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과 기억 대우고전총서 17
앙리 베르그손 지음, 박종원 옮김 / 아카넷 / 200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각·기억·신체의 관계 구조


문제 설정: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넘어

물질과 기억은 앙리 베르그손의 핵심 저작으로, 전통적인 심신이원론(정신 vs 물질)의 틀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다. 그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처럼 정신과 신체를 별개의 실체로 보지도 않고, 단순한 유물론처럼 정신을 뇌의 산물로 환원하지도 않는다. 대신 이미지(image)”라는 중간 개념을 도입하여 세계 전체를 이미지들의 총체로 파악한다. 여기서 신체 역시 하나의 이미지이며, 특수한 기능즉 행동을 위한 선택과 지연을 수행하는 중심으로 정의된다. 이 책의 핵심 질문은 지각은 어떻게 형성되며, 기억은 어떤 방식으로 현재의 행동에 개입하는가이다. 결국 그는 의식, 기억, 신체를 하나의 작동 체계로 이해하면서 지속이라는 시간 개념을 그 기저에 둔다.


1. 지각은 선택된 이미지

1표상을 위한 이미지들의 선택은 이 책 전체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베르그손은 우리가 세계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하는 통념을 부정한다. 외부 세계는 무수한 이미지들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의 지각은 그 전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유용한 일부만을 선별하는 과정이다.


핵심은 신체의 역할이다. 신체는 단순한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 행동의 중심(center of action)”이다. 외부 자극이 들어오면 신체는 그에 대해 즉각 반응하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선택을 수행한다. 지연이 바로 의식과 지각의 발생 조건이다. , 지각은 외부 세계의 축소판이 아니라 행동 가능성에 따라 필터링된 결과다.


예컨대 동일한 풍경을 보더라도 화가, 군인, 건축가는 서로 다른 것을 지각한다. 이는 감각기관의 차이가 아니라 행동 목적의 차이 때문이다. 따라서 지각은 객관적 재현이 아니라 실천적 선택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뇌의 기능도 재해석된다. 뇌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기관이 아니라, 외부 이미지들 중에서 행동에 적합한 것들을 조정하고 차단하는 장치다


이 장의 중요한 전복은 다음과 같다:

지각은 제하기’(reduction). 즉 전체 세계에서 일부만 남긴다.
신체는 중계기가 아니라 선택기
의식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선택의 자유에서 발생한다.


결국 제1장은 우리가 보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행동하기 위해 잘라낸 세계라는 급진적 인식을 제시한다.


2. 기억 이론: 순수기억과 습관기억의 이중 구조

2장과 제3장에서는 기억이 본격적으로 분석된다. 베르그손은 기억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습관기억으로, 이는 반복을 통해 신체에 각인된 자동적 반응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 타기나 글쓰기 같은 기술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순수기억으로, 과거의 경험이 시간 속에 보존된 채 의식 속에서 소환되는 형태다.


중요한 점은 순수기억이 뇌에 저장된 것이 아니라, ‘지속속에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기억은 물질적 저장소가 아니라 시간의 심층에 보존된다. 뇌는 단지 그것을 현재 행동에 맞게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기억은 과거의 복제가 아니라, 현재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 이론은 시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시간은 균질하게 흐르는 물리적 단위가 아니라, 과거가 현재 속에 스며드는 질적 지속이다. 이 지속 속에서 기억은 현재를 두텁게 만들며,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 가능성을 확장한다.


결론: 지각-기억-행동의 통합적 구조

4장과 결론에서 베르그손은 지각과 기억의 관계를 통합한다. 지각은 현재의 행동을 위한 선택이고, 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현재에 개입시키는 힘이다.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다. 순수 지각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며, 실제 지각은 항상 기억과 결합되어 있다.


결국 인간의 의식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외부 세계: 이미지들의 총체
신체: 행동을 위한 선택 장치
지각: 현재를 위한 축소된 이미지
기억: 과거를 현재에 투입하는 힘


이 구조 속에서 정신과 물질의 대립은 해소된다. 정신은 물질과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작동하는 선택과 기억의 운동이다. 물질과 기억은 이를 통해 심리학, 인식론, 형이상학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며, 특히 의식은 행동을 위한 장치라는 실천적 철학을 제시한다


[덧]

1. 이 책은 딱 읽을 만하게 번역돼 있다. 정말 집중해서 읽을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중간 중간 비문이 섞여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양호한 번역이다. 좋은 번역은 절대 아니고, 지금 번역된 <물질과 기억> 중 유일한 선택지이기에 그걸 감안하면 괜찮은 정도. 칸딘스키의 <점선면>에 비하면 양반이다.

2. 본 책을 9번 읽고 나름 정리한 내용이라 이 리뷰를 통해 <물질과 기억>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다면 다행이다.

3. 제1장은 10번도 더 읽었다. 매우 난해하고 이미지를 접근하는 방식이 일반 상식과는 완전히 달라 이해하기가 매우 버겁다. 그래도 10번 이상 읽으니 베르그손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것 같아 정리할 수 있었다. 10여년 전에 이 책이 토론 주제도서였는데 참가자들이 어렵다고 난리였다. 자기 평생 이렇게 어려운 책은 처음본다고. 나름 독서가에서 선수들이었는데 말이다. 여튼 최고난도 책 탑3에 포함되는 책임은 분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점.선.면 - 회화적인 요소의 분석을 위하여
바실리 칸딘스키 지음, 차봉희 옮김 / 열화당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들어가며

 

칸딘스키의 <··>(열화당, 2001)은 화가로서, 그리고 조형의 본질을 탐구하는 이론가로서 내 서재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여 있는 책이다. 내가 2022년 처음 붓을 잡은 이래로 아비투스라는 추상적 개념을 어떻게 시각화할지 고민할 때마다, 이 책은 단순한 교본을 넘어 하나의 철학적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칸딘스키는 이 책을 통해 회화의 기초적인 요소들이 어떻게 내면의 울림을 만들어내는지 수학적 정밀함과 예술적 직관으로 풀어낸다.

 

 

1. (), 정적 속에 감춰진 무한한 역동성


칸딘스키는 점을 '회화의 원천'이자 '지고의 정적'으로 정의한다. 나에게 점은 캔버스라는 빈 우주에 처음으로 가해지는 예술적 충격이다. 그는 점이 단순히 기하학적인 위치를 표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생명력을 가진 존재라고 말한다. 점이 하나 찍히는 순간, 캔버스의 정적은 깨어지고 새로운 긴장감이 형성된다.

 

내가 색면 추상 작업을 할 때, 화면의 균형을 잡기 위해 마지막에 찍어 넣는 작은 점 하나는 단순한 점이 아니다. 그것은 칸딘스키가 말한 내적 필연성의 결과물이다. 그는 점의 크기가 커지면 면으로 이행하려 하고, 그 형태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점 하나에서도 베르그손의 생의 도약과 같은 뜨거운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점은 가장 작지만, 가장 거대한 폭발력을 품은 씨앗인 셈이다.

 

 

2. ()과 면(), 보이지 않는 힘의 궤적과 공간의 탄생

 

점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선이 된다. 칸딘스키는 선을 '점이 이동한 궤적'으로 보았다. 그에게 수평선은 차갑고 평온한 휴식을, 수직선은 따뜻하고 상승하는 힘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들의 만남과 충돌은 화면 위에서 음악적인 리듬을 만들어낸다. 내가 최근 작업에서 콜라주와 색면을 결합하며 강조하는 강약 조절역시 칸딘스키의 이 선 이론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직선이 주는 명료함과 곡선이 주는 유연함이 충돌할 때, 화면에는 비로소 드라마가 생긴다. 그리고 이 선들이 모여 면을 이룰 때, 회화는 비로소 하나의 '세계'를 완성한다. 칸딘스키는 면의 위아래, 좌우가 갖는 심리적 무게감까지 세밀하게 분석한다. 위쪽은 가벼움과 해방감을, 아래쪽은 무게감과 구속감을 준다는 그의 분석은 내가 20%의 콜라주를 화면 어디에 배치할지 결정할 때 결정적인 영감을 준다. 그의 이론은 단순히 기술적인 지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 세계를 어떻게 시각적 질서로 치환할 것인가에 대한 고도의 철학적 탐구다.

 

 

3. 내적 필연성, 예술과 철학이 만나는 지점

 

이 책의 핵심을 관통하는 단어는 내적 필연성이다. 칸딘스키는 형태나 색채가 단순한 장식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작가의 내면적 울림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내가 사회 생활을 거쳐 철학적 기반 위에서 아티스트로 거듭나며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도 일치한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텍스트, 화폐, 지도 등을 색면 추상 속에 녹여내는 나의 작업 방식은, 겉으로 보기엔 이질적일 수 있다. 그러나 칸딘스키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시대의 아비투스를 표현하기 위한 나의 내적 필연성이다. 그는 예술이 자연의 모방에서 벗어나 순수한 정신적 실재를 드러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은 추상 미술이 결코 우연이나 무질서의 산물이 아니라, 지극히 정교한 논리와 정신의 산물임을 증명한다.

 

 

나오며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면, 칸딘스키는 점과 선, 면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여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혼의 울림을 전달하려 했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다시 붓을 든다. 내가 찍는 점 하나, 긋는 선 하나가 단순한 표식이 아니라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필연적인 소리가 되기를 갈망하면서 말이다. 칸딘스키는 나에게 회화라는 우주를 유영하는 법을 가르쳐준 가장 위대한 도슨트다. ()


[덧]

원래는 별4개 반을 줄 예정이었지만, 번역 때문에 별1개 반을 뺐다. 정말 열받는 번역이다. 총 3번 읽었고, 제1장 점은 4-5회독 했다.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게 번역됐기 때문. 번역만 제대로 됐어도 별5개 만점을 줬을 거다. 이렇게 번역하면 안되는 거다. 나중에 이 번역에 대한 불만을 토로해 볼 요량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가가 사랑한 바다 - 명화에 담긴 101가지 바다 화가가 사랑한 시리즈
정우철 지음 / 오후의서재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화가가 사랑한 바다>(오후의서재, 2023)를 단 2시간 만에 다 읽었다. 176쪽 정도 두깨의 책을 이렇게 빨리 읽을 수 있었던 건 본 책이 일종의 화집이었기 때문. 정우철의 책은 슬적 슬적 맛배기로 많이 보긴 했지만 구입해서 본 건 처음이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저자의 책은 읽고 건질 게 별로 없다. (밀도가 평론가들 책에 비해 약해서 이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정우철이 사랑한 화가들, 그 화가들이 자신만의 눈으로 바라본 바다 그림을 모아놓은 일종의 편집본이다. 정우철이 큐레이팅한 화가의 바다로 보면 되겠다. 좋은 그림이 많아서 구매하긴 했지만, 화집으로서는 진짜 함량미달이다. 무슨 미술책 도판에 캡션 정보가 없나. 그림 제목과 화가만 있고 제일 중요한 크기와 재료 정보가 없다.

 

아울러 체계도 없다. 클로드 모네 작품이 나오다가 갑자기 모네 그림이 아닌 작가의 그림이 연속해서 나온다. 이런 불협화음은 계속된다. 작가별 작품도 들쭉날쭉. 어떤 작가는 4점 또 어떤 작가는 3, 심지어 6점 수록한 작가도 있다. 그 중간중간에 2점에서 4점씩 작가별 구분 없이 들어가 있는 작가들도 심심찮게 있다. 왜 이렇게 편집했는지 의문이다.

 

해당 작가에 대한 설명이나 그림 감상이 없지 않았을 텐데 아무 설명도 없이 모네나 쇠라 작가 다음에 배치하면 어쩌자는 건지. 작가 그림와 같이 배치된 글도 그림 감상평이기 보단 신변잡기식 글이 대부분이다. 글을 안 읽어도 무방할 정도


하지만 이 책의 최대 장점은 시원한 바다 그림을 보는 것. 다양한 바다의 모습을 그린 대가들의 편집 도록판으로 보는 거다. 바다를 주제로, 좋은 그림은 죄다 모아 놓은 느낌이니까.

 

어쨌거나 그림 감상은 잘했다. 그림 도판 때문에 구입했으니 후회는 없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그림 몇 개를 선정해서 내 감상평을 남겨놓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할까 한다.



 

정우철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바다 그림은 낭만주의부터 현대 회화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넓다. 그림들을 보면, 바다라는 대상을 대하는 화가들의 철학적 태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중에서 나는 잊지 못할 4점의 바다 그림을 선정했다.

 

1.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 <바다 위의 월출>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거장 프리드리히는 이 작품에서 바다를 단순히 풍경의 대상이 아닌, 신성함과 무한함을 간직한 형이상학적 공간으로 상정한다. 화면 하단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바위와 그 위에 앉아 수평선을 응시하는 세 인물의 뒷모습은 감상자로 하여금 그들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보랏빛과 푸른빛이 감도는 밤하늘과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달빛은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우주적 질서를 상징하며, 정박한 배들은 삶이라는 항해 끝에 맞이할 안식 혹은 영적인 세계로의 이행을 암시한다. 프리드리히는 자연의 거대함 앞에 선 인간의 미약함을 고요하고 절제된 색조로 그려냄으로써, 시각적인 재현을 넘어 존재의 근원에 대한 명상적 태도를 견지한다. 이는 당시의 종교적 경건함과 맞물려 자연을 통해 신성을 발견하고자 했던 화가의 고뇌가 투영된 결과물이다.

 


2. 오딜롱 르동 - <하얀 옷을 입은 두 여인이 있는 배>

르동의 회화에서 바다는 물리적 실체가 아닌 내면의 심연과 무의식이 발현되는 환상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인상주의자들이 빛의 분산에 집중했다면, 르동은 빛과 색채를 통해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상태를 가시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화면 상단을 가득 채운 다채롭고 몽환적인 구름과 질감은 현실의 대기라고 보기 어려우며, 마치 상상의 정원이나 꿈속의 풍경을 바다 위로 옮겨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배에 몸을 실은 두 여인은 구체적인 서사를 제공하기보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적 기호로서 존재하며,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의 편린을 시각화한다. 르동은 고전적인 원근법이나 형태의 명확성을 포기하는 대신 색채의 음악적인 조화를 통해 바다를 초현실적인 영역으로 확장시켰으며,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내밀한 환상을 투영하게 만드는 강력한 매개체가 된다.

 


3. 에드워드 호퍼 - <더 롱 레그 (The Long Leg)>

호퍼가 그려낸 바다는 현대인이 마주하는 고립과 고요의 정수를 보여준다. 맑고 투명한 대기 속에서 항해하는 돛단배와 저 멀리 보이는 등대는 평화로운 휴양지의 단면처럼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호퍼 특유의 서늘한 정적이 흐르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게 처리된 수면과 규칙적인 파도의 묘사는 감정의 과잉을 철저히 배제하며, 화면 전반을 지배하는 밝은 푸른색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타자와 단절된 현대적 고독을 극대화한다. 등대는 항로를 안내하는 기능적 존재를 넘어, 망망대해에 홀로 서 있는 단독자로서의 자아를 투영하는 상징물로 읽힌다. 호퍼는 장식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빛과 그림자의 대비만을 남김으로써 공간의 물리적 무게감을 덜어냈으며, 이를 통해 관람객이 바다라는 텅 빈 공간에서 스스로의 외로움과 대면하게 만드는 독특한 심리적 풍경을 완성하였다.

 


4. 앙드레 브라질리에 - <물이 흐르면서>

 

브라질리에의 바다는 캔버스 위에서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과 리듬감의 총체이다. 화가는 바다를 정지된 풍경으로 보지 않고, 파도의 포말과 바람의 흐름, 그리고 그 안을 질주하는 생명체의 에너지가 교차하는 역동적인 장소로 정의한다. 수채화적인 기법이 가미된 유려한 붓질은 형태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색채의 유희를 극대화하고, 푸른색의 변주를 통해 물의 투명함과 깊이감을 동시에 표현한다. 특히 바다를 가르며 달리는 말들의 군상은 자연과 동물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원초적인 일체감을 상징하며, 화면 전체에 경쾌한 음악적 운율을 부여한다. 브라질리에는 구체적인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선과 색의 정수만을 추출하여 바다의 본질적인 인상을 포착하였으며, 이는 보는 이에게 시각적 해방감과 더불어 자연의 근원적인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듯한 벅찬 감동을 선사한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세상문고 <공산당선언>(책세상, 2007)10여 년 만에 다시 읽었다. 예전에 읽어서 금방 읽을 줄 알았는데,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번역이 진짜 어렵게 되어 있다. 박종철출판사 전집 1권을 다시 찾으려 해도 어디 있는지 몰라 울며 겨자 먹기로 꾸역꾸역 읽었다.

 

2018년 리커버판도 봤지만, 번역은 07년판과 대동소이했고 줄 간격만 늘려 페이지 수만 26쪽 늘렸다. 가격도 5900원에서 9900원으로 대폭 올렸다. 번역은 수정 증보하지 않았으면서도 말이다.

 

이 책은 본문이 288페이지(07년판)로 끝난다. 그럼에도 3번을 읽어야 했다. 그 이유는 본문 첫 페이지, 그 유명한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문장을 포함하고 있는 첫 2~3페이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지뢰를 밟는듯한 문장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역자 이진우는 한국어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한국어 문장 자체를 독일어 문장 쓰듯이 쓰기 때문. 역자 자신이 쓰고 있는 한국어 문장 자체가 매우 난삽하다. 역자 해제를 보면서 이를 여실히 느꼈다.

 

"현재 사회의 자궁 속에서 새로운 사회 관계의 물질적 실존 조건이 자라나기 전에는 결코 그 사회는 사라지지 않는다. 시민 사회의 자궁 속에서 발전된 생산력은 이 사회의 모순과 대립 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동시에 산출한다는 것이다. 이 명제는 포스트모던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정치경제학 비판은 주어진 현실 속에 이미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잠재력이 함축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실을 섣불리 이상으로 재단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의 모순과 철저하게 대립함으로써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태도,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 정신이다." (152)

 

역자 해제 6장에 나온 부분이다. ‘~’, ‘~을 매우 남발하고 있다. 누가 유학파 교수 출신 아니랄까 봐. 제대로 된 한국어 문장으로 썼다면 <공산당선언> 책세상 문고본은 이보다 훨씬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웠을 거다.

 

본문 번역문으로 넘어가면 진짜 짜증 나는 문장들이 넘쳐난다. 일단 몇 문장들만 보자. 이 책이 읽기 어려운 것은 난삽한 번역 문장이 한몫 단단히 했다고 본다.

 

"사회가 총생산력을 사용하고 교통수단이나 생산품을 교환하고 분배하는 권한을 사유 자본가들의 손에서 빼앗아 기존의 수단들과 전체 사회의 욕구에서 도출되는 계획에 따라 관리함으로써, 무엇보다 특히 현재 대규모 산업의 경영과 연관된 모든 나쁜 결과가 제거된다." (80)

 

처음 읽을 때 이게 무슨 의미인지 한참을 헤맸다. 그도 그럴것이 위 문장에는 주어가 없기 때문. 전형적인 비문. 첨엔 잘 모른다. 이해가 안 돼 몇번 읽어야 왜 잘 이해가 안 돼는지 밝혀진다. 정말 고약하지 않은가. 한번 읽어 끝낼 문장을 난삽한 번역 때문에 몇 번을 읽고 있으니. 여러 번 읽으라는 심보인가?

 

이런 문장들이 도처에 있다. 문장들을 더 보시겠다. (하나하나 지적하기 힘들다. 그냥 비문의 사례로 참고하고 보시길. 제발 이런 문장으로 번역하지 말자!)

 

"현대적 시민의 사적 소유는 계급 대립, 다른 계급들에 대한 한 계급의 착취에 기반을 둔 생산품의 제조와 획득의 최종적인 가장 완성된 표현이다." (34)

 

"물질적 생산물의 공산주의적 취득 및 생산 방식을 향해 쏟아지는 모든 비난은 마찬가지로 정신적 생산물의 취득과 생산으로 확대되었다." (37)

 

"게다가 이른바 공산주의자들의 공식적인 부인 공유제에 우리의 부르주아들이 고결한 도덕심에서 경악하는 것보다 더 우스운 것은 없다." (39)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의 비판의 반동적 성격을 거의 감추지 않았기 때문에, 부르주아 정권하에서 붉은 사회 질서 전체를 공중으로 날려버릴 하나의 계급이 발전했다는 점이 바로 부르주아에 대한 그들의 주요 비난이 될 정도다." (46)

 

"그들은 노동자들에게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적대적 대립에 대해 가능한 한 명확한 의식을 이끌어 내는 일을 한시도 중단하지 않았다. 이는 독일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가 그들의 지배권과 함께 반드시 도입할 사회적, 정치적 조건들을 동일한 수의 무기들로 부르주아지에게 겨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며, 독일에서 반동 계급들을 타도한 후 곧바로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59)

 

'적대적 대립에 대해 가능한 한 명확한 의식을 이끌어내는 일'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적대적 대립자체가 명확한 의식이 수반됨을 전제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대립이 적대적일 수 있을까?

 

이런 걸 곰곰 생각하다간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게 된다. 번역을 창작물로 봐 주지 않기에 이런 모호하고 잘못된 문장들이 넘쳐난다. 같은 내용을 두세 번 읽어야 한다. 보통의 교양인이면 당연하다. 이해가 잘 안되는 문장이기에.

 

이걸 한 번에 읽고 이해하는 사람은 아마도 역자와 같은 독일 유학파로 한국어를 독일어식으로 사고하는 사람일 터. 한국인이면 처음 읽어 이해되지 않는 게 당연하다. 저런 문장들을 어떻게 한국 산문 읽듯 술술 읽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번역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다. 이 책이 어렵다고만 말하지 왜 어려운지 그 실체를 말하는 사람을 못 봤다. 고전 사회철학서라는 아우라에 교묘히 가려져 있기에 그렇겠지. 다시 한번 강조한다. 본문 내용이 난해한 게 아니라 역자가 난삽하게 번역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이 책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 노동자에게 읽히게 할 목적으로 쓰인 선언서다. 마르크스가 읽기 어려울 정도로 난해하게 썼기 만무하지 않을까. 전 세계 번역본인 러시아, 영어, 프랑스어 번역본 모두!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26-04-21 1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학박사가 문학자가 아니니 한국인이 읽기 쉽게 번역을 할 순 없겠지요.아무래도 이런 류의 책들은 독자들이 어렵게 읽어야 역자들이 지적 우월감을 느낄수 있어서 그런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고로 일반인들도 쉽게 일고 이해할 수 있는 공산당 선언에는 어떤 출파사 본이 있는지 궁금해 집니다.

yamoo 2026-04-22 09:12   좋아요 0 | URL
네, 물론 철학박사는 문학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자기가 논문 쓰고 학생 리포트 지도할때 항상 말하지요. 문장같지도 않은문장을 쓰지 말라고요. 그러면서 자기는 저런 문장들로 논문쓰고 번역하지요.

현재 공당산선언 판본 중 그나마 가장 읽기 수월한 판본은 박종철출판사에서 나온 전집1권에 수록된 번역본입니다. 약 20여 페이지 정도 분량인데 정말 빽빽합니다. 이걸 책세상 문고본은 100여 페이지로 늘렸지요. ㅎㅎ

살리에르 2026-04-22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산당 선언이 이렇게 어려운 내용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내용과 관련 없이 정말 개떡같이 쓴 글이에요. 아니 글만 한글이고 내용은 어디 안드로메다 언어인 것 마냥 뭔 소린지 모르겠네요.

yamoo 2026-04-23 09:48   좋아요 0 | URL
여실히 느끼셨군요.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보면 어렵다는 걸 별로 못홨고, 번역 때문에 읽기 힘들다는 리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최근에 이 책으로 독서토론을 했는데, 함께 읽은 분들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원성이 높아 저도 왜 그런지 자세히 읽어본 끝에 번역이 개같이 해 놔서 무슨 소린지 모르는 내용이 많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이 책은 리콜되어야 마땅합니다!
 

현대적 색채로 재해석한 자연의 숭고미



작자미상, 총석정의 일출, 110×59cm, 종이에 채색


강렬한 색채 대비와 독특한 질감 표현이 돋보이는 수평 구도의 풍경화다. 110x59cm(40~50호 사이의 변형 규격)라는 가로로 긴 화면은 동해의 광활한 수평선과 주상절리의 수직적 위엄을 동시에 담아내기에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동양화 전공자의 수준 높은 작품으로작년에  5만원 경매 행사날에 억수루 운 좋게 낙찰받은 작품이다.


 

1. 색채의 상징성과 감정적 파동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강렬한 오렌지빛과 붉은색의 하늘이다. 상단의 뜨거운 붉은색과 하단 바다의 차분한 황토색, 그리고 바위의 무채색에 가까운 회색조가 대비를 이룬다. 이는 일출 직전 혹은 직후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시각화하며, 관람객에게 정서적인 고양감을 전달한다. 보색 대비와 긴장감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채색의 밀도 또한 좋다. 종이에 채색 기법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그러데이션이 매우 부드럽고 촘촘하게 쌓여 있어 몽환적이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2. 수직과 수평의 조형적 질서


이 그림은 자연의 기하학적 미학을 극대화하고 있다. 화면 우측을 지배하는 주상절리는 거대한 기둥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형상으로, 자연의 강인함과 수직적인 질서미를 보여주고 있다. 마치 성벽이나 신전의 기둥처럼 묘사되어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아울러 가로로 긴 화폭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수평선을 강조하여 시각적인 해방감과 여유를 주고 있다. 수직(바위)과 수평(바다/하늘)이 교차하며 화면의 구조적 안정감을 완성한다.

 


3. 세밀한 묘사와 질감(Texture)의 변주


주상절리와 좌측의 암석들을 표현한 선들은 매우 날카롭고 명확하다. 이는 동양화의 전통적인 '준법(바위나 산의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듯한 느낌을 주며, 돌의 단단한 질감을 촉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화면 좌측 하단에서 부서지는 흰 파도는 정적인 바위와 대비되는 동적인 요소다. 일렁이는 물결의 세밀한 묘사는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넣으며 자칫 무거울 수 있는 풍경에 리듬감을 부여하고 있다.

 


4. 시점과 여백의 미학


부감법의 활용이 두드러진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을 통해 주상절리의 상단부(소나무와 정자)부터 발치에 부서지는 파도까지 한눈에 조망하게 한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관조하는 자세로 볼 수 있겠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의 섬과 가까운 곳의 바위를 배치하여 깊이감을 형성했고, 특히 밝게 빛나는 태양 주변의 명도 조절은 화면의 중심부로 시선을 모으는 블랙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총 평


미학적으로 볼 때 이 작품은 '자연의 숭고미(Sublime)'를 현대적 색채 감각으로 풀어낸 수작이다. 자연 경관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상절리라는 독특한 지형을 기하학적 패턴으로 재해석하여 현대적인 세련미를 갖추었다. 특히 정자라는 작은 인공물을 배치함으로써 거대한 자연과 대비되는 인간의 존재를 암시하고, 이를 통해 자연 속에서의 안식과 평온이라는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강한 생명력과 정적인 명상이 공존하는 묘한 매력을 지닌 그림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

채색화는 캔버스에 유화를 칠하는 것보다 밑작업(아교포수 등)이 까다롭고, 색을 한 번에 올리는 게 아니라 수십 번 겹쳐 발라(중채) 깊이감을 만든다. 이 정도 밀도의 주상절리와 하늘의 그러데이션을 뽑아내려면 최소 수개월의 작업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작가의 인건비와 재료비를 고려하더라도 5만원 경매 행사에 낙찰받은 것은 진정 포르투나의 선택이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6-04-15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림 넘 멋있네요
작자미상인데, 나중에 유명 작가가 나타나는건 아닐까요?^^

yamoo 2026-04-16 10:48   좋아요 1 | URL
제가 작자 미상 이나 무명 작가 그림을 낙찰받아 공부해서 몇 개 작가를 알아낸 적이 있습니다. 그림 만큼 확실히 화력이 깊고 중견으로 지방에서 활동하신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알려고 열심히 발품팔면 알게 되더라구요. 멋진 그림은 얼추 그린 작가를 찾아가는 것 같아요. 작자 미상의 그림을 구매하는 하나의 매력입니다..ㅎㅎㅎ

카스피 2026-04-15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작품을 저렴한 가격에 낙찰 받으셨네요.미술품의 장점은 고호에도 알 수 있듯이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후대에 크게 인정 받을 수 있기 때무에 맘에 드는 작품을 저렴하게 구입행서 물려주는ㄴ 것도 좋은 미술 투자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yamoo 2026-04-16 10:54   좋아요 0 | URL
작자 미상은 경매에서 보통 시작가가 10만원 부터입니다. 1천원부터인 경매도 있어요. 시작가가 10만원인건 화풍이나 화력 등 그림이 풍기는 아우라에 따라 책정됩니다. 10만원부터시작해서 무섭게 치고 올라가 몇백만원에 낙찰되는 그림도 있어요. 누가 그렸는지 아는 사람이 경쟁이 붙어 사는 거겠지요. 저렴하게 구입하여 작가를 알면 그림 가격은 수배에서 수십배 뜁니다. 60-70년대 국전 특선 이상, 해외초대전 및 개인전 수십회 국전 심사위원 경력 정도 알려지면 가치가 달라지죠. 지방에서만 활동을 해서 이름이 아예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나중에 이력이 밝혀지면 그림은 제대로 대우 받습니다. 작자미상 그림을 찾게 되는 매력이라 하겠습니다..ㅎㅎ

얄리얄리 2026-04-18 1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혹시 북한 작가의 그림..은 아닐까요..(자신없음)

yamoo 2026-04-20 13:22   좋아요 0 | URL
흠...북한 작가라은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럴 수도 있겠네요!
북한화가도 열심히 찾아봐야겠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