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올해 발표된 사루비아 선정작가 4인 중 박다솜 작가 작품을 봤다. 종이의 물성을 실험하면서 꿈을 불러와 인간의 가치를 새롭게 환기하는 작품들. 89년생. 이화여대 미대 학부 및 대학원 출신. 22년 금호영아티스트 선정작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품들이지만 화면이 외국 작가들에서 많이 봤던 거. 저게 동시대 회화의 담론이라니. 스페이스 사루비아에 급실망했다. 대안 공간에서 볼만한 회화가 아니랄까.




나는 대안공간(사루비아, 루프 등)이 국전 보다 더 동시대적이라서 회화도 회화의 본질을 건드리거나 과감한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작가들을 선정하는 줄 알았는데, 대안 공간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를 게 없다는 인상이 짙다. 24년도 루프 공간에서 봤던 회화는 이해할 순 없었지만 시도는 그럴듯했고 이런 시도도 가능 하구나 하는 걸 느꼈다.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작업. 동시대 회화가 건들여 볼 수 있는 가능성. 당시 이해할 수 없고 내용과 형식이 정합적이지 않았지만 그 불편함이 의외로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게 했다. 대안 공간 다운 전시였다.



 

근데 2026년 사루비아는 너무 안전지향인듯해서 실망이 컸다. 이랜드나 태평양에서 공모하는 것과 다를게 뭐지? 라는 느낌. 그래서 원래 대안 공간 이란 곳에서 가지는 일종의 선입견. 즉 대안공간에서 선정되는 작가란 이야, 진짜 회화에서 미친넘이 나왔구나. 이런 시도를 하다니. 매우 전복적이네라는 생각이 드는 작가들이 선정되는 공간인 줄 알았다는 말씀. 뭐랄까 박다솜 작가가 보여주는 작품들은 내가 루프에서 봤던 날 것과는 심하게 대비되는 화면이었다. 그래서 학맥에 의해 정교하게 위치지워진 작가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가 박다솜 작가 작품을 보면서 느낀 게, 제도권(대학)에서 동시대 회화를 하면 정교하게 조율된 화면이 된다는 거. 한국미술계의 생리겠지. 평론가와 큐레이터가 지향하는 바가 딱 박다솜의 회화를 보면서 느껴진다랄까. 날것이 아니라 세현되게 포장된 느낌이 강하다. 문법 안에서 변주라는 느낌. 감각은 세련됐지만 위험성은 관리되어 있고 제도 내부에서 충분히 해석 가능하며 낯설지만 불편하지는 않은 방향. 이게 요즘 동시대 미술을 지향하는 한국의 시선인듯하다.

 



한국은 왜 현 시점에서 이 이미지가 한국 동시대 회화를 대표한다고 생각한 걸까? 종이물성 실험은 이미 회화에서 끝났고, 페미니즘--꿈 주제 역시 비엔날레의 복재에 지나지 않는다. 왜 지금 박다솜의 회화가 한국의 동시대 회화의 첨병인가? 대안 공간의 게이트 키퍼들은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2000년에서 2010년대 영미 유럽 30대 회화들 보면 확실히 화면에서 말하는 바가 강력했다. 특히 추상은 화면이 매력적이고 다층적이며 어떻게 이런 화면을 구축했지! 하는 놀라움을 줬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도록을 봐도 역시 매력적이다) 이에 비하면 박다솜 작가의 화면은 나쁘게 말하면 유아틱하고 좋게 말하면 감성회화처럼 보인다. 한국의 대안공간들은 시간을 거꾸로 가는 듯하다.

 

60년대 아스거 욘이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그림에 낙서를 한 행위가 한국의 현재 대안공간의 시선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강력한듯하다. 60년대 그런 시도를 했는데말이지. 폰타나는 캔버스를 찢기까지했는데, 그에 비해 26년 한국의 대안공간 사루비아는 너무 안전지향적인 듯하다. 2-3년 전 비엔날레 주제가 여전히 대안공간까지 점유한 느낌. 페미니즘-몸에 대한 주제가 아직까지 한국 동시대회화에서 강력한 걸 보면, 한국은 참 미술에서는 담론을 선언하는 위치에 있지는 못한 듯하다. 올해 사루비아 선정 작가 보고 느낀 내 실망의 본체다.

 

비교 대상으로 영국의 핫한 동시대 작가 자데이 파도주티미 작품들을 함께 올려본다. (20년 전시 모습) 대학원 졸업(20년, 당시 25세)하고 몇 번 전시회를 했는데, 작품들을 사려고 줄을 섰다는 20대 여성 작가의 작품이다. 박다솜 작가의 계열과 비슷한 반추상에 선을 사용하는 면까지 비슷하지만, 화면의 에너지가 다르다. 평면에서 자기 언어를 끝까지 밀어붙임 느낌이 강하다. 내가 박다솜 작가의 작품이 유아틱하다고 느낀 지점이다. 전달되는 에너지 면에서 너무 확연한 차이가 난다. 안전한 동시대 회화는 이 정도가 대안공간에서 볼만한 화면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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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병자들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61
헤르만 브로흐 지음, 김경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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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안온한 휴식보다는 지적인 투쟁에 가깝다. 특히 베르그손의 지속이나 기억의 문제를 조형적 언어로 고민하는 나에게,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2010, 열린책들)은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거대한 철학적 텍스트로 다가온다. 밀란 쿤데라가 이 작가를 그토록 상찬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브로흐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을 인식론적 차원까지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삼부작은 분명 읽기 녹록지 않은 고역의 시간을 요구하지만, 그 시간을 견뎌낸 자만이 맛볼 수 있는 지적 황홀경이 그 안에 숨겨져 있다.



1. 낭만과 허무, 그리고 가치 붕괴의 마티에르


이 소설은 1888년의 낭만주의, 1903년의 무정부주의, 1918년의 즉물주의라는 세 단계를 통해 유럽 정신사의 궤멸 과정을 추적한다. 작가는 인물들을 몽유병자로 명명한다. 이는 과거의 가치가 붕괴된 폐허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발을 내딛는 현대인의 초상이다.


내가 캔버스 위에 색면을 겹겹이 쌓아 올리며 아비투스를 탐구하듯, 브로흐는 인물들의 내면을 겹겹이 쌓아 올린다. 파르크니우가 낡은 제복의 권위에 매달리고, 에슈가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질서를 갈구하는 모습은 마치 마티에르가 두껍게 올라간 유화처럼 묵직한 질감을 형성한다. 때로 묘사가 지리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그것은 삶의 본질적인 중량감을 재현하기 위한 작가의 치열한 붓질이다. 서사의 속도감에 길들여진 독자라면 고통스럽겠지만, 그 느린 호흡 속에 담긴 사유의 밀도를 느끼기 시작하면 이 지루함은 어느새 숭고함으로 변모한다.



2. 소설의 지평을 확장하는 가치 붕괴의 철학적 변주


3권 후반부에서 서사를 멈추고 직접 등판하는 가치 붕괴라는 논문조의 삽입절들은 이 소설의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지점이다. 나는 예술가가 자신의 사상을 조형적 서사로 완벽히 녹여내지 못하고 직접 설명하는 것을 경계해왔으나, 브로흐의 시도는 차원이 다르다. 그는 소설이라는 그릇 안에 철학적 논리 자체를 하나의 오브제로 던져 넣는다.


전 지구적 가치가 파편화되고 각자의 논리만이 득세하는 시대를 향한 그의 분석은 서늘할 정도로 명확하다. 이는 내가 현대미술의 복잡한 층위 속에서 철학적 근거를 찾으려 애쓰는 과정과도 맞닿아 있다. 브로흐는 말한다. 가치가 붕괴된 시대에 인간은 각자의 논리 속에 갇힌 몽유병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이 지독한 통찰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오히려 자본과 텍스트가 뒤섞인 현대 사회에서 더욱 강렬한 울림을 준다.



3. 고통스러운 독서 뒤에 찾아오는 쓸쓸한 아름다움


​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한동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윌리엄 트레버가 보여주는 단정한 쓸쓸함과는 또 다른,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간 뒤의 적막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브로흐는 무너져 내리는 세계의 잔해를 하나하나 수집하여 소설이라는 거대한 박물관을 지었다.


이 책을 읽는 과정은 마치 거대한 추상화를 완성하기 위해 수천 번의 붓질을 반복하는 고독한 작업과 같다. 재미라는 얄팍한 기준으로는 이 책을 온전히 평가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현대미술의 난해함을 지루함으로 치부해버리는 것과 같다.


<몽유병자들>은 지독한 인내를 요구하지만, 그 끝에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위대한 서사를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은 내 서재의 가장 깊은 곳, 가장 손이 잘 닿는 곳에 머물며 나의 예술적 사유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스승으로 남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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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6-05-15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정말요? 거의 찬사에 가까운데요? 이러면 괜히 흔들립니다. 저도 그러는 줄 알고. 저한텐 거의 고문에 가까울 수도 있는데. 😂 저는 이제 외국문학은 거의 못 읽게된 것 같아요. 얼마전 뤼팽 선집 한 권 읽어보려고 했는데 재미가 없으니. ㅠ 마침 스티븐 킹의 책을 읽어야해서 다행이라고 해얄지. ㅋ 암튼 지루하고 어려운 소설도 잘 읽으시니 부럽습니다.

yamoo 2026-05-15 12:53   좋아요 1 | URL
와우! 스텔라님이시다!!ㅎㅎ 잘 지내시나요?
찬사긴 한데...이거 잡으면 정신건강에 해로와요. 안 읽으시는게 좋습니다..ㅎㅎ
제가 위에도 썼다시피 전 철학텍스트로 대했어요. 철학텍스트로 읽으면 읽을만합니다..ㅎㅎ 끝까지 읽으면 왜 밀란쿤데라가 상찬했는지 이해가 되요..
 
물질과 기억 대우고전총서 17
앙리 베르그손 지음, 박종원 옮김 / 아카넷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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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기억·신체의 관계 구조


문제 설정: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넘어

물질과 기억은 앙리 베르그손의 핵심 저작으로, 전통적인 심신이원론(정신 vs 물질)의 틀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다. 그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처럼 정신과 신체를 별개의 실체로 보지도 않고, 단순한 유물론처럼 정신을 뇌의 산물로 환원하지도 않는다. 대신 이미지(image)”라는 중간 개념을 도입하여 세계 전체를 이미지들의 총체로 파악한다. 여기서 신체 역시 하나의 이미지이며, 특수한 기능즉 행동을 위한 선택과 지연을 수행하는 중심으로 정의된다. 이 책의 핵심 질문은 지각은 어떻게 형성되며, 기억은 어떤 방식으로 현재의 행동에 개입하는가이다. 결국 그는 의식, 기억, 신체를 하나의 작동 체계로 이해하면서 지속이라는 시간 개념을 그 기저에 둔다.


1. 지각은 선택된 이미지

1표상을 위한 이미지들의 선택은 이 책 전체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베르그손은 우리가 세계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하는 통념을 부정한다. 외부 세계는 무수한 이미지들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의 지각은 그 전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유용한 일부만을 선별하는 과정이다.


핵심은 신체의 역할이다. 신체는 단순한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 행동의 중심(center of action)”이다. 외부 자극이 들어오면 신체는 그에 대해 즉각 반응하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선택을 수행한다. 지연이 바로 의식과 지각의 발생 조건이다. , 지각은 외부 세계의 축소판이 아니라 행동 가능성에 따라 필터링된 결과다.


예컨대 동일한 풍경을 보더라도 화가, 군인, 건축가는 서로 다른 것을 지각한다. 이는 감각기관의 차이가 아니라 행동 목적의 차이 때문이다. 따라서 지각은 객관적 재현이 아니라 실천적 선택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뇌의 기능도 재해석된다. 뇌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기관이 아니라, 외부 이미지들 중에서 행동에 적합한 것들을 조정하고 차단하는 장치다


이 장의 중요한 전복은 다음과 같다:

지각은 제하기’(reduction). 즉 전체 세계에서 일부만 남긴다.
신체는 중계기가 아니라 선택기
의식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선택의 자유에서 발생한다.


결국 제1장은 우리가 보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행동하기 위해 잘라낸 세계라는 급진적 인식을 제시한다.


2. 기억 이론: 순수기억과 습관기억의 이중 구조

2장과 제3장에서는 기억이 본격적으로 분석된다. 베르그손은 기억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습관기억으로, 이는 반복을 통해 신체에 각인된 자동적 반응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 타기나 글쓰기 같은 기술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순수기억으로, 과거의 경험이 시간 속에 보존된 채 의식 속에서 소환되는 형태다.


중요한 점은 순수기억이 뇌에 저장된 것이 아니라, ‘지속속에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기억은 물질적 저장소가 아니라 시간의 심층에 보존된다. 뇌는 단지 그것을 현재 행동에 맞게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기억은 과거의 복제가 아니라, 현재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 이론은 시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시간은 균질하게 흐르는 물리적 단위가 아니라, 과거가 현재 속에 스며드는 질적 지속이다. 이 지속 속에서 기억은 현재를 두텁게 만들며,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 가능성을 확장한다.


결론: 지각-기억-행동의 통합적 구조

4장과 결론에서 베르그손은 지각과 기억의 관계를 통합한다. 지각은 현재의 행동을 위한 선택이고, 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현재에 개입시키는 힘이다.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다. 순수 지각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며, 실제 지각은 항상 기억과 결합되어 있다.


결국 인간의 의식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외부 세계: 이미지들의 총체
• 신체: 행동을 위한 선택 장치
지각: 현재를 위한 축소된 이미지
기억: 과거를 현재에 투입하는 힘


이 구조 속에서 정신과 물질의 대립은 해소된다. 정신은 물질과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작동하는 선택과 기억의 운동이다. 물질과 기억은 이를 통해 심리학, 인식론, 형이상학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며, 특히 의식은 행동을 위한 장치라는 실천적 철학을 제시한다


[덧]

1. 이 책은 딱 읽을 만하게 번역돼 있다. 정말 집중해서 읽을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중간 중간 비문이 섞여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양호한 번역이다. 좋은 번역은 절대 아니고, 지금 번역된 <물질과 기억> 중 유일한 선택지이기에 그걸 감안하면 괜찮은 정도. 칸딘스키의 <점선면>에 비하면 양반이다.

2. 본 책을 9번 읽고 나름 정리한 내용이라 이 리뷰를 통해 <물질과 기억>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다면 다행이다.

3. 제1장은 10번도 더 읽었다. 매우 난해하고 이미지를 접근하는 방식이 일반 상식과는 완전히 달라 이해하기가 매우 버겁다. 그래도 10번 이상 읽으니 베르그손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것 같아 정리할 수 있었다. 10여년 전에 이 책이 토론 주제도서였는데 참가자들이 어렵다고 난리였다. 자기 평생 이렇게 어려운 책은 처음본다고. 나름 독서가에서 선수들이었는데 말이다. 여튼 최고난도 책 탑3에 포함되는 책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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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선.면 - 회화적인 요소의 분석을 위하여
바실리 칸딘스키 지음, 차봉희 옮김 / 열화당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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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칸딘스키의 <··>(열화당, 2001)은 화가로서, 그리고 조형의 본질을 탐구하는 이론가로서 내 서재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여 있는 책이다. 내가 2022년 처음 붓을 잡은 이래로 아비투스라는 추상적 개념을 어떻게 시각화할지 고민할 때마다, 이 책은 단순한 교본을 넘어 하나의 철학적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칸딘스키는 이 책을 통해 회화의 기초적인 요소들이 어떻게 내면의 울림을 만들어내는지 수학적 정밀함과 예술적 직관으로 풀어낸다.

 

 

1. (), 정적 속에 감춰진 무한한 역동성


칸딘스키는 점을 '회화의 원천'이자 '지고의 정적'으로 정의한다. 나에게 점은 캔버스라는 빈 우주에 처음으로 가해지는 예술적 충격이다. 그는 점이 단순히 기하학적인 위치를 표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생명력을 가진 존재라고 말한다. 점이 하나 찍히는 순간, 캔버스의 정적은 깨어지고 새로운 긴장감이 형성된다.

 

내가 색면 추상 작업을 할 때, 화면의 균형을 잡기 위해 마지막에 찍어 넣는 작은 점 하나는 단순한 점이 아니다. 그것은 칸딘스키가 말한 내적 필연성의 결과물이다. 그는 점의 크기가 커지면 면으로 이행하려 하고, 그 형태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점 하나에서도 베르그손의 생의 도약과 같은 뜨거운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점은 가장 작지만, 가장 거대한 폭발력을 품은 씨앗인 셈이다.

 

 

2. ()과 면(), 보이지 않는 힘의 궤적과 공간의 탄생

 

점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선이 된다. 칸딘스키는 선을 '점이 이동한 궤적'으로 보았다. 그에게 수평선은 차갑고 평온한 휴식을, 수직선은 따뜻하고 상승하는 힘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들의 만남과 충돌은 화면 위에서 음악적인 리듬을 만들어낸다. 내가 최근 작업에서 콜라주와 색면을 결합하며 강조하는 강약 조절역시 칸딘스키의 이 선 이론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직선이 주는 명료함과 곡선이 주는 유연함이 충돌할 때, 화면에는 비로소 드라마가 생긴다. 그리고 이 선들이 모여 면을 이룰 때, 회화는 비로소 하나의 '세계'를 완성한다. 칸딘스키는 면의 위아래, 좌우가 갖는 심리적 무게감까지 세밀하게 분석한다. 위쪽은 가벼움과 해방감을, 아래쪽은 무게감과 구속감을 준다는 그의 분석은 내가 20%의 콜라주를 화면 어디에 배치할지 결정할 때 결정적인 영감을 준다. 그의 이론은 단순히 기술적인 지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 세계를 어떻게 시각적 질서로 치환할 것인가에 대한 고도의 철학적 탐구다.

 

 

3. 내적 필연성, 예술과 철학이 만나는 지점

 

이 책의 핵심을 관통하는 단어는 내적 필연성이다. 칸딘스키는 형태나 색채가 단순한 장식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작가의 내면적 울림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내가 사회 생활을 거쳐 철학적 기반 위에서 아티스트로 거듭나며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도 일치한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텍스트, 화폐, 지도 등을 색면 추상 속에 녹여내는 나의 작업 방식은, 겉으로 보기엔 이질적일 수 있다. 그러나 칸딘스키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시대의 아비투스를 표현하기 위한 나의 내적 필연성이다. 그는 예술이 자연의 모방에서 벗어나 순수한 정신적 실재를 드러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은 추상 미술이 결코 우연이나 무질서의 산물이 아니라, 지극히 정교한 논리와 정신의 산물임을 증명한다.

 

 

나오며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면, 칸딘스키는 점과 선, 면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여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혼의 울림을 전달하려 했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다시 붓을 든다. 내가 찍는 점 하나, 긋는 선 하나가 단순한 표식이 아니라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필연적인 소리가 되기를 갈망하면서 말이다. 칸딘스키는 나에게 회화라는 우주를 유영하는 법을 가르쳐준 가장 위대한 도슨트다. ()


[덧]

원래는 별4개 반을 줄 예정이었지만, 번역 때문에 별1개 반을 뺐다. 정말 열받는 번역이다. 총 3번 읽었고, 제1장 점은 4-5회독 했다.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게 번역됐기 때문. 번역만 제대로 됐어도 별5개 만점을 줬을 거다. 이렇게 번역하면 안되는 거다. 나중에 이 번역에 대한 불만을 토로해 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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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사랑한 바다 - 명화에 담긴 101가지 바다 화가가 사랑한 시리즈
정우철 지음 / 오후의서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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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사랑한 바다>(오후의서재, 2023)를 단 2시간 만에 다 읽었다. 176쪽 정도 두깨의 책을 이렇게 빨리 읽을 수 있었던 건 본 책이 일종의 화집이었기 때문. 정우철의 책은 슬적 슬적 맛배기로 많이 보긴 했지만 구입해서 본 건 처음이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저자의 책은 읽고 건질 게 별로 없다. (밀도가 평론가들 책에 비해 약해서 이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정우철이 사랑한 화가들, 그 화가들이 자신만의 눈으로 바라본 바다 그림을 모아놓은 일종의 편집본이다. 정우철이 큐레이팅한 화가의 바다로 보면 되겠다. 좋은 그림이 많아서 구매하긴 했지만, 화집으로서는 진짜 함량미달이다. 무슨 미술책 도판에 캡션 정보가 없나. 그림 제목과 화가만 있고 제일 중요한 크기와 재료 정보가 없다.

 

아울러 체계도 없다. 클로드 모네 작품이 나오다가 갑자기 모네 그림이 아닌 작가의 그림이 연속해서 나온다. 이런 불협화음은 계속된다. 작가별 작품도 들쭉날쭉. 어떤 작가는 4점 또 어떤 작가는 3, 심지어 6점 수록한 작가도 있다. 그 중간중간에 2점에서 4점씩 작가별 구분 없이 들어가 있는 작가들도 심심찮게 있다. 왜 이렇게 편집했는지 의문이다.

 

해당 작가에 대한 설명이나 그림 감상이 없지 않았을 텐데 아무 설명도 없이 모네나 쇠라 작가 다음에 배치하면 어쩌자는 건지. 작가 그림와 같이 배치된 글도 그림 감상평이기 보단 신변잡기식 글이 대부분이다. 글을 안 읽어도 무방할 정도


하지만 이 책의 최대 장점은 시원한 바다 그림을 보는 것. 다양한 바다의 모습을 그린 대가들의 편집 도록판으로 보는 거다. 바다를 주제로, 좋은 그림은 죄다 모아 놓은 느낌이니까.

 

어쨌거나 그림 감상은 잘했다. 그림 도판 때문에 구입했으니 후회는 없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그림 몇 개를 선정해서 내 감상평을 남겨놓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할까 한다.



 

정우철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바다 그림은 낭만주의부터 현대 회화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넓다. 그림들을 보면, 바다라는 대상을 대하는 화가들의 철학적 태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중에서 나는 잊지 못할 4점의 바다 그림을 선정했다.

 

1.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 <바다 위의 월출>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거장 프리드리히는 이 작품에서 바다를 단순히 풍경의 대상이 아닌, 신성함과 무한함을 간직한 형이상학적 공간으로 상정한다. 화면 하단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바위와 그 위에 앉아 수평선을 응시하는 세 인물의 뒷모습은 감상자로 하여금 그들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보랏빛과 푸른빛이 감도는 밤하늘과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달빛은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우주적 질서를 상징하며, 정박한 배들은 삶이라는 항해 끝에 맞이할 안식 혹은 영적인 세계로의 이행을 암시한다. 프리드리히는 자연의 거대함 앞에 선 인간의 미약함을 고요하고 절제된 색조로 그려냄으로써, 시각적인 재현을 넘어 존재의 근원에 대한 명상적 태도를 견지한다. 이는 당시의 종교적 경건함과 맞물려 자연을 통해 신성을 발견하고자 했던 화가의 고뇌가 투영된 결과물이다.

 


2. 오딜롱 르동 - <하얀 옷을 입은 두 여인이 있는 배>

르동의 회화에서 바다는 물리적 실체가 아닌 내면의 심연과 무의식이 발현되는 환상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인상주의자들이 빛의 분산에 집중했다면, 르동은 빛과 색채를 통해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상태를 가시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화면 상단을 가득 채운 다채롭고 몽환적인 구름과 질감은 현실의 대기라고 보기 어려우며, 마치 상상의 정원이나 꿈속의 풍경을 바다 위로 옮겨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배에 몸을 실은 두 여인은 구체적인 서사를 제공하기보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적 기호로서 존재하며,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의 편린을 시각화한다. 르동은 고전적인 원근법이나 형태의 명확성을 포기하는 대신 색채의 음악적인 조화를 통해 바다를 초현실적인 영역으로 확장시켰으며,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내밀한 환상을 투영하게 만드는 강력한 매개체가 된다.

 


3. 에드워드 호퍼 - <더 롱 레그 (The Long Leg)>

호퍼가 그려낸 바다는 현대인이 마주하는 고립과 고요의 정수를 보여준다. 맑고 투명한 대기 속에서 항해하는 돛단배와 저 멀리 보이는 등대는 평화로운 휴양지의 단면처럼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호퍼 특유의 서늘한 정적이 흐르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게 처리된 수면과 규칙적인 파도의 묘사는 감정의 과잉을 철저히 배제하며, 화면 전반을 지배하는 밝은 푸른색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타자와 단절된 현대적 고독을 극대화한다. 등대는 항로를 안내하는 기능적 존재를 넘어, 망망대해에 홀로 서 있는 단독자로서의 자아를 투영하는 상징물로 읽힌다. 호퍼는 장식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빛과 그림자의 대비만을 남김으로써 공간의 물리적 무게감을 덜어냈으며, 이를 통해 관람객이 바다라는 텅 빈 공간에서 스스로의 외로움과 대면하게 만드는 독특한 심리적 풍경을 완성하였다.

 


4. 앙드레 브라질리에 - <물이 흐르면서>

 

브라질리에의 바다는 캔버스 위에서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과 리듬감의 총체이다. 화가는 바다를 정지된 풍경으로 보지 않고, 파도의 포말과 바람의 흐름, 그리고 그 안을 질주하는 생명체의 에너지가 교차하는 역동적인 장소로 정의한다. 수채화적인 기법이 가미된 유려한 붓질은 형태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색채의 유희를 극대화하고, 푸른색의 변주를 통해 물의 투명함과 깊이감을 동시에 표현한다. 특히 바다를 가르며 달리는 말들의 군상은 자연과 동물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원초적인 일체감을 상징하며, 화면 전체에 경쾌한 음악적 운율을 부여한다. 브라질리에는 구체적인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선과 색의 정수만을 추출하여 바다의 본질적인 인상을 포착하였으며, 이는 보는 이에게 시각적 해방감과 더불어 자연의 근원적인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듯한 벅찬 감동을 선사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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