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
최민석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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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독서 취향에 대해 말해 보자면, 때로는 고상한 고전 순수문학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으나 대개의 고전문학이 지루하기 때문에 너무 읽기 어려우니 B급 취향이라고 솔직히 자수해야 하나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다. 다수의 우리 문학 창작가들이 그래도 순수문학 계열을 추구하다 보니 어쩌다 등장하는 오늘 이야기할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의 최민석 작가 같은 양반은 문단의 이단아라는 느낌이 든다. 그의 대선배에 해당하는 미국의 찰스 부코스키가 있지만, 그의 19금 필력에는 조금 미치지 못한다고나 할까.

 

소설에 문득 나오는 필자의 창작 수준이 역행 혹은 퇴행하는 게 아닌가라는 데 대한 자신의 직접적인 설명이 나오는데, 늦깎이로 문단에 데뷔해서 전업작가로 먹고살기 위해(여전히 그의 행적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써제낀 단편소설들을 끌어 모아 이제야 소설집을 발표하게 되었단다. 그리고 보니 <능력자>, <쿨한 여자> 같은 경장편에 이어 소설집이 나온 점이 요사스러웠으나, 작가의 변을 듣고 나니 절로 이해가 갔다.

 

총 6편의 단편과 보너스 트랙으로 구성된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 중에서 혈기방장한 수컷의 본색을 숨기지 못한 나의 눈길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은 <독립운동가 변강쇠>였다. 마치 오래 전 즐겨 보던 양영순의 <누들누드>의 소설판이라고나 할까? 대물을 자랑하는 한국의 변강쇠 아니 변강석이 독립운동의 현장에 뛰어 들어 중국 마적떼와 친일 변절인사 노무라와 서방 변강쇠 스티글리츠와 한판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황당하기 그지 없지만, 묘한 카타르시스를 지어내는 그런 촘촘한 재미를 선보인다. 아직 그의 소설을 읽지 않은 독자 제하들에게 경고하노니, 너무 기대할지 말지어다. 기대는 보다 큰 실망을 불러 오는 법이니.

 

<국가란 무엇인가>에서는 좀 더 큰 국가 담론에 대해 말할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그것 또한 끔찍한 오산이리라. 그가 처음부터 까놓고 말했으니 이것은 대하(大蝦:길이 30~36cm에 달하는 보릿새우)를 막장에 찍어 먹는 그런 황당무계를 기반으로 한 서사다. 오, 작가의 재기 넘치는 이 따위 말장난이란 정말. 소시의 제시카야말로 국내 걸그룹 중에 독보적인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지질하거나 횡설수설을 삼가지 않는 예의 작가는 이북의 리혁수 동무를 터무니없는 계기로 귀순시켜(개연성이나 도덕성 따위는 강아지에게나 줘 버리라고), 수구정당국회의원으로 둔갑시키고 나아가 이북에서 남파된 “그들”에게 납치되어 ‘손시’(손녀시대)의 요리와 함께 갇히게 된다는 설정은 그들이 나중에 대하를 찍어 먹는 막장 뺨치는 전개였다. 아, 과연 어쩌면 정말 이 의미 없는 소설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는 나의 노력이야말로 부질없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그에 비해 <이방인 부르스의 말로>는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외계인의 신분으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한국 땅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문제는 그가 배운 한국말이 로버트 할리 뺨치는 부산말이었다는 점이다. 중앙무대, 다시 말해 서울 바닥에서 뜨기 위해서는 표준 서울말이 필요했다. 그래서 볼펜을 깨물고 표준어를 배우기 위해 침을 질질 흘리며 사투를 벌이는 우리의 주인공 부르스. 그런데 우리의 부르스는 그 흔하디흔한 할리우드 영화 한 편 안본 모양이다. 외계인의 표준어는 우리의 언문이 아니라 영어란다 영어. 자신에게 표준 서울말을 가르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던 야매 한국어교습소의 원장마저 필상의 생존을 위해 클래스에 앉아 있는 것을 본 부르스는 그야말로 좌절한다. 이 부분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통해 대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고, 예의 관문을 지나면 그 다음 목표인 취업을 위해 각종 스펙을 쌓는 우리네 청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스펙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어학실력을 입증하는 토익 점수를 따기 위해, 막상 입사한 다음에는 그다지 필요 없는 스펙쌓기에 오늘도 여념이 없는 그들의 모습이 요사하게 겹치고 있었다. 이 스펙쌓기에는 외계인도 열외 없다는 표현이려나.

 

리뷰의 제목으로 달았지만, 최민석 작가의 글이 지질하거나 횡설수설해도 난 좋다. 근엄하거나 젠 체 하지 않으니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지 않은가. 그냥 그가 갈긴 그대로 읽으면 될 듯 싶다. 의미없다고 목놓아 외치는 작가의 횡설수설을 지나치게 분석하거나 그럴 필요도 없지 않은가. 또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말고. 어쩌랴, 책은 필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그 나머지 부분, 해석이나 오독 모두 오롯하게 독자의 몫이지 않은가 말이다.

 

자, 일필휘지로 갈기는 리뷰의 대단원을 장식할 시간이 됐다. 오리지널과 속편으로 구성된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를 이야기하지 않고 끝낸다면 혹시라도 작가가 섭섭할지도 모르니 잠깐이라도 언급하고 마치기로 하자. 어느덧 우리나라도 백만명 이상의 외국인들이 합법적 혹은 비합법적으로 사는 그런 거대 공동체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백의민족, 순수혈통 따위는 유효하지 않는 표어가 됐다. 주인공은 키르기스스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 초이아노프스키다. 원래 이름이 훨씬 더 길지만 그대로 인용했다간 리뷰를 늘려 먹으려는 수작이라고 할테니 간단히 그가 일하던 가발공장의 악덕기업주 안면몰수 씨가 붙여준 최 씨라 부르기로 하자.

 

얼마 전 무려 집권여당의 사무총장이 무슨 박물관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고 혹사시켰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어쩌면 우리의 횡설수설 작가는 바로 그 사건에서 이 이야기의 모티브를 취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우리의 초이아노프스키 아니 최 씨는 부조리한 현실세계의 억압과 착취, 무엇보다 콩고에서 온 동료 주글리레 주씨가 안면몰수 사장이 제공한 떡을 그야말로 게눈 감추듯이 허겁지겁 먹다가 허무하게 죽어 버린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처한 주변의 부당함을 깨닫고 분연하게 의거를 도모하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간다. 몽골 엘리트 출신 바타르 박씨와 쿠마리 구씨와 작당해서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버스에 불을 붙이고 청와대로 돌진하자는 그들의 무(모)한 도전은 허무하게 사그라진다.

 

뭐 사실 최민석 작가가 농 혹은 유머로 담아 낸 이야기의 밑바닥에는 그저 웃고 넘어갈 수만은 없는 그런 층위의 서사들이 녹아있다. 아마 그런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면, 타이핑을 날리는 나의 손가락들이 매서운 혹사를 당할 지도 모르겠다. 진짜 이야기는 그렇게 다 웃고 난 뒤에, 비로소 자각하게 되어 생각하게 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작은 빗방울이 모여 강을 이루어 바다로 나가는 듯이, 일면 지질하거나 횡설수설해 보이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도전하는 이 B급작가의 도전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글을 읽는 재미까지 있으니 더 바랄 게 없다.

 

[뱀다리] 그의 전작 어디에선가 본 심이(心耳)라는 표현을 이번 소설집에서도 만나볼 수가 있었다. 그냥 마음의 귀로 듣는 소리인가 싶어서 표준국어대사전을 뒤적여 보니 ‘심이’는 의학용어로 “심장에서, 좌우 심방의 일부를 이루는 귓바퀴 모양의 돌출부”라는 뜻이란다. 에이, 설마 그런 뜻에서 작가가 쓴 건 아니겠지. 그러니 그냥 내 맘대로 마음의 귀로 듣는 소리로 규정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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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의 습관
김희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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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럴 때가 있는가? 어느 책과 만나게 될 때, 책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리고 그 책을 쓴 작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 없이 무턱대고 책을 읽게 되는 것 말이다. 어제 그리고 오늘에 걸쳐 바지런히 읽은 김희진 작가의 <양파의 습관>이 그랬다.

 

작가분이 들으시면 기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양파의 습관>은 어쩔 수 없이 <길버트 그레이프>를 연상시킨다. 고래 같이 살이 쪄서 외출이라곤 도통 하지 않은 엄마, 하지만 정신박약아인 둘째 아들 어니를 위해서라면 못하는 일이 없었던 슈퍼맘 말이다. 오래 전에 본 영화 그리고 뒤이어 읽은 책은 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겨줬었지 아마. <양파의 습관>의 주인공 보조 요리사 서장호의 엄마 강수자 아니 강수지 씨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데자뷰였다.

 

이 책은 뭐랄까,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같은 이름의 친구로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이십대 초반에 이탈리아로 떠나며 맡아 달라고 부탁한 원숭이 마짱과 지내는 서장호는 고등학교 때, 자신의 꿈이 요리사라는 걸 깨닫고 아빠와의 전쟁을 통해 자신의 꿈에 도전했다. 어쩜 이 소설은 꿈에 대한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글을 적다 보니 문득 들었다. 대대로 법조인 집안의 마장호는 집안의 너도 법조인이 되라는 족쇄에서 벗어나고파 이탈리아로 날아가 사랑도 만나고 자신의 꿈을 일궈나간다. 멋지다!!! 서장호는 말할 것도 없고, 드라마 장보리를 떠올리게 하는 이웃집 연극배우 지망생 김보리 양도 역시 말도 못하게 수줍음을 타면서도 연극배우의 꿈을 놓지 않는다. 어디 그 뿐인가? 주황주택단지의 무수한 캐릭터 중의 하나인 공부를 무척 잘하지만 그 놈의 수학 때문에 만날 전교1등을 놓친다는 추가을 양 역시 영화배우의 꿈을 야무지게 꾸고 있다.

 

이렇게 <양파의 습관>은 꿈에 대한 소설인 동시에 한 편으로는 상실에 대한 소설이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나 서장호를 제외하고, 하나둘씩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장호의 곁을 떠난다. 뭐지 이 소설은? 후반으로 갈수록 상실에 대처하는 갖가지 방식을 은근하게 들려준다. 역시 장호는 요리사답게 자신의 전공인 요리에 집중하면서 이별과 상실을 극복해 나간다. 우리에게 이별이란 어떤 의미이며, 그 이별을 대하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들이 희붐하게 그려진다.

 

범상치 않게 지붕 위에 냉장고를 얹은 김보리 양이 55호로 이사 오면서, 교통사고로 깁스한 장호가 무언가 이루어지지 않나 하는 기대감을 부풀린다. 서사의 공식대로 작가는 충실하게 더디지만 의미 있는 만남, 관계의 발전 등등을 전개한다. 베냇손톱부터 시작해서 스물일곱 해 동안 손톱을 모아왔다는 김보리 양에게, 장호는 자기 역시 특이한 수집품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바로 가름끈이다. 특이한 인연답게, 이 정도는 되야겠지. 우표 수집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이렇게 지붕 너머로 시작된 인연은 서먹한 관계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해 주는 단계에까지 발전한다. 굳이 어떤 의미가 되지 않더라도, 그 존재만으로도 충만하게 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원래 발레리나였다가 고래엄마가 되어 버린 하지만 언제까지나 자신의 전폭적인 지지자였던 강수지 씨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부터 시작해서,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친형, 그런 고래엄마를 비틀즈보다 더 사랑한 광팬 아빠 같은 가족사 이야기는 평범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소재로 소설의 재미를 더한다. 그 순간, 과연 장호와 7살 연상의 보리의 관계가 어떻게 될까 싶기도 하지만 김희진 작가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별과 상실의 패턴을 대입한다. ‘세상살이가 다 그런거지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느낌이다.

 

그냥 문득 작가가 이 소설에 제목을 <양파의 습관>이라고 지었는지 궁금해졌다. 소설에 양파가 등장했던가? 이웃집 김보리 양이 까면 깔수록 알 수 없는 양파 같은 매력의 소유자일지도 모른다는 나의 섣부른 상상은 단박에 부정당했다. 아, 양파는 깔수록 맵지, 뭐 그것도 어느 정도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자신의 힘으로 마련한 지붕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별빛을 즐기며, 사물을 관찰하는 장호 삶의 습관처럼 내 삶의 습관인 독서는 오늘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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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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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팟캐스트 황금시대 책다방을 통해 프리모 레비라는 유대계 이탈리아 작가를 알게 됐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황정은 작가의 열렬한 레비 사랑 덕분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프리모 레비의 첫 작품인 <이것이 인간인가>를 샀지만 미처 읽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에 출간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먼저 읽게 됐다. 작가 작품세계의 시원을 밝히는 차원에서라면 전작부터 읽었어야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마지막 작품부터 거슬러 올라가게 됐다.

 

레비의 책 제목에서 최근 발생한 세월호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상황도 그렇지만, 구조된 자 역시 가라앉은 자의 비극과 고뇌를 짊어지고 살아야 할 운명이라는 것이 홀로코스트 이후 드러난 여러 사례를 통해 드러났다. 어쨌든 이탈리아어를 모르니 그저 시기적절한 타이밍에 제목 한 번 그럴싸하게 뽑았구나 싶었지만, 영어제목을 보니 똑 같기에 이런 우연이 있나 싶었다. 이탈리아 출신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생존자로 인류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대학살의 기록, 홀로코스트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증언한다.

 

그가 들려주는 라거(강제수용소)의 모습은 다시 들어도 비현실적이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스트들이 유대인 절멸계획에 따라 게르만 민족 특유의 효율성을 발휘해서 그렇게 끔찍한 범죄를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는 것이 인류사의 비극이다. 모두 8개의 이루어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레비의 초기작 <이것이 인간인가>의 현재진행형의 모습이다. 아우슈비츠로부터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과거사에 대해 반성할 줄 모르는 독일인들의 모습이 마지막 장의 편지를 통해 고스란히 들어난다. 하긴 우리 이웃나라는 자신의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저질러진 각종 전쟁범죄 자체를 아예 부인하고 있지 않은가.

 

레비가 자신의 작품에서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점 중의 하나는 홀로코스트의 본질이 세대를 거치면서 희석화되고, 잊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역사의 평가를 시간에 맡기자는 말이야말로 당대의 가장 무책임한 말이 아닌가 싶다. 시간의 경과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객관성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의적 왜곡과 망각으로 사건 자체를 희석시키려는 그런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 생각은 역시 우리나라 현대사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화학자에서 문필가 혹은 작가로 전업에 성공한 프리모 레비의 글에는 라거에서의 체험에 대한 분노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죽기 전까지 버텨낼 수 있었던 용기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가 끝나고, 후대에 제기된 왜 유대인들은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해외로 도망가지 않았는가, 또 라거에서 탈출하지 못했나 하는 이견에 대해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최대한 성실한 답변을 시도한다. 비록 산업혁명을 통해 산업화가 많이 촉진되긴 했지만, 여전히 유럽사회는 농촌사회의 전형이었고, 다른 나라에 가서 산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겠지만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SS무장친위대가 지키는 라거에서 조직적인 탈출이나 저항을 도모하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였고, 실패했을 경우 뒤따르는 보복조치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홀로코스트 시절 대다수 독일인들에 대해 묻고 싶었던 것은 과연 그들은 당시 진행 중이던 홀로코스트에 대해 전혀 몰랐을까? 그리고 대학살에 침묵한 것이 궁극적으로 나치스트의 행위에 찬동하는 결과를 초래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잉태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설사 당시에는 몰랐다고 하더라도, 훗날 통절한 반성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어쩌면 보통의 평범한 독일인들은 대부분 자신들은 홀로코스트에 직접 수행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양심의 면죄부를 받지 않았나 하는 추정을 해본다.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다룬 많은 영화와 다큐멘터리, 소설 등의 미디어를 접하면서 어려서 받은 충격은 이제 어느 정도 완화됐지만 직접 홀로코스트를 체험한 당사자가 남긴 증언은 여전히 파괴력을 가진다. 새로 라거에 도착한 신참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면서 길들이는 야만적 행위로부터 시작해서, 독일식 엄격함의 상징인 침대의 모서리 각잡기와 끝도 이어지는 점호, 배고픔보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갈증 그리고 마침내 물을 발견했지만 모든 동료와 나눌 수 없었던 그런 상황에 대한 작가의 변론 등이 인상적이었다.

 

라거의 가혹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하고 비겁해지는 모습에 대한 상황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무엇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라거의 공식 언어인 독일어를 통한 소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소중한 양식을 제공하면서 독일어를 배우기도 했다. 물론 라거에서 사용되는 독일어가 괴테나 횔덜린 같은 대문호가 남긴 그것과 많은 괴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놓치지 않는 과학도로서의 예리함도 빠지지 않는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무척이나 더딘 속도로 읽었다. 죽음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죽음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노라는 프리모 레비의 증언처럼 인류의 비극을 읽는 것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프리모 레비의 냉정하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술 방식은 탁월하다. 그렇게 때문에 희생자로서 당연한 분노조차도 절제하면서 남긴 그의 증언이 여전히 시대를 초월해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마침 그전에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을 읽어서 가해자의 목표였던 유대인 절멸계획의 밑그림을 파악해서 그런지, 피해자의 입장에서 서술한 홀로코스트의 기록을 이해하는데 한결 도움이 됐다. 자, 이제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을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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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한 여자 - 최민석 연애소설
최민석 지음 / 다산책방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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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요즘 즐겨 읽고 있는 최민석 작가가 낸 책들의 출판사를 꼼꼼히 살펴보니 다 다르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보통 작가로 데뷔하고 나면 한 출판사에서 줄곧 책을 내지 않나? 고개가 갸우뚱거려졌다. 어쨌든 <능력자>에서 자신의 페르소나인 ‘작가’를 투입해서 서사를 풀어 나가는 구조가 인상적이었는데, 역시 이번 연애소설의 주인공도 작가다. 후기에선가 직접 말한 것처럼, <능력자>나 최근에 출간된 소설집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와는 다른 좀 더 진중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본인이 직접 밝혔듯이 <쿨한 여자>는 단편을 확장한 요즘 유행인 경장편 분량의 연애소설이다.

 

해마다 책을 한권씩 꾸준하게 발표하고 있는 최민석 작가의 연애소설은 확실히 전작 <능력자>와 다른 궤도를 지닌다. 전작에서 얼토당토 않은 캐릭터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했다면, 이별했지만 심정적으로는 전혀 그러지 못한 소설지망가 경도진의 그녀에 대한 미련이 중심에 서있다. 여느 평범한 연애소설처럼 출발은 비슷하다. 7살 어리지만 재기발랄하고, 헤어진 후에야 비로소 그 누구보다 예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나”의 고백에 힘입어 예전의 추억들을 더듬기 시작한다.

 

작가의 서사는 독자로 하여금 내러티브에 집중하게 하기보다 그들도 삶의 어느 순간에 만났던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의 추억을 되살리게 만든다. 아니 어쩌면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야말로 작가가 진짜 쓰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한다는 선언은 주인공과 주인공의 그녀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랑하면서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그녀를 떠나보내야 했던 남자의 미련 혹은 후회가 진한 아메리카노 커피향처럼 그렇게 무시로 감상을 자극한다.

 

역시나 문학적 클리셰이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방적 통고와 함께 떠난 그녀와의 재회는 필연일 수밖에 없다. 누가 쿨한 여자냐고? 물어볼 것도 없이, 그렇게 주인공과 헤어지고 난 뒤에 사랑을 찾아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나선 그녀가 스스로 쿨하단다. 그러니 자신의 주장과 현실의 괴리가 뒤따라 올 수밖에.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행동이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야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으로 보이겠지만, 한발짝 뒤에서 냉정하게 판단해 보면 그만큼 피곤한 스타일도 없을 것 같다. 이런 의미 없는 훈수야말로 연애소설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 하긴 또 연애소설을 읽으면서 무슨 의미를 찾겠는가.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계속해서 자신과 자신을 비판하는 문우(文友)가 의미 없는 소설/글쓰는 글쟁이라고 쉴 새 없이 방어기제를 돌린다.

 

모름지기 문학을 하는 이들을 이래야 한다는 사명감에 제주도 강정길에서 만난 시인과의 인연이 추가되면서 또 다른 잠재적이면서, 점진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실재적 이별에 이르는 과정이 주인공과 그녀 사이에 내던져진다. 도대체 헤어진 그녀가 언제 어디서 튀어 나와 고요한 주인공 삶에 파문을 던질지 궁금해진다. 마치 장기판에서 다음 수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장기꾼의 심정이라고 할까.

 

제주도가 전초전이었다면, 다음 공간적 배경은 나가사키다. 역시 차이나타운으로 유명한 나가사키에 갔다면 짬뽕을 빼놓을 수 없으리라. 운명이라는 개연성을 투입해서 결국 나가사키행 비행기에서 그녀와 다시 해후한 나는 그녀와 만날 생각에 곁에 있는 시인에게 잠별이니 점별이라 부르면서 이별을 준비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만나 무얼 해보겠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생각보다 몸이 가는 대로, 어떻게 되겠지 하는 그런 대책 없음이라고나 할까. 시인과 같이 짬뽕을 먹으면서 고작 십여분 정도 되는 그런 시간에 자신의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나가사키 짬뽕에 담긴 각종 해물과 기타 식재료에 대한 찬란한 비유를 통해 ‘동물성’ 짙은 페이소스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주인공의 부질없는 떡타령에 뒤이은 빠블로 교수님의 발길질 세례는 예견된 분노의 발로였노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의미를 찾는다. 사랑을 하면서도 너는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앞으로 우리의 관계는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라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혹은 상대방에게 묻는다. 그런데 최민석 작가는 너무나 현실적인 연애소설 <쿨한 여자>(라고 쓰고, 쿨하지 못한 여자라고 읽는다)에서 그런 의미타령이 무의미한 것이라고 소설의 곳곳에서 훈수를 던진다. 소설 속의 관계는 어느 지향점을 향해 가지 못하고, 자신이 너무나 사랑한 그녀 때문에 어떤 글도 쓰지 못한다고 핑계를 능수능란하게 제조한 경도진의 삶처럼 그렇게 부유할 따름이다. 아니 어쩌면 더 솔직하게 이렇게 묻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 모든 게 너에게 무슨 의미인데?’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탈출구로 시간은 고스란히 흘러간다는 고전적 수법을 채용한다. 하긴 이것보다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현실적 대답도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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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콩고
배상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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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어제 배상민 작가의 <조공원정대>를 다 읽고 나서, 바로 그동안 눈으로 찜해 두었던 <콩고, 콩고>를 사러 달려갔다. 그리고 반나절 만에 책을 다 읽었다. 확실히 배상민 작가의 글은 재밌다. 그동안 최제훈 작가를 최고의 신진 작가로 꼽았었는데, 이제 그 반열에 한 명을 추가해도 무방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책을 읽는 동안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그동안 뭐랄까 재밌는 소설을 읽고 싶었는데, 배상민 작가의 첫 소설인 <콩고, 콩고>는 그런 나의 기대에 정확하게 부응했다.

 

소설 <콩고, 콩고>는 기본적으로 두 명의 바보에 대한 이야기다. 먼저 존재했던 달리기와 버티기에 능한 바보 담과 교활할 정도로 영리한 바보 부, 그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배상민 작가는 <조공원정대>에 나오는 <아담의 배꼽>에서처럼 기존의 전설/성경에서 모티브를 채용해서 새로운 진화론에 입각한  창세신화에 도전한다. 척 봐도 아담과 이브(이부)가 떠오르지 않는가? 유사 이래 새로울 게 없다는 이집트 피라미드 경구가 떠오른다. 그리고 서기 일만년에 8천년 전에 존재했던 아종 인류를 추적하는 발굴단장에게 역사의 베일을 벗기는 임무를 부여한다. 그렇게 독자는 시간과 공간을 이동해서 우리의 주인공들과 만나게 된다.

 

아이큐 78의 소년 담은 모자라는 지적 능력 때문에 필연적으로 신산한 삶 가운데 내던져진다. 그리고 담의 구원자로서 사창가 출신(작가의 고의적 선택이리라) 부가 등장해서, 수확(도둑질)의 즐거움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이 그 둘의 만남은 운명적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와 지적 능력의 부재를 가진 소년이 태생을 알 수 없는 비천한 출신 때문에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소녀를 만나는 건 서사 전개를 위한 필연이다.

 

배상민 작가는 현대판 신화 다시쓰기에 “범죄의 재구성”과 담의 플래시백이 이어지는 정신병원 장면을 삽입한다. 전자는 담과 부가 생존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후자는 인간 세상에 부적응한 아종 인류의 종착지로서 작동한다. 다만, 정신병원 부분은 기존의 작품들에서 많이 차용된 일종의 문학적 클리셰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부의 지휘 아래, 담의 세상에 대한 투쟁은 계속된다. 부는 애초부터 자신이 현생 인류와는 다르다는 확신을 가지고 새로운 종족을 만들 궁리에 전념한다. 그러기 위해 수시로 ‘수확’을 기획하고, 행복 바이러스를 만들어 현생 인류를 멸종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싶어한다. 그녀의 기획을 충실하게 수행하면서도 담은 가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과연 부는 모든 것을 초월한 초인(위버멘쉬)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8천 년이 지난 다음에는 그녀 역시 삶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을 피할 수 없는 존재였다.

 

모든 것을 경쟁으로 귀결시키는 신자유주의 광풍에 맞서 그런 경쟁이 없이도 충분하게 행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왠지 공허하게 다가온다. 획일화된 행복과 가치의 추구야말로 야만의 시대에 유일한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던가. 그렇기 때문에 정신병원에서의 배식 경쟁의 위선과 허구를 깨달은 담 일당은 비로소 권력에 대한 저항을 개시한다. 부가 만들어낸 행복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창궐할 조짐이 보이자, 로제타스톤이라 불리는 비밀결사 조직은 자신들만 누려야 할 기득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행복 바이러스를 디지털 마약이라 규정하고 철저하게 금지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규칙들에 포위된 우리네 삶에 대한 숱한 질문들을 배상민 작가는 담과 부의 종횡무진 활약상에 뭉뚱그려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행복하냐고.

 

처음 제목만 보고 황당무계한 아프리카 탐험이 아닐까 하는 나의 짐작은 여지없이 빗겨나갔다. 대신 치밀하게 짜여진 구조에 멋진 SF 인류 진화론으로 버무려진 소설과 만나게 됐다. 중반의 박진감 넘치는 전개에 비해 후반부의 힘이 좀 달리긴 했지만, <콩고, 콩고>가 배상민 작가의 첫 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정도면 수작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싶다. 이 책을 읽는 동안은 그래도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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