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모더니티 - 영화는 어떻게 가장 독특한 예술이 되었는가
자크 오몽 지음, 이정하 옮김 / 열화당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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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어떻게 예술에 대한 반성의 예술이자 혁신의 예술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나`라는 질문(혹은 이 질문은 타당한가)이 너무나 퇴색된 지금, 어떤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장들의 외침. `미술관으로 들어가버린 영화`라는 역사적 지점이 특히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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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테로토피아
미셀 푸코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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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강박증`의 상태에서 나온 미셸 푸코의 공간에 대한 에쎄. `배치`라는 개념에서 시작해 결국 그가 역설해온 통치적 합리성을 조망해가는 한 과정. 이런 맥락에서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을 통해 `본래의 기능을 배반하는 기능`을 구현하는 대안의 공간은 가능한가에 대해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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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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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에 대해 어린아이가 처음 경험하는 것은 "어른들이 좀 더 강하다"는 깨달음이 아니라 "오히려 어른들이 마술을 부릴 수 없다"는 깨달음이라고_조르조 아감벤, 「마술과 행복」


작년,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속에 담긴 윗 문장을 적어놓고 여러 번 곱씹었더랬다. 그리고 최근 이 문장 속 벤야민의 통찰력을 자주 곱씹어본 듯한 페터 한트케의 「아이 이야기」를 읽었다. 쉽게 가보자. 아이가 등장하는 작품은 늘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려는 음산함을 동반한다. 아, 하는 과장된 감탄에 휩쓸리지 말자 경계하면서도 아이는 어느새 나이 든 나를 꾸짖고 있다.

아이의 꾸짖음은 엄중하지 않고 천연덕스럽다. 그래서 읽고 있는 나이 든 나는 아이에게 질투심마저 느낀다. 글 속의 아이가 나를 꾸짖는다 느낄 때, 그 아이의 머리를 능글맞게 만져줄 나를 상상하며, 나에 대한 역겨움도 느낀다. 나는 왜 능글맞음으로 나의 당황스러움을 감추려 했는지, 자책하면서.


아, 하는 과장된 감탄에 휩쓸리지 말자라는 경계심이 무너짐과 동시에, 왜 한 아이가 나 스스로를 역겨운 존재로 만드는지 한트케는 작품을 통해 작가인 남자와 그의 아이에 관한 '사회학적 풍경'을 조성해낸다. 여기서 '사회학적-'이란 흔히 학문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학술성에 담긴 묘사의 둔감함을 자책하며, 쉽사리 그들의 학문을 비하하는 데서 오는 흔한 수사가 아니다. 한트케는 독자로 하여금 사회에서 '학學'의 면모를 뽑아내는 출중한 능력이 있다. 이 출중함은 큰따옴표로 처리해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얼른 올려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고픈 문장의 빈번한 출현이 아니다. 


한트케의 출중함은 작품 속 인물을 탁월하게 몰아세울 줄 안다는 것이다. 몰아세워서 거기서 오는 밑바닥의 자잘하고도 얕은 피해의식 같은 심리를 축축하게 늘어놓지 않고, 한트케는 거기서 더 한 번 인물들을 건조한 상태로 몰아세운다. 몰아세운다는 것이 더 이상 몰아세운다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그래서 한트케의 인물들은 몰아세움에 대해 기본적으로 냉랭하고 담담하다. 

자신을 몰아세울 줄 아는 인간들이 벌이는 고찰은 중립성을 담보한 '성찰' 같은 영역에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람들이 뻔하게 여기는 장면, 그리고 이 뻔하게 여기는 장면을 덜 뻔하게 보려는 인간들이 예상하는 장면을 폭로해 자신을 한 번 더 건조시키는 한트케의 인간들. 


본 작품에서 주인공인 한 남성 작가는 아이를 공동체 속으로 집어넣어본다. 기본적으로 극도의 예민함을 안고 사는 한트케의 캐릭터가 여실히 구현된 이 남성 작가는 아이를 향해 폭력, 냉대감, 쓰라림 등의 감정을 느끼며 자신의 시도를 분석해본다. 이 작가는 자신이 예전부터 강조해온 '모험심'이라는 가치가 자식을 갖게 된 이후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신경 쓴다. 세상에 태어나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는 작가의 정서를 이어받은 듯, 아니 더 어쩌면 뭔가 더 빼어난 감정을 갖고 있는 듯한 행동을 보이자 작가는 묘한 폭력적 정서, 질투심, 그리고 안쓰러움을 느낀 채 아이를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이게 된다.


아이는 자신인가, 아이는 자신이어야만 하는가, 아이가 자신이어야만 할까라는 복잡한 마음속에서 작가는 아이를 아이들의 세계에 둔 채, 자식을 관찰하고 자식의 반응을 챙긴다. 참고로 이 작품에선 '조숙하다' 같은 표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이는 그냥 무섭다. 여기서 무서움은 어른을 부끄럽게 하는 아이의 어른스러운 말 한마디의 차원이 아니다. 또래를 사귀고, 학교에 들어가고 거기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의 행동을 보며 우리가 으레 예상하는 '반항적' 캐릭터가 주는 그 냉소적인 힘이 이 작품을 이끄는 무서운 기운은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작품을 읽으면서 이 기운을 형언할 수 없었다. 아니 말로 표현하면 뭔가 그 기운을 갉아먹는 듯해 마음속에 떠오르는 기묘한 이미지로 가둬놓자고 생각했다. 물론 한트케는 이 작품에서 거창하거나 장황한 선택을 귀결로 삼진 않는다. 자신이 싫어하는, 격언이 씌어진 가방을 자식은 메고 다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작품의 마지막 대목에서 모호하게 처리된다. 


한트케는 「아이 이야기」에서 자신만큼 스스로를 잘 몰아세울 줄 아는 인간이 있었나 하는 쾌감 섞인 자만심으로 살아가던(허나 그 자만심을 내향적인 사색에 감처둔) 한 어른이 자신의 아이가 그런 자만심을 붕괴시키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천연덕스럽게 몰아세우는 것에 대해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의 마지막은 결국 어느 정상적인 운명의 굴레에 아이를 집어넣은 어른의 '이것이 결국 삶인가'하는 진부한 고백보다는, 자신을 너무 이른 나이에 잘 몰아세울 줄 아는 아이에게 당황스러움을 느낀 한 어른이 비겁하게 내놓은 달달한 패배감 같았다. 이 패배감은 결국 글을 통해 자신의 세계감을 표현해야 하는 작가 자신에 대한 예리한 타격으로 다가온다. 덕분에 우리는 그 타격으로 인해 어른과 아이 사이에 놓인 또 다른 세계를 곱씹어볼 기회를 얻었다. "그땐 어쩔 도리가 없었으니까"라는 말로 자신의 아버지가 벌인 시도를 평하는 아이의 툭 내뱉은 말은 이 기회의 소중함을 좌우하는 양분이다. 


이렇게 '성장'이란 말은 우스워지고, 우리 앞엔 먹먹함만이 남았다. 허나 이 먹먹함은 그 어느 감정보다 요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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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작가의 옮김 1
에두아르 르베 지음, 정영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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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이기도 했던 작가의 섬세한 자기 포착이 빛난다. 스투디움 같지만, 실은 푼크툼 같은 문장들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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