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팬이 연극으로 초연된지 100년만에 원작에 가까운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해서 설연휴를 맞이하여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다. 보고난 느낌은 역시 돈들인만큼 스펙터클은 확실하다는 것. 연극의 대본이 동화가 되고, 그 동화가 영화가 된 만큼 <피터 팬>은 확실히 극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보고난 다음 가장 크게 든 의문은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도로 도대체 이 영화의 홍보담당자가 <피터 팬>의 원작을 읽었을까 하는 것. 등장인물과 네버랜드의 배경을 원작과 가깝게 재현해 놓았다고 그것을 원작에 충실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근본적으로 원작과는 큰 차이가 있는 또다른 버전의 피터 팬이 되고 말았다.
먼저, 가족의 문제. 동화 <피터 팬>에서는 의도적으로 가족과 부모를 조롱한다. 웬디의 아빠 달링 씨가 어리석은 부모의 대표적인 인물. 달링 씨는 돈을 제일 중요시하는 속물로 나온다. 이 인물이 어느 정도 속물이냐면, 아이들이 피터 팬을 따라 네버랜드로 떠난 후, 속죄하는 마음으로 개집에서 잠을 잔다. 그런데, 그 일이 신문에도 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자 아이들을 까맣게 잊고, 자신이 유명인이 된 것을 우쭐해서 기분 좋아한다.
그리고, 원작에서는 '엄마'가 아이들을 과도하게 보살피는 내용이 종종 나온다. 웬디가 네버랜드에 사는 아이들을 돌보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비웃고 있다. 물론,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꼭 필요하지만, 약 먹어라, 손 씻어라, 낮잠자라, 싸우지 마라 하루 종일 잔소리하는 웬디의 모습은 영화 속 모험을 즐기는 웬디의 모습과 큰 차이가 있다. 영화가 여성 캐릭터를 양성평등적으로 기르려고 했을지는 몰라도 나는 웬디의 모습이 별로 마음에 안들었다.
무엇보다 걸리는 것은 피터 팬과 후크의 갈등의 원인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작에서는 그 점이 무척 설득력있게 그려진다. 원작을 읽은 어른이라면 후크라는 인물에게 매혹되지 않을 수 없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항상 괴로워하고, 쪼잔하기도 한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후크가 피터를 싫어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놈은 아이주제에 너무 잘난척한다.(이 말에 나는 100% 공감한다.) 거기다 피터에 대한 질투의 마음도 있다.
내가 원작우선주의자라 그런지 몰라도. 원작의 감칠만나는 대사가 빠진 것도 너무 아쉬웠다.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스미의 대목이 왕창 잘려나간 것도 ㅠㅠ 아쉬웠다. 후크의 해적 가운데 스미만큼 재미있는 인물도 없는데, 그를 그냥 멍한 아일랜드 출신의 해적으로 그려놓다니... 예를 들면, 후크가 피터 팬 때문에 악어에게 팔을 먹힌 이야기를 하다가 스미는 이렇게 말한다. "악어가 선장님 팔을 맛있게 먹었다는 것은 선장님에 대한 일종의 칭찬이 아닐까요?" ㅋㅋㅋ 나는 정말 이 대목에서 자지러졌다. 웬디가 스미를 애완동물로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정말 이해가 된다.
뭐, 영화는 아주 무난하게 가족 영화로 마무리된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아이가 사랑하는 양친 밑에서 성장한다는 것. 원작과는 사뭇 다른 결말을 보면서, 차라리 권교정이 패러디한 <피터 팬> 이야기가 더 재밌고 새롭게 느껴졌다. 이 이야기는 단편집 <붕우>에 중편 분량으로 실려있다. 영화를 보고 책을 찾아서 다시 한번 읽어보았는데 역시 인생의 모든 단계를 천천히 살고 싶다는 온화한 후크의 모습이 가슴을 울렸다.
결론을 말하자면, 영화는 원작이 가진 가족 제도와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조는 모두 제거하고 화려한 스펙터클로 포장한 어정쩡한 가족영화로 만들었다. 제임스 배리가 이 영화를 보았다면 아마 기절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 속에는 아무런 성찰도 관찰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가족 안으로 들어오면 만사 오케이라는 나약하고 성의없는 결론이 뒷맛을 쓰게 했다. 애들 영화라고 이렇게 쉽게 만들면 되는가. 사족처럼 덧붙이자면, 원작 피터 팬은 잔혹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 사실 그동안 나온 피터 팬의 동화 버전이나 애니메이션은 원작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보면 된다.
오늘 날의 어린이들은 너무 중산층적인 안온하고 디즈니적으로 결말지어진 재미없는 이야기를 보고 자라는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예전보다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역으로 어린이를 위한 작품은 잔인성이 제거되고, 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풍자 역시 제거된 착한 어린이를 위한 교본 정도밖에 되지 못한 듯 하다. 이것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제도권 교육이 전체 교육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크면 클 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 아이들이 만화와 게임에 몰두하는 이유를 나는 여기서 찾고 싶다. 인생이 안온한 판타지가 아니라는 것은 애들도 알고 있다. 그러니 거짓말로 범벅된 동화가 재미있을리 없다. 이러니 애들이 요즘 동화를 안읽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