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1,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 1차 대전 종전일

 


[1]

어제 다른 날보다 늦게 퇴근하는 아내와 따듯한 국수 한 그릇 먹고 들어오려고 지하철에 마중을 나갔다. 개찰구 옆에서 기다리는 동안 몇몇 젊은 남자들이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싶었는데, 다음날(1111)이 일명 *로 데이라서 그랬나 싶었다. 학창시절에 이 날이 있었던 게 생각난다. 족히 25년은 더 되었을 테다. 정체불명(?)의 명절처럼 되어버린 할로윈을 포함해서 이제는 새로운 세대의 문화가 되었구나 싶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문화를 만들어가는 세대가 주인공이지 싶다.



 

[2]

오늘이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탄생 200주년 되는 날이라고 한다. 그는 18211111일에 태어나 188129일 사망했다. 여러 출판사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작가의 탄생 200주년 기념판으로 제작해서 내놓았다. 학창 시절에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기에 중년의 나이가 되어 처음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죄와 벌이다. 아니면 내가 예전에 백치를 읽었던 작품인지 가물가물하다. 죄와 벌은 작년에 읽었는데, 한 번에 다 수긍이 가는 작품이 아니었다. 작가의 삶과 사상에 대해 좀 더 조사와 이해가 필요한 것 같다. 그의 삶 자체가 마치 소설과도 같이 극적인데다 다채로운 사건들이 많아, 그의 삶에서 있었던 전환점들을 다시 살펴보고 이해해야하지 싶다.









































최근에는 그의 작품 악령을 구입했는데, 아직 시작하진 못했다. 어디선가 읽은 글에 따르면 이 작품은 좀 더 어렵지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주는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악령을 읽은 다음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으면서 작가의 세계에 다가가면 좋지 않을까, 언제나 그렇듯이 일단 읽을 계획() 세운다.































 개인적인 취향이긴 하지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경우, 작년에 코너스톤 출판사에서 나온 두 권짜리 기념판이 제일 아름답게 보인다. 











   

 


[3]

‘1111하면 또 떠오르는 것이 있다. 오늘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이 선언된 지 103년 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 1차 세계대전은 1914728일 시작하여 19181111일에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현재 우리에게는 연인들을 위한 기념일처럼 되어 기대와 흥분을 가져다주는 날이기도 하지만, 유럽의 누군가에게는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을 떠올리고 그리워했던 날이리라. 그들은 전쟁 속에서 가족의 품에 돌아오지 못했던 누군가의 아들, 남편, 아버지 혹은 딸, 아내, 어머니였을 것이다.


 

이 날을 배경삼아 나온 소설이 생각난다. 피에르 르메트르의 오르부아르. 이 소설은 2013년 콩쿠르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소개글에 따르면 문학성과 예술성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문학상에 대중 문학 작가가 선정된 것은 이례적인 일인 모양이다. 자세한 내용을 피하고자 간단한 정보만 언급하자면,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여했지만 부상을 입고 귀환한 이들을 국가는 나몰라라 했다. 오히려 이들은 국가에 짐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참전 용사인 주인공은 종전 기념일인 1111일을 기념하는 기념탑 건립사업에 참여하여 국가를 상대로 거대한 사기극을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다.

















 


[4]

프랑스 작가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니 프랑스와 관련한 사건이 하나 떠오른다. 요새 매일 조금씩, 성경을 읽듯이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의 대표작 뿌리(Roots)를 읽고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책장에 이 책이 꽂혀 있던 게 생각난다. 그저 일하시느라 바빠서 책 읽으시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대학생이 된 내가 어느 날 중고 서점에서 Roots를 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지난주에 부모님 집에 들러 책을 넣어둔 박스를 뒤져 20년 넘게 읽지도 않은 상태로 먼지 쌓인 이 책을 다시 찾아 보았다. 감회가 새롭다. 이 책은 꽤나 긴 소설인데다, 가지고 있는 번역본은 행간이 너무 작아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마음을 다스리는 셈치고(?) 천천히 읽게 되었다.














잘 알려져있는 것처럼 소설의 주인공은 쿤타 킨테라는 흑인이다. 쿤타 킨테는 작가 알렉스 헤일리의 7대 조상으로 알고 있다. 그는 아프리카의 서부 끝에 있는, 현재 세네갈 지역의 숲에 있던 푸아레 부족 출신이었다. 17세가 된 어느 날 자신의 북을 만들려고 나무를 구하러 숲에 들어간 사이, 백인 노예 사냥꾼들에게 납치되어 미국 남부로 끌려왔다. 네 번의 탈출을 시도했지만, 백인들에게 결국 붙잡혔다. 그들은 쿤타의 한쪽 다리를 도끼로 잘랐다. 이렇게 이어지는 작가 집안의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와 노예제의 면모를 고발하며 보편성을 얻는 역사가 되었다.


 

이 작품에서 프랑스와 관련한 사항은 아이티의 역사에 대한 내용이었다. 당시 아이티는 3만 명 미만의 프랑스인이 지배하던 식민지였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아프리카 흑인 50만 명 이상을 아이티로 데려와 사탕수수, 옥수수 등의 농장에서 가혹하게 일을 시키고 착취했다. 인간적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혹독한 노동환경과 현실에 불만을 품은 투생이라는 흑인이 아이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쿤타는 백인들이 하는 말을 듣거나 아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통해, 흑인 반란군 지도자 투생을 마음속으로 지지하고 응원했다. 이 반란은 결국 비극으로 끝이 난다. 나폴레옹이 협상을 구실로 투생을 끌어내어 붙잡은 다음 프랑스의 어느 토굴 감옥에 가두어버렸던 것이다. 투생은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프랑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올해 언제인가 큰 지진이 났다는 아이티 생각이 났다아이티는 아프리카 전역에서 끌려온 흑인들의 후예들로 유지되던 프랑스 식민지였기에 프랑스어를 사용하게 된 아픈 역사를 가진 나라다.


 

눈 상태도 좋지 않고 책의 행간이 너무 좁아 뿌리(Roots)를 다 읽으려면 11월 한 달 내내 조금씩 읽어야할 것 같다. 작가 알렉스 헤일리 연보를 보니, 1921811일 생이다. 올해는 헤일리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셈이다. 그는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을 이끈 맬컴 X에 관한 전기 The Autobiography of Malcolm X: A Life of Passion and Struggle를 쓰기도 했다. 맬컴 X의 자서전이긴 하지만 그와의 대담 및 인터뷰를 통해 구술한 사항을 기록한 책으로 보인다. 맬컴 X에 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뿌리(Roots)의 주인공 쿤타 킨테처럼 무슬림이면서, 무장투쟁을 지지했던 입장으로 기억한다.
















이 부분은 또 다른 흑인 작가 제임스 볼드윈의 에세이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The Fire Next Time)를 떠올리게 한다. 이 책에서 볼드윈이 맬컴 X와 만나 이야기하는 부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책 제목은 성경에 나온 하느님의 말씀 다음번엔 불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표현에서 가져온 것이다. 노아의 홍수 이후 인류의 죄를 벌하는 심판으로 말이다. 제임스 볼드윈은 흑인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지향하는 입장에는 동의했지만, 흑인 인권 운동을 실행하는 방법에 대해 맬컴 X와 상반된 입장 차이를 확인하고 있다. 제임스 볼드윈은 오히려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주의에 가까운 방식을 지지했던 것 같다. 출판사에서는 알렉스 헤일리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 보다 읽기 쉽게 행간을 넓힌 기념판을 내주었으면 한다. 뿌리(Roots)는 나머지를 다 읽고 정리를 해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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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11-11 14: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도끼샘 200번째 벌쓰
데이로군요.

카페이 투자로 땡긴 책이 오늘
쯤 오나 학수고대하고 있었는데
벌쓰데이 수령은 안될 것 같네요.

내일은 받을 수 있겠죠?

오르부아르는 5년 전에 사두었는
데, 아직 못 읽고 있네요. 그래픽
노블로라도 만나야 하나 어쩌나
싶네요.

초란공 2021-11-11 21:52   좋아요 3 | URL
도끼샘 책을 주문하셨나 봅니다^^ 내일 받으시길~ 저는 르메트르 선생이 국내 왔을 때 사인받아놨는데 책이 오디로 갔는지 못찾겠네요 ㅋㅋ

scott 2021-11-11 14: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퇴근 하는 아내를 기다리며 따뜻한 국수 한그릇 사주는 초란공님 따숩
빼빼로 보다 더 달콤 ^^
코너스톤 첫판 완판시키고 재판 찍고 있다고 합니다 ^^

초란공 2021-11-11 21:55   좋아요 3 | URL
아내가 오늘 빼빼로 사왔습니다~^^ 추운데 편의점 밖에 떨고 있는 누드 빼빼로가 가엽다고요 ㅋㅋ 코너스톤 3쇄도 찍으시길~!

stella.K 2021-11-11 20: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TV 시리즈 유명했죠. 70년대 후반에 나오고 나중에 또 만들어졌던 모양인가 본데
저는 오리지널판은 봤습니다. 나중에 만들어진 건 잔인해서 결국 안 봤죠.
영화가 하도 감동스러워 책을 샀는데 결국 읽지는 못했습니다.ㅠ

초란공 2021-11-11 21:56   좋아요 3 | URL
와~ 그럼 지금 넥플릭스 처럼 대단한 인기였을 것 같습니다!! 저도 오리지널판이 궁금해지네요.

레삭매냐 2021-11-13 07: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피에르 르메트르 아자씨의 책들
도 예전에 사두기만 하고 당최
읽지 않았네요.

초란공님의 글을 보고 나서
도서관으로 달려가 그래픽 노
블 <오르부아르>를 빌려다
읽었는데 아리까리하네요.

아무래도 원전으로 다시 읽
어야지 싶습니다.

초란공 2021-11-13 11:36   좋아요 2 | URL
그래픽 노블이 이미 나와있었군요! 그래픽 노블은 정말 별개의 작품일듯합니다^^; 모비딕 그래픽 노블도 상당히 낯선 느낌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레이스 2021-12-09 16: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집이 곳곳에 출몰하고 있어서 지뢰밭 지나가듯하고 있습니다.^^
축하드려요~~

초란공 2021-12-09 23:21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scott 2021-12-09 16: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 ✌!

도끼옹 전집
반쯤 완독 하셨을 것 같습니다 ^^

초란공 2021-12-09 23:24   좋아요 3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사실 마구 진도나가기 보다는 작년에 처음 읽어본 <죄와 벌>을
읽는 것으로 다시 시작했습니다. 읽은 내용이 가물가물해서요. ㅜㅜ
이제 <악령> 읽어보려구요~

페크pek0501 2021-12-10 14: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 님 같은 분을 능. 력. 자. 라고 하지요. 두 편의 당선작을 내시다니... (혹시 더 있는 건가요?)ㅋㅋ
진심을 담아 축하드립니다. ^^

초란공 2021-12-10 19:29   좋아요 3 | URL
페크님, 감사합니다! 올해 페이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선된 것 같아요. ^^
 
케이크와 맥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4
서머싯 몸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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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와 맥주

: Cakes and Ale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 지음 | 황소연 옮김 | [민음사]

 




인생의 원숙기에 접어든 작가가 말하는 위선과 진실한 삶

 



케이크와 맥주는 서머싯 몸의 대표작 인간의 굴레와 짝을 이루는 인간 탐구시리즈로 보면 되겠다. 물론 모든 소설은 작가가 탐구한 인간의 삶을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각자가 다른 색으로 보여줄 뿐이다. 결국 모든 작가의 작업은 인간이라는 주제로 수렴한다. 서머싯 몸은 무엇보다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진실과 부조리함, 자유와 예속의 문제를 다루었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 토대를 이루는 기본 전제는 사랑과 죽음이다. 이렇게 시작하고 보니 다소 맥 빠지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이 이야기를 꺼내든 이유는 내가 서머싯 몸의 글을 학창시절에 읽었다면 당시에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으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케이크와 맥주를 읽다보면, 작가의 생각이 슬며시 드러나는 부분마다 꽤나 공감을 하게 되었다. 삶에 대한 이런 통찰을 얻으려면 적어도 작가가 40-50대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작가 연보를 살펴보았다. 1874년에 출생한 서머싯 몸은 외교관 역할을 겸하며 첩보활동을 하던 시기인 1915(41)인간의 굴레를 출판했다. 첩보 활동으로 건강을 해치고 활동을 접은 직후인 1919(45)에 화가 고갱의 삶을 모티브로 삼은 달과 6펜스를 펴냈다. 오늘 다루게 될 케이크와 맥주는 보다 원숙기에 접어든 1930(56)에 출판했다. 아마도 40-50대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삶의 고민들이 작가가 소설에서 그려내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달과 6펜스에서는 고갱이라는 화가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고, 작품 전반에서 진지함으로 일관하는 듯했다. 반면 케이크와 맥주에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날카롭고 풍자적인 시선과 위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기적으로도 작가가 긴장 속에서 치열하게 인간을 탐구하던 40(그리고 첩보활동을 병행하던 시기)보다는 여유로움을 찾은 50대의 모습이 소설에 반영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학창 시절에 읽은 인간의 굴레는 사실상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그저 유명하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서머싯 몸의 소설에 아무런 감흥을 얻지 못했던 셈이다.


 

이 소설에서는 크게 두 가지 주제로 작품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 하나는 작가 혹은 예술가의 성공과 위선, 자유 및 예속과 관련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과 진실에 관한 부분이다. 우선 전자에 대해 언급해본다. 작가가 태어난 영국은 오랜 세월동안 귀족이 세상을 지배했고, ‘그들만의 리그가 만들어진 세계였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노동자 출신의 자녀들은 세상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장애가 많았다. 세상은 이미 기득권인 귀족 중심으로 규칙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노동자출신의 작가가 더 올라가도록 도와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는 이들이 감히세상의 중심에서 활약하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소설의 화자 어셴든은 성직자 가문의 도련님이다. 부모가 전하는 교양과 관점에 영향을 받은 어린 화자는 노동자 출신 가정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도 분명히 인식한다. 하지만 남들이 자신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싫어하고, 우연한 기회에 노동자 출신의 작가(에드워드 드리필드)와 부인(로지)을 만나 격의 없는 교제를 하게 되면서 또 다른, 말하자면 관습에서 보다 자유로운 세계를 알게 된다. 소설은 오랫동안 계급의식이 지배하던 영국에서 지식인으로 성공과 출세를 거머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상세히 보여준다. 문단 내에서 작가와 비평가와의 유착 관계, 기득권 계층 내의 네트워크를 통해 만들어지는 스타 작가의 허상을 드러낸다. 서민 출신의 작가 드리필드는 사회의 도덕을 조롱하듯 규범을 벗어난 일탈행동을 보인다. 아울러 노년에 그의 성공과정을 통해 계급사회의 두터운 규범과 체면으로 위선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군상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풍자 정신과 위트가 드러나는 순간은 이렇다.


 

예로부터 노인들은 그들의 젊은이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젊은이들을 끊임없이 세뇌했고, 젊은이들은 그것이 허튼소리임을 깨달을 즈음엔 이미 늙은이가 되어 그 기만적 행태에 편승해 이익을 봐 왔다. 또한 정치인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치고 국가를 다스리는 데 별다른 지능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결과만 봐도 파단이 가능하다.)” (143)


 

책을 다 읽고 남는 인상은 다소 아련하고 애틋한 감정이랄까. 특히 작가가 표현하는 사랑관에 주목하게 된다. 누구나 살면서 현재 사랑하는 상대에게 말하지 않는 비밀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계급이 인간 공동체에 등장하면서부터 따라온 체면과 위선이 강요하는 일종의 불문율일 테다. 작가 드리필드와 결혼한 로지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여성이었다. 그녀가 선택하는 모든 행동은 체면치레에 급급한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부도덕한 여성이었다. 사회가 강요하는 위선적인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루살이처럼 내일을 고민하지 않고 현재의 감정에만 진실하고자 했다. 결국 로지는 자신의 삶에 진지했다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은 여성이었다. 물론 그녀는 개의치 않았지만 도덕적인 이유로 그녀를 비난한 모든 이들은 결국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


 

훗날 사람들이 세상의 규범을 벗어난 로지를 비난할 때, 로지와 좋은 추억을 간직했던 어센든은 그녀를 옹호하며,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그녀는 아주 단순한 여자였어요. 건강하고 천진한 본능을 가진 여자 말입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걸 좋아했죠. 사랑을 사랑했어요. (...) 그럼 그냥 사랑의 행위라고 해 두죠. 천성이 정이 많은 여자였어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두 번 생각하는 법이 없었죠. 그건 악덕도 아니고 음탕한 것도 아닙니다. 천성일 뿐이죠. 태양이 햇빛을 발산하고 꽃들이 향기를 내뿜듯 자연스럽게 자신을 내어 준 거예요. 그녀 자신에게 기쁜 일이었어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걸 좋아했으니까요. 됨됨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녀는 늘 진실하고 예의바르고 순박한 여자였어요.” (274-275)


 

아마도 50대 후반에 이른 서머싯 몸이 생각하던 사랑의 원형을 어센든의 말 속에 이렇게 담아두지 않았을까 싶다.


 

어떤 면에서 로지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 역시 학창시절에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을 주제다로지를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비난했을 것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해 사랑의 모습을 조금은 다르게 고민해보게 된다. 인생에서 단 한 명의 파트너와만 사랑해야한다고 요구하는 자는 누구인가. 인류 역사에서 계급이란 것이 생겨나기 전 인류의 초기 공동체를 떠올려본다. 이런 집단에서 이루어졌던 사랑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상대에게 끌리는 감정이 들면 다가가 서로를 탐색하다가 자연스럽게 사랑의 행위를 하게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에게 덧씌운 문명의 관습과 규범을 벗어나 서로와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고 자연스러운 사랑의 모습을 추구한 작가가 또 한 명의 영국 작가 D. L. 로렌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케이크와 맥주의 로지는 온전히 자신의 삶을 진실하게 살아낸 유일한 자유인이었다.


 

로렌스를 생각할 때 반드시 고려할만한 대상은 영국 사회가 고질적으로 지녔던 계급성이다. 로렌스 자신의 내밀한 생각을 담은 에세이집 귀향에 실린 글에서도 이 문제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의 글에는 작가로 상승하고 싶은 욕구가 넘쳐나면서도 동시에 광부의 아들, 곧 노동자 가정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두터운 장막과도 같은 계급 구조를 극복할 수 없었던 좌절감이 깊게 배어있다. 능력을 갖추고 열심히 노력만 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영국 사회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게임판에 참여하기에 적절하다고 인정한 이들만이 게임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사회였다. 그들은 언제나 이 게임이 공정하다고 말해왔던 것이다. 작가 서머싯 몸은 이 지점에 주목하여 노동자 출신의 작가가 성공하는 이야기를 한 줄기로 끌고 가며 세상을 풍자했다. 내가 서머싯 몸에게 좋은 점수를 주는 부분이 있다면 이런 지점을 놓치지 않는 그의 작가 정신이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성공에는 어느 정도의 운과 그만한 대가(노력과 희생)가 으레 요구된다. 물론 성공의 정도와 기준은 각자 다르겠지만 여기까지는 많은 이들이 수긍할 것이다. 소설 속의 노 작가 드리필드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그저 애쓰면서 남들보다 오래 살기만 하면 되는 거야”(147)라면서 겸손한 듯 다소 냉소적으로 표현하지만, 그 역시 귀족 계층 후원자의 집중적인 관리를 받아 비로소 문단 시스템에 안착했다. 문명을 갖춘 어느 인간 사회든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성공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머싯 몸 역시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사람을 탐구하면서 이렇게 부조리한 세계의 이면을 이야기로 솜씨 좋게 드러냈다. 서머싯 몸은 드리필드의 평전을 쓰고 성공의 발판을 마련하고자하는 로이 앨로이처럼 성공에 목마른 작가들이 빠지기 쉬운 위선적인 삶을 보여준 반면 작가로서의 사명감과 가치 역시 인정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어셴든의 입을 통해 작가의 삶이란 가시밭길이다”(294)라고 언급하면서도 작가는 유일한 자유인이다”(295)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50대 후반에 이른 서머싯 몸이 작가로서의 삶을 되돌아보고 스스로에게 건네는 하나의 위안이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내게 묻는다. 당신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놓치고 있지는 않는지 말이다. 소설의 제목 중에서 케이크는 귀족 계급이 사교 모임에서 차를 곁들이며 먹는 음식 혹은 값비싼 향신료가 들어간 기름진 저녁 식사 후 먹는 후식으로 여겨진다. 귀족들의 삶에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계급성을 대표하는 음식인 셈이다. 반면 맥주(원문에서는 에일 Ale)는 계급성을 벗은 음료로서, 서민들의 삶과 함께 했던 음료였다. 노년의 드리필드가 술집에 들러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어울리며 한 잔씩 마셨던 음료였으니까. 몸의 대표작 달과 6펜스가 정신과 물질적 세계, 혹은 자유와 예속의 세계와 같이 대조되는 세계의 삶을 보여주듯, ‘케이크와 맥주역시 위선과 진실의 세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내일 케이크를 먹기 위해 오늘 체면치례 없이 진실한 사람들과의 맥주 한잔을 마다할 것인가. 아니면 내일에 대한 불안과 고민 없이 오늘을 온전히 받아들이겠는가. 내게는 이런 문제로도 다가왔다. 계급사회 이전의 인간 공동체에서 과연 내일이란 개념은 존재했었을까. ‘내일을 대비하고자 염려하느라 오늘을 놓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내일이란 문명의 필요로 만들어진 정교한 발명품이거나 문명이 만들어낸 고질병은 아닐까.




 



[1] "위선만큼 성취하기 어렵고 진이 빠지는 악덕도 없다. 위선은 한시도 늦추지 않는 경계심과 영혼을 초월하는 극기가 필요하다." (27)

[2] "돌이켜 보면 당시 사람들은 가식이 가득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이들은 체면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았다." (100)

[3] "평균 나이를 넘긴 노작가가 노년에 보편적으로 칭송받는 진짜 이유는 지식인들이 서른 살이 넘으면 글을 전혀 읽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젊었을 때 읽은 책들은 화려한 빛을 발하게 마련이니 그 책을 쓴 저자의 가치는 해마다 높아진다." (144)

[4] "지금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면 안 돼? 기회가 있을 때 인생을 즐겨야지. 어차피 100년 후엔 우리 모두 죽을 텐데 뭐가 그리 심각해? 할 수 있을 때 우리 좋은 시간 보내자. (...)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줘." (224)

[5] "진지한 감정이란 본디 부조리를 내포하는 게 분명하다. (...) 다만 영원불멸한 지성이 보기에는 하찮은 행성에 잠시 머물다 가는 처지에 온갖 고통에 시달리며 아등바등하는 인간이 그저 농담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276)

[6] "청혼하는 남자가 없어서는 아니고 지금 이대로 행복하니까. 어떤 느낌이냐면 늙은이하고 결혼하기는 싫고, 이 나이에 젊은 남자랑 결혼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니까. 한세상 신나게 살았으니 여기서 그만 마무리해도 괜찮아." (295)
- 노년의 로지가 재회한 어셴든에게 한 말

[7] "그 사람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296)
"그이는 언제나 완벽한 신사였거든."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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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09 16: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 공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저녁 메뉴로
케이크와 맥주 ^0^

초란공 2021-12-09 22:26   좋아요 1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올해 스콧님의 놀라운 글과 음악에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야밤에 땡기는 각종 음식 사진까지요~ 내년에도 잘 부탁드릴께요!

그레이스 2021-12-09 16: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못읽는 책 리뷰 보면 마음이 바빠집니다.
이달의 리뷰 축하합니다.

초란공 2021-12-09 22:2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님께서 아직 읽지 않으신 책이 있다는게 상상이 안되네요^^

그레이스 2021-12-09 22:29   좋아요 1 | URL
그럴리가요

쎄인트saint 2021-12-09 17: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선정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1-12-09 22:46   좋아요 0 | URL
쎄인트님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1-12-09 18: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리뷰에 선정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1-12-09 22:41   좋아요 1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1-12-09 18: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리뷰당선 축하드려요**
저와 같은 책으로 선정되어 더 이 책이 좋아요~~

초란공 2021-12-09 22:33   좋아요 3 | URL
와~ 그렇군요!!! 이렇게도 선정을 해주시네요.
독서모임 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이렇게 페넬로페님의 글도 읽으면서
미쳐 생각치 못했던 것들을 즐겁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다요~

이하라 2021-12-09 18: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초란공 2021-12-09 22:39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R.U.R - Rossum's Universal Robots 로숨 유니버설 로봇
카테르지나 추포바 지음, 김규진 옮김, 카렐 차페크 원작 / 우물이있는집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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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페크의 세계는 알수록 점점 빠져드네요. 그래픽노블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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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의 말들 -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 문장 시리즈
은유 지음 / 유유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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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의 말들

: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

은유 지음 | [유유]

 



자기 삶의 맥락 만들기로서의 읽기와 쓰기

 


이번에 쓰기의 말들을 통해 은유 작가의 글을 처음 읽게 되었다. 그의 글은 어딘지 모르게 나를 불편하게 했다. 글 자체가 내게 불쾌감을 주어서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을 들춰놓고, 내 안의 어딘가를 쿡쿡 찌르는 경험을 주기 때문이었다. 항상 결핍에만 주목하던 내가 그럼에도 많은 것들을 지니고 누려온 사람임을 지속적으로 일깨워주었다.


저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글 쓰는 노동자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삶의 현장에서 글을 쓰며 사유의 근력을 키워온 작가였다. 어쩌면 무의미한 반복에 가까워 보이는 글쓰기 노동자로 일하며 유의미한 사유를 캐냈던 사람이었다. 저자는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은 누구나 글감이 있다는 것”(49)이라고 언급하며 각자 자신이 발 디디고 있는 삶을 끌어와 한 줄씩 써보라고 조언한다.


쓰기의 말들은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구조에 따라 쓰인 글쓰기 책이 아니다. 오히려 삶에서 길어낸 깨달음을 차곡차곡 모아둔 글쓰기 도움말 상자 같다. 혹은 작가의 영업 비밀과도 같은 말들을 모아 펼쳐 놓은 책에 가깝다.


그동안 나의 글쓰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무엇보다 개인적인 감정을 노출하는 것이 부끄러워 항상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대개는 솔직함에 한계가 보이는 글들을 쓰지 않았나 싶다. 자신을 들여다보기보다 대상이나 주제를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데만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글을 쓰면서 내 삶과 다소간 분리된 상태를 유지하고자 의도했던 모양이다. 그럼 삶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는 글쓰기란 어떤 것일까. 그것이 삶에서 느끼는 고통과 울분을 과감 없이 다 드러내야 한다는 말이 아님을 막연하게나마 짐작해본다. 대신 저자는 줄곧 자기 삶의 맥락을 만드는 글쓰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에게 읽기와 쓰기는 삶의 맥락 만들기로서의 공부였다.


따라서 작가가 글쓰기를 할 때면 끊임없이 자아와 세계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이 과정에서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타인의 생각을 들여다보며 이해하고자하는 시도로 나아간다. 이 때 저자는 자신의 지각과 감성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나 뿐이던 세상에 남이 들어오게 된다’(221)고 일러주었다.


작가의 글이 그의 몸에서 나와 내게 스며든 느낌이다. 쓰기의 말들은 얇지만 읽는 내내 작가가 삶에서 끌어 올려 팔딱팔딱 뛰고 생동감 넘치는 문장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 머리 아프게 고민하기를 피해왔던 문제들을 저자는 독자의 사유를 갱신하는 글로 바꾸어 놓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나도 어느덧 현명해진 느낌이 들었다. 지식을 많이 습득해서가 아니라 나와 타인을, 그리고 세상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말하는 글쓰기는 쓰는 사람을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해주는 비결인지도 모른다.





[1]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가 발 디딘 삶에 근거해서 한 줄씩 쓰면 된다.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은 누구나 글감이 있다는 것."(49)

[2] "쓰는 고통이 크면 안 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은 쓴다." (75)

[3] "둔필승총(鈍筆勝聰): 둔필의 기록이 총명한 기억보다 낫다는 말"(90)
- 정약용이 언급한 표현

[4] "공부는 독서의 양 늘리기가 아니라 자기 삶의 맥락 만들기다. 세상과 부딪치면서 마주한 자기 한계들, 남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얻은 생각들, 세상은 어떤 것이고 사람은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고 수정해가며 다진 의식들. 그러한 자기 삶의 맥락이 있을 때 글쓰기로서의 공부가 는다." (109)

[5]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흔들리는 상태를 인식하는 것. 글이 주는 선물 같다." (167)

[6] "하고 싶은 일이면 문제를 해결할 궁리를 하고, 하고 싶은 일이 아니면 문제를 핑계 삼아 그만둘 명분을 만든다." (181)

[7] "묵독이 아닌 낭독은 어조, 억양, 공명, 논점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내가 나를 벗 삼는 것, 글이 느는 지름길이다."(187)

[8] "굳어버린 지각과 감성이 아니라 흔들리는 감정과 울분이 사유를 갱신하는 글을 낳는다."(211)

[9] "글쓰기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타인의 처지를 고려하는 작업이다. 나뿐이던 세상에 남이 들어오는 일이다."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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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2021-11-05 0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쓰기의 말들. 단단하고 치열한 책이죠?^^ 작가가 말하는 글쓰기란 ˝쓰는 사람을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해주는 비결˝이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저는 지금 은유 작가의 < 글쓰기의 최전선> 읽고 있는데요. 글쓰는 이의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쓰기의 말들.가슴에 새기고픈 글귀가 많아 좋아요^^

초란공 2021-11-05 01:03   좋아요 0 | URL
처음에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아주 좋았습니다. <글쓰기의 최전선>은 더 좋지 않을까 기대가 되네요!! 저도 줄치고 싶은 곳이 많아서 다시 보려구요~
 
믿는 인간에 대하여 -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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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인간에 대하여

: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믿음이 사라지는 시대, 종교의 역할을 묻다

 


몇 년 전,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에 있는 어느 언덕에 올라 분리장벽 너머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바라본 적이 있다. 장벽 너머에서는 검은 연기가 무언가를 태우며 여기저기 솟아오르고 있었다. 죽음의 냄새를 맡았던 것일까, 독수리 떼는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느끼며 장벽 너머를 바라보는데, 돌연히 총격이 시작되었다. 대응사격이 시작되며 한동안 총소리가 이어졌다. 이들은 공통의 신을 섬기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아니었나. 외모로 서로를 구분하기 힘든 이들이 자신과 다른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향해 공허한 총격을 가하고 있었다.


 

지금은 첨단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세계다. 인류는 과학 혁명으로 미신을 극복했고, 이성에 힘입어 과학기술의 영향력을 여전히 확장하고 있다. 반면, 오랜 역사를 지닌 종교와 신앙은 긴장감이 감돌던 가자 지구처럼 현실 세계에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면서도 그 입지는 점점 감소했다. 언뜻 보기에 과학과 종교는 공존이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첨단 과학기술 시대에 종교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동일 교수는 믿는 인간에 대하여에서 종교적인 믿음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신앙과 종교가 인간과 맺어온 관계를 살피고, 종교와 신앙의 역할을 묻고 있다.


성경에서 아담과 이브를 유혹했던 뱀은 인간의 분별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리분별은 인간과 세계의 모든 것을 구분하고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인간은 공동체의 규범과 관습을 만들고 법을 제정하여, 수치심과 죄를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초기의 종교는 삶의 조건을 형성한 사회장치 중에서 법, 의학, 과학과 같이 분별이 담긴 산물마저 통합한 형태로 인간의 삶을 규정했다. 오늘날 종교의 입지가 감소한 현상은 초기 종교의 역할이 점차 세분화되며 축소된 것으로 이해된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순간부터 종교의 입지 감소는 필연적으로 예견된 것이 아니었을까. 이 사례는 서구 유럽의 정교 분리 현상과 같은 세속주의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자 지구에서 보았던 평화로운 풍경과 돌연한 총격의 장면, 저자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리조치로 엄마를 만나지 못해 울던 아이를 바라본 경험에 존재하는 모순을 비로소 포착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부조리한 인간이야말로 자신의 욕망을 위해 신을 필요로 했고, 부조리한 신을 만들어 이를 숭배했던 장본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삶이 드러내는 부조리함은 지극히 인간적이면서 본질적이기도 하다. 이는 종교가 오랜 시간 세속의 힘과 권위를 욕망하고 여기에 의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서구 유럽의 세속주의 흐름은 종교가 현실에서 힘과 권위를 하나씩 내려놓게 된 과정이었다.


 

저자는 종교와 신앙이 인간의 삶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지, 우리의 믿음을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는 오랫동안 서구 유럽인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지배했다. 여기에서 종교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이해를 토대로 생겨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오랜 지혜가 축적된 유산이자 공동체 유지 시스템이기도 했던 셈이다. 따라서 종교가 바라보는 인간은 그 자체로 부조리하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종교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 관용을 사람들에게 제의하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불교의 자비심, 기독교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 같은 가르침은 종교가 인류에게 제시한 가장 중요한 지혜이기도 하다.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는 신 혹은 절대자의 말을 경청하고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요구했다. 이제 세속적인 권력과 힘을 내려놓은 종교가 신앙이 옅어진 현대인에게 줄 수 있는 메시지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통해 내 삶을 들여다보라는 주문이 아닐까 싶다. 상대방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 이 깨달음이 종교가 제공하는 인간과 공동체 이해의 핵심이 아닐까. 삶의 부조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다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서로를 소외시키는 유무형의 장벽을 걷어내야 한다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은 얼굴을 마주하고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자는 바로 내 앞의 존재에 주의를 기울여 바라보고 경청할 때 비로소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지혜를 일러주었다. 그러면 지금의 종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인류의 오랜 지혜를 환기하고 사람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일이 아닐까.






[1] "인간이 그토록 전쟁과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종교적 신념이 결국 동일한 신에 대한 믿음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는 어딘지 모르게 허무한 비애가 있습니다." (41)

[2] "오, 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여, 나의 고통과 같은 아픔이 있다면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42)
- 이스라엘 십자가의 길 초입에 있는 예수가 했다는 말의 라틴어 글귀

[3] "타인을 바라보는 만큼 더 절실히 주의를 기울여 자기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조화로운 질서에 관해 연구하려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진실하고 치열하게, 내면을 바라보는 눈앞에 등불을 켜서 들어야 합니다." (43)

[4] "오늘날 우리는 미래 세대에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 안락한 삶을 사는 법만 강요할 뿐, 실패할 기회를 주지 않고 다시 일어설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65)

[5] "저는 누군가의 아픔, 실수와 실패가 불명예가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이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나 공동체가 불명예스럽다고 느꼈습니다." (84)

[6]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136)
- 마태오 12:7에서 재인용한 예수의 가르침.

[7]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데 ‘자유에만 큰 방점을 찍고 행동한다면 사회나 이웃과 불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을 믿고 그 뜻을 따라 살고자 한다면, 나와 내가 속한 종교 공동체의 행동이 이웃에게 고통을 주거나 이웃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더 나아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137)

[8]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단 하나의 차이는 태도의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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