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의 국가론 강의가 국내 계약되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부르디외의 국가론에 대해 깊이 공부해본 적은 없다. 다만 이 책의 4장 「국가의 정신들: 관료 장의 생성과 구조」를 읽다보면 부르디외가 국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 정리해볼 수 있다. 지적 자극을 우선시하는 이에겐 외형적으로 푸코의 생정치보다 그 전개 과정이 심심할 수 있다. 허나 "낱말은 사물을 만든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부르디외는 국가가 만들어지는 조금은 상식적인 역사를 기술하면서도 권력의 형성과 분배 과정 안에 깃든 실천의 이름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이는 또다른 지적인 자극과 호기심으로 다가온다. 


가령 부르디외는 국가 권력에서 '임명'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왕과 영주 사이의 법적 관계를 보면 영주는 자신의 관할구역 안에서 법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점 왕을 중심으로 한 법 권력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보편'이라는 이름의 상징이 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왕의 이름을 대신하는 '법률적 인간'이 만들어지고, 영주의 법적 권한은 소멸된다. 이 시기에 왕에게 '임명'이라는 절차가 강조된다. 임명은 곧 국가가 부여하는 상징을 배분하는 실천이다. 명예와 평판이라고 하는 상징적 자본을 관료들은 받게 되며, 국가는 이런 관료들의 마음을 적절히 관리하면서 세금과 군사 등 '보편'이라고 하는 국가의 상징을 유지할 사회 체계를 잘 유지할 수 있도록 관료 장의 역동성을 기대한다. 내부의 다양한 권력자들이 갖고 있던 물리적 권력은 이제 왕과 관료 장이라는 형태로 일원화된다. 

부르디외는 세금이란 무엇인가도 묻는다. "반대 급부 없는 징수" 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부르디외가 보기에 세금 징수와 납부라는 실천은 곧 국가의 비인격성을 드러내는 사회적 논리로 구성되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을 위한 납부라는 저항을 막기 위해 나타난 큰 이유는 군대와 영토의 보존이었으며, 부르디외는 여기에 영토 방위에 따른 민족주의라는 연원을 끌어들인다. 군주의 이익을 위함이 아닌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란 동의의 정서가 나타났다는 것이다(여기엔 국가 외부 세력에 대한 안전과 더불어 국가 내부의 치안을 위해 세금 납부와 징수가 상식이 되는 역사적 과정 기술은 빠져 있다). 이러한 세금 징수를 통해 국가가 애를 쓴 것은 자연스레 통계와 조사였으며, 통계와 조사라는 실천은 곧 법률적, 언어적, 계량적 규범의 통일로 이어진다. 부르디외는 이 과정을 기술하면서 '문서'라는 사물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사실 이 틀에서 보론으로 실린 '가족 정신'이라는 부르디외의 글에서는 가족은 국가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그의 입장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은 1970~80년대 가족 관련한 국내 정부의 백서를 연구 자료로 찾아 읽고 어떤 해석틀을 마련하는 데 푸코뿐만 아니라 부르디외의 가족론도 큰 활용도가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으로 꽉 차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르디외는 가족이란 "잘 확립된 허구"라고 본다. 이것은 오늘날 인기 있는 신자유주의의 '-테크론'을 들먹이며 '기획된-'을 주장하는 가족론이 아니다. 어찌보면 좀 더 푸코적인 '국가와 호적'이라는 문서적/인구적 차원의 가족이 어떻게 오늘날 그 존재를 인증받고 있는가를 부르디외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국가의 관료장은 문서화라는 형식을 통해 가족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구성한다. 부르디외에게 그래서 호적이란 문제는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특히 가족 정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가족 특유의 따뜻하고 은밀/긴밀/친밀한 정서가 그냥 주어진 소여의 상태가 아니라 국가에서 비롯된 공적 활동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부르디외에게 가족이라고 하는 프라이버시는 곧 공적 기관이 부과하는 기능들의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결을 정리해보면, 부르디외는 '보편'이라고 하는 상징적 자본을 행사하는 국가를 향한 의심을 던지기 위해 어떻게 우리는 국가를 상식적으로 따르게 되었는가를 역사적으로 다시 돌아보는 작업을 선보인다. 부르디외에게 상징 폭력이란 그 폭력을 당한 당사자가 정작 그 폭력이 폭력인지 모르는 상태 혹은 그 폭력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상태라는 점에서, '보편'이란 상징적 자본은 의혹을 위한 제1항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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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들의 호기심


                           김신식


올해가 벌써인 사람들과 올해는 아직인 사람들이 만나 벌이는 유일한 위안은
결국 세상사와 주변일이었다
할머니의 손주름이 아니더라도
달력이 된 손가락은 시절과 세월을 
탓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오늘은 김씨, 이씨, 박씨, 최씨들의 시시콜콜함에
끼어들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뾰족한 한 녀석이 무슨 어울리지 않는 성자 타령이냐며 그 선한 음흉함을 벗어던지게
라고 십자가를 보이면
자네 이 성경구절을 아는가 하며 들킨 마음을
숨겼다

누군가의 아이고, 만 들어도 또 누가 떠나는가보다 싶어 대신 말을 이어주면 탄식한 친구는 

그런 게 있다네로 날 아이 취급하지만 이내 소주로 입을 이리저리 헹군 뒤 

그게 말일세로 운을 띄운다
나는 본디 청개구리라 막상 말이 시작되니
이미 딸딸이를 친 기분이네 농을 던지니
어허 사람 참 하는 삿대질이 싫지 않았다

탄 마늘만 씹어먹던 윤씨가 고백의 제왕인 줄
진즉 알았더라면 젓가락 짝이라도 맞춰줄걸
속으로 곱씹었다
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은 문양에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입담에 아직 반 이상 남은 술잔을 보는 

계획맨 임씨는 마음을 놓은 채 여기가 명당일세라며 엉뚱한 추임새를 넣었다

작별들의 호기심이 새어나올라 치면 윤씨가 고맙게도 땡초를 먹어주니 

풋고추라 속인 아주머니의 분주함에 박수를 보탰건만
윤씨의 뚝심은 분발에 분발을 더하거늘
오이를 먹던 성씨가 아이 매워를 깡마르게
외치니 그 시끄럽던 고깃집의 말들이 
물구나무를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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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때'라는 때이른 표현을 내걸고 어떤 결혼상이 있었다. 헐리우드 로맨틱코미디 영화에 자주 나오는 한 장면 같은. 아내에게 연말이고 하니 회사 동료 부부를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자는 제안. 정갈한 식탁보, 앤티크한 촛대, 혹시 동료 부부가 사올지 모르는 와인을 따를 와인잔까지. 아내가 손수 요리를 하고 디저트까지 만들면 바랄 것이 없겠지만 '에이 시켜서 그냥 접시에 얹자'라고 하는 이해심까지 구상해보았던 터였다. 







2. 교회명이 달린 십자가를 문앞에 붙이는 것보단 동료와 그의 아내가 식탁을 꽉 채운 요리를 보고선 '우와 이 많은 요릴 다 하셨어요?'란 진부한 감탄을 연발한 뒤 같이 기도를 하는 장면도 구상에 있었다. 각자 두 손을 모을까 아니면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을까 주기도문을 외울까 주기도문이 기니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는 굶주린 생명들이...'로 시작하는 기도를 할까도 미리 깔아놓은.

3. 때론 멍하니 텔레비전에서 하는 연말 시상식을 아내와 보면서 저 배우 혼자 타야 되는데 왜 공동수상이야란 불만을 서로 나누기. 그러다가 당신만 네일아트 하냐 나도 귤로 네일아트 한다며 개그를 치면 '아 짜증나' 하며 아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기도 있었다.

4. 혹은 애써 예약한 연극이었는데 같이 관람한 어린 대학생들의 타이밍 안 맞는 환호에 기분을 잡친 아내의 투덜거림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싸우다 서로 어색하게 대문을 열고 누구든 먼저 '나 먼저 씻을게' 하며 회피하는 것을 겪어보기도 있었다.

5. 김연수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와 이 소설에 모티브가 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그리고 <모두에게 복된 새해>에 더 어울릴 듯한 카버의 <깃털들>을 연달아 읽고선 그렇게 '한때의 생각'을 새삼 떠올려보았다. 그러곤 물었다. 내가 갖고팠던 기분은 뭐였을까.

6. 후덥지근한 날의 연속인데 12월 말이 왔으면 좋겠다. 그게 안 될 걸 알기에 어르신들이 잘 하는 '아이고 시간 자아알 간다. 이제 몇 달 남았노?'란 말이 음성지원되어 시계와 달력을 재촉했으면 좋겠다. 그리 큰 대박은 아닐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자족하며 버텼다, 보냈다, 지나간다에 박수를 치는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 익명의 초대손님과 실컷 귤을 까 먹으며 티비를 보며 '자들은 멘트 연습 좀 하지. 맨날 상 받으몬 떨린다 열심히 하겠다 그른 말밖에 할 줄 모르노' 하는 돌직구 손님의 말에 다 같이 깔깔 웃어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7. 그러곤 어느 채널이든 잠시 고정시켜놓고 카운트 열부터 뜻을 모아 아홉,여덟, 일곱...잘 가다가 하나 반에 반 하는 장난꾸러기 친구의 소리에 티비와 일치되지 않은 '땡!'을 모두 크게 외치는. 
각자가 새해 문자를 보낼 때 카톡 숨김 버튼으로 감추어놓았던 흑역사의 목록을 봉인해제하고 '잘 지내지? 새해 복 많이 받기를..^^' 아니 건조하게 가자. '새해 복 많이 받으렴'의 그늘진 장면들도 덤으로. 그러곤 1이 사라질까 계속 있을까 초조해하지 말고 나가기 버튼을 누른 채 '야 재미있는 것 좀 틀어봐'라고 말하는 그날의 기분을 갖고 싶었던 것 같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모두에게 복된 새해 그 기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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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 나오는 '마음의 습속'과도 연관이 있지만, 사실 파머의 책을 접하고 나서 떠오른 책은 장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였다. 주의: 이 거울 속에 비치는 사물들은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로 출발점을 끊는 보드리야르의 그 무심한 문체, 사막을 통해 현대사회의 침잠된 정치적 상태와 미국 민주주의의 우울을 풍경과 엮는 인트로는 책을 읽는 당시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정치적인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파트인 「권력의 종언?」에는 '제4세계'라는 표현과 '역설적 신뢰'라는 용어가 울림을 준다. 해방과 팽창, 더 이상의 적대란 없는 시기에 외려 나타나는 미국 사회 내부의 배제는 '깨끗하고 완벽하게'란 구호 아래 더 견고해졌다. 정치적 무관심에 의해 잊힌 사람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건 시대가 밀어붙이는 강박적인 행복증 전파, 정말 사람들이 편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편의를 협박조로 구성하는 권력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이런 권력의 망에 있는 이 사람들은 공민권을 박탈당한 채 지도에서도 잊힌 사람들로 전락해갔다. 이들은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자면 "가난한 사람들은 나가야 한다"의 언어에 묶인 사람들이다. 보드리야르는 지워질 운명과 소멸의 통계 곡선에 있는 좀비들을 양산하는 이 사회를 안타까워하며, 그 좀비들을 '제4세계'라고 명명한다. 여기서의 제4세계란 제3세계의 추락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현대 권력의 통치술이 낳은 비극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보드리야르는 이 챕터에서 '신뢰'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꺼낸다. 보드리야르는 미국인들이 정치의 실재에 대해선 그리 큰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합의된 신뢰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신뢰를 권력이 정부가 적절히 관리해주기만 한다면, 정치인들을 향해 믿음이 있는 것처럼 연기하길 좋아하는 게 미국인이라는 강도 높은 비판을 선보인다. 그러면서 그가 제시하는 신뢰에 대한 개념은 '역설적 신뢰'다. '이상하다. 저 정치인은 내가 보기에 갈수록 형편없어지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물고 빨아주는거야?' 보드리야르의 역설적 신뢰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역설적 신뢰는 점점 더 실패하고 점점 더 자질이 없는 이를 위해 부여되는 지지의 감정이다. '자 이제 천년왕국의 그날이 왔소'라는 예언이 실패되어도 그 예언의 실패에 아랑곳하지 않고 휴거를 믿는 종교인들의 비유를 들어 보드리야르는 레이건 정부를 향한 미국인들의 정서를 비판한다. 역설적 신뢰가 무서운 것은 보드리야르의 표현처럼 "실패의 부인에서 나오기 때문에 조금도 약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드리야르는 미국이라는 여행을 통해 무감각의 개입을 실천한다. 출판사에서 잘 만든 부제처럼 '희망도 매력도 클라이맥스도 없는' 이 미국 문명 여행기에서 보드리야르가 경계하는 것은 '어 저곳 나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던 건데, 직접 보니 신기하다' 같은 확인의 자세였으며, 이 "갱년기"와도 같은 미국 사회가 주는 모호한 유토피아적 분위기였다. 

"여행은 끝났다"라는 말이 책의 말미가 아니라 거의 책의 시작 부분에 나타나는 건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파커 파머가 어떻게든 이 모난 자식들을 보듬으면서 착한 장남으로서 민주주의의 상태를 복원해보려 한다면, 보드리야르의 이 미국 기행은 늘 같은 표정으로 조용히 살아가는 둘째 특유의 차갑고 무심한 정서가 다분히 느껴진다. 시종일관 차갑고 건조하다. 그러나 둘 다 '지금 이 상태의 사회는 아니다'라는 공통의 정신은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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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출판계에서 도드라진 움직임 중 하나를 꼽자면 시대의 어른을 찾으려는 것 같다. 사실 찾기도 하지만 이는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채현국 효암고 이사장의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라는 발언이 담긴 인터뷰를 비롯해 불문학자 황현산 선생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가 큰 히트를 치면서 이런 움직임의 의도가 보이는 서적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사실 시대의 어른을 찾는다는 것이 새삼 새로운 기획 작업은 아니다. 최근의 분위기가 갖는 차별점에 대해 '인문적-'이라는 성격 부여를 꼽고 싶지만 이는 그 분야에 심취한 사람들의 시선에 지나치게 기우는 것 같다. 


2

외려 마음이 가는 쪽은 '꼰대포비아'에 걸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확인받을 수 있는 영역을 만났다는 것 아닐까 싶다. 꼰대라는 적대적 표현 속에서 자신들의 마음을 동조해줄 수 있는 존재가 자신이 보기에 꼰대라고 예상했던 쪽이라면 그 확인 속에서 피어나는 희열은 좀 더 클 것이다. 여기에 '늙음'이 주는 잔잔함과 온기가 더해짐으로써 존경이라는 정서는 보다 굳건해진다.

하지만 황현산 이후 시도되었던 시대의 어른을 찾는 작업, 그 성공의 여부를 평가하자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도정일의 최근 책은 '맞는 말의 동어반복'을 통해 해석의 열림보다는 '굴복할 수밖에 없는 바른말'에 더 가닿은 듯하고, 김우창의 『깊은 마음의 생태학』은 이 책을 만든 자들의 지나친 고개숙임이 페이지 내내 느껴져 부담스럽다. 특히 후자의 경우 한국 인문학의 기념비적 사유라는 호칭을 두른 건 책 내용을 읽어보건대 김우창의 지난 공로를 생각하더라도 과한 호평이라고 생각한다. 


3

사실 시대의 어른을 찾는 작업 속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건 '우리 편이 아닐 것 같은 사람이 우리 편이네?' 하는 시선을 주는 흔적의 모음이다. 이 흔적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라는 요즘 인기 있는 구호와 잘 맞물려 '그래 이래야 정상이지' 하는 통쾌함을 주지만 그 이상으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볼지에 대한 고뇌의 영역은 주지 않는다. 속은 시원하지만 이 시원함을 넘어선 찝찝함을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4

이런 찝찝함의 영역을 고민하게 된 건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읽으면서였다. 사이드는 일찍이 말년성lateness을 고민했던 아도르노의 작업을 해부하면서 말년성이 오늘날 사회에 던지는 가치를 모색한다. 양해를 구하고 책의 내용을 조금 소화해보면, 말년성이란 인간이 시간을 통해 맞춰갈 수밖에 없는 신체-정신-건강의 영역이 문학-예술과 결부되었을 때 전자의 영역이 슬그머니 협상하는 인간의 한계에 맞선 '화해불가능'의 예술적 태도를 말한다. 더 나아가 '화해불가능성'이란 사람들이 뻔히 예상하는 처음과 끝이 선명한 통일된 큰 그림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어붙일 수 없는 예술 작품 속 단절의 상태를 뜻한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세계를 초월해 뭔가 극도의 숙성된 느낌을 보여주리라 예상된 노령의 솜씨에 "야 이거 내가 한번 만들어도 이것보다 잘하겠다"라는 격한 반응이 동반된 아마추어리즘이 발표된다면 우리는 이를  그냥 "이 사람 이제 예전같지 않구만 그래"라고 쉬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에드워드 사이드가 아도르노의 해석에 탄복하면서 그를 범상치 않은 말년의 사상가로 위치짓고 싶은 건 바로 이 문제의식이었다. 이 문제의식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사이드의 해석은 그런 말년성을 실천한 사람들이 세상에 아예 무관심하진 않았다는 점이다. 세상을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감각을 갖고 이 감각을 곧이곧대로 쏟아붓는 게 아니라 조금 비틀어버리는 '형식'으로 자신들의 예민함을 둔감함으로 포장해버리는 단계는 말년성의 아름다움이었다. 


5

사이드와 아도르노가 주창했던 말년성을 실천했던 이들은 세상이 듣고 싶어하는 말들을 고스란히 옮기지 않았다. 그들은 쾌 대신 불쾌를 택했다. 그럼으로써 주변에 머물렀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택한 불쾌의 전략은 오늘날 그들을 계승하려는 후예들이 고스란히 학습해 써먹고 있기에 그들이 마냥 외롭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오늘날 시대의 어른을 찾는다는 것에 대한 반감은 '맞는 말의 동어반복'과 '굴복할 수밖에 없는 바른말'로 뭔가 움츠렸던 울분의 해소 정도로만 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비판의 복잡다단한 결이 윤리의 호소로 환원되었으며, 이런 형식은 기껏해야 온화함 속에 묻어난 단호함 혹은 김구라 같은 직설/독설이란 형식을 빌려 빚어내는 통쾌함의 도모일 뿐이다.


6

 나는 더 찝찝한 어른이 보고 싶다. 그가 대가이기 때문에 당연히 기대하고 싶은 인문적 아포리즘 따위가 아닌 살면서 부대낀 그 나름의 경험담이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골계로 표현되었음도 싶다. 이를 위해선 '꼰대'라는 표현이 이 사회의 부조리를 겨냥한 평어로 작용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피아를 식별하는 격분의 언어로 전락하진 않았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랏 이 정도면 나 이 사람이 준 의외의 면에 감동받아 이 사회 그래도 아직 살만해'라는 정서에 만족하지 않고 '아 근데 이 사람 이 정도면 해주면 됐지. 아 이 이야긴 왜 꺼내? 사람 불편하게'의 정서를 주는 어른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그 정서의 형식성을 고뇌 끝에 이미 내놓은 어른들에게도 우리는 주목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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