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은 남아메리카에 머무는 동안 "아무도 내게 기도하면 달라진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일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기도하지 않으면 쉽게 화를 내고, 마음이 무거우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자주 놓쳐서 자신이 아닌 남에게 관심을 쏟을 수 없게 된다. 기도하지 않으면 선입견에 따라 행동하기 쉽다. 변덕스럽고 사소한 일에도 원한을 품는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앙갚음을 하고 싶은 마음에 시달린다." 물론 그는 하루에 한 시간씩 교회에 앉아 있자면 정신을 집중하기 어렵고, 안절부절못하고, 졸리고, 혼란스럽고, 지루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되돌아보았을 때, 기도한 뒤로부터 하루가 다르게, 한 주가 다르게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내 삶은 일관성을 잃어버렸을 테고, 그저 갖가지 사건 사고들이 이어지는 평범한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pp522-3)

 의사로 일하는 동안 블룸은 온통 미래에만 신경을 썼다. 환자를 검진하면서도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손님의 수를 헤아리느라 자꾸 옆방을 흘끔거렸다. 수술이 끝나고 돌아서는 순간부터 환자에 대해서는 아주 사소한 것마저 다 잊었다. 한술 더 떠서,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똑같은 질문을 두세 번씩 자신에게 던지곤 했다. 블룸은 접근 방식을 바꾸기로 작정했다. 눈앞에 앉아 있는 환자를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람처럼 대하자고 다짐했다. '빨리 움직여야겠다'는 조급증이 들면 일부러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대고 환자에게 몇 마디 말을 시켜서 서두르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결과는 놀라웠다. 하루에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이전보다 훨씬 늘어났던 것이다.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 하고 같은 절차를 쓸데없이 반복하는 실수가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블룸은 너무 빨리 움직이려고 애쓰는 시간을 멈추게 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안돼!"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시간을 온전하게, 내면의 긴장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분일초가 정말 일분일초답게 흘러가는 걸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는 5분이 30초 만에 달아나버리는 것처럼 살지만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시간을 멈추게 하는 훈련은 차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변화시켰다. 무엇보다도 과거는 돌이킬 수 없으며 미래는 어떻게 될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재의 삶에 집중하게 됐다. 눈앞에서 흘러가고 있는 지금이 영원이라는 시간과 교차하는 지점이었던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블룸은 하던 일을 멈추고 마음을 추스렸다.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앉아 있어야겠다. 앞으로 5분 동안은 꼼짝도 않을 거야. 여기 하나님의 임재 안에, 내 존재 속에, 가구들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을 거야." 조바심이 들 때마다 잠깐씩, 5분 정도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그런 식으로 짬짬이 쉬었다가 다시 분주한 일정으로 돌아가면 차분하고 평온한 마음을 지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후로는 차츰 시간을 늘렸다.
 뜻밖에도 5분을 한가하게 쉬면, 나머지 세상도 그만큼을 기다려주었다. 과제를 처리하는 게 제아무리 급박하다 해도(보통 이런 일들이 그의 마음을 꽉 채우고 있었다) 3분, 5분 아니 10분 정도는 여유를 낼 수 있었다. 사실 잠깐 짬을 냈다가 다시 시작하면 오히려 더 평온하고 신속하게 과제를 끝낼 수 있었다. 결국은 그렇게 틈틈이 멈춰 섰다가는 시간을 연장해서 아침, 저녁 기도 일과를 만들었다.
 블룸은 날마다 조용하고 평온한 가운데 일과를 시작했다. 하루라는 시간 자체가 이전에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던 하나님의 선물이며 다시 시작할 기회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겼다. 눈을 뜰 때마다 새로운 날이 어린 시절 러시아에서 보았던 순백의 설원처럼 넓게 펼쳐졌다. "오늘은 주님이 만드신 날이다. 여기서 마음껏 즐기면 기뻐하자!" 아침에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의 임재를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밤이 되면 그날 일어난 일들을 차근차근 돌아보며 잘됐든 잘못됐든 모든 일에 감사했다. 하루를 통째로 하나님 손에 올려드렸다.
 잠깐씩 기도하는 여유는 목걸이의 진주들처럼 블룸에게는 줄줄이 늘어서서 본질적인 진실을 일깨워주는 이정표가 되었다. 산다는 건 무의미한 행동들의 연속이 아니다. 삶은 하나님 나라의 목표를 지신의 몸으로 살아내는 경기장이다. 기도는 행위인 동시에 특정한 상태를 가리키는데, 기도를 하루에 몇 차례라는 식의 제한된 순가능로 생각하면 쉽게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pp537-40)

 온 영혼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도의 상급학교에 올라가면 의심과 갈등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거기에 덜 휘둘리게 된다. 예수님은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7:11)고 말씀하셨다. 마음속에서 무수한 반론을 불러일으킬 만한 말씀이다. 그러나 영혼을 기울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반론은 힘을 잃는다. 무엇이든 '좋은 선물'로 바꾸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순간, 기도와 관련된 갖가지 의문들은 돌연 생기를 잃는다. (p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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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뮬러나 마르틴 루터 같은 인물들이 그토록 놀라운 기도 응답을 받았던 비결이 뭔지 묻는 이들에게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흔히 성인들이 받았던 축복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똑같이 누리고 싶어 하지만, 그들이 탁월한 신앙인이었다는 사실은 곧잘 잊어버린다. 그리고는 성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처럼 자신의 기도에 반응하시지 않는 까닭이 뭐냐고 묻는다. 먼저 우리가 성인들의 생활방식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야 한다. (pp406-7)

 화이트 교수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미앙고 묘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도 독생자를 선교지에 묻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뿐이다."
 이곳 나이지리아의 흙무덤가에 선 선교사 부부에게 응답되지 않은 기도를 제 아무리 설명해봐야 답이 되니 않을 것이다. 그저 선이 악을 이기며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성취될 것이라는 약속이 이미 성취되었음을 믿어야 할 뿐이다. 그 믿음에 매달리는 것만이 최고의 합리적 행위인 것이다. 아니면 최고의 믿음의 행위이거나. (p417)

 CS 루이스는 설명한다.
 기도의 핵심은 응답될 수도 있고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점에 있다. 결과를 강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지혜가 무궁무진하신 분께서 어리석기 한량없는 피조물의 요청을 듣는다면, 경우에 따라 들어주시기도 하시고 거절하시기도 하시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언제나 응답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는 건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다. 오히려 마술에 가까운 현상일 뿐이다.
 교장이 학생들에게 "교칙에 따라, 이러저러한 일들은 허용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차여차한 행위는 너무나 위험해서 너그러운 원칙을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일들을 하고 싶으면 내 방에 찾아와서 요청을 하세요. 모든 문제들을 함께 상의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건 전혀 불합리한 일이 아니다. (p422)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또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던 육신과 새로운 몸을 맞바꾼다. 은혜와 기쁨을 누리기는 했지만 악과 고통에 취약했던 삶을 버리고 약속하셨던 대로 완벽한 새 삶을 얻는다. 혼란스러운 교리와 흔들리는 믿음 대신 분명한 지식을 갖게 된다. 남은 세월 동안, 그런 교환을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p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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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세계는 좁아진다. 현실 세계를 뒤로하고 예수님이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기도 골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실제로도 전혀 다른 영역에 진입하게 된다. 똑같이 실존하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다. 나는 물론이고 뒤에 남겨두고 온 세상을 모조리 변화시킬 힘이 거기에 있다. 시간을 정해서 규칙적으로 기도하면 내면세계를 방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외부세계가 침투해서 장악하지 못하게 막아준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라고 말씀하셨다. 욕망을 부추기는 장인들이 할리우드에서 빚어낸 영상들이 얼마나 끈질기게 마음을 사로잡는지 생각하면 주님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머무시도록 마음의 방을 샅샅이 청소하는 상상을 자주 한다. 기도에는 "마음을 새롭게"(롬12:2) 하는 과정이 포함되는데 주님을 슬프게 하고 자신을 망가뜨리는 요소들을 모두 정리하는 단계와 가장 소중한 것들을 채워주시도록 마음을 내어맡기는 단계로 구성된다. (p300)

 캘리포니아 주 웨스트몬트 대학에서 교목으로 일하는 벤 패터슨은 디스크 파열로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말라는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 독한 약을 복용하는데다 침상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으므로 책을 읽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렇게 무기력한 상태에서 패터슨은 기도에 관해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속수무책이었다. 더럭 겁이 나기도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어떻게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까?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목사라고는 나 하나뿐인데 이제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교회를 위해 기도나 해보기로 했다. 주소록을 펼쳐놓고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날마다 기도했다. 거의 두 시간이 걸렸지만,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으므로 그렇게 하는 게 특별히 싫지 않았다. 신앙이 깊어서가 아니라 지루하고 낙심이 돼서 기도를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는 동안 차츰 기도 시간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몸이 거의 회복되었을 무렵,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말씀드렸다. "아시다시피, 여기서 정말 멋진 시간을 보냈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보냈던 순간들 말입니다. 건강해지면 이런 여유를 가질 수 없게 된다는 게 정말 아쉽습니다."
 하나님의 시큰둥한 대답이 금방 돌아왔다. "애야, 건강해져도 아플 때만큼 시간이 넉넉하지 않니? 하루는 똑같이 스물네 시간이란다. 건강할 때는 네가 교회를 돌보는 책임자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지. 몸이 아플 때는 그럴 수 없는데 말이야." (p303-4)

 일이 워낙 많이 생겨서, 마귀의 장난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기만 하면 전화벨이 울리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그렇게 이른 새벽에 전화를 건단 말인가? 화장실에서 물이 새는 소리가 너무 또렷해서 화들짝 달려가 꼭지를 점검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 뒤에는 물탱크에 팔꿈치를 들이민 채 나사를 죄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날 하루는 그렇게 잡다한 일로 모두 망가지고 말았다. (p331)

 비록 몇 가지에 불과하지만, 나는 기어이 잡생각을 다스리는 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기술들을 찾아냈다. 우선 가전제품들이 정신을 산란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예방 조치를 취한다. 컴퓨터가 없는 방에 자리를 잡는다. 자동 응답 장치를 작동시켜서 전화가 걸려오는 걸 막는다. 곁에는 언제나 메모지와 펜을 준비해둔다. 잡다한 생각이 떠오르면 종이에 적어서 나중에 처리할 일 파일에 끼워둔다. 한두 가지  잡념이 떠오르다 말 때도 잇지만 때로는 예닐곱 가지에 이르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나는 일들을 적어두면 계속해서 깐죽거리지 못하도록 붙잡아두는 효과를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능하면 잡생각들을 기도에 끌어들인다. 아침을 먹으면서 보았던 지진 피해 영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으면 재난을 당한 가정들과 현장에서 뛰고 있는 구조대원을 위해 기도한다. (pp336-7)

 잡생각이 생기는가? 상념의 뿌리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서 바로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 진실로 소원하는 바를 위해 기도해야 산만해지지 않는다. 침몰중인 배에 타고 있는 승객들은 기도할 때 잡생각이 난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p338)

 목회자라면 누구나 그날 설교는 다른 사람보다 목사 자신에게 적용해야겠다는 교인의 한마디에 금방 실패자가 된 것처럼 착잡해져서 집으로 돌아온 경험이 한두 번쯤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도 기도를 그렇게 보실지 모른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적었다. "가장 형편없어 보이는 기도가 실제로 하나님의 눈에는 제일 훌륭한 간구처럼 보일지 모른다. 경건한 느낌이 매우 적고 대단히 내키지 않아 하면서 드리는 기도 말이다. 이런 기도들은 거의 모두 감정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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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하나님이 일상사에 관여하셔서 감기를 고치고 주차장에 빈자리를 준비해 주시면서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의 재앙은 미리 막지 않고 방치하셨다면 그건 윤리적으로 모순이다. 히로시마와 아우슈비츠 참사로 미루어보건대 하나님은 세계적인 대사건들의 진행 과정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또는 절대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계신다)고 추정하는 게 타당하다."
 이런 극단적인 겨론에까지는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 게 사실이다. (p123)

 예수님의 기도를 조사하면서 기도에 관한 핵심적인 의문 하나가 풀렸다. "기도가 정말 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하는 문제다. 마음속으로 살금살금 회의가 기어들고, '기도라는 게 혹시 거룩한 형식을 빌어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늘어놓는 게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 때마다, 예수님조차 기도해야 할 필요를 강력히 느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이 누구신가? 말씀 한마디로 세상을 만드시고 온 우주를 움직이시는 분의 독생자가 아닌가? 기도가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에 대해 주님은 한 점 의심이 없었다. 사람들을 돌보는 데 투자하는 것과 똑같은 양의 시간을 기도에 쏟아부으셨다.
     외과의사로 일하는 한 친구는 기도에 관해서 조사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기도에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세 가지 전제에서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셋 다 인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명제들이 아니야.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이지." 옳은 말이다. 나로서는 믿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이 기도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기도의 중요성을 폄하한다면 결국 예수님이 착각하셨다고 결론짓는 셈이다. (pp133-4)

 베드로가 실족하는 과정을 보면 욥의 기사가 희마하게 겹치며 떠오른다. 하나님은 욥을 구석으로 몰아붙이도록 허락해달라는 사탄의 청을 들어주셨다. 적극적으로 뜯어말리는 대신 시험에 빠진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자는 난해한 결정을 내리신 것이다. 욥처럼 시몬도(누구나 마찬가지다) 시험을 이겨내든 실족하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여기에 한 가지 요소를 덧붙이셨다. 베드로를 위해 뜨겁게 기도해주셨던 것이다. 욥과 유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인류가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결정적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사탄이 악한 일을 도모할 때, 잔혹한 군주가 선량한 백성들을 압제할 때, 배신자가 독생자를 원수에게 넘겨줄 때 어째서 하나님은 '두 손 놓고 앉아만' 계시는가 하는 문제다. (pp141-2)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저버리는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나는 얼른 예수님의 약속에 매달린다. 베드로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나를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약속 말이다. 주님은 시험 자체를 없애달라든지 결코 실족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신다. 비록 시험을 당하고 실패를 거듭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날나라의 유일한 일꾼이 되고 주님을 좀 더 닮아가길 간청하실 따름이다. (p152)

 욥의 거친 언사에 비하면 두 거장이 주님과 벌였던 논쟁은 유순한 편에 속한다. 욥의 세 친구들은 상투적이고 거룩한 표현을 써가며 이야기했다. 대표기도 시간에 자주 듣는 부류의 젊잖은 말투를 사용했다. 다들 하나님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불운한 친구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갖은 애를 다 썼으며,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신들의 가치관을 합리화했다. 반면에 욥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잔인한 하나님의 희생자가 되길 통렬하게 거부했다. 깊은 상처에서 나오는 생각을 조금도 가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토해냈다. 기도는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마땅찮게 쳐다보는 친구들에게 했던 말처럼,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욥21:15)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욥기 끝부분을 읽어보면 참으로 역설적인 반전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자신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욥의 접근 방식을 단호하게 두둔하시면서 친구들의 번드르르한 말치레를 신랄하게 나무라셨다. (pp164-5)

 예언서 연구에 정통한 유대교 신학자 헤셸은 예언자들의 반항적인 기도들을 이렇게 평가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고통스러운 길을 '사랑의 선물'로 합리화하며 무조건 받아들이는 태도를 버리는 게 올바른 기도 방식이다. 고대 예언자들은 주님의 가혹한 심판에 대해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대신 '뜻을 바꿔주소서'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설령 상대가 주님이라 할지라도 결코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p166)

 한번은 집회에 참석했다가 호스피스 사역을 하는 목회자의 간증을 들었다. 어느 날 정서적으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환자가 상담을 요청했다. 암세포가 이미 온몸으로 번진 상태였는데, 전날 밤에 고래고래 소리치며 하나님께 욕설을 퍼부었다며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사라져버렸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당신을 저주하고 욕한 인간을 용서하실 리가 있겠는가?
 목사가 환자에게 물었다. "사랑의 반대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미움이겠죠." 환자가 대답했다.
 대단히 지혜로운 목사가 대답했다. "아니요.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입니다. 형제님은 하나님께 무관심하지 않았어요. 도리어 어떤 마음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밤새도록 정직하게 말씀드렸던 겁니다. 어젯밤에 한 일을 기독교에서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바로 '기도'입니다 형제님은 밤을 꼬박 새워가며 기도를 드린 겁니다." (p174)

 하나님 체험은 미리 계획하거나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설파했던 랍비가 있었다. "은혜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거의 우연에 가까운 시간이다."
 한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는 게 그저 우발적인 일이라면, 꾸준히 영적인 훈련을 거듭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랍비가 대꾸했다. "우발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지." (p186)

 한 일본 그리스도인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을 처음 여행할 당시, 그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기도가 너무 직선적이어서 마치 햄버거 가게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쇠고기 햄버거로 주시고요, 고기는 다 익혀주세요. 피클하고 상추는 많이 넣어주시고요. 케첩도 하나 더 주셔야 해요. 아셨죠?" 거기에 대면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은 외국 식당에 들어가 앉기는 했지만 메뉴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는 쪽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손짓발짓에 사전까지 동원해서 기껏 '주방장 추천 메뉴'를 시킬 뿐이라는 설명이다. 기도에 임하는 동양인의 자세에는 긴장감과 모험심뿐만 아니라 더 큰 신뢰가 필요하다는 게 그 일본인의 판단이었다. 기도하는 쪽에서는 어떤 결과를 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다. 결정권은 기도를 들으시는 분에게 있기 때문이다. 기도로 뭔가를 요청하는 방식에 대해 동양과 서양의 그리스도인은 서로에게서 배울 게 많다. (pp187-8)

기도의 단계(pp186-9) - (상승 발달 개념이 아닌 단계)
첫째는 어린아이처럼 필요한 것을 요청하는 단계다.
두 번째는 일종의 묵상 단계다.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동행하는 단계라고 부른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는 기도의 세 번째 단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CS 루이스는 말한다. "피조물에게 위임하실 수 있는 일이라면 전혀 손대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직접 하신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완벽하게 해내실 수 있는 일을 자녀들이 천천히, 그것도 서투르게 처리하도록 맡기신다. 소흘히 다루거나 실패할 공산이 높지만 그것도 받아들이셨다. 인간으로서는 죽었다 깨나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말하자면 유한한 인간의 자유의지가 전지전능한 성품과 동거할 수 있게 되었다. 순간 순간 '거룩한 포기'가 개입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루이스는 또 다른 글에서 이렇게 덧붙인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철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위임하셨다. 피조물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절대 스스로 행하지 않으신다. 개인적으로는 주님이 베푸는 데 익숙한 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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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의론자에게 기도란 그저 허상이요 시간낭비일 뿐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그만큼 소중한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나로서는 당연히 후자 쪽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기도에 대해 그토록 확신이 없는 것일까? 영국의 목회자 마틴 로이스 존스는 기도를 둘러싼 혼란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일 중에, 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는 부분 가운데 이른바 기도만큼 그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허다한 문제를 일으키는 일도 없다." (p20)

 전문가가 아니라 순례자의 마음가짐으로 이 책을 썼다. 다른 이들이 의문스러워하는 점들이라면 나 역시 궁금하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가? 주님이 나 같은 존재에게 마음을 쓰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도 응답에 일관성이 없고 변덕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암에 걸렸을 때 주변에 중보해주는 친구가 많으면 기도를 받지 못하는 환자보다 빨리 나을까? 하나님이 때로는 가까이, 때로는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 마음을 바꾸는가, 아니면 나를 변화시키는가?
 나 역시 이 책을 쓰기 전까지는 웬만하면 기도라는 주제와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죄책감과 열등감 때문이었다. 기도 일지를 쓰지도 않고, 영적인 지도자를 만나러 다니지도 않으며, 정기적으로 기도 모임에 나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게 쉽지 않았다. 공개적으로 기도 이야기를 하자면 스스로 의심의 안경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고백해야 했다. 응답받은 기도에 기뻐하기보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에 더 집착하는 게 내 실상이다. 간단히 말해서 기도에 관한 책을 쓸 만한 자질이라곤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진심으로 알고 싶어한다는 것'뿐이다. (pp20-1)

 물방울이 강물을 이루는 여정을 보며, 기도에 대해 오랫동안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여태까지는 하류에서 시작해서 개인적인 관심사를 상류에 계신 하나님께로 올려보내려고 했었다. 주님이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는 것처럼 자신의 상황을 알려드리기에 급급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고 도저히 거부할 수 없도록 몰아붙이려는 듯 강청하며 매달렸다. 그럴 게 아니다. 상류에서 시작해 물길을 탔어야 했다. (pp33-4)

 시카고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던 중에, 젊은 여성이 손을 들고 일어나서 질문을 했다. 꼬박꼬박 수업에 참석하면서도 입 한 번 뻥끗하지 않던 수줍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함께 공부하던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귀를 쫑긋 세웠다. 무엇인가를 묻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이다. "늘 진심으로 기도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마지못해 앉아 있기도 했어요. 무슨 의식에 참석하는 것처럼요. 주문을 외듯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기도도 들으실까요? 이건 아니다 싶은데도 계속 그러고 있어야 할까요?"
 한동안 침묵이 흐르도록 내버려둔 다음에 말했습니다. "보세요. 방 안이 조용해졌지요? 자매님이 얼마나 정직한 사람인지 이미 다들 알고 있습니다. 연약함을 드러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매님은 여기 있는 모든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교묘한 말로 지갑을 열게 만드는 장사꾼과는 전혀 다른 진지함 같은 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모두들 하던 일을 멈추고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 뜻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기도에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될 거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이의 진심을 원하십니다." (pp66-7)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는 말씀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기도가 부질없는 짓이란 얘기가 아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주님이 돌봐주신다는 걸 확인하려고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는 진즉부터 자녀들을 돌보고 계시며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깊이 관여하신다. 기도는 하나님께 새로운 정보를 드리는 의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상황을 새카맣게 모르고 계신다는 듯 요구 사항을 늘어놓을 게 아니라, "주님은 제게 이것이 필요하다는 걸 아십니다"라고 고백하는 편이 타당하다. 기도에 관한 의문점들에 대해 팀 스태포드가 찾아낸 일종의 해답도 그와 비슷하다.

 기도에서 가장 인격적인 부분을 이해하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르고 계신 사실을 가르쳐드리려고 기도하는 게 아니다. 잊고 계신 걸 상기시켜 드리려는 것도 아니다. 자녀들이 구하는 일들을 하나님은 벌써부터 보살펴오셨다. 자녀들이 더불어 문제를 해결하자고 찾아오길 오랫동안 기다리렸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 어려움을 끼치는 인물이나 곤란한 상황들을 주님과 나란히 서서 바라보게 된다. 문제나 사람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얼마든지 아름다운 찬양을 드릴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가장 절친하고 오래된 벗에게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 지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하나님과 대화하라. 사랑 안에서 교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pp99-100)

 전에는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고 하신 예수님 말씀 때문에 늘 헷갈리곤 했다. 그렇다면 뭐 하러 기도를 한단 말인가? 친구로서 친밀감을 나누고 싶어하시는 마음을 알고 나서 이 의문이 풀렸다. 서로를 깊이 알면 알수록 커뮤니케이션에 필요한 정보의 양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의사를 처음 만날 때는 병력을 시시콜콜 알려주는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반면에 이미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주치의라면 당장 어디가 아픈지만 이야기하면 그만이다. 교우관계도 그렇다. 흉허물 없이 지내는 가까운 친구끼리는 낯빛만 봐도 서로의 상태를 꿰고 있는 까닭에 거추장스러운 절차를 생략한 채 곧바로 '영혼의 문제'를 꺼낼 수 있는 것이다.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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