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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아프리카누스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5년 6월
평점 :

출간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민 말루프의 <레오 아프리카누스>가 드디어 출간됐다. 세상에 이 책이 나왔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그리고 바로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지만, 정작 다 읽는 데는 두달여가 걸렸다. 사실 집중해서 읽는다면 많이 걸려도 일주일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상관없다. 드디어 다 읽었고, 독서는 역시나 대만족스러웠다.
15세기 말, 서방에는 그라나다로 알려진 알 안달루스의 가르나타 출신의 알 하산 무함마드 알와잔이 바로 이 책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주인공이다. 무슬림 가정에서 자란 하산은 카스티야 왕국의 레콩키스타로 나스르 왕조가 가르나타를 잃은 뒤, 마그레브의 페스로 이주했다. 이 부분은 왠지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타리크 알리의 <석류 나무 그늘 아래>의 후속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수한 그라나다 시절을 뒤로 하고, 실향민이 된 하산 가족은 전혀 새로운 환경의 페스에서 적응해야 했다. 그라나다에서 검량관으로 활동하던 하산의 아버지는 페스에서 애증의 관계를 엮어간다. 어려서부터 책과 학문을 사랑한 주인공 하산(미래의 조반니 레오)은 페스에서 착실하게 학업을 쌓아 가면서 미래의 자산을 쌓아간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는 외숙부와 함께 말리 왕국의 팀북투로 외교 사절로 출동하기도 한다. 사막을 가로 지르는 카라반의 일원으로 하산을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평생의 친구가 될 하룬과의 관계도 페스에서 시작된다. 하룬은 하산의 누이 마리암과 사랑에 빠지지만, 타향에서의 삶은 하산 가족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하산에게도 대운이 터서 재물을 쌓아 상인으로 성공하는 입지전적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여인 복도 많아서 가는 곳마다 애인들이 끊이지 않는다. 외숙부가 죽고 난 뒤, 그의 딸인 파티마와 결혼해서 딸 사르와트를 낳기도 한다. 하지만 누이 마리암을 괴롭히던 자르왈리를 하룬이 암살하면서, 페스에서 하산은 추방당하는 신세가 된다.
여기까지가 역사 소설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가르나타와 페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다음 하산의 무대는 맘무르 왕조의 술탄 칸수가 지배하는 카이로다. 당시 하산 같이 가르나타에서 쫓겨난 무슬림들은 동방에서 한창 부상 중이던 오스만 제국이 가르나타를 다시 카스티야 왕국의 손에서 해방시켜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지금은 포르투갈 세력과 카스티야 왕국의 도전으로 마그레브 상당 부분이 기독교도 진영에 떨어졌지만, 맘루크 왕조와 오스만 제국이 힘을 합쳐 서진을 개시한다면 무슬림 제국의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부활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카이로에서도 하산은 누르라는 오스만 제국 술탄 조카 미망인 누르와 만나 로맨스를 꽃피운다. 하산이야말로 16세기판 '펠릭스'가 아닐까 싶다.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오랜 친구 하룬에게 발탁되어 하산은 이번에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가게 된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여러 제국을 오가면서, 16세기에 이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인사가 얼마나 되었을까 과연 의문이 든다. 다양한 언어에 능통한 하산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외교 사절로 유감 없는 활약을 펼친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오스만 제국이 사실은 맘루크 왕조와 동맹을 맺을 생각이 아니라, 맘루크가 다스리는 이집트를 복속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온 하산은 이집트 공략에 나선 오스만 제국과의 치열한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술탄 칸수에 이어 맘루크 왕조의 마지막 술탄의 자리에 오른 투만베이는 월등한 군세를 자랑하는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지만, 결국 게릴라전 끝에 배신당하고 포로가 되어 처형당한다. 한 명의 문제적 인간이 이 모든 아수라장 속에서 생존에 성공하고 삶을 영위해갈 수 있다는 상황이 너무 신기하게 다가왔다.
이것만으로도 하산의 파란만장한 삶은 충분히 후대에 기억할 만한 그런 서사였다. 하지만 주인공의 간난신고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 무대인 로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성지 메카 순례를 마치고 어머니와 가족이 기다리는 튀니스로 가던 제르바에서 하산은 기독교 해적에게 납치당하고 만다. 그렇게 기독교 노예 신세로 전락한 무슬림 지식인 하산은 로마 교황 레오 10세가 다스리는 로마의 산탄젤로성으로 끌려간다.
그 누구보다도 세속적이었던 메디치 가문 출신의 레오 10세에게 가르나타-아프리카 출신 지식인이자 외교관이었던 하산은 소중한 존재였다. 동방의 오스만 제국은 술레이만 대제가 지휘하는 정복 사업으로 로도스를 함락시키고, 서방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부다페스트와 빈이 다음 목표였다. 서방에서는 카스티야와 신성로마제국을 아우른 칼 5세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면서 이탈리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레오 10세 그리고 그의 조카 줄리오 추기경(훗날 클레멘스 7세)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교황령 확대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목표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등장한 하산은 그야말로 신이 보내준 사자가 아니었을까. 이에 레오 10세는 하산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키고, 조반니 레오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양자로 삼을 정도의 절대적 신임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레오 10세는 줄리오 추기경의 유대계 정부 마달레나를 이제 레오 아프리카누스가 된 하산의 부인으로 삼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마달레나는 레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그가 바라던 아들 주세페를 안겨 준다.
로마에서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기념비적인 저술 <아프리카 지리지>을 쓸 준비하는 동시에, 로마 지식인들에게 아랍어를 가르키는 교사의 역할도 맡게 된다. 물론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라틴어와 기독교 교리 그리고 복음서를 배우는 학생이기도 했다. 그의 제자 중에 작센 출신으로 한스라는 이름의 사제가 있었는데 훗날 한스 사제가 그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
로마에서 계속해서 꽃길을 걸을 것만 같았던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운명은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던 레오 10세가 선종하고, 하드리아노 6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운명이 다시 꼬이기 시작한다. 산탈젤로성의 죄수 같은 신세로 유폐되어 있던 그는 개혁적 성향의 하드리아노 6세가 선종하고 줄리오 추기경이 클레멘스 7세가 되면서 다시 한 번 인생역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고난이 끝난 건 아니었다.
클레멘스 7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칼 5세 대신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를 자신의 전략적 파트너로 삼았고, 1525년 2월 24일 파비아 전투에서 코냑 동맹군이 칼 5세의 제국군에게 대패하고 포로로 잡히면서 교황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같은 신세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1527년 5월 6일 란츠크네이트 용병대가 주축이 된 제국군이 로마에 진입하면서 비극의 서막이 올랐다. 이 사건은 훗날 "사코 디 로마(로마 약탈)'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우리의 주인공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이 대살륙전 속에서도 신의 가호와 옛 제자 한스 사제의 도움으로 살아남는 무쌍의 정수를 보여준다.
우선 격변의 16세기를 살아낸 문제적 실존인물 레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는 마치 "포레스트 검프"처럼 가르나타 함락에서부터 시작해서, 페스로의 강제 이주, 마그레브 일대를 주유하고 맘루크 제국의 멸망을 지근거리에서 직접 목격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1세를 알현하기도 했다. 로마에서는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의 비호를 받기도 했다. 로마 약탈은 레오 아프리카누스 일생에 방점을 찍는 대사건이었다. 그는 정말 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을 체험한 몇 세기에 나올까 말까한 그런 인물이 아니었던가.
아민 말루프는 이 방대한 대서사시의 신화적 주인공 레오 아프리카누스를 역사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현대에 소환하는데 성공했다. 영국 BBC에서는 이미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고 한다. 무슬림과 기독교 세계를 경험하고, 명멸하는 제국들의 흥망성쇠를 직접 목격한 매력적인 인물 레오 아프리카누스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를 기대해 본다면 너무 과도한 기대일까. 대가의 작품은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