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의 「내가 훔친 여름」(1967)를 읽다가 '연락 없음'의 시대성이라는 것이 있을까 생각해봤다. 이 소설이 나온 시절만 해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나 000야"로 시작되는 말이 친숙했을 것이다(이 소설의 시작처럼). 성과 이름을 큰 목소리로 다 꺼내고, 상대방이 "누구....?"라고 하면 허허 하며 혀를 끌끌 차고 가슴을 치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이때 연락 없음을 명증하는 인사란 '환골탈태'나 '금의환향'의 서사에 가닿아 있었을 것이다. 마치, 고추장사하던 박씨네 코흘리개 아들 흥수가 저렇게 말끔해져서 돌아왔네라는 반응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그러다가 흥수의 성공기가 흥수의 옛 친구를 통해 흘러나오게 되고 거기엔 학벌이나 재력, 땅 이야기가 포함될 것이다. 


요즘은 조금 시들해진 것 같지만 한때 많은 이를 휘감았던 연락 없음의 시대성은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이름의 서사였던 것 같다(『오늘의 거짓말』에 나온 어느 구절처럼). 허한 말들의 과다와 자극에 지친 이들을 씁쓸한 맛으로 위무하는 이 서사는 도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서 연유하는 가녀린 위악에 맞닿아 있었다. 이 가녀린 위악은 서로가 어차피 이 약속의 달성 유무에는 관심이 없다는 걸 속으론 알고 있지 않냐는 룰을 '암묵적'으로 숙지하고 있다는 그 자체에서 출발했다.


"잘 지내지?"라는 인트로도 없이 거두절미한 용건 제시가 도착했을 때, 인연의 길이와 넓이를 가늠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죄송하지만, 제가 폰을 새로 해서요"라는 인사법은 사실과 과해석의 저울질로 구성된다. 과해석에는 간소한 인연을 추구하겠다는 자기 선언의 합리화 혹은 상대방이 행여나 기분 나쁘지 않을까라는 지나친 염려가 끼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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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경과가 독해로 이어지는 작품들이 있다. 은희경의 「짐작과는 다른 일들」도 그랬던 것 같다. 제대 뒤 처음 샀던 소설집인 『타인에게 말 걸기』에 수록된 이 작품이 나는 묘하게 끌렸다. 문장을 하나하나 분명하게 포획한 데서 온 포만감은 아니었다. '아직 내가 삶의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걸거야' 하는 자기위로로 문장들을 읽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예는 결국 내가 지금 이 작품을(그리고 이 소설집 전체를) 읽는 게 아니라 '훑고 있었구나'란 직시를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10년 만에 이 작품을 다시 읽었다. '와 대박' 이나 '쩔어' 같이 취향의 젊고 명쾌한 반응 대신 그래도 나이가 한두살 먹어간다고 뭔가 속이 먹먹해졌다. 작품 속 이 여인의 삶을 알 것 같다는 느낌 앞에 '나두'라는 말을 자연스레 넣는 게 좋다가도 좀 그러했다. 소설은 제목을 충실히 따른다. 어느 한 여성에게 그리고 그 여성을 좋아했던 남자에게 짐작과는 다른 일들이 나타난다. 결혼, 이혼, 죽음, 섹스, 아이, 직장. 삶의 한 단계라면 단계인 것들이 너무 빼곡하지 않게 압축적으로 잘 담겨 있다. 


사실 짐작이라는 말 자체가 어느 정도 다가올 일들의 예견을 감지하고 있다. 사람은 그래서 선택을 두려워하고 짐작이란 자신이 좀 더 현명했었을 수도 있었다는 과거의 선물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작을 감추어놓는 건 내 앞에 다가올 삶에 대한 수긍이 출처 없는 행복일지라도 행여나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삶은 나로 하여금 그렇게 먹은 마음이 미련이 될지, 현명한 선택이 될지, 오랜 회한이 될지 매번 정하라고 한다. 


작품은 겉과 속의 천지 차이를 대조하며 짐작과는 다른 일들에 대한 충격을 계속해서 주입시키기보단, 이것이 어느새 삶인가라는 체념의 기운으로 조용히 초대한다. 이 작품 안에서 누군가에게 덧씌우고픈 '가면'이란 용어는 짐작과는 다르게 힘을 잃는다. 누군가의 선함과 애씀에 반한 남녀가 한 가정을 이룸이 결국 가면의 확인이었다는 전형적인 서사의 기운을 넘나들며 조금씩 그 기운과 결별하는 이 작품은 누군가를 향한 기대, 누군가를 향한 실망의 경계에서 벗어나 초탈해지려는 사람들이 갖는 세속의 창백한 우울을 풍긴다. 이 우울은 결국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짐작과 가늠의 수준을 넘어서는 유일한 문구인 "유한한 앎을 가지고 무한한 삶을 어떻게 알 것인가. 알려고 하면 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장자)라는 말의 운명에 가닿아 있다. 


소설을 덮으면서 한때는 짐작이란 것이 주는 예상치와 현실치의 간극, 그 충격에 집착했다면, 이젠 그 충격으로 인해 점점 쌓이는 예비된 짐작의 다발이 점점 많아지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짐작의 인해전술'은 수많은 말풍선을 만들고, '내 그럴 줄 알았다'라는 말의 빈번함으로 사람들은 짐작과 같은 일들이라고 단언한다. 이때 삶에서 짐작은 무수히 많은 화살을 쏘아본 다음에 나온 '골드텐'을 보고 기뻐하는 것과도, 어려운 스릴러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복잡해하는 한 장면을 이런저런 논리로 정리해 인정받는 것과도 같은 행위가 되어버린다. 이 단언은 자기자신이 만들어놓은 짐작의 항목을 자신 있게 입밖으로 꺼내놓는 걸 망설이지 않는다. 

물론 이런 가운데   '어머 웬 일이니?' 라고 하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도 '그것 가지고 뭘'로 대변되는 인간을 부러워했던 내가 점점 그 사람처럼 되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는 것은 짐작과는 다른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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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비평지 《말과활》온라인 공간에 <김신식의 외서통신>이란 코너를 연재하게 되었다.

관심 있는 분들은 가끔 들려주시길..


1회는 사회학자 니나 엘리어소프의 『자원봉사자의 형성: 복지의 종말 이후 시민적 삶』이란 책 소개.



누가 행복을 책임지는가. 국가는 무너지고 남은 것은 시민의 힘!이런 익숙한 구도 가운데 상향 권력의 한계를 짚어보는 책들은 단순히 ‘비평을 위한 비평’ ‘연구를 위한 연구’라는 명목을 넘어선다. 『자원봉사자의 형성: 복지의 종말 이후 시민적 삶Making Volunteers: Civic Life after Welfare’s End』도 그런 책 중 한 권이다. 참여, 행동, 헌신이란 가치가 넘실대는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정치적 무관심을 꼬집었던 사회학자 니나 엘리어소프는 한 중소 규모 도시에서 일어난 자원봉사의 물결에 의문을 표한다.

익히 알다시피,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이 주창한 ‘빅 소사이어티Big Society’ 담론은 국가가 행해야 할 복지를 시민에게 ‘떠넘기는 것’ 아니냐는 의문 대 사회적 기업 등을 위시해 시민의 자치 영역을 공고히 하는 상향 권력에 대한 인정이라는 구도로 양분되어왔다. 이 책은 이런 거시적인 입장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자원봉사라고 하는 실천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해부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엘리어소프는 도시 내 공동체 활동에서 자주 강조되는 ‘역량강화empowerment’라는 개념이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 5년간의 참여관찰을 통해 빚어진 예리한 결과물을 선보인다. 원래 역량강화는 사회학이나 정치학, 여성학 쪽에서 자주 쓰였다. 시민들의 권리 확장, 노동조합의 설치, 흑인 투표에 대한 보장, 성해방에 대한 인식 확산 등에서 주창된 이 개념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권력의 주변부에 있는 이들이 일어설 능력을 부여하는 실천을 지칭했다. 그러다가 이 개념은 현대 사회복지학을 설명하는 근간이 되었고, 경영 이론에서도 조직을 이끌어가기 위한 이론적 매뉴얼로 전유되어왔다.

전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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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의 산문을 가끔 읽을 때 매체를 멀리한다는 유형의 서사가 등장해 싱겁다. 가령 "텔레비전은 잘 보지 않습니다" 같은. 이런 고백은 내 엄마 세대의 작가들이 공유하려는 연한 계몽 혹은 삶의 지혜인 줄 알았다. 시간이 흘러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물론 영민하고 묵묵하게 매체를 활용하는 작가들이 매체의 유별난 예찬을 글로 표하는 것보단 나을지 모른다. 허나 뭔가 다른 시선을 찾고 싶은 게 독자의 마음. 작가들에게 바라는 마음이다. 

벤야민이 자신의 집에 들어온 전화기에 대한 복잡미묘한 생각을 회술했던 정도까진 바라지 않는다. 다자이 오사무가 「가정의 행복」에서 수수하게 표해준 라디오에 대한 이야기 정도는 어떨까(물론 이 산문은 라디오보단 공무원의 히죽거림에 대한 오사무의 분노가 더 포인트이긴 하지만).


허나 조금 숨을 고르고 돌아보면, 우리가 신기해하던 이 매체들에 대한 서사를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 후손들이 읽었을 때 그만큼의 정감을 얻어갈 수 있을진 의문이 들긴 한다. 새로운 매체들이 등장할 때마다 으레 나오는 세상을 바꿀 것이다류의 헛소리를 미리 예방하는 정도까진 이제 우리가 생활감각으로 익혔겠지만, 여전히 떠도는 언어에 대한 자극을 둘러싸곤 반응이 갈린다. 한 편에서는 특유의 침묵주의가 흐르지만, 이는 뻔한 아포리즘 같다. 다른 한쪽은 영민하게 쓰면 괜찮다고 하지만 뭔가 자기 도취에 머문단 느낌이다.


실은 사회적, 문화적 기억의 문제인데 벤야민이 전화기가 들어왔을 때의 그 일상 속에서 겪은 곤란함과 감탄은 우리가 고수하고 싶었던 사물과 환경의 덕택도 있었을 게다. 고로 우리는 미술관에서 본 유럽의 옛 풍경화에서 느낀 우아함을 하나의 문화적 향수로 공유한 채, 지금은 '쓰이지 않는 단어들' 같은 전화기의 옛 형태를 고스란히 그려본다. 


시간이 지나 우리가 무덤과 병원에 더 가까이 있을 때쯤(아니 더 걸려야 할까), 지금의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벤야민의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같은 서사로 조망하는 글을 볼 수 있을까. 물론 사람들의 감각은 발전할 것이고 지금까지의 말들을 모두 기우로 만들어버릴지 모른다. 그래도, "텔레비전은 잘 보지 않습니다" 같은 말의 풍경과는 좀 다른 걸 보고 싶다. 하늘나라에서라도, 가능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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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긴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취향은 자신의 문화적 선호를 분명히 밝히는 용어가 아닌, 그러한 선호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불안과 그 방어에 가까운 용어임을 우리는 이미 실생활에서 느끼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취향을 밝힌다는 것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일이다. 물론 이는 내가 어떤 영화를, 음악을, 회화를 보고 공유하는 것에 대한 설렘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이런 걸 밝힘으로써 누가 날 공격할까?라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생겨버린다. 

이번 《문학과사회》 여름호 기획 ' 취향에 대해 논쟁할 수 있는가'에 참여한 필자들 또한 이런 시선의 바탕 안에서 흥미로운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오늘날 '취존(취향을 존중합니다)'이니 '개취(개인의 취향이 있는 거니까요)'라는 표현은 곧 진정한 상호 존중이 아닌, 사실은 내가 당신과 더 이상 이 문제를 두고 깊은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소, 라는 단절과 폐쇄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처럼 취향을 밝힌다는 것의 피로감은 별것 아닌 듯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취존과 개취는 곧 취향을 두고 정서적 에너지를 쏟기 싫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서동진 선생은 "사악한 윤리적 기회주의"라는 강도 높은 표현으로 "취향 없는 취향"(정성일)의 시대를 우려한다. 정성일 선생은 오늘날 취향이라는 말 자체는 취향이라는 그 말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 시장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이러한 취향을 둘러싼 윤리적 풍경에 부정이란 없다. 오직 긍정만이 있을 뿐이다. 무엇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타인과의 쟁투로 이어지기에 이를 애써 막을 방도는 "좋아요"이다. "그 영화두 좋아요" "그 음악 괜찮죠(각자 다 즐기는 기준은 다르니까요)"

사실 가장 점잖은 것 같지만 도발적인 언사를 표하는 글은 이상길 선생의 <취향, 교양, 문화>다. 이상길 선생의 글 내용을 보면 사람들은 이미 부르디외가 될 채비를 갖추고, 이를 잘 써먹는다. 아 이 계급이면 이런 문화를 좋아하지, 아니야 이 계급이라고 해서 이런 문화를 반드시 좋아한다는 보장은 없지? 하는 마인드로 문화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허나 이상길 선생의 진정한 관심사는 이러한 사회학주의가 아니다. 사회학자인 그가 보기에 오늘날 문화, 예술을 다루는 관점은 지극히 사회학주의에 치우쳐 있다. '나'가 이러한 문화를 좋아하는 것에 대한 외부의 결정적 요인을 자연스레 이어보고자 하는 태도, 이러한 사회학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오늘날 취향-교양-문화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필요하다. 

그는 이러한 맥락에서 푸코의 '자기 배려' 개념을 검토하며 주체의 능력에 주목한다. 그는 언뜻 오늘날 주어진 교양의 일반적 규범(가령, 이런 정도는 읽어줘야지 않겠어?란 말이 따라오는 하나의 문화적 위계라고 한다면)을 습득해가는 사람을 향해 '교양의 몰이해''줏대 없는 시류의 영합과 편승'이란 쪽으로 몰아가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면서 '자기 계발'이라고 하는 표현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는 듯하다. 어떤 인문주의와 교양주의에 함몰되지 않은 채, '나'가 자기 배려라는 능력을 통해서, 사람들이 합의해놓았지만 '뭐 그게 중요한 텍스트이긴 한데, 편한 것부터 읽어, 그게 그리 중요한가'라는 태도로 그 합의를 은근히 숨겨놓은 듯한 문화적 환경에 주체적으로 설 수 있는가. 이상길 선생은 그 문제를 건드리고 싶어하는 듯 보인다. 쉽진 않겠지만, 이란 말과 함께.  

서동진 선생(<이토록 아둔한 취미를 보라>)은 개취, 취존의 인류학에서 나타나는 윤리적 합의의 풍경을 우려하면서 '합의'의 공동체가 갖는 한계를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지향해야 할 공동체는,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주창하는 이의의 공동체다. 정성일 선생(<21세기 신사숙녀 '反' 매너 가이드>)은 취향에서 안전을 추구하는 풍토를 걱정하면서 취향이 불안과의 모험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가 보기에 영화를 통해 취향을 밝힌다는 것에서 영화는 없다. 오직 (취향을 밝힘으로써 나타나는 불안감을 감지한) '나'만 존재할 뿐이다. 

세 필자의 글에서 두 가지 특성을 발견해보았다. 서동진 선생과 정성일 선생의 글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인류학/인류학자'라는 표현(이상길 선생은 명시하지 않았지만 부르디외의 인류학적 접근이 들어간 《구별짓기》의 마인드를 체득한 소비자-시민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 필자 다 그 용례는 미세하게 다르지만, 사람들은 이미 문화를 소비할 때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이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의 반응을 챙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견해가 깔려 있는 것 같다.
고로 '나'는 영화를 보지만,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다. 나와 함께 영화를 보는 사람들과의 정서적 반응과 무의식적인 교류를 챙긴다. 컴컴한 극장과 스크린에서 압도되어진  '집중'(흔히 극장주의자들이 잘 썼던) 대 이 산만하고 할 일 많은 가운데서 여러 개로 발산되는 듯한 가정 내 '분산'이란 구도는 어찌보면 다시 한번 관에 들어가야 한다(많은 영화학자가 밝힌 것처럼).

다른 하나는 아쉬운 점이다. 세 필자 모두 '존취(당신의 존중을 취향합니다)'란 이 비문적 실천을 챙기진 않는다. 존취라는 용법은 아직까진 남녀의 외형적 매력에 국한되어 있는 듯하다. '아니 저런 남자가 잘생겼어요?' '아니 저 여자가 정말 예쁘다구요?' '당신 눈이 어떻게 된 것 아닌가요?'라는 뜻이 한꺼번에 담긴 이 익살스러운 '존취'는 허나 정작 문화적 취향의 전쟁터인 영화나 음악에선 찾아보기가 힘들다.
어쩌면 존취는 취존이 갖고 있는 '취향을 밝힌다는 것에 대한 불안'을 더 떠안은 표현일 것일까. '취향 없는 취향'의 시대를 사는 '자신의 자신 없는' 상태를 극도로 방어하기 위한 용법일까. '존취'의 인류학이 궁금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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