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은 당신에게 극렬한 찬사와 흥분을 원하는 책이 아니다. 김연수의 귀엽고도 탐스러운(?) 추천사에서 나오듯, 당신 내면의 요염하고도 내밀한 애정과 약간의 시기심이 이 책을 통해 느껴진다면 이 책은 그 소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텔레비전 뉴스에서 날씨의 변화를 알리는 소식을 몹시 싫어했다. 사시사철 그냥 그렇게 물 흐르듯 흐르는 날씨가 왜 뉴스 첫 꼭지가 되어야 하는 걸까라는 의문은 내가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면서 언론의 무용함을 알아가면서 더 커졌다.

나이가 들면서 귀는 더 얇아지고 주변의 목소리는 더 잘 듣게 되었다. 여기서 잘 들음이란 관용의 차원보다는 타자의 내밀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내 재미없는 삶의 활력으로 보충하려는 일상적 도청의 의미였다. 중년들은 날씨 이야기를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자 그냥 던지는 덧없는 말들에 날씨가 희생되는 것 같았다. 차라리 말을 아끼지, 왜 햇살을, 왜 구름을, 왜 비를 끄집어내어 자신들의 허기에 담으려 하는 걸까. 이런 퉁명스러움이 오래 갔다. 여전히 이런 생각은 남아 있다. 그리고.

 

2

 

이 책은 내겐 작은 도전이었다. 메리 올리버는 책에서 평범한 날씨도 보도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그리고 이 문장이 나오는, 책의 제목이기도 한 '완벽한 날들'을 다시 읽었다. 어떤 찝찝함 그리고 약간 틈이 만들어져 그 속에서 방황하는 내 마음들. 쉽게 올리버의 시선에 동요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이 시인이 모아놓은 단어에 박수를 칠 정도로 환호하진 않았지만, 하나 확실했던 건 내 마음속에 깃든 '소소함의 여진'이었다. 이 책이 주는 풍경에 대한 예찬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기보다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도 계속. 페이지를 여러 쪽 넘기고, 아포리즘 같은 문구의 아찔한 경계에 유혹을 받지 않고자 이 책이 주는 특유의 부들부들함에 속지 않으리란 경계심을 부쩍 늘려갔다.

 

3

그 지독한 싸움이 끝났다는 진부한 결론을 내리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내 마음속 시시한, 아니 그 누군가가 에이 뭐.

이렇게 시시한. 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진부함에 대한 수긍은, 이 책은 그래도 이 세상은 살 만하다는 가능성에 몇 퍼센트

기여하는 소품이라는 것이다. 트위터에서 쏟아지는 그 매혹적인 냉소의 말에 당신이 조금 지칠 때쯤, 그러나 너무 달달하고 의심으로 대하게 되는 그 찬사로 가득한 언어의 풍경에 지칠 때쯤, 당신은 당신이 지극히 평범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의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이 마음에 드는 건 ~할 것이다,라는 선언에서 이미 자신의 에너지를 다 써버린 채 그 소진의 상태를 본문 속에 티를 내는 수많은 발기부전의 글과는 달리, 묵묵히 자신이 보이고자 하는 세계를 걸어갈 뿐이라는 태도에 있다. 메리 올리버는 세상을 그냥 이야기해보라고 한다. 많은 이가 이야기해보라고 한다에 방점을 찍지만, 외려 이 책이 찍는 방점은 '그냥'이다. 어깨엔 힘이 빠져 있으며, 글의 표정은 '세상에 바치는 찬사'라는 이 책의 무게와 달리 그 나름 담담하다. 호들갑스럽지 않게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어떤 자극을 느낄 수는 없지만, 대신 그것보다 더 나은 안정감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4

<완벽한 날들>은 로저 프라이가 말했던 '정서적 색조'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우리가 마주치는 예술이란 곧 그 예술과 교류할 수 있는 개인의 회상 혹은 반성에 기대어 그 감흥을 주고받는 매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술은 개인의 회상 혹은 반성이란 일차적 의식 세계를 넘어서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무의식의 풍경에 자신의 살을 부대끼는 매개이기도 하다. 로저 프라이는 바로 이 과정을 예술의 상징형식이란 틀 안에서 설명했으며 이를 '정서적 색조'라는 개념으로 제시했다.(나는 이 개념을 허버트 리드의 <예술의 의미>에서 발견했다.)

 

<완벽한 날들>에는 소소하고 담백한 풍경이 등장한다. 활기차고 명랑한 구호로 가득찬 풍경이기보다는 좀 더 차분하고 디테일이 살아 있는 풍경 말하기를 택한 저자는, 풍경을 이야기하며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성찰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일단 써봐. 노래해. 피가 혈관을 흐르는 것처럼."(127쪽)

 

이 책을 통해 찾아본 나만의 정서적 색조는 연두였다. 그곳에는 마치 프로이트적인 '어머니와 아버지와 나'로 구성된 정신분석학적 연대기도, '사회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그물망으로 거창해져보고 싶은 사회학적 야심도 없었다. 연두는 그냥 연두일 뿐이었다. 이 마음이 오래 가길 바라면서. 지금 이 정도로 그래 이 정도면 되었다는 고백이 이 사회가 포획해버린 정체감과 두려움 그리고 세월 따위에 복속되질 않길 바라면서. 지극히 평범한 언어들에 애정을 가져본 지도 참 오래되었다는 생각 하나가 이 책을 덮을 때쯤 스쳐 지나갔다.

 

나는 얼마나 나의 평범성을 사랑하고 있을까. 있는 것을 그냥 놓아두지도 못하는 그 두려움의 시간을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방치해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송호근 교수의 『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를 흥미롭게 읽었다. 송호근 교수의 이 책은 젠틀하다. 하지만 그 속에 저자의 야심이 가득 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쉽게 정리하자면 송 교수는 '50대의 김난도'가 되고 싶어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어떤 조언 위주의 글보다는 자신을 포함시킨 경험을 바탕으로 한, 타인과의 땀냄새/침냄새가 섞인 젠틀한 필드워크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저자가 나름 요즘 텍스트들을 챙겨보고는 있구나라는 점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50대의 엄기호'가 되고 싶어하는 듯도 보였다.

 

2

 

그러나 나 스스로 착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필드워크적 글쓰기'란 것이 비단 젊은 연구자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땅과 사람 그리고 접촉의 순간을 만끽하고 싶어했던 많은 연구자가 있어왔다는 점에서 그의 필드워크적 글쓰기에 기반한 50대 베이비부머를 향한 그만의 인류학은 사실 그리 신선한 접근 방식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외려 필드워크가 지향하는 경험의 지향성은 소위 "~해봐서 아는데"라는 한국 중년 특유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과 매우 가깝다는 점에서, 이 책의 필드워크적 글쓰기에 담긴 어떤 태도는 한국 중년 남성들이 흔히 갖는 약간 불쾌한 커뮤니케이션 스타일과 교묘하게 만나는 지점이 있다.

다만 태도의 젠틀함에 섞여 그 교묘함이 약간 순하게 보여진다는 느낌일 뿐이다.

 

3

 

이 책은 참 순진한(?) 것이 왜 세대론을 통한 아픔의 위치와 그 중요성이 비단 베이비부머에겐 가면 안 되냐고 아우성치는 것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내가 교묘하다고 쓴 이 표현이 미안할 정도로 저자는 우직하게 베이비부머의 가치 좀 한국 사회가 알아야 한다고 점잖게 그리고 자신이 '사회과학자'라는 그 전문성을 지긋이 내세우면서 책의 결말을 보여줄 때까지 그 태도를 멈추지 않는다.

 

4

 

이 책은 대학원생들이 자리잡은 교수들 가운데 술자리를 같이하거나 대화를 하면서 느끼는 어떤 학자형 대화의 연구 대상으로도 삼을 만하다. 저자는 호구조사를 싫어한다고 했지만, 조상이 누구이냐면서부터 시작되어 그 조상과 관련된 역사적 정보를 꺼내어 공유해주고, 나름 젊은 친구들과도 그 호흡이 끊기지 않을 만큼의 유연함을 선보이면서, 묘한 온기를 내비친다. 그러면서 자신 또한 연약한 아버지이자 평범한 아버지이지만, 지적으로 화려하되 경제적으로는 (이 책에서 많이 쓰이는 '운좋다' 등으로 살짝 자신이 이루어놓은 어떤 태도가 자만으로 보일까봐, 그 수위를 낮추고자 겸양된 표현의 전략을 쓰는) 못 미친 과거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위로 대상과 수평적이지만, 그 나름의 차별성도 있음을 은근히 드러낸다. 나는 바로 이 지점이 이 책에서 정말 못마땅하다. 수평과 수직의 위치를 교묘하게 겹쳐놓으면서, 내가 이들을 위로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뭔가 관찰자/연구자적 위치에서, 라는 그 객관성으로  그 의중을 숨기면서, 자신이 한국 사회에서 얻은 성과들을 인정해달라고 하는 듯한 묘한 뉘앙스가 이 책에 대한 기분 나쁜 내 감정을 숨길 수 없는 이유다.

 

5

 

그래서인지 그가 계속 '사회학자'라는 학문적 전문성을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도 매우 불편하다. 가교세대부터 시작해서 나름의 개념 설정/선정을 통해 사회를 보는 눈을 공유하는 것은 좋지만, 그런 전문성에 대한 강조가 자신이 위무하려는 세대적 비극-베이비부머의 비극을 온전히 잘 전달하기보단 저자의 나르시시즘 그 이상으론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필드워크적 글쓰기를 통해 최대한 타인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그리고 그것을 젠틀하게 담으려 했지만, 문제는 그 태도의 기본적 설정이다. 구리다/구리지 않다를 떠나서 왜 저자는 '피해의식'과  '알아주지 못함'이라는 정서를 통해 베이비부머를 위로하려는 시도를 시작했을까. 그러한 정서가 지배적이라서 이 젠틀한 필드워크가 내세우는 베이비부머의 특성 '그들의 소리내지 못함'과 '울지 않음'의 결합 '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라는 세대적 고통의 특수성에 온전히 공감할 수 없는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젠틀한 필드워크는 구리다 이상의 느낌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6

 

베이비부머가 사회 속에서 정녕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느냐/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이 책에서 저자가 내세우는 메시지를 잘 읽지 못하는 것이리라. 문제는 다시 돌아와서 더 이상 그런 고통의 감수를 보여주면서 사회를 위한 헌신과 희생으로 소리내지 못함이란 상태를 연관시키는 건, 필드워크적 글쓰기가 지향하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와의 접촉이라는 가치와 전혀 만나지 못함이라는 것. 고로 송호근 교수의 필드워크적 글쓰기는 이미 자신이 내려놓은 사회적 법칙과 개념 틀 그리고 마음의 습관 속에서 자신의 말을 누군가의 입을 대신 빌려 전하는 수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는 이미 정해진 풍경과 그 언어 속에서 그만의 세계관이 정해진 사람인 것 같다. 그 안에서 자신이 만난 사람은 그를 깨우쳐주기보단 그의 꼭두각시라는 느낌일 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커피우유 2013-04-1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리뷰 잘봤습니다. 저도 사실 이 분의 포지션을 잘 모르겠어요.
이념상 보수이고 자의식도 무척 풍부하신 분 같은데...객관과 관조라는 가면은 쓰셨지만 (원래 그게 학자들의 특성이고, 사회학이란 학문의 특성이긴 하지만 ㅋ) 결국은 본인이 겪고 경험하고 생각하는 틀 안에서 노실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보여주시는 모습이 역력.
학교때 존경하던 K교수님께서 과연 학자들이 본인의 사회 경제 문화적 기반에서 벗어난 사고를 하는게 과연 가능할까에 대해 얘기해주셔서 한참 토론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게 참 어렵겠다 싶긴 해요. ^^;;
차라리 걍 솔직하게 까놓고 나 이런 사람이야! 하는게 더 진솔해보일것 같은데,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자들이 본인의 당파성을 드러내는거랑 학문의 객관성을 침해하는게 같은 걸로 혼동하시는 분들이 많던데, 이분도 그런 케이스 아닐까 싶어요.

2013-04-15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키틀러의 <광학적 미디어>를 정독중이다. 읽으면서 한국의 커뮤니케이션학 교육 과정에 대해 내 경험들을 돌아봤다. 내가 대학생 때 맥루언과 더불어 키틀러의 견해를 비교해서 공부할 수 있는 커리큘럼을 만났다면, 커뮤니케이션학에 대한 지금의 내 심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을 텐데.  나는 한국의 커뮤니케이션학에 환멸을 느낀다. 


2. <광학적 미디어>는 좋은 번역도 한몫하지만, 키틀러의 생각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 더 나아가 확신이 들었다.


3. 왜 키틀러를 좋아하는 내 지인들이 기술사에 탐닉하는지 그 이유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4. 지젝의 책과 키틀러의 책을 읽으면서 하나 공통점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은 '의인화/인간화의 오류'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두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말을 한번 만들어본 것인데, 가령 지젝은 시장에 대한 의인화가 오늘날 자본주의의 자기증식이 고도화하는 과정 속에서 자본주의의 인간미가 있는 것처럼 포장되고 있음을 개탄한다. (동감한다) 키틀러 또한 기술/기술사를 대하는 태도가 마찬가지다. 키틀러는 마치 기술에 인간을 덧씌워 기술의 비인간성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주장은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기술사는 아예 인간과 무관하다는 전제하에 키틀러는 조금은 센 이 견해 속에서 기술의 '사회문화적 의미'라는 국내에도 한때 참 유행했던 연구들의 무용함을 언급하는 듯하다.


5. 어떻게 보면 문화연구자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과학-'이라는 부분에 대한 광활한 접촉의 필요성과 가능성도 이 책을 통해 다시 생각해본다. 다만,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이라면, 문화연구의 그 잡식성이'과학'을 흥미로운 수사로 전락시키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6. 문화연구는 참 다양하고 넓은 공부를 하지만, 논문들을 보면, 이런 게 너무 연구가 안 되어왔다 그 정도의 '외로움 호소' 이상은 아닌 것 같아 아쉽다. 이야기가 어쩌다 여기까지..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다음으로 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지젝의 생각이었다. 다만 < 지젝이 파고드는 대중문화와 그 철학적 사유가 어떤 매너리즘에 있는 듯. 새로운 시선일수록 그 매너리즘이 더 피곤하게 다가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장님 조퇴할게요


                            김신식



새벽 두세 시 울퉁불퉁한 표정으로 자기 매장

우육탕사발면을 드시던 패밀리마트 아저씨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미스테리다


출근길 개그맨 장두석을 닮은, 늘 후드 점퍼를

두툼하게 입고 안 어울리는 색감의 루이뷔통 숄더백을

맨 청년은 또 이유 없이 나를 뻔하니 쳐다본다

미스테리다


버스정류장에 뒤섞인 비누향, 샴푸향은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은 채 누군가는 자고도 있을 시간에 헐레벌떡

출근하는 그 혹은 그녀들의 행진이다

하지만 그들의 축축함은 미스테리다


근데 나 왜 이곳에 있는거지 미스테리다


사장님, 저 오늘은 조퇴할게요

(씩씩하게 누워 있고 싶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