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연대기 샘터 외국소설선 5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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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레이 브래드버리의 작품들은 취향에 완전히 맞지는 않다. 하지만 읽고 난 후 그 여운은 다른 어떤 소설에 뒤지지 않는다. 그것은 SF문학에서 취향이 밀리터리SF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몇 유명 작가들의 경우는 다르다. 그중 한 명인 아서 C. 클라크는 치밀한 과학적 묘사와 광대한 상상력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처음에 들기는 힘들지만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그래서 늘 그의 작품이라면 관심을 가졌고, 재미있게 읽었다.

그럼 레이 브래드버리는 어떨까? 이 작품도 예전에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정확하게 기억하기로 처음 읽은 작품은 <화씨 451>이다. 사실 그리폰북스 판으로 읽으면서 큰 재미를 누리지 못했다. 사전 정보 없이 읽었고 예상과도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르귄의 <어둠의 왼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겼고, 다른 소설을 읽으면서 이 작품이 몇 번이나 떠올랐는지 모른다. 언젠가 다시 읽으면서 처음 읽을 때 놓친 재미를 찾아보려는 작품 중 하나다. 

사설이 좀 길었다. 이 작품은 연작이면서도 독립적이다. 1999년 1월에 시작하여 2026년 10월까지 시간과 화성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앞에 나온 인물이 나중에 다시 나온다는 점과 시간 순이란 점에서 연대기에 부합되고 연작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마지막 시간이 가장 먼저 발표되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장인 <백만 년짜리 소풍>은 중간의 <어셔2>나 <하늘 한가운데 난 길로>와 더불어 작가의 성향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 작품들이 발표된 시기가 40년대 후반임을 감안하면 그가 느끼는 미래가 얼마나 암울한지 알 수 있다.

<화성침공>이란 고전 영화에서 침략자는 화성인이다. 그런데 이번 소설에서 화성을 침략하는 것은 인간들이다. 물론 작가는 물리적인 공격으로 화성인을 공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초기에는 화성에 도착한 탐사대가 화성인들에게 죽는다. 이 과정을 하나의 장으로 각각 풀어내는데 외계로부터의 방문이 주는 공포와 낯설음이 잘 나타난다. 그리고 허버트 조지 웰스의 <우주전쟁>에서 침략자 화성인을 몰살시킨 바이러스가 화성에서도 역시 그대로 적용된다. 이것은 하나의 오마주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하나의 시간이 하나의 장이 되지만 그 분량은 각각 너무 다르다. 한쪽짜리도 있고, 몇 십 쪽짜리도 있다. 하지만 이 시간들은 모두 연결되고, 각각의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한다. 어느 장은 환상이 교차하고, 어느 장은 그 시대의 현실을 지극히 암울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의 바닥에 흘러가는 소재와 주제는 인간, 사회, 인종문제, 전쟁, 검열제도, 사랑, 물질만능 등이다. <어셔2>가 함축적인 <화씨 451>이자 변주라면 <하늘 한가운데 난 길로>는 그 시대에 느낀 인종차별 문제의 암울한 미래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다시 지구에서 펼쳐진 전쟁 때문에 지구로 모두 돌아간 인류의 편협한 조국애를 풍자적으로 그려내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아메리카 대륙 침략사 혹은 학살과 맞닿아 있는 것은 의미심장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하다는 다른 사람의 평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어느 부분에서 그런 것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화성이란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화성이주민과 화성인의 삶은 환상의 외피를 뒤집어쓰고는 있지만 현실적이다. 거기에 공감하면서 이야기는 SF의 향기를 스스로 지워간다. 이 때문에 SF문학보다 환상소설로, 사회 혹은 문명 비판서로도 읽힌다. 블록버스트영화 같은 SF소설을 기대한 사람에겐 실망을 주겠지만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겐 다시금 그의 문학이 주는 여운과 사색으로 즐거운 시간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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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
신란 지음, 이영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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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은 티베트 전통 장례방법이다. 예전에 다른 책에서 풍장을 세부적으로 묘사한 글을 읽었는데 하나의 문화임을 알고 있어도 쉽게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다른 문화의 특징들을 하나씩 깨닫게 되면서 머릿속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 그 장례를 본다면 어쩔지는 모르겠다. 그만큼 풍장은 우리의 문화와 괴리가 심하다. 

작가가 결혼 백일도 되기 전에 티베트에서 전사한 남편을 찾다가 30년만에 돌아온 여자를 인터뷰한 것을 소설로 구성한 것처럼 꾸몄다. 남편의 이름은 커쥔, 아내의 이름은 수원이다. 이 둘의 사랑을 간단하게 설명하면서 문을 열지만 곧 티베트 전장으로 떠난 남편과 그를 기다리는 아내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어느 날 한통의 전사 통지서가 날아온다. 남편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그녀는 남편을 찾아 티베트로 떠날 결심을 한다. 이 결심은 그녀를 낯선 티베트로 가게 만들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30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30년. 결코 짤은 시간이 아니다. 티베트가 얼마나 넓은지 모르지만 이 정도 시간이면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수 있다. 그런데 작가는 이 시간을 다르게 묶어버린다. 그 시작은 그녀의 부대가 티베트로 들어와서 매일 밤 두 명씩 살해당하고, 우연히 한 티베트 여자 줘마를 구해주면서부터다. 매일 자신의 동료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티베트 사람에 대한 적대감이 자라고 있는 부대원들에게 그녀의 살해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원의 노력이 줘마를 구하고, 이 줘마를 통해 다시 그들이 티베트 군인들의 살육에서 벗어난다. 이 과정은 하나의 윤회처럼 그려져 있다.

원과 줘마가 티베트 군인들과 함께 다니다 사고로 떨어졌을 때 한 유목민 가족에게 도움을 받는다. 이 만남은 원이 티베트를 이해하게 만드는 시발점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받아온 교육과 문화 양식이 거라 가족과의 생활 속에서 충돌하고, 충격을 준다. 지금도 굳게 닫혀 있는 문화 속에서 산다면 놀랄 정도인데 60년대의 그녀라면 더 심할 것이다. 이 문화 충격을 자신의 시선에서 보는 것에서 점점 벗어나는 것이 바로 그들과의 어쩔 수 없는 삶을 이어가면서부터다. 그리고 도중에 줘마가 납치된 사건은 말도 통하지 않은 그녀를 그 유목민들에게 더 오랫동안 묶어두게 만든다. 그것이 비록 불행한 삶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긴 시간을 티베트에 머물지만 그녀의 삶은 변방에 머물고 있다. 이것은 그녀와 함께 동행한 사람들의 행동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대도시나 트랙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들의 놀람과 먹을 것 대신 사치품을 사는 티베트 사람들의 삶을 보는 원의 놀람은 문화 충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시간들을 작가는 결코 끊어서 보여주지 않는다. 몇 년이 흘렀다거나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다거나 하는 서술을 피하고 그녀의 삶에 집중한다. 그리고 결코 가슴 한 곳에서 사라지지 않는 커쥔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세부적인 감정의 흐름을 생략한 것은 개인적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그 힘든 시간을 어떻게 견뎌내고, 그리워하고, 아파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한 여성이 30년간 티베트에서 죽은 남편을 찾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놀라움은 티베트와 중국 간의 전쟁과 대립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 하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티베트 사람들이 중국의 침공으로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는 사라지고, 중국 부대원의 전멸이나 죽음은 명확히 그려진다. 혁명이니 해방이니 하는 단어 뒤에 숨어 있는 원래의 목적은 흐려지고, 비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국에겐 한없이 불편한 진실이기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다시 우리의 고대사나 북한으로 이어지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체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세밀하게 그려내지 않음으로써 그 긴 세월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조금 부족하다. 하지만 그녀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만나게 되는 유목민들의 삶과 티베트의 문화는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한다. 자연스럽게 티베트 문화 속으로 동화되는 원의 삶은 그녀의 사랑과 더불어 감동을 준다. 화려함은 사라지고, 투박하지만 간결한 묘사들은 시간을 넘어 그녀의 삶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 때문에 이 소설이 지닌 몇 가지 약점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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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왕, 여기 잠들다
필립 리브 지음, 오정아 옮김 / 부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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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전설과 신화 속에서 아서 왕은 조금 특별하다. 그 특별함은 어린 시절 본 애니와 영화로 만들어진 이미지가 그대로 간직되고 있고, 내 속에서 점점 미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그런 이미지를 만드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신검 엑스칼리버가 아닌가 생각한다. 선택받은 인물이란 것과 기사도로 대변되는 원탁의 기사는 하나의 강력한 이미지로 구축되었다. 여기엔 어릴 때 본 애니가 크게 한 몫 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런 이미지를 산산조각낸다. 그 옛날 영화 <엑스칼리버>가 한 번 깨트렸던 이미지를 다시 말이다.

필립 리브는 견인도시 연대기로 처음 만났다. 잘 만든 sf소설이란 호평 덕분에 관심을 가졌는데 재미있었다. 그런 그가 영화 <엑스칼리버> 이후 아서 왕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현실적인 아서 왕을 그려내었다니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버나드 콘웰의 <윈터 킹>에서 실제 있었을 것 같은 아서 왕을 만났기에 그는 어떤 식으로 그를 현실로 불러내었을까 궁금했다. 첫 장면을 보면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아서의 어린 시절이구나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혀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시녀 그위나다. 이 소녀의 등장과 더불어 우리가 알고 있던 아서 왕은 사라지고 야만인에 폭군인 아서 왕이 등장한다. 사실 이 등장은 너무나도 낯설고 이질적이라 어떤 반전이 후반에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위나의 성주는 아서 왕의 공격으로 죽고, 그녀는 겨우 살아나서 달아난다. 물속에서 힘겹게 나온 후 만나게 되는 인물이 아서의 음유시인이자 마법사로 알려진 마르딘이다. 그는 색슨 족을 브리튼에서 몰아낼 인물로 아서를 선택했고, 그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뭉치게 하기 위해 아서에 대한 전설과 신화를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그의 무공과 용기와 인물을 상상력으로 꾸며서 퍼트리는데 이것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아서 왕의 전설과 비슷하다. 마르딘은 이런 이야기의 힘을 통해 아서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지만 현실에서 그는 이 전설을 전혀 뒷받침하지 못한다. 이런 괴리감은 이 소설에서 모든 갈등과 문제의 시발점이 된다. 

사실 아서 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위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녀에서 생존을 위해 소년으로 분장하고, 이후 다시 소녀로 돌아오는 그녀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마르딘의 시종으로 돌아다니며 남자 아이들과 우정을 쌓는 것이나 이제 여자의 모습이 뚜렷해지면서 다시 여자로 돌아오는 그녀의 변신은 그 시대 상황과 함께 변한다. 이 변화가 약간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지만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본다는 마르딘의 말처럼 이야기 속에 녹아든다. 이후 펼쳐지는 그녀의 활약과 좌절과 고통과 사랑의 감정들은 영웅 전설에 가려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펼쳐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녀의 삶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고 하여도 말이다.

아서 왕에 대한 전설은 사실 만들어진 것이다. 기록도 없고, 실존 인물인지도 알 수 없다. 아서 왕을 성배와 연결시킨 이야기와 원탁의 기사들을 등장시킨 이야기가 큰 줄기를 형성한다면 조금 더 현실성을 부여한 아서 왕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도 작가의 상상에 의한 창작이다. 너무나도 세련된 이야기는 중세 유럽의 생활상을 생각하면 사실 맞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수많은 아서 왕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상상력의 의해, 기존 이미지에 의해 만들 수 있는 매력이 많다는 의미다. 물론 개인적인 호불호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겠지만 말이다. 만약 기존 아서 왕에 대한 이미지를 깨트리고, 조금 더 현실적이고 색다른 느낌을 받고 싶다면 필립 리브의 아서 왕을 만날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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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
빅토르 로다토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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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끔찍해지고 싶어. 끔찍한 짓을 하고 싶어”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지겹고 지겹고 지겨운 게 내 삶인데.”를 외치는 열세 살 소녀 마틸다를 이렇게 만났다. 왜 이렇게 어린 소녀가 이런 말을 하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시선을 끈 문장은 이야기로 파고들기보다 짧은 단문으로 이어지는 문장에 더 시선이 갔다. 간결하면서 독백체로 이어지는 문장은 매력적이다. 문장에 눈길이 더 가면서 첫 문장에 받은 인상은 왠지 모르게 빛이 조금은 바랬다.

마틸다의 언니 헬렌은 기차역에서 죽었다. 처음 마틸다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누군가가 그녀를 밀어 죽였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헬렌은 자살했다. 이런 거짓말은 그녀 안에서 사실처럼 굳어져 있었다. 언니의 자살이 그녀에게 강한 충격을 준 것이다. 그리고 부모들의 삶은 뒤죽박죽이 되고, 강하게 흔들리면서 중심을 잡지 못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마틸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죽은 언니에게 더 집착한다. 광고 글에 스토킹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헬렌. 그녀는 예쁘고 똑똑했다. 마틸다의 친구 애나가 예쁘기만 한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그런 그녀가 자살을 했다. 왜일까? 마틸다는 언니가 숨겨놓은 수많은 기록들을 찾아내고 읽는다. 하지만 그 기록들은 그녀만의 것이지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다. 언니의 기록을 들여다보고 숨겨진 삶을 하나씩 알게 되지만 그것으로 자살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열세 살 소녀가 알고 있는 세계와 열여섯의 예쁘고 똑똑한 소녀가 알고 있는 세계는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 세 살 차이가 크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처럼 어린 나이의 성장기 소녀라면 다르다. 경계선 이쪽과 저쪽 이상으로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언니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그녀가 하나씩 알게 될 것들이기 하다.

열세 살 소녀가 일탈을 꿈꾼다고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친구들과 함께 지하실에서 하룻밤을 보내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부모에게 어리광 같은 투정을 부리지만 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런 그녀의 행동이 단순히 언니를 잃었기 때문일까, 하고 의문을 가지는 순간 또 다른 하나의 사실이 드러난다. 언니가 자살한 아침 크게 싸웠고 죽으라고 소리친 것이다. 어린 소녀에게 이것은 너무나도 큰 상처고 충격이다. 물론 이 싸움만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니의 죽음은 그녀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너무 많은 충격을 주었고, 이 때문에 가족은 본래의 힘과 사랑을 잃고 만다. 사실은 이 상황이 그녀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헬렌의 죽음과 9.11사건과 이라크 사건 등과 같은 것을 같이 다룬다. 테러의 공포를 곳곳에서 풀어놓는다. 9.11 이후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라크 침공 같은 문제에서 자기 집은 군인으로 참가할 일이 없다는 말에선 소시민들의 위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마틸다가 중동여인을 기차에서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고문 등의 공포를 느끼는 것은 신랄한 정치비판을 담고 있고, 중동 여인의 아이들 이름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테러 공포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반전과 종교로까지 상징과 암시는 이어진다. 아는 것이 부족하여 충분히 다 발견 못한 것은 조금 아쉽다.

성장소설이란 것과 오프라 윈프리가 추천했다는 사실에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열세 살 소녀에게 공감하지 못한 나의 문제도 있고, 환경적으로 집중할 상태가 아닌 탓도 있다. 이것은 마지막 장을 읽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아마 문장이 주는 힘과 매력이 없었다면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미래는 모든 것의 가장 큰 비밀”(336쪽)이라고 말할 때 그녀의 힘겹고 지겹고 참혹하고 어두웠던 과거가 미래에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궁금하게 만든다. 다시 충분히 집중할 시간을 낸 후 읽는다면 마틸다의 삶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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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 - 에릭 드루커의 다른만화 시리즈 4
에릭 드루커 지음, 김한청 옮김 / 다른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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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수상 경력과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는 다른만화 시리즈 중 한 권이라 관심이 갔다. 사실 다른만화 시리즈를 읽으면서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다. 아직 읽지 않은 <바시르와 왈츠를>를 언젠가 읽게 되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서평을 보면 더 확신이 생긴다. 가볍게 읽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속에 담고 있는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은 그래픽노블이기에 이번에도 역시 기대를 많이 했다. 그런데 책을 받아 넘겨보면서 당황했다. 단 하나의 지문도 대사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읽어온 만화는 대부분이 일본만화의 영향을 받았거나 일본만화다. 그 덕분에 내용에 상관없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읽지 않는 작품들이 많다. 나중에 그 작품들의 가치를 깨닫고 몇 편 읽기는 했지만 알게 모르게 놓친 작품이 적지 않다. 아마 어릴 때 이 작품을 손에 들었다면 대충 넘겨보고 한 곳에 팽개쳐두었을 것이다. 그림체는 판화 같고, 대사는 없고, 뭔 이야기를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다르다. 뭔 이야기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이 색다르고 강렬한 그림과 그림으로 전하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판화 같다고 했는데 사실은 스크래치보드 작업으로 만들어졌다. 판에 잉크를 바른 뒤에 그것을 면도칼로 긁어내는 방식이다. 이 방식으로 그려낸 그림들이 판화 느낌을 준다. 의도된 작업이다. 이 작업을 통해 만나게 되는 이야기는 날카로우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준다. 한 컷 한 컷을 따로 두고 보아도 멋진 작품인데 이야기로 이어진 것을 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강렬함을 조금은 잊게 된다. 그것은 그림 탓이 아니라 대사와 지문이 없다보니 상상력으로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끝없이 유추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상상력이 어느 순간은 확신 부족으로 뭔 뜻인가 고민하게 만들지만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게 도와준다.

모두 세 편의 단편 만화가 실려 있다. <집>, , <대홍수>다. 별도의 작품들이지만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착각한다. 아마 비슷한 그림체와 남자 주인공의 행동과 모습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모양이다. 첫 작품 <집>은 한 소년이 아침 무렵 잠에서 깨어나 부모가 성교하는 모습을 보고, 창밖으로 한 노동자가 텔레비전 앞에서 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힘없고 지처보이는 노동자가 방송 시작과 함께 잠에서 깨어 직장으로 향하는데 빠른 발걸음과 더불어 점점 활기차게 변한다. 이 과정을 속도감과 힘찬 동선으로 이어간다. 그런데 도착한 직장은 폐쇄되었다. 이후 그는 처진 어깨를 가지고 집에 온다. 집은 퇴거명령이 떨어진 상태다. 작품 해설에는 직장을 잃은 사람이 집까지 잃게 된다는 것으로 풀어내는데 동의한다. 노숙과 부랑자가 단순히 개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 경제적 문제란 점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곳곳에 상징과 의미를 심어 놓아 아는 만큼 보이게 만들었다. 

은 사실 <집>과 이어진 이야기로 착각하고 읽었다. 지하철로 들어간 한 남자의 기이한 환상과 경험이 다루어지는데 원시적이면서도 강렬하다. 음악과 춤이 이어지고, 자유를 만끽하고, 강한 열정으로 사랑을 나눈다. 그런데 이것이 꿈이다. 현실에서 그를 깨우는 것은 무섭게 생긴 개와 경찰이다. 쓸쓸하게 지하철을 벗어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무력하고 처량하다. <대홍수>는 지하철 밖으로 한 남자가 나오면서 시작한다. 제목에서 끊어지지 않았다면 의 그 남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이런 것도 염두에 두고 그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남자가 그리는 그림 속에서 이 만화 속 유일한 단어들이 나온다. 한 에스키모 사냥꾼 이야기다. 위에서 세는 빗물을 우산으로 막고 다른 그림을 그리는데 비오는 날 강한 바람에 우산과 함께 날려간 후에 발생한 모험이다. 마천루와 공장을 지난 후 도착한 곳은 놀이동산이다. 그곳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한 곳에서 두 면에 걸쳐 아주 의미심장하고 함축적인 그림을 보여준다. 아트 슈피겔만의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를 말한 그 대목이다. 이후 이어지는 시위장면과 대홍수는 또 다른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미국의 뒤틀린 가치관과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의 소외라는 주제로 했다지만 나에겐 도시 빈민과 그들의 삶에 더 눈길이 간다. 뉴욕의 마천루와 부랑자나 좀도둑으로 변하는 그를 보면서 현실의 무거움과 무서움을 느낀다. 스크래치보드 작업으로 만들어진 그림과 다양한 장면 구성은 보면서 호흡을 조절하게 만들고, 한 면에 실린 그림을 통해 작가의 의도를 유추한다. 그것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하는데 이 낯설음을 생각하면 그 명성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하소설이니 마음의 눈이니 아름답다고 하는데 지금 이 순간 고개를 끄덕인다. 컷과 컷 사이에, 컷 그 자체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충분히 아름답기 때문이다. 혹시 일본만화에 질렸다면 혹은 그림만으로 충분하다면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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