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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노래 - 가토 슈이치 자서전
가토 슈이치 지음, 이목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일러두기: 리뷰는 일반적으로 객관성을 지향하는 서평쓰기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좀더 주관적인 독후감에 가깝다. 책을 소개하고 판매를 고려한 서평쓰기보다는 책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책과 나와의 밀당과정을 써보고 싶었다. 글의 구성은 다소 느슨한데, 이유는(사실은 졸렬한 글쓰에대한 나의 변명) 책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 하나의 생각이 들면 그걸 붙들고 남겨둔 메모를 그러모았기 때문이다.

 

 

    <양의 노래> 받자마자 명절 연휴 사흘 뜨겁게 읽어 나갔다. 대부분의 원고는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리버럴리스트였던 가토 슈이치가 1960년대 후반, 저자가 40대일 쓰여졌다. 저자의 어린시절부터 중년까지 (1920년대 -1960년대) 대부분을 이루고, 나머지 30 정도(1990년대 까지) 간략하게 그동안의 경과보고를 포함하고있는 자서전이다. 가토 슈이치는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여 책을 좋아하게되었다고 한다. 문학소년이 조숙한 아이는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었고, 아울러 여러 문인, 예술인들과 교류하며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성장하였다. <양의 노래> 저자가 독자적인 눈으로 세상의 부조리와 거짓에 어떻게 대면하고, 이와 길항하여 저자의 지적 발견과 사상적 성숙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에대해 담담하게 기술하고있다. 특히 태평양 전쟁 전후, 수많은 일본의 예술인, 문인,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20세기 전반 일본 지식인들의 세계를 자발적 아웃사이더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양의 노래> 마치 미국 현대사의 장면들을 개인의 이야기와 곁들여 집약해놓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 보는 했다. 개인이 고국 일본 아니라 세계 역사의 소용돌이 복판에서,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목격하고, 흐름을 몸으로 체험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에이르러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 미공군의 도쿄 공습 당시 저자는 도쿄에 있었으며, 하루 아침에 사라진 도시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의사로서 방사선에 피폭된 환자들의 혈액을 직접 관찰하고, 다친 환자들을 치료하는 활동도 하였다. 한편, 1968 8 체코의 프라하의 당시 소련의 전차가 체코로 침범해오기 직전 가토 슈이치는 불과 수일 전에 프라하에 있었다. 자서전을 쓰던 60년대에 저자는 캐나다 밴쿠버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당시에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기도 하였다.

   가토 슈이치는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건들에 대해, 근저에까지 내려가 사건들의 의미를 철저히 따져 묻고,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이를 해석하려는 노력을 평생 지속했다. 이는 저자 자신이 어느 민족, 국가에 속하는  특수성의 제약을 뛰어 넘어 모든 가치 앞에 인간이라는 기준을 두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가토 슈이치는 평생을 인간의 가치 회복을 위해 목소리를 내었던 지식인었다고 있겠다.

   

가토 슈이치의 어린 시절 가정환경

   가토 슈이치의 어린시절과 가정환경을 살펴보면 아웃사이더 지식인 형성하는 여러 요인들을 발견할 있다. 가토 슈이치의 부모님들은 부모로서의 권위를 자녀들에게 절대 강요하지 않았으며, 특히 아버지는 의사로서 바쁘게 일만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책을 읽고, 피리를 불줄 알았으며 아들과 친밀한 대화를 아는 가장이었다. 작은 부정에도 민감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품성은 가정교육, 가정의 분위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미 어린 시절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여긴 부분은 가토 슈이치에게 어린 시절 최초의 영웅 일본 문인이 아니라 찰스 다윈이라고 밝힌 대목이었다. 찰스 다윈의 저작에대해 가토 슈이치는 “...... 그것은 거의 시적인 감동이었고…(중략)…어린 나는 속에서 자연과학을 배운게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즐거움을 알았던 .”이라고 회상하고 있다. 책읽기 지식을 얻는 활동보다도 사유를 자극하는즐거움을 주는 활동이었던 모양이다.

   한편 태평양 전쟁 이전, 저자는 수재들이 모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다양한 문학책 읽고, 연극과 음악에 접하며, 격렬하고 집요하게 토론하고 질문하는 지적,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했음을 있다. 대학입시에만 올인하여 소진되어가는 요즈음 고등학생들의 학교 생활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조숙한 모습에 놀랐다.

   학창시절에 전통 일본 문학 세계 문학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을 이해하는 눈을 키울 있었던 것도 어떤 면에서는 제국주의 일본이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기위해 마련한 번역환경 때문이기도 하다. 부분에 있어서는 장단이 있겠고, 논쟁의 여지가 있을 있겠으나, 100년전에 이미 존재한 엄청난 번역 문학 기억해내는 부분에서는 우리 사회와 격차를 느낄 있었다.

 

가토 슈이치에게 미친 예술의 영향_연극과 음악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어려서부터 문학책을 즐겨읽었던 가토 슈이치는 더욱 폭넓은 예술 장르에 접하게 된다. 연극과 음악, 미술이 대표적인 예인데, 다양한 예술과의 접촉은 가토 슈이치에게 평생동안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으며 이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저자는 전통 문학 아니라 일본의 전통 연극을 통해 보편적인 예술로서의 연극 발견하는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나는 전쟁 기간에 스이바도바시의 노가쿠당에서 발견했던 것이 아니라 연극이라는 단어의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했던 것이다. (중략)……배우의 육성이 과연 얼마나 아름다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작은 동작 하나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야기 있는가 하는 것이다. (중략)……실제로 나는 거의 세계 극장에서 일류 연극을 보게 되었지만, 그것은 내가 먼저 우메카와 만자부로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곤고 이와오가 추는 춤을 보았기 때문이다. 결코 반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양문화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한국인의 눈에는 우리 문화가 보잘것 없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이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의 문화와 바탕을 이루는 태도 혹은 정신에대해 감탄하고 애정을 가질 기회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정신적인 단절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곤한다. 우리의 문화에대한 애정마져 갖지 못한 , ‘타자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여기에 나에 대한 존중, 것에대한 사랑이 제대로 싹틀 있을까? 나는 우리의 에대한 지식을 배우는 이전에 우리의 것에 대한 애정 갖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연극에서 나아가 가토 슈이치는 피아노 음악을 통해 예술의 세계를 새롭게 발견했다. 특히 전통적인 일본의 가극과 연극을 아는 상태에서 세계에 나갔을 예술에 대한 눈을 더욱 키우고, 시야를 넓히는 경험을 얘기한다. 이러한 경험 이후 다시 고국 일본의 예술을 접하며 성숙해진 눈으로 가치를 새롭게 발견했다. 예술의 보편성을 이해하고 전통 예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했다고 있겠다. 저자가 유럽으로 갔을 서양에서발견한 예술의 형식은 연극 뿐이 아니니라 회화, 조각 건축의 세계였다. 결국 가토 슈이치에게 있어 문학, 연극, 음악, 미술 등의 예술은 평생의 기반이 만큼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예술은 마치 몸의 일부 처럼, 때론 세계를 해석하는 눈으로서 가토 슈이치와 평생 함께했다고 있다.

 

주변인으로서 삶을 선택하다

   의사로서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가토 슈이치는 중년의 나이에 의학을 그만두고 문필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 자발적 아웃사이더로서 삶을 선택한 결정의 이유가 나에겐 놀랍기만하다.

   병원을 오가며 밤새워 글을 쓰면서 (그림을 보고 글을 읽고 시간을 들이는)그런 짬을 낼 수는 없다. 나는 의학 연구실에서 생활해왔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런 이유로 연구실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략)……의학 연구는 전문화의 극단을 달리던 학문이다. 일에 몰두하면서 1년을 보낸 뒤, 나는 종종 그 1년을 마치 없었던 시간처럼 느꼈다. 1년 동안 오고 간 계절과, 주변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 전부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연구실 바깥의 나는 산사람이 아니었다. (중략)……나는 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는 또 주변 사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혈액학 전문가에서 문학 전문가로 변신한 게 아니다. 전문 영역을 바꾼 것이 아니라 전문화를 폐기한 것이다. 그리고 내심 비전문화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뜻을 세우고 있었다.

   이는 일본의 또 다른 지식인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을 다니다가 갑자기 그만둔 이유와도 비슷하다. 다카시는 직장생활을 바쁘게 하면서 읽지 않고 쌓여가는 책을 두고볼 수 없었노라 고백했다. 다카시 역시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삶이 아니라 제너럴리스트로서의 삶을 선택하겠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가토 슈이치의 포부 또한 다치바나 다카시와 유사하다.

  

이방인으로서의 시선_정신적 자유의 추구

   파리를 산책하고 사유하기를 좋아했던 발터 벤야민처럼 산책하는 이방인으로서 가토 슈이치의 면모도 흥미롭다.

   “’일본관시절, 나는 파리 시가를 즐겨 걸어다녔다. 그곳엔 내가 그때까지 살았던 공간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공간이 있었고, 공간의 질서감은 아무리 바라봐도 싫증나지 않았다. 아무 용무도 없으면서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거리를 거닐며 돌아다닌걸까. 지금 회상해봐도 그 이유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중략)..어쩌면 나는 그곳에서 외재화外在化되었다. 다시 말하면 감각적으로 대상화된 한 문화의 핵심을 보고 있던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중략)……그러나 누구에게나 공통되었던 것은 매사에 도쿄와 파리를 비교해 생각하는 습관이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집단이 보여줄 수 있는 부조리함과 폭력성에 저항감을 가졌던 가토 슈이치의 시선은 자신이 속한 사회속에서 주변인 혹은 경계인, 여행자의 시선으로 옮겨가고 있다. 노년이 된 가토 슈이치는 자신을 모습을 회고하며 주변인으로서의 삶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또 어떤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은 나는, 개인으로서 한 시민으로서 늘 일본 사회의 주변에 머물렀다. 우연과 주변사정이 절로 나를 그렇게 만든 측면도 확실히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의식적으로 그런 위치를 선택했던 측면도 있다. (중략)……또 오랜 외국생활이 거의 필연적으로 일본에서의 나를 사회적 영향력의 중심에서 멀어지게끔 했던 것도 분명하다. 사회의 주변에 살면 영향력을 잃는다. 그러나 정신의 자유를 최대한 누릴 수 있다. 소용돌이 한복판에 선 사람은 전체 상황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조망하기가 곤란할 테지만, 주변이라는 위치는 전체 상황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이해하는 목적에서는 무척 용이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주어진 환경을 바꾸기보다는 먼저 그 환경을 이해하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정신의 자유를 최대한 누리길 원했다는 점은 물질적 부가 넘처나는 대신 개개인이 누릴 수 있는 사색적 삶을 박탈당한 우리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가토 슈이치는 이미 반세기도 전에 이렇게 바쁘고 소진되는 삶에 저항했다.

   태평양 전쟁이 그 절정으로 달려갈 때 일본의 언론과 정부는 거짓 선전과 과장된 구호를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가토 슈이치는 주변인의 시선으로 이러한 사회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예컨대 일본인들이 서양의 양식과 적성국의 언어를 읽고 공부하는 것에 대한 반감기류를 들 수 있다. 태평양 전쟁 이전에 양복을 입고 신세대임을 과시하듯 활보하던 거리가 국민복으로 획일화되어갔기 때문이다.

   또한 태평양 전쟁 직후 새로운 사회 국면을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에대한 기록은 우리가 겪은 한국 전쟁과 이후의 사회상의 그것과도 너무나 유사한 같다.

   수완있는 여자들은 점령군 장교에게 줄을 대서 ‘PX’에서 옷을 입고 시영 승합버스라도 타고 다녔는데, 그들의 얼굴은 의기양양 절정의 기쁨으로 빛나는 보였다. 전화로 폐허가된 도쿄에서는 그럴싸한 치장대신 진실이 있었고, 일부러 만들어낸 겉치례 대신 본바탕 그대로인 인간의 욕망이 식욕, 물욕, 성욕까지 고스란히 거리낌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무시무시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울러 우리가 산책하는 이방인의 눈으로 여행을 한다면, 관광객이 아닌 새로운 눈으로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고 사유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토 슈이치는 여행자란 그 지역 사람들과 다른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풍경에서 다른 의미를 읽어내는 사람이라고 했다. 일상의 습관 체계로부터 벗어난 여행을 통해 나는 내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여행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을 낯설게 보는 기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따라서 내가 속한 사회, 체제의 내부와 외부에서 나를 바라보고 고찰해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예술 및 역사에대한 이해가 이 작업의 틀이 되어 줄수 있다고 믿는다.

   가토 슈이치는 여행이 줄 수있는 혜택으로 주어진 조건의 한계를 벗어나 선택에 의해 정신적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왜 외국의 도시를 찾았던 걸까? 아마도 그것은 환경에 대한 호기심이 유달리 강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태어난 해는 1919년이지만, 만일 1819년에 태어났더라면 어떤 환경을 경험했을까? 이 물음은 역사에 대한 회고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도쿄였는데, 만일 그곳이 베이징이나 멕시코시티였더라면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이 물음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유혹이다. 인생은 우연으로 가득하다. 우연으로부터 받은 내적 조건은 DNA이고 외적조건-그것은 다시 내면화되어 한 인간의 형성을 결정할 것이다-은 특히 태어난 시간과 공간이다. 그런 조건의 특수성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며 초월할 수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적 수준에서 혹은 역사적 지식을 통해서 또는 환경의 선택을 통해서 조건의 특수성에 도전하는 것은 정신적 자유의 증언이리라.

   앞서 언급했듯이 정신적 자유를 최대한 누리기 위해 의사의 신분을 폐기하고 문필가가 되기로한 저자에게 여행은 마음껏 숨실 수 있는 신선한 공기'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만약 우리에게 내일이 주어지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당신에게 무엇이 보이고 거리의 풍경은 어떻게 보이겠는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미군의 도쿄 공습이 엄습해오는 분위기에서 가토 슈이치는 도쿄의 평온한 일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경험을 기록한다.

   도쿄는 아직 폐허가 아니었지만, 나는 눈 앞에 있는 거의 모든 것에서 도쿄가 폭격으로 불탄 뒤의 황량한 폐허로 변해버린 환상을 겹처서 본 적이 있다.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것이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과일 가게 앞에 쌓인 과일, 겨울 오후의 햇살, 산시로 연못 부근의 고요한 양지, 석양의 해, 혼고 거리의 책방과 카폐 창에 켜지기 시작한 불빛, 헌책방 안쪽에서 화로를 끼고 장부를 들여다 보던 가게 주인 등의 모습은 연합군의 공습 직전 가토 슈이치가 새롭게 바라본 일상의 모습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채 주변의 일상이 조만간 폐허가 될 것을 예감하면서도 그 순간 아름다움을 보았던 지식인의 심정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가토 슈이치의 이러한 감수성과 여행자로서의 시선 뿐아니라 세계를 여행하며 만나게 된 지역의 지식인들과 대화 및 토론을 통해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믿음과 관점이 더욱 성숙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안과 밖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히 보여준다. 이는 저자가 학창시절부터 부지런히 교양을 쌓고 수많은 문인 및 예술인을 만나 영향을 주고 받으며 스스로 세계를 바라보고 의문을 던지는 일을 끊임없이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한다.

 

하워드 진과의 대비

   미군의 도쿄 공습 당시 지상에서 역사를 목격하던 젊은이의 눈에 비친 대목을 읽으며 나는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의 한 명이었던 하워드 진을 떠올렸다. 하워드 진은 노엄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양심을 대변했던 지식인으로1922 (가토 슈이치는 1919년 생) 뉴욕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청소년시절 조선소에서 일하면서 <자본론>을 읽고 현실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던 하워드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군 폭격기 조종사로 임무를 수행했다. 하워드 진은 당시 폭격 임무를 수행하며 폭탄이 투하되는 목표 지점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고 제대 후 당시의 경험을 성찰하게 되었다. 폭격으로 인해 희생되었을 사람들, 부상자들과 이들의 고통에대해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당시 미국의 적성국인 일본의 국민이었던 가토 슈이치, 그는 엄청난 양의 폭탄이 도시에 투하될 때 도쿄의 한 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은 하늘에서 죽음을 몰고오고, 다른 한 사람은 땅에서 죽음에 직면한 상황. 나는 훗날 공통적으로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위해 발언하고 활동했던 이 두 지식인이 적으로서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던 역사의 아이러니를 떠올렸다.

 

타협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가치 & 반전주의자로서의 면모

   가토 슈이치는 인간에게서 선과 악을 결정하지 않았다. 전차 안에서 마주하던 사람좋아보이는 아버지, 남편은 어제까지 중국 대륙에서 사람을 죽이고 있던 존재인지 모른다고 독백한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판정하는 일에 의문을 제기했다.

   많은 인간을 악마로도 만들고 천사로도 만드는 사회 전체, 그 역사와 구조를 고찰하는 편이 더 온당할 거라는 판단에 도달했던 것 같다. 그것은 즉흥적으로 떠올린 생각이 아니었다. 당시 내 생각은 이후 내 사고방식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어떤 인간도 악마가 아니기에 나는 사형에 반대하며, 전쟁은 어떤 인간이라도 악마로 만들기에 나는 전쟁에 반대한다고.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인식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치 문제다. 매일 폭격 아래 아이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논의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뜻이다.

   <분노하라> 저자 스테판 에셀은 부조리함에 대해 용인하거나 참지 말고 인간으로서의 분노 표출해내라 촉구했다. 우리는 부당한 일에 분노하기 잊고, ‘짜증 쌓여가는 현대 사회 속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반문해본다. 가토 슈이치도 옳지 않다고 믿는 일에 분노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니까 알고 싶지 않다 인간과 그래도 알고 싶다 인간이 있을 것이다. 나에겐 전자가 틀렸다는 논리는 없다. 다만 나는 자신이 후자에 속한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다. … (중략) 25만명의 어린아이…(중략) 나에겐 멀리 있는 아이들의 죽음이 마음에 걸렸었다. 전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 나는 일에 분노하고 일로 흥분한다…”

   가토 슈이치가 느꼈을 분노와 흥분에는 인간의 존엄을 짓밟을 있는 모든 사항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고 하는 바램이 들어있었다. 나아가 가토 슈이치는 그래도 알아야 한다라고 나에게 호소하고 있다. 평범한 시민으로서 우리 모두가 생업을 뒷전으로 하고 시위의 현장에 나갈 수는 없다. 하지만 과거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혹은 나와 동떨어진 곳일지라도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에 관심을 가져야하며 우리가 인간임을 잊지 않기 위해 스스로 판단하고 문제를 붙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있다.

   현재 일본 후쿠시마 지역의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의 우경화, 강경파 득세와 반한, 반중 분위기의 역전 현상을 이해하는데 가지 실마리를 주고 있다. 전쟁 아니라 자연재해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들이 있은 , 정부 권력자 그리고 그에 편승한 미디어들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억압하고 의문을 던질 기회를 노골적으로 박탈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알게 모르게 용인하고 결과적으로 부추기는 것은 결국 우리의 무관심 내지는 알고 싶지 않다라고 회피하는 마음가짐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래도 알려고 노력해야한다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재일 조선인으로서 일본의 대학교수가 된 서경식 교수는 최근의 저서 <내 서재 속 고전>에서 바로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 <양의 노래>를 본인의 고전으로 선택했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가치는 가토 슈이치가 확신하고 있었던 것만큼 부동의 것일까. 아우슈비츠 이후, 그리고 지금도 매일매일 그 가치는 근저에서부터 위협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 분명해지지 않았는가. 가토 슈이치의 저서를 내가 고전의 반열에 올린 것은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무릇 고전이라함은 외부에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 속에서 어느 순간 다가와 책이라는 도끼로 머리를 치듯 그렇게 충격을 주는 책이 아닐까. 아울러 시간이 지나 다시금 돌아가게 만드는 그런 책, 그 때마다 선명한 깨달음과 새로운 인식을 줄 수 있는 책이 고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제 설레는 마음으로 내 고전의 세계에 첫 발을 내 딛은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책을 덮으며 머리 속에 떠오르는 문구가 있는데, 가토 슈이치가 규수 탄광에서 광부들과 함께 갱도 안으로 들어가본 이후 남긴 말이라고 한다. “방관자로서의 판단은 항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방관자이기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의 지성인이 지금 삶에서 좀더 능동적인 삶의 주체로서 깨어있으라고 당부하고 있었다.

 

(유럽의) `중세`는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것만큼은 도쿄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중략)... 드디어 나는 중세 이래로 프랑스 문화가 면면이 이어져 오늘에 도달한 사정은, 일본 문화가 가마쿠라 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는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348면)

나는 일본어와 프랑스어를 섞어가면서, 이를 표현 전체가 시사하는 바 일종의 심리적 상태를 나 스스로 형용하려 했다. 일상생활의 습관 체계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나는 내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내 감정생활의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과연 나는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희생하며 또 무엇을 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걸까? (386면)

인종 우열 논쟁의 거의 모든 것은, 요컨대 논자의 지식 부족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불행은, 지식의 부족이 종종 역사를 움직여왔다는 사실이다. (414면)

도쿄에서 의사 일을 시작한다면 너무 바쁜 나머지 자아를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자아를 망각하지 않고 다시 자아를 발견하는 것, 그 발견을 위해 잠시 나 자신과 만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43면)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인식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치 문제다. 매일 폭격 아래 아이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논의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뜻이다. (516면)

매일 푸른 하늘 아래서 살아가는 우리가 그들의 입장을 거부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때 나는 그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한, 그들의 입장은 모두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방관자로서의 판단은 항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방관자이기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된다....(44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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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 교수는 노암 촘스키 교수와 함께 미국의 양대 좌파적 지식인으로 알려져있으나 국내에서는 촘스키 교수만큼 많이 알려져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워드 진 교수는 인권운동에 평생을 바친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애써 외면하는 주제 중의 하나인 백인들에 의한 `아메리카 인디언의 학살`을 첫 장부터 언급하고 있는 이 책은 하워드 진 교수의 대표적인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고 세상을 보는 관점을 새롭게 했다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아니지만, 우리를 감싸는 경계 밖에서 `인간`에대한 보편적인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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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데이비드 케일리 외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 물레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내맘대로 독후감)

 

이반 일리치는 세상에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이반 일리치는 정규학교를 거의 거치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고 성장하였으며, 카톨릭교회의 신부이자 사상가가 되었다. 독립적인 한 개인이자 주체로서 이반 일리치는 평생을 통해 다양한 영역의 사회 현상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대한 대안과 해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소책자’운동을 통해 사람들이 이 문제를 논의의 주제로 삼기를 원했다.

 이반 일리치는 사회의 커다란 담론인 교육, 의료화와 건강, 운송 및 교통등의 수단을 도구로 규정하고 이를 두 가지 분수령의 관점에서 우리 사회에 주는 변화를 파악하였다. 우선 초기 분수령에 이르면 도구는 우리가 기대했던 생산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번째 분수령에 이르게되면 도구는 반()생산적이 되어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된다는 것이다. 이는 도구가 만들어진 의도와는 멀어지는 사람이 장점으로서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사람보다 더 많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도구들의 반생산성을 예로 들면, 제도화된 의무교육으로서의 학교 교육은 많은 어린이에게 가난에더해 의무교육을 마치지 못했다는 죄의식까지 심어주며, 학교는 필연적으로 탈락자를 만들어내는 제도로 되어버린 점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개인 혼자의 힘으로는 무언가를 배울 수 없다는 무능과 무기력에 빠지게되고 이는 사회통제라는 도식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은 개인을 양산하게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만연하는 수많은 자격증따기 열풍은 제도화된 의무교육의 역기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정 직업을 얻기위해 권위를 내세우는 어떤 독점 기관이 제시하는 시험을 통과하고 자격증을 따야 자격을 부여받는 것이다. 자격증은 한 개인이 가능한 능력의 확장을 의미한다. 자격증은 마치 컴퓨터 게임의 머니 내지는 무기와도 같은 기능을 한다. 한 개인의 능력이 되는 자격증은 곧 개인 자신인 것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자격증따기 열풍지나친 자기 긍정이 불러온 결과가 아닐까. 여기서 과잉 긍정은 결핍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지나친 긍정은 개인화되고 분열화된 사회 구성원에게 개별적이고 무기력한 피로를 가져다주고, 나아가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과 같은 병리학적 상황을 초래한다고 한병철 교수는 말하고 있다.    

 한편 이반 일리치는 운송 수단 및 교통의 문제를 통해 지나친 운송 수단의 발달이 비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자동차와 교통체증은 대도시에서 살고있는 사람이라면 절실히 느끼는 점이다. 교통 수단은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여 속도 경쟁을 하고 있지만, 공간적으로는 제한되어있다. 그 결과 대도시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시간에 쫓기게되는 부작용을 경험하게된다. 소설가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소설에는 1997년 외환위기를 맞고, 회사에서 권고퇴직을 하게 된 주인공이 인지하는 시간성을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장비나 운송 수단을 통해 우리는 과거에 일주일에 걸쳐 해내던 일을 단 하루, 혹은 몇 시간만에 끝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일주일의 시간을 단축했다고 여가시간이 고차원적인 활동에 쓰이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인간의 정신적정서적 한가로움을 위해 쓰이지도 않는다. 사색적인 안식과는 무관하게 그 단축한 여가시간은 끊임없이 다음 일을 위해 쓰여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현대 산업사회가 추구한 효율성의 극대화는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에 쓰이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여가시간이란 다음에 하게될 미션을 위해 필요한 육체적인 원기 회복의 시간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의료문제의 경우, 이반 일리치는 과도한 의료화에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건강을 일정 강도 이상으로 의료화할 경우, 진단과 치료 모두를 의학이 독점하게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의 느낌을 의사가 가르쳐주는 대로 배우게 되고 고통을 견디어내는 능력이 퇴화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의사는 생명을 책임지는 관리자가 되어버렸다.

 관리자가 된 의료의 문제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실히 드러나있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Middles East Respiratory Syndrome)이 현재 한국에서 가장 큰 화두이다. 첫 감염자 발생이후 한 달이 넘어가고있다. 감염된 환자는 14번 환자와 같이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린다.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병리학적 접근에서 보면 감염 환자14번 환자로 불리는 것이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지하철 방송에서도 메르스사태는 마치 국가 비상 사태로 선포되고 있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손세정제를 비치하고, 비상 소독을 자주 실시하고 있으며, 국민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결연한 다짐을 한다. 관리의 대상으로서의 메르스는 방송을 통해 국민의 안전이 위기에 내모는 주범이 되었다. 심지어 질병관리본부에서는 메르스에 대처하는 방법과 같은 광고를 여기 저기 붙여놓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현재 대한 민국 사회에 번져있는 메르스에 대한 필요 이상의 공포는 언론과 대중 매체라는 도구가 우리에게 주는 반생산성의 산물이라 볼 수도 있겠다. <피로사회>에서 제시하듯 배타적 타자에대한 면역반응으로서 공산주의에대한 혐오와 공포가 20세기 대한민국을 지배한 언론과 대중 매체 그리고 권력의 합작품이었다면, 메르스에 대한 공포는 21세기에 대한민국 사회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신경증적인 폭력이라고 볼수도 있다. 이반 일리치는 오늘날 중대한 위협은 건강에대한 병적인 추구 그 자체”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주인공은 다음과 같은 독백을 하고 있다.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삶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숙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그 숙제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남아 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 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독백에서 주인공이 말하는 ‘필요 이상’은 이반 일리치가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가 반()생산성을 갖기시작하는 두 번째 분수령을 넘어선 상태에 상응할 것이다. 소설 속 한 개인의 자각을 통해 이반 일리치가 지적하고 있는 도구의 부작용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과  <피로사회>에서는 모두 머무는 삶, 사색적 삶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반면 이반 일리치는 개인의 자각을 넘어서서 연대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개인의 소박하고 절제하는 삶과 더불어 가속화되고 반생산적인 역기능을 통제할 공생을 위한 도구로서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 제도와 적정 수준의 기준을 마련해야할 필요성을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그가 책에서 언급한 방대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대상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라는 정신이다.  

 

참고도서

- 이반 일리치데이비드 케일리,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권루시안 옮김

 

- 한병철, <피로사회> 김태환 옮김

 

- 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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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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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정을 버리고도, 회사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이 말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박민규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이 하던 독백이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가장들은 가정을 버리면, 회사에서 살아남는다라는 구호아래 열심히 일했다.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하나로 오랜 시간동안 공부하고 좋은 대학을 진학하여 나라의 훌륭한 일군이 되는 것이 마치 신성한 의무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들은 가정보다 회사가 더 우선이었으며 평생 회사에 충성하여 가정을 지탱하고, 아이들을 교육시켜 대학까지 보내는 것이 당연한 의무였다. 하지만 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그 이전의 사회와 질적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회사에 모든 것을 걸고 일만했던 가장들은 가정으로부터 이미 소외되어가고 있었고, 가족은 점점 더 낯선 사람들로 변해갔다.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가장들은 결국 사회에서, 가정에서 버림받은 존재로 느껴졌을 것이다. <시간의 향기>를 읽으며 생각나는 소설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었다. 소설에서 일류대를 나와 열심히 일해온 주인공은 외환위기로 회사로부터 정리해고 당하고, 곧이어 부인과 이혼하게 된다. 실직 후 온 몸으로 시간을 인식하게된 주인공이 프로로서의 삶의 본질을 독백하는 대목이 나온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시간의 향기>는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근대에서 후근대로 이행되는 과정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산업사회 이후 생산성과 효율의 극대화가 절대화되면서 인간이 인지하는 시간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되었다. 근대의 전형적 현상인 가속화로 인해 역사는 종언을 맞았고 의미를 상실했다는 보드리야르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앞에서 언급한 소설과 현재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 충분히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사람의 손으로 혹은 손에 쥐는 도구로 일주일동안 하던 일을, 이제는 한 시간 이내에 도구 혹은 장비를 이용하여 끝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의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고, 여가시간이 고차원적인 활동에 쓰인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인간의 한가로움을 위해 쓰이지도 않았다. 사색적인 안식과는 무관하게 그 단축한 여가시간은 끊임없이 다음 일을 위해 쓰여지게 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여가시간이란 다음에 하게될 미션을 위해 필요한 육체적인 원기 회복의 시간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사색적 삶을 위한 한가로움으로부터 소외된 인간. 그 결과 조급성의 사회가 만들어버린 향기없는 삶이 우리에게는 고향이자 자연이 되어버리고 말았고 급기야는 우리 존재에대한 망각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하이데거는 전반적인 조급함의 원인을 정적, 긴 것, 느린 것에 귀기울이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찾았다. 우리가 만성적인 시간부족의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나타나는 징후는 곧 권태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깊은 권태로서의 징후. 깊은 권태는 총체적인 의미의 공허로 경험되며 이는 시간의 공허에서 비롯된다.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해 소속으로부터 이탈한 경우, 많은 이들은 새롭게 주어진 시간에 머무름의 능력을 상실하여 권태에 빠지고, 불안해하고 심지어는 우울증과 자살에도 이르는 것이다. 우리가 느긋함을 즐기고 시간의 향기를 지각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과도하게 고양된 주체성이야말로 깊은 권태가 생겨난 주원인이다. 더 많은 자기 생각보다 더 많은 세상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은 행동보다 더 많은 머무름이 권태의 저주를 깨뜨릴 수 있다.라고 말하고있다. 아울러 저자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활동적 삶을 비판하고 있다. 아렌트의 활동적 삶에는 혁명적 행동에 그 무게를 두는 삶으로 진정한 머무름, 사색적 삶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머무름의 모습은 앞서 언급한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설의 말미에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결성한 주인공은 대기업 야구동호회 회원들과 야구시합을 하게된다. 이 경기에서 이 팬클럽 회원들이 보이는 행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스포츠맨쉽을 가진 이들은 아니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억지로 잡지 않는다가 이들의 모토이며, 경기 중 팬클럽 회원 하나는 공을 잡으러 가다 주저앉아 무언가를 보기 시작한다. 공을 잡으러 풀밭으러 갔다가 들꽃이 예뻐서 멈추고 꽃을 보고 있었노라고 말하고 있다. 이 팬클럽의 회원들은 바로 시간의 주체로서 시간의 향기를 듬뿍 맡을 줄 아는 이들이었다.       

  저자는 극단적으로 고립되고 원자화된 시간을 사는 우리들이 조급성의 사회로부터 우리자신을 찾는 길은 사색적 삶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근대의 행진과 같이 목적지향적인 걸음걸이가 아니라 산책유랑과 같은 무목적의 걸음걸이로 머물고 사색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러한 사색적 삶은 사실 저자만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의 철학자들이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한 모양이다. 키케로의 말로 마무리를 하며 사색하는 삶, 머무르는 삶을 다시 생각해본다.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 있을 때만큼 덜 외로운 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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