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히 알다시피 스웨덴에는 '늑대의 시간'이라 일컫는 게 있다. 새벽 3시~새벽 5시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의미다. 남들이 코~하고 깊은 잠에 빠진 시간, 잠을 청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설명하는 데 자주 쓰이는 용어다.

실수가 자꾸 기억난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두렵고 그 목록이 떠오른다. 교회에서 방언이라 말하는 알 수 없는 괴랄한 언어들이 누군가의 방 안을 떠도는 시간이다.


늑대의 시간을 겪어나가는 이들은 '과소감정'(과소감정에 대한 견해는 친구 정용택님의 소중한 생각을 참조했다)이 주는 내면의 억압상태에 예민하다. 혹은 누구나 한 번씩 진단하려는 '과잉감정'에 대한 피로감으로 인해 녹초가 되기도 한다.


새벽3시~새벽5시는 아침9시나 저녁6시에 비해 의미 부여가 뭐 있을까 하는 시간일 수 있다. 허나 내향성의 사회학은 바로 이 '늑대의 시간'을 떠도는 감정의 장에 주목해보려 한다.

늑대의 시간에 쏟아지는 혼잣말, 욕설, 외계어 같은 자기주문 혹은 누군가를 향한 저주는 단순히 심리학의 수리수리마수리만 다룰 문젠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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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 생존과 저항에 관한 긴급 보고서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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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이에 깨문 희망`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평범성의 인간들에게 보내는 존 버거의 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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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기록해두는 인물은 스위스 출신의 문학연구자 장 스타로뱅스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에서 가장 먼저 그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책을 읽어본 분들은 알겠지만, 세넷의 이 책 중 장 스타로뱅스키의 생각이 인용된 「상처를 주는 동정」편을 보면, 왜 세넷이 스타로뱅스키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세넷이 참조하고 있는 스타로뱅스키의 생각은 스타로뱅스키가 쓴 에세이 『후한 부조Largesse』에 기인한다. 이브가 아담에게 건네는 독사과를 담은 코리지오의 그림에서 출발한 스타로뱅스키의 사유는 '돕는다는 것'의 폭넓은 의미 고찰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사도 요한의 목을 베어달라고 요청했던 살로메의 시도 등도 포함되어 있다.-성경에서 헤롯에게 요한의 목을 베어달라고 하는 살로메의 간청은 단순히 사도 요한이라고 하는 개인을 향한 증오가 아니라, '선물'이란 의미에서 나타나는 그릇된 권력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조르주 바타유의 '저주의 몫'과도 걸쳐 있는 부분이 있을 듯하다)

스타로뱅스키는 기부라는 사회적 실천을 비롯해 이처럼 도움에 대한 다양함을 고찰함으로써 세넷이 바라보는 '현대
적 감정으로서의 동정'에 영향을 끼친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마음씨를 쓰는 것일 수 있지만, 권력의 시혜라는 비판적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건 사실 누구나 아는 지점이기도 하나 그냥 시선의 통쾌함만으로 가두기엔 무거운 주제이고 계속 다뤄야 할 주제다.

+

스타로뱅스키는 장 자크 루소에 대한 탁월한 전문가로도 알려져 있는데,
아카넷에서 나온 『투명성과 장애물』은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무척 읽고 싶은 내용이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형식으로서 투명성을 긍정적으로 표출하고 싶었던 루소는 이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에 마주하면서(장애물) 자기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만다. 스타로뱅스키는 이 두 가지 관점을 주요 포인트로 해서 루소의 삶과 사상을 외부적인 요인이 아닌 루소의 책 내부 분석을 통해 파고들어 보려 했다고 한다. 

* 물론 이러한 투명성과 장애물이란 구도는 내가 '택해서 보려는' 관점에서, 루소가 취하는 표현 방식으로서의 투명성과 이에 대한 역반응이지만, 책은 사실 문명과 자연, 인간이란 삼각 구도에서 루소가 그리는 큰 그림으로서 투명성과 장애물을 더 보려는 듯하다. 

최근 '투명사회'가 뜨면서 '투명성'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떠오르고 있는데(나는 개인적으로 이 논의는 국내 사회과학자들도 충분히 진지하게 잘 다뤄온 테마라고 생각하고 관련된 좋은 기존의 연구물도 꽤 있다고 본다)
장 스타로뱅스키가 바라보려는 투명성의 전개 과정은 조금 특이해 보여서 마음속으로 도그지어를 해본다.

+덧붙임) 장 스타로뱅스키의 생각은 parti pris, 우리말로 하면 '편견'이라고 하는 루브르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이 프로그램의 첫번째 큐레이터는 자크 데리다와 영화 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였다. 스타로뱅스키는 이 프로그램의 세 번째 큐레이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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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는 사람 얘기. 요즘 산이의 <아는 사람 얘기>를 자주 듣는다. SNS시대의 대표적인 미묘한 감정싸움 테마 중 하나는 자의식(1인칭이란 감정의 과잉)일진대,
나는 뭔가 오프라인 정서, 혹은 인터넷 게시판 문화 정서에 가까운 '아는 사람 얘기'란 이야기방식에 더 관심이 많이 간다.

2. "이 얘기 내 친구에게 들은 얘기인데" "이 얘기 아는 사람한테 실제 있었던 일인데"에서 시작되는 섹스 경험담, 황당한 연애담, 직장일 등등. 

3. 아는 사람 얘기란 결국 나를 '나'로 전환시키는 작업. 나 한 사람이 꺼낸 다른 누군가에 대해, 청자가 꼭 찝어내지 않아도 되는 '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의 전환.

4. 아는 사람 얘기 효과는 나를 다치치 않고도 남에게 나를 가린 채 남의 의중을 물어볼 수 있다는 거지만. 더 재미있는 건 산이의 노래처럼 이거 아는 사람 얘기다라고 수차례 강조하면서 결국 자기 자신임을 청자가 알아차리길 원하는 지점. 이때 다가오는 사람의 연약함이 짠하면서도 밉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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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4-03-27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사람 얘기해 줄께..." 정말 오프라인 정서죠...^^ 노래도 좋고...뮤비는 충격이고...

얼그레이효과 2014-03-28 09:30   좋아요 0 | URL
아 뮤비는 못 봤는데 함 봐야겠군요^^
 

















1. 좌절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_ 열정과 좌절의 거리가 가깝다는 걸 요즘 다시 한번 느낀다. "뭘 어쩌겠어요"라는 말이 이야기의 귀결이 아니라 아예 처음이 된 사람들. 이어 나오는,

2. "대학원에 가고 싶었지만" "내 글을 쓰고 싶었지만"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서울을 떠나 살고 싶었지만"이란 옛 소망들. 이 소망들을 마치 헐리우드 영화 속 어린 소년이 다락방으로 올라가 먼지 가득 낀 상자를 열어 챙겨보는 야구카드처럼 아련하게 대할 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잔이 허전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3. 사람이 갖고 있는, 특유의 선한 얼굴 속을 어슬렁거리는 위태위태한 울분을 마주할 때면 인상을 찌푸리며 경청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사실 마음 한 구석은 저 울분의 기운에 행여나 스스로에게 안타까운 짓은 하지 않으려나 싶어 주변에 있는 뾰족한 것들의 유무를 눈짓으로 쳐다본다. 

4. "기술이라두 배워놓을 걸" "장사나 해볼까나"가 어느새 삶의 클리셰로 인식되는 순간, '아 또 이 이야기야'란 징그러운 깐깐함을 마음에 품을 때도 있지만, 선함과 울분이 섞인 저 고요한 얼굴들이 겪었을 마음감기에 이내 필요한 침잠함을 안으로 받아들인다.

5. 아주 예전에 책이 나왔다며 만나자고 한 편집자 A가 기억난다. 책은 사실 뒷전이었고 울분데이였다. 엉엉엉 우는 와중에 미안했는지 책을 바삐 만들어 오자가 많아 미안하다고 화제를 돌린다.
그땐 건방지게 그 사람의 엉엉엉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 믿어서 억지로 그 친구의 통곡을 다시 끌고 나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훈계를 했던 것 같다.

6. A에게 내가 우선 해줘야 했던 말은 "오자여도 괜찮아"였다는 걸 이제서야 뒤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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