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아니 에르노의 책을 한 권만 읽어보면 누구나 에르노의 글쓰기를 오래 기억할 것같다.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은 쓰지 않는다는 철학을 갖고 글쓰기를 하는 작가로서 에르노의 강한 개성은 저자의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한인상을 받을 것이다. <단순한 열정>도 중년의 나이에 이미 성년이 된 아들이 있는 저자는 파리에 파견나온 한 외국 영사관의 유부남 직원과 연애한 경험을 글로써서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한 작품이었다. 자신은 사실을 기반으로 썼으나, 저자가 겪은 경험을 통해 이를 회상할 때(글을 쓸 때) 떠오른 이미지의 말들로 이야기를 구성하였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지금 표지를 다시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문구가 보인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와 나를 둘러싼 삶들을 생각할 때 썼던 그 단어들을 되찾는 일이다.") 


저자의 강한 개성이 드러나는 글쓰기를 떠올려볼 때, <남자의 자리> 역시 저자가 겪지 않은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책은 자신의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젊은 시절 아버지에 대한 딸의 시선, 아버지와 딸의 관계, 그리고 저자 자신의 불가피한 근원에 대해, 그리고 노이로제에 가까울 정도의 오랜 자신의 열등감과 치부의 흔적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어서 강한 인상을 남긴 책이었다.


책의 절반은 분명 에르노가 담담하게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아버지에 대해 에르노가 느끼는 흔들리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 이 역시 책을 읽고 내가 다시 나의 기억을 더듬어갈 때 떠오른 단상의 말들일 뿐인지 모른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부모님을 방문하며 어느 새 늙어버린 아버지에게 로션 한 병을 선물하며 '아빠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거야!'(110면)라고 적은 부분처럼 아버지가 병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 장면이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로서 에르노의 부모님은 평생을 줄곧 일만 했고, 교양이 부족함을 언제나 부끄러움으로 여겼던 에르노의 고민이 곳곳에 묻어난다. 자신의 '근원'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을 그녀는 그러면서도 교양을 갖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이 곳에 속한 사람이 되어 간다. 그러면서도 에르노는 늘 아버지의 변함없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지만, 딸이 바라보는 아버지에 대한 시선은 국경과 민족을 초월해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하나의 유형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엄마와 딸의 관계와는 또 사뭇 다른 무언지 모를 애틋함과 거리감이 존재하는 그런 유형이 있고, 이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공통점이 있는 모양이다. 


또 한 가지 떠오른 생각은, 롤랑 바르트의 책을 많이 접했을 에르노의 이 <남자의 자리> 또한 어떤 점에서 바라보면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과도 같은 계기(어머니의 죽음)를 가지고 부모를 회상하는 구조를 갖는다는 점이다. <남자의 자리><밝은 방>에 대한 하나의 오마주와 같은 글쓰기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에서 바르트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어머니의 어릴 적 사진 한 장을 바라보며 사진이 주는 감정을 돌아다보고 있다. 회상의 어느 특정한 부분이 주는 '찌를 듯이 아픈' 기억들과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감정, 그리고 삶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 이 모든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남자의 자리>에서도 보인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오랜 옛날 헌팅캡을 쓰고 카메라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젊은 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하고 바라보는 에르노의 심정이 느껴진다. 아울러 이 사진첩에 아버지가 스크랩 해놓은 에르노에 관한 신문기사 스크랩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뿐만 자신의 열 여섯 살 당시의 사진(아마도 dust cover에 나온 사진으로 보이는 이 사진)에 드리운 아버지의 그림자를 발견하며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니 에르노가 결핍으로 가지고 있었던 교양있는 집안의 '교양'은 그녀의 부모가 평생 접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세계였다. 톨스토이의 귀족 사회를 엿보면서도 느꼈던 점은 이 '교양'이라는 이름의 허구의 모습을 프랑스의 '교양있는' 집안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대화에서 항상 '재치있게 말하는' 법을 알고 있다던가, 심지어는 감탄사를 연발할 때도 누구의 시에 나온 대사를 자연스럽게 체화된 것처럼 내뱉는 그런 교양에 나는 주목한다. 이러한 '스펙'은 노동자 가족의 딸로서 갖지 못한 특질로서 언제나 에르노에게 스트레스이자 컴플렉스가 되었던 모양이다. 한 사회가 불편해하면서도 공유하는 이 '교양'이라는 허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했던 것일까. 배운 사람들과 노동자와 구분하기 위한 혹은 이들이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도록해주는 자위장치였을까. 하지만 이제 현대사회에서 이런 모든 것을 다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것은 자본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남자의 자리>에서 프랑스 사회의 또 다른 단면(그러나 내가 속한 사회와 크게 다를바 없는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남자의 자리>를 단순한 '사부곡'으로 정리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이 책의 원제는 <La Place> 곧 공간, 장소, 자리의 의미가 될 것이다. 아버지가 평생을 지켜온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에 대한 발견이자 회상이며 애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공간은 아버지가 평생을 지켰던 '물리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영역이며 존재에 대한 분명한 흔적일 것이다. 따라서 이 영역에 대한 재발견 내지는 회귀는 어머니에 대한 집요한 애도를 보여준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과도 너무나 닮아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93면)

글을 왜 쓰고 있는지 에르노는 끊임없이 되물었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이 경험한 일만을 소재로 글을 쓴다는 제약이 있는 그녀의 글쓰기는 오히려 더 엄정하게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끝없이 의심하고 반문했으리라 생각한다. 저자는 이 한 문장에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이유와 아버지와 딸인 자신의 관계의 양상을 간접적이나마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말이 힘을 갖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아니 어느 딸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번역에 관하여)

피에르 르메트르의 흥미로운 소설 <오르부아르>를 번역한 임호경 번역자의 번역으로 만나는 <남자의 자리>는 역시 번역이라는 것은 쉽지 않다는 자각과 함께, 무난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잘 된) 번역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물론 딸의 시선에서 바라본 아버지에 대한 관점과 자신의 치부의 드러냄을 얼마나 섬세하게 잘 드러내었는가라고 묻는다면 글세,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어떤 기교나 거슬림없이 무난하게 읽어나갈 수 있게 도와준 번역이라면 나는 그것이 잘된 번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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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

롤랑 바르트의 <밝은 > 만나는 접점에서 머무르기

 

 

한병철 교수의 <에로스의 종말> 다시 읽는다. 전체에 대한 서평을 정도의 실력이 나에겐 없음을 통감하지만 책읽기의 매력이 책의 어떤 부분에서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에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은 롤랑 바르트의 <밝은 (영어판 제목: Camera Lucida)>에서 카프카(Franz Kafka) 말했다는 대목에서 멈춰서 저녁 내내 생각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목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사물에서 의미를 몰아내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나의 이야기들은 일종의 감기다.”(79)

 

저자 한병철 교수는 이에 사물의 내밀한 음악 눈을 감을 비로소 울려 나온다. 눈을 감는 순간에야 사물 앞에서의 머무름 시작된다.”라고 덧붙이고 있다.(5 환상, 79)

 

롤랑 바르트가 인용했다는 카프카의 말과 한병철 교수가 덧붙인 말은 얼핏보면 서로 연관성이 희박하다. 나는 대목에서 과연 부분이 서로 어떤 연관성에서, 어떤 맥락에서 이렇게 병치되어 나오게 되었는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카프카의 말이 인용되는 롤랑 바르트의 <밝은 > 맥락은 이 책 22장에서 롤랑 바르트 자신이 사진을 보는 행위를 언급하며 맥락에서 나온 말로, “사실 또는 결국 하나의 사진을 보기 위해서는, 머리를 치켜들거나 혹은 눈을 감는 것이 좋다.라고 말하며 야누흐(Janouch) 카프카의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이미지에 선행하는 조건은 시선이다.’라고 야누흐는 카프카에게 말하곤 했다. 카프카는 미소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사물을 촬영하는 목적은 그들을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쫒아내기 위해서이지. 나의 이야기들은 눈을 감는 하나의 방법이네.’ 사진은 말이 없어야 한다.

 

책에서 롤랑 바르트가 썼던 동일한 문장에 대해 사뭇 다른 느낌의 문장이 나왔다. 한병철 교수는 롤랑 바르트의 독일어판 <밝은 >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이며, 내가 가지고 있는 <밝은 > 불어판 번역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독일어 판으로부터 나온 번역은 매우 간결하다.

 

카프카의 인용구가 있는 <밝은 > 22장은 현대 사진론에 영향을 끼친 바르트의 스투디움 푼크툼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가지 사진을 이야기 한다. 1882 나다르라는 사진 작가가 찍은 이태리계 프랑스 탐험가의 사진으로부터 바르트 자신의 푼크툼 언급하며 시작하고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 푼크툼 사진 관람자에게 고통의 확실한 징후 되는 것으로서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환기되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같다. (모두 사망했을)타인의 오래된 가족사진에서 인물이 신던 구두 혹은 목걸이로부터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요소가 바로 푼크툼 요소라고 있겠다. 바르트가 생각하는 사진(혹은 사진 감상)이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평범한 세부가 홀로 (푼크툼을 발견하게 해주는) 감정적인 의식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도록 내버려둠을 통해서 가능한 행위인 같다.

 

다시 카프카의 (밑줄 인용구) 돌아가자면, 롤랑 바르트에게 사진’은 사진에 담긴 대상이 전달하는 정보, 의미를 사진 관람자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점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강요 하나의 폭력일 수도 있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런 정보, 의미 수다스러움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자신에게 감동을 주는 사진은 수다스러움 제거된 사진이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수다스러움 범주에 테크닉’, ‘현실감’, ‘르포르타쥬’, ‘예술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에로스의 종말>에서는 사치스러움' 현대 사회의 과도한 가시성(혹은 정보)이라는 보다 확장된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한병철 교수가 언급한 사물의 내밀한 음악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이미지 혹은 단상 정도로 이해할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이미지 혹은 단상이라는 개념을 생각할 도움이 만한 부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목이 있다. 이 대목은 프랑스 작가이자 대학교수인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소설 <단순한 열정> 마지막 부분에 있다. 작가 아니 에르노는 50 중반이던 1990년대 초에 30 후반의 외국인 유부남과 사랑을 나눈 체험을 바탕으로 책을 썼다. 그녀는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적은 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이라고 말하며 평생 글을 써왔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사건이 사실이므로 소설이라기 보다는 '시간 개념이 없는 일기'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같지만 아무튼 그건  책의 분류를 '굳이' 원하는 사람의 몫이다.

 

<단순한 열정>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하고 말했었다. 나는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사람의 존재 자체로 인해 내게로 단어들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사람이 읽으라고 글을 것도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내게 어떤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대목에서 언급된 작가가 떠올린 단어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실존적 인식 한병철 교수의 사물의 내밀한 음악 동등한 의미를 갖는다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에로스의 종말> 돌아간다. 책의 옮긴이에 따르면 독일어 눈을 감는다라는 동사는 닫다, 끝내다 등의 의미를 지니는 동사를 사용한다고 한다.  눈을 감는다 종결 의미를 내포한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시각적 정보의 결핍을 의미하며 이는 에로틱한 환상을 자극한다고 한병철 교수는 말한다. 여기서 에로틱한 환상은 기본적으로 상상력을 매개로 타자 갖는 욕망을 대변한다고 있다. 한병철 교수는 쿠스타브 플로베르(Gustav Flaubert) 소설 <마담 보바리>에서 보바리와 레옹이 달리고 있는 마차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인용한다. 대목에서는 사랑의 행위에 대한 어떤 시각적 묘사도 나오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에로틱한 환상을 자극하는 것이다. 대목은 <시를 읽은 그대에게> 정재찬 교수도 '가장 에로틱한 장면'이라고 손꼽는 장면이기도 한데, 여기에 시각적 정보가 자세하게 주어진다면, 에로틱한 환상은 곧바로 파괴될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얘기한 혼란되고 균열된 포르노로서의 성애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린다.

 

지나친 정보가 주는 환멸 떠올리자면 나는 언제나 소개팅에 나가기 전에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 통해 상대방의 사진을 검색하는 젊은 세대를 떠올린다. 개인에 대한 과도한 정보와 가시성(프로필 사진, 셀피 사진 ) 확보한 이들은 상대방에 대한 기대 커지거나 아니면 환멸 따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의 인간다운 매력에 대한 환상(또는 상상력) 머물 여유가 정보 검색과 더불어 곧바로 박탈당한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상대를 결정지어버린다. 이처럼 과도한 정보가 주어지는 세대에게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관심이 머물 여유가 사라진 세대가 것이다.   

 

오늘날 무한한 긍정성 양상이나 과도한 가시성 성과주체를 지배하고 있으며 이런 가속화 사회에서 눈을 감는 행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한병철 교수가 언급한 눈을 감는 행위 문자 그대로 눈을 감고 거부하는 행위에서 나아가 종결 형식으로서 사색적인 머무름 또는 사색적인 안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도 주목해야 것이다.  

 

한병철 교수가 <피로사회>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자유주의의 성과주체는 자기착취적인 존재이다. ‘과도한 긍정성의 강박 성과주체를 소진시키는 원인이 되며, 이는 오늘날의 우울증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병철 교수는 우울증이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의 특징적인 질병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에로스 환상( 상상력) 매개로 하는 타자에 대한 욕망이다. ‘타자 경계가 분명한 것이다. 반면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자아의 나르시시스트화 경향이 강화되어가기에 이는 타자 침식이 진행되어 결국 타자 소멸로 이어진다고 한다. 나아가 자아 타자 경계가 해체되어 사라지게되면, ‘타자 대한 환상 사라지며, 이는 에로스의 종말 의미한다는 , 그리고 나아가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이 된다고 한병철 교수는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에로스의 종말이란 사태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병폐라고 진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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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느릿 느릿 읽기 [2]

 

 

 

 

 

 

 

 

 

 

 

 

   청년 레빈은 여전히 키티에게 청혼을 주저하고 있다. 1부에 보면 레빈이 키티를 만나기위해 스케이트장에 가는 장면이 있다.

   네시에 레빈은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면서 동물원 입구에서 세낸 썰매를 세우고 스케이트장으로 가는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입구에서 쉬체르바쓰키네의 사륜 여행마차를 보았기 때문에 그곳에 가면 틀림없이 그녀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 그는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환희와 두려움으로 그녀가 거기 있음을 알아챘던 것이다. 그녀는 한 부인과 이야기를 하면서 스케이트장 건너편 끝에 서 있었다. 그녀의 복장이나 자세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레빈에게는 이러한 군중 속에서 그녀를 찾아내는 것이 쐐기풀 속에서 장미를 찾아내는 것처럼 손쉬웠다. 모든 것이 그녀로 인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의 온갖 것을 환하게 밝히는 미소와 같았다. (1 62-63)

   흔히 내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사람으로부터 같은 아우라가 퍼져나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130년도 전에 톨스토이는 우리가 이야기하듯 그런 빛이나는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키티의 사촌오빠가 레빈을 알아보고 러시아 제일의 스케이터!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대목을 통해 레빈은 스케이트를 매우 잘 타는 것으로 나온다.

   역시나 오늘은 처음부터 삼천포로 빠지자면, 나는 이 대목을 읽고 문득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렸다. 크리스마스 즈음 기숙학교에서 쫒겨난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여자 친구 샐리를 만나기전 뉴욕 맨하탄을 배회하면서 스케이트장에 이르는 장면이 나왔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사건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도 찾아낼 길은 없지만, <샐린저 평전>(케니스 슬라웬스키 지음)을 보면 꽤 젊은 나이에 단편 소설로 데뷔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1941 12월 일본군이 진주만을 폭격한 이후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군 복무 중(1943년 즈음으로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책을 열심히 읽어댔다(104)라고 적힌 대목이 보인다. 샐린저는 실제로 맨하탄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실제로도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 콜필드가 나도 어렸을 때 똑같은 장소에서 스케이트 타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라고 혼자 생각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이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혹은 무의식 중에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레빈이 스케이트장에서 키티를 만나는 장면이 <호밀밭의 파수꾼>과 연결되었을 뿐이다.

  

   딸의 운명은 부모가 결정지어주어야 한다는 프랑스의 관습은 배척당하고 비난받았다. 딸에게 완전한 자유를 줘야 한다는 영국의 관습도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러시아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중매쟁이를 고용한다는 러시아식 관습은 뭔가 상스러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남들처럼 부인 자신도 그것을 비웃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시집을 가야 하고 시집을 보내야 하는가는 아무도 몰랐다. 부인이 이 문제에 대해 상의했던 사람들은 모두 부인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 생각해봐요, 이제는 그 낡은 관십을 버려야 할 때예요. 결혼하는 건 젊은 사람들이지 부모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당사자들이 알아서 하게끔 내버려둬야 해요. 딸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부인으로서는 딸이 사내들을 가까이하면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그것도 결혼할 의사가 없는 사내나 혹은 남편감이 되지 못하는 사내를 연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95-6)

   결혼 적령기가 된 키티의 어머니인 부인의 입장에서 톨스토이가 써내려나간 이 대목을 보면 작가가 인식하는 당시 결혼 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톨스토이의 표현에 의하면 프랑스의 결혼은 과거 우리처럼 부모가 정해준 결혼이 대세였을 듯하고, 영국은 자유연애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반면 러시아의 결혼문화는 회원제로 운영되는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배우자를 선택하기도하는(물론 자유연애와 부모의 주선에의한 결혼도 혼재해있지만) 현재 우리의 모습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아울러 러시아의 문화는 특히나 프랑스 문화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교계 모임에서 러시아어 대신 프랑스어를 쓰기도하고, 하인이 있는 자리에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나 껄끄러운 이야기를 할 때 프랑스어를 쓰는 장면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롤리타>의 작가)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연애소설로 꼽은 이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특정 한 사람이 주요 인물이 아니고 바로 두 남자와 두 여자의 사랑과 운명을 대립시키고 있다. 한 쪽은 유부녀인 안나 카레니나와 사랑을 하게되는 브론스키 백작(알렉세이 키릴로비치 브론스키)이 있고, 그 대척점에 키티(카테리나 알렉산드로브나)와 레빈(콘스탄틴 드리트리치 레빈)이 있다. 따라서 이 두 커플이 조우하고 고백을 하는 시점이 비슷하게 나오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레빈이 키티에게 처음 고백하고 청혼을 했을 때 처음에는 키티에게 거절당하게 되는데, 반면 브론스키와 안나는 기차역에서 서로 첫 눈에 반하게 된다. 이 두 커플의 시작은 이후 이들이 맞게되는 운명과 반대로 레빈은 청혼을 거절당하는 쓰라림으로 시작하며, 브론스키는 무난하고 좋은 분위기로 두 사람사이의 관계가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브론스키와 안나가 처음 만나는 곳이 기차역이라는 것, 그리고 이들이 처음 만난 날 기차역에서 한 남자가 열차에 치여 죽는 사건을 맞게 되는데, 안나가 불길한 징조예요.라고 하는 말은 아무 의미없이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기차역은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불행을 잉태하는 장소로서 톨스토이가 사용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톨스토이가 말년에 집을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영면한 곳도 어느 기차역이었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에게 있어 기차역은 인생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지도 모르겠다. 삶과 죽음을 기억하라는 톨스토이 말년의 잠언집을 읽다보면 인생이 갖는 은유적 의미(지나가는 곳으로서의 인생)또한 떠올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톨스토이에게는 기차역과 부합하는 인생의 의미가 아닐까한다.

  

   여기서 잠깐 안나 카레니나와 사랑에 빠지는 인물인 브론스키 백작에대해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브론스키는 좋은 집안 배경 출신이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손에서 성장하는데, 초반에는 마마보이처럼 보이는 착한 아들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어머니와의 관계가 썩 좋지는 않으며, 그림을 잘 그리는 것으로 나온다. 브론스키는 유부녀인 안나 카레니나와 첫 눈에 반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열정적인 사랑을향해 나아가지만 사교계의 냉담한 시선과 사회의 관습에 고통을 받는다. 좋은 집안에 학식은 있지만 20세 연상인 남자(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카레닌)와 결혼 후 무덤덤한 결혼생활을 하던 안나는 브론스키를 만나 새로운 삶에 모든 것을 걸고 뛰어든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촛불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사랑하는 아들마저도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지는 못한 듯하다. 이런 사건을 내 주변에서 마주하게 된다면 언제나 타인의 행동을 비난하기는 쉬운일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내게도 일어났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타인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까? 안나의 남편인 카레닌의 입장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타인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퍼부으며 복수와 응징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합리적 대안을 선택할 수 있을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이런 문제에 대해 당시( 130여년 전)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사회의 분문율에 톨스토이는 소설에서 질문을 던지고 편견에 도전하고 있다. 안나는 단순히 자신의 쾌락을 쫒는 여자일까? 그리고 어쩌면 쾌락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쾌락을 구하는 것이 과연 잘못된 일일까하는 의문을 던져볼 수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갖고있는 도덕적인 기준이야말로 모호하고 자의적이며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도덕적인 문제에 있어 정답이란 없는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문제는 생각해볼 일이다.  

 

"인생의 온갖 변화와 매력과 아름다움은 모두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는 거니까."
(91면)

"All the variety, all the charm, all the beauty of life are made up of light and shade." (펭귄 북스, 4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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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느릿 느릿 읽기 [1]

 

 

 

 

 

 

 

 

 

 

   앞으로 몇 달이 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주 천천히 읽어 나가면서 밑줄 그은 부분을 옮겨 적고 삼천포로 빠지기도 하고 그 때 그 때 나에게 든 생각들을 옮겨 놓는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 일기가 될 것 같다. 이 독서 일기는 박형규 교수가 번역한 문학 동네의 <안나 카레니나> 3부작에 기반하여 읽어 나갈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지도 한 참 지난 내가 아마도 제작년 부터 문학 책을 들여다보다가 결국 이름만 들어왔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만나게 되었다. 책의 뒤 편에 나온 유명 소설가들의 <안나 카레니나>에대한 짦막한 서평만이 아니더라도 가깝게는 <책은 도끼다>를 쓴 박웅현 선생이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 최소한 길을 잃지는 않을거에요.라고 한 언급이 이 책에 대해 더욱 흥미를 갖도록 했다. 번역본으로 해설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소설 지면으로 156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나는 어떻게 읽어 나갈 것인가가 처음 이 책 세 권을 앞에 두고 들었던 생각이었다. 그래도 태어나서 한 번은 남들이 고전이라고 하는 책을 읽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사명감에 읽기 시작한 것이 작년 12월 초 였는데, 느릿 느릿(그려나 꽤 부지런히) 읽어나간 지 2달 남짓만에 다 읽어내어 후련하다. 나는 여기에서 나아가 천천히 읽으며 딴 생각으로 멈추기도 하고 메모도 해 둔 부분을 서재에 기록해두고 싶다. 그렇게 해서 나만의 <안나 카레니나> 다시 읽기 프로젝트를 생각해낸 것이고, 이렇게 하면 또 한 번 인상깊었던 부분들, 삼천포로 빠졌던 기억들을 다시금 그러 모을 수 있을 것같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전을 통해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내 삶에 질문을 던지는 일이었던 것 같다. 자 그럼 시작해보자!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소설은 성서에 나온 이 알쏭달쏭한 표현으로 시작한다. 책의 뒷 표지에 언급된 것처럼 미국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안나 카레니나>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연애소설의 하나라고 표현했는데, 이 성서의 표현은 처음 읽을 때 무심코 지나쳤던 문구이다. 지금 다시 책을 펼치고 눈에 들어온 이 문구를 다시 생각해보면 비극적인 소설의 결말과 관계된, 그리고 이 소설을 관통하는 삶과 신앙의 문제와 관련한 문구가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았다. 당연히 작가가 아무런 의도 없이 소설의 첫 페이지를 이 문구로 시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시 소설을 읽으며 생각해볼만한 꺼리가 생겼다.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하면서도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니까.

   소설의 첫 부분은 소설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영역으로서 모든 소설가를 비롯한 작가들이 공을 들여야한다는 데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1 11) 또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로리타>와 마찬가지로 인상적인 소설의 첫 문장으로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우리글로 표현한 이 문장은 나름 괜찮은 번역이라 생각했다. 특히 가족이라는 다소 좁게 느껴지는 표현보다 가정이라는 단어의 선택이 복잡한 현대의 삶을 좀더 유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울러 고만고만나름나름의 리듬감과 대칭적인 구조는 역자가 상당히 고민했다고 느껴지는 점이다. 나는 러시아어를 모르니 영역으로 번역(Richard Pevear & Larissa Volokhonsky 번역한 펭귄 북스 참조)한 문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ll happy families are alike; each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이 문장의 원래 의미가 어떻든 나는 이 문장이 참으로 많은 인생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도 느꼈다. 부자든 가난한 이든 누가 더 행복한가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행복해보이는 사람 누구든지 각자 나름의 고민을 안고 이 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데에서 나만의 소심한 위로를 받기도 하는 것이다. 안정된 직장과 빚이 청산된 내 집을 갖고있고, 행복한 가족이 있다면 그야말로 행복할 것 같지만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들마저도 어김없이 말못할 아픔이나 고통, 고민거리는 늘 존재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견지한 인생의 참모습이다. 곧 고민의 개별적인 대상은 다르더라도 고민 자체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일게다. 그러므로 잘나가는 내 동창들의 모습에 배아파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소설의 두 번째 문장(1 11), 오블론스키 집안은 모든 것이 어수선하게 들떠 있었다. 어수선함이라는 단어는 앞에서 말한 펭귄 북스에서 confusion이라는 단어로 나타나고 있는데, 나중에 더욱 자세히 나타나겠지만, 톨스토이가 이 <안나 카레니나>를 쓸 당시에 고민하던 신앙과 이에 무관한 듯 살아가는 러시아 민중의 현실적인 삶과의 괴리감 내지는 혼란스러움을 더 잘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형규 교수의 해설에도 잠깐 언급되지만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 중이던 당시에 톨스토이는 민중의 삶과 인생의 의의, 그리고 선의 의미에대한 입장이 확고히 정리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 것처럼 소설가로서의 인생에서 비교적 초기(<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이후에 쓴 대작이다.)에 집필한 소설이기에 이러한 혼란스러움은 소설 전반의 전개 방식이나 주인공의 혼돈스러운 의식의 전개에서 곳곳에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어쨌든 <안나 카레니나>의 첫 부분은 행복한 가정보다는 불행한 가정에대한 암시를 전달하며 소설의 주인공 안나의 오빠인 스테판 아르카디이치 오블론스키가 프랑스인 가정교사와 바람이 나서 험악해진 분위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잠깐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을 조금 소개하자면, 소설이 시작하는 시점에서 34세로 나오는 스테판(애칭은 스티바)은 모스크바에 거주하며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 지역에서 영향력있는 사람으로 나온다. 스테판의 부인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애칭은 돌리, 여기서 알렉산드로브나middle name으로 보인다.)는 쉬체르바쓰키 공작 집안의 세 째 딸 중 큰 딸로 결혼 전 이름은 다리야 쉬체르바쓰카야 (애칭은 다쉐니카)이다. 둘 째딸은 나탈리 알렉산드로브나이며 나중에 외교관과 결혼하여 외국생활을 주로 하며 소설 전반에 큰 역할을 하지 않으며, 결혼 후 리보바 부인으로 불린다. 그리고 막내 딸 카테리나 쉬체르바쓰카야(애칭-키티, 레빈과 결혼 후 카테리나 알렉산드로브나 레비나 부인으로 불린다.)는 위에서 외도 사건으로 곤혹을 치르는 스테판의 처제인 셈이다. 소설의 시작 당시에는 18세의 앳된 숙녀로 등장하며, 가장 중요한 등장 인물인 레빈과 결혼하는 아가씨이다. 레빈은 원래의 이름이 콘스탄틴 드리트리치 레빈으로서 키티와 결혼하게 되는데, 키티의 큰 언니 돌리의 남편인 스테판과 오랜 친구이다(스테판은 레빈을 코스티야라는 애칭으로 부르곤 한다). 레빈은 대학시절 자연과학을 공부한 과학도로서 시골에서 살며 농사를 지으며 독서와 농업에 관한 저술작업도 하는 젊은이 이지만 사회적으로 아무런 경력이나 지위를 얻는데 무관심하다. 소설의 시작에서 32세의 청년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소설에는 복잡한 이름들이 등장한다. 내가 <안나 카레니나>를 느릿 느릿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단 러시아 이름들이 수도 없이 나오는 이 장편 소설에서 인물들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앞으로 조금씩 소개를 하며 기회가 되면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때가 있을 것이다. 

   레빈은 키티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으며 청혼을 하려고 기회를 엿보는 중이다. 하지만 시골에서 살던 레빈은 모스크바의 사교계에서도 영향력을 갖고있던 쉬체르바쓰키 공작 집안의 막내 딸 키티에게 다가가려고 하지만 번번이 자신감을 잃고 머뭇거리는 대목이 나온다.(1 53)

   상대방 부모의 눈으로 볼 때 자기는 아름다운 키티에게 도저히 어울리지 않으며 한참 처지는 배필이라는 것과, 키티 또한 그를 사랑할 수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에 있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서른두 살인 그와 동년배인 누구는 벌써 대령이나 시종무관이 되었는가 하면 누구는 교수, 누구는 은행장이나 철도청장이나 혹은 오블론스키처럼 관청장이 되어 있는데 그는 사회적으로 아무런 경력과 지위를 갖지 않은 사내였던 것이다. 그는 그저 (남의 눈에 비치는 자기의 모습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암소들을 치고 도요새를 쏘며 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는 지주, 말하자면 무능하고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소심하고 전도도 없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자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사람에 불과했다.

   이 대목은 키티에게 청혼을 주저하는 레빈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단행본이 출간된 해가 1878년이므로 무려 130년도 전에 레빈이라는 청년이 고만하던 것들을 나 자신도 고민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묘한 안도감(?)마저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공자의 말을 제자들이 정리한 <논어>에 등장하는 불혹이라는 나이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타인의 시선을 젊을 때처럼 의식은 하되 이전보다 타인의 시선이 중요하지 않게 되는 나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소설의 첫 문장처럼 고민의 내용은 각자가 다르겠지만 누구나가 다 고만고만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듯이 이런 보편성을 깨닫게되면 레빈의 고민을 더이상 하지 않게 되겠지만, 역시 레빈은 32세의 청년이었다. 32세라는 나이는 잘 나가는 동료와 친구가 한다리 건너 누구든 있을 법한 세상 살이에서 여전히 자신의 결핍이 더 크게 느껴지는 나이일 것이다. 그리고 특히나 타인에 대한 동질감이 안정감을 주고 큰 역할을 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공감이 많이 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레빈은 자연과학을 전공한사람 답게 당시에 상당히 논쟁적이었을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다만 소설을 통해 레빈의 사유가 전개하는 양상과 주석을 통해 톨스토이는 인생의 문제나 마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하는 유물론적인 사고 방식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극히 유물론적인 관점으로 보였을 진화론에 대해서도 레빈을 통해 잠깐 잠깐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점이 흥미롭다. 동물로서의 인류의 기원(1 56)에대한 언급은 나 스스로 대학시절 생태학 개론 수업을 들은 후 갖게된 인간관이기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나중에도 물론 생각해보겠지만, <안나 카레니나>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 명인 레빈이 자연과학을 전공했다는 설정 또한 톨스토이의 치밀한 의도가 엿보이는 것 같다. 이 소설이 물론 몇 젊은이의 연애사건을 다루기는 했지만, 1800년대 중 후반 사회 변혁이 태동하던 러시아의 사회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해 두어야할 것 같다. 따라서 연애사건을 중심으로 다양한 계급에 속한 사람들과 삶의 현실, 그리고 농노제해방 등의 사회상이 폭넓게 반영되고 있다는 점도 내가 감탄하게 되는 점이다. 특히 톨스토이는 신앙과 무신앙의 문제, 삶의 의미를 찾는 문제(삶과 죽음), 공적 신앙과 개인적 쾌락의 추구의 문제 등을 고민하는 대목을 등장 인물을 통해 표면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또 다른 작가의 일기장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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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권정생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9-10) 바람처럼 오셨다가 많은 가르침을 주고 가셨습니다

 이오덕 선생님

다녀가신 후, 별고 없으셨는지요?

바람처럼 오셨다가 제()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가셨습니다. 일평생 처음으로 마음 놓고 제 투정을 선생님 앞에서 지껄일 수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많이 읽었지만, 역시 만나 뵙고 난 다음, 더욱 그 진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우리 것을 가지신 분이라 한층 미더워집니다.

어저께는 안동 김성영 씨를 만나, 선생님 얘기를 입이 마르도록 나누었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고, 무엇이나 아껴 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행복이란, 외모로 판단되는 값싼 것이 아닐 겝니다. 선생님이 걱정하시는 마음이 제게 많이 통하고 있다고 당돌하나마 말해 봅니다. 착하기만 해서도 안 될 것이죠.

소리소리 지르며 통곡하고 싶은 흥분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가슴으로 자꾸만 모아들이이는 아픔이란, 선생님은 더 많이 아실 것입니다.

체험하지 않고, 겪어 보지 않고는 절대 모르는 설움을 무엇 때문에 외면하면서 설익은 재롱만으로 문학을 한다는 것부터,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안동에 오시는 기회가 있으시거든 종종 들러 주시기 바랍니다. 원고는 며칠 더 기다려 주세요. 그동안 사정으로 아직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추위에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뵈올 때까지 안녕히!

1973 1 30

권정생 드림

: 1973 1, 권정생 선생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나서 이오덕 선생이 직접 권정생 선생을 방문합니다. 당시 혼자 살던 권정생 선생은 서른일곱, 이오덕 선생은 마흔 아홉. 띠동갑(12년차) 두 남자는 이렇게 만난 이후, 권정생 선생이 보낸 편지 입니다. 이 두 분은 이후 30년 가까운 우정을 지속하게 됩니다. 한 평생 이런 인연을 만난다는 것은 참 행운이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특히 12살 나이 차이가 무색하게 이오덕 선생은 편지에서도 언제나 권정생 선생을 존대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권정생 선생의 작품을 출판하도록 여러 모로 배려를 하는 이오덕 선생의 인품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두 분이 나눴을 문학에 대한 얘기도 조금 엿볼 수 있는데, 자신의 체험을 통한 솔직한 문학, 솔직한 글쓰기에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글이 표피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면 개인의 체험이 녹아나야한다는 것. 글을 쓰는 과정은 결국 자신을 알아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어느 순간 부터 어렵다고 느낄 때, 내가 이전에 끄적거린 글들을 다시 보고 얼굴이 화끈거릴 때 무언가를 쓴다는 것이 너무나 큰 부담으로 다가오네요. 이럴 땐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소탈한 마음이 보이는 이러한 글들이 적힌 책을 가만히 넘겨보게 됩니다. 30년 가까운 남자들의 우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 흔적들을 보면서 다시금 길을 잃지 않으리라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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