대륙에 이름을 붙일 정도는 아니었단 말이다. 물론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콜럼버스가 하지 못한, 새로운 대륙에 대한 인식은 탁월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모든 것을 고치겠다고 아메리카 대륙을 콜럼비아라고 부르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을까. 잘못된 것도 역사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광기와의 우연의 역사> 시리즈에서 츠바이크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자신의 놀라운 관찰력과 분석력을 보여준 바 있다. 이번 <아메리고>에서도 오해와 우연이 빚어내는 놀라운 역사의 드라마에 대한 자신의 접근 방식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내가 이래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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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7-22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광기와 우연의 역사와는 다른 책이네요?!
같은 책인가 했어요

레삭매냐 2025-07-22 21:57   좋아요 1 | URL
비스무레하지만 아주 다른
책이랍니다.

정말 오래 전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 읽
은 생각이 나네요.
다시 한 번 읽어봐야지 싶
습니다.

카스피 2025-07-23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광기와 우연의 역사 읽은 기억이 나네요^^

레삭매냐 2025-07-23 11:08   좋아요 0 | URL
츠바이크 선생의 저작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
 
특이한 베네딕토회 : 캐드펠 수사의 등장 캐드펠 수사 시리즈 21
엘리스 피터스 지음, 박슬라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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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희망도서로 신청한 엘리스 피터스의 <특이한 베네딕토회 : 캐드펠 수사의 등장>이 도서관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제 바로 대출하러 달려갔다. 전국에 폭우로 비가 그야말로 양동이로 퍼붓고 있었어도 나의 강렬한 독서욕을 꺾을 수는 없었다.

 

대망의 TCBC 21권의 마지막 책이다. 사실 나는 11권부터 20권까지 읽지는 못했다. 그저 외전 성격의 마지막 권이 궁금했을 따름이다. 나머지 열권은 시간적 여유가 많으니 천천히 읽어도 되겠지 뭐. 부디 도서관들이 엘리스 피터스 작가의 책들을 신속하게 수급해 주길 바랄 뿐.

 

<특이한 베네딕토회>에는 모두 세 개의 짧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확실히 기존의 구성과는 전혀 다르다. 보통 그전의 시리즈들에서는 하나의 이야기에 살을 붙이는 방식의 서사로 진행되었으니까. 우선 <우드스톡으로 가는 길에 만난 빛>에서는 동방 십자군 전사 출신의 캐드펠 압 메일리르 압 다비드가 자신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어떻게 해서 슈루즈베리 수도원의 수사로 변신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는 법이다. 노르만 왕조의 3대 국앙 헨리 1세의 가신 로제 모뒤를 따라 노르망디 정복에 종군했던 서기 알라드와 캐드펠은 잉글랜드에 도착하는 대로 하나의 재판을 마친 뒤, 모뒤에 대한 봉사를 마치고 제 갈 길을 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캐드펠은 훗날 슈루즈베리 수도원장이 되는 헤리버트 부수도원장을 고난에서 구해내고 그의 뒤를 따라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의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권에 안착하 게 된다.

 

11201125, 노르망디의 바르플뢰르 항을 떠난 헨리 1세의 적장자 윌리엄 애설링과 친구들 그리고 다수의 귀족들을 태운 블랑슈 네프호가 거센 강풍에 좌초되었다. 그리고 그 배에 승선한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헨리 1세 사후, 잉글랜드 전역을 수십년 동안 내전으로 몰아넣은 암흑기가 도래했다.

 

다음 에피소드인 <빛의 가치>에서도 엘리스 피터스는 중세나 지금이나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기득권의 탐욕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안위와 사적 이익을 구하는 부자나 권력자들의 욕심은 끝이 없다. 문득 그런 탐욕의 근원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일신의 영달과 안락한 삶에 대한 끝없는 욕심 때문일까. 자기가 가진 것에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를 발전하게 만든 원동력이라고들 하는데, 그걸 위한 무한 경쟁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는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목격자>에서는 엘리스 피터스 특유의 미스터리 기법과 도대체 누가 범인인가를 추적하는 기술이 잘 드러나 있다. 임대료 징수인 윌리엄 리드가 피습을 당하고, 수금한 임대료를 강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단 유력한 용의자로 그를 세 번 강에서 구한 죽음의 뱃사공마독이 지목된다. 하지만 그의 알리바이는 충분하다. 그 다음에는 그의 망나니 아들 에디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다.

 

하지만 우리의 캐드펠 수사는 그를 용의선상에서 바로 제외한다. 일종의 촉이 발동했다고 해야 할까? 그에게는 갚아야 할 상당한 금액의 벌금이 있지만, 캐드펠은 에디가 아버지를 해치면서까지 그럴 만한 위인은 아니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수도원에 실연당하고 새롭게 유입된 유트로피우스 수도사가 현장에서 목격되었다는 증언에 힘입어 용의자 물망에 오른다. 캐드펠 수사는 그 역시 리드를 피습한 강도 용의자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캐드펠 수사는 행정관과 더불어 범임을 잡기 위한 치밀한 덫을 놓는다. 리드가 피습당하는 장면을 직접 본 목격자가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용의자가 그를 해치우기 위해 야심한 밤에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한 캐드펠 수사와 에디 그리고 행정관은 범인을 기다린다. 과학수사가 일반화된 현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TCBC 시리즈가 13세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너무 짧아서 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요즘 독서가 너무 지지부진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읽을 책들은 항상 차고 넘치지만 나의 독서 속도는 너무 더디다는 게 문제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를 읽다 보니 왠지 중세 영국 역사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이걸 또 책으로 해결해야 하나 싶다. 너튜브 동영상으로 안되나. 결국 돌고 돌아 너튜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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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7-20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날씨 더울 때는 이런 책이 딱일 듯 하네요^^
저도 도서관을 한번 다녀올까봐요^^

레삭매냐 2025-07-20 18:52   좋아요 1 | URL
문득 도서관이라는 시스템은
누가 처음에 만들었는지 궁금
해지네요.

정말 인류에게 꼭 필요한 시설
이라는 생각이...

카스피 2025-07-21 0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 저는 구판으로 캐드펠 수사 시리즈 20권을 갖고 있는데 외전 성격의 1권이 새롭게 출간되었나 보네요.전집의 경우 항상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데 구판과 신판을 섞어 놓으면 조화가 안되서 참 말썽입니다.그렇다고 신판을 20권 새로 사기도 거시기 하고요ㅜ.ㅜ

레삭매냐 2025-07-21 07:40   좋아요 0 | URL
오오 그러시군요!
저도 구판 중고서점에서 봤답니다.
이번에 같은 출판사에서 신판으로
때깔 좋게 나왔더라구요.

지적해 주신 대로, 그런 문제점이
있더라구요. 무려 20권이나 돼서
이걸 다시 사는 것도 그렇고 말이
죠.
 
퇴근길엔 카프카를 - 일상이 여행이 되는 패스포트툰
의외의사실 지음 / 민음사 / 2018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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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일주일 전에 눈여겨보고 있다가 <삼국지>부터 읽고 나서 오늘 결국 읽을 수가 있었다. 결국 읽게 될 책들은 읽게 되는구나. 오늘 아침에는 도서관에 가서 빌려서 읽지 못한 책들을 다 반납하고 왔다. 그리고 다시 빌린 책들도 있고 말이지. 책에 대한 욕심이 끝이 없구나 싶다.

 

의외의사실 작가가 소개하는 책들을 보니 참 다양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춘수 쌤의 <노르웨이의 숲>은 독서모임 책으로까지 읽었는데 왜 기억이 나질 않는 거지. 그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을 적에는 센세이션 그 자체였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읽어 보니 그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춘수 쌤 특유의 허세 그런 느낌 때문일까.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글을 쓰기 위해, 매일 같이 하루에 10KM를 뛰신다고 하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졸업하고 나서는 재즈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고. 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하면서 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인이 바로 춘수 쌤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식의 흐름으로 유명한 버니지아 울프의 <등대로>는 다른 버전으로 두 권이나 사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호기롭게 읽어 보겠다고 도전장을 던졌으나... 결국 읽지 못한 것으로. 그런데 또 의외의사실 작가의 액기스를 읽어 보니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다. 그전에 <등대로>가 책무더기 어디에 끼어 있는지 찾아야 하는 건 아니고. 그리고 보니 <댈러웨이 부인>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맨 끝에 실린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의 <나를 보내지 마>는 항상 영화의 애절한 장면들이 계속해서 생각나게 만들어 준다. 물론 책도 읽었다. 내가 책을 먼저 읽었던가? 아니면 영화를 먼저 보았던가. 어쩌면 이시구로 작가의 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을 꼽으라고 한다면, 헤일셤 출신 복제인간들의 삶에 대한 책인 <나를 보내지 마>를 꼽을 지도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 우리 인간이나 복제인간들이나 유한하다는 점에서 같으면서도 동시에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살아간다는 결정적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가. 영화의 스산한 엔딩은 다시 생각해도 참 슬프고 뭐 그렇다.

 

도끼 선생의 <죄와 벌>은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두 번 읽었다. 처음에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으로. 그리고 두 번째는 문동판으로. 처음에는 여러 개의 다른 이름을 가진 라스콜니코프 때문에 좀 헷갈렸지 아마. 그리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전당포 자매를 참혹하게 살해한 주인공의 행동에 충격을 먹었지. 살면서 모든 이들의 행동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걸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문득 어디서 일러스트로 그린 예의 장면을 보고 따라서 그려본 기억이 난다. 지금이라면 AI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물론 바로 제한 조치를 받았겠지만 말이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이야기도 재밌었다. 이아고라는 악당이 불러일으킨 데스데모나에 대한 오셀로의 의심이 결국 모든 이들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17세기 막장 드라마라고 불러야 하나.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이 그의 생전에 책의 형태로 있지 않았고, 사후에 기억과 배우들에게 주어진 대본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거라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기억의 왜곡과 편집의 오류 같은 건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런 이유로 그의 작품들이 더 흥미진진하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무려 2,500년 전에 소포클레스에 의해 쓰인 막장 오브 막장 드라마인 <오이디푸스> 서사가 여전히 건재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되고 있다는 점도 놀랍지 아니한가.

 

인상 깊게 읽은 어떤 책들은 의외의사실 작가의 도움으로 생생하게 기억이 나기도 하고 또 언젠가 읽어봐야지 하는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반대로 분명히 읽고 리뷰까지 써서 기록해 두었지만, 지금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 책들도 있고 말이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굳이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비용을 동원해서 책을 읽는 건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가질 수가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어쨌든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책들에서 엑기스만 쪽쪽 뽑아내는 기술? 실력에 그저 놀랄 뿐이다. 그렇게 얻은 경이가 새로운 독서나 재독으로 이어진다면 아마 더 바랄 게 없겠지. 그중에 가장 관심이 가는 책은 바로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었다. 가까운 중고서점에 있다고 하기에 사러 가야 하나 싶어서, 혹시나 하고 주문도서들을 검색해 보니 2년 전에 이미 산 책이다. 그런데 그 책은 어디에 가 있나 그래. <보이지 않는 도시들>도 찾게 되면 한 번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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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7-20 1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이지 않는 도시들, 생각할 지점이 많았어요.

레삭매냐 2025-07-20 18:53   좋아요 1 | URL
구매 기록을 보니 샀다고 해서
찾아 보려고 하는데... 책탑 속
에서 찾을 길이 없네요 ㅠㅠ

그렇다면 도서관에 가서 빌려
봐야 하나요.

그레이스 2025-07-20 21:21   좋아요 1 | URL
ㅋㅋ
완전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