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은 무조건 아양 일변도이다. 그래서 호감이 안 가는 걸까? 그의 그런 말이 나로 하여금 무안해서 얼굴을 들 수 없게 만드니 말이다. 더구나 나는 대답하기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고맙게도 그가 내게 선택의 자유권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그런 자유는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난감하게 만드는 귀찮은 선물일 뿐이다."

                                                                          - 롤랑 바르트, 「파리에서의 저녁 만남」



『작은 사건들』에 수록된 「파리에서의 저녁 만남」은 롤랑 바르트의 '저녁 일기'다. 엄밀히 말하자면 일기라는 형식을 고민했던 한 늙은 게이의 일기에 관한 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글이 일기란 무엇인가에 관한 특색 있는 아포리즘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바르트는 '나'의 취향, 기분, 조심성을 고려하면서 충실한 관찰자로 활약한다. 
이 늙은 에세이스트는1979년 8월~9월 파리에서의 '저녁들'을 기록한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서 뿜어대는 열의의 출처와 기원을 의심하면서, '그다지 볼 품 없는' 식의 표현을 서슴없이 기록한다. 그가 간 식당, 그가 만난 사람들, 그가 참여한 저녁 모임, 그런 사람들이 읽어보라고 한 책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간혹 가다가 입을 싱그럽게 만드는 음식들만이 위로가 될 뿐이다. 

그는 만난 사람들이 주는 무례의 자극을 진찰하며 따가운 말들을 하는 이의 사연을 상상해보거나, 모임에서 나오는 장광설에 피곤함을 느낀다. 
롤랑 바르트가 '나는 ...이다'로 시작하는 타인과 사회가 잘하는 이름 붙이기의 유혹에 걸려들 표현을 일찍이 싫어했다는 것을 안다면, 그래서 그가 그냥 '나다'라는 단언에서 오는 그 불확실과 불안에서 하나의 저항적 의미를 구축해가고 싶었다는 것을 안다면. 아울러 그런 단언이 타인에게 쾌/불쾌의 경계를 주어 오해를 사지나 않을까의 염려로 이어진다는 걸 미리 감안한 섬세함의 소유자란 걸 안다면. 
그가 이 일기에서 보여주는 툴툴거림은 자연스러운 내뱉음과 의도된 실천 사이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나는 뭔가를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대화중에 그것에 대해서는 정작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끝에 가서야 겨우 단 한 문장으로 줄여서(대화 내내 주제로 삼았어야 할 문제를) 할 뿐이다."

그에게 오직 호감의 대상은 젊은 게이의 신체, 그들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의 그 어색하지만 순수한 장면이다. 자신에게 다가온, 자신이 느끼고 싶어하는 쾌락에 대해서는 온순해진다. 
때론 연약함을 자청하는 듯한 인상도 보인다. 바르트는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옆사람을 유혹하고 싶은 용기를 못 내는 늙은 자신에 대한 초라함, 사랑의 재판관 같은 시선으로 자신에게 애정을 표하는 사람에 대한 부담감을 고백한다. 그는 일기의 마지막에 '어떤 자신'으로 돌아오면서 침참한 무대 뒤로 쓸쓸히 퇴장한다.
타인을 떠나보내는 것이었지만, 결국 자신이 자신을 떠나보내는 듯한 중의의 풍경은 그가 주는 선물이다. 아프지만, 도움이 되는. 삶.

"섬세하면서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뭔가 수수께끼 같은 면을 지닌 그. 온순하면서도 동시에 멀게 느껴지는 사람이다. 피아노를 연주한 다음, 일할 것이 있다는 말로 그를 돌려보냈다. 이젠 끝났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도 함께 끝났다. 젊은이와의 사랑이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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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는 <한 희망 없는 내향성 인간의 고백>이라는 블로그를 운영중이다. 그녀는 기독교 대학에 재학 중이며, 영문학과 비교문화 연구를 전공하고 있다. 한나는 자신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는 걸 싫어한다. 허나 자신이 인디락에 심취해 있다는 문화적 표시에는 마음이 열려 있다. 자신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긴 싫지만, 그래도 이 부분만큼은 밤을 새서라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영역, 그것은 그녀가 남이 잘 듣지 않는 음악을 선호하고 있단 사실이다. 

 

그녀가 2013년 8월 26일에 남긴 일기의 제목은 <나는 지금 영문학 수업의 힙스터야, 야호?>다. 일기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한나는 개강 첫 주, 수강신청한 두 수업은 아무런 정서적 에너지 소비 없이 무난하게 넘어갔다. 그런데 세 번째 수업이 문제였다.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 초중반부는 한나가 보기엔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교수가 실라부스를 주며 수업이 이렇게 진행될 거라고 말하며, 교재를 사세요 라는 말을 했다. 분위기가 어색할까봐 나오는 잡담까지도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헌데 '이제, 5분 남았나? 집에 가자..'는 기대감을 깨뜨렸던 교수의 제안이 있었으니 '자기 소개 시간 갖기'였다.

 

한나는 블로그에서도 밝혔지만 남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 취미가 뭔지, 내 가족은 어떤지를 떠벌리는 게 무척 싫다. 학생들이 이런 시간을 싫어한다는 것을 안다는 둥 교수가 먼저 모범을 보였다. 다른 소개야 한나의 예상대로 였던 듯한데,  교수가 인디락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어 이 사람 보게?'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나가 생각하기엔 교수들이란 느끼한 클래식 음악을 들을 것 같은 부류라 생각하는 게 여전히 좀 남아 있었기에. 암튼 이어 학생들이 하나둘 나와 자기 소개를 했다. 물론 소개 시간은 갈수록 짧아졌다. 드디어, 한나의 차례. 이 시간에 그리 많은 정서적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그녀가 이 일기를 쓰게 된 원인이 나왔다. 자신의 문화적 선호를 밝히고 만 것. "저는 인디락을 좋아하구요.." 마침 교수가 이 질문을 놓치지 않고 잡아챘다. 한나는 이 말이 나오자마자 실수란 걸 알았다. 그러면서 자신을 한번 비웃어준다. '그래 나는 이 수업에서 교수의 좋은 편에 서고 싶어하는 여자지. 어느 친구들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교수는 한나에게 좋아하는 인디락 밴드 이름을 수업을 같이 듣는 학생들과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한나는 지금처럼 뜨기 전, 인디 씬에 있던 이매진 드래곤스의 음악을 좋아하구요로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밴드들의 이름을 말했다. 누군가의 반응에 민감한 한나는 자신이 그 말을 하고 나자 몇 명이 킥킥 웃어대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교수도 뭥미? 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대하는 것 같다.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반응을 비웃는다. 자신이 이 수업에서 힙스터가 된 것 같다고.

 

힙스터는 '반反의 정서'로 버텨온 '실체 없는 문화적 부류'라고 할 수 있다. 힙스터는 자신이 힙스터라고 지목당하면 정작 당사자는 난 힙스터 아닌데, 라고 말하는 '부인 전략'으로 존재를 유지한다. 힙스터들은 세상과 타인에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나는 이 시대 사람들이 다 우루루 몰려 가서 하는 걸 경멸하지? 하는 입장에 있는 문화 부족인 듯하지만, 그들은 '세상에 관심 있는 비세상인을 선망하는 사람들'인 역설적 상태의 '문화 석학'이다(이 표현을 쓰는 일부 논자들은 조소라는 의미를 넣어놓는다).

 

자, 이제 내향성과 힙스터의 끈을 고민해볼 때다. '내향성의 장'이란 연구 분야에서는 내향성과 문화 그리고 미디어의 연관성을 미약하게나마 분석해왔다. 소피아 뎀블링 같은 심리학자는 내향적인 사람들이 문자 문화와 친숙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전화의 구술성이 내향적인 사람에겐 큰 정서적 에너지 소비로 느껴지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내향적인 사람들은 말보다는 글로 자신의 영역을 표현하고 지켜나가길 원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견해에 따르면 메일과 페이스북, 트위터는 내향적인 사람에겐 안성맞춤인 매체다. 누군가와의 접촉을 통해 드는 정서적 에너지의 소비를 줄이고, 그 보존된 양으로 매체 활용에 신경 쓰는 게 내향적인 사람들에겐 중요한 요소라고 그녀는 말하고 있다.

힙스터들은 구술을 통해 자신의 '까칠까칠한' 스타일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나, 인터넷은 그들의 까칠까칠함을 극대화시키는 수단으로 등장했다. 힙스터는 이제 '쟤는 뭔데, 별루 한 것 도 없는 놈이 저렇게 인기가 많지?' '쟤 봐, 스키니 진에, 저 의미도 모르고 쓰는 모자 봐, 선글라스 하며?' 같은 어디에도 갖다 쓸 수 있는 펑퍼짐한 용어가 되었으나, 사람들은 외려 이 펑퍼짐한 상태로 인해 힙스터를 언어 게임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랬을 때 내향성과 힙스터를 치면, 힙스터는 '까칠까칠한'이란 성격 유형으로 일반화되는 것 같다. 우리 인터넷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쿨내 나는 인간들'로 수렴되는 것이다. 

내향성의 연구 역사에서 내향적인 것이란 초기에 '차갑고, 무뚝뚝하고, 줏대 없고, 따분하고, 까다롭고'라는 성격 유형으로 정의되었다. 1960년대 성격 이론가들의 이러한 결과물은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내향성의 긍정적인 면을 보는 쪽으로 보완되었다. 내향적인 사람들이란 '깊이 있는, 창의적인, 융통성 있는, 책임감 있는' 성격을 가진 이라는 것이다.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는 내향성의 유형을 분석하면서, '스스로 소외되는 사람들'에 주목한다. 이런 소외는 자신에겐 자부심인데, 콜린스는 이런 '반항적 개인주의자'와 '고독 숭배자'들이 현대적 개인주의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정의한다(사실 이러한 진술에 대해선 우린 얼마나 많은 하위문화에 대한 문화연구적 시선을 익혀왔던가). 콜린스는 이런 정의의 과정 속에서 '테크놀로지에 집착하는 이들' 특유의 개인성에 주목한다. 이들은 모임에서 대개 활기도 없고, 자신과 맞지 않는 농담이나 뜬소문을 나누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수줍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데, 그러다가도 자신과 비슷한 '기술적 지식'을 갖고 이를 보여주려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문을 연다.

힙스터는 자신이 지닌 문화자본에 애착을 보이기 때문에, 세상에 나온 사물에 관심이 많긴 하다. 단 그 관심 많음의 영역을 희소성으로 규정하고, 친한 사람 외에는 남이 따라올 수 없는 장벽을 쳐 '무관심'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전략을 쓴다. 힙스터는 자기 주변의 '싱거움과 진부함'을 활용해 존재를 유지하기 때문에 타인의 취향 관찰에도 민감하며, 그래서 그들은  '만남과 모임'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패턴을 오글거림으로 규정하고 이러면 차라리 집에 가서 웨스 앤더슨의 영화나 볼 걸 하는 말풍선을 만드는 데 익숙하다. 그런 점에서 힙스터는 자신과의 문화적-정서적 공동체를 만들어줄 가능성 있는 이와 에너지를 쓰고 싶어하는 만남의 효율성을 따지는 내향적 인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은 집 안에서 힙스터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정서적 에너지 줄이기의 매체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고.

 

 

문화적 구별짓기가 내향적인 사람일 수록 더 민감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내향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유니크한' 문화를 소유하고 있다는 그 '차이 확증의 심리'를 더 강하게 품고 싶어할까? 아니면 절망적인 대답 '케바케'를 택해야 할까?

 

'내향성의 장' 연구자들은 내향성-외향성이라는 성격 유형을 설명하는 단계에서 그들이 왜 이런 문화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외부 요인' 분석과 그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 적어도 그런 점에서 랜들 콜린스가 고려하는 내향성 연구는 '종교적 속성의 기원을 가졌던 내향성' '시장에 토대를 둔 지식인과 주류 사회를 적으로 삼는 반항적 유랑아, 급진적 사회운동의 결탁 관계 그리고 내향성' '창조적 인성과 예술 장 그리고 내향성' 등을 내향성의 미시사를 통해 조금이나마 챙겨보려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 검색해보면 내향성과 힙스터의 관계를 궁금해하며 나름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고 싶어하는 '아마추어 작가'들의 흔적이 온라인엔 많다. 물론 그들이 펼쳐나가는 심도 있는 고민만큼 상대의 반응이 안 올때가 많지만. 힙스터들? ESFJ도 있고 ISFJ도 있고 그러지 뭐, 라는 시큰둥한 반응들 그 자체를 보고 혹자는 힙스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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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 명예교수 조셉 와이젠바움. 영화 <her>에서 테오도르와 OS 사만다의 관계를 좀 깊게 이해해보고자 찾은 두 권의 책은 셰리 터클의 『외로워지는 사람들』그리고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두 권 다 조셉 와이젠바움 교수와 엘리자에 대한 에피소드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1964년부터 1965년 사이 몇 달에 걸쳐 당시 41세의 한 교수가 글로 쓰여진 언어를 분석하는 소프트웨어 응용프로그램을 만든다. 이 프로그램은 애초에 컴퓨터를 쓰는 학생이 문장 하나를 치면, 프로그램이 영어 문법의 단순한 규칙들의 집합에 따라 이 문장에서 중요한 단어나 구문을 알아내고, 이것이 사용된 통사론적 문맥을 분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후 이 프로그램의 혁신은 '답변의 형태를 띤 새로운 문장'이었다. 엘리자는 답변과 물음으로 '인간과 컴퓨터가 벌이는 인간적 공모'인 엘리자 효과라는 개념의 당사자가 되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의 원리는 '나는 00다'를 엘리자가 기본적으로 인식한 뒤, '얼마나 오랫동안 00했나요?'식의 답변을 산출해내는 것이었다. 
와이젠바움의 엘리자는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컴퓨터, 소프트웨어프로그램, 인공지능에 대한 열광이 있던 시기였다. 심지어 인간의 언어는 컴퓨터 내에서 실행되는 알고리즘 중 하나의 산물이란 생각이 나왔던 시기였다.

와이젠바움은 엘리자에 심리치료사라는 인격을 부여한다. 1940년대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환자와 대화할 때 부러 이 세상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는 척한다. 심리학자들은 환자와 대화할 때 따분하게 느껴지는 열린 질문을 반복해 던지고, 이 형식을 알아차린 환자는 모든 종류의 배경 지식, 이해, 논리력이 자신들의 치료사로부터 나온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와이젠바움은 이 로저리안 페르소나가 엘리자에게 매우 결정적인 심리학적 유용성이 있음을 깨달았다. 
(참고로 엘리자라는 이름은,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에서 음성학 교수 헨리 히긴스의 가르침 아래 또박또박 정확히 영어를 말하는 법을 배우는 런던의 꽃집 아가씨 엘리자 두리틀에서 따온 것이다.)

(이미지는 대화 내용과 무관함)

엘리자의 초기 시험자였던 한 젊은 여성과 엘리자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눴다.

시험자: 남자들은 모두 똑같아요
엘리자: 어떤 식으로요?
시험자: 그들은 언제나 이런저런 일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어요
엘리자: 특별한 예를 생각할 수 있나요?
시험자: 글쎄, 내 남자친구는 내가 이곳에 오도록 했어요
엘리자: 당신의 남자친구가 당신을 이곳에 오도록 했군요
시험자: 그는 내가 거의 늘 우울해한다고 말해요
엘리자: 우울하다는 소리를 들으니 안됐네요

조셉 와이젠바움의 제자들이 자신의 스승이 만든 프로그램을 썼을 때, 스승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은 처음엔 '오늘 기분이 어때요?'나 '안녕하세요?'란 인사를 건네다가 '여자친구가 날 떠났어요' '유기화학 시험을 망쳐 걱정이에요' '여동생이 죽었어요' 같은 이야기를 자주 꺼내게 되었다. 

셰리 터클은 이러한 인간적인 기계의 시대를 조망하면서, 인간이 무생물에 기만당하는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한 관점이 아니라고 말한다. 터클이 보기에 중요한 것은 빈 곳을 채우려는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엘리자 효과에 대한 이해는 와 어느새 컴퓨터가, 로봇이, 인공지능 시스템이 이런 단계까지 왔냐에 대한 감탄보다는 실은 인간이 기계와 교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준비가 이미 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터클의 주장이 눈에 들어온다.

한편 와이젠바움은 엘리자가 일으키는 여러 사회적 현상들을 보면서, 지혜를 요구하는 업무를 컴퓨터에 위임하는 것을 거부하는 용기를 주장했다. 물론 그런 그의 주장에 대해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와이젠바움이 이단이라는 혹독한 평가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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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6-11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 흥미가 생겨서 저도 저 책들중 한 권을 읽어볼까 싶긴한데, 아마도 제가 끝까지 다 읽지 못할것 같아요. 이 페이퍼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님.

얼그레이효과 2014-06-11 13:5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다락방님. 혹 도움이 될까 하여..『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선 10장이 이 내용을 다루었고, 『외로워지는 사람들』에선 8장에서 이 내용을 다뤘답니다. 포스트는 이 책들 쭉 읽다가 해당 내용에서 영화 her가 생각나서 한번 정리를 해본 거였네요:) 시선의 섬세함은 셰리 터클의 외로워지는 사람들이 좀 더 괜찮아 보였던 것 같습니다.
 














감정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는 그녀의 대표작인 『관리되는 마음』(국내에선 『감정노동』이란 제목) 출간 이후, 찬사도 많이 받았지만 혹독한 비판도 꽤 받았다. 사실 모든 연구가 이런 딜레마에 빠지지만, 혹실드는 자신이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을 무적으로 만들고, 그 대상의 부정적인 면에 갇힌 연구 대상자들은 나약하고 수동적인 사람들로 대부분 그렸다. 『나를 빌려드립니다』 또한 그 아쉬움의 망에 갇혀 있다. 

사실 기존 감정사회학자가 그녀의 연구를 비판할 때 나오는 견해, 그녀가 진정한 마음 대 진정하지 않은 마음이라는 구도로 연구 대상을 양분해 바라보려는 것 또한 『나를 빌려드립니다』 에서 잔존하는 아쉬움이다. 혹실드는 시장의 불순함 대 사적 영역이 지켜야 할 순수함이라는 구도 속에서 '이것이 최신의 자본주의다'라는 인상을 주는 서사의 특색에만 힘을 쏟는다. 그러다보니, 신기방기한 서비스 직종을 알았다는 만족감만큼 그녀가 정작 하고 싶어하는 이 만족감 깨기라는 실천과 그 소산이 썩 훌륭하진 않다(이건 그녀에게 대안의 부재를 지적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그리고 싶어하는 아웃소싱 자본주의의 첨단성, 그 맛만 맛있을 뿐 이 첨단성이란 환영을 무너뜨려야 할 그녀의 논리적 준비물이 허술하다는 뜻이다). 

그녀는 감정사회학자 잭 바바렛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연구를 빌어 비판했던 지점. 감정 노동에서 중요한 감정 관리라는 것이 왜 꼭 자본주의와만 긴밀한 것처럼 주장하는 걸까란 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혹실드는 감정의 상업화라는 개념을 수호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꼭 적용되지 않더라도 나타나는 권력과의 의존 관계에 대해서는 깊은 고려를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런 시장의 무적상태를 그려내는 것이 지극히 도덕적인 차원이라는 점도 그녀의 논지를 허술하게 만든다. '서비스' '계량화' '경영' '기업화'라는 그녀가 겨냥하는 용어는 다분히 도덕적인 정서로 설명되는 추상적인 용어일 뿐이다. 뭐라고 할까. 이런 용어들을 겨냥함으로써 뭔가 그녀는 예전부터 실컷 때려서 너덜너덜해진 급 낮은(?) 방어전 상대에만 집중해 과한 에너지를 쏟는 것 같다. 

결국 시장의 불순함 대 사적 영역이 지켜야 할 순수함이라는 구도에서 그녀는, '가족이라면 옛부터 가족답게 할 일이 있는 거란다'라는 지점에 안주한다. 그녀가 친밀성을 디테일하게 파악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서비스 형태에 대해 그 서비스의 대상자인 대표격인 가족이 극복할 수 있는 지점으로 전통 지향적인 면을 제시하는 건 아이러니하다. 감정사회학자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감정사회학의 한계 중 하나로 보수적 사회과학이 지향했던 세계관에 어느 정도 기대고 있다는 견해를 언급한 점 또한 곱씹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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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국엔 내향적인 사람들과 관련된 흥미로운 자료가 꽤 많다. 그중 '내향적인 사람도 사회학을 전공해도 될까요?'란 질문이 눈에 들어왔다. 스스로를 내향적인 사회학자라고 지칭한 랜들 콜린스(실제로 내향성을 연구하기도 했던)는 전문가 냄새를 풍기며 명쾌한 사회학적 지식으로 그 질문에 답을 해줄지도 모른다(그는 내향성의 미시사를 실제로 정리해본 사람이며, 자신이 주창한 사회적 상호작용의 연쇄론으로 내향성이라는 현대형 개인주의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한 사람이다).

 

2. 그러나 이럴 땐 학문의 때가 덜 묻은 이들의 답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찾을 수도 있다. 답을 쭉 읽어보니 예 내향적이어도 충분히 사회학을 전공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한 쪽은 먼저 자신을 수줍음을 타는 사람 (shy person)이라고 소개하며 사회학을 전공 중이라 밝혔다.  자신은 곧 사교에 능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사교성에 대한 이런 부인은 답변자가 충분히 사회학의 신조(?)를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게오르그 짐멜은 시민사회를 분석하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친교'였으니 말이다. 랜들 콜린스 또한 내향성을 설명할 때 사교적/비사교적이라는 대비를 자주 애용한다. 콜린스는 내향적인 사람이 비사교적이다라는 시선에 더 가깝다. 허나 심리학자 소피아 뎀블링은 내향적인 사람들 보고 제발 사교적이지 않다는 편견 좀 던지지 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3. 이보다 더 흥미로운 건 답변자 중 몇몇이 자신들이 사람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내용이다. "수줍음이 많아서 강의실에 가면 자리 뒤에 앉아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 즐기죠" 혹은 인터뷰 등의 작업이 흥미롭다는 답변도 있었다. 사람들을 조사하는 만남이 좋다는 것이다.

내향적인 사람들을 다룬 여러 책을 보면 '관찰자observer'로서의 내향성에 대한 언급이 눈에 띌 정도로 많다. 그러면서 연구자들은 내향적인 사람들의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강조해 편견을 깨려는 논지를 택한다. 간단한 관심 수준이 아니라 특유의 섬세함과 감수성을 동원하는 관찰자로서의 내향적 인간은 '내향성의 장'에서 자주 다뤄지는 테마다. 

 

4. 아무래도 사회학적 진술에서 내향성이란 곧 '비사교성'으로 바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허나 이는 좀 재고해볼 문제다. 랜들 콜린스는 나름 섬세하게 내향성을 설명하지만, 군데군데 내향적인 사람이 사람과 접촉하고 교제하는 것에 대해 에너지를 너무 안 쓰는 경향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내향성에 대한 연구는 아무래도 심리학 쪽이 강세이긴 하지만, 심리학계에서는 '내향성의 장'이라고 하는 영역을 하나의 사회로 보려는 데는 별로 주안점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면 대 면(face to face)의 측면에서 나타나는 진실된 자아-거짓된 자아라는 축에서 정서적 에너지를 생산, 소비하는 데 디테일을 동원하기 때문에 상호작용이라는 형식 안에서 개입되는 개인 간의 불균등(사회적 현실에 속한 개인의 상태, 계급-자본-젠더-정치 의식 등등)에는 문제의식이 약하다. 

 

5. 그러나 역시 이런 질문에서 가장 심적 우위에 있는 사람은 "사람마다 다 다양한 성향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다. 참고로 내향적인 사람들은 이런 답변을 하는 사람에게 약하다. 자신이 섬세하고 꼼꼼하게 준비한 표현에 대해 가장 성의 없고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타인을 향해 투여한 정서적 에너지가 그만큼 회수되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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