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7.02

나는 그때 그곳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긴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싸웠다.
그러나 그 시간은 결국 끝났다.
기다리는 대상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그 시간은 아픔이 되고 슬픔이 되고
끝을 알 수 없는 우물이 된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그 시간을 떠올리면 아득해진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때 난 그곳에서 평생을 기다렸다, 라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던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 그때 나는 그곳에서 평생을 기다렸다, 황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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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3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왠지 저도 훗날에 저 대사를 읊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잔잔한 피아노곡을 듣고 있는데. 어쩜 이리도 잘 어울리는 글인지. (웃음)
 

 

    【카타르시스】 [katharsis]

    정화. 배설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제 6장, 비극의 정의(定義) 가운데에 나오는 용어.
    '정화'라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는 한편, 몸 안의 불순물을 배설한다는 의학적 용어로도 쓰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의에 대해서는 이 구절의 표현이 불명료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설(異說)이
    분분한 채 오늘에 이르지만, 요컨대 비극이 그리는 주인공의 비참한 운명에 의해서 관중의 마음에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이 격렬하게 유발되고, 그 과정에서 이들 인간적 정념이 어떠한 형태론가
    순화된다고 하는 일종의 정신적 승화작용(昇華作用)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정신분석에서는 무의식 속에 잠겨 있는 마음의 상처나 콤플렉스를 말. 행위. 감정으로써 밖으로
    발산시켜 노이로제를 치료하려는 정신요법의 일종으로, 정화법, 제반응(除反應)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마음의 상처, 응어리는 상기하거나 말하기가 괴롭고, 전혀 생각나지 않는 수도 있다.
    이 방법을 처음으로 발견한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J.브로이어'는 이 저항을 완화하기 위해 최면술을
    사용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마취제(아미탈, 펜토탈)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라도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 어느 정도의 마음의 연결이 없으면 성공
    하지 못한다.  문제아의 치료에 쓰이는 유희요법(遊戱療法)도 【카타르시스】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블로일러'에 의한 이러한 【카타르시스】의 발견은 정신분석의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

    자, 여기까지가 사전적 의미이고 -

    한 마디로 말 하면, '억압된 감정의 표출'을 영화나 소설 속의 주인공을 통해서 이루거나
    어느 날 무언가를 계기로 느끼게 되는 감정의 배설 - 오르가즘, 환희, 희열, 성취감, 충족감, 만족 등.

    '환희' 나 '희열' 혹은 '쾌락' 같은 감정/느낌의 최고봉에 달하는 감각들은 흔하게 접하는 문자들이지만,
    실제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피부 속, 정말 발 밑에서부터 영혼이 끌어 올려지는 듯한 그런 느낌의 감각은 애당초 쉽게 느낄 수가
    없는 감각.
   

    그럼에도, 나는 운 좋게 - 딱 한번 '환희'를 느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느낌은 정말로 -
    온통 하얀 것 밖에 없는 시.공간에 둥- 떠 있는 느낌이다.

    온 세상의 빛이 내 주위에 모여 있는 오로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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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에는 서로 모순된 두 가지 감정이 있다.
물론 누구라도 타인의 불행에 동정심을 품지 않는 이는 없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이 불행을 어렵사리 극복해내면
이번에는 어쩐지 뭔가 아쉬운 듯한 마음이 든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다시 한번 그 사람을
똑같은 불행에 빠뜨리고 싶은 듯한 마음까지 든다.
그리하여 어느새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자칫 그 사람에 대해 적의까지 품게 된다.

― 라쇼몽,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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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1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시련을 극복하여 성공한 사람을 보면 내가 된 것처럼 기분이 좋고 자극이 되어
의욕도 약간 생기고 그러던데.
저 사람은 주관적인 불특정 소수에서 일어나는 심리를 마치 '인간의 모든 마음'에
있는 것처럼 표현했군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남들도 다 그런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저 얼마나 작은 그릇의 생각입니까.

moon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302moon 2007-05-11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러게 말입니다. 좀 어이없다 싶어서, 밑에 의견을 단다는 게 그만 빠트리고 말았군요.
어제, 20분 동안 컴퓨터와 씨름하다가 겨우 페이퍼 3개 올려놓고/
이거,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아닙니까, 정말!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데, 순간 분노에 휩싸여서.
저 글은 웹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예전에 제가 읽은 적이 있던 소설이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_-), 저런 구절이 있었나 싶습니다. 책을 다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슬쩍 기록해둡니다. ^^*

비로그인 2007-05-12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잔재주를 부리는 기교는 필요 없다.
과장된 비평이나 해설도 필요 없다.
사는 것이 예술이다.
죽을 때 '나라는 작품'에 감동하고 싶을 뿐.

― 다카하시 아유무, LOVE&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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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 멋있는 표현입니다.
결국 인생의 의미는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 어떻게 만들어냈냐에 따라 나중에
어떤 점수를 받고 죽는가 ... '왜 사는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한 답을
항상 찾고 있었는데, 뭐랄까. 조금 힌트를 얻은 기분입니다. (웃음)
 
혹성탈출 SE : 스틸북 DVD (2disc)
팀 버튼 감독, 마크 월버그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인간만이 지구를 지배하고 문명을 이루어 살 수 있다는 거만한 우월주의를 한번에 깰 수 있는 영화.
   

    여기에서 '혹성 탈출'은 바로 지구를 뜻한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인간의 지구'가 아닌, '다른 영장류의 지구'.

    때는 2029년.
    언제나 그렇듯, 끊임없는 호기심과 도전심으로 우주를 연구하던 인간들.
    어디가 좌.우고 어디가 상.하인지 그 경계선을 긋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이는 광활한 우주의
    어느 곳에서 그들은 묘하고 아름답게 무리지어 있는 별들이 있는 곳으로 훈련받은 침팬지를
    탐사선에 태워 보낸다. 그러나 곧 탐사선과의 교신이 끊어지자, '레오'가 침팬지를 찾으러 가겠다고
    자신도 탐사선에 탑승해 따라 나선다.

   
     Leo

    앞의 탐사선이 사라진 지점은 그 아름답게 무리지어 있던 별들의 근처.
    그 곳은 전파기가 철철 흐르는 곳으로 시간의 뒤틀림이 있는 곳이었다.
    '레오'의 탐사선은 똑바로 쳐다보면 금방 시력을 잃어버릴 정도의 엄청난 섬광과 함께 전파기의 영향을
    받으며 우주의 뒤틀린 시간속에서 왔다갔다하다가 어느 행성의 밀림에 불시착하게 된다.

    도대체 여기가 어딘가.
    정신을 못 차리며 물 속에 빠진 탐사선에서 탈출하여 밖으로 나와보니, 원시인같이 지저분하고
    맹해 보이는 인간들이 미친듯이 도망치고 있었고, 그들을 잡으려는 철갑옷을 입은 무장한 원숭이,
    침팬지, 고릴라 등 영장류가 쫒아온다.
    다른 인간들과 함께 붙잡힌 '레오'가 끌려간 곳은 모습만 다를 뿐 인간들이 사는 모습을 똑같이 하고
    있는 '유인원의 사회'.
    꿈인지 생시인지 어리둥절한 '레오'는 뭔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어느 시대나, 혹은 어느 행성에나 있을 법한 '깨어 있는 계몽가 혹은 혁명가' 같은 부류의 여자
    유인원의 도움을 받아 가축처럼 하등 동물 취급을 당하는 인간들의 힘을 모아 폭군같은 악한
    유인원 '테드'의 군대와 맞서 싸우고, 먼저 실종되었던 침팬지의 탐사선이 이 행성에 뒤늦게
    도착하자 그 탐사선을 타고 행성을 탈출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가 돌아가고 싶어하는 '현재'가 아닌 -
    죽기 살기로 탈출한 그 행성의 경악할 미래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데...
    과연 그가 본 것은 어떤 미래였을까.

 

    힌트를 주자면, 그가 불시착했던 행성은 바로 지구였고, 자신이 '현재'라 생각했던 시대에서
    수천년이나 흐른 - 인간은 노예가 되고 문명을 발전시킨 것은 다른 영장류였던 전혀 다른 세상.

   

  

    '하찮고 지능도 없고 더럽고 영혼도 없는' 인간을 자신들의 때 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오만한 원숭이도
    있고, 그런 '어리석은 미개한 동물'을 사랑과 관심과 자비로 감싸안아주는 원숭이가 있는 그 세상이
    왜 나는 낯설지 않았던 것일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1968년에 상영하여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원작을 2001년에 세련된 기술로 다시 만든 이 영화는
    인류만이 최고라고 생각하여 다른 동물에 대한 학대와 무시를 일삼는 인간들에게 울리는 경종과도
    같다.  아니, 그렇게까지 거창할 필요도 없이 단순하게 -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

    라는 메세지만 전달해도 이 영화가 전하고 싶었던 주제의 임무는 완수한 것이나 다름 없다.

    사악했던 '세모스'의 후손인 '테드' 원숭이 장군을 전투에서 패하게 한 후, 
    무지한 인간과 똑똑한 원숭이들이 서로 평화롭게 살아가자는 결말을 보았을 때 들었던 만족감을
    예쁘게 만들어 놓은 두부를 짓밟듯  묵사발내며 -

    '그래, 결국 자신들이 최고라고,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생물들의 오만방자함의 역사는
     저런 것이지.'

    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아주 적나라하게 까발려 놓은 영화랄까.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인간의 반응은 두 부류 아닐까 싶다.
    '쳇. 말도 안돼. 저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라고 여전히 인류만이 뛰어나다는 오만한 부류와
    '그래. 인간만큼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동물은 없다. 반성해야 돼' 라고 감독의 뜻에 동조하는 부류.

   

    인상깊었던 대사 한 마디.
    침팬지를 사랑으로 평생 보살피던 어느 여인처럼, 인간을 관심과 애정으로 보살피고 돕는
    여자 유인원이 '왜 (당신이 온 세상에서는) 원숭이를 가둬두고 무시하냐'고 '레오'에게 묻는다.

    "말을 못하거든."

    정말 의미심장한 대사라고 생각했다. 그런가. 
    만약 모든 동물들이 인간처럼 똑같이 말을 한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어땠을까.
    적어도 원숭이과의 영장류만이라도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우리는 그들을 동물원의 구경거리로
    만들 생각을 감히 했을까 싶다.  

    먹고 살기 위해 먹이 사슬의 제 위치에서 타 동물들을 죽이는 것이 아닌,
    단순히 재미와 이기심에서 죽이고, 학대하고,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발상의 전환' 혹은 '반전'이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추천해주고 싶다.
    '원숭이 사회'에서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거울 삼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니까.

 
   
          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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