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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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에 대해 어린아이가 처음 경험하는 것은 "어른들이 좀 더 강하다"는 깨달음이 아니라 "오히려 어른들이 마술을 부릴 수 없다"는 깨달음이라고_조르조 아감벤, 「마술과 행복」


작년,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속에 담긴 윗 문장을 적어놓고 여러 번 곱씹었더랬다. 그리고 최근 이 문장 속 벤야민의 통찰력을 자주 곱씹어본 듯한 페터 한트케의 「아이 이야기」를 읽었다. 쉽게 가보자. 아이가 등장하는 작품은 늘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려는 음산함을 동반한다. 아, 하는 과장된 감탄에 휩쓸리지 말자 경계하면서도 아이는 어느새 나이 든 나를 꾸짖고 있다.

아이의 꾸짖음은 엄중하지 않고 천연덕스럽다. 그래서 읽고 있는 나이 든 나는 아이에게 질투심마저 느낀다. 글 속의 아이가 나를 꾸짖는다 느낄 때, 그 아이의 머리를 능글맞게 만져줄 나를 상상하며, 나에 대한 역겨움도 느낀다. 나는 왜 능글맞음으로 나의 당황스러움을 감추려 했는지, 자책하면서.


아, 하는 과장된 감탄에 휩쓸리지 말자라는 경계심이 무너짐과 동시에, 왜 한 아이가 나 스스로를 역겨운 존재로 만드는지 한트케는 작품을 통해 작가인 남자와 그의 아이에 관한 '사회학적 풍경'을 조성해낸다. 여기서 '사회학적-'이란 흔히 학문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학술성에 담긴 묘사의 둔감함을 자책하며, 쉽사리 그들의 학문을 비하하는 데서 오는 흔한 수사가 아니다. 한트케는 독자로 하여금 사회에서 '학學'의 면모를 뽑아내는 출중한 능력이 있다. 이 출중함은 큰따옴표로 처리해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얼른 올려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고픈 문장의 빈번한 출현이 아니다. 


한트케의 출중함은 작품 속 인물을 탁월하게 몰아세울 줄 안다는 것이다. 몰아세워서 거기서 오는 밑바닥의 자잘하고도 얕은 피해의식 같은 심리를 축축하게 늘어놓지 않고, 한트케는 거기서 더 한 번 인물들을 건조한 상태로 몰아세운다. 몰아세운다는 것이 더 이상 몰아세운다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그래서 한트케의 인물들은 몰아세움에 대해 기본적으로 냉랭하고 담담하다. 

자신을 몰아세울 줄 아는 인간들이 벌이는 고찰은 중립성을 담보한 '성찰' 같은 영역에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람들이 뻔하게 여기는 장면, 그리고 이 뻔하게 여기는 장면을 덜 뻔하게 보려는 인간들이 예상하는 장면을 폭로해 자신을 한 번 더 건조시키는 한트케의 인간들. 


본 작품에서 주인공인 한 남성 작가는 아이를 공동체 속으로 집어넣어본다. 기본적으로 극도의 예민함을 안고 사는 한트케의 캐릭터가 여실히 구현된 이 남성 작가는 아이를 향해 폭력, 냉대감, 쓰라림 등의 감정을 느끼며 자신의 시도를 분석해본다. 이 작가는 자신이 예전부터 강조해온 '모험심'이라는 가치가 자식을 갖게 된 이후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신경 쓴다. 세상에 태어나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는 작가의 정서를 이어받은 듯, 아니 더 어쩌면 뭔가 더 빼어난 감정을 갖고 있는 듯한 행동을 보이자 작가는 묘한 폭력적 정서, 질투심, 그리고 안쓰러움을 느낀 채 아이를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이게 된다.


아이는 자신인가, 아이는 자신이어야만 하는가, 아이가 자신이어야만 할까라는 복잡한 마음속에서 작가는 아이를 아이들의 세계에 둔 채, 자식을 관찰하고 자식의 반응을 챙긴다. 참고로 이 작품에선 '조숙하다' 같은 표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이는 그냥 무섭다. 여기서 무서움은 어른을 부끄럽게 하는 아이의 어른스러운 말 한마디의 차원이 아니다. 또래를 사귀고, 학교에 들어가고 거기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의 행동을 보며 우리가 으레 예상하는 '반항적' 캐릭터가 주는 그 냉소적인 힘이 이 작품을 이끄는 무서운 기운은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작품을 읽으면서 이 기운을 형언할 수 없었다. 아니 말로 표현하면 뭔가 그 기운을 갉아먹는 듯해 마음속에 떠오르는 기묘한 이미지로 가둬놓자고 생각했다. 물론 한트케는 이 작품에서 거창하거나 장황한 선택을 귀결로 삼진 않는다. 자신이 싫어하는, 격언이 씌어진 가방을 자식은 메고 다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작품의 마지막 대목에서 모호하게 처리된다. 


한트케는 「아이 이야기」에서 자신만큼 스스로를 잘 몰아세울 줄 아는 인간이 있었나 하는 쾌감 섞인 자만심으로 살아가던(허나 그 자만심을 내향적인 사색에 감처둔) 한 어른이 자신의 아이가 그런 자만심을 붕괴시키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천연덕스럽게 몰아세우는 것에 대해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의 마지막은 결국 어느 정상적인 운명의 굴레에 아이를 집어넣은 어른의 '이것이 결국 삶인가'하는 진부한 고백보다는, 자신을 너무 이른 나이에 잘 몰아세울 줄 아는 아이에게 당황스러움을 느낀 한 어른이 비겁하게 내놓은 달달한 패배감 같았다. 이 패배감은 결국 글을 통해 자신의 세계감을 표현해야 하는 작가 자신에 대한 예리한 타격으로 다가온다. 덕분에 우리는 그 타격으로 인해 어른과 아이 사이에 놓인 또 다른 세계를 곱씹어볼 기회를 얻었다. "그땐 어쩔 도리가 없었으니까"라는 말로 자신의 아버지가 벌인 시도를 평하는 아이의 툭 내뱉은 말은 이 기회의 소중함을 좌우하는 양분이다. 


이렇게 '성장'이란 말은 우스워지고, 우리 앞엔 먹먹함만이 남았다. 허나 이 먹먹함은 그 어느 감정보다 요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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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5년 2월 13일(금) 오후 2시-오후 6시

장소: 연세대학교 위당관 301호 

주최: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뒤늦게 후기를 남긴다. 시간이 지나서 쓰기 때문에 어떤 흐릿함이 있을 듯하다. 세 발표자(권명아, 정정훈, 쇼지 마키코)의 연구 중 권명아, 정정훈 선생의 연구는 진행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 스스로 무슨 논박들이 가능할지 감안하고 있는 듯했다. 질문을 하면 그것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보다는 감안을 통한 추후 전개가 필요한 발표였던 것 같아서 두 연구자의 발표 내용에 대해서는 일부러 질문하지 않았다.

 

나는 이 자리에서 도시사대 쇼지 마키코 선생의 '평범한 재특회에서 보는 앎의 문제: 계속 질문을 만든다는 것'에 주목해보았다. 그리고 조금 다른 생각도 품어보았다. 일단 이러한 주목이 한국과 일본이라는 실제 거리에서 오는 언어상의 유리함을 상정하고 쇼지 선생의 연구물에 다른 생각을 표하는 것은 아님을 밝힌다. 그녀의 연구는 세 연구물 중에서 일단 가장 완성도가 있어 보였고, 시선이 예리했다. 물론 이렇게 느끼는 데에는 후지이 다케시 선생의 충실한 한국어 번역도 한몫했다고 본다. 

 

 

우리는 이미 '인류학적 글쓰기'가 갖는 몇 가지 장점을 알고 있다. 허나 그 장점이 관성에 빠지면, 단점보다 더 독한 단점이 되기 마련이다. 다른 연구자들이 차용하는 '인류학적 글쓰기'의 사고 형태상 하나의 정치/사회문제에서 나타나는 상징이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러한 상징을 표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이 있다. 표층과 심층이 나눠지고, 인류학적 글쓰기는 현장성을 통해 표층에 나타난 정서가 과연 우리가 예상하는 일원화된 목적에 따라 나타나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인류학적 글쓰기는 명랑을 내세운 집단에서 진지함을 찾아내고, 혐오를 내세운 집단에서 혐오와 상관없음을 찾아낸다. 인류학적 글쓰기의 사고 구조에는 이처럼 '유관'할 것 같은 구도를 '무관'으로 전환시키는 습성이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인기를 끈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이 테마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다카하라 모토아키의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를 미워하는 진짜 이유』그리고 쇼지 마키코 선생의 발표에는 '유관'할 것 같은 구도를 '무관'으로 전환시키는 습성을 따르고 있었다.

 

과연 혐오의 대상을 두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그 일상 속에서 혐오의 대상과 아주 밀착된 관계를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세 저자들은 그 관계를 해체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다. 관계의 끈을 널럴하게 만들어버림으로써, 그 널럴한 관계가 하나의 앎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는 하나의 집단이 실은 그 이데올로기의 신도들은 아니며, 외려 자신 고유의 일상 속 신도들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차원에서 멈춰 있는 연구 경향에서 좀 더 나아갔으면 싶다.

 

고작해야 이것은 하나의 정치적 의지가 담긴 퍼포먼스 속에서 그 집단 속 구성원의 얼굴(사정)을 파악하는 스케치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인류학적 글쓰기 더 나아가 질적 연구에서 에쓰노그라피가 기대고 있는 문학적 글쓰기의 정서적 기운을 담아내는 참여관찰이라는 방법이 "참여묘사"(클리퍼드 기어츠)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고민하게 만든다.

 

물론 "참여묘사"라는 용어를 통해 문학가/연구자라는 촌스러운 대립항을 만들고 싶진 않다. 나는 이런 두 정체성의 혼융을 바란다. 허나 어설픈 혼융은 연구자 본인이 갖고 있는 글쓰기적 재치와 재주로 주어진 현실을 탁월하게 조망하고 있는 듯한 착시를 일으킬 수도 있다.  글의 힘으로 인류학적 현실의 멱살을 끌어와 연구 대상을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그 현실 분석에 굉장한 의미 부여가 된 듯한 지점에서 나는 일시정지를 권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글이 연구자의 사고와 유/무관한가라는 지점은 따로 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허나 적어도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책은 저자가 주목하는 사토리세대의 정서적 둥지에 기대어 그 정서에 안주해 자신의 너스레떠는 문체를 무기로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그 문체가 행사하는 힘이란 고작 하나의 둔중하고 진지한 집회 속 얼굴을 뒤져보면 명랑한 얼굴들이 있다는 유/무관의 관계 포착에 지나지 않는다(여담이지만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명랑'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이날 쇼지 선생에게 "심정적 미안함"이라는 정서의 힘을 잘 씀(아마 이것은 질적 연구에서 가장 중요시여기는 '성찰'이란 점잖은 용어로 둔갑되어 있을 것이다)으로 자신의 연구물에 대한 논지의 결핍을 보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이날 나도 충분히 내 의사 표시를 못했기 때문에 질문과 답변은 어긋나고야 말았다. 이는 전적으로 질문자인 '나'가 의견을 다듬지 못해 발생한 어긋남이었기 때문에 쇼지 선생의 책임은 없다. 허나 기록으로 남겨둠으로써 이런 형태의 연구에 대한 지속적 문제제기는 하고 싶었다. 

 

정치 집단을 연구하는 차원에서 그 구성원의 일상성에 지나치게 주목할 경우, 이것은 우리가 뻔히 아는 정치 행동 자체의 연성화를 가져오는 것을 넘어 "너네 이거 몰랐지?"라고 하는 차원으로 심층적 형태를 제한시키는 누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에 대한 연구자들 본인의 반박이 정치적 단죄라는 것은 이 연구에서 중요하다/아니다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는 꼴이 되고 만다.

 

연구자 본인은 이미 연구문 초기에 이 연구는 단순히 하나의 정치 사건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단죄가 아니며,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며 시선의 입체화를 천명하나, 그 입체화가 구성원의 '속사정'을 수집함으로써 나타나는 상대화에 머물고 있다는 점 또한 지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

마지막으로 이런 '현장성'이라는 감각을 글로 뛰어나게 푸는 연구자들의 연구물이 기존 출판계의 '르포르타주' 형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어떤 지점들이 깎아지고 다듬어지는지에 대한 고찰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연구물과 상업 단행본의 우열을 매기고자 함은 아니다.

 

허나 하나의 에쓰노그라피가 소위 '괴짜사회학'류에 포획될 경우, 우리는 에쓰노그라피의 '탁월한 글쓰기'라는 감각과 그 감각과 상관된 연구자의 관찰력, 그 관찰력이 조망하는 연구대상자에 대한 인상적인 면면만 얻을 수 있을 뿐, 정작 에쓰노그라피가 보려는 '추상의 힘' '이론적 토대물의 힘'은 놓치고 만다. 에쓰노그라피가 연구자 본인을 '저자'로 만들어주는 데 유리한 측면이 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유리함은 불리함으로 언제든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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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가 카톡 목록을 본다. 주르륵 바를 넘기다가 평소 늘 활발한 셀카를 올리던 친구 G의 프로필 사진이 기본형으로 되어 있어 뭔 일이 있나 골똘히 생각해본다. J가 카톡 메시지를 보낸다. “요즘 마음날씨는 좀 어떠하니?” 1이 언제쯤 사라지나 기다리다가 J는 다른 일을 한다. 그러다가 다시 1의 사라짐을 확인한다. 마침 G가 답을 한다. “별일 없어. 그냥 그럭저럭 살아.^^” J는 “다행이다:)”란 답을 남긴다.

 

근데 뭔가 마음이 묘하다. “그럭저럭”이란 G의 표현에 안도하면서도 G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싶은 생각이 든다. 가만히 있으면 될 걸 J는 기어코 G의 고민거리를 짜내려고 노력한다. 기억력이 좋은 J는 친구들이 사소하게 던진 말들을 잘 줍는 능력이 있다. G에게도 그 능력을 써먹는다. “지난번에 고민하던 그 일은 어떻게 잘 해결되었니?” J는 이 질문을 던질 때 G가 무슨 말을 할지 답변의 유형까지 미리 예상하고 있다. J는 자신이 타인에게 평가받는 것에 신경을 쓴다. 그것도 무척. 고로 G가 이왕이면 “와 고마워. 그걸 기억해주다니”란 말로 답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질문을 던진다. 대신 “??”이라든지 “그건 그냥 내가 알아서 할 게”라는 답변만은 아니길 바란다. 자신의 섬세함이 거부당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J와 같은 사람을 다룬 책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매사에 진지하면서도 지나치게 섬세한 촉수를 가진 사람들. 이들은 예민함이란 어감까진 받아들이지만 깐깐함이란 어감으로 자신을 평하진 않았으면 하고 타인을 향해 디테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이다.

이른바 ‘내향적인 사람들의 장field of Introvert’이 하나의 지적 담론으로 구축되면서 섬세함이 지나친 사람들은 현대인의 인상적인 유형으로 주목받고 있다. 일찍이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란 에세이를 통해 도시 속 신경/감각 과민 vs 둔감함이라는 정서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심리학적 현미경이 동원된 사회학으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분석하길 좋아했던 짐멜에게 이 사회란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만나 벌이는 세심한 상호작용의 순간이었다.

 

 





2

그런 사회적 상호작용에 기반을 둔 내향성의 역사는 의외로 두텁다. 심리학자들은 오랫동안 자신만의 방식으로 ‘신경계로서의 도시와 도시인’을 주목했다. 감각과 자극에 예민한 이들은 그들만큼이나 예민한 학자들의 레이더에 포착되었다. 학자들은 내향적인 것이란 게 무엇인지 자신이 만난 이들의 서사를 기록하고 편집해 설득력을 얻고자 노력했다. 특히 심리학계는 내향적인 사람들의 장을 통해 ‘꿍꿍이’를 분석하는 데 애를 썼다. 그 노력의 성과로 타인에 대해 지극히 너그럽고 이해심 많은 이가 실은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을 시 나오는 부정적 에너지가 상당한 사람이라는 견해를 반복적으로 제시했다. 조력자로서 타인에게 다가가려는 섬세함이라는 메시지가 실은 자신이 구상해놓은 배려의 완벽한 지도를 타인이 제발 무너뜨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맞닿아 있다는 주장이 인기를 얻었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신이 평소에 구축해놓은 자아의 지도와 맞닿아 있는 이 완벽주의적 성향은 간혹 선택공포증에 걸린 이의 우유부단함으로 연결되기 쉽다. 허나 섬세한 사람들의 평가지향성은 이 우유부단함마저 자신의 완벽한 자아에 해가 되는 것을 알기에 나름의 선택항을 준비하여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쓰인다.

 

J와 G의 카톡 대화로 돌아가자. G에게서 뭔가 심각한 일이 있었으면 했지만 밋밋한 답변이 돌아온 것에 대해 실망한 J는 “언제 한번 우리 맛있는 거 먹자^^”라며 애써 마음을 감춘다. 그러면서도 J는 자신의 섬세함이 짜둔 설계도를 접지 못한다. “고마워”라는 답변이 도착하자마자 “우리 이거 늘 하는 빈말 되면 안 되니까 아예 시간을 박아버리자”라는 답변을 남긴다. “나는 언제든 괜찮아. 네 편한 시간에 맞출게”라는 친절어린 말을 해놓고 이것 또한 허언으로 받아들일 것 같은 마음에 J는 용기를 내어(?) 옵션을 건넨다.

 

섬세한 사람들의 그 선한 인상과 제스처는 간혹 타인으로 하여금 그가 ‘랜덤형 인간’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섬세한 사람들은 “당신이 좋아하는 건 아무거나”에 따른 침묵과 그 어색한 상황을 지극히 싫어하기에 차라리 자신이 미리 그 곤욕을 방지할 대비책을 세우는 걸 즐긴다. 심리치료사 크리스텔 프티콜랭은 자신의 저서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에서 이런 섬세한 사람들을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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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런 명명을 통해 섬세함이 지나친 사람들을 요즘 유행하는 심리학적 인간으로 몰아세우고 싶진 않다. 다만 이들이 심취해 있는 테마를 통해 우리가 늘 옳다고 여겼던 가치를 다른 시선으로 재고할 필요성을 느낀다. 섬세함이 과한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 세 가지에 중독되어 있으며 여기서 삶의 재미를 느낀다. 이들은 ‘의혹의 중독자’이자 ‘경청의 중독자’이며 ‘성찰의 중독자’이다. 일찌감치 ‘내향성의 사회학’을 고민했던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는 『사회적 삶의 에너지』에서 내향성의 여러 유형을 분석한다. 그중 콜린스가 보기에 내향적인 지식인은 유난히 과잉 성찰 상태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과잉 성찰 상태는 일반인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성찰성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여기서 길게 따져보기란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섬세한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갖는 자기반성의 능력은 탁월하다. 이들은 조목조목 자신의 오류를 잘 짚어내는 반성문 쓰기의 달인이다.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할 따가울 말을 미리 봉쇄해버린다. 이 봉쇄의 효과가 과하면 타인의 주눅 든 상태를 이용해 심리적 방어선을 긋는다.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지금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란 표현은 역설적으로 그의 폐쇄적 성찰 상태를 열린 그것으로 만들어버린 듯한 착각을 안긴다.

 

 

말을 퍼 나르는 사람은 있으나 말을 되새기는 사람은 없다는 언어의 무력함을 여기저기서 호소하는 시대에 경청이라는 용어는 성찰이란 구태의연하지만 스테디한 해결책과 함께 인기 있는 인문주의적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경청 만능주의 또한 간혹 타인이 누리고 있는 평온한 일상을 지나치게 문제 있는 사람으로 보려는 태도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마음속에 섬세함의 경우수를 만들기 좋아하는 이들은 간혹 다른 사람들의 삶이 지나치게 심심하고 평온하다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그리하여 “요즘 뭐 힘든 것 없니?”라는 조력의 메시지는 ‘끄덕끄덕’이라는 자신의 에너지를 투여할 사람 찾기가 되어버린다.



 

심리학자 볼프강 슈미트바우어는 『무력한 조력자』에서 경청에 중독된 사회복지사 프란츠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바깥일에서 남의 사연을 귀담아 듣는 것에 익숙한 프란츠는 집에 와서도 직장에서의 감각을 유지하려 애쓴다. 그 대상은 자신의 아내였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자신이 일을 하는 동안 아내에게 무슨 일은 없는지 깊고 세밀하게 파고들었다. 정작 아내는 할 말이 없었다. 허나 프란츠는 이를 추궁할 정도로 아내에게 문제의 계발을 원했다. 이에 짜증이 난 아내는 외려 프란츠에게는 심리적인 위안을 주었다. 자신의 고된 조력 활동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공격성이 간혹 아내에게 분출될 때 ‘거봐 내가 뭐라 그랬어’로 시작되는 정당화를 맛보고자 프란츠는 은밀하게 아내의 예민함이 분출되도록 도발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런 도발이 곧 프란츠에게는 하루를 버티는 에너지였던 셈이다.

 



프란츠를 비롯해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타인의 문제를 끄집어내는 사람들은 만남을 통해 타인의 장점을 끄집어내는 재주도 출중하다. 섬세한 사람들은 자신의 간파 능력을 즐긴다. “와 그런 말은 지금껏 처음 들어본 것 같아요”라는 답변을 기대하면서 섬세함이라는 골병에 걸린 사람들은 매력을 발견하는 자신의 능력을 기꺼이 시험대에 올린다.

 

내향성 연구의 권위자 소피아 뎀블링은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에서 관찰자라는 특성을 지닌 내향적인 사람들에 주목한다. 사람 관찰하기 좋은 카페나 극장은 섬세한 사람들이 자신의 관찰력을 뽐낼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들은 늘 남들이 잘 보지 않는 장면을 포착해 공유하길 좋아하며, 거기서 자신의 영민함을 은근히 인정받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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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함이 골병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확인하는 건 결국 털털하고 둔감한 사람들과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그 조화불가능성에 있다. 대개 섬세함은 예찬의 수준으로 두루두루 회자되지만 그것이 지나친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난 그거 별로던데”라는 말이다. 자신이 쏟은 마음 에너지만큼 회수되지 못한다는 감정에 도달하면 섬세함이란 골병을 앓는 사람들은 자신이 잘 수행하는 연극성에 혼란을 느낀다. 어쩔 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섬세함이 과한 사람들은 간혹 자기부정의 극대화를 꾀해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 누군가 자신을 치켜세운다면 언제든 “별말씀을요”라는 한마디가 준비되어 있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장점을 과하게 열거하며 그 사람이 사실 나와 맞지 않음을 선언해버린다. 이를 포착한 제3자가 “그럼 나에 대한 칭찬은 가짜야?”라고 물으면 “난 그런 과한 칭찬을 할 때는 그런 상황이란 걸 미리 말하고 계속 이어나가. 넌 물론 예외지”라는 멘트도 준비하면서.

 

지금껏 이 모든 해석은 그간 섬세함이라는 골병을 앓아온 나에 대한 분석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원히 그럴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영원히’라는 표현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닌데……. 근데, 나 또 미안하다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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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겨레21에 실린 이동기 교수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았다」라는 글을 읽고 여러 생각이 들어 적어보고자 한다. 나는 일단 개인적으로 저널리즘이 무슨 사건만 일어나면, 기자든, 칼럼을 쓰는 학자든 '악의 평범성'을 들이미는 것에 진절머리가 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 글의 의도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려고 하진 않기 때문에, 이 글의 한계와 별개로 '악의 평범성'을 다르게 보려는 지점엔 동의한다. 


2. 근데 나는 이동기 교수가 역사학자로서 '다른 사료'를 들어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연기에 속았다는 식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보는 걸까에는 아쉬웠다. 솔직히 말해 자신이 제시하려는 그 사료라는 근거로 이 정도 의견밖에 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의 한계를 돌파해보려는 데 있어, 이동기 교수는 흔히 문화연구자들이 능동적 수용자론이 흥했을 때, 그 이후 정치적 연성화를 의심받은 이 학문이 돌연 정치적 강성화를 주장하며, 자신들의 수용자론에 담긴 '문화적/문학적 의미' 동원을 거부하자는 그 제스처와 동일한 논법을 쓰고 있다. 소비의 쾌락과 자본주의에 복무하는 놈들을 뭐라고 연하고 부들부들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냐, 그딴 거 다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거칠게 말하자! 이게 능동적 수용자론에 대한 정치적 연성화, 그 회의감에서 온 주장이었다. 근데 이러한 정치적 연성화/강성화라는 이분적 구도에 매몰되어 문화연구는 이후 더 퇴보되었다. 



3. 이 논지로 악의 평범성을 보았을 때, 이동기 교수는 자신의 '대안-사료'로 아이히만이 '판단력이 마비된 인간'이 아닌, 능동적 가해자라는 구도로 바로 넘어가버리는 누를 범하고 있다. '악의 평범성'을 다르게 보려는 지점에서 우리가 왜 굳이 '주체적 가해자'라는 입장을 바로 선택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악의 평범성을 다르게 보려는 입장은 단순히 자신의 정치적 자아가 탈색된 채, 상부의 지시를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 vs 실제로 유대인을 증오하면서 운동으로서 자신의 나치즘을 실현할 마음이 있었던 주체적 가해자로서의 인간이라는 구도로 환원될 필요가 있는가. 


4. 외려 이런 구도는 고작해봐야 한 인간이 정치적 사건 앞에서 어떤 윤리/윤리학을 결정한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진정성 게임으로 가는 한계에 봉착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에 타격을 주는 방식은 고작 '아이히만의 연기에 속았다'에서 비롯된 수동적/능동적 주체의 행위와 그 맥락에 대한 고찰이 아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인기를 끌면서 범람하게 된 '심리적 이력 파악하기'라는 그 '역사적 접근 자체'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이동기 교수의 논지 또한 '심리적 이력 파악하기'와 결을 같이 하는 견해일 뿐이다. 


5. 이러한 심리적 이력 파악으로서의 역사적 접근은 지젝이 언급했던 홀로코스트 연구에 대한 '신비화'로 빠지는 귀결과 같다.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 앞에서는 연구자 네가 애써 찾은 그 모든 이야기 닥쳐!라는 경건한 태도. 이른바 지젝이 말한 그 "형언할 수 없는 악"이란 지점 자체가 문제적이다. 그러했을 때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이 문제적인 것은 한 정치적 사건에 휘말린 개인의 심리 드라마가 왜 이렇게 '신비스럽게' 대중화되었나 하는 메타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이동기 교수가 '악의 평범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은 동의하지만, 한겨레21에 소개된 견해는 그렇게 썩 유효하다고 보지 않는다. 이동기 교수의 이런 이분법적 견해는 자칫 교양으로서의 역사에 함몰될 위험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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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29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은 건 속은 거지만 아렌트가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고 보는 지점에 아이히만을 둔 것인데, 이동기 교수 주장은 공격의 단순성이 되버렸네요. 기사 제목부터 그런 무모함을 여실히...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역시 그 당시 전체주의에 물들었고, 뇌과학과 심리학에 가까운ㅡ전체주의에 빠진 개인의 내부까지 파헤쳐가면 `악의 평범성`이란 城조차 과연 굳건할까도 의문입니다.
강성화/연성화, 수동성/능동성보다는 복잡성과 공격성이 모이는 집단성으로서의 욕망자 그들로 더 논의를 펼쳐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비로그인 2015-01-29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얼그레이효과님..~~
제 개인적으로는 `환원될 필요가 있는가?` 라기 보다는 `환원될 수 있는가? `의 문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아렌트가 말하는 수동성은
`악의 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저 생각없이 (수동적) 으로 동참했다` 의 이분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때의 생각없음은 타인에 대한 입장의 고려, 상대에 대한 인간적 이해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컨데 능동과 수동..... 당시 나치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저항과 순응, 지지 등을 오가며 회색지대에 머무르기도 하는 모순적인 것이었지요.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은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니 결론이 아렌트의 논점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흘렀지 않나 ?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 같은 그러한 사람들은..아예 그 어떤 생각도하지 않거나 못하는, 바로 이 의미에서의 수동성.. )광인들이거나 괴물들 일거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라는 문제제기를 밀어부쳐서, 아이히만의 개인의 경우를 통해, 어쩌면 * 역지사지 할 수 있는 생각의 능력이 없이* , 오로지 자신의 이익, 혹은 집단, 우리 의 이익에 적극적 소극적, 혹은 그어느 방식으로든 목적을 달성해내는 우리내 인간의 사악함을 본 것이고, 그것으로 악의 평범성을 논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이히만의 이기심, 역지사지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 (그것이 자신의 이익추구를 위해 철저히 무시될만큼의 무지) 를 확인한것이지, 속은 것이 아닐테니까요. 단지 광인일 것이라는 자신의 가정에 배신당했을 뿐

《그녀가 가정한 악과 아이히만을 보고 도출한 악 의 사이 .. 그 간극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의 정의를 이끌어 낸 과정인데, 교수님은 후자의 악의 개념을 잠시 혼동하신것이 아닐까》
아마도 기고하신 교수님 께서는 작금의 현실, 수동적으로 일을 처리하는데 어쩔 수 없이 저질러지는 악(?)이 아닌 너무나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푸른집 아래의 개인들에 대해, 한말씀 하시고자 했던 의도이셨는데 글의 내용이 미끄러져버린것이지 않을카 싶습니다.
˝너희는 적극적 동참가들이다. 직업, 밥줄 운운하지마라. 어리석은 척도 하지마라. ˝

판을 펼쳐보면 프랑스 사건도, 전세계 많은 문제들도 결국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의 문제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단촐한, 거친 ? 틀이라도 요즘 같아서는 `그 악의 평범성을 왜 《 나》에게는 묻지 않는가?` 가 두려워집니다.
오히려 가장 많이 자문 자답할 시기가 아닐까? 우리가 상대라 칭하는 저들에 대한 / 이편과 저편에 대한 group 을 정의하는 원소들에 대한 물음까지. 《물론......저 역시 그 누구보다도 ..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입니다. 악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 두서없이 조금 긴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
 
















우울은 세계와의 대결에 실패해서 생긴 먹먹한 감정이 아니다. 오늘날 우울은 세계와의 대결에 왜 자신을 낄 수 없는가에서 비롯된 좌절감에 초점이 더 맞춰져 있는 듯하다. 고로 우울은 세계를 향한 부정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부정의 부정으로 나아간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아니다. 사회학자 워너 본펠드의 말을 떠올려보면, 부정의 부정을 긍정으로 생각하는 사고는 세계를 향한 긍정을 미리 규정해버린 이들의 영역일 뿐이다. 허나 우리의 비판적 기획은 긍정을 미리 규정해버렸을 때 많은 걸 놓치고 만다. 고로 부정의 부정에 대한 생각은 세계와의 대결을 벌이는 주체 자신을 강조하듯 소묘하고 그 비극적 결말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부정), 그 부정의 방식을 감안한 채, 자신이 기대고 있는 세계의 잔혹함 자체에 방점을 찍고 생생히 그려냄으로써 주체의 필연적 실패를 이야기한다(부정의 부정). 


주체의 필연적 실패는 앞에서 말했듯, 세계와의 대결 자격을 둘러싼 박탈감, 초조함, 무력감이 혼재된 우울의 상태다. 그러했을 때 부정의 부정이란 사고를 받아들이는 우울의 주체들은 이 세계를 향해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왜 세계는 나를 혼내지도 않는가(김소진이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서 보여주듯, 이 세계가 괴물 같은 이유는 세계가 더 이상 나를 혼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울의 주체는 우울의 기예에 등급이 있다는 것을 과거에 비해 더 기민하게 신경쓰게 되며, 선망할 수 있는 '우울가'를 분석하면서 동경한다. 분석되는 우울가는 자신이 분석 대상이 된다는 것은 곧 자신을 따라할 이가 생긴다는 걸 안다. 고로 모방할 수 없으면서도 슬며시 모방을 할 수 있게끔 틈을 벌려준 채, 도망쳐 새로운 우울의 구역을 만든다. 

그러했을 때 앞서 나간 우울가는 우울과 가까이하는 세계를 향한 냉소와 그 냉소에 반하는 지극히 평범한 감정을 능숙히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우울로부터 '당황하고 싶어하는' 이들을 타격한다. 우울가의 우울에 당황함으로써 만족감을 얻던 이들은 이제 우울가의 우울이 실은 평범성에 기초해 있다는, 누구나 누리고픈 행복의 상태에 귀속되었다는 반전에 당황함으로써 우울가를 동경한다. 

최근 우울과 세계를 문제의식으로 삼은 여러 젊은 해외 뮤지션의 앨범 리뷰와 인터뷰 내용을 분석하면서 나는 어떤 공통점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들은 내향성에 기초한 사운드 속에서 굉장한 문화자본을 가지고 그 내향성의 사운드를 실생활에 관한 선망의 영역으로 구성해낼 줄 아는 기예를 가졌다. 나는 이들을 '포스트 멜랑콜리'의 주체들이라 명명해보려 하는데, 이들의 '문화적 우울'은 가장 전략적이지 않으면서 그렇기에 전략적인 감정의 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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