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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회한이 될 수도 있지만, 나를 비롯한 젊은이들은 '계간지'의 체온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 내가 소속된 '당대비평' 일도 내 몸에 익숙하게 만드는 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점에 가서, 차라리 <지큐>나 <에스콰이어>에 실린 '새끈한' 문화비평이나, '시사평론'을 읽고 "야, 허지웅이 쓴 그 칼럼 봤어?", "김현진이 쓴 에세이 봤어?"로 말문을 트는 친구들이 익숙한 세대에 속한 나로선, 가끔 <창작과 비평>이나 <실천문학> 이야기를 꺼내는 내 또래 친구들을 보면 신기하다 못해 징그럽기까지하다.(물론 이 징그러움은 좋은 의미다)
출판 시장을 그리 잘 알지 못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출판론>이란 학부 강의 때, 모 메이저 출판사 사장님으로부터 '인문,사회 출판 시장의 죽음'을 듣고 난 이후로, 또 내가 실제 공부 이외의 활동으로, 책 만드는 일을 하면서 느끼는 한기와 온기란 게 있다. 각종 칼럼을 통해 '앓이'를 표시하는 그런 인문 사회 비평 저서의 '감기 현상'을 글로 아닌, 내가 직접 체감할 때, 좀 깊은 고뇌를 하게 된다.
나는 다행히 '인복'은 있어서, 90년대 문화 관련 잡지들의 출간이 활황이었을 때 그 주도자들과 친분을 쌓고 산다. 그래서 그 시대의 '무용담'들을 종종 들을 때가 있다. 그리고 이제는 절판되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잡지들이 진열된 장소로 초대받아, 옛 추억들을 매만질 수 있는 시간도 가진다. 많은 분들이 그 시대를 그리워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시대는 또 이 시대만의 룰이 있다는 걸 부정만 하고 살 수는 없다. 늘 이런 회한이 나오면 등장하는 현실의 체제는 '인터넷'일 것이다. 글만 잘 쓰고, 시각만 독특하면, 또 그것으로 주목을 받으면 출판사는 러브콜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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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문/사회비평 쪽에선 유난히 '젊은 피'에 대한 판단 유보가 센 것도 있다. 특히 나같은 대학원생들에 대한 출판사 쪽의 아쉬움이라고 할까. 나도 필자 섭외 때 그런 걸 경험했는데, '논문체'에 익숙한 친구들은 출판사로부터 몇 가지 지적들을 받는다. 아마 대중과의 소통 부분일텐데, '쉽게 읽히는 글의 방식'에 대한 트레이닝을 요구하기도 한다. (나도 그런 지적을 대중문화를 다루는 모 잡지에서 꽤 받았다. 하지만 결국 부적응으로 난 그 자리를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흔히 이런 구분선이 작동한다. '시의성의 문제'. 내 또래 공부 한다는 친구들은, 늘 한윤형이나 노정태 이야기를 자주 꺼낸다. "나는 그 친구들처럼 시의성있는 사건들을 빠르게 해석못하겠더라구."로 시작하는 핑계들. 그래서 좀 호흡이 길 수밖에 없고, 글을 쓰게 된다면, 이런저런 학술적 살붙임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미리 겁을 준다(?). (물론 상황 자체를 빨리 해석하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형태로 녹여내는 그 가치는, 분명 지금 주목을 받는 개개인이 스스로에게 투여한 노동의 성과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성과들을 존중한다.)
실제로 그런 친구들의 글을 받아보면, 정말 겁난다. 그런데, 이런 겁이란 자신이 속한 학술적 제도 안에서 스스로가 연구자로서 잘 살고 있음을 '티 내고' 있다고 부정적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오히려 '헤비한' 이 글들의 정체를 직시해보면, 그들에겐 "난 역시 대중과 소통할 자격이 없어."로 시작하는 두려움이나 자괴감이 보인다. 그래서 많은 젊은 연구자들이 연구실 안에서 논문과 함께 숨었다. 그 현상은 아마 더 심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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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가 제대로 돌아가기엔, 참여하는 사람들이 워낙 바뻐, 실제로 내가 들은 '귀동냥'에 의하면 좀 엉성하게 만들어지는 경우가 꽤 있는 것으로 안다. 이 시장도, 충분한 개인의 자금 확보력이나 물적 토대의 지원을 '카리스마'있게 해주는 개인이 없으면 당장 무너질 모래성이 많다. 내가 속한 장르를 '인문,사회 비평지'라고 하자면, 이 장르의 오랜 생존자인<문화과학>은 유구한 전통을 갖고 있다. 나는 <문화과학>의 시선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소통의 형식을 놓지 않기 위해 공들인 노력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으면, 존경심을 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문화과학>의 목차만 보면, 지금 하는 이야기들이 예전에 했던 이야기들의 재판인 경우도 많다는 걸 느낄 때도 있다. 이건 지식인들이 갖는 예리한 '예언자적 촉감'일수도 있고, 시대가 부딪히는 '문화적 순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이들의 '생존'으로 인해, 나는 그런 생존의 양식들을 뷔페음식 먹듯이 경험하는 행복함을 누릴 수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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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적 개인'의 존재. 비하인드 스토리엔 이 표현이 낯익다. 누군가가 열성적으로 많은 비중의 글 노동(글쓰기 뿐만 아니라, 필자 섭외를 비롯한 업무를 포함)을 하지 않으면, 한 권의 책을 내기가 어려운 구조는 늘 존재해 왔다. 학생들에게 강의도 해야 하고, 본인의 연구도 해야 하며, 또 각각 학술 모임에 참여해 인사도 해야 하고, 학교 외 업무를 하다 보면, '계간지'의 그 두터운 내용을 챙기기 위해 매번 '출석체크'를 해줄 수 있는 기대는 늘 이상이 되고 만다. 그러다보면, 개인의 '비평 감'에 의존하게 되고, 또 잘 나가는 필자들의 '비평 감'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그러면 판매와 호응의 측면도, 결국 약간의 '감'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젠 어떤 기획 아래 모여 무엇을 만든다는 건 참 힘든 시간임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유명한 필자', '스타 지식인'을 모셔올까.라는 '이름값 효과'에 대한 유혹도 생기지만, 비평적 존심이 있는 분들은 이런 전술에 고개를 흔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발굴의 노동을 시도하자!'라고 의견을 공유하다보면, 현실 비평계에 대한 '냉혹한 판단과 사람들이 두르는 찬사에 대한 보류'로 하루를 마감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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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교체. 젊은 피의 수혈. 사실 내가 속한 <당대비평>(줄여서 '당비')은 이 전술에 대해 실패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당비'를 아는 사람들은 아직 문부식 선생이나, 임지현 선생의 '당비'로 기억을 많이 한다. 이 그늘을 벗어나야 하는 게 아마 나를 비롯한 젊은이들의 고민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책을 좀 팔아야 한다는 현실적 고민 안에서, 이 '유혹의 기술'이 주는 속물성을 벗어나고자 어떤 '진정성'을 발휘할 것인가라는 쉽지 않은 고민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