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송파 세 모녀의 죽음이 상처를 남긴 이유
김윤영.정환봉 지음 / 북콤마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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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송파구에서 환갑이 된 어머니와 30대의 두 딸이 함께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일명, ‘송파구 세 모녀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하얀 봉투에 5만원 권 14장, 70만원을 넣어두었고, 이런 쪽지를 남겼다.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빈곤가정들이 얼마나 힘겨운 상황가운데로 몰리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 복지의 사각지대가 얼마나 큰지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책,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는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우리 복지제도의 사각지대에 대해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안타까움, 슬픔, 분노, 무력감, 허탈감 등의 감정들이 밀려온다.

 

가난이 마치 죄 인양 살아가는 절대 빈곤층들의 아픔과 눈물에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낀다. 아울러, 이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비정한 사회를 향해 분노를 느끼며, 더 나아가 이들을 위해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연약함에 무력감과 허탈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아픔을 함께 공유하는 것, 문제의식을 함께 느끼는 것, 그리고 그들을 마음속으로나마 응원하는 것, 더 나아가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는 것, 이런 것들이 비록 미력하나마, 세상을 조금 더 따스한 공간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힘이 되리라 여겨진다.

 

이 책은 송파구 세 모녀 사건의 전말을 설명한 연후에 이들이 과연 박대통령의 말처럼 복지제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면, 구제받을 수 있었는지, 그들의 신청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를 진단한다. 답은 아니다 이다.

 

그리고 이 사건만이 아닌, 다른 여러 실례들을 들어가며 빈곤층들을 향한 복지제도의 문제점, 사각지대, 구멍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특히, 부양의무자 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추정소득과 간주부양비와 같은 가짜소득의 함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솔직히 이런 문제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데,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무엇이 문제인지, 그리고 어떻게 개선해나가야 할지에 대한 가닥을 잡아갈 수 있어 도움이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지점에 이른 빈곤자들을 향해, 그들의 긴급함과 간절함을 우리가 이해하고 함께 품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좋은 제도개선도 필요하다. 하지만, 담당자나 관련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제도로 할지라도 소용이 없다.

 

아울러 현 제도의 문제점에 대한 개선노력이 절실히 필요함도 느끼게 된다. 소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과 애정, 그리고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역량을 발휘하는 자리에 앉은 힘 있는 사람들의 자세가 더욱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기본적인 문제점은 그런 자리에 앉아 있는 분들에게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이 혹 관심 밖의 세력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저 자신들을 귀찮게 하는 세력으로 여기고 있진 않은가 하는 점이다. 그렇기에 책임 있는 자리에 앉은 분들의 마음자세가 우선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저자는 복지의 시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검열하고 의심하며 심판하려는 자세보다는 혹 우리가 빠뜨린 어려운 사람은 없는지 찾아보려는 시각으로 말이다. 현 제도는 수급자의 입장에서 작동하고 있지 않다. 수급자를 선별하고 관리하는데 더욱 치중하고 있다며 문제의식을 제시한다. 그렇다. 무엇보다 마음자세의 변화가 중요하다 여겨진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책임 있는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이 이처럼 벼랑 끝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알기를 원하며, 현 제도와 정책의 문제점에 대해 알게 되길 원한다. 알아야 관심을 가지니 말이다(물론 알아도 관심이 없을 수는 있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큰 문제가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바로 윗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과 빈곤의 악마적 힘에 함몰된 사람들 간에는 좁혀질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건 바로 윗자리에 앉아계신 분들은 결코 가난의 처절함을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궤도에 오를 수 없는 사람들의 답답함과 무력감을 그들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대다수는 출발부터 지금까지 이처럼 생존의 문제로 발버둥치는 고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령 높은 자리에 앉은 분들 가운데는 그 출발이 비록 어려움의 상황 가운데 출발했다 할지라도 그들 모두는 이미 성공신화를 이룬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그들 모두는 승리자들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자의 자리, 패배자의 자리에서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이들의 고통과 절규를 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바라기는 정책을 만들고, 결정하며 집행해나가는 분들에게 이 마음이 필요하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연구하고, 이해하는 것에는 여전히 사각지대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사방이 우겨쌈을 당하여 고통당하는 빈곤자들의 입장으로 그들 스스로가 내려가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먼저, 가장 책임과 권한이 많은 분부터 모두 그래야 할 것이다.

 

나이 드신 어른들이 이런 이야기를 종종 한다. 요즘 아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밥을 굶는다면 밥이 없으면 라면 끓여먹으면 되지 라고 말한다는 것. 참 순진한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기도 하다. 전혀 공감하지 못하며, 대안을 내놓는.

 

오늘 정책을 만들고, 결정하며, 집행하는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이 바로 이런 모습 아닐까? 여기에 진짜 문제가 숨어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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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에도 정의가 필요해 - 위기의 지구를 살리는 녹생 비상구 비행청소년 3
장성익 지음, 어진선 그림 / 풀빛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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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환경에도 정의가 필요해』는 ‘환경’에 대한 책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정의’를 이야기한다. 환경문제는 ‘정의’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에 ‘정의’가 필요한 이유는 환경 파괴의 원인이 대체로 인간에게 있으며, 그 영향을 받는 이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권을 노린 대규모 개발로 인한 것들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기업들(특히 다국적 기업)은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지만, 그에 비례하여 환경은 파괴되며, 그 피해는 민중들, 특히, 힘없고 가난한 약자들에게로 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를 든다면,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투발루는 해마다 바닷물이 점점 차오르고 있어 앞으로 50-70년 안에 나라 전체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9개의 자그마한 산호초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아름다운 나라, 인구가 1만 명 정도에 불과한 이 자그마한 섬나라는 해수면이 높아지게 된 원인인 지구 온난화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나라이다. 오히려 많은 배기가스를 배출하여 온실효과를 더욱 높이고, 지구 온난화를 가속시킨 나라들은 강대국들이다(여기에는 우리나라도 포함된다. 우리나라는 세계8위의 이산화탄소 배출국이다). 그런데 정작 그 피해는 지구 온난화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만큼 작은 나라, 힘없는 나라, 가난한 나라인 투발루가 고스란히 받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정의롭지 못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 그래서 ‘환경정의’가 필요한 것이다.

 

뿐 아니라, 전기의 문제 역시 그러하다. 우리나라의 예를 든다면, 결코 안전할 수 없는 원자력발전소는 모두 가난한 지역에 있다(핵발전이 안전하고 깨끗하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핵은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이 체르노빌과 일본의 사태가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생산되는 전기의 대부분은 그 지역에서 소비하는 것이 아닌, 그 지역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서 소비하게 된다. 잘 사는 지역에서 많은 전기를 소비하기 위해 전기를 옮기는 고압송전탑 역시 가난한 지역을 지나게 된다.

 

힘없는 사람들은 자신들과는 어쩌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임에도 엄청난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반대로 실제 전기의 주 고객들은 위험에서 멀리 떨어져 안전하게 혜택만 누린다. 이것이 정의롭지 못한 모습이다. 그렇기에 ‘정의’가 필요한 것이다.

 

이뿐인가? 나무를 잘라내고, 잔디를 심어 그 잔디를 관리하기 위해 농약을 쏟아 부은 골프장에서는 가진 자들이 즐긴다. 하지만, 그 농약이 내려와 오염된 물을 마시는 자들은 골프장 아래의 가난한 농민들이다. 이것이 정의가 깨어진 모습이다.

 

풍요롭진 못했다 하지라도, 굶지 아니하며 정을 나누며 살아가던 지방에 외국 자본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곳을 대규모 농장으로 만든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환경은 파괴된다. 뿐만 아니라, 이제 그곳에서 생산한 농산물은 모두 다시 외국으로 수출된다. 그러니 돈을 벌게 될 것 같지만, 실상 이익은 외국의 다국적기업이 다 가져가고, 정작 그 지방의 주민들은 적은 임금을 받고, 모든 식재료를 비싼 가격에 구입해야만 한다. 그래서 부유해지기는커녕 도리어 갈수록 이들의 가난은 깊어지고, 노동은 늘어만 간다. 이 일로 외국 다국적기업과 정부의 부패한 관료들의 배만 채워간다. 이것이 정의가 깨어진 모습이다.

 

이처럼 환경문제는 인간에 대한 문제, 특히 정의, 평등, 민주주의와 같은 문제가 포함된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환경파괴의 일차적 피해자는 환경파괴에는 기여하지 않은 수많은 동물들과 가진 것 없는 약자들이다. 그렇기에 ‘정의’가 강조되어져야 한다.

 

‘환경 정의’ 이제는 우리가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실천해나가야 할 부분이다. 개인과 기업과 정부가 함께 이 일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정부는 환경에 대한 문제에 더욱 심각한 의식을 가지고 바른 정책들을 만들어 가야할 것이다. 아울러 기업은 눈앞에 있는 자신들의 이익만을 좇을 것이 아니라, 보다 장기적인 안목과 이타적인 안목을 더하여서 환경보존을 위한 노력들을 해나가야 할 것이며, 개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삶의 실천들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 ‘지속가능한 미래’를 약속받으며,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서평에서는 자세히 언급하진 않았지만, 저자가 책에서 언급하는 원자력문제와 먹거리 문제 역시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들이다. 저자의 환경에 대한 접근, 관점이 옳다. 『환경에도 정의가 필요해』, 참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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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잘될 거야!
마나 네예스타니 글.그림, 유달승 해설 / 돋을새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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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개혁적 성향을 가진 시사 만평가 마나 네예스타니의 시사 만평을 모아 놓은 작품집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활동으로 인해 수감되기도 한 작가는 결국엔 정치범으로 이란에서 추방당하여 현재 파리에 망명중이다.

 

이러한 작가의 작품들은 모두 시사성을 띠고 있다. 특히 이란과 시리아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탄압에 대한 내용들과 이로 인한 자유를 꿈꾸는 주제들이 주를 이룬다. 이외에도 예술을 향한 검열, 핵무기에 대한 경고, 종교적 갈등, 사회적 불평등(여성, 아동, 성소수자 등)에 대한 작가의 고발, 그리고 결코 괜찮을 일이 없는 현실 속에서도 꿈꾸는 희망, 그리고 고난 가운데서의 유머 등을 담고 있다.

 

단순한 그림이 때론 글보다 더 힘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하는 만평들이다. 많은 작품들 가운데 몇 개만 올려본다.

 

“탄압”이란 제목의 작품이다. 이란의 반체제운동인 녹색운동에 대한 탄압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그 탄압으로 인한 결과는... 결국 그 탄압은 자신들에게 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작가의 유머가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녹색이 노란색으로 바뀔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두 가지를 생각해본다. 첫째, 거짓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운 인생을 설계하고 실제 그려나간다. 그리고 믿는다. 내 인생은 아름답다고. 하지만,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그 위 권력의 군홧발에 짓이겨지기 일보직전의 상태.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행복한 인생, 아름다운 인생에 불과하다는 것.

 

둘째, 공권력의 군홧발은 끊임없이 민중을 억압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희망을 그려내고, 아름다운 인생을 꿈꾸는 모습이 민중의 삶의 모습이다.

 

 

 

“주의: 부서지기 쉬움”이다. 마나 네예스타니의 만평에는 이처럼 군화와 꽃이 많이 등장한다. 군화는 민중을 유린하는 공권력일 테고, 꽃은 힘없어 언제나 밟히고 꺾이는 민중, 하지만 그 가운데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피길 꿈꾸는 희망, 그리고 그들이 흘리는 붉은 피를 상징하는 듯싶다. 민중은 언제나 힘이 없다. 하지만, 결코 약하지 않다. 때론 그 약함에 공권력에 구멍이 뚫리기도 한다. 부서지기 쉬운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꽃일까? 아님 군화일까? 그래서 권력자는 언제나 연약한 민중의 소리를 두려워하는 것 아닐까?

 

“저를 따라 오세요(Fallow me)”

누군가 벽에 붉은 선을 그었다. 그리고 따라오길 바란다. 그 선을 따라가 본다. 반듯하게 이어지던 선이 갑자기 아래로 떨어진다. 하지만, 다시 이어진다. 계속 이어지던 선이 다시 아래로 떨어진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다. 이어지던 선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아랜 붉은 펜이 놓여 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펜을 주워 끊어졌던 선을 다시 이어간다.

 

이것이 바로 “운동”이다. “운동”은 반드시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 해 오던 그 일이 무엇에 의해서인지 알 수 없지만 끊어졌다(권력의 탄압에 의해서일수도, 본인의 변절에 의해서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사라졌다. 하지만, 또 누군가 그 뒤를 잇는다. 계속하여... 결국 내 차례가 되었다. 물론 망설임이 없지 않다. 하지만, 결국엔 펜을 들고 선을 이어간다.

 

그리고 마지막은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다. 힘겹다. 중간에 올가미에 걸려 넘어질 수도, 인생이 끝날 수 있다. 하지만, 끝까지 간다. 저 희망, 자유, 새 시대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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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에서 홍수까지 - 양승훈 교수의 아주 특별한 창세기 주해
양승훈 지음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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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는 39권의 구약성경 가운데서도 유독 사랑받는 성경이다. 신앙인들뿐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창세기 속의 이야기를 한두 번쯤 들어봤을 정도이다. 그만큼 잘 알려진 성경이지만, 여전히 많은 분들이 창세기에 대한 연구서적이나 설교집을 발간하기도 한다. 또한 교회의 강단에서 구약 가운데 가장 많이 설교되어지는 성경 가운데 하나이다.

 

이토록 많이 알려진 창세기에 대해 또 하나의 책이 나왔다. 바로 양승훈의 『창조에서 홍수까지』란 책이다. 이 책에는 부제가 붙어 있다. “양승훈 교수의 아주 특별한 창세기 주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아주 특별할까? 그것은 양승훈 교수는 목회자가 되기 전, 물리학교수의 이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창조과학회 활동도 오래 하신 분이다.

 

그렇기에 과학자의 관점에서 창세기를 바라보고 있다. 물론, 그 범위는 창세기 전체가 아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역사(창세기 1-11장) 부분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실제 다루고 있는 부분은 원역사 전부가 아닌, 창조이야기(사실 창조이야기 역시 저자는 하나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렇기에 어쩌면 반쪽 창조이야기일 수도 있다)와 홍수이야기 부분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제목을 『창조에서 홍수까지』라고 하기보다는 『창조와 홍수』라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원역사에서 창조와 홍수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야기의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작지마는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처럼 창조이야기와 홍수이야기를 저자는 과학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그 관점을 첨가하고 있다. 이러한 과학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내용들은 우리의 성서해석을 더욱 풍요롭게 하며, 또 한편으로는 흥미로움을 더해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과학자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목회자의 관점에서 바라본다(신학자의 관점이라고 말하기에는 약간 부족함이 없지 않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관점을 잃지 않고 거듭 강조하며, 우리에게 알려준다. 성경은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하다. 창조과학회 활동을 하시는 분들의 긍정적인 성과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은 신앙에 대한 책이다. 성경은 우주의 기원에 대해 말하고 있지도 않다. 창세기 1장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창세기 1장을 접근하며,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집중하게 되면, 잘못 접근하게 된다. 창세기 1장은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가 아닌, 세상을 ‘누가’ 창조하셨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홍수이야기 역시, ‘어떻게’ 사건이 진행되는지 보다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홍수 사건 이후에 재창조 사역이 ‘누구’를 통해 이루어지는 지를 말씀하고 있다. 이 부분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된다. 성경 안에 역사가 담겨 있다. 하지만, 성경은 역사책은 아니다. 성경 안에서 과학적 내용을 도출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저자는 이 부분에 있어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다. 과학적인 접근, 해석을 한 후에도 다시 돌아와 이 부분을 짚어 준다. 이처럼 과학자로서의 접근을 하면서도, 신학자, 목회자로서의 접근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 이 책의 큰 장점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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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지음 / 다섯수레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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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방한하셨던 교황 프란치스코에 대한 관심은 대단히 높다. 물론, 프란치스코 교황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물론 많지만 말이다. 아무튼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관심이 높은 이유는 여러 가지겠다. 무엇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자의적 사임, 그렇지 않은 경우까지는 2번째) 교황직을 사임하고 선출되었다는 이유가 한 몫 했을 것이다.

 

게다가 선출된 인물이 비유럽권으로는 최초의 교황이라는 점. 아메리카 대륙 출신 최초의 교황이라는 점도 화제집중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러한 요소들은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일 수 있다. 가톨릭 인구의 대다수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기 때문에 어쩌면 아메리카 대륙의 교황이 선출된 것은 시대적 부응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탈리아 이민자 2세이기에 어쩌면 가장 많은 교황을 배출한 나라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딱지가 붙을 수도 있다.

 

사실, 이러한 요소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인기에 일조함이 없지 않겠지만, 그의 가장 큰 인기 비결은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서,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는 철저하게 이 부분에 대해 접근하고 있다. 본서는 사실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서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 서적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현재와 같은 신학적 사고를 갖게 된 배경, 그가 교황이 되기 이전에 교회의 신학작업에 끼친 영향, 그리고 그에게 그러한 신학적 영향을 끼친 신학사조와 교회의 작업들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저자가 생각하는 교회의 모습, 교회의 역할, 교회의 목적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발견하고 찾아가는 작업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어쩌면 그렇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저자가 추구하는 방향, 그 부분의 모습만이 보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관점은 건강하고 옳다. 물론, 교황의 외적 영성부분이 아닌 내적 영성부분에 대해서는 소홀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을 통해,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그 내용은 대단히 건강하다.

 

교회(가톨릭, 개신교, 동방교회 등 모든 기독교 교회)는 결코 닫혀 있어서는 안 된다. 닫혀 있는 교회를 ‘자기 참조적인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런 교회는 복음 전파보다는 교회 보존에 열을 올리는 폐쇄적인 교회로 건강한 교회라 말할 수 없다. 아니, 복음 전파 역시 교회 보존의 수단으로 삼는 교회가 있는데, 이를 저자는 ‘영적 세속성’의 늪에 빠진 교회라고 말한다. ‘영적 세속성’이란 신앙심의 외양 뒤에,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대다수 교회 인사들의 열정은 바로 이 ‘영적 세속성’에서 출발한다.

 

교회는 이익 창출의 집단이 아니다. 교회는 성공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 역시 아니다. 교회를 위한 교회는 옳지 않다. 교회는 하나님을 위하여야 하며,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는 문을 닫고 안에 평안히 거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방향성을 변두리로 본다. 세상의 모든 존재적 변두리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변방이 교회가 갈 곳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랬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지 않으셨다. 당시 변방 갈릴리에서 활동하셨다.

 

그리고 교회는 약자들의 눈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더 이상 무관심한 채 끼리끼리 모여 거짓 평안을 위안삼아서는 안 된다. 주님은 약자들의 눈물, 아픔을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셨다. 이제 교회 역시 이런 연민의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교황을 통해, 가톨릭이 옳은 방향으로 변혁되어지고, 이 건강한 물결에 개신교 역시 건강한 자극을 받게 되길 바란다. 사실, 중세 시대 가톨릭이 타락하여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교회가 새롭게 시작될 때,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영향을 받아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회의 출발이다(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 출신 최초 교황이다). 그렇다면, 이제 개신교 역시 누구의 영향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새로워짐이 중요함을 깨닫고 함께 새로워지는 축복이 있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누가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에 처음 선포하신 말씀을 살펴봄으로 서평을 마친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복음 4: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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