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날 '사회적인 것le social'이란 이론적 전장이 우리에게 끼치는 이로움이란 무엇인가? 새삼 고전 사회이론을 다시 들추어보게 되었습니다,란 학자들의 진부한 고백을 넘어 이 전장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주입되는 매혹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사회적인 것에 대한 논의를 담은 관련 논문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2. 사회적인 것을 오늘날 사회의 종언이란 조금은 섣부른 비평의 감각으로 환원하는 자들이 외치는 평어로 소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것을 둘러싼 학술적 쟁투는 계속 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쟁투의 형태는 사회적인 것을 선험적인 것-경험적인 것-실천적인 것으로 재구성해보는 논리 게임의 도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보다 적극적인 사회비평의 기능을 탑재한 채, 사회적인 것에서 경제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재정리하고 공적/사적 영역의 공간에 속한 개인의 '정치적 실천의 목표'를 끌어내는 기획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3. 후자의 측면에서 먼저 우리는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과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이 갖는 묘한 유사성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두 인물 다 정치적 실존주의를 견지한 상황에서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이 갖는 가능성에 대해 탐문해보았다.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에 대한 개념을 정리한 김홍중의 견해에 따르자면,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에서 연상되는 행위신학의 귀결은 메시아로서의 '나'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란 이 사회의 부조리함을 해체할 무한한 가능성의 주체로 상정되지 않는다. "아렌트의

메시아는 특정 초인이나 계급이나 젠더나 사회적 집합체가 아니다." 아렌트는 이 희미한 주체의 상정 속에서 기적을 바란다. 아렌트에겐 이 기적이 이뤄지기 위해선 기적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나'가 아닌, 단지 태어났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행위능력만을 가진 '나'의 불완전성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나는 아렌트가 강조하는 '말들의 사회'에서 참여하는 공적 주체로 나아간다. 


4. 아렌트가 고안한 메시아로서의 나는 사르트르가 사회적 집합들의 세 요소를 설명할 때 나타나는 '조절적 제3자'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사르트르의 논의가 좀 더 사회학적인 향취가 나는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조절적 제3자란 "우두머리도 아니고 지도자도 아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지시와 지침을 통해서 타인들을 위해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각자다." 


5. 사실 사르트르에게 조절적 제3자란 개념은 사회의 변혁을 위해 필요한 대중의 가능성을 고취시키기 위한 기획어일지 모른다. 알랭 바디우가 『사유의 윤리』에서 잘 정리해놓았듯이 기본적으로 사르트르의 회의주의가 깔려 있는 '사회적 집합들'이란 개념에는 인간의 수동성/능동성에 대한 사르트르의 은밀한 집착이 담겨 있다. 그 집착은 결국 인간은 어떻게든 수동성으로 돌아가고야 만다는 것. 사회성의 평균적인 형태는 분리라는 것이다. 바디우는 사르트르의 이 집착이 사회적 집합들이라는 개념에 관한 매력적인 기술을 뒷받침하면서도 사르트르가 갖는 대중을 향한 일관된 원칙 "대중이 역사를 만든다'에 대한 과신을 낳았다고 보는 듯하다. 사르트르의 이러한 회의주의는 대중에게 할 수 있다를 더 주입시키려는 계몽적 기획으로 태어났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6. 바디우의 깔끔한 정리를 참고해 짧게 재정리해보면, 사르트르는 집합적인 수동성 100의 형태를 계열이라 보았고, 이 계열의 수동성을 깰 집합 형태가 '융합'이라 보았다. 그리고 조직은 정치가 가장 잘 나타나는 곳으로서 여기서 조직이란 융합이란 집합형태가 제도로 구축되는 형태다. 사르트르는 조직을 이끌어가는 데 맹세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조직이란 집합 형태에 있는 개인은 맹세를 통해 배신이란 감정을 체화화게 되고 이러한 배신을 극복하는 것은 맹세 아래 만들어진 형제애다. 그러나 이러한 형제애는 늘 공포와 동반된다. 이 지점에서 조직에 깃든 제도는 능동성이 발휘되었던 융합 상태에 있던 개인을 다시 계열 상태로 돌려보내는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제도의 위치에 국가가 있다고 주장한다. 


7.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에 대한 비유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에서 비롯된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린다'는 동일한 이유 속에서 줄을 서서 기다린다. 그러나 이러한 줄을 선다는 행위가 바로 이 줄 서기에 대한 부당함을 외치는 것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대게 무관심 속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나와 너일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자연스레 체화한 인간일 뿐이다. 사르트르는 이를 '수동적인 종합' '무력함의 통일성'이라 보고 계열이란 집합 형태로 명명했다. 허나 융합 형태에 오면 사르트르는 "다 같이 항의하러 갑시다"라는 인간의 가능성을 본다. 바로 이 인간의 존재가 '조절적 제3자'이며. 이 존재는 '여느 인간'이다. 이 여느 인간인 조절적 제3자의 말 걸기를 통해 상호성이 구축되고 계열이란 집합 형태가 갖고 있는 수동성, 무기력은 녹아내린다. 


8. 근데 바디우의 문제제기가 재미있다. 상식적이라 더 재미있다. 

'아니, 사르트르. 당신 인간을 그렇게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로 본다며? 근데 어떻게 인간이 무슨 계기로 그렇게 서로를 인식하며 뭔가를 바꿔보려는 능동적인 통일성의 존재가 된단 말이야?' 사르트르는 앙드레 말로의 표현을 빌려와 이 극적인 변화의 계기를 종말론이라고 부르는데, 사르트르에게 종말론적 순간은 곧 인간의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분리된 상태를 극복할 사건인 듯하다. 사르트르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종말론적 순간은 곧 계열이 용해된 융합의 순간이다. (이 부분부터 바디우는 조금 미심쩍어하는 것 같다)


9. 바디우가 파고드는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이 갖는 허점은 계열이 용해된 융합 단계로 접어드는 대중의 상태가 늘 '반란'이라고 하는 계기를 통해서만 이뤄진다는 사르트르의 경직된 도식이었다. 그리고 이 도식의 문제는 대중을 능동성/수동성의 차원으로 정리하려는 사르트르의 감정적 개입이었다. 바디우는 사르트르의 지나친 차가움이 못마땅하다는 듯, 인민의 능동성이 반드시 수동성으로 회귀하는가란 의문을 표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결국 수동적이고 분리된 상태로 돌아가고 만다는 회의주의적 시나리오에 심취해 있었다.


10. 허나 이러한 허점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이란 개념은 아렌트와 더불어 '사회적인 것'의 실천성을 두텁게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것의 논의에 유익한 나름의 중요한 도해라고 여겨진다.사회 속 개인을 무기력, 수동성/능동성이란 정서적 차원에서 보려고 한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은 감정사회학적 해석의 중요한 영역으로도 고찰해볼 수 있을 듯하다(합리성-합당성-합정성 모델에 기초하여, 우리는 개인의 수동성-능동성에 선/악의 가치를 덧씌우지 않은 채 좀 더 입체적 해석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인가).

김홍중의 사회적인 것에 대한 도해를 참조하자면, 사회적인 것은 베버처럼 인간의 사회적 행위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짐멜처럼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뒤르켐처럼 행위 규칙과 도덕적 규범이란 요소를 통해, 루만처럼 시스템을 통해 다양한 논의로 전개되어왔다. 


사르트르가 제시한 사회적 집합들의 계열-융합-조직의 단계를 앞선 '사회적인 것'의 네 요인과 결합해 해석해본다면, 이 작업은 사회적인 것의 개념적 두터움을 도모하는 데 나름의 유익함이 있으리라 본다. 이러한 유익함이 사회적인 것을 둘러싼 쟁투에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매혹일 수 있다. 물론 이 매혹은 우리가 서 있는 세상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 


*

김홍중, 「사회로 변신한 신과 행위자의 가면을 쓴 메시아 전투: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사회학》제47집 5호, 2013, p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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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월적 사유의 섬세함을 더 이상 되찾을 수는 없지만, 모든 질병을 세심하게 예방하도록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노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셸 푸코의 국가 박사학위부논문 서설인 「칸트의 『인간학』에 대한 서설」(문지에서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로 출간되었다)을 읽다가 일흔대 칸트의 당시 상태를 짐작해보는 푸코의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노년의 역사'류의 책에서 어느 역사학자나 한번쯤은 언급할 진부한 문장 같기도 했지만, 뭔가 마음이 끌린 이유는 몇 페이지 뒤 나오는 '소원들의 등록부'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2. "철학은 자신의 총체성 안에 건강과 질병의 관계를 포함시키면서, 자신의 절대적인 지평을 형성한다. 확실히 [철학의] 이러한 우위성은 인간이 가진 소원의긴급한 성격에 의해 은폐된다. 우리가 오래 살거나 건강하기를 희망할 때, [이 두 가지 소원 중에] 오직 첫번째 소원만이 절대적인 것이며, 죽음을 통한 해방을 원하던 병자는 [정작] 임종의 순간이 왔을 때는 언제나 [죽음의] 유예를 소원한다. 그러나 소원들의 등록부에서 절대적인 것이 삶의 차원에 있어서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푸코는 이 표현이 나오기까지 칸트의 『인간학』출판과 관련된 사정들을 다 뒤지고 개연성을 만들어나간다. 이는 단지 자신만의 칸트 전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아니다. 칸트가 묻고 싶었던 인간과 자연의 관계, 푸코 자신이 관심 있었던 철학과 의학의 관계를 전자와 엮는 것을 넘어 생명 자체에 대한 탐문을 시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3. 푸코의 추적 과정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학자들'에게 노령 혹은 나이듦이란 무엇인가 생각을 해봤다. 출판인들은 가급적 학자들의 총명함에 치우쳐 그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혹은 그 총명함의 기준에 들지 못하면 비판하고 과한 훈계도 보탠다. 그런데 뒤집어보면 후추보다 소금이 많은(이는 나이듦에 대한 오에 겐자부로의 비유다) 나이를 맞이하는 학자들이 갖는 어떤 좌절감은 단순히 정서적으로 (흔히 안타까움이란 표현으로) 미화되어왔다. 혹은 출판인들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류의 시선으로 뒤늦게 '학문적 비아그라'를 복용한 이들의 성과와 흔적을 찾아 노령과 거기에 얽힌 지성을 예찬한다.

4. 그런데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가 『사회적 삶의 에너지』에서 학자들의 일반적인 궤적을 이야기한 것을 고스란히 따르자면, 이런 예찬을 받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대부분은 자신의 왕성했던 문헌 소화 및 탐독 능력을 떠올리며 한때의 별이었음을 추억한다. 이를 감내하고 무리하지 않은 채 여느 직장인처럼 살아갈 뿐이다. 책이라는 것은 본디 지식의 최적화된 상태를 담아내는 게 상식이지만, 총명함을 향수로만 품고 살수 밖에 없었던 학자들의 삶을 제대로 다루진 않았다. 총기를 잃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건 사람 몇 없는 조용한 학회에서 늙은 고단함에 하품을 몰아 쉬거나, 심지어 코를 골거나, 자신의 질문 차례에서 동문서답을 하는 경우일 수도 있다. 

5. 오랜만에 쓴 논문은 으르렁거릴 에너지로 충만한 젊은 학자들이 보기엔 헛다리 짚기 일쑤고, 진부한 개념어 일색이다. 아이러니는 그 논문의 결과는 결국 지금 그 늙어가는 학자가 쓸 수 있는 최상급이라는 것이며, 이런 간극을 자기만 모를 때 생기는 잡음은 그 늙어가는 학자들이 떠안고 가는 짠한 운명일 수도 있다.

6. 요즘 독서라는 것을 되돌아보면서 그리고 거기서 앎의 최상급이라는 형태로 구현된 각각의 책이라는 사물을 보면서 나는 여기에 투여된 총명함이라는 것 말고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을 발휘할 수 없는 학자들의 사회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단순히 그들이 오랫동안 학자로 살아왔다는 것에 대한 관행적인 트리뷰트는 물론 아니다. '어쩌다'로 시작하든 '반드시'로 시작하든 학자라는 굴레 안에서 자신의 지적 감퇴를 인생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사회학은 푸코가 말한 다음의 당연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삶의 지혜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령은 질병이 아니라, 질병이 더 이상 제어되지 않는 때이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지배한다." 

7. 자신의 지적 황혼을 준비하는 이들이 남몰래 감추어 작성했던 소원들의 등록부를 찾아 들추어볼 때다. 여기엔 예상 외의 흥미와 깨달음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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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던가?_ 오에 겐자부로의 《'나의 나무' 아래서》가운데


"나는 내가 어린 시절에 사람을 보았던 눈에는 옳은 부분이 있었다고 느낍니다. 틀린 부분도 확실히 있었는데 그것은 '저 사람은 안 된다'라는 식의 어른들의 말투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부끄러움과 더불어 그 생각을 취소합니다. 어른들이 '저 사람들은 훌륭해'라고 하는 말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때 항상 그것은 옳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책에선 겐자부로의 워너비 두 사람이 소개된다. 한 명은 자신이 다니던 학교의 사환 아저씨다. 아저씨는 야생의 사나움을 고스란히 공포로 뿜어내는 들개가 학교로 내려오자 이에 맞서 벌벌 떠는 학생들을 보호했다. 그의 나이는 겐자부로의 귀여운 비유처럼 후추보다 소금이 많았다. 

















3. 다른 한 사람은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이를 체험했던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이었다. 이 학생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학생들을 도피시키고 책임을 지려했던 교장선생님의 행동과 최후(교장은 미처 대피하지 못한 채 열쇠를 손에 쥐고 숨을 거두었다)를 자신의 눈과 생각대로 꼼꼼히 기억하고 기록했다. 이 학생은 커서 학자가 되었는데 겐자부로는 이 학자 밑에서 공부한 학생들과의 식사자리에서 학자의 위엄과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다.

대지진 당시 그 학생의 이름은 마루야마 마사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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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잊혀지면 그만일 것을,알면서도 어쩔 수 없네_ 통속의 매혹은 우연한 문화적 접촉이 단번에 내 이야기인 느낌을 줄 때가 아닐까. 저 슬픈 노래의 가사, 저 황당한 영화의 결말, 저 담담한 산문의 고백이. 

2.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에서 <잊혀지면 그만일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네>를 좋아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21살 입영통지서를 받은 김연수의 기분. 군대에 간다는 것은 막막하다. 입대란 것 자체가 막막한 게 아니라 그 무력한 기다림 때문에. 그의 말마따나 군대에 간다고 해서 총검술을 미리 배운다거나 군복을 미리 받아 다림질을 할 수 있다거나 하는 현실이란 없다. 무얼 계획해서 그걸 븨자 체크해가는 정돈된 시간 채우긴 이별 뒤 친구와 나눈 대화 속 조언에 "고맙다. 잘 추스려볼게"란 빈말로 지금 네 이야기도 안 들어온단 태도 같은 것에 자릴 내주고 마는. 그런 기다림의 시간.

3. 우연에 맡기고 즉흥에 기대고 싶은 시간. 김연수도 글에서 누구나처럼 음주와 연애와 여행의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한다. 썩 멋지게 의미를 다듬어보지 않아도 흐트러지고 느슨해도 그걸 했단 것만으로도 뿌듯한 시간. 일어나면 돌아오면 머리와 마음이 아프고 허한 잔고에 허기지지만 하는 동안이라도 '될 때로 되라지'란 마음을 품어봤단 용기에 자족하는 시간.

4. 정처없이 떠도는 김연수가 일본만화 풍선마크 윤문 알바를 할 때 몸을 뉘이러 찾은 만화방. 김연수가 하는 작업을 신기해하며 그를 대단한 만화가 여기듯 묻고 보던 할아버지는 운동권 학생을 잡으러 온 경찰에게 왜 만화방 을 이 시간까지 여냐며 혼난다.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저는 아르바이트입니다" "할아버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수치심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뇌까렸다" "저는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만 일하는 아르바이트라구요"

5. 김연수는 자기야 입영통지서를 받았다지만 이 할아버지의 삶은 무언가 싶어 멍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직업의 귀천이 아니라 우릴 이렇게 가게 한 삶을 향해. 짐작은 가능하지만 그게 정 말 맞다고 확인/확언하기 두려운 게 삶 아닐까 김연수는 여행스케치 2집 속 노래를 떠올린다. "잊혀지면 그만일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네"

6. 일을 그만두고 쉬면서 김연수의 글 같은 기분이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거요?"란 질문이 미리 감지되어 거짓 계획안을 준비해가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이럴 때 실컷 방황해" 하는 말들은 내게 성의가 없는 듯해 서운하기도 했다. 이 변덕의 오감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성실했다.

7. 햇빛 좋은 어느 날. 아직도 날 일꾼으로 기억해주는 두 분에게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냐는 말을 들었다. 나는 선언보단 매우 미지근하고 결심보단 조금 단단하게 이렇게 살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자 좋아하는 선배 한 분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말은 하지 않은 채 눈빛으로 보낸 메시지가 이런 거란 걸 간만에 느꼈다.
돌아오는 내내 입에서 네 앞날 응원한다고 꺼내지 않아준 선배가 고마웠다. 내 선언과 결심 사이의 혼란을 눈치채고 자신의 제안을 거두어준 채 시시콜콜한 요즘 사는 이야기를 들려준 친구 O양에게 나는 빚 하나를 진 것 같았다. 그들 덕분에 종점에서도 곤히 자는 할매들의 어깨를 살짝 만지며 저 할머니 다 왔는데요 연한 오지랖을 떨 수 있었다. 나도 내릴 곳을 지났지만 간만에 단잠 잤네라며 마음에 달달한 풍선껌을 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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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이자 문학에도 욕심이 많아 소설가 데뷔 경험도 있던 랜들 콜린스는 정서적 에너지라는 개념에 큰 관심을 보였다. 마음을 다루는 책들이 근래 엄청나게 출간되면서 사람을 설명하는 데 겹치는 용어가 많은데 그중 하나가 바로 정서적 에너지 혹은 정신 에너지라고 하는 것이다. 이 개념에 대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쓰는 말에서 의미를 간접적으로 헤아려도 큰 무리는 없다. "아 더 토론하고 싶은데 에너지가 없어서 이제 그만.." "아 평소엔 안 그랬는데 너랑 있으면 에너지가 팍팍 줄어들어" 랜들 콜린스는 정서적 에너지의 누적과 소모에 있어 사람들이 어느 쪽에 에너지를 더 쓰고 싶어하는지 연구 초점을 맞추었다.


2

그에겐 평상심은 고요한 지층 아래 숨겨진 용암이었다. 지루하고 진부하고 '그냥 그거 늘 이렇게 해왔던 것처럼 하면 되잖아?'란 말로 설명되는 게 일상 아니요?라는 시선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데 뭐 에너지가 들겠소? 싶지만 콜린스는 늘 새롭고 일탈적인 것을 찾는 사람들이 숨겨놓은 그런 새롭고 자극적인 일상을 향한 갈구가 외려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에 많은 정서적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사회학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 있는 한 명인(명예의 전당은 내 표현이다) 해럴드 가핑클의 위반실험이 사람들이 얼마나 평상심을 유지하는 데 공을 들이려 하는지 잘 보여주는 훌륭한 사회학적 연구방식이라고 분석한다. 가핑클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습득해왔고 그리하여 미리 예상해 준비해두고 있는 일상의 틀을 조금 비틀었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당혹감을 보고팠던 개구쟁이였다. 


3

평상심에 관한 흥미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소설가는 W.G. 제발트다. 그는 『공중전과 문학』에서 엄청난 폭격을 당한 독일의 한 지역 속 사람들의 정서를 추적하면서 그들의 평상심 안에 든 어떤 그릇된 오만함을 본다. '공격당했다고? 괜찮아. 다시 세우면 된다고. 이럴수록 당황해선 안 돼. 그냥 있던 그대로 행동하자구'의 마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기가 아무 의미도 없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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