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 시인의 《눈앞에 없는 사람》을 읽었다. 벤야민적 자아를 가진 시인은 걸으면서 표지판을 본다. 첫 표지판인 <말들>에서부터 마지막 표지판인 <사랑은 나의 약점>까지, 시인은 비뚤어진 표지판을 바로 세우거나 매우 올곧은 표지판은 쓰러뜨려 놓는다. 

시 속 산책자는 '시달리는 인간'이다. 이런 그에게 심장이란 설렘이기보다는 권태다. 하품이야말로 인간의 심연을 열어준다는 벤야민의 규약을 지키는 시인은 심장박동수를 세면서 하품을 한다고 고백한다(<심장은 미래를 탄생시킨다>). 

시달리는 인간은 <운명의 중력>을 통해 뒤늦게 인간의 능력이 중력을 발견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운명에 속한 것과 운명에 속하지 않는 것 사이를 끌어당기는 힘을 깨달은 시인은 수줍게 묻는다. 자신에게 운명을 바꿀 능력이 있는지. 그리고 수줍게 말한다. 자신에게 그 능력이 있다고.


시달리는 인간은 '그때'라는 진공의 영역을 나약하게 만들어놓은 채, 이별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며 인연의 쓰라림에 대해 작은 데시벨로 절규한다. 시달리는 인간은 자신의 절규가 소요 속에 묻히길 바라면서도, 고요 속에 드러나길 바란다. <사랑은 나의 약점> 속에서 시인은 노인의 이미지에 소요와 고요가 정확히 반이 갈린 시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노인의 미세한 절규를 듣는다. 자신의 그림자, 남보다 특색 있는 그림자를 이야기해줄 수 있겠냐는 절규를.

시달리는 인간은 시달림이 준 시련의 숙달 속에서 당장 맹세하지 않고 잠시 그 절규를 숨겨놓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에게 불현듯 절규의 비밀을 신중히 속삭인다. 

시달리는 인간에게 태어난 것도 죽은 것도 별스럽지 않다. 그래도 시인은 시달려보았기 때문에 이방인의 심장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신의 심장은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부인당해왔다는 비극을 소란스럽게 전달하기보단, 한 사람의 심장이라도 부인당하지 않게끔 단어의 가장자리를 부여잡는다. 

그래서 시인이 전하는 희망의 변증법은 조심스럽다. 큼지막하고 헐거운 것들을 건드린 것에서 시달림을 느꼈던 인간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들에서 큼지막한 개념의 발명을 추구하기보다 이미 태어난 것들에서 비루한 현실의 소묘를 추구한다. 
시로 이뤄진 소묘는 시인이 줄곧 이야기하는 죄의식과 그 부채감에 대한 고결한 청소이기보단, 자신이 어쩔 수 없었던 여백들을 채우지 않고 그대로 두는 데 방점이 찍힌다. 

이것은 곧 시달리는 인간이 심장을 부인당한 자들을 위해 준 선물이다.
덕분에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이생에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이 생에서 이야기해도 될지 조심스러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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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의 공백이다. 하지만 이 기획을 완수하기 위해 쉬진 않았다. 다만 어떤 망설임과 초조함 그리고 비판받음의 여지 가운데 예민한 각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고민했다. 

먼저 감정사회학을 '고요의 사회학'으로 비판하는 이들을 향한 내 나름의 반론을 다져나가면서 비판가들은 감정사회학을 '팔자 좋은 사회학'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학의 연성화를 우려하는 그들의 의도는 짐작이 가지만, 그들만이 비판이론의 정수인 것처럼 (마르크스는 그들에게 좋은 보호막이 된다) 행세하는 건 불편하다. 
감정사회학은 비판이론의 기획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고 관련 학자들은 지금도 활동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분과학문은 이제 시작이다. 비판가들의 재판은 이르며 부당하다.

지난 18회까지 정리하면서 나는 '사회적 상호작용'으로서의 이론과 그 맥락으로 내향성이란 성격문화를 고찰했다. 근래 국내 출판에서도 형성된 내향성에 관한 문헌을 참조하면서 '내향성의 장'이 있음을 이야기했다. 일리언 아론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지만,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가 가져온 열풍은 '내향성 담론'을 촉발시켰다. 어빙 고프먼의 자기계발 담론적 전유인 본 책은 우리 시대의 성공 모델에 내향성이라는 성격문화를 잘 절합한 성과임이 분명하다. 
다만, '사회적 상호작용'을 인간 대 인간의 심리적 갈등으로 축소시키는 가운데 나타나는 기존 질서의 안정화라는 한계는 가장 손쉬운 비판이면서 이 기획이 갖는 비판의 출발점임은 부인할 수 없다.

*내향성의 사회학 2라운드로서 나는 내향성의 사회학이 의식해야 할 비판이론으로서의 보충물을 수집하고, 더 나아가 이 비판의 대상은 어디를 향해 있는지 윤곽을 계속 드러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이 기획은 부르디외와 에바 일루즈의 개념 작업을 참조해 '내향성의 리더십'과 이를 문화기획으로 전유하면서 생기는 전략들을 정리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음악웹진 웨이브를 통해 선보인 <라나 델 레이: 우울의 리더십과 명성문화>란 글은 한 예다. 
특히 '우울의 리더십'이란 틀은 내향성의 사회학이 견지하는 비판적 기획으로서 그 모델들을 하나둘 선보일 것이다.원고를 끝냈고, 곧 웨이브를 통해 두 번째 모델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우울의 리더십은 김홍중의 <멜랑콜리와 모더니티> 그리고 랜들 콜린스의 <내향성의 작은 역사> 그리고 부르디외의 장이론이 결합된 개념화 작업이다. 내향성과 문화권력이란 테마 속에서 이 개념화 작업은 진행된다. 
무엇보다 우울의 리더십은 예술가의 감정, 고독의 숭배자라는 18~19세기 사회의 감정문화적 산물이 오늘날 문화기획/문화기획자를 통해 어떻게 새로운 문화상품으로 만들어지고있는지 집중한다. 그러면서 생기는 우열의 관계는 단지 인물에 대한 애호가 아닌, 그 애호에 동원되는 사회적 행위에 주목케 한다. 우울이 '문화적 우울'로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각 사회 주체들의 절합은 불안한 봉합으로서 우리는 이 불안함을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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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프카에게 꿈은 자신의 "개념적 인물"(들뢰즈&가타리)을 만드는 공장이다. 이 공장은 정확한 출퇴근 시간이 없다. 몸에 생기가 돌아야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공장이지만, 어느 정도의 피로가 출근 조건이 된다. 일을 하다 보면 능숙해진다. 이 공장에서 능숙함이란 그곳에 출근하거나 퇴근한다는 시점 자체를 망각하는 것이다. 능숙할수록 이 망각은 의식적이기보다는 천연덕스럽다. 공장일에 능숙해진 카프카는 잠이란 현실적 구분선을 자유자재로 부린다. 꿈에서 깬 자신을 과장되게 표현하기도 하고, 때론 잠과 절취된 꿈 자체를 담담하게 읊조린다. 이 꿈의 숙련공은 이제 습관적으로 말한다. 

나는 잠을 자는 게 아니라, 꿈을 꾸는 거라고

2
카프카만큼이나 꿈을 소중히 다룬 사람은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에게 꿈이란 '소망이미지'의 생성과 파괴가 변증법적으로 일어나 폐허가 된 곳을 '각성'의 자세로 거니는 통행로였다. 벤야민은 꿈을 통해 희망을 소망의 실현이 나타나는 이미지로 보지 않고, 소망의 실패 속에서 지연되는 역사의 도래와 그 기대로 보았다. 이 도래와 기대는 이미지의 연이은 생성이 아니라, 이미지의 파괴와 구축을 오가는 '파상력'의 목적이다.

3
카프카의 '예술이 된 꿈'은 벤야민의 파상력과 닮았다. 그는 잠을 잔 것이 아니라, 꿈을 꾸었다는 강조를 통해 꿈의 영역을 파괴하고 꿈의 이미지로 현실의 영역을 생성해낸다. 현실 속 도처에 있는 사물에서 신들을 발견했던 벤야민처럼, 카프카는 꿈이라는 공장 속 컨베이어벨트로 운반되는 꿈속 사물에서 신과 요정을 찾아낸다. 허나 카프카의 신과 요정은 보다 고딕적이다. 꿈이라는 공장의 분부는 노동시간의 한계를 따지지도 묻지지도 말라는 것이며, 이에 적응한 카프카는 이 공장에서 자신을 내맡겨버린다. 카프카는 꿈을 꾸기 위해 피로에 접어드는 것이 아니라, 꿈에서 피곤해진다. 꿈에서 피로해진 인간이 만난 사물과 인간, 그것들이 자아내는 풍경은 또다른 꿈이다. 카프카가 꿈을 꾸어 만난 또다른 꿈은 절로 카프카의 '이명'이 된다. 

4
이명의 존재가 된 카프카는 <판결>에서처럼 친구와 아버지에 자신을 투영하듯, '카프카들'이 된다. 그러한 '카프카들'은 꿈속에서 대체로 두 가지 물음을 던지지만, 이는 되돌아오지 않는 답을 향한 물음이다.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는 겁니까?" "내가 어떻게 여기 온 거죠?" 

허나 이 물음이 허무하지 않은 것은 카프카의 파상력은 '문학적 상상력'이란 이름 아래 이미지들을 '앞으로 나타날 것'이란 소망에 가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벤야민처럼. 그는 꿈이라는 공장에서 생성이 아닌 파괴를 꿈꾸는 노동자로서, 상식과 배치된다. 그가 꿈에서 만난 모든 것은 어쩌면 '이미 파괴되어진 것들'일지 모른다. 진리는 이렇게 불현듯, 전혀 새로운 형성과 창안에서 파괴의 숙명을 안은 채 나타난다. 
카프카가 꿈속에서 만난 이미 파괴되어진 것들은 허나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찾아오기에, 우리가 그의 소설을 읽고 있는 공간 속 사물은 어쩌면 예전의 당신일 가능성을 내포한다. 고로 우리가 내일 당장 그레고르 잠자의 삶을 산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렇게 잠 없는 꿈은 시작된다.


* '파상력'에 대한 생각은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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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잠의 종말
조너선 크레리 지음, 김성호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 이 책을 트렌디한 학술서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책의 참신성을 부정해야 한다(이는 이 책을 다룬 국내 언론의 서평 기사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이 책은 발터 벤야민의 '꿈과 각성': 변증법적 이미지 프로젝트의 리메이크이며, 편곡은 조르조 아감벤의 '장치론'이다. 그리고 샘플링은 수전 벅 모스의 「파사젠베르크」분석이라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자가 주장하는 이 책의 '공상론'은 그가 오랫동안 집착해온 연구 테마다. 고로 이 책은 시각문화연구에서 꽤 이름을 알린 연구자가 벌인 뜬금없는 변화의 지점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1. 꿈 없는 잠, 잠 없는 꿈


꿈 없는 잠은 이해가 가지만, 잠 없는 꿈은 과연 가능한가. 후자를 문학적인 방식으로 탐구한 사람이 카프카다. 카프카의 꿈에 대한 기록을 읽어보면, 잠에 들어 꿈을 꾼다는 순차적 과정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꿈은 꿈 자체로서 가상/ 현실의 구분선을 지우며, 인간 앞에 선다. 문학적인 방식으로 '잠 없는 꿈'을 다룬 카프카의 삶을 어린 시절부터 몸소 체험한 이가 발터 벤야민이며(그의 『1900년경 베를린 유년시절』을 보라), 사색과 이론으로 성장하고 무장해간 벤야민은 '잠 없는 꿈'의 상태에서 자본주의 질서를 논리적으로 읽어내는 시도를 벌인다.


벤야민에게 근대성이란 곧 '꿈나라'였다. 부르주아는 자본주의 질서를 만들고 쌓아가면서 꿈을 실현시켰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안녕을 위해 질서의 변화를 꾀할 여지가 있는 꿈을 은폐해버린다. 그리하여 벤야민은 자본주의체제를 간파하고자, 상품에 담긴 꿈의 이미지를 불러내 글로 보여주었다. 이는 곧 꿈의 이미지를 각성 상태로 끌어오는 것이었다. 깨어난 인간은 이로써 부르주아가 어떤 꿈을 은폐하려 했는지 알게 되며, 자본주의적 사물 속에 은폐된 꿈을 소생시켜 혁명을 꿈꾼다. 이것이 곧 자본주의적 꿈, 상품화가 된 꿈을 '꿈의 이미지'로 드러냄과 동시에, 자본주의에 복속되지 않을 역사적 시간의 꿈을 소망한 벤야민의 '꿈의 이중 이론'(수전 벅 모스)이었다. 


변증법이 가미된 벤야민의 꿈에 대한 이론은 조너선 크래리가 『24/7 잠의 종말』에서 깔아놓고 있는 큰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크래리는 이 책에서 잠과 꿈의 식민화를 우려하면서 아직 복속되지 않은, 침범받지 않은 '꿈의 시/공간'을 모색하는데, 이는 신자유주의체제가 꿈의 자유를 상품화시켜, 권력의 기술로 쓰고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장치가 되어버린 꿈  


크래리가 신자유주의체제의 권력술을 분석하기 위해 논법의 전개상 조르조 아감벤의 '장치'에 대한 분석을 끌어오려는 것은, 인간과 접속되어 있는 장치들을 체제 안에서 올바르게 사용해보자는 헛된 희망과 결별하려는 시도(아감벤이 그대로 말했던)이면서, '주체화'를 실현하는 장치의 속성이 오늘날 사회 속에서 어떻게 '배치'되고 있는지 입체적으로 보려는 시도로 보인다. 다만, 크래리가 푸코가 권력의 자유/통제를 바라보던 관점, 들뢰즈가 권력의 자유/통제를 바라보던 관점을 비교해가면서, 권력이 마냥 유연하지만 않다고 보는 부분까지 도달하는 내용은 논리적으로 튄다. 즉, 아감벤의 장치론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정신의 병리화를 꾀하고, 꿈마저 장치로 만들어버리는 시대를 기술하면서, 아울러 신자유주의체제의 권력술을 조망하는 근래 논의들에 대한 비판도 가미가 되는데, 후자는 그리 설득력 있게 제시되진 못한다(그는 권력의 유연한 제스처에 심취한 비판이론가들을 비판하고 싶어, 권력의 억압적 속성을 다시 역설하는데, 사뭇 감시와 통제에 관한 교훈적인 도덕극으로 오늘날의 권력술을 스케치하는 데 그치고 만다). 


3. 유령에 관한 이론: 잠과 꿈의 상호성은 가능한가


저자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신자유주의적 시간, 24/7 시간과 단절하기 위해, 잠과 꿈의 복원을 꾀하는데, 무엇보다 꿈을 통한 '공상'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것은 고도의 자본주의가 뻗치고 있는 꿈의 세계에 잡히지 않고, 근대의 유령들을 불러모으는 실험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유령들이란 근대화가 전개되면서 인간들이 구상했던 꿈이 '강력한 신화'가 되어 체제에 복속되는 것을 막는, 공상의 구현물로 해석된다. 한편으로 이 유령은 애초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밝힌 '유령에 관한 이론'과도 접속한다고 보는데(본 책에 직접 언급되진 않는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유령을 죽은 자 / 산 자의 구분을 없앤 채, 역사를 추방하는 권력에 대항할 개념으로 보았다. 


허나 역사를 앗아간 채, 자신의 영원성을 주장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체제의 권력술로부터 꿈과 잠이라는 개인 영역이 어떻게 변화의 계기로 쓰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크래리는 꿈의 상호적인 기능을 뜬금없이 내어놓는데, 여기서 크래리의 논리적인 명석함은 미학적이며 문학적인 찬가로 봉합된다. 아니. 사실 미학적이며 문학적인 관점이 어떻겠냐마는 실망스러운 점은 크래리가 고수하는 꿈 더 나아가 공상의 상호성이 '시각문화 연구자'들이 겪는 정치적 실천에 대한 사유, 그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것 때문이다. 


시각문화 연구자들  특유의 '심미적' 해석에서 발견되는,  한 작품을 통해 사회를 조망하고자 할 때, 즉 '작품 해석의 심미적 특성'과 그 해석을 발판 삼아 내놓는 사회비평의 메시지를 놓고 볼 때, 후자의 경우 시각문화 연구자는 '커뮤니케이션 윤리학' '미디어 윤리학'류의 사회비평으로 빠지고 마는데(매체를 사유하는 정치철학자들이 기본 수준으로 언급하는 매체의 지배에 대한 윤리적 비판), 크래리도 이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잠과 꿈의 상호성을 강조함으로써 외려 크래리는 자신의 정치적 실천에 대한 강박을 책 말미에 드러내는 꼴이 되고 말았는데, 고로 잠과 꿈의 개인 영역을 공동체적 협력, 사회적 유대로 이어가보려는 시도는 잠과 꿈을 잠식해버리는 신자유주의체제의 권력술에 대한 괜찮은 해부를 상쇄시킨다.


* "스위치가 꺼지지 않는 사회", 즉 "절전 대기 상태"에 있는 24/7사회 속에서 저자는 잠과 꿈을 일상의 과한 자극을 제어하는 장치로 낮춰보지 말자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유지를 위해 끝없는 낭비와 동원령을 발휘하는 자본주의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공상의 가능성을 여러 번 강조한다. 물론 저자가 후반부에 보여준 정치적 실천에 대한 강박을 꼬집어, 대안의 부재 등으로 쉽사리 비하하는 건 외려 이 책의 깊은 이해를 가로막는 것이라 본다. 다만, 우리는 앞에서 말했듯 벤야민이 시도했던 꿈과 각성의 기획을 통해 어떻게 은밀히 쌓여가는 자본주의의 신화를 '중단'할 수 있을 것인지, 단순히 방법이 아닌, '작동방식'과 '배치'의 효과를 성실하고 섬세하게 간파하는 그 길을 이 책을 통해 한 걸음 이제 밟아보았을 뿐이다. 저자가 한 걸음 내딛은 우리에게 주는 힌트는, 잠의 종말은 곧 '깨어남(각성)'의 종말이라는 역설이다. 



덧붙임) 

1) 이 책을 소위  '피로사회'류로 접근해서만 본다면, 얻어가는 게 생각보다 없다. 조너선 크래리가 시각문화연구자였던 맥락을 존중해, 관련된 텍스트를 두텁게 붙여 읽어나가면, 우리는 잠-꿈-각성의 오랜 비판이론 기획을 이 책이 편집해놓았구나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여기서 편집은 이 책의 주장에 대한 참신성 여부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2) 이 맥락에서, 나는 폴 비릴리오의 '운동학' '리듬학'을 통한 속도의 문제, 프리드리히 키틀러가 『광학적 미디어』에서 밝힌 매직랜턴 에피소드를 권한다. 후자가 특히 흥미로운데, 키틀러는 귀족과 종교계가 쓰던 야간조명이 어떻게 부르주아에게 내려와, 야간조명의 일상화가 일어났는지 역사적으로 분석한다. 이러한 변화는 어스름함을 만들어내고, 권력에 대항할 비밀결사체가 과연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지 아리송하게 만들었지만, 역사는 이러한 야간조명의 일상화를 통해 부르주아가 자본주의의 장사꾼으로 가버렸음을 키틀러는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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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로야 2015-01-29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덕분에 흥미로운 책을 알게 되었네요. 더듬더듬 읽겠지만 제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1914년. 전직 연극기획자이자 배우들의 매니저였던 한 남자가 영화사 책을 썼다. 그는 책이 나오기 4년 전부터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미국 공연업계에 대한 많은 기사를 써오던 터였다. 이 남자의 이름은 로버트 그라우. 그는 최초의 미국 영화사 책으로 평가받는 《과학의 극장》의 저자다.

 

비록 '위인'의 관점에서 영화계의 발전을 이끈 인물들을 조명했단 한계는 있지만, 참고할 만한 기존 문헌이 없었음을 감안할 때 저자의 역사쓰기는 의외로 빈곤치 않았다고 후대의 영화사가들은 평한다.

 

이 책은 제도권으로서의 영화학이 없던 시기(전공교재로라도 팔 수 있는 환경이 없던 시기), 영화서적의 출판 행태에 대해서도 유의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과학의 극장》은 3000부가량 찍었는데 책은 '예약구매'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예약구매란 책을 미리 살 사람들을 정해 주문을 받아 일정 부수만 출판을 했다는 뜻이다. 방문판매원이 있었지만 그라우는 직접 판매에 나섰다고 한다.

그 당시 영화배급업자인 조지 클라인은 아직 출판되지도 않은 책을 주문하라고 하는 그라우의 행태에 아쉬움을 표했다.

 

고백하건대, 만약 당신이 보낸 모든 편지에 대해 구매예약서가 동봉되지만 않았다면 나는 당신 책에 개인적으로 대단한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책을 사기 시작하면 나도 살 마음이 생길 것이란 정도의 관심만을 당신 책에 대해서 갖고 있습니다. 책 구입요청서가 이런 식으로 모든 편지에 동봉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조지 클라인의 편지

 

그라우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클라인을 꼬드겼다. 앞으로 발간될 서적엔 클라인이 운영하는 영화관을 다루는 내용이 많을 거라고. 그러나 정작 《과학의 극장》엔 조지 클라인을 다룬 비중은 적었다고 한다.

기술이 곧 미학임을 믿던 미국의 당시 분위기가 반영되어, 영화사의 발전을 이끈 기술의 발명과 인물 위주의 역사서이지만 영화의 기술적, 미학적, 산업적 측면은 한 덩이임을 표명한 중요한 책.

 

*영화사에 대한 영화사인 로버트 앨런&더글러스 고메리의 《영화의 역사: 이론과 실제》& 영화사가 루크 맥커넌의 초기영화사아카이브 <바이오스코프>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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