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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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하루키다. 올해 출간된 하루키 상의 열 번째 단편집이 출간되기도 전에 예판만으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신형철 평론가가 진행하는 문학동네 팟캐스트 문학이야기에서도 대대적으로 하루키 상의 단편집 소개에 나섰다. 그 방송을 듣고 나니 도저히 배길 재간이 없었다. 난 사실 하루키 상의 열혈 팬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의 책이 나오는 족족 사서 보고 있다. 누가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루이스 세풀베다와 로베르토 볼라뇨라고 할텐데.

 

 

신형철 평론가의 꼬드김으로 <빵가게 재습격>을 읽게 됐다. 2010년 멕시코 출신의 감독 캉를로스 쿠아론이 연출을 맡아 단편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고 해서 유튜브로 검색을 해보니 동명 제목 <The Second Bakery Attack>으로 수많은 패러디 작품들이 있었지만, 정작 본 영화는 구할 수가 없었고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두 주인공이 맥도널드를 터는 장면을 볼 수가 있었다. 단편집에서는 남자인 내가 이야기를 이끌어 갔는데, 영화에서 보니 실제적인 액션/행동은 여자 주인공 냇(커스틴 던스트 분)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단편에서는 맥도널드를 털기 전에 자동차 번호판까지 꼼꼼하게 가리는 장면이 묘사되었는데 영화에서도 그랬는지 궁금하다. 뱀파이어 소녀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 멋진 연기를 보여 주다니, 그릴에서 지글지글 굽는 햄버거 패티를 보며 참을 수 없는 공복의 표현인 던스트 양의 꿀꺽하는 목넘김 소리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신형철 평론가의 이야기를 빌어 하루키 월드를 분석해 보자. 하루키 상에게 1960-70년대는 영원한 이상향이 아닐까 싶다. 무언가 자유로운 의지로 이룰 수 있었던 시기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그의 작품 곳곳에 묻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그가 매문(賣文)하여 먹고 사는 지금은? 어쨌든 이 매력적인 단편 <빵가게 재습격>의 이야기는 참을 수 없는 공복 때문에 한밤 중에 일어난 남자 주인공은 어린 시절 못다 이룬 빵가게 습격을 다시 성공하고 싶다는 무의식의 발로를 이제 막 결혼한 그의 아내가 동조해서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레밍턴 산탄총에 스키 마스크까지 준비해서 빵집털이에 나선다는 얼개다. 그런데 왜 유독 빵집만 털어야 하지? 일본에는 빵집 말고도 오코노미야키라든지 맛있는 우동, 혹은 돈까스집도 많이 않은가.

 

소설의 서사 중에서 개연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제 막 결혼한 와이프가 도대체 어디서 레밍턴 자동 산탄총을 준비했는지 너무나 궁금하다. 단편영화의 배경인 뉴욕 브루클린이라면 몰라도 도쿄 한 복판에서! 물론, 그건 오래 전에 못다 이룬 꿈(빵털이)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는 사나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하루키 월드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빵가게 습격에서 실패한 원인 중의 하나였던 바그너의 음악을 당당하게 재습격에 차용한 카를로스 쿠아론 감독의 재치가 인상적이었다. 라지 콜라 가격까지 지불하고 맥도널드 매장을 나서는 커플의 당당함이 과거에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을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증을 해소하는 기폭제로 멋지게 작용한다.

 

<로마제국의 붕괴, 1881년의 인디언 봉기,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그리고 강풍세계>는 제목만 보고서 많은 기대를 했는데 그저 화자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습관처럼 하는 메모의 일부로, 세상을 기억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이라며 눙치며 빠져 나가는 스타일이 역시나 하루키 월드의 지배자답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은 어느 나른한 오후에 벌어지는 기담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을 그만 두고 아내를 대신해서 전업주부로 활동하는 주인공 남자에게 어느 날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그의 세계를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에로틱한 상상은 어쩐지 넘어서는 안될 선을 위태롭게 넘나드는 그런 유혹이 진득하게 배어 있다. 법대에서 법학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는 꿈도 꾸었지만 어느 순간 일이 꼬여 이렇게 되었나 싶은 상념에 젖었다가 아내의 부탁대로 집 나간 고양이를 찾아나서는 주인공. 고양이 수색 중에 우연히 만난 정체 불명의 소녀와 백일몽 같은 서사들이 이어진다. 결국 고양이는 찾지 못하고 아내와 대판 싸우는 남자. 아내는 고양이가 죽었을 거라고 단정하고 그의 탓이라고 비난한다. 화를 달래기 위해 맥주를 마시는 동안, 받고 싶지 않은 전화가 다시 울린다. 어느 나른한 오후의 여파가 빚은 갈등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에서 최고로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바로 <패밀리 어페어>다. 이십 몇 년을 같이 산 여동생이 결혼을 앞두고 데려온 와타나베 노보루(태엽 감는 새의 실종된 고양이 이름도 와타나베 노보루였다)를 못마땅하게 생각나는 화자의 이야기다. 여름 베짱이 같은 그야말로 일본이 온 세상을 집어 삼킬 것 같이 잘 나가던 시절(1980년대)을 상징하는 주인공은 난봉꾼 혹은 자유연애주의자로 맥주와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된 LP 레코드 감상을 즐긴다. 생업을 위해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출근을 하지만 매사가 귀찮고 일도 그다지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를 재밌게 살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역시 하루키 월드의 정예 멤버다운 성정이다. 여름 베짱이처럼 살면 뭐가 문제냐는 투의 하루키 상인 선사하는 간드러진 유혹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서로를 얽매지 않는 여동생과의 단란한 생활에 와타나베 노보루라는 혼다 500시시 오토바이를 즐겨타는 남자가 등장하면서, 오누이 간의 첨예한 갈등이 피어오른다. 세상을 좀 너그럽게 보라는 여동생에 말에, 시니컬한 오빠는 그렇게 생겨 먹을 걸 어떻게 하냐고 대꾸한다. 이런 가족 간의 사소한 다툼의 배후에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맞이하는 다양한 군상의 모습을 하루키 상은 배치한다.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개인-가족 그리고 사회의 면모를 반추하게 해준다. 자신의 평온한 일상을 깨뜨리는 어떠한 변화도 원치 않는 나에게 땜질 인두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겠냐는 설득이 묘하게 다가온다. 물론 그 이면에는 노보루가 자신의 오디오를 고쳐준 고마움에 대한 화해의 일면도 담겨 있겠지만 말이다.

 

너무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서 하루키 상이 걷어 올리는 서사들은 가히 매혹적이다.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간단한 저녁 식사를 위해 바지락조개를 씻는 따위의 일상에서 상실한 추억을 떠올리고, 집나간 코끼리와 그 사육사를 생각하거나 내가 원하지 않는 LP판도 때로는 들어야 하는 삶의 의무 또는 소소한 관계의 확장을 통한 세상 보는 시각의 다양화 등이 하루키 월드에는 소소하게 담겨 있다. 물론 생뚱맞게 레밍턴 산탄총과 스키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30개나 되는 맥도널드를 털러 나갈 때도 있지만. 이제 노장이 된 하루키 상의 새 단편집에는 또 무슨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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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3-02-2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나오는 책이 단편집이군요. 장편소설을 기대했는데, 뭐 그래도 좋지만요ㅎ

<빵가게 재습격>이 너무 읽고 싶어지는 리뷰네요ㅠㅋ 단편영화가 있는지 몰랐네요ㅎ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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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이후, 미국 전역에 보도된 충격적인 영상 하나가 있었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아 불타고 있던 월드 트레이트 센터(WTC)가 마침내 무너져 내리자, 그것을 보고 환호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장면이었다. 미국 언론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분노를 조장하는 듯 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그 효과는 대단했다. 미국 본토가 공격을 받은 초유의 사태 속에서 민주당 8년 시절을 보낸 미국 사람들은 급속도로 우경화하기 시작했고, 맹목적인 애국주의의 물결이 전 미국을 휩쓸었다. 당장에라도 911 테러를 기획한 것으로 알려진 아프간의 오사마 빈 라덴을 핵무기로 폭격하라는 자동차 범퍼 스티커가 불티나게 팔렸다. 그 가운데 이성적인 목소리들은 발붙일 틈이 없었다.

 

 

 

 

파키스탄 출신 작가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는 주인공 찬게즈가 그토록 미국의 일부가 되고자 노력하지만 결국 주류 사회에 편입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터진 911 테러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 작가의 명백한 페르소나인 찬게즈(칭기스칸의 애너그램이라고 했던가)는 파키스탄 라호르 출신의 뛰어난 인재로 미국 아이비리그의 명문대 프린스턴 출신으로 언더우드샘슨이라는 기업 감정(평가) 회사에 취업해서 소위 잘나가는 슈퍼엘리트다. 이렇게 미국식 교육의 혜택을 풍족하게 받은 찬게즈가 180도로 바뀌어서, WTC가 불타는 장면을 보고 자신이 느낀 첫 번째 반응이 ‘즐거움’이었노라고 밝히고 근본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모신 하미드는 절묘한 서사 구성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우선 주인공 찬게즈는 자신의 무대였던 미국 뉴욕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 파키스탄 라호르의 아나르칼리의 어느 거리에서 처음 만난 미국인에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유전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가 프린스턴을 졸업하고 일하게 된 언더우드샘슨에서는 무한경쟁을 통한 효율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라고 끊임없이 직원들에게 세뇌하는 그야말로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첨병이다. 아울러 아무 것도 ‘우연’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바로 찬게즈와 아나르칼리에서 만난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미국인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이 점을 잊지 말고 모신 하미드의 서사를 따라가 보자.

 

작가의 서사 구조 한쪽에 아무런 배경 없는 파키스탄 출신의 남자 찬게즈가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프린스턴 학벌이라는 무기를 들고, 세상이라는 거친 무대에서 싸우는 과정이 그려졌다면 다른 한 쪽에는 주인공 찬게즈의 러브스토리가 자리 잡고 있다. 찬게즈의 이름이 중세 세계의 정복자 이름의 애너그램이라면 그가 사랑하는 미국 여인 에리카라는 이름은 볼 것도 없이 많은 이들이 사랑에 빠진 아메리카의 재현이다. 찬게즈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연애의 싸움을 하고 있다. 본인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에리카의 죽은 첫 애인 크리스와의 경쟁이다. 아무리 불확실한 것도 수치화하고 계량화해낼 수 있는 철두철미한 교육을 받은 찬게즈는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이길 수 없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진흙탕 싸움에 빠져든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 전쟁 이래 서양과 동양의 갈등/전쟁 구조는 21세기 파키스탄 작가의 치밀한 문학 작품을 통해 다시 형상화됐다. 동양남자 찬게즈의 물질적으로 발전한 서방세계에 대한 처절한 구애는 죽은 애인을 잊을 수 없다는 야릇한 핑계로 요리조리 피하는 에리카의 밀당의 다름 아니다. 뛰어난 현실감각을 지닌 이 남자는 자신의 업무나 관계 파악에서는 냉철한 이성을 발휘하지만, 도대체 사랑이라는 게임 앞에서는 철저하게 무장해제당하고 어쩔 줄 몰라한다. 바로 그 점을 작가는 '주저(reluctant)'라는 표현으로 집약해낸 게 아닐까. 어떤 노력을 해도 이길 수 없는 죽은 옛 애인과의 게임은 아무리 뛰어난 학벌과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미국 주류사회에 동화될 수 없는 이방인의 비애를 절묘하게 짚어낸다. 이창래 선생이나 줌파 라히리의 이민자 문학이 화해 혹은 타협을 지향한다면, 모신 하미드의 그것은 좀 더 공세적이다. 물론, 이 작품 하나로 그의 문학 세계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말이다.

 

한 때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던 이민자의 나라 미국은 더 이상 관용적이지 않다. 그것은 마치 과거 로마제국이 관용(클레멘티아) 정책을 버리고 수구적으로 변해 가면서 세계 제국의 위상을 잃었던 것과 비슷한 경로를 걷고 있다는 느낌이다. 찬게즈는 꾸준하게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에리카를 포기하지 않지만, 에리카의 세계에 그를 받아들일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저한 조건부 짝사랑이다. 미국 사회에 효용이 될 만한 재능과 능력을 가진 이들은 환영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문호개방은 엄격하게 제한된다. 사랑의 유효기간 만료는 이민자들의 합법적인 체류를 보장하는 비자 기간 만료와 동일하게 적용된다. 사랑이 끝나면 그들은 미국을 떠나야 한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를 오스만 제국의 기독교 용병 예니체리에 비유한 장면은 신의 한수처럼 다가온다. 술탄에게 예니체리들은 언제나 소모품에 불과했다는 점에서도 그들의 운명은 일치한다.

 

다시 작가 모신 하미드는 독자를 라호르의 번잡한 아나르칼리 거리로 데려간다. 찬게즈는 계속해서 정체불명의 이 미국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파키스탄 전통 차와 음식, 문화를 권한다. 이미 수천 년 전에 자신의 조국 파키스탄은 뛰어난 문명을 이루고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역전되었다고 자조하는 찬게즈의 모습에서 작가의 의도가 무언지 궁금해졌다. 어쨌든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면서도 고향 라호르를 잊을 수 없었던 남자 찬게즈는 미국에서의 생활과 업무 때문에 파견된 칠레에서의 자각을 통해 반미투사 혹은 근본주의자라 불리게 되었다.

 

소설의 후반부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런 급격한 변신의 개연성이 좀 떨어지는 느낌은 있어도 작가의 문학적 미니멀리즘을 통한 직접적 현실성 담보가 인상적이다. 그만큼 현실과 문학적 창조의 상상력을 오가는 모신 하미드의 작법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열린 결말을 배려한 점도 역시 일품이었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2012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고 하는데 기회가 되면 영화도 봐서 책과 비교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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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기담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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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젊은 날의 피카소 전이라는 전시회에 다녀온 적이 있다. 피카소의 초기작을 보면서, 저 정도 그림이야 내가 발로 그려도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초기작은 훗날 그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대가로 인정을 받은 후에 재평가를 받은 작품인 것이다.

 

말하는 원숭이 이야기를 들어 보신 적 있는지? 그리고 또 잠깐 아래층에 내려간다고 한 남편이 사라졌다가 한참 뒤에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 이 정도는 돼야 기담 혹은 괴담의 범주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 아마 범인(凡人)이 이런 소재의 이야기를 했다면 술좌석의 농담 혹은 우스갯소리로 치부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쓰면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이번에 새로 나온 하루키의 소설집 <도쿄기담집>은 최신작이 아니다. 2005년에 나온 책으로 모두 5편의 ‘기담’스러운 단편 소설집이다. 나는 맨 먼저 맨 마지막에 실린 <시나가와 원숭이>편부터 읽기 시작했다. 다른 이유는 없고 그저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시나가와라는 지명을 알 리가 없고, 뒤편에 달린 원숭이에 시선을 끌었다. 안도 미즈키라는 여성이 기억상실 때문에 병원을 찾고, 상담사를 찾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상담의 과정을 거쳐 아주 오래 전, 고교시절 자살한 학교 후배에게서 모든 것이 연유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종착역에는 도쿄 시나가와의 말하는 원숭이가 있었다.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말하는 원숭이가 아니라, 자신이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는 진실을 대면하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그녀가 다시 기억력을 되찾게 되었는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5편의 단편 중에서 <하나레이 해변>이 가장 재밌었다. 하와이 하나레이 해변이라는 곳에서 상어에게 물려 다리를 잃고 결국 목숨마저 잃게 된 어느 청년의 어머니 사치의 이야기다. 하와이에서 윈드서핑이 목숨까지 걸 정도인가 하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사치는 예전에 미국 생활 덕분에 현지에서 영어 소통에 문제가 없다. 그런 세심한 장치까지 배려해 주다니, 역시 하루키답다. 아니면, 본인이 미국 케임브리지에서 2년간 체류한 경험 덕분인지 미국 생활에 대한 그의 감상을 책 곳곳에서 엿볼 수가 있다. 어쩌면 하루키의 재즈 사랑도 그 덕분인지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상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서 어떻게 해서 그녀가 호놀룰루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런저런 만남을 통해 사치의 과거를 되짚어 가는 품이 고수다운 풍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무런 부담 없이 타인의 삶을 엿보는 그런 즐거움이라고나 할까. 소설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주인공/타인의 삶에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간에 개입한다는 점에서 보이저리즘(관음증)의 다른 표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들의 기일 즈음해서 하나레이 해변을 찾아 며칠씩 보내곤 하는 그녀에게만 왜 외다리 서퍼가 보이지 않는건지 참으로 기이할 따름이다.

 

남자가 평생 동안 만나야 할 의미 있는 여자의 수는 세 명 뿐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남자 준페이의 고민 역시 재밌다. 어차피 깨지기 마련인 터부를 마련하는 고수 하루키는 한 번의 만남 그러니까 다시 말해 원 스트라이크 이후 투 스트라이크를 준비한다. 정말 딱 맞는 상대를 만났다고 준페이는 생각하지만(물론 육체관계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기리에는 자신의 직업도 알려 주지 않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미스터리다. 어쩌면 이렇게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발을 보여주는지 하루키답다. 대뜸 기리에가 직업 킬러가 아닐까 생각해 보지만 그렇게 쉬운 직업으로 정할 리가 없지. 얘깃거리가 떨어지지 않는 두 사람이야말로 천생연분이 아니었을까. 결국 준페이는 기리에의 자극을 받아 만날 자리를 옮겨가는 콩팥 모양의 돌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낸다. 창작에 있어 정말 중요한 건, 영감이 아니라 어떤 식의 자극이라는 하루키 식 고백일까? 미스터리한 그녀의 실종 역시 예측가능한 좌표상에 자리 잡고 있다.

 

하루키 소설집의 공간적 배경은 소설집의 제목이 가리키고 있듯이 대도시 도쿄다. 인구 천만명이 사는 예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다투고, 싸우고, 화해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삶의 모습이 스펙터클하게 변화하는 공간의 이야기가 하루키 식 기담의 원천이 아닐까. 얼마 전 뉴스에 보니 셀카가 뭐라고 남들보다 압도적인 셀카를 찍으려다 절벽에서 추락사하고 고압선에 감전되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 이 이야기야말로 기담이 아닌가.

 

판에 박힌 듯 돌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자신도 모르게 가정을 떠나 자발적 홈리스가 된다는 이야기도 이젠 식상하다. 일상의 모든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은 내면세계의 일탈 욕구가 빚어낸 이야기도 이제는 설명 가능하다. 어느 시대에는 통용되지 않던 이야기나 상식도 시간이 지나가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불과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여성참정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폭도나 정신병자로 치부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진짜 이 소설집에서 하루키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건 그런 상식의 수용 문제가 아니라 그의 작풍 또는 스타일이 아닐까. 정확하게 꼭 집어서 이게 바로 하루키 스타일이야라고 말하기 쉽지 않지만, 재즈와 위스키를 사랑하는 여피 스타일적인 삶의 방식 말이다. <하나레이 해변>의 사치처럼 상실 가운데서도 그런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물론 그러기 위해선 금전적 여유가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하루키는 두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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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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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다. 그동안 성석제 작가의 다른 책들도 꾸준하게 읽어 왔는데, 이번에 새로 나온 신간 <투명인간>처럼 현실계에 다가선 작품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그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해방 전 시대부터 현대사를 관통하는 서사를 구축해냈다. 그리고 글쟁이답게,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 창조해낸 캐릭터들의 광휘는 눈이 부시다 못해 찬란하기까지 하다.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한 ‘저파’ 프란치스코 교황의 낮은 곳에 임하라는 메씨지가 일종의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성석제 작가 역시 우리가 흔히 보는 막장드라마의 필수 요소인 재벌이나 권력자들을 등장시키는 대신 밑바닥 인생에 초점을 맞춘다. 소설 <투명인간>의 주인공 만수의 3대 이야기는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축약판이다. 만석꾼이었던 그의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좌익 사상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옥고를 치르고, 집안이 단박에 거덜 나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그렇게 산골에서 화전을 이루기 살기 시작한 만수네는 천만다행으로 한국전쟁이라는 참화는 피해갈 수 있었지만, 하루 벌어먹고 살기 힘든 가난이라는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줄줄이 사탕처럼 형제들이 즐비한 만수는 온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모은 백수처럼 그리고 훗날 또 다른 총기를 보여준 석수처럼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수십일 을 걸어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는 돈끼호떼의 둔마 로시난떼처럼 그렇게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걷는 오늘의 대한민국 건설에 이바지한 장삼이사의 전형으로 그렇게 다가온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머나먼 월남에서 고엽제로 어이 없이 비명횡사한 집안의 기둥 백수의 뒤를 이어 집안의 가장이 된 만수에게 가족이야말로 우리네 삶을 이루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각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보다 훨씬 잘난 석수가 자신을 형대접 하지 않아도, 그를 온전하게 받아 주며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며 살얼음판 같은 인생 역정을 겪는 식구들을 전심전력을 다해 뒷바라지 한다.

 

삶에서 평범함을 추구하지만, 도무지 평범할 수 없는 인생의 간난신고를 겪은 만수의 삶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과연 국가란 어떤 의미인가라는 1차원적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1960, 1970년대 고도의 독재개발을 추구한 국가는 국민에게 무한한 인내와 희생을 요구했다. 인간관계에서 최소 단위를 구성하는 만수네 가족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백수는 순전히 자신이 가진 천재성으로 성공의 끝자락에 다가서지만, 어찌할 수 없는 가난은 결국 그의 발목을 잡고 전쟁터로 파병된다. 집안의 기둥 백수는 월남에 파견되어 조국근대화의 최전선에서 달러를 벌어 훗날 만수 가족이 신산한 서울 생활을 버틸 수 있는 단초가 되는 재봉틀을 사는데 일조했다. 백수는 명분 없는 전쟁에서 장렬한 전사도 아닌 미군이 월남 정글을 초토화시키기 위해 사용한 에이전트 오렌지라는 초강력 고엽제 때문에 어이없이 병사하게 된다.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구로공단에 먼저 취업한 친구의 편지에 상경한 만수의 누이 역시 사실을 담보하지 않는 편지의 의미 없음을 현장에서 직접 깨닫게 된다. 몸뚱이 외에 아무런 생산 수단도, 자본도 가지지 않은 이들이 갈 곳은 정해져 있으며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성석제 작가의 소설은 명징하게 우리에게 보여준다. 문제는 40년이 지난 오늘에도 예의 불평등과 소득분배 불균형의 문제는 여전히 개선될 여지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우리의 주인공 만수가 부딪히는 사회적 현실 또한 불편하다. 소설의 전반부가 산업화의 여명기와 성숙기를 그렸다면, 각자의 목소리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정리된 후반부에는 비로소 만수가 주인공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공간의 배경 역시 만수네 일가가 살던 시골에서 벗어나 도시화의 영향으로 본격적인 이촌향도가 진행된 1980년대에는 경제성장과 더불어 서울로 이동한다. 성석제 작가의 <투명인간>을 읽으면서 이렇게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놀라운 이야기를 빚어낸 작가의 글발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 또한 역사의 질곡을 있는 그대로 체험하지 못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해본다.

 

민주화 투쟁의 열기가 치솟던 시절에도 우리의 주인공 만수는 우직스럽게 공장에 취업해서 자신의 일을 누가 보건말건 그야말로 투명인간처럼 묵묵하게 해낸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대학생 혹은 엘리트의 외침은 만수에게 사치일 뿐이다. 아직 독립하지 못한 동생들의 대학교 학비를 벌기 위해 짠돌이 소리 듣기를 마다하지 않으면 알뜰살뜰 돈 모으기에 전념하는 그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우리 아버지 세대의 임무를 부모 세대가 아닌 형제 세대에게 전가한 것도 책임감과 부채 의식의 극대화라는 성석제 작가의 전략이었을까.

 

좀 먹고 살만해지니 닥친 전대미문의 IMF 경제위기 속에서도 특유의 끈기와 성실함을 무기삼아 할아버지의 유언대로 가족의 테두리를 온몸을 내던져 지켜낸다. 만수네 가족을 덮치는 시도 때도 없는 간난신고의 스펙터클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더 놀라운 것은, 예의 사건사고들이 우리 현대사에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이미 존재하고 있던 역사적 사실에 성석제 작가가 창조해낸 각양각색의 캐릭터들의 조합을 적절하게 맞춰 놓았다고나 할까. 다시 한 번 캐릭터들의 보여주는 다채로운 광휘에 갈채를 보낸다.

 

개인적으로 <투명인간>은 성석제 작가가 전작 <조동관약전>에서 보여준, 시대상에 대한 사적 투쟁의 침잠이라는 점에서 <만수전(萬壽傳)>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똥깐이가 난장을 부르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슈퍼맨(초인)이었다면, 만수는 ·니체의 위버멘쉬(초인)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주인공 만수가 어떤 철학적 사유를 통해 모든 것을 개인적 노력으로 극복해내는 초인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나는 가난이 부여한 다양한 고통이라는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한 만수 혹은 우리 장삼이사를 시험에 들게 하는 끝없는 도전에 대한 응전의 기록이라고 부르고 싶다.

 

<투명인간>의 가독성은 엄청났다. 흥미로운 역사서(우리나라 현대사)를 읽는 재미에 덧붙여서 희비극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캐릭터들의 향연에 책장 넘기기를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물론 때때로 마주하게 되는 극적인 결정의 순간에 내가 이 상황에서 만수라면 어떤 결정을 했을까라는 고민도 빼놓을 수가 없다. 최근에 어떤 책을 읽으면서 자신을 투영한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최고의 몰입이었다. 2014년 대표작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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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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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읽는 천명관 작가의 소설집이 새로 나왔단다. 아직 이창래 선생의 신작도 다 못 읽어서 버벅대는 판에 나의 손가락은 절로 구매로 향한다. 도대체 칠면조와 육체노동자랑 무슨 상관일까? 닭(치킨)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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