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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클 텅스텐 - 올리버 색스의 과학 탐험기
올리버 색스 지음, 이은선 옮김 / 바다출판사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내가 아끼는 몇 안되는 책중에 한 권이 추가되었다. 1933년 7월 9일 출생하여, 작년(2015) 8월 30일 사망한 올리버 색스 박사가 65세가 되던 1990년대 말 자신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써내려나간 이 책, <엉클 텅스텐>은 화학과 물리학에 대한 간약한 역사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올리버 색스 박사를 형성하게한 요소들이었다. 의사 부모님을 둔 지식인 가족의 자녀로서 색스 박사는 공학도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식물학자와도 같은 어머니와 피아노 및 음악에 대한 큰 역할을 한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띈다. 색스 박사가 14살 즈음 자신의 나이 또래인 소녀의 죽은 시체를 해부하도록 한 색스 박사의 어머니의 일화를 보면 너무 놀라 할말을 잃게하였다. 어느 부모가 자신의 아이에게 또래 아이의 시체를 해부하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겠는가? 아무튼 이 책은 첫 장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색스 박사가 화학에 대한 열정을 지속할 수 있었던 요인은 형들 뿐 아니라 `텅스텐 삼촌`이라고 부르는 `데이브 삼촌`의 역할이 매우 컸다. 데이브 삼촌은 텅스텐 필라멘트를 이용한 백열 전구 생산에 집중하였고, 조명관련 공장에서 동업을 했던 `에이브` 삼촌은 냉열에 관한 연구를 지속했는데, 이들의 과학에 대한 존경과 열정은 어린 올리버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던 모양이다. 광물학, 화학, 물리학에 대한 강한 지적 호기심과 끊임없는 탐구정신은 올리버 색스의 평생 지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엉클 텅스텐>이 저자가 65세 때 쓴 회고록에 가깝다면, 82세로 사망하기 전에 마무리 한 마지막 자서전 <온더무브>는 그의 성인기에 대한 회고가 주를 이룬다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두 책이 주목하는 범위가 다르다보니(물론 근 20년의 시간 차도 있다), <온더무브>만을 봤을 때 몰랐던 올리버 색스의 어린 시절의 모습들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단순히 `공부만 잘 한` 신경과 위사가 아니라 화학, 물리학. 지질학 등에 깊은 이해와 지식을 갖춘 전방위적인 지식인이었다는 점이 놀랍기만 했다.

이 책은 198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로알드 호프만(Roald Hoffmann)에게 바친다라고 되어 있다. 이 책의 시작은 아마도 저자가 헌사로 밝힌 호프만의 선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인다. 특히 신경과 의사로 거의 반평생을 지내오면서 잊고 있던 화학에 대한 열정과 개인적인 추억은 호프만의 선물(주기율표와 텅스텐 막대)이 불러들인 마술 때문이었을 것이다. 호프만의 선물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처럼 올리버 색스의 기억을 불러들이고, 기억을 붙들어두는 차와 마들렌 과자와도 같았다. 저자가 남긴 이 후기의 추억을 불러오는 장면은 다시봐도 멋진 부분이다.

이 책을 보고서야 나는 화학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주기율표의 원소 하나 하나에 깃든 수많은 과학자들의 숨은 노력과 인내, 그리고 성찰의 시간들을 좀더 이해할 수 있었다. 나아가 양자론의 등장으로 보다 분명하고 명확한 자연의 체계로 보강된 주기율표의 역사를 이 책을 통해서 처음 깨닫게 되었다. 이 것은 내가 과학분야의 책읽기를 게을리한 나의 무지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좀더 일찍 과학분야 책을 읽었다고 하더라도 이처럼 재미있고 실감나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처럼 명료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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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과정을 겪은 이후, 우리 사회의 전과 후는 더이상 같지 않다고 한다.

스스로를 소진해나가도록 만든 업그레이된 자본구조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개발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부족하니 반성하고, 좀더 나의 능력을 키우자'는 후기 새마을 운동 전사들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자기 계발 열풍이 주춤해질 무렵,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분위기가 휩쓸더니, 기업의 오너들이 인문학 코스프레를 하고, 다시 우리들은 이들이 던지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열광한다. 인문학 열풍의 시대에 대학의 인문학과는 사라져가고, 경영학과만 거대한 괴물처럼 규모가 커지고 있다. 아이러니하다.

 

가만히 보면 많은 사회 지도층이 말하는 인문학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인문학을 말하는 듯하다. 회사를 유지하고, 사람들을 관리하고, 최고의 효율을 얻기위한 자기 주도형 인문학. 한병철 교수가 그의 저서에 언급한 바처럼 각자 도생의 자본 구조에서 스스로를 무한 착취하고 스스로 소진하도록 부추긴다.  

 

오늘 온 스팸메일 중에 다음과 같은 홍보 문구가 있다.

***와 함께 Peter Drucker Society(PDS) 함께, 
AI
창시자 Ron Fry 교수에게 긍정혁명 구축 방법론을

직접 사사받을 있는 최고의 교육...."

 

우리가 접하게되는 권위있는 이론, 경영법 등은 모두 서양인들이 공부한 것을 그럴 듯하게 포장해놓은 것들이 많은 것 같다. 여전히 경영이론은 우리를 무제한으로 '긍정'하게 만들고, 소진지킬 방법과 동기부여를 제안한다. 우리의 것, 전통과 단절된(보다 정확히는 우리 스스로 우리를 소외시킨 것) 상황에서 우리는 빈약한 정신을 채울 대상을 또 다시 외부에서 받아들인다. 다람쥐 쳇바퀴도는 형상이다. 무한반복이 계속된다.

 

서양은 과거 수백년 전의 글도 후손에게 잘 전달이 되고 연속성이 있으나, 어쩌면 우리는 조상들의 값진 사상들이 우리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 무언인지 반문해본다. '한글 전용'이 옳은가하는 문제는 또 다른 진지한 주제가 될 수 있겠지만, 한글 전용이 '과거의 부정'을 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될 것 같다. 후손이 조상의 사상과 기록을 받아들이는데 제약이 있다면 아마 우리는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보수적인 견해를 갖고있다. 전통은 좋고 나쁨의 판단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지킬만한 것들은 분명히 많다. 조상의 지혜는 하루아침에 쌓인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 나라 사람들 중 100년 전 문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문맹률은 거의 제로에 가깞지만, 그리고 모두가 영어에 목을 매달지만, 100년 전 문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가될 것인가.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문맹률은 99%가 아닐까.

 

평생 아이들을 생각하셨던 이오덕 선생의 <이오덕의 말꽃 모음>을 읽었다. 선생의 많은 글 중 일부분을 모은 책이라 전반적인 글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 아쉽긴 하지만, 상당부분 공감을 하게된다. 물론 한글 전용에 대한 생각은 선생과 다르긴 하지만. 우연히 보게된 스팸 광고 문구 하나를 보고 또 이런 저런 잡생각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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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뭐랄까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로는 ‘필사’문화가 번성했던 해가 아닐까 한다. 사실 책을 그다지 읽지 않은 나는 부끄럽지만, '필사' 라는 단어를 올해 처음 듣게되었다. 반면 신문에는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 10권을 필사한 80대 할머니가 기사화되어 나오기도 했고, 거리를 지나다보면 성경 필사반 모집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새봄 출판사에서 한국 단편을 필사하는 책이 나와 인기를 많이 확보한 모양이다. 나아가 <마음 필사>, <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 같은 필사책도 나오기도 하고 명시를 필사하며 음미하는 책도 있다. 그런가하면 천병희 교수가 본인이 번역한 고전 중 가려 뽑은 <필사 다이어리>시리즈도 있지 않은가. 문화센터에서는 필사 수업이 생겨나기도하고 아뭏든 올해는 필사가 눈에 띄게 붐을 이룬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문득 기존의 작가들, 그리고 작가 지망생들이 많이 해왔던 필사가 이렇게 폭넓게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우선 글쓰기에대한 관심의 증가가 그 한 이유일 것이다. 글쓰기 책은 유독 2000년대 들어 눈에 띄게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출판되는 책은 어느 정도의 주기가 있는 모양이다. 혹자는 글쓰기에 대한 지대한 관심, 예컨대 글쓰기 책이 잘 팔리고, 대학에서 글쓰기 강좌가 붐을 이루는 이유를 경제난과 취업난에 따른 결과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대학에서 글쓰기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의 주된 목적이 자기소개서를 쓸 때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이도 있었다. 그럴듯한 이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서평 쓰기>와 같은 책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책읽기글쓰기 혹은 서평쓰기에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지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나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시행착오라면 시행착오도 많을 수록 좋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책읽기글쓰기를 시도해보고, 좌절해보고, 나름대로 다시 도전해보고 하는 과정에서 각자는 나름의 길을 언젠가는 발견해나가리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얄팍한 목적의 글쓰기 수업이 붐을 이룬다고 해도, 없는 것보단 낫다는 입장이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효과를 얻거나 계획된 길을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글쓰기자체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일이다. 독서에대한 중요성의 인식 뿐 아니라, 시험제도로서의 논술이 갖는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겠다. 개인적으로는 초중고 및 대학생들의 외국 유학생들이 많아짐에 따른 영향도 있다고 생각한다. 외국, 예컨대 미국에 일찍 유학을 나간 수많은 학생들이 새로운 방식의 수업방식에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글쓰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에서 이 유학생들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취직이나 연봉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통계를 수도 없이 접했을 것이다. 글을 쓸줄 안다는 것의 힘에대해 그리고 중요성에대해 보다 폭넓은 인식이 생겨난 부분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분위기는 블로그와 같은 플랫폼을 통해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확대된 것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울러 인문학 열풍을 타고 독서 모임의 활성화가 책읽기글쓰기에대한 관심이 더욱 증가된 원인이기도 하다. 사사키 아타루가 언급했듯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유신 말기 1978년 부산에서 양서협동조합이라는 독서 모임이 생겨났다. 이 모임에서 나온 인물들이 카톨릭 사제이자 활동가로서 중앙정보부에 48회 이상 체포되면서도 독서모임을 이끌었던 송기인 신부를 비롯하여, 무명의 노동 변호사였던(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노무현도 있지 않은가. 아울러 이 모임은 여러 명의 국회의원도 배출해내어 책을 읽는다는 것의 위험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결국 사사키 아타루가 언급한 것처럼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활동인 것이다. 책을 읽고야 말았다는 것은 책을 읽은 후 독자는 책을 읽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책을 읽기 전과 다를 바가 없다면 <논어>에 나온 것처럼 책을 읽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올해 책읽기글쓰기에대한 관심과 더불어 필사와 관련한 출판 서적 및 관심이 증가한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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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올해 처음으로 시집을 사보기도 하고 문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나 문학 밖에서 살아왔던지, ‘문학동네라는 출판사도 올해 처음 알게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 가까이 참으로 무식하게 살아온 같다. 그동안의 반성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이 사실인지는 몰라도, 아뭏든 올해 나는 문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에겐 변화다.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손을>에서 말한대로, ‘책을 읽는 다는 ’, 그리고 문학 읽는다는 (물론 아타루는 문학을 음악, 미술 등의 예술과 , , 철을 아우르는 폭넓은 의미에서 사용했다.) 하나의 혁명이라고 말했듯이, 나에게는 혁명 시작이었다( 믿고싶다). 물론 이제 책을 열심히 읽자라고 마음먹은지 1년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금방 그렇게 바뀔리는 없을 것이다. 더불어 글못쓰기로 말하자면 해도해도 너무한 이공학도 아니었나.

 그동안 소설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필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알게되었는데, 문체를 나름 주목해가면서 읽어가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읽으면서 간결하고 남성적인 힘이 느껴지는 문장이 어떤 것인가 조금은 알게되었다. 아울러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읽으면서 김훈 작가의 문체가 나에게 주는 느낌과 헤밍웨이의 문제가 주는 느낌이 비슷한 부분이 일면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하나의 문장이라도, 아주 간결한 주어-동사 형태의 건조한 문장이 이어지는 방식을 보여주는 헤밍웨이의 문체는 하드보일드한 문제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게 해주었다. 이렇게 문체까지 관심을 가지면서 읽게 되니, 빨리 읽지는 못해도 나름 색다른 재미를 느끼면서 읽게되었다.  나아가 올해는 국내의 출중한 여러 젊은 작가를 처음 알게되었는데, 김연수, 김영하, 김애란, 박민규 등의 작가들이었다(사실 아직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보진 못했다.). 최근에는 김영하 작가의 글에 재미를 느끼게 되어 조금씩 읽고 있다.

  김훈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김영하 작가의 문체는 어떨까 궁금했다. 그래서 읽어보게 소설이 <살인자의 기억법>이었다. ‘짦은장편소설이었지만, 당황스럽기도하고 문학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흥미와 혼란을 함께 소설이었다. 이런 소설은 어떻게 읽어야할까. 아직까지는 모르겠다. 잔인한 살인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조금씩 오싹오싹한 느낌도 주는 것이, 조이스 캐럴 오츠의 <이블 아이> 나오는 단편소설 같은 느낌도 주었다. 장면을 이끌어가는 1인칭의 화자는 마치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처럼 의식의 흐름들을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살인자의 입장에서 일관되고 치밀한 의식의 흐름들을 모아둔 기록의 형태가 아니다. 그보다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도 파악이 안되는 나약한 인간의 혼란스러운 기억을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후반부에 드러나는 반전에 놀라기도 하고 감탄하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 기억이라는 것은 우리를 인간답게 해주는 중요한 기능이기도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며, ‘기억 통해 지식의 축적과 전수 그리고 사유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억이라는 요소가 빠진 알츠하이머 환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않고 기억해내기위해 분투하지만 결국 자신의 병에 굴복하게 된다. 의식의 흐름이라고 생각했던 화자의 인식 체계가 뒷부분에가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이 진행되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경계의 즈음 발견되는 여자의 부위는 이따금 나를 섬뜩하게 만들며 강한 인상을 남기고있다.

  김영하 작가의 문장 특성을 소설 하나로 파악하기는 힘들겠지만, 문장이 군더더기없이 깔끔하고 간결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김훈 작가의 문체처럼 길고 짧은 문장의 호흡을 의식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했다. 속도감있게 읽혀지는 이유는 아마도 김영하 작가의 간결한 문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마무리에서 보여지는 극도로 혼란한 상태는 소설에서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과연 무엇을 진실이라고 믿을 것인지에대한 막연함때문이 아닐까. 마치 알츠하이머 환자의 머리 속에 들어갔다 나온 같은 김영하 작가의 고민과 연구의 흔적을 느껴본다. 소설을 읽고 당황스러운 막연함과 혼란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나를 김영하 작가가 본다면 성공이군!’하면서 좋아하실지 모르겠다. 나에겐 짧지만 모호하고 쉽지않은 소설이지만, 간결하고 깔끔한 문체 그리고 알츠하이머에 걸린 작중 화자의 상황과 성격을 리얼하게 묘사하는 핍진성 강한 인상을 받았다.

(7면)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148면)

"미지근한 물속을 둥둥 부유하고 있다. 고요하고 안온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공(空) 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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