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삶의 철학
엠리스 웨스타콧 지음, 노윤기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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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삶의 철학

(원제: The Wisdom of Frugality)

엠리스 웨스타콧(Emrys Westacott) 지음 | 노윤기 옮김 | [책세상]

 

 

이번에 읽게된 <단순한 삶의 철학> 대한 글은 기존의 독후감과 유사한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고 보다 간결하게, 내가 받은 인상을 책은 어떤 책이다라는 방식으로 정리해보려한다.

 

 

<단순한 삶의 철학> 생각의 출발점이 되는 책이다.

책의 저자 엠리스 웨스타콧에 대해 출판사에서 제시한 자료를 보면 미국 뉴욕 소재 대학의 철학과 교수로서 본인 자신은 지독한 구두쇠로 스스로 인정하고 있으나 책에서는 독자에게 검소한 삶만이 길이다라고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는 책의 처음부터 소박하고 단순한 선배 철학자들이 주장했고, 이를 찬양했다고 하여 우리도 여기에 따라야하는가를 묻는다. 책의 원제(검소함의 지혜) 고려하면 결국 저자의 입장은 소박하고 검소한 손을 들어주고 있긴 하지만, 이를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을 공개하듯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는인상을 받는다. 일상생활에서 당연한 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에 대해 의심하기, 일상에서 철학하기를 우리에게 책전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저자의 견해에 동조하든 반대하든 선택은 각자의 논리와 철학에 달려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저자가 제시하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하나하나 따라가며 자신의 견해와 비교해보면 것이고,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들을 풍부하게 제시한다.

 

 

<단순한 삶의 철학> 천천히 읽는 책이다.

저자가 어떤 관점에 대해 소개할 , 다양한 견해를 제시해준다고 말했다. 동전의 양면을 모두 면밀히 살펴보듯, 해당 관점에 대해 저자는 반론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뚜렷한 주장이 없이 저자의 논점이 없어보이기도 한다.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반론의 모습을 따라가는 것은 긴장의 이완이 없이 지속적으로 긴장상태에 있는 같아 속도감있게 진행되지 않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책은 소박하고 검소한 삶과 우리의 행복한 , 의미있는 삶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소개해주는데, 고대의 철학자 뿐만 아니라 알랭 보통과 같은 동시대의 저술가도 소환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가 제시하는 문장의 의미는 저자가 정리한 고대 철학자나 동시대 철학자의 저서에 대한 서평이기도 하다. 책은 독자의 수준에 따라 저자가 제시해주는 견해들을 이미 알고있다면 빠르게 읽어나갈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천천히 읽을만한 책이다. 어떤 점에서는 <단순한 삶의 철학>  검소한 삶의 미덕으로 가기 위해 저자가 오랜 시간 함께해온 책들과 삶의 철학이 함께 녹아든 독서에세이라고 수도 있겠다. 저자의 폭넓은 독서 경험과 검소한 삶의 미덕 대해 생각해온 저자의 고민이 들어있는 만큼 천천히 읽으며 독자 자신의 생각을 부추기는 책이기도 하다.

 

 

<단순한 삶의 철학> 유연한 윤리학을 보여준다.

윤리학/철학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우선 자신이 책을 읽으며 받은 인상은 책이 북미의 실용주의 윤리학의 전통을 잇는 실천윤리학적 맥락을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 실천윤리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피터 싱어의 철학과 생각하기의 방식 닮아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치에 대해 우리의 일상의 실례를 다양하게 고찰하고, 다양한 관점을 모두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서양철학사 2000년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는 영국 철학자 화이트 헤드(White Head) 말을 떠올려본다. 플라톤 철학의 전통은 이데아 철학임을 인정한다면, 이데아 영원불변의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다. 여기서 플라톤을 갑자기 꺼내는 이유는 <단순한 삶의 철학> 원제가 의미하듯 소박한 삶의 지혜라는 (저자의) 기준을 가진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전통을 잇는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길에 이르기 위한 과정은 상당히 유연하고 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 또한 우리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어떤 가치 대해 다시 들여다보기를 실천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경제를 북돋우기 위해 지역 농산물만을 구매하여 섭취하는 것이 좋다라는 주장을 놓고 , 피터 싱어가 그의 <죽음의 밥상>에서 다양한 입장을 모두 고찰하던 모습을 책의 저자 엠리스 웨스타콧도 유사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 측히 후기 자본주의로 대두되는 지구촌에서 물질적 풍요와 소비의 향유는 성공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풍요속의 빈곤, 공허감을 이야기하기 시작한지 오래다. 책은 결국 이러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검소한 사람 가치를 다시 들여다보게 해주고, 우리의 일상에서 각자가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로 실천의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책이 아닐까 한다. 

 

 

<단순한 삶의 철학> 읽고 옆길로 흔적 단상들

저자는 고대 철학자, 사상가들의 시대와 현대 시대는 분명 삶의 양태가 다르다는 점을 분명이 인식하고 제시한다. 가진 것이 부족하고, 소수의 특권 귀족 계층만이 부를 누리던 고대 사회에서는 귀족 계층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서 금욕주의 칭송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금욕주의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다’(49)라고 저자도 주장하고 있듯이, 저자는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에 대한 고려를 놓치지 않는다. 책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역시 2년에 가까운 속에서의 생활에 기반하여 <월든>이라는 책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역시 전세계가 긴밀히 인터넷과 전화 등의 통신망으로 연결되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소유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소로의 실험적인 삶은 사실 접근하기 어려운 방식이다.

 

2018 현재, 자본주의적인 경제구조가 지구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잡리잡을 있었던 이유 하나는 서구의 자본주의가 지구촌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개성이란 개념을 발명(?)하고 주입시킨데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우리는 언제나 욕구 가지고 있다. 생물체로서,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말이다. 자본주의는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라는 점으로 우리에게 안심시키며, 우리가 자신들의 욕망 충족하기 위해 자유의지 갖고 이를 추구하도록 독려한다. 저자도 누누이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가 무엇을 욕망한다는 것은 그른 일일까를 반문해보면서도, 보다 중요한 것은 욕망 모습이 어떤 양태를 가지며,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따져보라는 것이 저자 엠리스 웨스타콧 교수의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간결히 말하면,  어떤 가치 주장에 대해 단순히 수긍하기 전에 각자가 따져보라 것이다. 그리고 판단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모양이다. 저자는 끝없이 의심하고 소소한 반론을 제기한다. 저자는 심지어 끝없는 욕망이 불행으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127)라고 까지 주장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높고 강렬하고 광범위한 행복의 동력이 되는 경우도 있다’(127) 점이다.

 

그러나 책의 후반에서 다루고 있듯 우리 현대인들은 개성 표출, ‘욕망 충족을 위해 많은 시간을  일해야만하는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4차혁명이라는 화두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인공지능에 기반한 삶의 혁명은 우리의 삶의 질을 보다 높여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당장은 우리의 삶을 좀더 편하고 일처리를 빠르게 해주는 자동화 과정에서 현대 기술은 인간의 생산성을 더욱 압박하는 양상도 무시하지 못함을 지적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자동화 설비를 통해 일주일하던 임무를 하루만에 해냄으로써 기존의 작업방식을 혁명적으로 개선했지만, 이는 또다시 노동자로하여금 일주일 내에 일곱배의 일을 완수하도록 강요하는 메카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현대인들, 특히 노동자들의 삶은 노동시간이 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 내에 많은 일을 하도록, 높은 생산성을 요구하는 모순을 가져왔다는 점도 고려해야한다. 저자가 소박한 사람또는 검소한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노동시간을 언급하는 것도 분명 검소한 에는 삶의 대한 고려도 분명 포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있었다.  

 

저자가 보여주는, 혹은 저자가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검소한 모습을 글로 모두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를 글로 표현하고 타인에게 주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책의 가치는 저자가 독자들을 각자 나름의 고유한 점과 보편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인정하고,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한번 면밀히 들여다보라고 권유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각자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낯설게 보라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책은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성찰하지 않은 삶은 가치가 없다(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라는 주장에 대한 실천적 가능성이라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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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 사유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다
로제 폴 드루아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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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로제 드루아 지음 |  백선희 옮김 |  [책세상]

 

 

 

 

 

로제 드루아는 <일상에서 철학하기>, <사물들과 함께 하는 51가지 철학 체험>등과 같이 일반독자들이 철학에 친숙하게 다가갈 있도록 책을 작가이자 철학자라고 있다. 철학자라고 하면 사변적인 이야기로 책을 채우는 사람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로제 드루아는 그렇지 않은 같다. 장황하고 어렵게 글을 쓰곤 하는 다른 프랑스 철학자들과 달리 그의 글은 간결하고 명확하다. 철학책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철학에 부담없이 다가갈 있도록 안내하는 철학저술가로서 그만한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하다.

 

 

걷기와 철학하기의 유사성

머리만이 아닌 온몸으로 철학을 해보는 그만의 철학하기 방식은 결국 저자로하여금 우리의 가장 평범한 일상의 풍경으로 다시 눈을 돌려 우리 곁에 철학을 데려왔다. 바로 걷기와 철학을 함께 시도해보는 것이다. 드루아가 독자에게 걸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해볼 것을 권하는데, 바로 우리가 걷는다는 행위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주문이었다. 저자가 표현하는 걷기의 메커니즘은 우리가 추락하기로부터 걷기 행동을 개시한다는 것이다.

 

 

추락이 시작되다가 만회되고 다시 촉발되다가 모면되는”(106) 행위가 바로 걷기 행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발을 내딛고 몸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반대쪽 발이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넘어지게 된다. 다른 발의 행동이 보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로 추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하나는 걷기의 메커니즘을 철학에 비유한다. 걷기와 철학은 항구적인 추락과 만회라는 유사한 움직임 속에 자리하고 있다. 생각은 어느 곳보다 철학의 훈련 속에서 스스로 붕괴될 위험을 촉발하며, 새로운 솟구침, 도약으로 자신에 저항하길 멈추지 않으며 나아간다.”(22)  결국 저자는 우리의 걷기와 철학하기가 무한히 균형을 잃었다가 되찾는 과정을 통해 나아가는 이라고 정리한다. 철학하기에서 균형을 깨는 계기는 우리에게 명백하게 보이는 대상이나 사실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 내지는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우리가 철학하는 과정은 바로 사고의 요동, 의혹을 통해 기존의 가치를 뒤흔드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태가 걷기의 메커니즘을 닮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걷기는 철학자에겐 필수불가결한 도구이자 과정이라고 있고, 지구 위에서 이동하는 인간만의 유일무이한 특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로제 드루아는 걷기 그리고 철학하기의 풍경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서양을 넘나들며 걷기와 철학하기의 유비를 책에서 전하고 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우리 인류가 이동 도구에 보다 의존하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될까? 영화 < 투더 퓨처>에서 미래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청소년들이 타고다니는 날으는 보드 모습과 유사한 풍경들을 현재 우리 사회에서 엿볼 있다. 불과 10 전만 해도 바퀴 하나 또는 달린 발판 이동기구, 또는 전동 자전거를 타고다니는 사람은 거의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심심치않게 도시의 한복판에서 이러한 이동기기들을 타고다니는 젊은이들을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번씩은 우리의 머나먼 미래 세대의 경우, 걷는 일을 잊게 되지나 않을까하는 노파심이 들기도 한다. 로제 드루아도 분명 우리의 걷기가 우리 인류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요소로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 자신도 우리가 이상 걷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멈출 것이라고 단언 한다. “인간의 걷기가 점차 소멸하는 분명 모든 측면에서 인류의 소멸이 것이다.”(208)라고 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걷기행위를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중력에 저항하는 인류의 고유한 행동이라고 수도 있지 않을까. 인류가 지구의 표면에서 살아가고 있는 , 모든 인류는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없다. 하지만 인류는 발로도 서야하고, 중력에도 저항하는 방식으로서 다리를 단단한 대지 위에 버티고 서서 걷는 행동을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습득하게 되었다. 로제 드루아가 직립보행하는 인류는 걷기과정을 통해 생각하고 철학하는 일이 함께 발달해왔다고 보는 것처럼, 나는 인류가 중력에 저항하여 대지 위에 버티고 걷게됨으로써 의지(will)라는 것을 배로소 배울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된다. 바로 자신을 억누르는 무형의 존재에 대한 저항행위로서 인간이라는 개체가 스스로 의지를 발달할 있었던게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걷기란 인간이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고유한 속성이라는 드루아의 표현을 다시 확인할 수도 있다. 걷기의 리듬에 맞추어 우리의 사고도 진일보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빠른 교통수단을 타고 순식간에 이동하는 현대인들에게 걷는 행위, 산책과 같은 일은 인류가 인간다움 비로소 회복할 있는 마지막 보루로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마져 해보게 된다. 우리에게 철학을 친숙하게 만들어준 로제 드루아의 책은 걷는행위 잃어가는 혹은 잊어가는 듯한 현대인들이 주목해보고 함께 사유의 풍경 걸어 볼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20면)
"인간은 걷기 시작하면서 말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22면)
"걷기와 철학은 항구적인 추락과 만회라는 유사한 움직임 속에 자리하고 있다. 생각은 그 어느 곳보다 철학의 훈련 속에서 스스로 붕괴될 위험을 촉발하며, 새로운 솟구침, 새 도약으로 자신에 저항하길 멈추지 않으며 나아간다."

(23면)
"어떤 경우건, 생각하기와 걷기는 서로 닮았다. 생각 또한 불안정한 균형을 통해 나아간다. 무한히 균형을 잃었다가 되찾으면서 멀리 나아간다."

(106면)
"추락이 시작되다가 만회되고 다시 촉발되다가 모면되는..."
==> 인간의 직립보행이 지니는 고유한 속성의 표현

(107면)
"철학적 사유는 여러분이 지각하는 것, 그 명백한 사실을 불안정하게 흔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207면)
"걷는 모터는 자기 삶을 살 위험이, 일하는 모터처럼 돈을 벌어 오지 않을 위험이 있다."

(208면)
"인간의 걷기가 점차 소멸하는 건 분명 모든 측면에서 인류의 소멸이 될 것이다."

(210면)
"왜 여전히 걸을까? 인간의 여행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 한 발짝은 미미하나 길은 무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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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 테크놀로지와 기술제국 소련의 몰락
로렌 R. 그레이엄 지음, 최형섭 옮김 / 역사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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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목과도 같은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읽은 책을 덮으며 서서히 떠오른 것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  < 도시 이야기> 문장이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찰스 디킨스 < 도시 이야기> 에서 인용

 이율배반적인 삶의 역설과,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인간 사회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문구를 떠올리며, 아마도 문장은 인류가 존재하는 어느 시대이든 진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미국의 역사학자가 냉전이 한창이던 60년대 초반 미국 최초로 구소련에 교환학생으로 모스크바에서 공부한 이후 관심을 갖게된 소련 엔지니어의 삶과 스탈린 치하의 사회상을 추적한 기록이다. 저자가 관심을 갖고 추적한 사람은 표트르 팔친스키라는 이름을 가진 구소련 엔지니어이다. 그는 1875 10 05,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42 전에 태어나 1929 5 54세의 나이에 산업당 사건이라는 역사의 사건을 통해 다른 엔지니어들과 함께 소비에트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숙청당했다. 책의 저자는 처음 팔친스키와 관련된 정보를 얻는데 어려움을 겪은 이야기를 통해 폐쇄적이던 구소련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팔친스키는 어떤 사람이었나

 

표트르 팔친스키는 평범한 가정의 12 형제 장남으로 태어나 이혼한 어머니 슬하에서 어머니가 운영하던 도서관의 책을 많이 접할 있었던 환경에서 자랐다. 장남으로서 사실상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자력으로 엘리트 공대에 입학해서도 생활비를 벌기위해 다른 부유한 동급생과 달리 다양한 일을 병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엔지니어로서 정치와 예술에 또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점에 주목하게 된다. 특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는 아나키즘에 이끌려 온건적인 아나키스트였던 표트르 크로포트킨과도 교류를 했다. 러시아 혁명 당시 급진세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여 스탈린이 집권한 20년대 이후 소련 공산당과의 마찰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다만 팔친스키의 경우, 지도자급의 엔지니어로서 글쓰기로 정치적 견해를 표출한 행동을 통해 체포와 석방을 여러 반복하는 경험을 했다. 아마도 작가 디킨스가 자신의 소설에서 묘사한 인간 사회의 극한 진실을 팔친스키는 온몸으로 겪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팔친스키의 엔지니어링 철학을 인간적 엔지니어링으로 간결하게 요약한다. ‘기술과 노동자 모두 최적의 상태여야 한다라는 팔친스키의 주장이 보여주듯 기술 대한 신뢰와 더불어 인간으로서 노동자의 삶의 조건 주목한 점에 주목해야한다. 소련의 중앙집중식 프로젝트에서도 엔지니어의 의사 결정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인간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필요가 충족된 상태를 의미했다. 인간의 요소는 나아가 인간을 위한 사회정의 기술과 동시에 고려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기술은 인간의 삶의 질을 고양하는데 활용되어야한다는 가치에 충실한 철학인 셈이다. 당대에 국가 주도의 소련 산업구조 속에서 개별 인간에 대한 가치를 중요한 요소로 고려했다는 점은 현대의 고도 산업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한편 팔친스키의 엔지니어링 철학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경험들을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꾸준히 제공하고 있다. 분명 다른 많은 당대의 엔지니어들과 다른 폭넓은 식견과 인간의 가치를 주목할 있게 배경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운영하던 가족도서관에서 경험한 독서체험, 그리고 성장해서는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 성공한 산업 컨설턴트로 일하며 다양한 삶의 양식과 문화를 접한 경험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울러 엔지니어로서의 전문지식 뿐만 아니라 정치와 예술에 관심을 갖고 사회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있었던 인문적 교양 형성의 결과가 아닐까.

 

 

 

【스탈린 치하의 사회변화와 엔지니어의 역할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이 집권을 이후, 숱한 정치적 숙청이 이루어지던 20년대 후반 유능하지만 공산당에 비판적이었던 팔친스키는 스탈린에게 거슬리는 존재였을 것이다. 특히나 현재의 시각으로 인문적 교양 지닌 팔친스키는 자신의 비판적인 시각을 글쓰기로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후 팔친스키는 스탈린의 비밀경찰에 납치되어 20년대 후반, 비밀리에 숙청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팔친스키의 숙청과 관련한 산업당 사건 스탈린 치하의 폭압적인 정부아래 어떻게 지식인들이 억압을 받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사례가 된다. 팔친스키의 체포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묘사해놓았다고 하니 이후에 보다 자세한 면모를 구소련체제 내에서 바라본 지식인의 시각으로 살펴볼 있을 것이다. 시기에 많은 지식인과 정적이 숙청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도 고통을 받게된다. 30년대에 우즈베키스탄 등의 황무지로 강제이송당한 고려인들의 기억은 팔친스키가 처형당한 이후, 구소련의 암울한 시기와 병치되고 있음도 상기해볼 있다. 

 

팔친스키가 국가와 이데올로기의 폭력으로 인하여 숙청된 이후, 스탈린은 본격적으로 엔지니어들을 생각하지 않는기술자들로 만드는 국가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스탈린 시대에 비로소 엔지니어의 인문 교양의 습득 전통이 소멸해버린 것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과정이었다. <타임머신> 작가 H. G. 웰스 스탈린을 인터뷰한 아래 대목에서 스탈린의 생각을 보다 분명히 느낄 있다.

생산 조직가인 엔지니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받은 대로 따라야 한다. (…) 기술 지식 계급이 독립적 역할을 있다고 생각해서는 것이다.

(84, Bailes, <Technology and Society>에서 재인용)

 

더욱 경악스러운 부분은 스탈린 집권 이후 엔지니어 양성과정이 지나친 전공 세분화라는 특징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기계 공학 전공엔지니어가 아니라, 기계 종류별 압축기 담당 엔지니어를 양성한다던지, 구리와 구리합금을 다루는 전문가가 별개로 존재했다는 점이다. 저자가 모스크바에 자료조사차 갔을 , 근교에서 만난 여성 엔지니어가 자신을 제지공장 볼베어링엔지니어라고 소개한 상황을 믿기지 않는 듯이 묘사한 대목도 이런 소련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스탈린의 목표대로 과도한 전공 세분화는 팔친스키와 같은 생각할줄 아는엔지니어가 아닌 거대한 전체의 부속품으로 기능하는 기술자를 양성해내었다. 저자는 스탈린이 뿌린 이러한 씨앗의 재앙이 여전히 팔친스키의 유령으로 소련 내에 출몰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스탈린의 중앙집중식 산업화 방식은 기본적으로 이전의 레닌이 도입한 미국식 산업경영기법 (포드주의 테일러주의 기반한 경영방식) 결합되어 이루어졌다고 이해해볼 있겠다. 시기의 사회 건설 실험은 노동자를 인격체로서가 아니라 기계 부속품으로 만들어 효율성(생산성)만을 추구하게 하는 강력한 추동을 제공했다. 나아가 금융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여기에서 나아가 인간이 하나의 상품으로, 자본의 노예로 전락해버렸음을 상기해볼 있을 것이다. 

 

스탈린이 성취(?) 중앙집중식 산업화의 사례를 가지 떠오려보자면, 나는 백해운하 건설 프로젝트 예로 들어보겠다. 발트해-백해를 잇는 운하 건설은 스탈린 치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선전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나, 이면은 참혹한 진실이 가려져 있었다. 백해운하 건설에 투입된 노동자는 거의 대부분인 정치범인 죄수들이었기에, 이들의 인권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던듯하다. 표트르 팔친스키와 동료 엔지니어들이 제시한 엔지니어링 원칙이 철저히 무시되었고, 폭압적으로 인권이 유린된 역사의 현장이었다.  2 미만의 공사기간 동안 20만명이 사망하여, 매달 평균 명씩 사망한 참혹한 프로젝트였다. 이것이 스탈린식 산업화와 사회주의의 진실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전문가/엔지니어들이 정치적 폭압으로 인하여 전문가로서의 소견 표명의 기회를 포기하거나 차단되는 경우, 또는 폭압적인 정치체계나 정치가들의 견해에 심지어 동조하게 되는 경우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생각하는엔지니어의 역할로서 팔친스키는 어떤 국가의 프로젝트에 대한 결정을 , 경제적·사회적·윤리적 관점 포괄적으로 검토를 거쳐야하며 특히 산업에서 노동자와 지역주민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주장한 팔친스키의 유령은 국내에서도 여기 저기 출몰하고 있다. 4대강 사업, 제주 강정 마을의 해군기지 건설과정이나 밀양 송전탑 건설, 그리고 성주 사드 배치 과정 등을 들여다보면 공통적으로 인간, 특히 지역 주민을 고려한 사회 정의는 아예 고려되지 않고 있음을 알아볼 있다. 특히 지역주민이 완전히 배제된 의사결정 과정과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윤리적 관점 등에서 검토되지 않고 성급하게 결정된 엔지니어링이 초래하는 대가는 우리의 후손들이 짊어지고 부담이 것이다. 과연 무엇을 위한 건설이었나? 결국 소수 집단의 이익을 위한 졸속 국가 프로젝트의 엔지니어링 양상은 스탈린의 무리한 중앙집중식 산업화 방식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찾기 힘들다.

 

 

 

 

 【책을 덮으며】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나에게 하나의 주제를 던져주었다. 인간이라는 요소가 배제된 기술 어떤 결과를 초래할 있는가? 그리고 생각하는엔지니어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당당히 말할 없는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있는가?하는 주제들이다. 그리고 나는 주제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모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겠다. 팔친스키가 엔지니어들은 정치와 경제를 반드시 알아야한다는 점과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있어야한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 오늘날의 엔지니어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인을 포함하여 모든 분야에서 타당하다고 본다. 과학기술인은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면 안되는가? 과학기술인들도 역시 정치들과 마찬가지로 국민이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힐 있는 사회가 더욱 건강한 사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스탈린 치하 국가 주도의 거대한 실험은 분명히 실패했다. 하지만 사실이 행여나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일방적 우월이라는 엉뚱한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할 것이다. 물론 저자는 서문에서 책은 소련이 근대 산업국가가 되지 못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언급하듯 국가의 지원을 받는 프로그램의 수혜자로서 입장을 대변하는 언급하고 있다. 부분은 물론 거슬리긴 하지만 나는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통해 스탈린 치하의 사회상을 잠시 살펴볼 있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의 사상에 동조하는 견해를 피력함으로써 결국은 정치적 숙청을 당한 팔친스키의 삶과 당대의 사회상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는데 시사하는 바가 많음을 상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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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의 작은 도덕경 - 하루 한 장 나를 깨우는 지혜의 말
노자 지음, 오강남 옮김 / 현암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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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의 작은 도덕경

노자 지음 | 오강남 풀이 | 현암사

 

 

 

     매일 아침 들어찬 도시의 지하철 안에서기회가 때마다 <작은 도덕경> 꺼내 보았다. 노자가 지었다고 알려진 <도덕경> 많이 들어보았으나 실제로 한줄도 읽어보지는 못했던 차였다. 실제로 도덕경은 짤막한 아포리즘 또는 싯구와도 같은 문구가 81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매우 짧은 책이다. 책을 옮긴 오강남 교수의 언급대로 글자만을 따라가면 시간에도 읽어낼 있으나, 사람에 따라 평생을 읽을 수도 있다는 오묘한 책이다.

 

 

 

     포켓판 <도덕경> 한자 원문을 비롯하여 한글 번역본과 영문 번역 본을 모두 수독하되 해석 집어넣지 않은 말그대로 원전의 텍스트만을 담았다. 나처럼 처음 도덕경을 읽은 사람들에게 처음 읽는 경우,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가 듯한 장은 아마 20%정도는 되지 않을까 한다. 나머지는  알쏭달쏭한 내용이 많다. 더구나 옮긴이의 풀이 없기에,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우선 역자의 풀이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을 있다는 점은 장점으로 꼽힌다. 대신 독자가 적극적으로 노자가 남긴 문구의 진의를 파악하기위해 좀더 적극적으로 노력을 해야하는 같다. 그래도 들어찬 아침 지하철에서 이따금 공감이 가는 <도덕경> 문구를 만나게 되면 반갑다.

 

 

 

 

 

 

너무 날카롭게 벼리고 갈면 무디어집니다.”(9, 42)

 

 

칼날을 너무 날카롭게 벼리면, 쉽게 무디어지는 약점을 가지거나 의도하지 않게 사람을 다치게 하기 쉽다. 무언가에 대한 집착을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해주고, 극단에의 집착을 경계하는 가르침이 아닐까 나는 지하철에서 생각해보았다. 우리는 중용 어떤 상황이나 입장의 기계적인 가운데 의미한다고 피상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내가 생각해본 중용 모습은 극단을 피하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중용의 모습이 어떤 이에게는 일종의 기회주의자로서의 면모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회주의자 자세와 중용 자세는 사뭇 다르다. ‘기회주의 특정 주체에게 유리한 상황을 취하는 것이라면 중용 자세는 상생을 위한 것이다. 흔들거리는 지하철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손에 <작은 도덕경> 풀이가 없기에 어쩌면 나만의 창조적인 오독 허용한다. 내가 떠올린 중용 덕은 어느 극단으로 부터 일종의 거리두기 통해 어느 쪽이든 자신의 오롯한 비판능력으로 바라보는 자세를 의미하지 않을까. ‘상생을 위한 이라는 의미는 어느 쪽이든 양쪽을 차별없이 고려하여 보다 합리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하철에서 만난 풀이 없는 <도덕경> 문구는 나를 빈번히 옆갤로 새도록 한다. 창조적인 오독 허용하고, 또다시 새로운 생각의 고리를 만들어준다. 어쩌면 내가 <도덕경> 이전에 읽어본 적이 없어서 나만의 소요(逍遙)하기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도덕경> 저자가 바로 노자가 맞다고 한다면 노자는 대단한 자연관찰가로 보인다. 자연으로부터 거침이 없는지혜를 읽어내기 때문이다. 노자는 물이 아래로 향하는 특성에 낮춤(겸손) 지혜 이야기하고, 자연의 맑음과 고요를 추구한다. 자연의 지혜를 추구하므로 인간이 정해둔 인위적인 모든 것을 비판한다. 특히나 인위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또한 유가의 가르침인 듯하다. 유가의 가르침인 (), (), () 등을 언급하며 비판하는 대목도 보인다.

 

 

 

 

대도(大道) 폐하면 ()이니 () 하는 것이 나서고,

지략이니 지모니 하는 것이 설치면 엄청난 위선이 만연하게 됩니다.

가족 관계가 조화롭지 못하면 () () 하는 것이 나서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충신이 생겨납니다.  - 18(68)

 

 

 

     우리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인 인과 , 효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렇지 못함을 반증한다. 지하철을 타면서 차량의 끝에 지정해둔 교통약자 배려석 우리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규칙이다. 결국 과거와는 달리 우리 사회가 교통약자에 대한 배려가 그만큼 사라졌기에 인위적으로 만들게 되었다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교통약자 배려할 정도로 성숙한 사회가 되었다고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양보와 배려의 미덕 사라지는 것이 이유라고 지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가끔씩 지하철에서 있는 교통약자 노인들이 교통약자 배려석 앉은 젊은이들에게 폭언 심지어는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있는데, 노자는 우리 사회의 이러한 인위성을 바라보고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책의 풀이를 아직 읽어보진 못했으므로 분명히 상당한 정도의 오독이 이미 행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경> 주석서가 중국에만 1500권이 있다는 사실도 그만큼의 다양한 오독 이루어진 결과일 것이다. 이렇게 풍부한 오독의 가능성은 책에 나오는 말의 아낌 더욱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비우므로서 더욱 풍성해지는 이치를 <도덕경> 스스로 증명해내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간결한 지혜의 보고인 <도덕경> 서양에 영향을 미친 것은 혹시 후기 현대사회의 미니멀리즘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스스로 자족할 알고, 지나치지 않으며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의식하는 , 자연의 지혜를 배우는 노자의 가르침은 어쩌면 점점 비대해지고 극단으로 치우쳐가는 도시의 , 신자본주의 속에서 소진되는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언제든 다시 되돌아 있는 가르침이 있을 것이다.

 

 

     책장 넘기기 힘든 아침 지하철에서 조그만 책을 꺼내들고 읽어가는 동안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옆길로 새기를 반복한다. 어떨 때는 모호하여 전혀 와닿지도 않는 문장들이 다음 다시 되돌아가면 이해가될 듯도 하다. 페이지를 들고서도 출근 내내 이해가 안되는 경우도 있다. 나도 물의 지혜를 떠올리고 나를 낮춘다. 모르면 돌아가기. 다시 <도덕경> 펼치게 되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것이므로, 나의 무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편하게 읽게 된다. 천천히 책을 읽게 데에도 <도덕경> 다시금 일러준 지혜다. 여러 읽어도 모든 문구나 내용이 내게 와닿거나 이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삶의 경험치가 하나 쌓이면서 내게 와닿는 문장들이 하나 늘어갈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그러면 나의 삶도 그만큼 산책하듯 더욱 깊어지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나는 다시 내일 출근용 가방에 <작은 도덕경> 찾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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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 91년 5월투쟁과 김은국의 《순교자》로 본 정치.죽음.진실
강정인 지음 / 책세상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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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 91 5월투쟁과 김은국의 <순교자> 정치죽음진실

강정인 지음 | 책세상

 

 

[1]

        인생에 있어 삶과 죽음은 결국 하나의 실체/진실을 이룬다. 생명을 가진 개체에게 죽음은 삶의 종착점이자 완성이라 있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실존적으로 배태되어 있으며 삶이란 끊임없는 그리고 점진적인 죽음에의 굴복과정이다.”(64)

 

      정치철학서 권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굳이 삶과 죽음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강정인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정치과정이 죽음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 언급한 책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인간이라는 심연>, 성염 2), 인간이 나이가 들어 죽음에 더욱 다가갈수록, 인간의 삶에 진지함이 더해짐에는 누구나 공감할 있을것이다. 저자는 정치권력의 기원에 폭력과 죽음은 본질적으로 잠복해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정치와 죽음과의 밀접한 관계는 현재 대한민국사회라는 현장에서 예외일 없다.

 

      저자는 지난  30여 년간의 대한민국 정치현장에서 진실 죽음관계 또한 헐거워진것으로 표현하는, 이것은 그동안 대한민국 정치 의식과 수준이 향상되어 죽음이미지가 약해졌다는 의미보다는 정치권력이 정치와 관련된 죽음 탈정치화꾀하고 있기때문으로 해석된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현대의 정치적 거짓말들은 '원래 비밀이 아닌, 사실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들'다룬다."(144)라고 언급하기도 것처럼, 오늘날 ‘(정치)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거짓말하기는 하나의 국가통치술이 되어가고있다’(145, 주석11)있다. 150수준으로 인간 최초의 정치집단을 상정하고, 이들이 강한 결속력을 가질 있게 한 매개체로서 신화, 이야기, 상상력을 이야기하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정치적공동체란 진리가 아니라 합의에의해 결속력이 유지된다’(166)언급한 셸던 월린의 주장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있다.  

 

      크게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책에서는 우선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는 1987 6월 항쟁에 비해 종종 망각된 1991 5월투쟁을 시작으로 정치와 죽음과의 관계를 고찰한다. 91 5월투쟁은  시위도중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군이 전경들의 구타에 숨지는 사건으로 촉발된다.  그리고 박승희를 비롯하여 이어지는 청년들의 분신으로 사태가 더욱 심각해져가는 상황에서 검찰의 주도하에 꾸며진 김기설 유서대필논쟁/사건김지하,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의 자살방조배후설’, 그리고 정원식총리 서리의 봉변사건등의 사태로 인하여 당시 운동권세력이 와해되어버린 투쟁이다.

 

      저자 강정인 교수는 현상적으로 실패한’ 91 5월투쟁이 안목에서 실패한 투쟁이 아니라  87 6월항쟁 이후에도 지속된 반민중적반민주적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민중의 저항행위였음을 주지하고 있다. 특히 책에언급된 91 5월투쟁의 소멸에 사회지도층(검찰, 김지하, 박홍 신부)   보수언론이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할 있었는지를 있는 종합선물세트같은 사례로 있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저술한 <사법부>에서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민낯을 공개하고 있는데, 책의  말미에보면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함과 동시에 김기설 유서대필사건대한 간략한 평가를 하는 대목이 나온다. 한홍구 교수는 사건을 검찰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규정하며, ‘과거에는 정권핵심이나 안기부가 기획한 사건을 검찰이 법률적으로 뒤치다꺼리를 해주었다면 이제는 검찰이 전면에 나서서 정권의 위기를 돌파했다라고 사건의 본질을 전하고 있다. 사건은  검찰이 권력의 하인/머슴 역할을 자처사례로 역사에 기억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김기설 유서대필사건한국판 드레퓌스사건으로 규정되는 것도 수긍할만한 해석이라 있다.

 

[2] 

     5월투쟁이 넓은 의미의 정치적 개념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역사 창조에 개입, 참여함으로써 공동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활동과정에서 본질적으로잠복해 있는 죽음 진실관계를 풀어나갔다면, 번째 부분에서는 정치와 종교적 진실사이의 관계로 관심을 제한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재미교포작가 김은국이 1964출간한 소설  <순교자 The Martyred>가지고 분석하고 있다. 소설은 ‘6.25전쟁으로 많이 통용되는 한국전쟁배경으로하여,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희생된 12명의 목사에 관한 진실을 중심으로 다루고있다. 번째 장은 개인적으로 이번 독서에서 상당히 흥미를 갖게된 부분인데, 작가의 소설 이전에 작가 김은국에 관한 관심 때문이다.

 

      김은국 작가는 대학에 입학한지 달만에 한국전쟁’(1950)발발하여, 자원 군입대한  55년까지 복무하다가 도미하여 역사학과 정치학을 공부한다. 학사를 졸업하고 작가워크숍등록, 글쓰기 훈련을 보다 본격적으로하며, 자신의 번째 소설이자 작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준 <순교자>발표하면서, 영문학과에서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내가 대학생시절 인상깊게 읽고 좋아했던 인류학자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번역한 장본인이 바로 김은국 작가였다는 사실, 나아가 이범선의 <오발탄>영역했다는 사실도 작가를 다시 보게한 계기가 되었다.

     <순교자>에서 재확인 할 있는 점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구분한 가지 진실-합리적진리사실적진실-중에서 정치권력에 의해 쉽게 왜곡이 가능한 사실적진실취약성이었다. 점은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의 정치공학적 전략으로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 부분이기도하다. 이러한 실례는 앞서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검찰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규정했던 김기설 유서대필사건’에서 다시 떠올려볼 있다강정인 교수는 <순교자>에서 드러나는 사실적 진실왜곡 문제와 1장에서 언급한 김기설 유서대필사건연결지으며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거짓말하기는 전쟁때나 혁명기 뿐만아니라 정권의 정당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집권세력이 이른바 국면전환위해 흔히 사용하는 국가통치술이 되어가고 있다.”(145)

      우리가 좀더 실감할 있는 예로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등장할 있었던 ,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될 있었던 것을 상기해볼 있다. 이러한 실례들은 집단으로서의 정치적 공동체가 분명한 진리보다는 합의에 의해 결속력이 유지된다월린의 지적을 돌이켜볼 수긍할 있는 사례이다. 집단,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결속이 허구로서의 신화에 의존한다는 통찰은 강정인 교수의 <순교자> 분석을 통해 보다 주의깊게 들여다볼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3]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는 내용은 미국 반전(反戰)영화관한논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저자는 미국의 반전영화가 과연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것인지에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서구의 동일자중심의세계관과 이를 착실히 내면화하고 있는 우리의 서구중심주의지적하고있다. 장에서 다루고 있는 미국의 반전영화 <디어헌터>, <플래툰>, <지옥의묵시록>, <7 4일생> 등은 내가 학창시절에 인상깊게 보았던 영화인데, 저자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서구중심주의시각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주로 베트남전과 관련하여 등장한 반전영화들이 사실은 미국인(주로 백인)인명피해에만 주로 관심을 갖고 있을 , 베트남인들은 미국의 아들 딸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미개인으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보다 정제된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미국 반전영화의 베트남인들은 미국인 영화관람자의 지배적 의식속에서 비인간화(타자화) 되어버린다.”(190)

      미국 반전영화에서 드러나는 시각은 과거에 제작된 카우보이영화시각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미국역사의 주체는 백인 이민자들로서  규정되고 있으며, 저자가 아메리카인디언으로 부르는 미국 원주민들은 미국사의 객체나 배경으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저자의 시각에서는 미국의 반전영화도 람보시리즈와 다름없이 서부활극다름아니다.

미국의 반전영화는 전쟁동기의 타당성이 아닌 수행방식의 타당성에 의거해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있다. 또한 전쟁방식을 제한하는 움직임도 상대방의 피해는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피해만을 고려한 결과로, 집단 이기주의를 드러낼 뿐이다.”(192)

점에서 미국의 반전운동은 일관성있는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원칙론적 반전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중의 마음을 쉽게 움직일 있는 최대공약수로서의 우리의 피해방지호소하는, 집단이기주의의 발로였다. 결국 이러한 반전운동이 대중적 성공을 거둠에 따라 어떤 면에서는 성공보다도 중요한 반전의 윤리적, 원칙적 의미는 퇴색하게 되었고, 집단이기주의의 형태인 공리주의가 빛을 발하게 되었다.”(196)     

 

      이러한 시각은 최근 유럽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테러사건들에서도 확인할 있다. 다시말해 서방국가의 무고한 시민들이 겪은 희생에는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도, 비서방국가들의 시민들이 겪는 희생에 우리는 동일한 애도를 보였는지 자문해볼 있다. 과연 그런가? 미국의  2001 9·11사건이후, 미국내에 거주하는 무슬림 대학생들이 경찰의 감시를 받아왔다는 사실이 수년 드러나 언론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미국은 여러 인종이 서로 융합되는(melting pot)아니라 여전히 백인들만의 왕국이었음은 저자가 언급한 반전영화의 사례로 다시금 확인할 있다.

      책의 군데에서 저자가 본인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단정적인 표현들은 과연 그럴까라는 의구심을 갖게하는 표현들이 간혹 나온다. 이런 부분은 자신감의 발로일 수는 있지만, 동일한 대상에 대해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한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바라보고 결론을 것이 아닌가 하는 부분들은 미미하지만 지적해볼 수 있겠다. 이런 가지 점들을 제외하면 미국의 반전영화를 중심으로 우리 안의 서구중심적 가치관지적하고 있는 3장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이기도 하다. 흔히 걸프전으로 불리는 미국-이라크전당시 학생으로서 나는 부끄럽지만 미국의 첨단무기에 관한 자료들을 모으는상당히 열중했던 일을 상기해 본다. 이번 독서는 어린 나에게 이미 내면화되어있던 강자의 세계관안으로부터 꺼내어 살펴보게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가지 떠오르는 생각은 저자가 베트남전쟁과 걸프전에 대해 미국내 반응이 정반대였던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을 던지는 부분에서 비롯되었다. 분명히 뚜렷한 명분을 갖지 못하고, 밀림에서 보이지 않는적을 제거해야 했베트남전과는 달리 걸프전에서는 버튼 하나로 목표물을 공격하는 첨단무기의 실험장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모호한 주적을 대상으로베트남전과는 달리 걸프전에는 후세인이라는 분명한 미국의()상정되어 있던 점도 무시할 없다고 본다. 말하자면 걸프전의 경우는 보다 컴퓨터게임적인 요소가 강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후세인은 게임에서 물리쳐 제거해야하는 난이도 높은 으로서 드러나고, 전쟁을 질질끌면서 미국의 아들딸들의 희생을 증가시키는 보다는 백악관에서 버튼 하나로 미군의 희생을 최소로하면서 단기간에 전쟁을 끌어나갈있었던 것도 반전(反戰)여론의 반전(反轉)현상에 영향을 것으로 이해할 있다. 걸프전은 게임적요소로서 화면을 통해 재구성되는진실은 베트남전과는 달리 피해자(희생자)들과의 거리두기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희생자들의 고통에 더욱 둔감해지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세력은 베트남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철저함을 보인다. 베트남전쟁을통해 배운 교훈을 다양한 각도에서 활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에게 비춰지는 미국의 모습은 걸프전 이후 미국내 전쟁에 대한 여론이 진실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가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미국의 정치세력이 주력하는 바는 구성원들의 비판적 기능을 둔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상으로 진리/진실’ – ‘정치’ – ‘죽음상호관계를 들여다보는 저자의 책을 읽으며 메모해둔 것들, 책을 덮고 옆길로 새며 끄적거렸던 나의 생각들을 모아보았다. 저자의 여러 학술논문을 다듬고 정리한 책은 정치철학서로서 이해할 있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찰하지 않는 삶은 무가치하다라고까지 언급했던 플라톤의 통찰처럼 책은 참다운살기 위한 통찰을 주고. 삶의 대척점을 이루는 죽음은 책의 전체를 통해 언급되고 있으며, 죽음우리에게 삶을 제대로 살도록 절실하게 요구한다. ‘참다운대한 기준은 매우 개별적일 것이다. ‘죽음각자에게 매우 개별적인 현상인 것처럼 말이다. 중세 판화가이자 화가였던 알프레드 뒤러의 그림에,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지도(화가 홀데인의 그림 버전)숨어있는 두개골(죽음)이미지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죽음문제는 인류생존의 문제와 떨어질 없는 본질적인 인간의 조건이기도하. 나는 책을 저자의 참다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의흔적이라고 하겠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정치세계에서 진리/진실의 지위는 근본적으로 위협받는 듯하다.’(8)라고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초래되는 죽음왜곡된 진실앞에서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 정치와 진실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동인은 죽음염두해둔 참다운대한 욕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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