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식 세탁소 - 정미경 소설집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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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언제쯤인가 한국 문학 중에서 정미경 작가의 소설집 <프랑스식 세탁소>와 한유주 작가의 <불가능한 동화>에 대한 신문 기사를 봤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두 작가의 글은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은 지라, 호기심이 동했고 일단 습관처럼 정미경 작가의 <프랑스식 세탁소>를 샀다. 그리고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첫 번째로 수록된 <남쪽 절>을 읽고 나서 두 번째 <파견 근무>를 읽다가 접었다. 그리고 1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2주 전에 책장 정리를 하다가 미처 다 읽지 못한 정미경 작가의 이 책이 생각났고, 다시 집어 들어 부지런히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처음 읽기 시작할 때만 해도 금세 다 읽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간에 무슨 사연 때문인지 다 읽는데 1년이 걸린 셈이다.

 

1년 전에 읽기 시작할 땐, 순서대로 읽자였는데, 다시 읽기 시작하니 마음이 바뀌어서 맨 끝에 실린 표제작 <프랑스식 세탁소>부터 읽기 시작했다. 수완은 있지만, 비리 사건에 연루된 사회재단 이사장의 이야기와 사보에 실린 어느 요리사에 대한 글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전개된다. 어디가 닮았다고 꼭 집어서 말하기엔 그렇지만 왠지 정미경 작가의 글에서는 미국 작가 제임스 설터의 그것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두 작가 모두, 아직까지 한 작품 밖에 읽지 않아서 구체적 비교가 불가하지만 말이다. 엄마를 위해 요리를 만들던 절대 미각의 소유자 마르셀 르와조의 요리를 통한 성공기가 자못 흥미진진하다. 유일하게 사랑했던 애인마저도 르와조의 요리에 대한 열정을 대신할 순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 이야기가 화자인 이사장의 횡령 그리고 비서 민미란과의 일탈로 이어지게 되는 걸까? 그냥 모든 것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리네 삶과 비슷하다는 점 때문일까. 르와조가 자신이 경영하는 레스토랑 <프랑스식 세탁소>가 박한 별점을 받았다고 엽총을 꺼내드는 장면이 섬뜩했다.

 

 

 

그런 점에서 다시 되돌아가 마저 읽은 <파견 근무>에 나오는 주인공 판사의 일탈도 일상의 한 부분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당연히 사회적 존경을 받는 자리에 앉은 인물이, 사실은 카지노에 빠진 상습 도박꾼이라니. 어쩌다 어울리는 지방 유지들과의 술자리에서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자신이 맡은 사건 사고들에 대한 각색도 마다하지 않는다. 수하의 검찰조사관이 흘린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보와 노름판의 판돈을 마련하기 위한 주식 내부거래 정보의 교환에 대해 고민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도 있다. 그건 그들이 즐기는 생선 횟집에서 제 살을 허리에 접시에 놓여나온 생선과 같은 신세가 아닐까. 도대체 이런 표현은 어떻게 창조해낸 걸까. 우리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생선회에서도 요렇게 멋진 문구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솔직히 부러웠다. 이제 기존의 클리셰이가 되었으니, 누구라도 다시 써먹을 순 없겠지.

 

소설에 곳곳에서 그런 일상의 비루함이 눈에 띈다. 첫 번째 글인 <남쪽 절>에서도 기세 좋게 독립해서 출판사를 차렸지만, 기획력과 자금 부족 그리고 출판계의 단골타령인 단군 이래 최악의 독서시장 불황 덕분에 어쩔 수 없이 대박내고 싶은 욕심에 표절 작가에게 갖은 아양을 떨어야 하는 출판사 사장의 비루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주인공이 표절 작가와 어렵게 성사된 자리에 가기 위해 나선 길에는 용산 참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누구는 절박한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출판사 사장 역시 절박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다만 자신이 처해 있는 삶의 조건이 다를 뿐.

 

<소년처럼>에서는 만족할 수 없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이돌 그룹의 <소원을 말해봐>라는 노래에 빠져 사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다. 진실이 아닌 만들어진 이미지가 소비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음악 산업 역시 예외는 아니다. 청춘을 잃어버린 이들에게는 그들이 바라 마지않는 풋풋한 젊음을, 스타가 되고 싶어하는 청춘들에게는 노력하면 너희들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판타지를 불어 넣는 아이돌 산업의 실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우연히 만난 은희라는 소녀로부터 자신이 가진 소년같은 판타지를 충족시키고 싶어하는 중년남자의 욕망을 날 것으로 그대로 드러낸다. 물론 작가는 자신의 딸보다도 어린 소녀로부터 그저 ‘옵빠’라고 불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선에서 그의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는 욕망을 제지시킨다.

 

이젠 낯설지도 않은 탈북자 출신 피아니스트, 아니 새터민이라는 명칭이 있었던가? 사지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에 정착했지만 여전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청년의 이야기, 멀쩡하게 의사 수업을 받고 있던 남자가 모르핀 중독 때문에 스님이 되겠다는 출가 선언으로 여자친구의 복장을 뒤집어 놓질 않나, 강아지도 안 먹는다는 돈의 부재 탓인 가난과 사랑의 비동시성 때문에 고민하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다소곳하게 이어진다. 나의 삶이 소설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그것처럼 버라이어티했다면, 과연 내가 이 소설을 읽었을까? 아마 그렇지 않겠지. 내가 체험하지 못한 타인의 이야기를 이렇게 열심히 읽는 건 아마도 일정 정도의 간접체험에서 오는 정신적 오르가즘 때문이 아닐까. 내가 알지 못하는 각각의 삶의 면면이 이렇게 다양할 수도 있겠다는 자조 섞인 감정이 슬쩍 스치고 간다. 물론 소설가는 그것들을 절묘하게 잡아내서 이렇게 글로 쓰는 것일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선구자가 남긴 글귀들을 쫓아갈 뿐.

 

어쨌거나 소설이라는 명명, 창작이라는 시뮬라시옹의 단계를 거쳐 삶의 진실을 반영하는 시뮬라크르에 도달하기란 난망한 것 같다. 작가라는 타인에 의해 창작된 현실의 복제물인 소설을 소비하는 독자로서 이렇게 책을 읽다가는 결국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도달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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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의 역사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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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 작가의 ‘바람의 사나이’ 허풍의 불타는 연대기를 읽어 가며, 나는 어쩔 수 없이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으 <포레스트 검프>, 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탐 행크스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세기 모든 미국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에 등장해서 관객들을 놀래켰던 포레스트 검프가 영화를 무대로 했다면,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에 개입한 유려한 인물로 최민석 작가는 이풍(아니 허풍이 더 어울리겠다)을 등장시킨다. 어마어마한 인원이 희생된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그리고 민족상잔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에서도 살아남은 불세출의 영웅 허풍 말이다. 문득 이 매력적인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면 주인공 허풍 역을 누구에게 맡겨야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최민석의 작가가 후기에서 남긴 글대로, 이 충성된 독자는 그의 신간이 나오는 대로 꼬박꼬박 사서 보게 됐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의 가열찬 구라와 뻥의 세계에 매료되었다고나 할까. 난 이 작가의 뻔뻔함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오로지 사랑하는 여인 밤의 이름을 외쳤을 뿐인데, 공격군이었던 미군 사령관의 마음을 움직여 대일본 전쟁을 마무리하는 원자폭탄(atomic bomb)을 투여하게 만들었다는 설정에서는 정말, 작가라면 이 정도 스케일의 서사도 해야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읽은 이기호 작가의 <차남들의 세계사>에서도 희화화를 통한 한국 현대사 조망이 돋보였는데, 최민석 작가는 한술 더 떠서 좀 더 스케일이 큰 희화화에 도전한다. 무대도 한국만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 등 동아시아를 움직인 굵직굵직한 사건에 자신이 애써 창조한 캐릭터들을 연달아 투입시킨다. 그 핵심에는 작가가 지속적으로 언급한 대로, 무언가 역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이들이 아닌 그저 생(生)이라는 종잡을 수 없는 미스터리를 버텨내기 위해 하루하루를 낸 우리네 삶의 근원을 예리하게 짚어내는데 방점을 찍는다.

 

우리의 주인공 허풍의 운발은 억세게 세다. 엄청난 인원이 희생된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국군과 인민군을 오가며 그리고 포로수용소 생활까지 거치면서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그것뿐이던가, 도리짓고땡으로 가산을 홀딱 날리고 월남에서 돌아온 오 중사를 따라 결국 월남에까지 흘러간다. 대단한 생명력이 아닐 수 없다. 아, 우리의 뻔뻔한 작가는 이런 불세출의 영웅의 활약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안티히어로를 배치하는 세밀함도 잊지 않는다. 그가 바로 앞잡이(꼴라보?)로 고향 중도에서 허풍의 일격에 남성성을 잃고 절치부심 복수를 꿈꾼다. 이름도 없는 앞잡이가 영웅탄생을 일조하기 위해, 위태로운 역사의 순간마다 등장해서 주인공 허풍에게 깊숙한 태클을 걸어댄다. 도대체 어떻게 그곳에 흘러가 있을까 하는 일말의 의문은 작가의 친절하기 짝이 없는 설명에 일사천리로 해결된다.

 

허풍 허구 부자의 월남행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들어줄 만하다. 하지만, 오 중사와 홍콩 여가수 만옥까지 낀 허풍 부자가 밴드를 결성해서 독재자의 마지막 대연회 행사에 참석해서 사건의 알파와 오메가를 목격했다는 이야기는 정말 이만저만한 허풍이 아니다. 적당한 허풍은 서사에 힘을 실어 주지만, 이 정도 레벨의 허풍은 독자가 감당할 수준이 아닌 것 같다. 그렇게 한창 달리던 서사의 힘이 꺾이면서 순간 맥이 풀려 버렸다. 한국 소설의 귀환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최민석 작가의 <풍의 역사>에 대한 나의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한국현대사라는 좋은 (서사의) 요리 재료를 가지고, 셰프급 요리가 아니라 짬뽕을 만들어냈다고나 할까.

 

물론 무성영화 시대 변사를 연상시키는 최민석 작가의 이야기 풀어내는 스타일은 확실히 재밌다. 그것은 이미 전작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와 <능력자>에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약간 과하다 싶은 희화화와 가벼움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급의 진중함은 아니겠지만, 그저 참을만한 가벼움이면 좋겠다. 연달아 읽은 최제훈의 작가의 소설처럼 엘리트 코스 소설가가 아닌, 다양한 경험을 가진 늦깎이 작가의 등장을 반가워하면서도 <풍의 역사>를 다 읽고 난 뒤의 헛헛함을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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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잠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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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에 늦깎이로 데뷔한 최제훈의 작가의 팬이다. 책은 작년에 출간되자마자 샀지만, 그동안 미처 읽지 못한 게으른 독자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이 가진 빼어난 가독성을 알고 있기에 서두르지 않았다고 한다면, 좀 변명이 되려나. 거의 일 년을 묵혀 두었다가 지난 주말에 서가에서 신작 <나비잠>을 빼들었다. 역시나 기대 이상의 재미가 있었고, 놀라운 속도로 다 읽어냈다. 아무래도 짧은 단편보다는 긴 호흡의 장편을 더 선호하는 편인데, 최제훈 작가의 <나비잠>은 전혀 길이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후반부로 갈수록 아쉬웠다고 해야 할까.

 

원래 다른 일을 하다가 문학 수업을 받고 문단에 뛰어든 때문인지, 엘리트 코스를 밟고 등단한 다른 작가와는 다른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 최제훈 작가의 서사에는 장르적 특성이 추리가 담뿍 배어있다. 약간 누아르적이기도 하다고 말해야 할까. 우리의 주인공은 40대 중년의 최요섭 변호사다. 나이와 직업이 일단 그의 특질을 말해준다. 잘 나가는 대형로펌 <사해> 출신의 최요섭은 최근 들어 이상야릇한 악몽에 시달린다. 최제훈 작가는 그렇게 현실계에서 주인공에게 벌어지는 일단의 연쇄적 사건과 꿈을 등치시킨다. 꿈에서 총 맞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부터 벌써 범상치 않다.

 

웹진에서 연재할 적에는 제목이 <몰락>이었다고 하던데, 그 제목이 어쩔 수 없이 장자의 호접몽을 떠올리게 하는 <나비잠>보다 훨씬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집에 꼬맹이가 있어서 그런지 어린 아이가 두 팔을 위로 올리고 자는 잠이라는 뜻의 제목이 귀에 쏙 들어오기는 한다. 소설 <나비잠>은 지방 소도시 출신 목사의 아들로 한양공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패스해서 로펌에서 승승장구하며 서울숲 고급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음대 출신의 미모의 아내에, 야구선수를 꿈꾸는 아들까지 무엇 하나 부러운 게 없는 우리 시대 성공방정식을 풀어낸 주인공의 몰락에 관한 이야기다. 자신이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오소리 변호사라면 도저히 꿈꾸지 않을 억울하게 감옥소 신세를 지게 된 대리기사의 무료 변론을 맡게 되면서부터 잘 나가던 삶의 톱니바퀴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작가는 작가 세대 소년들이라면 누구나 즐겨 보던 <은하철도 999>의 서사부터 시작해서 <빨간 두건>, <돈키호테>, <피노키오>, <몬테크리스토 백작> 그리고 영화 <빠삐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사 시스템을 소설 속에 투입시킨다. 특히 <빨간 두건> 일화의 금기(터부)에 대한 작가의 분석은 인상적이었다. 법이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금기는 모두 깨고 있으면서, 타인에게 적용하는 최요섭의 이중잣대를 통박하는 빨간 두건의 퉁바리는 통쾌했다.

 

이렇게 작가가 투입시킨 이야기들은 꿈속에서 혹은 현실계에서 도주하면서 유년 시절의 잊고 싶었던 트라우마를 해결하라는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털곰(털 많은 곰)이라는 캐릭터와 멋진 조화를 이루면서 서사의 긴장감을 촉발시킨다. 한술 더 떠서, 목사였던 아버지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이자 동시에 신의 저주를 받아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로 배치하기도 하고, 막장드라마 단골메뉴인 출생의 비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현존하는 모든 서사 얼개는 차용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덧붙이자면, 유년 시절 트라우마는 현란한 로드무비 같은 대모험을 거쳐 최 변호사가 31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선택적 기억상실을 통해 지키고자 했던 원죄에까지 도달한 느낌이다.

 

주인공이 겪는 몰락의 서사는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꿈의 서사의 기이한 변용의 과정을 거쳐 현실계에서 반복된다. 길을 잃고 산속에서 헤매던 중, 가까스로 찾아들어간 외딴 민가에서 묘령의 여인에게 진수성찬이 차려진 음식을 대접 받다 불륜에 휘말려 갑자기 들이닥친 그녀의 우락부락한 사냥꾼 남편에게 봉변을 당하는 설정은 무간지옥의 다름 아니다. 최요섭의 무료 변론이라는 일탈과 유학생 사건 협잡으로 비롯된 그를 옥죄는 보이지 않는 세력의 개입으로 시작된 그의 몰락은 상상초월의 속도로 신속하다. 아내는 아들 과외 선생과 바람이 났고, 아들의 야구 특기생 진학을 위해 바친 뇌물 수수 혐의로 잘나가던 직장에서 짤리고 집행유예로 자격 정지 먹는 상황이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펼쳐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최제훈 작가의 장기 중의 하나인 추리적 요소가 개입한다. 도대체 누가 우리의 주인공 털곰을 이렇게 혹독하게 몰아붙인단 말인가?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긴장감에 책장을 넘기는 속도에 가속이 붙기 시작한다. 주의하시라, 작가는 미스터리를 짜내는 데도 능수능란하지만 또 한편으로 두 가지 서사의 축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게다가 이미 여기저기서 차용해온 다양한 서사적 장치들을 그야말로 마리오네뜨 인형처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현란한 이야기의 시전 속에서 과연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빠삐용처럼 삶이 감옥이란 말이었을까. 무언가 기발한 문구를 기대했지만, 작가는 끝까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변호사 최요섭은 물질적 성공을 위해 헌신하는 21세기 남자로,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치르는 비용은 모두 소소할 뿐이라고 자위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투입된 정의감에 불타는 이정우 변호사의 실존적 고민도 일축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그토록 믿었던 조직에서 내몰리고, 재기의 물질적 토대라고 생각한 재산마저 날리면서 극한의 코너에 몰리자 예의 자신감을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남은 분노 게이지를 상승시키면서 자신을 파멸시킨 원흉을 찾겠다고 동분서주한다.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한 변호사로 사적 이익추구에 여념이 없던 최요섭 변호사의 처참한 몰락은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도대체 뫼비우스 띠처럼 얽힌 현실과 꿈이 만들어내는 변주곡의 코다는 어디일까.

 

이미지가 진실을 지배하는 소비사회에서 과연 최요섭 변호사가 쫓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게 신기루 같은 허상이었을까? 남부럽지 않은 직업과 연봉, 모델 같은 미모의 아내 그리고 야구선수의 꿈을 꾸는 아들, 모든 것을 갖춘 이상향에 근접해 있었지만, 조직의 규율을 어긴 이탈자를 기다리는 건 휘황찬란한 비상이 아닌 날개 없는 추락이었다. 작가가 보내는 중첩된 메시지 중에서 무엇을 골라잡아야할지 책을 읽으면서 내내 고민했다. 어쩌면 그런 복잡다단한 우리네 인생의 답없음이야말로 최제훈 작가가 소설 <나비잠>에서 전달하고자 했던 진정한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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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들의 세계사 - 2014년 제47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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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역사소설의 귀환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싶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필두로 해서, 성석제 작가의 <투명인간> 그리고 이기호 작가의 <차남들의 세계사>, 최민석 작가의 <풍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간 우리 문학 작가들이 잘 다뤄오지 않던 한국 현대사를 소재로 한 소설들이 풍년을 이루고 있다. 나는 <투명인간>, <소년이 온다>에 이어 세 번째로 <차남들의 세계사>를 읽었는데 제목이 자못 심각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웃픈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역사소설의 장점이 무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선 가독성이 뛰어나다. 내가 살아온 지난날과 소설에 등장하는 그것이 중첩될 때, 가독성은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여기에 이기호 작가 특유의 블랙 유머가 덧붙여지면서 서사가 주는 재미는 스카이로켓처럼 달려 나가기 시작한다. 잠깐 그런데 왜 그동안 우리 작가들은 이렇게 재밌는 현대사를 외면해 온 걸까? 얼마 전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대하면서 느낀 거지만, 그건 아마도 작가의 역량 탓이 아닐까 싶다. 그런 엄혹한 시절을 그려 내려면 보통 이상으로 다져진 내공과 긴 호흡이 필요하니 말이다.

 

이기호 작가는 누아르 뺨치는 반전드라마로 독재자 살인 사건을 조사하던 수사관에서 일약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누아르 주인공 전두환 장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시절, 안전택시 운전기사 1년차 신입 나복만에게 벌어진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작가는 짧게 끊고 지나갔지만, 그 시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부미방(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필두로 해서, 미국 부통령 방한을 앞둔 시기에 공권력을 집행하는 순경의 총기 난사 사건 그리고 대한민국을 통째로 흔든 큰손 장영자 씨 사건 등 그야말로 자고 나면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던 사고공화국의 추억이 아련히 지나간다. 그리고 그 사건사고들의 뒤켠에는 누아르 주인공의 그림자가 얼비치고 있었다는 점도.

 

미국을 큰형으로 모시던 웃기는 짬뽕 같은 누아르 집권자는 부미방 사건의 주도자들을 잡기 위해 그야말로 전국을 이잡듯 뒤진다. 수배 중인 용의자들이 대거 원주에서 검거되기에 이르는데, 바로 이곳 원주가 우리의 주인공 나복만 씨가 둥지를 틀고 있던 곳이었다. 작가가 끝없이 권하는 대로 맥주를 들이켜거나 혹은 감자 칩을 무시로 집어 먹으며(실제로 독자는 작가의 권유대로 따라했음을 고백한다) 이기호 작가가 현란하게 구사하는 구라의 세계 속에 빠져 들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주인공 나복만의 아버지가 월북인사이며, 홀로 남은 어머니는 나복만을 두고 개가하여 나복만은 고아로 자라났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글을 모르는 문맹(文盲)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훗날 그날 안기부원들에게 고초를 겪을 적에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 글을 모르니 진술서를 작성할 수가 없었다.

 

깝깝한 마음에 시간이 있다면, 담배 한 대 피우고 나서 다시 이어가자. 아니지, 앞으로 배보다 배꼽이 커지게 될 정도로 담뱃세가 오른다니 누구 좋으라고 담밸 피우나.

 

훗날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는 중이지만, 장군이 통치하던 누아르 시절에 숱하게 언론 지상에 도배되었던 수많은 간첩 공안사건들이 알고 보니 모두가 정권 보위 차원에서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이기호 작가가 전면에 내세운 나복만 씨는 어쩌면 그 시절에 국가권력에게 그렇게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무고한 이들의 오마쥬가 아닐까. 도대체 운전면허도 딸 수 없는 실력의 까막눈 나복만 씨가 무슨 실력으로 이북에서 파견된 아버지와 만나 접선을 하고, 아버지가 건네준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숙지하고, 원주 부근의 미국 주둔지에 대한 정보를 작성해서 북한에 보내 선전선동을 일삼았단 말인가. 그들의 상상력은 어지간한 글쟁이들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나 보다.

 

고아원 시절 형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며 맷집 하나는 자신 있던 나복만 씨였지만, 장장 이십여 년 간 갈고 닦은 기관원들의 무수히 쏟아지는 각목 세례와 발길질 매뉴얼에는 어림도 없었다. 민주주의자 고(故) 김근태 의원이 남영동에서 스포츠머리나 손등에 털이 많이 난 요원 혹은 정 과장 같은 기관원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당할 때 정말 두려웠던 건, 고문 막간에 자식들의 성적이나 집안의 대소사 같은 일들을 걱정하는 일상의 이야기를 할 때였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괴물 같은 폭력을 행사하던 그들이 우리와 같은 일상을 지내는 보통 사람이었다는 점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다. 하긴 최근에 읽은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서 보면 독일 함부르크에서 모집된 지극히 평범한 독일 중년 사내들이 동부전선에서 냉혹한 유대인 학살자가 되지 않았던가.

 

이기호 작가의 현대사를 대하는 빼어난 역량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하는데 있지 않고, 너무 심각해질 수 있는 소재를 희화화해가면서 서사에 힘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다큐멘터리처럼 나복만 씨의 비참한 삶을 그대로 그렸다면, 독자의 가독성은 현저하게 떨어졌을 것이다. 어마무시한 간첩단 조작사건에 교사가 연루된 불륜치정사건을 곁들이고,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반미주의자를 자처하는 나복만 씨의 동료 운전기사 박병철의 협박사건까지 고명으로 얹으니 장군의 누아르 반전드라마 뺨치는 그런 서사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반에 난데없이 월북해서 소련에서 희곡 작가로 활동 중인 나복만 씨의 생부가 등장하는 장면은 아무래도 개연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 정도야 옥의 티 정도로 봐주면 안 될까.

 

그래서인지 후반으로 갈수록 왠지 힘이 달리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 초반에 나복만 씨에게 30년도 넘는 수배의 족쇄를 채웠으니 해피엔딩을 기대하기는 난망할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그가 악몽 같은 3호실에서 어떻게 탈출해서 옛 애인 김순희에게 연락을 해왔는지 궁금했지만 서사의 전개 과정을 유추해 봤을 때, 그것도 또한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 두렵고 분통이 터졌던 건, 우리가 부지런히 먹고 마시고 피우며 알게 모르게 낸 세금이 스포츠머리나 손등에 털이 많이 난 요원 혹은 정 과장의 활동자금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다시 한 번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 어떻게 주인을 배신하는 아브락사스가 될 수 있는지 깨닫게 됐다. 이렇게 부조리한 현실의 기원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 이기호 작가의 꾸준한 집필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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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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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의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귀향>을 읽었다. 법을 전공한 작가답게, 이번 작품에서도 인간사에서 빠질 수 없는 법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중요한 소재로 삼고 있다. 주인공 페터 데바우어의 아버지를 찾는 문학적 <오디세이아>가 악에 대한 인간의 본성과 어우러져 멋진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귀향의 전범이라는 <오디세이아> 이야기, 선과 악에 대한 심각한 논쟁 그리고 아버지 부재의 극복이라는 진지한 주제들로 쉽지 않은 독서였다.

 

아버지가 전쟁 중에 죽었다고 믿는 페터 데바우어의 유년 시절의 이야기가 정겹다. 독일에서 홀어머니 밑에서 살지만, 방학이 되면 스위스에 사는 조부모님의 집에 가곤 하던 시절의 이야기.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갖가지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자못 흥미진진하다. 역시, 아버지라는 존재의 부재가 드리우는 유년시절의 그림자랄까? 그런 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현업에서 은퇴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여가에 공을 들여 <기쁨과 재미를 주는 소설>이라는 총서를 편집한다. 그리고 화자이자 주인공인 페터 데바우어는 성장해서, 어려서 자신에게 금지되었던 총서의 이면의 글을 읽게 된다. 신화 속의 이야기가 그렇듯, 모든 금기는 깨지게 되어 있고 주인공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비밀에 도전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그가 접하게 된 금단의 소설은 카를이라는 독일군 포로가 러시아에서 귀향하지만, 집에 돌아온 그를 기다리는 아내는 낯선 남자와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의 결말에 집착하게 된 주인공은, 이 이야기가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 연원을 쫓기 시작한다. 그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쫓으면서, 동시에 자신도 오디세우스의 그 위험천만한 여정을 따르게 된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카를이 그의 아버지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법을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한 페터는 출판사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모든 것을 아는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의 그림자를 쫓지만, 완고한 어머니는 항상 모호한 대답으로 얼버무린다. 그는 카를 이야기의 원형을 이루는 방랑, 모험, 위기의 극복, 좌절 그리고 귀향이라는 패턴이 <오디세이아>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후 독일에서 붐을 일으킬 정도로 유행했던 수많은 귀향 이야기 중에서, 카를의 이야기야말로 진수일 거라고 예감한다.

 

페터는 소설에 등장하는 실제 주소를 찾아갔다가 바바라라는 이름의 낯선 여인과 만나게 되고, 필연적(?)으로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페터는 바바라 남편의 ‘귀향’이라는 당혹스러운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여인으로부터 ‘버림’ 받았다고 생각한 페터는 회의주의에 빠져 자신을 분주함 속으로 내몬다. 그리고 다시 잠시 중단했던 카를을 찾기 위한 <오디세이아> 프로젝트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바라의 친언니인 마가레트를 통해 카를의 모델이라고 믿어지는 폴커 폰란덴이라는 미지의 인물을 존재를 알게 된다. 모든 비밀의 열쇠를 쥔 자신의 어머니를 닦달해 보지만, 그녀는 완강하게 거부한다. 페터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알고 싶은 욕망에 비례해서, 그의 어머니는 과거를 밝히고 싶지 않은 욕망을 드러낸다. 마치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욕망의 평행선을 달리는 기관차 같다고나 할까.

 

통일 독일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날아간 페터는 우연한 기회에 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바바라를 만난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페터는 그녀에게 청혼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예전의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결혼을 서두르는 페터. 관청에서 결혼신청을 하다가 자신의 본명이 데바우어가 아니라 그라프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지지부진하던 페터의 아버지 찾기 <오디세이아>는 다시 한 번 급물살을 탄다. 게다가 우연히 입수하게 된 <법의 오디세이>라는 책의 저자 존 드 바우어라는 이름과 그의 저술을 통해 알게 된 모든 지표가 존 드 바우어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가르킨다. 자, 과연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귀향>은 확실히 쉽지 않은 소설이다. 작가 슐링크는 페터가 그렇게 애타게 찾던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 눈물의 부자상봉 혹은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게 분노의 일격을 가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천편일률적인 구성 대신 훨씬 더 복잡한 시놉시스를 구사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귀소본능의 지향점인 ‘귀향’이라는 간단한 주제를 가지고, 귀향의 고전 <오디세이아>와 악이 선을 위해 사용될 수도 있다는 지극히 파시즘적인 소재를 양념으로 곁들인다. 마지막 장에 나오는 존 드 바우어 교수의 세미나를 가장한 인간본능 테스트는 구세대에 대한 슐링크식 조롱이라고나 할까. 동시에 뛰어넘을 수 없는 기성세대 권위에 대한 좌절도 동시에 표출된다.

 

페터의 <오디세우스> 과정에서 작가는 곳곳에서 ‘카를’을 쫓는 실마리들을 차례로 배치한다. 조금 개연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 정도야 애교로 봐주자. 그렇게 준비된 절묘한 조력들을 따라가다 보면 대서양 너머에서 새로운 정체성으로 가정을 꾸리고, 성공한 법학자의 삶을 사는 존 드 바우어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과 대면하게 된다. 어느 순간, 그가 정말 페터의 아버지냐 그렇지 않느냐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전쟁 세대와 통일 세대라는 뚜렷한 구분에서 더 나아가, 과거에 빚을 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야말로 작가가 말하고 싶은 21세기 독일의 현재가 아닐까.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귀향>을 읽고 났더니, 호메로스의 원전 <오디세이아>와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을 읽어 보고 싶어졌다. ‘귀향’이라는 주제는 그야말로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인류의 영원한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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