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허시먼에게 분리새로운 조합의 가능성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능주의possibilism라는 말을 만들기도 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단어는 쾌락은 실망을 주지만 가능성은 절대로 실망을 주지 않는다는 쇠렌 키르케고르의 유명한 경구를 차용해 자신의 기질을 드러낸 것이었다. 27

 

허시먼은 사건이 변칙적이거나 일탈적이거나 뒤집힌 순서로 전개될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 그것을 잠재적 경로로서 그려 볼 수 있도록 연구자의 상상력을 재설정해 줄 사회과학을 만들고 싶었다. 미래의 역사가 나아갈 수 있는 대안적 경로에 여지를 열어 줄 다양한 조합들을 탐색해 볼 수 있도록 말이다. 28

 

오래될수록 딱딱해지는 것이 아니라 물컹해지는 바게트 빵처럼, 허시먼은 역사가 일반 법칙들을 거부하면서 전개되는 다양한 방식에서 의미를 발견하고자 했다. 33

 

좋은 시는 위대한 발명품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 같아. 매우 단순하지만 읽는 사람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잖아. 37

 

정통과 확실성만 추구하다보면 의심과 회의가 가져다줄 수 있는 창조적인 가능성들과 예기치 못했던 경로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을 배제하게 될 수 있다. 45

 

앨버트 O.허시먼의 이야기는 개인사의 형태를 취한 한 시대의 기억이고, 실망에서 희망을, 긴장에서 해법을, 불확실성에서 자유를 발견하는 새로운 사회과학의 이야기이며, 지식인들이 겸손하면서도 대담한 태도로 관찰할 때 더 잘 포착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의 원천으로서 사회 세계를 바로보는 문학적 스타일의 이야기이다. 50

 

1.

 

우리는 세상에 대해 울거나 웃을 게 아니라 세상을 파악해야 한다.“ 118

 

결국 이 명령은 무언가를 첫 인상에 조롱하거나 적대시하지 말고 그것을 탐구하고 파악하고 고려하라고 요구한다. 그럼으로써 이 명령은 우리가 선전 구호만 넘쳐나는 상황에 맞서도록 이끈다. 스피노자의 가르침은 바로 그런 상황, 괴테의 말을 빌리면 개념의 빈틈을 말로 때우는 상황에 맞서 우리가 지켜내야할 이상으로 옹호되어야 한다.” 119

 

아우어바흐 우리는 정밀과학을 우리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정밀성은 구체적인 것들과 관련이 있다. 역사라는 예술에서 위대한 도약은 판단의 관점을 정교화하는 데서 나온다. 그렇게 해야만 다양한 시대와 문화를 그것들 자신의 전제와 견해들에 비추어 파악할 수 있고, 그것들을 최대한 발견해낼 수 있으며, 현상을 외부적 요인으로만 설명하는 모든 절대주의적 분석을 게으르고 몰역사적인 것으로서 기각할 수 있다.” 213

 

에우제니오는 주위를 보라고 조언했다. 세계의 현상들을 먼저 포착한 뒤 거기에서 아이디어가 나오게 만들라는 것이었다.....행동을 취하기 전에 객관적 조건들이 성숙하기를 꼭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218

 

프티 이데. 작은 것들은 큰 통찰을 주면서도 그 통찰로 환원되어 버리지 않았다. 반면 거대 개념은 세계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여러 원인들이 있는 사회적 과정들을 단 하나의 원칙으로 설명하려했다. 이를 피하려면 현실을 부분 부분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하고 자신이 관점이 주관적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했다. 220

 

그가 확실성을 인정한 예외가 하나 있었다면, 회의주의의 가치였다. 그는 회의야말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확실성은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회의는 무언가를 내가 알고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 것이다. 전자는 자신감을 약화시키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콜로르니는 의심과 회의가 창조성을 갖는다고 여겼다. 세상을 보는 대안적인 방식을 허용하기 때문이었다. 221

 

햄릿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자는 것이 이탈리아의 사상적 맥을 짚고 있던 친구들의 말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햄링이 아무런 동기부여도 일으키지 못하는 종류의 회의주의를 보여주었다면, 친구들은 회의주의가 행동을 추동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222

 

2.

 

영국에 왔을 때 내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갔다....그곳에서야 비로소 나는 경제학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235

 

그의 전환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하이에크를 택한 것이 아니었고 계급 분석을 버리고 케인스를 택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통상적인 전환이나 개종이야기에서보다 훨씬 많은 숙고와 선택과 적응의 과정이 있었다. 236

 

훗날 새러는 허시먼이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특정한 환경에서 어떻게 인지적 ·감정적 과정을 거쳐 의사결정을 내리고 행동하게 되는지에 매력을 느꼈다....엘버트는 작가가 주인공읫 심리에서 상황적 결과들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상황에서 심리적인 결과들을 도출하는 것에 놀라워했다고 한다. 268 ”관찰하라, 쉼없이 관찰하라.“ 269

 

카스텔루치. 피콜로 이데. 하나. 유쾌한 상상을 설명의 핵심으로 삼는다. . 상상력이 사람들의 믿음을 구성하고 믿음이 행동을 구성함으로써 세계사의 사건들에 영향을 미친다. . 회의와 의심은 도덕적 성찰과 행동에 대한 개념을 꺾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들었고 그 덕분에 허시먼은 모든 실천은 그에 앞서 역사의 전체성을 파악해야만 가능하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71

 

3.

한 국가의 경제정책은 단순히 무역 통제를 향한 내생적 경향성에서 발생하는 기술적이거나 실무적인 반응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경제정책의 밖에서, 그리고 위에서결정된 정치적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로 보아야했다. 302

플로베르는 회의주의적인 합리주의자로 키워진 한 젊은 남성에게서 비이성적인 요소들이 미신의 형태로 분출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는데, 여기에서 합리주의는 해결책도,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방향을 잡기게 그나마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의미하지. 위기를 겪고 난 뒤에 우리는 어떻게든 그 입장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 같아.“ 356

<<국가 권력과 교역 구조>> 허시먼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경제적인 공격성을 생각하고 여기에 보호주의, 국가 개입, 독점 등으 일반적인 경향성을 결합하면서, 어느 국가가 폐쇄적인 경제적인 경제정책을 편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 국가가 경제 문제에 대해 국가 내부만 바라본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려고 했다. 폐쇄적인 경제정책은 오히려 외부를 향한 무역 전략을 촉진했다... ... 세계경제 시스템의 붕괴와 거대 블록 간의 충돌은 불합리한 것도 아니었고 민족주의적인 병리현상도 아니었다. 그것은 체제의 기본적인 모순에 대해 각국이 합리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해 온 것과 달리, 제국은 자본주의의 주기적 위기가 초래한 결과가 아니라 교역에 내재된 상호의존성에서 기인하는 결과였다. 376 공급효과/영향력 효과. 이런 방식으로 교역은 타국에 강요를 행사하는 수단으로서 전재의 대체재가 된다. 약한 무역 상대국을 굳이 물리적으로 정복하지 않고도 지배할 수 있는, 20세기식 제국주의 모델인 것이다. 379

 

4.

 

가능한 것들에 대한 열정. 가능한 것들의 범위를 인식하는 것, 그 인식의 범위를 넓히는 것, 때로는 있을 법한 probable'것을 포기하면서까지 가능한 possible'것들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그가 이후 계속해서 되살리게 되는 프티 이데의 기초가 된다.(possible은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가능성을, probable은 현실적으로 있을 법한 것으로서 가능성을 말한다.) 421

 

5.

 

그는 마셜 플랜이 입안될 때 뒤에서 보이지 않게 움직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464. 최적의 위기. 란 변화를 강제할 수 있을 만큼은 크지만 그 변화를 끌고 나갈 수단까지 무력화시킬 만큼은 크지 않은 충격을 일컫는다. 466 유럽국가들이 문을 닫아걸고 배타적인 양자간 협상을 하기 때문에 유럽 지역 내 무역이 침체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쟁 부채를 갚기 위해 외환을 확보하고자 하는 절박함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유럽 지역에서 무역이 되살아나지 못한 다면 유럽은 막대한 대미 무역적자를 줄일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순지출이 순유입을 계속 초과하게 되면 미국의 원조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환자를 치료하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었다. 468

 

인플레이션과 무역적자 사이에서는 인과관계가 양방향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476

 

좁은 의미의 마키아벨리적인 관점에서 통합된 유럽이 생기는 것이 미국에 유리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 하지만 현재의 경험이 보여주는 바, 미국이 유럽을 전체로서 본다면 우리의 이익은 유럽의 통합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미국은 유럽을 하나의 지역으로 다루어야 했다. 480 각국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유럽의 금융과 재정을 상호 긴밀히 연결시킬 수 있는 통화 금융 조직의 구조를 어떻게 생각해낼 것이냐였다. 482

 

6.

 

무언가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배워 나가고 현상을 면밀히 관찰하는 기술은 몽테뉴와 콜로르니의 영향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었고, 여기에 작은 것들일상의 행위에 주목하는 특징이 더해졌다... ...그는 거리를 두고 조망하는 사람이 갖는 경험과 먼 experience-distant'개념을잠시 접어두고 경험과 가까운 experience-near' 지식을 추구했다. 경험과 가까운 지식이란 행동하는 사람이 그 행동 과정에서 배우게 되는 통찰을 의미한다. 527

 

후발 주자들은 선진사회가 기존의 공장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치중하는 동안 그 단계를 아예 건너뛰고 나중 단계로 도약할 수도 있었다. 즉 후진성은 부채가 아니라 자산이 될 수 있었다. 536 허시먼은 국가적인 사안이나 정치적 맥락 같은 것보다는 경제발전의 미시적 기반들에 관심이 더 많았다. 538

 

개발과정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싶지, 개발의 모든 비밀을 다 아는 사람인 양 행세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544 1954년경 콜롬비아가 잘하지 못하고 잇는 것이 무엇인지보다는 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하고 있었다. 545 프로젝트 평가가 허시먼 회사의 주요 업무가 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여러 프로젝트를 검토하고 평가했던 경험이 긴 경로를 돌아 그가 사회과학계에서 일구게 될 경력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551 경제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권력 야망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용맹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 결과 과학으로서 경제학이 저개발사회 발전의 세세한 부분까지 청사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고 경고했다. 569


볕뉘.


마지막 장이 다가온다. 갓난 아이를 들은 듯 무게감이 느껴진다. 어젯밤 말미를 읽다보니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아 설친다. 새벽에 마저 읽을까 싶다가 잠이 달콤해 이불 속에서 버티었다. 타계한 지가 2012년이니 그리 먼 일도 아니다. 조지 오웰이 스페인내전에 가기 전에 이미 다녀가셨다. 남미는 그야말로 밥먹듯이 가셨고, 지식인을 히틀러 치하에서 탈출시키는 요원으로 활동도 하셨고, 까뮈와 알제에서 만나기도 하셨단다. 전기저자도 대단하다 싶다. 바쿠닌의 전기도 흥미롭게 읽은 바 있지만, 이렇게 시대와 저작의 이면까지 꼼꼼하게 현장감을 느끼게 하는 대작은 상상이상이다.  두서없이 정리하다가 일단 쉬어가기로 한다.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그 맥락은 많은 것들을 불러내며 환기시킨다. 산 역사의 증인이라는 표현이 진부할 정도다. 역사의 생성자라는 것이 나을까. 그냥 밑줄의 이력을 쓰윽 보셔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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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1.
그러니 자넬 믿을 수 없어.

더군다나 자네가 전제하는 걸.
별반 흔들려 본 적이 없는 그것을 말야. 그래 묻고 싶어.
그건 무너질 수도 있고.
하면서 더 탄탄해질 수도 있지.
누가 그러던가.
자네가 믿는 사람이 그러던가.
그러면 되물어보게. 무엇을 해야하는가보다 왜 하느냐구.
그 분의 전제가 무언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 사람은 그걸 의심해본 적이 있다고 하던가.


2.

들어본 적이 없다고.
헌데 왜 그러는가. 자넨.
그러해야만 할 이유가 있는가. 사명감인가. 의무감인가.
그럼 그런 이유같은 건 애초에 없는 거라고 해보게.

왜 허망한가.
기댈 곳이 없어지는가.
삶의 끈아풀마저 잡을 수 없는가.
그렇군. 자넬 기대는 사람들도 자네에게 묻지 않았겠네.


3.

아쉽고 안타깝네.
안타깝고 아쉽네.

그래 자네도 문제야.
좀더 의심했더라면
자네가 길 하나쯤은 더 낼 수 있었다곤 생각한 적은 없는가.

그래 자네가 문제야.
좀더 흔들렸더라면 조금 더 단단해졌을거야. 아마.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가.
불리할 때 말고, 유리할 때일수록 친해져야할 이것 말야.


4.

명심할 필요는 없네.
세상에 존경같은 건 없네. 그런 게 다 망쳐놓았네.
그런게 다 무능을 키우고 감싸니.
늘 허세가 묻어 높아지기만 하는 건 아닌가. 내 편만 원해.

5.

한 두번쯤
당신이 믿는 세상같는 건 없다고 해보지않겠나.
그렇게
원하는 건 없다고 말일세.
늘 판에 박힌 회의가 두렵지도 않은가. 실행만 원하는. 자기를 갈아넣는.


볕뉘.





1. 아마 맴돌 듯. 그 자리에 머무는 건. 이럴 자유가 없어서는 아닐까. 불확실한 걸 말하는게 아냐. 분위기라는 서툰 관성. 절망을 폐기처분해버리고야 마는 힘. 말로 표현되지 않는 어떤 것들. 그 거름으로 또 자라날 숱한 것들은 어디 있을까. 애매를 보장해주는 관용같은 건 왜 대기하지 못하게 하는가. 참을성같은 것은 사전에 없는 듯이... ... 앨버트 허시먼을 3/5정도 읽고 있다.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모아본다.


2. 1차별에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인종차별, 성차별, 장애차별, 종차별, 나이차별, 계급차별, 차별이 위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울기를 보완한다는 차원에서, 비슷한 삶의 시선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고, 양심의 회복 방향으로 가야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사람은 복수적인 존재이므로 다양한 차별을 행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불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시야를 확보해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2.2 인종차별을 하는 발언을 하면 법적인 처벌을 받는다. 성적인 차별을 하면 정도에 관계없이 법적인 처벌을 받는다. 장애차별을 하면 받는가. 나이차별을 하면 받는가. 아이를 홀로두면 받는가. 종차별발언을 하면 처벌을 받는가. 계급차별을 하면 환경차별을 하면... .... 이렇게 생각을 확대해보자. 지금 당신은 어디쯤인가. 진리는 언제든 만들어질 수 있다. 그 기준으로 세상을 보면, 아직 도래하지 않는 세상을 본다면.....그럴 것이다.

2.3 대부분 그렇겠지만 자기의 아픔이 커보인다. 그래서 자신의 아픔을 기준으로 하면 다른 아픔이 가려서 덜 보이기도 한다. 차별 감정은 서로 예민해지는 것이고, 서로의 삶들을 윤택하게 하자는 것이 기본 취지일 것이다. 법과 제도는 무수히 만들어질 수 있다.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3. 참회자와 심판관. 인간의 양면성을 말해주는 것이겠다. 어느 하나로 설명해줄 수 없는...그런 과정을 살아내는 것이 삶인지도 모르겠다. 단언보다는 회의와 주장의 근저에 있는 의심들이 삶의 또 다른 길을 열어주고 가게하는지도 모르겠다. 지나친 확신들을 경계해 본다. 아마 위의 2번의 일거수 일투족이 빅데이터로 모아지는 사회라면, 이렇게 막가는 법체계 시스템을 갖는 사회라면, 스스로도 예비 범죄자로 분류되어 잠재종신형에 처해지지 않을까 싶다.

4. 어느 하나로 자신의 자리와 위계가 정해지지 않는다. 진리를 잡았다고 하는 순간 놓친 것이다. 과도함이 스스로에게 자라나고 있는지, 또 다른 우상이 슬며시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묻고 아파해야 할 것 같다. 이런 회의만이 다음을 준비하고 일상을 열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지나친 확신이 지금을 밀고 가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어느 한 분야를 콕 짚어내지 않더라도 어느 하나 샘플로 들춰보더라도 맹신에 가깝다. 감내하지 못할 극단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고, 그 벽들이 더 견고해지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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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올리고 주전자와 드립잔, 여과지를 챙긴다. 수동밀로 넉넉하게 갈아낸다. 물은 끓었고 숙성을 하자 향기가 진하게 퍼져 나간다.  몇 주 사이 근황들을 묻자. 사건 사고가 물려나온다. 눈이 많이 온 수도권 딸아이를 챙기러 갔다 넘어져 많이 다쳤다는 소식. 아들이 다쳐 3주간 입원하고, 한 주 집에서 요양시키고 있다는 소식. 마트를 운영하고 있어 혹시 피해가 될 수 있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소식. 


몇 주는 어쩌면 참으로 긴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평온한 일상 또한 얼마나 힘든 일인가.  만남의 발화로 만들어지는 온기가 사라져 간다. 사람이 그리워지는 그 시점도 고개를 넘어서고 있다. 서먹함이 그새 비집고 들어오는 그 빈 자리의 농도. 밀도. 연하고 흐리다. 맺히지 않는다. 그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부디 터널의 마지막 부근이기를 바래본다. 


매화와 진달래, 개나리 잔가지를 좀더 챙겨서 꽃병에 꽃아둔다. 스크랩을 살펴보고 할 일을 가늠해본다.


"웅크리는 것으로 계절을 통과하고 나면

시리게 쏟아지는 빛으로

왈칵 눈이 부신 봄이다


헤어짐의 방식으로 

나는 비로소 당신에게 도착한다" 

정용화, <터널이라는 계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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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로 가는 길. 전지 작업을 다 해두었다. 한 달남짓 쉬고 들렀는데 챙기기엔 한 발 늦었다 싶다. 우산을 들고 가위와 봉투를 챙기고 혹시 건질만한 매화 잔가지들이 있을까 하여 부산을 떤다. 여의치 않아 매화밭이 아니라 길가 한 그루에서 가지치기를 해주면서 얻는다. 화병에 한단.  고루면서 남은 잔가지를 철사와 고무줄로 묶어 빈통에 담고 떨어진 여린 매화알갱이를 담아둔다. 개나리와 동백도 한 모둠. 곧 서로 화사해질 것이다.


1. 대마 -  아열대부터 아한대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자라고, 일년생 식물로 봄에 심으면 여름이 지나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쑥대밭에 버금가는 듯싶다. 밀집해서 심으면 곧게 자라고, 암수가 구분되어 있다고 한다. 속대는 구멍이 나 있어 플라스틱 대용이나 단열용으로 쓰일 수 있다고 한다. 몽롱함이나 환기기능이 있어 제의용으로 시작했을 법하다고 한다. 인도 메소포타미아, 중국, 러시아 등을 가릴 것이 없이 곳곳에서 재배되었고, 염분에도 강해 밧줄용으로도 많이 쓰였다고 한다. 들깨나 유채기름처럼 바이오연료로도 쓰일 수 있고, 씨앗도 귀리나 깨처럼 오메가가 풍부한 필수 건강식품으로 환영받을 수 있다 한다. 린넨으로 쓰이는 아마, 포대로 쓰이는 황마, 모시로 쓰이는 저마와는 다르다고 한다. 저자는 농협에서 오랫동안 일하셨고, 양평에서 밭농사를 지으면서 대마에 관심을 가져오셨다고 한다. 편하게 다방면으로 잘 읽힌다. 잔잔한 정보들이 서로 이어지는 솔솔한 재미도 있다 싶다.


2. 책 - <<지식인의 배반>>은 앨버트 허시먼을 읽으면서, 책 속에서 언급되어서 구했다. 주의로 경직된 분위기에서 다양성을 넓히려는 시도로 읽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다시 출간한 서문이 사십여쪽이 넘는다. 하고픈 말이 얼마나 많았으면 그랬을까 싶다. 책들은 멈추어 있지 않아 있어서 좋다. 시간에 불문하고 다시 읽히고 다시 연결되어 또 다른 새로움들을 낳을 수 있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3. 애매 - 30호 영상을 다시 보게된다. 싱어게인을 어게인해본다.  앨버트 허시먼은 '회의'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창조성과 상상력을 보태주는 것은 이것때문이라고 한다. 애매함을 밀고나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과정을 모색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물도 그러하며 모든 애정하는 것들은 그러하다 싶다. 어떻게 하든지 제 몸과 마음에 익숙하게 만드는 시도는 남게 되어 있고, 다른 것들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 서둘지 말라.


볕뉘. 이것저것 갈피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서성인다. 꽃들도 서성이겠지. 피면서 벌들이 나비들이 찾아올까 궁금하겠지. 개미들이 서성거리겠지. 피면서도 아련하겠지. 아마 이렇게 제 몸이 필락말락하는 걸 보니 봄이 오고 있는 게야. 저 만치 아련하듯이 제 맘도 이렇게 서서히 떠오른 것이라고 말야. 스스로 챙기는 이들에게 포르투나가 생기길 바래. 지인이자 지인의 아들인 인효가 세미파이널에서 떨어져 아쉬움도 한 가득. 또 다르게 필거야. 넘 걱정하지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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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 상식이 잘못되었다는 얘기가 여기저기. 귀쫑긋 하던 참인데 마침 책이 나왔다. 살펴보기로 한다. 


린마굴리스의 책들을 이어보고 있던 참에 같은 제목이어서 마저 읽는다. 저자는 중간중간 가족사와 학력을 슬쩍 넣었다. 그가 만약 이 나라에서 생활했다면 그는 역으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부모의 손에서 컸고, 고졸에다가 효모 관련 실험실 잡일을 하다가 대학교에 특채되었다는 사실. 한 가지 연구에만 몰입하고 주변에서 매진하도록 배려하는 분위기는 사뭇 이곳 연구실의 분위기와 문화가 다르다. 논문 저자에 숟가락 얻는 것을 밥먹듯이 하는 관행과 다르게 많은 역할을 했음에도 사양하는 연구 습속은 차이가 많다 싶다. 이 나라에서 연구원이나 성별차이는 끊임없이 끌어내리는 힘으로 작용하지 연구에 더욱 매진하게 하는 배려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아니 확연한 차이다. 하고싶은 것은 하게 하는 암묵지가 없다 싶다.


글들을 쫓아가면 린마굴리스가 점점 집중하고 미세하게 들어가게 하는 데 반하여, 큰 그림들을 그려줘 통찰하기가 쉬워진다. 잘게 잘게 있었던 지식들을 이어준다는 느낌이 든다. 완독하면 기본적인 밑그림이 그려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다섯장을 말하고 6장은 유전자 편집이나 조작으로 대별되는 가능성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다소 불편했다. 과학 기술이 자본에 봉사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 여러군데에서 반대에 부딪치면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아픈 사람들을 위해 이 기술이 정말정말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꼭 개발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기술에 대한 우려보다는 아픈이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라고. 변명일까 아닐까. 과학이 기술이 언제 그렇게 경제를 생각하고 정치를 생각하고 인문이 몸에 배이는 활동을 해왔단 말인가? 평소의 모습과 너무 다른 사람이 흔히 하는 핑계는 아닐까 하는 그런 의문들이 생긴다. 그리고 마지막장은 생명이란 무엇인가 총괄편이다. 물론 책 제목은 아시다시피  슈렌딩거의 책 제목에서 나온 것이다. 6장에서 하고자 하는 말씀은 알겠지만 빼도 좋을 듯싶은 미련이 들었다.


볕뉘.


출근 길 라디오에서 특강을 해서 든다. 최열 이사장이 비닐 슈트를 입고 나왔다거나 대만이 페트 회수율이 95%인데 우리는 65%라거나, 비닐을 소각하는 방법에서 기후 이야기까지. 하지만 소빙하기도 있듯이 자신은 탄소배출이 식물들로 흡수가 가능하다. led로 24시간 식물팜을 하는데 어쩌구  사업가로서 급히 하지 않으면 안되어 쫓기는 느낌의 두서없는 강의에다가 기후위기 회의론을 슬며시 섞는다. 기후위기로 여기저기 다니지 않는 데가 없으며 하물며 그 일로 돈까지 벌면서, 관점은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채로... ...뭐하는 꼴이람.....그래 그게 내모습 같겠다. 그 꼴. 어정쩡한 그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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