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 - 세계를 뒤흔든 교황, 그 뜨거운 가슴의 비밀
김은식 지음, 이윤엽 그림 / 이상한도서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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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제공도서 서평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교황에 대한 책자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아무리 교황의 방한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 열기가 상당히 뜨겁다. 이는 현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관심 받고, 인기를 누릴 수밖에 없다. 교황으로 선출된 과정부터 시작하여 여타 교황과는 다른 출발을 했다. 2013년 2월 11일, 유래 없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사임 선언, 그로 인해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예상 외로 5번의 투표 만에 손쉽게(?) 선출된 교황, 최초의 아메리카 출신 교황, 최초의 예수회 소속 교황, 교황으로는 최초로 사용된 이름 프란치스코. 이처럼 현 교황 프란치스코는 여러모로 많은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 인해 교황이 이처럼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것은 아니리라 여겨진다. 그가 선택한 이름, 프란치스코처럼 현 교황은 약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 깊기 때문 아닐까? 작은 자들, 약한 자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예수님의 관심이었기 때문이다.

 

교황에 선출된 이후로도 여전히 낡은 자가용을 타는 교황, 권위와 군림의 자리에서 우정과 소통의 자리로 내려온 교황이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마치 신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인카네이션 했던 예수님처럼. 그렇기에 세계가 사랑하고 열광하는 것 아닐까?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는 바로 이 교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현 교황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부분은 현 교황이 닮고 싶어 하는 사람,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이해할 때, 현재의 프란치스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테니.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었던 프란치스코, 심지어 동물까지도 무시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같은 피조물로 여겼던 프란치스코, 그 정신을 잇고자 하는 교황 프란치스코 역시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 약자들의 친구가 되고자 한다.

 

본서의 프롤로그에서는 세월호와 람페두사의 한 배를 연관 짓고 있다. 탁월한 시각이며,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보는 시각이 아닐까?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사람들은 이탈리아에서 침몰되었던 초호화여객선 콩코르디아호와 세월호를 비교하였다. 두 배의 선장 모두, 배의 침몰 앞에 승객들을 버리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서는 같은 이탈리아에서 침몰한 또 하나의 이름 없는 배와 세월호를 비교한다. 문제의 핵심은 선장의 도망침에 있지 않고(승객을 버리고 도망친 선장이 잘 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배를 침몰로 내몰았던 시대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2013년 10월 3일 이탈리아 시칠리아 앞바다의 그림 같은 섬 람페두사에서 불과 800미터 떨어진 곳에서 20여 미터 크기의 조그만 고깃배가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그 배에 타고 있던 500여명의 승객(?) 중 350여명이 바다에서 구조되지 못한 채 사라져갔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탈리아 정부가 허용치 않았던 아프리카 난민들이었기 때문. 자신들의 유익을 지켜내기 위한 정부의 결정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고 유리하는 난민들은 눈앞에 있는 구조대원들의 방치 속에서 세상을 원망하며 수장되어 갔다.

 

바로 이 사건과 세월호가 비슷하다는 것이 저자의 관점. 세월호 역시 인간의 생명을 우선하기보다는 눈 앞의 이익, 더 많은 유익을 얻고자 하는 욕심이 우선이었기에 발생한 사건 아닌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애정과 관심보다는 자신의 욕심이 먼저이고, 자신의 생명만이 먼저인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자리 지켜내기에만 급급한 관료들, 아니 생명은 뒷전인 채 자신의 정치적 생명만을 좇았던 수많은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이 아닐까?

 

이처럼 닮아 있는 두 배를 연관 지으며 책을 시작하는 이유는 람페두사 사건으로 교황 프란치스코의 진가와 추구하는 바를 알게 되기 때문. 약자들을 죽음으로 몰아세운 슬픔 앞에 프란치스코는 슬픔의 분노를 발한다. 그리고 약자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을 촉구한다. 이러한 프란치스코의 관심이 계속되길 소망한다.

 

우리 모두가 약자들에 대한 돌아봄을 행할 때, 세상은 더 살맛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참되게 새겨야 한다.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 음식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헐벗었을 때 옷을 주고, 아플 때 돌보아 주었다.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것이 나에게 베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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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장석훈 옮김 / 판미동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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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출판사 제공도서 서평

 

본서는 저자가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는 세 사람,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에 대한 글이다. 그들의 어린 시절, 가족, 그리고 성문제, 소명과 인격, 가르침, 죽음, 후대의 평가에 이르기까지 세 사람에 대한 것들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조금 산만한 느낌이 없진 않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필요 없는 부분들까지 열거함으로 오히려 핵심을 흐리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본서는 본인에게 특별히 소크라테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끌게 하였다. 솔직히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함이 사실이다. 막연하게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에 소크라테스가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당시 신전에 새겨져 있던 말이었다는 정도.

 

그런 나에게 본서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에 붙들린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소크라테스가 뭘 말하고 싶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산파였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산파’로 살아감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확신했는데, 이 일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봤던 것이다. 영혼의 노예상태를 소크라테스는 다름 아닌 무지로 봤다. 그래서 알아야 하는데, 무엇을 알아야 하냐? 신에 대해서? 세상의 기원에 대해서?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신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대해서, 더 나아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봤던 것. 이 일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평생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이 질문들을 하였고, 그로 인해 그들로 하여금 위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게 함으로 그들이 내면의 자유를 누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소크라테스는 이성적 지식만을 붙잡지 않았다. 그는 이성적 지식과 함께, 이성을 넘어서는 지식, 즉 믿음, 직관 등을 붙잡았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시시때때로 신과의 접신(?)을 행하였으며, 내면의 목소리, 다이몬에 귀 기울이는 삶을 살았다.

 

또한 자신이 붙잡았던 인간의 삶, 즉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질문에 대해, 선을 위한 삶, 정의를 붙잡는 삶을 답으로 제시하였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비록 잘못된 판결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도망치게 되면, 그동안 자신이 붙잡았던 정의를 자신이 뒤집는 것이 되기에, 자신의 말이 행동에서 드러나게 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이런 모습이 참 멋지게 다가왔다. 소크라테스뿐이겠는가? 저자가 인생의 스승으로 모신 세 사람, 모두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 진정성 있는 삶을 살았던 분들이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아니겠나?

 

사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책의 뒷부분의 몇 단원만 읽어도 될 듯 싶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세 사람이 추구하였던 내면의 자유는 결국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 노예상태를 소크라테스는 무지, 예수는 원죄(사실 저자는 원죄라고 말하지만, 원죄라는 개념은 후기의 개념이고 그냥 죄라고 보는 것이 더 좋겠다), 붓다는 갈애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고, 자유함을 누릴 때, 그 자유를 가지고 옳고 바른 행동을 하게 되고, 또한 해야 한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진리에 합당한 삶은 무엇인가? 저자는 소크라테스에게 그것은 정의이며, 예수에게는 사랑, 붓다에게는 자비라고 봤다. 사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노예 상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인생에 있어 붙들어야 할 가장 큰 덕목이 무엇인지 아는 것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확신, 믿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천적 삶이다.

 

솔직히, 붓다가 갈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금욕과 좌선을 붙잡고, 이것을 통해 세상의 모든 욕망과 갈애, 집착을 제거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너무 인간적이지 못해 공감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믿었던 그것을 위해 평생을 살아갔기에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 하는 것보다 그 앎을 실천에 옮기는 실천적 삶이다. 그렇기에 저자의 다음 글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여겨진다.

 

“진리를 알았다면, 그 앎으로 인해 우리가 바르게 행동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앎이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유로 붓다나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윤리에 대한 가르침이다. 성공한 삶이란 진리를 실천에 옮기는 삶이다. (중략)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행적으로 그 가르침을 몸소 입증해 보였다.”(p.371)

 

그렇다. 앎도 중요하지만, 실천적 삶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의 모든 공부함이 실천적 삶으로 이어지게 되길 소망한다.

 

불교에서는 싯다르타가 그저 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를 묘사할 때는 흐트러짐 하나 없고 항상 평정을 유지하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초인 같다. 반대로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신이자 인간인 신비한 존재라고 말하면서 복음서에서 그를 묘사할 때는 너무도 인간적이다. 슬픔, 기쁨, 낙심, 격정, 연민, 분노 등과 같은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인간 말이다. 종종 눈물도 보인다. 놀라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p.120

소크라테스는 이성에 기반을 두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존재의 불가사의하고 초월적인 차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성적이었으나 그렇다고 이성주의자는 아니었다. 신비주의적 경향이 있었으나 그렇다고 독단주의는 아니었다. pp.246-7

진리를 알았다면, 그 앎으로 인해 우리가 바르게 행동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앎이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유로 붓다나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윤리에 대한 가르침이다. 성공한 삶이란 진리를 실천에 옮기는 삶이다. ...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행적으로 그 가르침을 몸소 입증해 보였다. p.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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