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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길리우스의 죽음 1 ㅣ 세계문학의 숲 21
헤르만 브로흐 지음, 김주연.신혜양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평점 :
보통 서양철학 원전 텍스트를 읽다가 보면 흐름을 놓쳐 텍스트를 다시 읽는 우를 범하곤 한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하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해당 부분을 돌아가 다시 읽고 한다. 그 이유는 번역이 이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장 속에 담긴 개념의 비유 또는 상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
헌데 소설 문학에도 이와 비슷한 난해한 작품들이 있다.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의 책들은 지루하고 난해한 문학의 대명사로 회자된다. 다른 작품을 읽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수고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이데거나 베르그손의 텍스트를 읽는 것과 견줄 수는 없다. 집중해서 철학 텍스트를 읽는다고 생각하면 이러한 난해성은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니까. 조이스, 무질, 푸르스트의 대표작들은 단지 분량이 많고 서사가 지루하다는 걸 제외하면 딱히 읽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 바로 헤르만 브로흐다. 이 사람의 책은 문학임에도 철학 원전 텍스트를 읽는 느낌이 강하다. 올 초 <몽유병자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76페이지까지만 읽고 잠정 보류 상태에 빠졌다. 읽으면서 흐름을 놓치기 일수였고, 도대체 서사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안보였다.
의식의 흐름 기법이 무엇인지 여실히 깨닫긴 했지만, <율리시스>보다 더 읽기 힘들었다. 조이스의 책들도 100페이지를 넘기지는 못했지만 지루해서 그렇지 맥락을 놓쳐 이해가 안 되어 포기하지는 않았다. 프르스투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마찬가지.
10월에 의미 있는 독서를 해 보자고 다시 시도한 책이 브로흐였다. <몽유병자들>에 데여서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을 펼쳤다. 지난한 과정이 읽는 내내 지속되었다. 어렵게 1부를 지났는데, 이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읽어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서 2페이지 단위로 끊어 3번씩 읽었다.
진짜 더디게 읽고 있지만 이 행위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브로흐만의 ‘철학적 망상(내식으로 표현하면 그렇다는 거)’을 읽는 치명적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브로흐는 산문을 운문으로 참 잘도 표현하는데,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심오한 철학적 ‘망상’이다.
여기서 나는 ‘망상’을 내식으로 조금 그 정의를 비틀어 봤다. 네이버 사전에 나와 있는 ‘망상’과 비교해 보시라. 내가 이 소설을 읽고 바로 떠올린 게 바로 ‘망상’에 닿아 있었기에.
망상(妄想, delusion) : 있지도 않은 것을 마치 사실인 양 믿거나, 논리에 맞지 않은, 논리를 초월한 생각을 하는 것. 근거가 없는 주관적 신념. 사실의 경험이나 논리를 확장하여 현실의 모순을 구현하는 믿음.
니체와는 다른 철학적 아포리즘이 시적 산문으로 표출된다. 논증이 필요 없는 비유와 상징이 현재의 시공간과 교차하면서 펼쳐진다. 망상이지만 결코 소설의 개연성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시공간의 상황은 단순하지만 그 찰나에 개입하는 소리에 망상의 미학이 시작된다. 시작과 끝은 항상 현재 시공간에 매인 주체로 계속 환기된다.
“오오, 신들조차도 신성시하지 않음을 아는 신과 인간이 똑같이 품는 지각에서, 피안과 차안 사이에 팽팽히 쳐진, 불온한, 으스스하게 투명한 마령 같은 양자의 제휴에서 생겨나는 웃음, 그 제휴의 어렴풋한 마령의 영역에서 신과 인간은 만남을 이룩한다.” (p180)
“부드러우면서도 오만하고, 마음을 녹일 듯하면서도 강압적이고, 밤의 광휘를 띠고 있으면서도 깊이 숨어 있는, 자연스럽게 울려 나오는 말과 자연스럽게 울려 나오는 영혼, 언어와 인간성의 통일―그것은 마치 모든 지상의 나이를 모르는 과거의 청춘이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듯했고, 그러면서도 이미 영원히 종말을 모르는 고향으로부터의 인사였다.” (p283-284)
이게 알프레드 자리(또는 욘 포세)와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결코 망상으로 그치지 않는다. 망상은 미학적으로 전개되면서 철학적으로 심화된다. 개연성이 없는 헛소리의 망상 같지만 다음 페이지에 그 망상이 헛된 이유가 적시되면서 의식의 흐름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아름답고 치명적인 문장들이 모여 아포리즘을 만들고 바로 다음 순간 전혀 다른 관념이 끼어들어 사고의 흐름을 방해하는 듯하지만 결국에는 주체의 상태(감정)를 말하는 바로 귀결된다. 귀결되는 순간 다시 의식은 다른 사고를 향해 달려간다. 이러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대구와 비유 그리고 상징으로 이루어진 문장들을 따라가다가 2-3번 읽고 음미하다 보면 경탄하게 된다. 이러한 문장들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브로흐의 관념, 이러한 작품을 쓸 수 있는 브로흐의 박학다식과 사색의 깊이에 빠져 같은 페이지를 반복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한 번에 읽어 알 수 없는 의식의 흐름과 관념의 흐름을 플롯 구조에 무지막지 흩어 놓아 반복해서 읽고 줄을 치게 만든다. 그렇지만 여전히 난해하여 앞의 부분을 잊어버리는 이 지난한 과정, 이 과정을 이겨내고 획득하는 문학적 과실은 달콤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읽기를 지속할 수밖에.
사실 브로흐는 철학을 전공했다. 심지어 비엔나 학파에까지 가입되어 있었다니 실로 놀라웠다. 하지만 브로흐는 말할 수 없는 그 형이상학에 대한 끌림을 버릴 수 없어 문학으로 전향했고, 그 결과 우리는 철학적 망상을 집대성한 이 놀라운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새로운 문학적 경험을 일깨워 준 브로흐에 경의를 표하며, 우리말 읽듯이 읽을 수 있게, 이 난해한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해 주신 역자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린다. (끝)
[덧]
1. 정말 술술 읽히는 번역본. 하지만 초집중하지 않으면 읽어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희한할 정도로 난해한 문학 작품.
2. 책 좀 읽는 다는 사람들과 함께 오래 전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 모인 사람들 모두가 이렇게 어려운 책은 자기 독서 인생사에서 처음이라고 했는데, 읽은 느낌상 이 책을 같이 읽으면 동일한 원성을 듣게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