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년에 한 번 우리시대 스테디셀러 현황을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 며칠 전 이 작업을 다시 하고픈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집 근처 대형서점에서 스테디셀러라고 하는 책들이 몇 쇄나 찍었는지 하나하나 들춰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걸 조사하러 대형 서점을 찾기에는 동기가 약했다. 막간의 시간을 이용하는 게 가장 좋은 기회인데, 어제 바로 그 시간이 주어졌다. 장소는 사당역 파스텔시티 반디문고.

 

스테디셀러의 기준은 책이 발행 된 후 10년 이상 된 책으로 했고, 내가 소장한 책만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몇 부가 팔렸는지는 출판 관계자가 아닌 관계로 정확히 잘 모른다. 그래서 표면적인 방법인 찍은 쇄만을 반영했다. 판을 거듭 찍은 책들은 그만큼 지속적으로 팔렸다는 증거이니 얼추 판매 부수를 어림잡을 수 있을 거다. 소설과 비소설의 1쇄 발행 부수도 출판사마다 다르니, 정확한 판매부수는 정확히 모르겠다. 단지 지속적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양서라는 점만 확인하는 것이 이 작업의 의의라 하겠다.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은 교양 인문학의 대박 출판물이다. 저자가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왕조실록을 알차게 펴냈다. 조선왕조실록의 성공에 힘입어 삼국왕조실록인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실록까지 시리즈로 완결했다. 나도 초판이 나왔을 때 읽어 봤는데, 매우 유익했다. 그래서 삼국왕조실록까지 보았다. 왕조 위주의 정치사라서 단점은 분명했지만, 고교 교과서보다 훨씬 자세하고 쉬운 서술은 이 책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돌려놓았다. 학게에서는 이 책의 가치를 평가절하하지만 이 책의 가치는 판매부수로 그 가치를 스스로 입증해 나가고 있다. 현재 판매되는 광고로는 300만부라하니, 놀랍기 그지 없다.

 

 

1996. 3. 10       초판 33쇄

2004. 10. 25     초판 175쇄

2004. 11. 18     개정증보판 1쇄

2014. 02. 05     개정증보판 94쇄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나의 예상을 완전히 깨버린 책이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읽은 건, 내 뜻에 의한 게 아니었다. 행정학개론 수업을 듣는데, 담당교수가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 내라는 숙제를 내 줬기 때문이다. 당시는 정말 황당했다. 행정학 교수가 왜 우리 문화재에 관계된 책을 읽으라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숙제를 하기위해 책을 읽었지만 매우 재미있었다. 4장 분량의 독후감도 일사천리로 써 낸 걸로 기억한다. 1권이 재미있어, 2권까지 읽었지만 그 후 관심에서 멀어지다가 <북한유산 답사기>까지 나온 걸 보고 다시 관심이 생겼다. 시리즈로 거듭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방송에서도 이 문화유산 시리즈에 따라 연예인들과 답사 여행을 하는 걸 보고 이 책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1993. 05. 20    초판 1쇄

1994. 06. 10    초판 23쇄

1994. 07. 11    개정판 1쇄

2010. 12. 20    개정판 85쇄

2011. 05. 11    개정2판 1쇄

2013. 11. 30    개정2판 18쇄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다. 오래 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래서 에코, 하면 바로 이 책이다! 헌데, 읽기 쉽냐? 천만의 말씀이다. 에코의 소설들은 매우 고약하다. 처음 100여 페이지가 매우 지루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소설의 대명사라 회자되는 이 책이 한국에서 선전하는 걸 보면 놀랍다. 열린책들이 문학시리즈를 세계문학시리즈로 통합하여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나서도 이 책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2010년부터 시리즈로 계속 간행되고 있는데, 열린책들 세계문학 중 이 책의 인기를 넘는 소설은 없다. (<위대한 개츠비>도 5쇄를 넘지 못하고 있다.)

 

 

 

 

 

1992. 05. 25    초판 12쇄

2000. 03. 15    개역판 42쇄

2006. 02. 25    3판 37쇄

2009. 11. 25    보급판 9쇄

2009. 11. 30    4판 14쇄

2014. 01. 20    세계문학판 10쇄

 

 

<로마인 이야기>로 시오노 나나미의 팬이 됐다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사실, 나는 이 시리즈를 3권만 갖고 있다. 1권, 3권, 5권. 읽었냐? 전혀 읽지 않았다. 워낙 베스트셀러여서 읽기가 싫었다. 그리고 10권이 넘는 분량도 읽기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읽었던 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한 권 잡으면 바람처럼 책장이 넘어간다는데, 난 여전히 이 책을 읽지 못하고 있다. 언제 이 책을 읽기 시작할 지는 모르지만 지속적으로 판을 거듭하고 있는 걸 보면 읽을 만한 가치는 충분한 거 같다. 몇 년 전 한길사에서 이 책에 대한 독후감 응모 대회도 한 모양이다. 책으로 묶여 나온 걸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보았는데, 수상작의 독후감을 읽는 맛도 솔솔했다. 어쟀든, 이 책 정말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다!

 

 

1995. 09. 30   초판 1쇄

2013. 07. 05   초판 102쇄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젤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과 더불어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랜동안 스테디셀러로 사랑받아 왔는데, 의외로 그리 많이 팔리지 않았다. 오래 전에 출간됐는데도 불구하고 100쇄를 아직 넘지 못하고 있다. 곰곰 생각해보니, 많은 출판사가 다투어서 출간해 왔기에 그럴 것이라 추정해 본다. 세계문학 작품들 대부분이 인기 작품 위주로 살펴보아도 20쇄를 넘는 책은 별로 없었다. 춮판사가 복수이다보니 경쟁이 심해져서 그런 듯. <개츠비>의 경우는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종류만 7종 정도 됐다. 민음사판이 그 중 가장 많은 쇄를 찍었다. 얼마 전 영화 개봉이 판매 부수를 올려주는 계기가 된 듯.

 

 

 

2003. 05. 06 1판 1쇄

2010. 09. 29 1판 47쇄

2013. 12. 20 2판 20쇄

 

 

파스칼의 저서들이 점점 번역되고 있지만, 파스칼 하면 그냥 <팡세>다. 팡세=파스칼이 자연스럽게 성립할 정도. 하도 유명한 작품이라서 <팡세>도 여러 출판사본이 보인다. 읽어 보면 철학적 수상집에 가깝다. 하지만 철학 총서 시리즈에 포함된 <팡세>보다는 문학 총서 시리즈에 포함된 <팡세>가 훨씬 더 많다. 서양 중세 사상의 중요 고전이기에 기독교 계열의 출판사도 많이 출간했다. 그럼에도 오랜 동안 사랑받아온 <팡세>는 문예출판사본이 아닌가 한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문예출판사 문고본 <팡세>는 1978년판인걸 보면.

어쨌든, 확인해 본 바로는 <팡세> 역시 민음사판이 제일 많이 팔린 듯하다.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10쇄를 넘기지 못했다.) 후발주자인 민음사의 약진이 놀랍기만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팡세 번역본이 아주 많은데, 발췌본부터 완역본까지 정말 천차만별이다~^^)

 

 

2003. 08. 25  1판 1쇄

2013. 12. 09  1판 36쇄

 

 

발타자크 그라시안의 <세상을 보는 지혜>는 판이 약간 변형되고, 하드커버에서 반양장으로 바뀌었음에도 지속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잠언서 계열의 책 중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책이 아닌가 한다. 내 눈에 이 책이 처음 띄었을 당시 출판사는 쇼펜하워가 극찬한 책이라고 선전하고 있었다. 양장본이던 이 책은 정말 불티나게 팔렸던 기억이 난다. 서로 이 책을 선물로 주고 받았으니. 대단한 베스트셀였기에 궁금해서 서점에서 봤는데, 2시간 정도면 다 읽고도 남을 분량이다. 뭐, 그리 강한 인상이 남은 건 아닌데, 왜 이리도 계속 팔리고 있는지 무척 궁금한 책 중 하나이다. 어쨌든 이 책의 인기는 놀랍다~

 

 

1991. 12   초판 1쇄

2005. 10   5판 2쇄(254쇄)

 

 

 

 

 

<경제학 콘서트>는 교양경제학 책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 이 책으로 인해 '~콘서트'를 단 책들이 봇물을 이뤘으니. 원제하고는 한참 먼 이 타이틀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책의 내용 덕분이지 않을까 한다. 경제 이론의 나열이 아니라 경제학적 마인드를 훈련시켜주는 내용이기에 단숨에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스타벅스 커피숍을 데이비드 리카도의 차액지대론으로 풀어주는 경제서적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의 인기를 확신하게 됐다.

이 책의 인기에 힘입어 <괴짜경제학>도 덩달아 베스트셀러가 됐다. 역시 읽어보니, 그럴만하다고 생각한다. 두 책은 이론의 나열이 아니라 나름대로 경제학적 시각이 이런 거라는 걸 사례로 잘 녹여낸 책이기에, 교양 경제학 책임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 두 책은 정말 꾸준히 팔리고 있다. 아직도 쭉~

 

2006. 02  초판 1쇄

2014. 02  초판 156쇄

 

 

사실 이 책이 지금도 꾸준히 팔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니기 때문에. 국제정치학자의 주요 이론서라 할 수 있는 책이 이렇게나 꾸준히 팔리고 있다는 게 신기 했다. 읽어 보면 교과서보다야 괜찮지만 꽤 딱딱한 책이데 말이다. 더군다나 헌팅턴은 미국에서도 보수 우익의 대표 학자이자 백인 우월주의 계열의 학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높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만큼이나 많이 팔렸다는데, 심기가 좀 불편하다. 이 책의 꾸준한 인기를 좀 생각해 보니 답이 금방 나왔다. 샌덜의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 속에 담겨 있는 정서가 아닐까. 우리나라 보수 학자들이 꽤 좋아해서 알아서 석학으로 대접해 주니 언론에서 덩달아 띄워주는 뭐, 그런 경향. 출간 당시 조선 동아 서평을 보고 나도 구매했으니...

철저히 서구 중심 시각으로 세계질서를 바라보고 있는 저자의 논지가 매우 거슬린다. 공격받을 헛점이 꽤 산재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출간 이후 이 책에 대한 비판서들이 줄줄이 나왔다. 헌팅턴이 무리수를 둬 가며 애써 주장하는 바의 논지를 따라가면 의외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997.05  1판 1쇄

2013.07  1판 63쇄

 

 

<제3의 침팬지>로 널리 알려진 문화인류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역저이다. 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황금의 마이다스 손. 매우 무거운 주제의 책들을, 그것도 상당한 페이지를 자랑하며 펴내는 저자이지만 절대 지루하지 않다. 어려운 주제를 흥미 진진하게 펼쳐내는 노 석학의 공력은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른듯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 책. 압도적인 분량을 자랑하는 문명사에 대한 이론서이지만 전혀 이론서같지가 않다. 목차만 봐도 알겠지만 주제들이 매우 굵직굵직하고 범위가 압도적이다. 하지만 책을 펼쳐 읽어 가면 그 두꺼운 페이지가 바람처럼 넘어간다. 러들럼의 <마타레즈 서클>만큼 두껍지만 흥미진진한 면에서는 얼추 경쟁이 될 듯하다. 문명과 문화를 다룬 책이 말이다! 이 책은 내 개인적인 예상으로 100쇄를 넘었을 거라 짐작했지만 그에 좀 못 미쳐 아쉬웠다. 그래도 꾸준히 팔리는 교양 과학 스테디셀러임은 증명되고 있다.

 

1998.08  초판 1쇄

2005.09.  초판 15쇄

2014.03    2판 58쇄

 

뭐, 스테디 셀러 현황은 이쯤에서 줄이도록 하자. 이 외에도 여러 스테디 셀러들이 선전하고 있지만 대부분 30쇄 미만이다. 물론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에 한에서. 더 조사한 책들 가운데 70-80쇄 찍은 책들이 있긴 한데, 내가 소장하지 않고 있는 책이다. 소장 도서 이외에 100쇄가 넘는 책이 있나 봤는데,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대형 서점을 몇 곳 돌면 몇몇 책이 나오겠지만 더이상은 무리인듯하다.

 

와중에 놀라운 속도로 단기간에 베스트셀러에 진입한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로 경제 경영 분야의 자기계발서들이 많이 팔리고 있었는데, 내 예상을 완전히 깨버리는 책들이 있었다. 조사하는 와중에 새롭게 안 정보라서 덧붙여 본다. 이들 책 모두는 100쇄 이상을 찍었고, 샌덜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300쇄에 다가가고 있다.

 

헌데, 샌덜의 책보다 더 압도적인 행보를 보이는 책은 쑹훙빙의 <화폐 전쟁>이다. 경제학 교양 도서로 분류되는 이 책은 정말 '압도적'이라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을 정도이다. 1권의 인기에 힘입어 4권까지 출간되고 있는데, 4권 공히 도서관에서 대출할 수 없을 정도. 대학생 교양도서 대출 순위 꼭대기에서 거의 내려오지 않고 있다고.

 

헛, 그런데 <아웃라이어>와 <넛지>가 100쇄를 훌쩍 넘고 있다는 사실이 신선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4-07-25 0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씁니다. 새로운 스타일의 알라딘 글이라고나 할까요. 줄거리 요약하는 글에 질려버렸는데... ㅎㅎㅎㅎㅎㅎㅎ 이런 스타일로 틈새 시장을 노리시다니요.... ㅎㅎㅎㅎㅎㅎㅎ 좋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지혜를... 이 책이 이리 많이 팔린 줄은 정말 몰랐군요. 출판사 입장에서 보면 베스트셀러보다 스터디셀로가 더 알차지 않을까 싶습니다.


yamoo 2014-07-27 14:45   좋아요 1 | URL
흥미 진진하게 읽으셨다니, 감사드립니다^^ 새로운 스타일의 글....뭐, 그럴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글을 쓰려면 사실 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게 노가다거든요~ㅋㅋ
흠...줄거리 요약하는 글에 질려버셨다는데, 요새 알라딘에 그런 글이 많은 가 보죠? 주로 리뷰아닌 페이퍼를 읽으심이..^^;;

저도 조선왕조실록과 그라시안의 책의 인기를 보면서 깜놀했습니다..ㅎ

루쉰P 2014-07-27 2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 야무님 잘 지내시죠?
오랜만에 왔어요 ㅋ 대단하시네요
집념이 느껴지는 글이에요
저 이제 자주 서재에 올 거에요 ㅋ

yamoo 2014-08-01 00:12   좋아요 1 | URL
와~~~루쉰님 올만입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그간 어찌 지내셨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자주 뵙게 되길 바랍니다. 서재 복귀를 축하드립니다~^^
 

알라딘이 15주년이 됐나부다..

요즘 서재에 많이 소홀해서 거의 모르고 지냈는데...

내가 산책도 거의 1000권이나 되는구나. 그렇지만 알라딘에서 만난 페이지수 누적 순위를 보니 등위는 한참 밀리는 듯...내 앞에 5000명 이상이 있다!!

 

그나저나 알라딘의 통계...정말 유용하다. 각 이미지들도 좋고..

이런 통계치를 제공하는 사이트는 알라딘이 유일한듯..^^

 

어쨌거나, 뒷북이지만 나두 기록으로 남겨둔다~

 

 

           

당신이 만난 책들을
모두 쌓는다면
아파트 5.93층 만큼의
높이입니다.
당신은 알라딘 회원 중
6,376번째로
많은 페이지의 책을
만났습니다.

밀란 쿤데라

움베르토 에코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플라톤

김용운

장 자크 루소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에드거 앨런 포우

임마누엘 칸트

막스 크루제

데이비드 흄

서정복

유시민

미셸 우엘벡

도올 김용옥

에리히 프롬

이반 워드

버트런드 러셀

변광배

송석구

서양철학
교양 인문학
사회사상/사회사상사
심리학/정신분석학

 

http://aladin.kr/e/l140701_15th_record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체홉의 소설을 통해 다시 소설 읽기를 시작했다. 주로 세계문학 작품 위주로 골라 읽어왔다. 대부분 추천작 위주로 보는데, 이상하게도 읽지 못하는작품들이 있다. 자전적 소설이나 가족 서사 그리고 아르누보 계열 작품들은 좀처럼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읽다가 만다. 르클레지오나 오르한 파묵 작품들도 완독한 책이 한 권도 없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현재는 아직 시기 상조인듯하다. 발라드 좋아하는 사람이 갑자기 다크 웨이브를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을까.

 

소설을 선택하는 데에도 분명히 취향이라는 게 작용하는 듯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읽었던 최고라고 생각하는 작품들 중에서 인상 깊은 구절들을 찾아봤다. 어떤 문장들이 나를 반하게 하여 줄을 치게 만들었는지 살펴보면 대충 나의 소설 취향이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생각나는 것 위주로 꼽아 본다.

 

 

 

“당신과 함께 갈 수도 있어요. 나는 자유로우니까.”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언젠가는 자를 거요.”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줄을 붙잡아 맬 뿐이지……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p339)

 

<그리스인 조르바>(열린책들, 2004)는 2008년에 만났다. 참 늦게 만난 편이데, 정말 감동적으로 읽은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 서재에 감상문도 남겼다. 자연과 함께 물아일체 되어 사는 조르바를 보며 자유로운 삶에 대해 심도깊게 생각해 봤다.

 여러 시각으로 이 작품을 읽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나니, '자유'밖에는 생각 나는 게 없었다. 그래서 보스에게 말하는 조르바의 위 말이 가장 인상깊게 다가왔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다니던 직장의 사표를 미련없이 던졌다. 조르바의 말이 결정적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문학의 힘은 대단하다!

 

 

 

 

나를 태워 죽일 불이 금각도 태워 없애 버리리라는 생각은 나를 거의 도취시켰다. 똑같은 재앙, 똑같은 불의 불길한 운명 아래에서 금각과 내가 사는 세계는 동일한 차원에 속하게 되었다. 나는 연약하고 보기 흉한 육체와 마찬가지로, 금각은 단단하면서도 불타기 쉬운 탄소의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때로는, 도망치는 도둑이 고귀한 보석을 삼켜서 숨기듯이, 내 육체의 속, 내 조직 속에 금각을 숨겨 갖고 도망칠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pp 50-51) 
내 관심은, 나에게 주어진 난문은 미뿐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나에게 작용하여 암흑의 사상을 품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다. 미라는 것만을 골똘히 생각하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암흑적인 사상에 자기도 모르게 직면하게 된다. 인간은 아마도 그렇게 만들어진 모양이다. (p52)

 

 미(美)라는 것은 마치 뭐라고 할까, 충치와도 같은 거야. 그건 혀에 닿아 신경 쓰이고 아프게하여,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지. 피투성이의 자그마한 갈색의 더러운 이빨을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이건가? 고작 이런 거였나? 나에게 통증을 주고 나를 끊임없이 그 존재 때문에 고민하게 만들며, 또한 나의 내부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던 것이, 지금은 죽어 버린 물질에 불과하군. 하지만 그것과 이것이 정말로 같은 것일까? 만약 이것이 원래 나의외부 존재였다면 어째서 무슨 인연으로 나의 내부와 연결되어 내 통증의 근원이 될 수 있었을까? 이놈이 존재하는 근거는 뭘까? 그 근거는 나의 내부에 있었을까? 아니면 그 자체에 있었을까? (p153)
모름지기 생명이 있는 것들은 금각처럼 엄밀한 일회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의 온갖 속성의 일부를 담당하여, 대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것을 전파하고, 번식시키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살인이 대상의 일회성을 멸망시키기 위한 행위라면, 살인이란 영원한 오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금각과 인간 존재와는 더욱더 명확한 대비를 보여, 한편으로는 인간의 멸망하기 쉬운 모습에서 오히려 영생의 환상이 떠오르고, 금각의 불괴(不壞)의 아름다움에서 오히려 멸망의 가능성이 느껴졌다. 인간처럼 필멸하는 것들은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pp204-205

 

<금각사>(웅진, 2002)는 한 지인 덕분에 만난 책이다. 한 매체의 대표였던 분과 사석에서 책에 대한 얘기를 하던 중에 가장 감동깊게 읽은 소설이 겹쳤다.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 작품이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였다. 그러더니 나에게 <금각사>를 읽어봤냐고 물으셨다. 아직이라고 하니, 읽어보라고 강추해주셨다. 복거일의 작품과 더불어 자신에게 가장 감명을 준 작품이기에 나 역시 좋아할거라 확신한다면서. 난 자리에서 반드시 읽어 보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당시 보는 책이 따로 있었기에 계속 읽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때 마다 그분은 문자로 읽었냐고 확인사살(?)까지 하는 통에 읽기 시작했다. 정말 단숨에 읽었고, 너무 아름다운 문장이 많아 재독 삼독까지 할 정도였다. 삼독을 마치고 명작을 추천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 대표에게 메시지까지 보냈다.

 이 작품은 금각사라는 절의 구조와 인물의 구조가 완벽히 유비되면서 실로 우아한 하모니를 이루는 작품이다. 그 속에서 미의 이데아가 주인공에게 점점 멀어져 감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그렇기에 '아름다움'에 대한 미시마의 성찰이 작품 도처에 깔려있다.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한 '탐미주의의 최고봉'이라는 찬사가 허언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나에게 다가온 위 인용들은 사실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다.

 

 

 

가난  poverty  명
개혁을 주장하는 쥐들의 이빨을 갈기 위해 고안해 낸 줄칼. 가난을 없애겠다고 제안된 입안(立案)의 횟수는 가난에 고통 받는 개혁주의자들의 머릿수에다가 가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학자들의 머릿수를 보탠 것과 같다. 이 가난의 희생자들은 온갖 미덕을 몸에 지니고 있다. 그리고 가난이 존재하지 않는 번영의 땅이 있을 것이라며 자신들을 그곳으로 데려다주려고 노력하는 지도자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

나이  age  명
자신이 시도하기 어려운 악덕을 매도함으로써, 자신이 여전히 즐기는 악행을 상쇄하는 인생의 기간.  


망각  忘却  oblivion
사악한 인간이 악행을 그치고, 마음이 따분한 자도 안식을 얻는 상태. 명성의 최종 도착지인 쓰레기장. 고매한 이상을 넣어두는 냉동고. 야심만만한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자만하지 않고 자신의 것보다 뛰어난 작품에도 질투를 느끼지 않는 곳. 자명종 시계가 없는 기숙사.

 

무감동의  無感動  apathetic  형
결혼해서 6주일이 지난.  

 

뻔뻔스러움  impudence  명
대담과 야비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수다  loquacity  명
상대방이 말하기를 원할 때, 자신의 혀를 제어할 수 없어 괴로워하는 질환.

 

심통  心痛  distress  명
친구의 성공을 본 것이 원인이 되어 걸리는 질환

 

온정  溫情  cordiality  명
우쭐한 기분을 당장 누리고 싶은 자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간지러운 행동. 
 

지인  知人  acquaintance  명
돈을 빌릴 정도의 안면은 있어도 이쪽에서 꿔줄 정도는 아닌 사람. 상대방이 가난하고 하찮을 때는 고작 얼굴이나 아는 정도라고 말하고, 돈푼이나 있고 유명할 때는 절친하다고 말하게 되는 우정의 정도

 

비어스의 유머와 신랄한 풍자도 나를 매료시켰다. <악마의 사전>(이른아침, 2008)에서 그가 풀어놓는 단어의 의미를 보고 있으면 유쾌하고 통쾌하기 이를데 없다. 풍자, 신랄, 유머라는 의미를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이 딱이다. 영어 단어를 이런 식으로 외웠더라면 아마도 영어의 달인이 되어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쓰치기도 했다. 의미가 정말 잊혀지지 않으니까. 무릎을 치고 뒤 늦게 따라오는 웃음은 더블 보너스!

참고로, 이 책을 너무도 재미있게 읽어서 비어스의  <악마의 위트사전>(함께, 2007)도 보았는데, <악마의 사전>보단 풍자와 유머의 강도가 상당히 떨어졌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분좋게 완독할 수 있는 유일한 '사전'이다.

 

 

 

다음 여덟 가지가 사랑의 증거이다; 심장, 말을 안 듣는 사지, 나른해진 몸뚱어리, 굳어진 혀, 수척한 모습, 눈물, 비밀, 홀로 타오르는 육체의 정염. 이러한 것들이 정열적인 사랑의 여덟 가지 증거이다.

 

다음 여덟 가지가 사랑의 결과이다. 사랑은 심장을 빨리 뛰게하고, 고통을 진정시키고, 죽음을 떼어놓고, 사랑과 관련되지 않는 관계들을 해체하고, 낮을 증가시키고, 밤을 단축시키며, 영혼을 대담하게 만들고, 태양을 빛나게 한다. 이러한 것들은 정열적인 사랑의 효과이다. (p201)

 

연극의 세 천재는? 이 물음에 2명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키냐르에 의해 한 명을 소개받았는데, 그가 쓴 이야기가 정말 아름답고도 경탄할만했다.  교토의 제아미가 일본 무로마치 시대 때 쓴 이야기라고. (아이스킬로스, 세익스피어, 제아미가 연극의 3대 천재로 꼽은 인물들이다.)

 

제아미 모토키요는 15세기 사랑에 적합한 악기를 고안해 냈다.  가죽이 아니라 비단으로 씌운 북이다. 그것은 침묵의 악기다. 그 북은 교토 황궁의 뜰에 있는 월계수 고목의 가지에 매달려 있다. 세월이 흘러 나무는 거대해 졌다. 월계수는 호숫가에 심어져 있었다. 공주가 단언하기를, 만일 누군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북을 살짝만 두드려도 천으로부터 소리가 생겨나, 퍼져서 규방에까지 크게 울릴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면 공주는 침상을 떠날 것이다. 공주는 궁 밖으로 나갈 것이다. 공주는 사랑하는 님에게 몸을 맡기러 호숫가로 달려갈 것이다.

정원사가 손으로 천을 두드려보니 허사여서, 가장 깊은 침묵만을 끌어냈을 뿐이다. 그는 호수 표면에 비치는 북 그림자 속으로 서슴없이 몸을 던진다. 호수가 그를 삼킨다. 그 위로 침묵이 감돈다. 호수 표면이 마지막 잔물결까지도 지워버린다. 그러자 차츰차츰 북소리가 공간을 채운다.북소리가 공주의 귀에 닿자 그녀는 달려나가 자신의 옷을 찢고, 미친 듯이 익사자를 욕망하며, 이번에는 자신이 북을 울려 죽은 자를 불러내려 한다. (pp191-192)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문학과 지성사, 2009)은 정말 명문장의 보고이다. 너무 많지만 그 중에서 특히 나의 주목을 끈 것은 위의 문장들이다. 키냐르는 이 책에서 전형적인 소설쓰기 형식을 탈피하고 있다. 읽고 있으면 이게 소설인지, 수필인지, 단막극인지, 에세이인지 전혀 구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행간을 채운 문장들은 모두 말할 수 없는 것들이 활자로 굳어진 것들이다. 그래서 수 없이 많은 문장들에 경탄을 쏟아 놓게 된다.

 8가지 사랑의 증거와 결과가 위와 같이 파악될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특히나 키냐르가 소개해 주고 있는 제아미의 저 이야기는 너무 매혹적이다. 누가 영화나 연극으로 만들어주면 좋으련만~.

 

 

 

삶은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우리에게 말을 하고 점진적으로 어떤 비밀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믿음, 삶은 해독해야 할 수수께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믿음, 우리가 겪는 일들은 동시에 우리 삶의 신화를 형성하며 또한 이 신화는 진실과 불가사의의 열쇠를 모두 지니고 있다는 믿음. (p 233)

 

어떤 사람들은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을 외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그에 반대하여, 우리는 개별자로서만 개개인을 사랑할 수 있다고 타당한 주장을 한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며, 사랑에 대한 그 말이 증오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덧붙이고 싶다. 인간은, 균형을 갈구하는 이 피조물은, 자신의 등에 지워진 고통의 무게를 증오의무게를 통해서 상쇄한다. 그러나 이 증오를 순수히 추상적인 원리들, 불의, 광신, 야만성에 집중시켜 보라! 아니면 당신이 인간의 원리 자체마저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면, 인류 전체를 한번 증오해 보라! 이런 증오는 너무나 초인간적인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분노를(인간은 이 분노의 힘이 한정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가라앉히고자 할 때 결국 분노를 한 개인에게만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법이다. (p 373)

 

과거에 최면이 걸린 나는 어떤 끈으로 거기에 자신을 묶어놓으려 하고 있다. 복수라는 끈. 그러나 이 복수라는 것은 요 며칠 사이에 내가 확실히 알게 되었듯이, 움직이는 자동 보도 위를 달리는 나의 그 질주만큼이나 똑같이 헛될 뿐이다. (중략)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들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 버린다. 그 인물들은 사실상(자동 보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움직인다)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예전의 얀이 아닌 다른 얀이 역시 예전의 제마넥이 아닌 다른 제마넥 앞에 서 있는 것이며, 내가 그에게 날려야 하는 따귀는 다시 되살릴 수도 다시 복구할 수도 없이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p 396)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모든 것은 잊혀지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질 것이다.(p399)

 

 

"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 "  이 소설의 주인공 루드빅은 이 짧은 농담으로인해 나락으로 떨어진다. 삶의 추락은 갑작스럽게 당하는 사고와 같다. 삶의 사건들은 우연적이면서 부조리하다. 이 소설은 루드빅의 농담을 통해 이를 빼어나게 입증하고 있다.

 쿤데라는 이 작품에 대한 인터뷰에서 "복수, 망각,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역사와 인간의 관계, 본래 행위의 소외, 섹스와 사랑의 분열 등 실존의 주제를 극도로 날카로운 빛으로 새롭게 내리쬐고 있다."라고 했다. 작품을 읽어보면 쿤데라의 말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 인용은 그 중 일부일 뿐. '실존의 주제를 극도로 날카로운 빛으로 새롭게 내리쬐'서 그런지는 몰라도, 회독수를 늘릴 수록 <농담>은 매번 새롭게 다가온다. "쿤데라의 소설들은 아편이다! 건조한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쿤데라 만쉐이~!"

 

 

 

 

순수한 도덕은 유일하고 보편적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무엇이 거기에 부가되지도 않는다. 순수한 도덕은 역사, 경제, 사회, 문화 등 어떠한 요인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순수한 도덕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결정하며, 무엇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조건을 부여한다. 요컨대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관찰할 수 있는 도덕은 순수한 도덕의 요소들과 다른 요소들이 다양한 비율로 혼합된 것이다. 이 다른 요소들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는 다소 불분명하지만, 대개는 종교에서 온 것이다. 어떤 사회의 도덕에서 순수한 도덕의 요소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크면 클수록, 그 사회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회에 보편적인 도덕의 순수한 원리가 충분하다면, 그 사회는 세상이 다할 때까지 존속하게 될 것이다. (p40)

 

<소립자>(열린책들, 2006)를 보고 우엘벡의 소설들을 컬렉션했다. 그가 작품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순수문학에서 추구하는 그런 고리타분한 것(예컨대 사랑)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거대 이슈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캐릭터에 담아 낸다. 이 소설은 정밀한 플롯 구조를 갖는 문학이 아니라 문학적 형식을 빌은 일종의 서구 성문화 비판서다. 사실 성은 매우 개인적인 영역인데, 우엘벡은 이를 사회 윤리와 연결시키는 시도를 한다. 엄청난 시도인데도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소설화시켰다. "다른 소설들이 토끼를 사냥하고 있을 때 이 소설은 거대한 사냥감을 노리고 있다"는 줄리언 반스의 평가도 이런 맥락에서 였을 거 같다. 위 인용은 그래서 꽤 인상깊게 내게 다가왔다.

 

헌데, 우엘벡의 주제의식은 그 전작인 데뷔작에서 훨씬 더 직접적이고 신랄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일기형식에 가까운 작품이지만 우엘벡의 주제의식이 집약적이고도 직접적으로 표출된 작품이라 아주 의미심장하게게 읽었다. 솔직히 문학적 기교는 현저히 떨어졌지만 그의 냉소적 비판의식은 거칠지만 상당히 빛난 작품이라 생각된다.

 

 

목적을 위해서는, 말하자면 철학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잔가지를 과감히 쳐내야 한다. 단순화시켜야 한다. 세부 사항들을 하나씩 파괴시켜야 한다. 나는 단순한 역할을 통해서 역사적인 변화에 일조할 것이다. 우리 눈앞에서 세상은 획일화 된다. 원거리 통신 수단은 점점 발달하고, 아파트 내부는 편리한 기구들로 나날이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차츰 불가능해지고, 그런 만큼 인생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줄어 간다. 온갖 화려한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다. 21세기가 어떨지 뻔하다. (p21)


결국 우리 사회에서는 분명히 섹스도 차별화의 또 다른 체계를 보여 준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돈과는 전혀 무관한 문제이다. 그것은 또한 냉혹한 차별 체계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체계의 효과는 엄밀히 똑같다. 무제한적인 경제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섹스의 자유주의는 <절대빈곤> 현상을 낳는다. 어떤 이들은 매일 사랑을 하는데, 어떤 이들은 평생에 대여섯 번뿐이다. 어떤 이들은 열댓 명의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여자가 한 명도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장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해고가 금지되어 있는 어떤 경제 체계에서는, 각자 어느 정도 자기 자리를 찾는데 성공한다. 간통이 금지된 섹스 체계에서, 각자는 어느 정도 자기 침실 파트너를 찾는데 성공한다. 완전히 자유 경제 체계에서, 어떤 이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실업과 가난 속에 허덕인다. 완전한 자유 섹스체계에서는 어떤 이들은 정말로 다양하고 짜릿한 성생활을 즐기지만, 다른 이들은 자위 행위와 외로움 속에서 늙어 간다. 자유주의  경제는 투쟁영역의 확장이다. (pp 118-119)

 

 <투쟁영역의 확장>(열린책들, 2003)은 <소립자>와 비교해서 봐 줄 수 없는 수준이다. 그냥 에세이 형식의 글을 소설형식에 담으려고 애쓴 습작 수준이다. 하지만 우엘벡의 이 데뷔작은 나름의 가치가 있다. 그가 출간 한 작품들 속에 한결같이 드러나 있는 주제의식의 맹아가 고스란히 담겨있기에. 그가 작품 속에서 일관적으로 비판하는 자본주의와 성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이는 '투쟁영역의 확장'이다. 우엘벡 철학의 근간이 이 책에 오롯이 담겨있다. 위의 인용은 이 책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소립자>를 읽어 봐도 <어느 섬의 가능성>과 <지도와 영토>를 봐도 우엘벡은 결코 이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우엘벡 철학의 결정체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내가 우엘벡 소설에 꽂히게 된 이유는 그의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에 있다. 우엘벡은 <투쟁영역의 확장>에서 이를 직접 밝혔다.

 

나는 어떤 미묘한 심리 묘사로 당신을 매혹시켜 보겠다는 생각은 없다.  나의 세심함과 유머 감각으로 당신에게 박수를 받아 보겠다는 욕심도 없다. 마음이나 외모나 성격 따위의 다양한 상태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능력을 구사하는 것은 작가들의 몫이다. 나는 그런 작가에도 속하지 못한다. 이런 사실적인 세부 묘사를 해나가다 보면 다양한 인물을 자세히 그려 나갈 수 있는데, 나는 그것을 아주 시시한 일들이라고 변명한다. (중략) 목적을 위해서는, 말하자면 철학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작가지를과감히 쳐내야 한다. 단순화시켜야 한다. 세부 사항들을 하나씩 파괴시켜야 한다. (투쟁영역의 확장, p 20)

 

아마도 줄리언 반즈가 "다른 소설들이 토끼를 사냥하고 있을 때 이 소설은 거대한 사냥감을 노리고 있다"는 평가는 이래서 나왔나 보다. 나는 이런 작가의 이런 글쓰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신경숙과 공지영의 소설들을 멀리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순수문학 위주(인간의 감정을 아주 디테일하게 그리는 뭐 그런 계열)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엘벡 소설들을 싫어하는 것 같다. 주위에서 우엘벡 소설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분들을 보니 이런 편견이 생긴 듯]

 

 

 

 

글을 쓴다는 것은 팽팽한 아름다움의 줄위로, 한 글자 한 글자씩 나아가는 일이야.한 편의 시, 하나의 작품, 비단 위에 쓰여진 한 이야기의 줄 위로 말이야. 글을 쓴다는 것은 책의 길 위에서 한 걸음 한 걸음, 한 페이지 한 페이지씩 나아가는 일이야. 가장 어려운 것은 땅에서 몸을 띠워 언어의 줄위에 올라서는 것도  평행봉과도 같은 붓에 의지해서 균형을 잡는 것도 아니지. 때때로 쉼표의 낙하나 마침표의 장애물 같은 남모르는 현기증으로 끊어지곤 하는, 곧은 선을 따라 똑바로 나아가는 일도 아니지.  그래, 시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글이라는 팽팽한 줄 위에 한없이 머무르는 것, 꿈의 고도(高度)에서 삶의 매 순간을 살아가는 것, 단 한 순간이라도 상상의 줄에서 땅으로 내려오지 않는 것이야. 참으로, 가장 어려운 일은 언어의 곡예사가 되는 일이지. (pp98-99) 

 

사실, 막상스 페르민의 <눈>(현대문학북스, 2002)은 조경란 작가가 아니면 있는 조차 모르는 작품이었다.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을 것 같다. 얄팍하고 여백 많고. 더욱이 무명 작가이기에. 하지만 오래 전 조경란 작가의 추천으로 소설을 찾았더랬다. 2008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절판이었다. (알려지지 않고 유명한 작가가 아닌 책들은 소리소문 없이 절판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도서관에서 빌려보려고 했는데, 누군가가 빌려가서 잃어버렸다나 뭐라나. 그러다가 2009년에 지인의 집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빌려 읽은 기억이 있다. 읽으면서 하도 멋진 동화였기에 인상이 깊었고, 정말 뇌에 깊이 박힌 바로 저 문장으로 인해 이 책을 소장하려고 무진장 애써왔다. 헌데 뜻밖에도 알라딘 일산점에 책을 반품하러 갔다가 거기서 만난 것이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집에 오는 도중에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다시 읽으니 예전에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도 발견해서 감동이 2배였다. 그리고 바로 저 문장들. 플롯 구조 속에서 저 부분을 발견하는 순간은 그야말로 전율이 일 정도였으니. 숱한 명작 소설의 명문장들을 봐 왔어도 이처럼 시적이고 아름다운 글을 만난 경험은 정말 드물다. 특히 글을 잘 쓰고 싶은 이들에게는.

 

 

 

뭐, 이쯤에서 줄여야 겠다. 아직 언급하지 못한 작품이 부지기수다. 움베르코 에코의 <푸코의 진자>, 우나무노의 <안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줄리언 반즈의 <플로베르의 앵무새> 등이 이 페이퍼를 쓰기 위해 꺼내 놓은 책들이다. 십여 권이 훌쩍 넘고, 분량상 더 쓰는 것은 무리인 듯싶다.

 

 

 

 

 

 

 

 

 어쨌든, 대충 인용된 부분들을 옮기다 보니, 나의 소설 취향이라는 것이, 잘 짜여지고, 심오하고 정교한 내용의 작품들을 선호하는 것 같다. 단언할 수 있는 건, 진부하고 평범한 주제에 대해 디테일하게 접근하는 작품들은 매우 싫어한다는 거. 하지만 의외로 극단적이거나 삐딱한 내용에 대해서는 관대한 듯하다.

 사실, 이 작업을 한 이유는 내가 아직 모르는 작품들을 찾아 읽기 위해서다. 잘 모르는 작가들을 찾아야 겠는데,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소설 취향을 알고 있어야 겠기에.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의미있는 작업이었다고 자평한다.

 

 

ps.

혹시, 이 페이퍼를 보신 분들 중에서 제 취향에 부합하는 소설을 알고 계신 분이 있으시면 기탄없이 추천해 주시길!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4-03-26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멕 메카시를 좋아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yamoo 2014-03-28 11:51   좋아요 1 | URL
오~ 메카시 소설이 좋다고 추천해 주는 지인이 있었는데...
흠...메카시 작품 중에서 어떤 작품을 제일 먼저 봐야 하는 지 추천해 주세요. 그것부터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곰발님~^^

lmicah 2014-07-18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제가 닿을 수 없는 문학의 깊이와 포스팅의 깊이네요. 알라딘에는 정말 고수분들이 많으세요^^ 제가 읽어 본 책은 <인간실격>이 다네요.ㅎ

yamoo 2014-07-24 19:21   좋아요 1 | URL
헐~ 그 무슨 당치 않는 말씀을...제 포스팅을 보시면 알겠지만 수준이 매우 얕습니다. 왜냐면 제 모토가 얕지만 넓게 알자거든요~^^;;

아마도 관심사가 다르셔서 그럴듯합니다. 저는 lmicah님이 읽으신 책 중에서 겹치는 책이 별로 없습니다.ㅎ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6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근 2년여 간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1년에 많아야 2-3권 쯤 읽었나 보다. 읽고 나도 뭘 읽었는지조차 모를 정도이다. 물론 재미는커녕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소설 읽기를 중단한 듯하다. 아니, 그냥 읽기 싫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겠다. 하지만 와중에 명작이라는 소설들은 계속 사재기를 하고 있었다.

 

2013년 1월 10일에도 역시나 습관 차 알라딘 중고서점 신림점에 들렀다. 콜렉션하는 책이 들어왔나 하고 둘러본 것이다. 한 주에 한 두 번 정도는 내가 원하는 아이템을 건지곤 한다. 이날도 그랬다. 위에서 밝혔다시피 소설은 좀처럼 읽지 않지만 수집은 꾸준히 하는 편이라 유럽 소설 코너에 자주 기웃거린다. 그러다가 열린책들의 미스터노 세계문학 시리즈 두 작품을 발견한 것이다. 체홉의 단편선과 까라마조프의형제들 2권(1권은 그 다음날 구매).

 

10일 날 알라딘에 들러 책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집에서 나올 때 책을 챙겨 오는 걸 깜빡했기 때문. 버스에서 읽을 책을 꺼낼 순간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크로스백을 갖고 나오면서 백팩에 있던 문고본을 옮겨 넣는 다는 걸 잊었던 모양이다.

 

지하철을 탔을 때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알라딘에서 구매한 소설을 읽는 것 외에는 갖고 있는 책이 없으니. 뭐, 소설을 읽지 않고 멀뚱하게 가는 것 보다야 10배 쯤 낫다. 휴대폰 갖고 노는 것 보다는 2배 쯤 유익하고. 분량 상 비교해 보니, 딱 결정이 나 있었다. 체홉 단편선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열린책들, 2003)을 보기로 했다. 단편집이라 짧은 호흡의 작품들 위주로.

 

이 책은 내가 읽는 첫 체홉 작품이다. 그가 어떤 소설들을 썼고 또 어떤 스타일의 작품을 쓰는 작가인지 전혀 몰랐다. 아는 것이라곤 체홉이라는 작가의 유명세 정도. 그래서 아주 오래 전 고전읽기 모임의 주제 도서였다는 사실 뿐. 당시 소설은 읽기 싫었기에 책은 사지 않고 모임도 패스했다. 그러하기에 책은 진작에 구입했어야 했다.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 체홉을 만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었다. 그리고 새 책이 3200원 이라니, 얼마나 착한 가격인가!

 

어쨌든 신림역을 출발함과 동시에 펴든 첫 번째 단편이 「어느 여인의 이야기」였다. 전철에 그날따라 떠드는 인간들이 많아 읽는데 집중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러시아 사람 이름들은 왜 그렇게 길고 기억하기 어려운지. 그냥 데면데면 글자들을 읽고 줄거리를 대충 파악해 가며 읽고 있었다. 극히 짧은 분량(47면~51면)밖에 안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중간쯤에 이르니 처음 상황을 도저히 기억할 수 없는 거다. 다시 집중해서 처음부터 읽어야 했다.

 

아, 그런데 당산역 부근을 지날 때 쯤, 줄거리를 완전히 파악하며 단편을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뭐시냐.....꽤 오래 전에 키냐르의 <혀 끝에서 멤도는 이름>을 읽은 직후의 느낌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직관적으로 느껴지지만 말할 수 없는 뭔가로 인해 한 동안 멍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3개의 역이 그냥 지나가 있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내가 어디 있고, 뭐 하러 가는지 까맣게 잊고, 오로지 ‘삶’에 대한 생각만 가득했다.

 

그리고는 심히 불편했다. 나만 홀로 멈춰 버린 듯한 삶의 실체를 마주하는 느낌 때문에. 급기야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살고’, ‘무엇을 위해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지’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 삶의 비루함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간신히 참으며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그냥 무참히 서 있었다. 손에 든 책은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체홉의 소설은 그렇게 나에게 왔다. 단 다섯 페이지만을 읽고 나는 그가 천재 작가임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주 심플한 이야기 속에 어떻게 삶의 본질적 단면을 담담히 담아 낼 수 있는지 놀랍고 놀라웠다. 평이한 이야기에 삶의 페이소스를 얹는 것은 아무 작가나 할 수 없는 재능이다.

 

이날 집에 와서 단편 몇 개를 더 읽어 봤지만 역시나 명불허전이었다. 「농담」과 「쉿」을 읽고 나서는 작가의 유머와 기지 그리고 풍자의 극한을 맛볼 수 있었다. 정말 그는 미시적인 이야기로도 거시적이고 보편적인 풍자를 능숙하게 플롯에 담아 낼 줄 아는 소설가 중의 소설가였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본 직후에는 ‘다른 작가의 작품은 모두 펜이 아닌 막대기로 쓴 것처럼 여겨진다.’는 고리키의 전언이 내가 하고 싶은 지점을 명확히 짚어 줬다. 체홉의 단편집을 읽고 나니, 내가 전에 그리도 열독했던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들이 그렇게도 초라하게 여겨지는 거다. (뭐, 이상문학상 수상작뿐이겠는가)

 

소설 읽기가 따분해 질 때 만난 체홉의 단편들은 소설 읽기의 재미를 다시 발견하게 해 주었고, 단편 소설의 매력을 다시금 일깨워주기 충분했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정신’을 온전히 드러내 준다. 그래서 돈이 제일이라는 이 시대에 적어도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갖는 가치를 생각하며 살 수 있게 된다.

 

[덧]

* 이 리뷰는 지난 1월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읽고 노트에 써 놓은 글을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과는 두어 달 정도의 시간 차가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제 인사동 한 카페에서 충격적인 말을 우연히 들었다. 외국인과 한국인들이 섞여 있는 무리 옆에 앉아 있었다. 약간 소란스런 와중에 러시아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러시아인이 천천히 말해서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요지는 “너희는 주체성 있는 나라냐?”라는 거였다. 그냥 소리가 날아와 귀에 꽂힌 거였다. 헌데,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외국인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그 한국 친구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뭐라고 대답하던데, 소리가 작고 울려서 못알아들었다. 아마도 역사 공부를 하는 모임같았는데, 카페에서 이런 말을 들을 지는 꿈에도 몰랐다. 이 질문은 내가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오던 문제의 화두여서 더 놀랐다. 이 단상은 아주 오래 전에 탁석산의 <한국인의 주체성>과 신채호 선생의 <신채호 문집>을 보고 끄적거렸던 내용을 생각나는 대로 살을 붙여 마구잡이로 쓴 글이다. 논의가 다소 거칠고 체계가 없더라고 양해 바란다.

 

 



 

 

 

 

 

 

 

 

 

 

 

 

1


역사서를 읽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볼 수 있고 과거에서 교훈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를 볼 때면 항상 답답한 그 무언가가 마음을 누른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 놓일 때까지 주권국가로서 반만 년의 전통을 가진 나라라고 자랑하는 일이다. 하지만 외국인이 지적했듯이 탁 깨놓고 말해서 우리나라가 중국의 속국이 아니었던 때가 언제인지 반문하고 싶다.


그래서 우리나라 일부 학자들과 외국 학자들 상당수는 흔히 우리역사를 가리켜 ‘사대주의의 역사’였다고 논평한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우리 역사를 왜곡할 때, 그리고 일본의 식민사관이 우리역사를 재단할 때도 언제나 ‘사대주의 역사’라고 주장한 것을 본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형식적 책봉관계 운운하더라도 우리역사에서 사대주의는 분명히 존재했고 또 그것이 우리가 남의 나라에 자랑할 만한 역사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역사가 사대주의의 역사라고 하였는데, 그러면 우리 역사상 주체성을 가진 움직임은 전혀 없었는가 하면, 그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우리철학 사상의 토착화과정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창조적이고 주체적으로 외국사상을 우리체계에 맞게 흡수했는지 알 수 있다. 원효의 불교사상은 한국불교사상의 원형을 이룸으로써 그 초석을 놓았다. 중국 주자학은 한국에 도입돼 퇴율 철학의 논쟁 속에서 독자적인 한국 성리학의 토대를 닦았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문자생활의 지평을 피지배층으로까지 확대했다. 우리는 15세기에 독창적인 문자를 갖는 나라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활약은 어떤가. 왕 이하 모든 대소신료들이 조선을 도우러 온 명의 행패를 보고만 있었을 때 이순신 홀로 잘못된 점을 비판하며 명의 장수를 나무랐다. 워낙 추상같고 바른 지적이었기에 명의 장수 진린은 그런 이순신을 흠모하기까지 하여 자신의 실수를 뉘우쳤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난중일기를 토대로 한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그려진 이순신은 그렇게 통쾌할 수 없었다. 확실히 우리의 주체적인 모습이라 할 만 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체적인 움직임은 장구한 우리의 역사 속에서 자주적으로 계승되지 못하고 단절되었다. 우리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은 다름 아닌 큰 나라를 섬기는 사대였다. 특히나 조선은 어처구니없게도 그 사대주의를 천명한 대표적인 나라였다. 오죽했으면 소중화(小中華)라는 표현을 스스럼없이 했겠는가.


이 사대주의 역사가 치욕스럽다면 그 원인은 어디서부터인지 소구해보는 건, 그래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역사가 오직 사대주의로만 일관된 건 아니었다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으니 그 점 또한 간과할 수 없겠다.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너희가 주체성 있는 민족이냐?’고 묻는 외국인들에게 정확히 답하기 위해서라도 사대주의의 역사적 소구 작업은 필요할 듯하다. 역사적 성찰을 통해서 적어도 작금에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기에.


2


사대의 역사, 즉 ‘사대’란 말은 ‘이소사대(以小事大)’의 줄임말이다. 풀자면, 약하고 작은 것이 크고 강한 것을 섬긴다는 의미.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소국이 대국을 종주국으로 섬긴다는 거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러한 사대주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의 시초는 (거칠게 잡아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듯하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은 모두 중국의 책봉 관계 속에 편입되어 제후국으로 봉해졌다. 물론 이러한 관행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반영된 형식적인 관계가 강하긴 했다. 역사를 보면 당시 중국이 3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걸 보면 형식적 관계가 강했다.


이러한 관계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이후에도 그리 달라지지는 않았다. 당을 끌여들여 미흡한 통일을 완성했지만 중요한 것은 당의 한반도 지배야욕을 막아 냈다는 점이다. 당시 신라는 어쨌든 전쟁으로 당의 세력을 이땅에서 몰아냈다. 신라 초기는 그래서 당과 적대 관계였지만 이후 체제가 안정되자 역시 무역을 위해 중국의 책봉제제를 받아들였다. 이후 신라는 당에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다한 것으로 보인다. 당과의 무역은 신라에게 매우 이로운 일이라 조공 관계는 그리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단지 외부에서 봤을 때 형식적으로 중국 세계에 편입된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신라가 망하고 후삼국의 통일을 마무리한 고려는 처음에는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아 북진정책을 추진했다. 고려 전기를 보면 중국과의 항쟁이 주를 이룬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국가였던 거란 족이 3차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 사건으로 알 수 있다. 전쟁을 해서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거란으로부터 자주국가로 인정받았다. 광종이 독자적인 연호를 썼던 것은 중국과 대등한 황제 국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고구려 광대토왕 이후 우리 역사에서 드물게 황제 국가로서의 위신을 선포한 때였다.


하지만 이는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 거란의 연호를 쓰기로 결정했지만 당시 동아시아 3국의 세력은 팽팽하여 안정된 국면을 맞이했다. 고려도 형식적인 책봉관계를 받아 들였을 뿐 중국을 받드는 사대외교는 이때까지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2세기 들어오면서 한반도 북쪽 만주지역에 살던 여진족이 강성하여 나라를 세우게 된다. 화북 지방까지 세력을 떨친 여진족은 금을 세운 뒤 연운 16주를 차지했다. 이후 송을 남쪽으로 몰아내는 정강의 변(1126~1127년)으로 화북지방을 송두리째 빼앗으며 송을 신하의 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는 다음 공격 목표를 고려로 정했다.


사실 여진족은 고려 초기부터 우리나라 북쪽 국경선에 살면서 고려에게 식량과 농기구를 구걸하다시피하며 생활 했다. 수렵으로 잡은 동물의 가죽 등을 갖고 와서 먹을 것과 교환해 갔다. 무역을 거부하면 애걸복걸하면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다. 실록과 각종 역사서에 보면 나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보잘 것 없던 미개한 여진족이 고려 중기 이후 송을 남쪽으로 밀어낸 것이다. 화북지방을 차지한 금은 과거에 부모의 나라로 섬겼던 고려에 대해서 형제국의 예를 맺자고 사신을 보내온다. 쉽게 말해서 자기들을 고려가 형님으로 대접해 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서 고려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무례한 놈들이라고 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금나라를 손봐줄 생각은 좀처럼 하지 못한다.


이때 묘청이라는 승려가 나와 금의 콧대를 꺽어버리자고 일갈한다. 처음에는 왕 이하 조정대신들이 솔깃했지만, 당시 정세상 금의 군사력은 동아시아 최강이었다. 묘청과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서경파(북진의 전초세력들)는 우리의 자주를 위해 금의 되먹지 못한 요구를 깨부수려고 천도까지 계획한다. 이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낀 왕과 대신들은 묘청의 이러한 행동을 제한한다. 거기까지만 하라는 것이다. 그냥 전쟁 없이 금을 형님 대접해주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에 대해 묘청 일파는 불합리한 정치적 결정이라 생각하고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이것이 유명한 고려시대를 뒤흔든 ‘묘청의 난’이다. 묘청은 나라의 자주를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호를 ‘대위’ 국호를 ‘천개’라 하며, 금 정벌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안타깝게도 김부식으로 대변되는 개경파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1135년에 있었던 이 사건의 이름은 사건을 평정한 사람들의 사관이 투영되어 '난'으로 기록되었다. 김부식은 묘청을 잔혹하고 정권의 욕심이 아주 많은 인물로 그려 그를 폄하했다. 왕과 백성을 혹세무민한 대역죄인이라 평했다. 정권을 잡은 개경파의 사관이 투영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김부식의 평가는 후대에 새롭게 평가받기에 이른다. 이후에는 '서경천도 운동'이라 명명하며 금에 대한 우리의 자주의식을 천명한 사건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신채호는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우리나라가 사대를 하기 시작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했다. 그는 이 사건을 ‘우리 역사상 제일대 사건(조선 천년 제일대 사건)’으로 보았다. 개경파와 서경파가 나뉘어서 정권을 놓고 싸운 게 아니라 아주 중요한 역사의식의 심각한 충돌로 해석한 것이다. 우리가 자주의식을 잃고 사대로 일관한 것은 묘청이 김부식 일파에게 패한 바로 그때부터 시작됐다고 신채호는 평가하고 있다.

 

모든 역사책과 기록에서 묘청과 서경파에 관계된 자료와 사서들은 제거 되었고, 이후 개경파의 역사의식이 투영된 <삼국사기>가 우리 역사 최초의 정사 기록으로 남게 되었으니,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삼국사기>는 금에 대한 사대의 예를 다한 김부식의 투철한 유교적 역사의식이 고취되어 있는 사서이다.

 

이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사대주의의 역사’는 유구한 시간을 갖고 내려오면서 우리의 의식을 지배했다. 사대의 유전자는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잉태되었다. 고려의 저 묘청의 사건은 이후 매번 다른 상황의 옷을 갈아입고 역사에 종종 출몰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명은 멸망했다. 조선에 파병한 군사력의 손실로 인해 청나라의 공격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명을 멸하고 청 왕조를 세운 민족은 금나라의 후신인 여진족이다.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 청은 금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고려의 후신인 조선에 형제의 맹약을 맺자고 소식을 전해온다. 이 사건이 정묘호란이다.

 

정묘호란은 꽤 심한 반발이 있긴 했지만 일단 형님으로 대접해 주는 선에서 타협을 보고 사건은 마무리 된다. 하지만 정묘호란이 있은 지 얼마의 시간이 흐르지 않아 전세는 변하여 이번에는 청이 군신의 예를 맺자고 소식을 전해온다. 이에 조선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미개한 무리들의 요구를 물리치고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무리와 전쟁 없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선에서 그치고 그 사이 우리의 힘을 기르자는 무리로 나뉘어졌다. 두 파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와중에 결론은 나지 않고, 청 태종은 직접 조선을 정벌하러 내려오는 사태가 벌어진다.

 

1636년 청 태종이 조선을 정벌하러 온 이 사건을 일컬어 병자호란이라 한다.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전, 김상헌을 비롯한 척화주전파는 청과 싸워 장렬히 전사하는 한이 있어도 오랑캐에게 굴복할 수는 없다고 일갈한다. 이에 대해 최명길로 대변되는 실리주의의 주화파는 우리의 힘이 청에게 상대가 되지 않으니, 일단 청의 요구를 들어주고 이후 힘을 길러 우리의 자주성을 찾자고 주장한다.

 

이 싸움에서는 고려와 달리 천화주전론이 승리하여 청과 싸움을 하지만, 이건 전쟁이 아니라 그냥 농성에 그치고 말았다. 남한산성에서의 40여일의 기록이 이때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전쟁의 결정이 우리의 자주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에 있었다는 점이다.


명을 받든 소중화(小中華), 다시 말해서 조선이 명을 대신해 복수하여 중화사상을 회복한다는 거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조선의 자주성을 회복하자는 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최명길의 입장에서 나온다. 어쨌든 소중화를 자처하고 행한 청과의 전쟁에서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맛보고, 깍듯하게 청에게 사대의 예를 다하게 된다.


시간은 흘러흘러 세도정권이 끝나고 세계 열강들이 이양선을 타고 우리 근해에 나타나는 시대가 도래 한다. 일명 구한말의 시기. 일본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와 러시아가 조선과 무역을 하기 위해 배를 타고 나타났다. 이 중에서 제일 열심인 나라는 일본. 일본은 치밀한 계획 하에 조선을 개항하여 청에 대한 종주권을 부인케하고 조선을 독립시켜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들 시나리오를 계획하고 있었다. 강화도 조약으로 시발된 이 시대에는 자주와 사대의 싸움이 개항과 척사의 옷을 입고 재등장하게 된다.


조선후기에 등장한 개화와 척사의 대립은 일제시대 이후 ‘선 독립 후 실력양성파’와 ‘선 실력양성 후 독립파’로 갈려진다. 선 독립 주창자들은 위정척사의 의식을 갖고 자주를 지켜온 자들의 생각을 대변한다. 그들은 독립을 위해 끝까지 최후의 한 사람까지 대일전쟁을 할 것을 맹세한다. 후자인 독립보다 실력양성이 우선이라는 자들은 곧 인조대의 실리파와 궤를 같이 한다. 이들은 독립을 하기위해 일본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 실력을 키운 후 독일을 하자고 주장했다. 일제 36년 간 무장독립 투쟁과 애국계몽 운동은 자주와 사대(실리)의 또 다른 표출이었다. 어떤 것이 더 옳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실력양성 측인 애국계몽운동을 한 많은 인사들이 친일 행각을 한 것으로 보아, 현재의 우리는 무장독립투쟁파가 더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평가하고 싶을 뿐이다.


3


그리고 이러한 대립 양상은 냉전체제로 분단국가가 되고 6.25를 겪으면서 복잡하고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고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출발한 대한민국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삼았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우익의 세상이 된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를 정재계에 고루 등용하여 친일파가 권력을 잡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거쳐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를 지배한 이들은 친일파의 후예들(작금의 보수이자 우익)이었다.


이들은 구한말 개화파, 그것도 일본의 세력에 빌붙은 후손들이다. 자주국가 건설과 무장 독립투쟁을 외쳤던 민족지사들은 대부분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해방과 함께 북으로 넘어갔다. 이것이 남한의 비극이자 나라의 주체성이 없어진 결정타였다. 비록 소수의 자주 계열이 남한에 남아 있긴 했지만 박정희 정권 하에서 독립투사들의 후예와 함께 빨갱이로 몰려 완전히 몰락했다.


작금의 진보 대 보수의 갈등은 전통적인 자주 대 사대의 도식으로 볼 수 없는 복잡한 양상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의 진보는 영미의 진보 개념이 아니며, 역시 보수도 영미의 보수 개념이 아니다. 우리의 보수 진보 논쟁은 색깔 논쟁을 넘어 종북이냐 아니냐로 확대되고 있다. 국가의 자주적인 국부를 위해서는 그 어떤 관심도 없는 게 현 정치권의 세태이다.


우리는 주한 미국의 주둔과 보호 속에 국방의 자주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며 각종 이권을 미국에게 빼앗기고 있다. 한미 FTA뿐만 아니라 차세대 전투기 사업을 둘러싼 잡음들 역시 한국의 기득권층이 이권을 미국에 넘겨주기 위해서라는 게 지배적인 시각이다. 현재의 외교 노선은 그야말로 미국에 대한 현대판 사대로 일관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외교역시 소극적이고 국가의 영토적 환경적 이익에서 할 말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이 시시때때로 외치고 있는 독도 영유권에 대해서는 본질적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외교는 구한말과 비교해 결코 나아보이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 초기에 미국에서 윤창중 사건이 터진 외교에 그 어떤 기대를 할 수 있을까? 일본 원전 사고로 방사능 유출수가 쏟아진다고 해도 일본산 해산물을 안전하다고 수입하는 나라다. 우리나라 국익과 자주를 위해 어떤 외교적 성과가 있는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친일을 정당화하고 일본의 한국지배를 정당화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파동은 이 나라 우익의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우리는 얼떨결에 사대주의도 모자라 친일 정권을 우리의 집권 정당으로 가진 나라가 된 것이다.



4


외국인이 우리에게 “너희가 주체성 있는 민족인가?”라고 물으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고려 김부식의 금에 대한 사대당이 조선의 소중화 사상을 거쳐 개화파로 그리고 친일파로 내려온, 이 기득권의 역사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저 외국인의 물음 앞에 반성을 하고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의 우리는 주체성 있는 민족이 아니기에 그렇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 생각해 보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반성하고 행동할 때 저 묘청의 자주 정신은 되살아 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이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놀 2014-03-01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한국사람다운 한국말을 쓰는지 알 길이 없곤 해요. 그러나, 누구나 한국말을 쓴다 하더라도 한국말이 어떤 한국말인지 제대로 들여다보는 사람이 거의 없지 싶어요.

말부터 말답게 쓰지 못하니, 역사도 역사답게 헤아리지 못하고, 문화도 문화답게 가꾸지 못하고, 정치도 정치답게 지키지 못하고...... 모두들 똑같이 흐르지 싶습니다.

외국사람이 한국사람더러 '너희는 진짜 한국말을 쓰는 사람인가?' 하고 묻는다면.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하는 저조차도 '아니다' 하고밖에는 할 말이 없기도 합니다.

2014-03-03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