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의 「피에르 부르디외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학술지 《문화와 사회》(2013년 14호 수록)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회학의 문제들』(1984/2004) 중 「언어시장」을 읽고 


"저기요 부르디외 선생. 근데 모든 걸 사회학적으로 생각해야 되나요?" 피에르 부르디외의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사회학적으로 보지 않으면 부르디외가 관을 뚫고 나와 삐질 것 같다고. 피에르 부르디외가 2002년 사망하기 전까지 그의 강렬한 투쟁적 사고, 특히 자신이 속한 학문적 위치를 끊임없이 돌아보고 그 거리감을 유지하려 했던 태도는 여느 지성인처럼 많은 지적 선물/산물을 안겨다준 게 사실이다. 특히 그는 주눅이 들어 있는 오늘날 사회(과)학도들에게 영원한 히어로이며, 고급 인문/사회과학 독자층에겐 '고전적 저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완전무결한 학자는 아니었다. 나는 부르디외의 그 완전무결함을 깼던 비판적 목소리 중 하나, '총체적 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이라는 정신을 추구했던 그의 태도에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는 편이다. 사실 부르디외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가 그런 사고의 과정을 거치겠지만, 이런 현상을 왜 자신이 속한 학문적 사고로 바라보지 못하느냐 더 나아가 하나의 현상을 해석하고 개념화한 A라는 학문이 왜 자신이 속한 학문적 사고에 비해 빠져 있는 게 많았느냐 비교해보는 것은 학자로서 당연히 고민해볼 지점일 것이다. 문제는 부르디외가 이게 좀 과했고 그리하여 과녁을 잘못 겨냥했다는 점이다. 이를 잘 짚어낸 국내 논문 한 편이 있다. 


국내에서 일급 부르디외 전문가로 평가받는 이상길 교수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라는 논문에서 부르디외가 강조하는 '사회학적-'이라는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언어관과 관련된 학문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언어학이다. 부르디외는 언어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쉬르와 촘스키의 논의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지향했던 언어에 대한 태도를 가져와서 '당신들 왜 언어를 사회(학)적으로 보지 못하냐'고 깐다.  

부르디외는 사회라는 현실 속에서 언어를 둘러싼 '나'와 '너'의 관계를 순수하게 바라봐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심지어 언어 공산주의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언어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맺는 언어를 둘러싼 관계는 전혀 순수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언어를 표현한다는 것은 그 언어를 표현하는 사람의 하비투스를 감안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소쉬르와 촘스키는 순수하고 순진하게 이 세계의 언어를 고찰한 사람처럼 여겨진다. 


이 논지에는 자연스레 사회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넘은 사회학적 오만이 들어 있으며, 이 '사회학적-'을 강조하기 위해 비교대상에는 전혀 '사회학적-'이 없는 것처럼 되어야 하는 상황 설정이 발생한다. 허나 이상길 교수의 훌륭한 지적에 따르면, 소쉬르의 언어학이 '순수'언어학이라 불리울 만큼 진공 상태에 있는 학문은 아니었으며, 소쉬르는 그 나름대로 언어의 사회성을 고안하기 위한 주장들을 펼쳐왔다. 다만 그 초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이상길의 논문 인용구는 다음과 같다.


예컨대, 소쉬르는 언어의 사회적 성격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그는 ‘개인적인 파롤’ 대 ‘사회적인 랑그’라는 이분법 위에서 랑그의 사회성에 주목한다. 다만 이 때 소쉬르가 중시하는 특성은 부르디외의 관심사와는 사뭇 다르다. 소쉬르에 따르면, “랑그는 개인 외부에 있는, 언어의 사회적인 부분으로 개인 혼자서는 그것을 창조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으며,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일종의 과거의 계약 덕분에만 존재”하고 “어느 누구의 뇌 속에서도 완전하지 않으며, 대중 안에서만 완벽하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다(Saussure, 1972: 30-31). 뒤르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이와 같은 개념화는 발화 주체들 외부에서 그들에게 객관적으로 부과되는 규범체계라는 언어의 속성을 무엇보다도 강조한다(124쪽~125쪽).


그다음 촘스키는 아예 부르디외와 언어를 보는 관심사와 태도가 달랐다. 고로 부르디외가 취하는 '사회학적 그물망'에 촘스키가 과하게 끌려온 점이 있다. 촘스키는 부르디외가 바라보는 사회 현실 내 언어의 경험적 다양성보다는 단지 인간의 생물학적 언어능력이 갖는 가능성에 중점을 두었을 뿐이다. 이상길은 촘스키가 취한 연구적 관심사에 대해 부르디외가 비판하려는 그 시선이 촘스키의 시선을 대체하거나 무효화할 꺼리인가라고 반박하고 있다. 


사실 이 논문에서 가장 탁월한 지적은 부르디외의 '외적 관심사에 대한 과잉'이다. 부르디외는 언어가 갖는 메시지 자체의 중요성보다는 메시지가 나타났을 때 이 메시지를 만들어낸 사람의 '상황' 혹은 '조건'에 관심을 기울였다. 쉽게 말해 알맹이는 대충 보고 껍데기에만 집착했다. 껍데기가 갖는 중요성에 과하게 천착했다는 것이다.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계급을 비롯해 사회적 조건이 평등하지 않은 조건에 있다면, 부르디외의 레이더는 자연스레 A라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봤을 시 A의 경제적 수준, 교양 상태에 따른 말투와 복식/격식 등을 따지려 든다. 허나 과연 메시지를 둘러싼 하비투스가 부르디외가 기대했던 대로만 움직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로 부르디외가 늘 강조했던 하비투스라는 이 개인의 실천을 좌우하는 행동의 성향 체계는 '개념을 위한 개념'으로 강제된다. 부르디외는 닫혀 있지도 않으면서 열려 있지도 않은 하비투스라는 개념에 대해선 유난히 자신이 강조하는 '성찰성'에 연약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부르디외가 『사회학의 문제들』에서 설명했던 '언어 시장' 속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 관계'를 어떻게 사회학으로 분석하고 폭로할 수 있을까를 알려주는 소중한 지침이다. 그는 언어하비투스, 언어시장, 가격형성의 법칙 같은 경제 용어를 동원해 언어 구사에 내재된 '불평등한' 상호작용에 딴지를 걸고 있으며, 이 딴지는 어느 정도 속이 시원하다. 다만 부르디외가 꿈꾸는 사회학의 세계는 이 사회가 사회학으로 그려지지 않았을 경우, '숨 쉴 틈'을 주는가에 조금 미심쩍은 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통렬한 어퍼컷이 간혹 상대를 잘못 조준했을 경우에 대해 부르디외는 자신의 당황스러움을 어떻게 변호할 것인가.


부르디외 당신, '사회학적-'이 아니라면 삐질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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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성의 심리학에서 감정사회학이라는 매개를 거쳐 내향성의 사회학으로 가는 길. 이 길을 가기 위해선 매개의 기능을 하는 개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중 내향성/외향성에서 /의 넘나듦을 설명하는 데 동원되는 '연극성'을 재고찰할 필요를 느낀다.

해외에서 발표된 내향성을 다룬 여러 시선에 깔려 있는 건 '당신 늘 이렇게 진짜 마음 감추고 살아왔는데, 사람들 앞에서 다른 모습 보이느라 힘들었죠?'에서 멀리 떠나지 않는 위로의 언어였다. 이 위로의 언어는 그 연극성을 디테일하게 관찰한 스케치로 이어지지만 역시나 우린 개인의 연극성을 둘러싼 그리고 이를 발휘할 수밖에 만드는 사회 환경이 무엇인지는 찾아볼 수 없다. 
앨리 혹실드의 '관리되는 마음'이 조금 더 연극성을 괜찮게 분석했던 건 현대사회 내 일의 의미를 작업장이라는 공간, 경영자 혹은 고용자-피고용자라는 요인을 감안했기 때문이란 것. 이를 참조한다면 내향성의 사회학은 내향성이라는 감정 영역과 연계된 고유의 '일터 감정'과 엮일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편집자'라는 직업을 세분화해보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감정을 둘러싸고 있는 경제자본에 대한 미묘한 좌절감 그리고 이 미묘함을 건드리는 문화자본, 더 나아가 그들이 직업의 스킬이자 그 성과물로 받아들이는 사회자본은 부르디외를 감정사회학 분석에 끌어올 계기를 마련한다.
그런 가운데 이 세 자본을 '관리'하고 그 관리의 과정 속에 괴로움을 스스로 느끼는 요인 중 하나는 연극성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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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독교인도 아마 한 번쯤은 들어본 적 있는 헨리 나우웬에 의해 널리 퍼진 운디드 힐러. 즉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개념은 오늘날 '공감 주파수'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데 자주 동원되곤 한다. 더 정확하게 나아가 공감 주파수에 대한 하나의 요건으로 언급되는 것 같다. B라는 사람이 아파한다. A도 B라는 사람이 아파했던 것으로 '아픈 적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아픈 적이 있다'다. A는 그러한 '상처입음'의 순간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B의 삶에 조언이란 과정 안에서 개입을 하며 A 스스로의 더 큰 상처를 만들어가게 된다.

 

사회적으로 목회자 자녀 출신의 문화계 종사자들-말과 글을 다루는 저자들에게 보여지는 공감과 경청에 대한 강박은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자신의 위치를 강조함으로써 더욱 굳건해진다는 게 몇 년간 관련자들을 만나 이야기해보면서 내린 소결론이다.  마음이 여리고 삶의 선택에서 어찌할 줄 모르며 누군가에게 자신의 두려움이 노출될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은 상처입은 치유자 유형의 저자들에게 메일, 전화 등 일대일이 될 수 있는 메시지 환경으로  다가가 S.O.S를 요청한다. 그러면 그 저자들은 자신도 편하게 살고 싶다며, 그간 자신이 그들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해왔던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공격적인 방식으로 풀곤 했다. 물론 이러한 공격성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독자이자 의뢰자에게 드러나선 안 된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가운데, 이 점이 자신의 신앙적 근본을 방해하지 않는 선(물론 독자의 측면에선 이 사람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었어?라는 의문이 들수록 좋은 삶의 어떤 유형을 살아가지만)에서 이뤄지는 말과 글을 통한 상처입은 치유자의 '다가가기'는 내향성의 사회학이 '조력자 콤플렉스'를 주시하는 이유와 이어진다.

 

상처입은 치유자에 은밀히 내포된 '감정의 헌신'은 상처입은 치유자가 갖는 감정노동의 그늘을 외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늘은 삶에서 자기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 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다는 활력 있는 언변, 똘끼 있는 그 나름의 경험담으로 나타나곤 하지만 결국 이러한 점들이 커지면 상처입은 치유자는 '원치 않은 대변자'의 자리에 자연스레 추대된다. 물론 이러한 추대는 상처입은 치유자의 위치에 우연/필연적으로 놓인 사람들이 무조건 원한다고  볼 수 없다. 거기서 심리적 에너지의 소비는 커지고 이러한 에너지 소비에 따른 스트레스는 심해진다.

 

상처입은 치유자의 위치에 놓인 저자들이 대부분 바랐던 점은 '평범성으로의 귀환'이었다. 뭔가 특수한 경험으로 점철된 자기 서사 혹은 타인보다 뛰어난 통각으로 사회적 고통을 매만졌던 그들에게 사람들은 하나의 '특수한 에피소드'였으며 이제 이러한 특수성은 진저리가 난 상태. 그들에게 삶의 평범함은 외려 더 '특별한' 가치였다. 

어찌 보면 '나도 당신이며, 그들이었다'라는 생각이 담긴 상처입은 치유자의 주요한 지향점은 이 개념이 지향하는 삶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타자에 대한 동일시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게 살고 싶은 감정노동의 그늘과 더 맞닿아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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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가을 어느 날. 영은은 남편 주훈이 정식으로 목사가 된 예배에 참석했다. 많은 목사가 남편의 머리에 손을 대고 안수기도를 해주었다. 영은은 그 장면을 본 순간 몹시 벅찼다. 시간이 지나 23년째, 영은은 한 목회자의 사모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교회 반주자로서. 그녀는 이제 주훈의 성급한 리듬을 따라가지 못한다. 주훈은 주훈대로 찬양을 하고 반주는 조금 뒤처진 채 예배의 소리는 채워진다.

한때 영은은 매우 뜨거운 '사모님 사모님 우리 사모님'이었다. 교인들의 힘겨운 삶을 다독이고 자신의 아픔처럼 상담해주었다. 과거 한 중소규모의 학원에서 상담실장으로 일했던 경력은 보탬이 되었다. 사람을 어려워하던 목회자 주훈을 커버해주던 역할을 그녀가 맡았다. 어느새 교인들은 지난 육일간의 고뇌를 자동적으로 영은에게 맡기게 되었다. 영은은 귀가 뜨거울 때까지 통화했고, 늘 호감 가는 덕담과 성경구절을 교인들에게 건넸다.


교인들의 고뇌가 행여 어디로 새어나갈까봐 화장실로 들어가 전화를 받는 건 예사였다. 그런 성의가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좋은 사람 콤플렉스'를 연구했던 신학자 듀크 로빈슨의 표현처럼 '친절 알림이'라고 불려도 지나침이 없었다.

허나 그녀가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 아주 활달한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거절을 잘 하지 못하고, 또 누군가에게 거절을 당할까봐 두려워하기도 했던 영은은 자주 몸살이 났다. 물론 이 몸살은 가급적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은 흐트러지지 않은 채 살아야 하며, 남의 흐트러짐을 위한 조력자로 살아가는 것을 '티나지' 않게 하는 것. 그게 남은 삶의 목표라고 여기던 영은이었다.


그러던 영은은 무언가 마음의 체함을 느꼈다. 늘 단호하고 분명하게 누군가의 삶에 조언을 해주던 그녀는 작은 일에도 쉽게 당황스러워 했다. 남편 주훈이 없어도, 아니 외려 주훈이 의지했던 생활 영역에서 영은은 주훈이 없으면 매우 불안해했다. "여보 어떡하지?"라는 말이 늘어가고, 판단을 주훈에게 맡겨버렸다.

자신을 위해 선택이란 걸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영은은 작은 화장품을 사러 갈 때도 매우 긴장했다. 어느 날 파우더가 떨어져 어느 브랜드점에 들어갔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저 파우더..." 하고 점원에게 말했다. 점원은 때마침(?) 적극적으로 물건을 파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 선택을 해주길 바랐던 영은에게 점원의 태도는 높은 레벨이었다. 당황하던 영은은 용기를 내어 "저한테 맞는 게 뭔지 좀 골라주실래요?"라는 말을 꺼냈다. 이 말을 꺼내기에 앞서 물론 영은은 가게에 가기 전 내가 어떤 파우더를 사야 하는지 마음속으로 골라놓은 상태였지만. 입구에 들어선 순간 선택의 장소에서 당황스러움을 느꼈고, 이는 약간의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점원에게 어느 파우더가 어울릴지 물어보기 전, 엉뚱한 파우더를 골라 점원에게 "어 그 파우더는 손님한테는 안 어울릴 것 같은데요"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영은은 점원에게 자신의 의사를 조금 얹은 소극적인 성향 찾기를 타인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영은은 가게문을 열고 나오자 명랑해졌다. 그리고 울리는 전화.


"어 집사님. 안녕하세요.  아구 맞다. 집사님 보험들라고 한 거 가입 깜빡했어요. 미안..근데 연지 시험 결과는

나왔어요?"


사모님, 사모님 우리 사모님은 어느덧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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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4-04-19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 좋은 콤플렉스라...참 힘든 거지요...
 



마이크 타이슨과 조이스 캐롤 오츠. 노벨문학상에 자주 거론되는 대작가와 한때 그 누구도 무섭지 않았고 끝없는 막장인생까지 가보았던 권투선수가 왜 사진을 함께 찍었을까. 아버지를 따라 권투 보는 것을 즐겼던 조이스 캐롤 오츠는 1987년『권투에 대하여』라는 인상적인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샌프란시스코대출판부에서 나온 이 에세이집은 '달콤한 과학'이라 불리는 권투의 세계를 오츠라는 여성의 눈에서 재구성한 책이다. 처음에 이 책을 알게 된 뒤, 본문 일부가 공개되어 있어 조금씩 읽고 있는데 묘사가 생생해서 꾸준하게 더 읽고 싶어졌다.

『권투에 대하여』에는 특별히 마이크 타이슨이라는 인물이 조망되어 있고 한 챕터를 차지한다. 80년대이니 이땐 마이크 타이슨의 막장 말년보다는 아무래도 권투라는 스포츠를 싱싱하게 볼 수 있는 역경의 드라마, 어떤 남성성에 비롯된 권투 예찬의 가능성을 짚어볼 흔적들이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말년의 마이크 타이슨은 어느 막장인생을 살아간 남자들의 전형적인(?) 회개 과정을 겪고 있는 듯하다. 믿기지 않겠지만 마이크 타이슨은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탐독하고 있으며, 니체의 책이 좋더라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한 '얌전이'로 바뀌어 있다.
몬스터짐에서 소개한 기사를 찾아보니, 홀리필드와의 '귀 물어뜯기 사건' 이후 시간이 지나 타이슨은 홀리필드에게 직접 사과했고, 홀리필드는 이를 받아들였다.

타이슨은 양념 소스 사업을 하고 있는 홀리필드의 광고에 출연해 
"이 소스와 함께라면 홀리필드의 귀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겠는걸?"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단다.

여전히 그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생이지만, 인생은 이래서 재미있다.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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