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관조 씻기기 - 제31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89
황인찬 지음 / 민음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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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의 시집 《구관조 씻기기》는 '마름'과 '젖음'을 다루고 있다. 시인은 시를 통해 축축한 상태, 젖은 상태를 계속 신경 쓴다. 황인찬은 이 습성濕性의 사운드를 통해 우울을 만드는 인간을 조망한다. 더 자세히 보자면 그의 시엔 우울을 만드는 인간은 어떻게 스스로 우울을 키우는가라는 고민이 담겨 있다.


우울의 인간은 젖어감으로써 습기를 받아들여 "몸이 자주 부었다"(<유체>). 습기는 황인찬의 시에서 상태가 아닌, 동작이다. 자아를 말리거나 젖게 내버려둔 시인에게 이제 세상은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베란다의 바닥이 젖어 있었다"(<면역>)는 고백이 가능한 장소다.

상태가 동작이 된 그의 시는 세상은 어쩌면 행동과잉=정지, 정지과잉=행동의 습성習性으로 이뤄진 곳이 아니었을까란  이 습성에 중독되어 피곤함과 노곤함 사이에 놓인 인간의 세상은 관찰 대상이자 시를 쓸 수 있는 조건이다."저녁인데 아직도 밝아"(<속도전>) 낮을 고찰하고, 낮인데 아직도 어두워 밤을 복기한다. 속도전을 감행하는 우울의 인간은 "혼자 집에 앉아서 물을 마셨다 한 번 마시면 멈출 수 없었다"(<물의 에튜드>)그리하여 우울의 인간은 습기를 보충함으로써 "물 없는 물병"(<물의 에튜드>)의 상태까지 나아간다.


습기와 건기를 오가는 동안 혼잣말과 중얼거림이 늘어나고 우울은 (시인의 말을 전유하자면) 나무로 서 있는 줄 알았으나 실은 나무의 그림자가 되어 떨고 있는 게 인간임을 증언한다. 《구관조 씻기기》는 마른 사운드에 향기가 나기 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몸부림친(그러나 이 몸부림은 정지였음을 깨달아가는) 젖은 성질의 사운드를 가진 시인의 b-side다. 젖은 사운드로 우리의 몸은 붓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구관조 씻기기》는 《페르난두 페소아: 페소아와 페소아들》에 수록된 작품 <선원>을 떠올리게 한다. '정지극'을 표방하는 이 작품에서 야경꾼인 세 여성은 이야기를 해보자, 이야기를 하는 게 옳은 걸까, 누가 이야기를 하라고 부추기는 걸까를 두고 '변덕 게임'을 벌인다. 많은 말이 움직인 것 같지만, 결국 움직이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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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와 영화
: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영민한 선택과 절단의 호흡법

1. 어젠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를 봤다. 영화에 관한 영화, 특히 스타와 명성을 다루는 영화에서 비화는 여담餘談이 아니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비화를 지혜롭게 활용한 영화다. 물론 이것이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의도인지, 영화가 진행되면서 생성된 우연인진 모르겠지만. 비화를 활용했다는 건 영화와 현실의 구분선을 활용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디까지가 줄리엣 비노쉬고 어디까지가 주인공인 대배우 마리아 엔더스(줄리엣 비노쉬가 맡은)의 삶인건지 모호하다면 영화의 비화 활용력은 출중한 것이다. 
근데 이 영화의 흥미로운 비화 포인트는 으레 우리가 예상하듯, 나이든 대배우의 과거에 대한 향수와 그 향수가 해결해줄 수 없는 쇠락해진 현실을 괴로워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아니다. 비화를 다룬 이 영화의 또다른 중심은 매니저 발렌틴(영화)과 그 역을 맡은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현실)다.


2. 캐스팅 비화는 보통 비화의 기능에 맞게 본 줄거리와 무관한 순전히 흥미의 부분만 건드린다. 즉 캐스팅 비화는 줄거리를 해치지 않는 어떤 결과론적 후일담이다. 근데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캐스팅 비화는 줄거리와 유관하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작품을 보러 가기 전, 캐스팅비화를 한번 살펴보고 가면 영화를 좀 더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한때 스타였던 나이 들어가는 대배우 마리아(줄리엣 비노쉬)- 그 배우의 강단 있는 매니저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마리아와 함께 리메이크될 연극을 함께할 똘끼 가득한 신성 조앤(클로이 모레츠)의 합으로 이뤄진 이야기다. 원래 온갖 스캔들과 파파라치에 시달리면서도 똘끼 있고 우울한 이미지로 아이돌의 리더십을 행사하는 조앤 역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더 어울려 보인다(그녀의 실제 삶을 돌아본다면). 그러나 《베니티페어》에서 크리스틴이 밝혔듯, 아사야스 감독이 조앤 역을 제안했을 때 크리스틴은 거절했고 대신 매니저 발렌틴 역을 하겠다고 했다.


3. 그럼 매니저 발렌틴 역을 통해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발렌틴을 선보이는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매니저 발렌틴은 매니저 발렌틴과 그 캐릭터를 다 연기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 자체를 보여준다. 즉 크리스틴은 한 대배우의 일상을 관리하는 사람을 연기하지만, 크리스틴 스튜어트 자신의 모습도 연기한다. 영화의 주요 내용 중 하나는 마리아가 함께할 상대역 조앤의 행동거지를 못마땅해하는 건데, 매니저 발렌틴은 마리아와 조앤의 캐스팅이 확정되고 난 뒤 마리아와 갖는 대본 리딩 연습 속에서 조앤의 똘끼와 이미지 속에 담긴 배우의 속내를 변호하는 말을 자주 한다. 


앞에서 말했듯, 영화 속에서 조앤은 현실의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겪은 일들을 유사하게 겪는데, 이런 행동, 배우가 선택한 작품 및 캐릭터와 인기를 이해 못 하는 마리아에게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매니저 발렌틴을 빌어 조앤의 삶을 이해시키고 변호하려 한다(크리스틴 자신에 대한 변호다). 어떻게 보면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매니저 발렌틴을 통해서, 헐리웃 신성 조앤을 통해서 만들어진 교집합을 통해 '1인 2역'으로 재현된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삶은 클로이 모레츠를 통해서, 그리고 크리스틴 스튜어트 자신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4. 영화의 화면 전개는 절단이 주를 이룬다. 시퀀스 안에서 시간은 천천히 자연스럽게 숨을 내쉬다가 쭉 절단되고 페이드아웃은 조금 갑작스럽다. 아사야스의 카메라가 시도하는 이 시간의 호흡법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이 영화에서 어떻게 제 임무를 다하는지와도 연관되어 있다. 물론 크리스틴은 그 호흡법을 충실히 따라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낸다. 
이 절단의 호흡법으로 자신의 비중을 과하지 않게 적정선에서 끊는 크리스틴은 고로 영화 속 다른 배우들을 빛나게 하는 현실의 '매니저'가 된 셈이다.


*이 영화와 닮은 구석이 있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맵투더스타>. 쇠락해져가는 대배우 하바나(줄리앤 무어)의 매니저 애거서를 미아 와시코브스카가 연기했다. 한데 원래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매니저 발렌틴 역에 크리스틴 스튜어트 대신, 미아 와시코브스카를 염두에 두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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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장애 세대 - 기회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올리버 예게스 지음, 강희진 옮김 / 미래의창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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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이 펑퍼짐하고 굳이 '결정장애'로 묶이지 않을 듯한 사례 제시가 많다. SNS를 위시해 미디어에 대한 비판도 전형적인 관점에 많이 기대어 아쉬웠다. '사례 수집'에 쏟은 열의 이상의 어떤 통찰력이 부족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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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래 영화총서에 빠져 있던 시기를 지나 영화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싶다 동기를 심어준 책 몇 권이 있다. 그중 영화학자 벤 싱어의 《멜로드라마와 모더니티》(이위정 옮김, 문학동네)를 김샥샥연구소 감정사회학 아카이브 두 번째 책으로 올린다. 일찍이 영화학 도서의 고전이긴 하지만, 이 책을 감정이란 키워드로 재구성해 다시 읽어낸다면 감정사회학의 양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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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책 9장 [멜로드라마와 마케팅]은 매체의 사회문화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나 영화광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좋아할 챕터일 것이란 생각이다. 며칠 전 영화학자 노엘 버치의 견해를 빌어 영화란 결국 우연을 서사로 통제하느냐 아니면 그 서사의 통제에 속박되지 않게 하느냐란 전투였다고 언급한 적 있다.
그러했을 때 벤 싱어의 9장 연구는 버치의 주장을 보충해줄 텍스트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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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발행물의 짧은 전성기. 9장이 다루는 테마다. 영화를 보기 전 대화를 나누면 우린 '스포일러'를 의식한다. 본 /보지 않은 사람이란 구분 속에 먼저 본 사람은 이야길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한다. 지금은 이야기, 줄거리를 대하는 감각이 사람 사이에서 나름 발달한 시대이기에 이는 뜬금없이 예민한 문제가 되기도 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이를 두고 언짢은 덧글을 주고받기도 한다.

한데 벤 싱어가 다루는 1910년대는 사람들이 영화를 볼 때 스토리, 내러티브, 플롯에 대한 이해도가 요즘에 비해 많이 떨어진 시기였다. 그래서 영화의 홍보수단으로 등장한 것이 영화 개봉과 함께 영화 줄거리 자체를 '특집화'하는 움직임이었다. 이것이 동시발행물이며 영화만큼이나 한 영화의 이야기를 상세히 지면에 소개하는 이 홍보수단은 짧지만 큰 전성기를 누렸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그 당시 대중영화의 재료가 된 단편소설이 영화화됨과 더불어 신문 게재 등을 통해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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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동시발행물의 전성기, 그 표지가 되어준 출판물은 스튜어트 블랙턴 파라그래프사 사장이 발간한 《더 모션 픽처스토리 매거진》(1911)이다. 영화사로 볼 때 영화팬을 위한 최초의 잡지라 불리는 출판물이다. 블랙턴은 사람들이 영화를 볼 때 이야기를 잘 파악하는 숙련도가 아직 떨어지는구나 냄새를 맡고 이 잡지를 내게 된다. 처음엔 영화의 감상과 이해를 돕는 스토리 게재가 중점이 되었지만 이후 영화배우들의 생활상도 전하는 잡지로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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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에 대해 갖는 관심은 대단했다. 영화사들은 홍보수단으로 다음 장면엔 어떻게 이뤄질까요라는 퀴즈를 내고 꽤 액수가 높은 현상금을 걸기도 했다. 
동시발행물은 왜 짧은 전성기를 누렸을까. 너무나 단순하지만 본질적인. 감독들이 이야기가 생생한 영화를 시간이 지날수록 잘 만들어나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동시발행물을 통해 영화 속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당시 영화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개상으로 뭔가 얼렁뚱땅 넘어가는 수가 제법 있었다고 한다. 관객들은 뭔가 갸우뚱하긴 한데 영화상으로 이야기를 인식하는 훈련이 덜 되어 있어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동시발행물의 이 짧은 전성기 속 아이러니. 영화보다 그 영화를 소개하는 동시발행물에 실린 영화-이야기가 관객들에게 더 재미를 주고 이해도를 높였다는 점이다. 심지어 동시발행물 제작자들은 상영을 앞둔 영화가 어눌한 이야기 투성임을 알고 영화의 허점을 가리기 위해 없는 이야길 덧대기도 했다.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또 영화와 종이매체를 통해 어떻게 통용되고 있는지 또 이를 둘러싼 생산자-소비자의 감정 구도는 어떤지 알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김샥샥연구소감정사회학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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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 버크 지음
《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아서: 쾌와 고통에 대한 미학적 탐구》(김혜련 옮김,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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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젠 신형철의 [이 사랑을 계속 변주해나갈 수 있을까]와 김소연의 [순교하는 장난]을 읽었다. 두 편 다 김수영에 관한 글이다. 읽고 나서 이 두 편을 중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형철의 글이 김수영에 관한 대서사시라면, 김소연의 글은 단막극 같은 느낌이다. 신형철이 답은 지문 속에 있더군요 하는 그다운 범생이의 마음으로 김수영을 우직하게 계승하려고 한다면, 김소연은 커피에 따라나오는 냅킨에 우연히 적어본 메모들에서 출발한 소소한 선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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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선언이라고 했지만 조촐하진 않다. 김소연은 소소함 속에서 김수영의 감각들을 꼼꼼하게 포착하고 배치한다. 이 시인은 김수영에게 천진성이란 감정을 발견하고 그가 언급한 '와선'에 호감을 느낀다. 부처를 체감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성실한 기운을 내뿜기보다 방구석에 누워 허공을 보며 부처를 느껴보려는, 그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 그것이 와선이다. 와선은 단지 건방짐이 아니다. 김소연에게 와선의 버르장머리 없음과 이에 기인한 천진성은 시대가 강압하는 정서와 맞붙기 위한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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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은 김수영에게서 사랑을 끄집어낸다. 그는 김수영이 사랑을 모호하게 다뤄왔다고 말하며 이것은 김수영의 성실한 방황을 입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김수영은 '사랑은 무엇이다' 대신 '무엇도 사랑이다'라고 시를 통해 말해왔다. 사랑이 전자처럼 주어가 아니라 서술어가 됨으로써 신형철은 김수영에게서 어떤 필사적인 기운을 느꼈다고 진술한다. 그 기운은 419에 가닿아 있으며 김수영이 맞닥뜨린 현대사와 관련이 있다. 김수영은 사랑을 통해 절망으로 주변을 다 뒤덮고 싶은 체념 대신 그래도 남아 있는 기운의 긍정을 도모하려 한다. 그리하여 신형철이 주목하는 김수영의 사물은 '주전자 물 끓는 소리'다. 한때 김수영은 이 물 끓음에서 소시민적 안일함을 느꼈다. 시대는 험악해지는데 '나'는 방 안에서 이 '들끓음'을 외면한 채 물 끓음에서 생명의 존속을 확인하는구나 하는 그런. 그러나 시인은 그 생각을 확언하지 않았다. 사랑을 욕망의 자리, 일상의 자리에 한 단계 '내려놓음'으로써 그것이 외려 우리가 다시 한번 시대의 불우함을 뜨거이 이야기하기 위한 예열이자 시작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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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은 오보에와 오케스트라의 음적 조화를 위해 오보에가 반음을 낮추어온 유래를 설명하며, 시인으로서 '낮춤'의 자세가 굴복이 아니라 성숙으로 가길 소망한다. 
김소연이 주목한 김수영의 사물은 '팽이'였다. 팽이를 세차게 돌리는 어린아해. 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 풍경에서 낯섦과 그리움을 느끼는 어른. 그녀는 우리는 어른이라서 이미 서럽다고 말한다. 어린아이의 천진성을 어른이 되어서도 나이를 먹은 만큼 잘 발휘할 것 같지만 그 기대는 빗나간다. 어른은 자신도 모르게 정돈되어간다. 시대가 요구하는 기운에. 그래서 팽이가 돌아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그 팽이가 동공 안에 들어와 접착된 상태일 때까지 그 순간에 중독되어보는 장면은 어른에게 남겨진 가냘프지만 붙잡아야 하는 새로운 선언의 동기가 된다.
김소연이 밝히는 선언은 다음과 같다.

"불온이 아닌 악동, 반란이 아닌 반동, 이것이 우리에겐 우리의 악기로, 우리의 음계를 찾는 우리의 주법이다."

신형철은 주전자 물 끓는 소리를 듣고 보는 김수영의 옆에 다가가 그 기운에 청진기를 댄다. 정확성과 엄밀함을 목적으로 한 진단이 아니다. 고스란히라는 태도가 담긴 전달이자 공유의 목적이 담긴. 그러했을 때 김수영의 시 <사랑의 변주곡> 속 호소력은 "넉넉한 믿음이 있어서 아들을 껴안는 아비가 아니라, 아들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믿음을 믿어야 했던 아비"에서 나온다. 

믿음을 필사적으로 믿어야 했던 김수영은 신형철이 보기에 사랑을 필사적으로 사랑했던 시인이다. 그는 그가 체험한 사랑을 배반하지 않고자 충성, 성실, 헌신의 윤리를 보였다. 물론 이 글 말미에 바디우의 사도바울론을 끌어들여 기념하는 신형철의 태도는 그다우면서도 그답지 않은 '물끓음'이 느껴져 부담스러웠다. 김수영의 존재 의의에서 유훈을 이어받고 싶은 건 아니니까. 바디우를 '교훈적'으로 전유했던 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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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필자가 시도한 김수영의 조망 속에서 다시 한번 예술에게 아니 실은 내 자신에게 부탁하고픈 문장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을 느꼈다. 김수영이라는 인물을 사건을 기념하고 싶은 문장이 아니라 김수영의 감각들을 끄집어내고 해체하고 새로이 공유하고픈 문장 그리고 문장에 도취되지 않는 사유.
그러기 위해 이제 필요한 건 감각하다, 즉 계속 김수영을 '덜어내는' 시도일 것이다. 덧대려는 기운은 끌리지 않는다. 내가 우리가 보고 싶은 건 기념비가 아니라 지금 여기, 세상이니. 다시 김수영처럼 턱을 괸 채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복사 씨 살구 씨의 존재인 인간을 믿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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