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동화작가가 굳이 아이를 키우는 부모일 필요는 없다고 했다. 동화는 자기 아이에게 읽히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라, 자기 안의 어린이를 위해 쓰는 글이라는 것이 그녀의 요점. 나는 그 글을 읽는 순간 이 <내 친구 비차>가 생각났다. 내가 초등학교 때에도 읽었던 비차. 무려 나이가 반세기다. 이번에 새롭게 개정판이 나왔다. 달라진 점은 러시아어를 전공한 사람이 번역을 했고, 이전의 오류를 바로잡았다는 것.
지금의 러시아가 소련이라고 불리던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동화다. 하지만 이야기는 지금의 아이들에게도 충분히 먹힌다. 그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학교와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이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아이들은 공부보다는 놀이를 좋아한다. 방학 동안 실컷 놀고 개학을 걱정하며, 제일 싫어하는 수학 숙제는 맨 뒤에 하는 비차. 어차피 해도 모르니까 숙제는 베끼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비차. 그런 비차가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로 거듭난다. 스토리만 보자면 굉장히 교훈적이고 설교적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무엇보다 아이들의 생활에 밀착해 아이들의 동일시할 수 있는 아이 비차가 있다. 50년 동안 이 동화가 사랑받은 이유는 아마도 이 작가가 자기 안의 아이를 위해 글을 썼기 때문이 아닐까.
14마리 시리즈로 유명한 이와무라 카즈오의 장편동화. 그림만 잘 그리는 줄 알았더니 글솜씨도 훌륭하다. 나는 그동안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현실을 언어로 빚어내는 것은 잘 못할거야하는 근거없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작품을 읽고는 그림을 잘그리는 사람이 동화까지 이렇게 잘 쓴다말이야. 세상은 참 공평치 않다고 궁시렁거렸다.
모두 8권으로 구성된 동화로, 뾰족이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무당벌레 친구와 함께 뾰족산을 오르는 모험을 담았다. 나이 든 할아버지가 매일 밤 손자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구조로 한 장이 무척 짧다. 바람과 구름, 뾰족쥐와 물방게, 나무들이 태어났다는 뾰족산을 찾아가는 여정은 야단스럽지 않다. 초록톤의 표지그림처럼 한없이 차분하게 '성장'과 '만남'의 의미를 반추하게 하는 작품이다.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다만, 일본과 제책방식의 차이 때문에 그림 순서가 반대로 보이는 부분(2권에서 줄무늬뱀이 서로를 먹는 부분)이 조금 거슬렸다. 글과 그림이 나무랄데 없는 모처럼 만난 좋은 작품이다.
청소년을 위한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는데 청소년에서 어른까지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아직 소프트한 가족 소설이다. 어머니의 자살로 고아가 된 삼남매가 그때까지 있는지도 모르는 이복형제를 찾아가 함께 살게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초콜릿에 탐닉하는 판사, 남편에게 매맞고 하는 여자, 지독한 독점욕으로 애인을 괴롭히는 동성애자와 같은 주변인물은 오히려 얌전한 수준이다.
남자 친구(애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진정제나 수면제를 탄 커피를 마시게 하는 이복형, 피는 한방울 안섞인 이복누나, 주방세제를 마시고 자살한 어머니, 집을 나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아버지가 고아가 된 삼남매의 유일한 가족이다. 그런데 이들 다섯 명이 가족공동체로 거듭나는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아와 병자와 동성애자라는 주변인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지만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너무도 평범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무엇보다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이복형 바르와 백혈병에 걸린 시메옹이라는 캐릭터가 참 흥미롭다.
내용보다 섬세한 세밀화풍의 그림이 압도적으로 멋있다. 굴토끼와 멧토기의 아기 토끼 기르기가 내용이다. 보통 그림동화의 틀을 깨고 글보다 그림이 주가 디고 있다. 텍스트 면에도 섬세하게 그림이 들어가 있으며 때로 그림이 글 중간에 끼어들기도 한다. 갑자기 개미들이 두 페이지의 글 숲을 가로지르며 지나가기도 하고, 아기 토끼들이 뛰기를 배우는 장면을 묘사한 '깡중깡충 뛰며 뒷다리로 힘껏 내닫기 시작했어요'에서는 깡총거리는 멧토끼들이 행간 사이로 뛰어 들어온다. 다양한 포즈의 토끼들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장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