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성의 미학

1.

[1 ] 경계는 서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는 문지방이 된다...오히려 이것은 융통성 없는 대립의 극복에 관한 것이고, 역동적인 차이로 이끄는 것이다. 이분법적 개념쌍을 와해시키고, ‘이것 아니면 저것‘ 대신에 ‘이것분 아니라 저것도‘라는 논리를 따르는 수행성의 미학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18세기에 주어진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문지방으로 만들고자 하는 세계의 재마법화에 대한 시도로 간주할 수 있다. 450

[ 2 ] 경계가 법과 연관된다면, 문지방은 마력과 연관된다. 경계가 다른 것을 배척하는 분계선으로 여겨진다면, 문지방은 모든 가능한 것이 발생하는 사이 공간으로 생각된다. 경게가 분리 작업을 진행하는 반면 문지방은 가능성, 권력, 그리고 변신의 장소를 드러낸다.....공연에서 창출되는 자동 형성적 피드백 고리는 무대와 객석, 행위자와 관객, 개인과 공동체, 예술과 삶 사이에 놓인 경계를 문지방으로 변화시킨다. 452

[ 3 ]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변환 과정에 존재하며, 경계선을 넘는 존재로 인식했다....이분법적 개념에 의존해 세계를 기술하고 지배하는 계몽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또한 인간을 체화된 정신으로 나타나게 함으로써 수행성의 미학 그 자체가 ‘새로운 계몽‘임을 입증했다...수행성의 미학은 모든 인간이 자기 자신 및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을,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뿐 아니라 저것도‘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을 장려한다. 456

[ ] 예술과 삶: 일반적으로 공연이 예술이라는 제도 하에서 일어나면 예술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반면 공연이 정치나 스포츠, 법, 종교 등의 영역에서 일어나면 비예술적인 것으로 간주된다....예술적 공연이냐 비예술적 공연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오히려 제도적 틀이다. 445 공연은 삶 자체일 뿐 아니라, 삶의 모델로 볼 수 있다. 공연이 삶 자체라는 말은 공연이 참여자, 곧 행위자와 관객이 자신의 삶의 시간을 실제로 같이 보내고, 그들에게 새로운 것을 창출할 기회를 준다는 의미다. 453

2.

[ ] 연극의 근본적 의미는 연극이 사회적 놀이였다는 데 있다. 연극은 모든 이를 위한 모든 이의 놀이다. 그것은 무대 위의 참여자와 관객 모두 참여자인 놀이다. 관객은 놀의 한 구성 요소로 참여한다....연극에는 항상 사회적 집단이 존재한다..62..행위자와 관객의 신체적 공동 현존이란 오히려 공동 주체의 관계다. 63 헤르만의 공연 개념은 작품 개념이 포함하지 않는다. 공연의 예술성 - 즉 미학성- 은 작품에 근거해서 생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수행되는 사건에 근거한다. .공연에서는 일회적이고 반복될 수 없는, 대부분 부분적으로 영향을 끼치거나 조정 가능한 상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관객이 ˝배우의 연기를 다시 한 번 희미하게나마 모사해봄으로써, 표정을 지각할 뿐 아니라 몸의 느낌을 수용함으로써, 같은 동작을 하고 싶고 같은 목소리를 내고 싶은 비밀스런 욕구 속에서˝ ‘창조적‘ 행위성을 창출한다고 보았다. 71 공연을 재현 혹은 그 이전의 것이나 주어진 것의 표현으로 규정하지 않고, 순수한 구성 능력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헤르만의 공연 개념은 수행적이라는 개념과 맞아떨어진다. 73

3.

[ 1 ] 버틀러는 젠더는 태어날 때부터 존재론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문화적 구성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 결과라고 설명했다...젠더란 인습화된 행위의 반복을 통해 만들어진 제도적 정체성이다...이러한 행위를 버틀러는 ‘수행적‘이라고 명명하고, ˝수행성은 그 자체로 극적인 것과 비지시적인 것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수행적인 육체의 행위는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체성 그 자체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육체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이 부단하고 지속적으로 물질화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몸이 아니라, 짧게 이야기하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몸이다....버틀러에게 ‘수행‘의 의미는 오스틴이 말한 ‘현실 구성적‘이며 ‘자기 지시적‘인 것과 결국 같은 것이다....메를로 퐁티는 육체를 특정한 문화와 역사에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이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상징화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와 반대로 버틀러는 정체성의 수행적 생산 과정을 체현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체현 과정이란 ˝행동 양식이며, 역사적 상황을 극적으로 재생산하는 방법˝이라고 규정한다. 49,50, 51

[2 ] 수행적이란 단어의 의미는 행위하다에서 비롯되었다. 즉 ‘행위를 ‘이행‘하다‘라는 뜻이다...이 발견이란 언어가 사실관계를 묘사하거나 한 가지 사실을 주장할 뿐 아니라 행위를 이행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어는 참과 거짓을 표현할 뿐 아니라 수행적 기능도 한다....발화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하며 변환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수행적 성공을 위해서는 언어적 조건뿐 아니라 무엇보다 제도적, 사회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44,45

[ 3] 문학 낭독에서 가장 특별한 점은 바로 읽기와 듣기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데 있다. 일리아스의 1만 8천줄을 교대해가면서 2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낭독했다. 낭독자가 계속 교체되었기 때문에 저마다의 목소리가 개성을 드러냈고, 그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든 청중에게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나아가 이 공연에는 시간이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했다. 22시간이라는 오랜 시간은 참여자들의 지각 상태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무엇봐 이러한 지각의 변화를 의식하게 했다.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지각의 조건으로, 무엇보다 변화의 조건으로 의식하게 된 것이다. 34,35

볕뉘

0. 우리는 말이 필요하다. 권력의 기울기에 바투 올라야 하는 자는 권력을 가진자의 말을 빌려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말을 만들어 써야 한다. 언어는 행위를 이행한다.(3.2) 언어는 수행적 기능을 갖는다고 하면 우리 말의 대기가 이분법의 개념쌍을 가진 언어로 가득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1.1) 그래서 힘이 없는 자는 힘있는 자의 이런 말을 쓰다가 결국 스텝이 꼬이고, 자기 말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1. 김수영의 애정지둔을 낭독하는 모임에 참가한 적이 있다. 한 편의 시를 열한두분이 자신의 음색과 속도롤 읽어내는 것은 묘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시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3.3) 무려 22시간을 낭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낭독을 하게 되면 언어가 품고 있는 박자를 생각하게 한다. 때로는 거슬러 올라가며, 때로는 호와 흡을 반복하며...사람마다 그 시를 품은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오기도 한다. 낭독은 언어가 자신과 글 속에 갇혀 있다가 친구를 만나게 되는 과정이다. 말로 변화하며, 그 말은 서로 마음을 흔들기도 한다. 그래서 말로 쓴 글은 언어에 갇힌 글과 미묘하면서도 무척 다르기도 하다.

2. 우리가 이분법의 말에 갇혀있다고 해보자. 선악, 좋다나쁘다로 무의식중에 구별하는 습관들. 이분법의 개념쌍....좋다나쁘다에서 나쁘다만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습관들이라고 해보자. 그렇게 남은 말들을 대부분 권력의 자장을 갖고 있는 것일 것이고, 약자를 제대로 표현하는 말들은 없거나 죽어버렸을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에서 ˝이것 뿐만 아니라 저것도˝라고 가정을 해본다면 조금씩 갖고 있지 못한 것을 의식하거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의식하게 된다. 싫어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좋은 장소, 나쁜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장소, 더 좋은 장소로 파악하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좋은 것, 싫은 것이 아니라 배경에 있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이 같이 마음 속에 들어오도록 해보는 것이다. (1.4)

3. 새로운 말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의 말은 나의 상황, 주변을 둘러싼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행정 용어나 남자의 말들로 둘러싸여 있기게 새로운 숙어를 발견해내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적확한 말을 찾는 것은 사회적 약자일수록 더 생생해야 한다. 내 존재를 온전하게 나타내는 말을 없다라고 가정해보자. 어쩌면 이것은 나의 존재를 바꾸어내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새로운 말이 가슴을 져미고 들어와서 익숙해지고, 그 표현을 나누어 가질 때 우리는 이미 전과 달라져 있는지도 모른다. 가지지 못하고, 힘에 밀려 경계에 있는 처지의 말을 명확히 듣도록, 들릴 수 있도록 귀 기울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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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삶

[ ] 지적 영역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자질은 지적 소명을 받는 것이며, 지능이나 총명함은 부차적인 자질에 지나지 않는다...지적인 일이 소명이라는 것은 곧 지성인에게 공부가 삶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14,15

[ ] 많이 읽지 마라: 우리는 지적으로 읽어야지 결코 격정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건강과 현명한 소비 규칙에 따라 그날 먹을거리를 미리 정한 주부가 시장에 갈 때처럼 책에 다가가야 한다.213 시류에 휩쓸려 공부 역량을 소진하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때로 시류는 당신을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게 막는다...다른 이들이 이미 걸어간 길을 따르지 말고 당신 자신의 길을 가라. 214

[ ] 단 한 가지만이 진짜 휴식을 준다. 바로 기쁨이다. 225

[ 1 ] 삶과 맞닿아 있기: 공부는 삶의 활동이어야 하고, 삶에 이바지해야 하며, 삶으로 충만해야 한다. 무언가를 알려고 애쓰는 사람과 누군가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 이 두 부류 가운데는 후자가 낫다. 우리가 아는 것은 시작이자 밑그림인 반면, 삶은 완성작이기 때문이다. 233 공부의 목표는 우리 존재를 확장하는 것이다. 공부가 우리를 좁히는 것으로 끝나서는 결코 안 된다. 예술이 자연에 인간을 더한 것이라면, 학문은 인간에 자연을 더한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 334 공부하는 소명에 자신을 바치려는 당신은 공부를 위해 삶의 나머지 영역에 등을 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인간에 속한 것은 무엇이든 포기하지 마라. 가장 무거운 것 쪽으로 나머지 모두가 쏠리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라. 339 지성인은 전공 공부를 철저히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보충하는 넓고 다양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다. 그는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그의 정신은 일과를 할 때나 명상을 할 때나 똑같다. 그는 신 앞에서나 동료 앞에서나 하녀 앞에서나 한결같다. 그는 관념과 감정의 세계를 책과 논문에만 적어두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대화할 때 내보이고 삶의 길잡이로 삼는다. 340

[ ] 쉬는 요령 알기: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면서 얻는 기쁨이다.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연인이 실은 상대방보다 사랑 그 자체를 더 사랑하는 것과 같다. 343 정신 그 자체는 지치지 않지만, 신체 안에 있는 정신은 지친다....쉬지 않고 계속 노력할 수는 없다. 343 휴식을 거부하는 것은 간접적인 나태인데, 쉬어야 다시 노력할 수 있거니와 과로가 노력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휴식을 거부하는 것은 더 은밀한 방식으로 나태다...우리가 여가라 부르는 것은 실은 에너지 전환과정이다. 당신 자신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공부와 휴식을 배분하라.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지 않고도 회복할 수 있도록 자주 짧게 쉬는 편이 가장 이로울 것이다. 347 집단을 이루게 되면 다른 사람의 휴식을 배려하라. 절대 장난치지 않는 사람, 농담을 웃음으로 넘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즐거움이나 기분 전환에 이바지하지 않는 사람은 무뢰한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웃의 짐이다. 348

[2 ] 시련: 가치는 스스로 변호한다. 저술 때문에 호들갑을 떨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당신에게 해롭다. 침묵하고, 신 앞에서 겸손하고, 당신의 판단을 의심하고, 잘못을 바로잡아라.....당신의 평온이 흔하디흔한 성공보다 가치가 높다. 353 시기는 영광, 탁월함, 공부라는 수입에 부과되는 세금이다. 공부는 공부하는 이에게 대가를 요구한다. 공부하는 이는 불평하지 말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354 진리는 조금씩 드러난다. 그늘에서 진리를 꺼낸 사람들이라해도, 진리에게 자신을 위해 후광을 만들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진리를 섬긴다는 것, 그것으로 족한다. 356

볕뉘

0. 우리는 스스로를 형성하고 누군가가 되려고 읽는다. 우리는 특정한 과제를 염두에 두고 읽는다. 우리는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고 선한 것에 관한 사랑을 얻으려고 읽는다. 우리는 휴식하려고 읽는다 220

1. 그럴 것이라고 읽었지만, 새겨둘 것들이나 지나친 것들이 있다. 단 한 가지만 휴식을 준다. 바로 기쁨이라고 한다. 쪽 쪽 여기저기 살피면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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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02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214쪽 내용을 보면서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책에 의존하는 글을 써왔거든요. 책 속에 나만의 길을 찾아가는 것은 힘들겠지만, 책 속에 다른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따르는 방식을 줄어야겠어요.

여울 2017-11-02 21:06   좋아요 0 | URL
저도 부끄러운 대목이 많네요. 같이 줄여나가요. 감사요^^
 

[ ] 1990년대 초반 이후 신도시의 아파트에 안착한 30대 여성들 상당수는 어려서부터 남녀평등의 이념을 교육받아온 터라 결혼 전까지만 해도 가부장제의 습속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하지만 결혼 후 상황은 바뀐다. ‘남편의 경제적 역할‘과 ‘아내의 정서적 역할‘이라는 핵가족의 기능적 분업화에 적응해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46

[ ] 외환위기 이후의 아파트: 1970년대 이후 10년주기로 첫 번째 세대는 근로소득을 능가하는 자본 이득의 중요성에 눈을 떴고, 두 번째 세대는 전세 제도를 지렛대 삼아 아파트 한 채를 더 보유하는 방법을 터득했으며, 세 번째 세대는 수도권 일대의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자신들에게는 앞 세대와 같은 자산의 증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시달렸다....흥미로운 것은 이 중산층 아버지들 중 어느 누구도 아파트가 고도성장을 통해 축적된 사회적 부를 시세 차익아라는 형태로 그 소유자들에게 배분하는 사회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그래서 그들은 이 시스템의 근간인 분양가 상한제와 주택청약 제도의 설계 의도에 대해 굳이 알려 들지 않았으며, 연간 10퍼센트를 넘나들던 특정 시기의 경제 성장률이 사실상 복지 제도를 대신했던 이 시스템의 에너지원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 52

[ ] 청년기의 정치적 경험에 방점을 찍는 세대론이란, 10년 주기로 펼쳐진 ‘정치적 격변, 경제적 호황, 대규모 아파트 건설‘이라는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성공적으로 중산층에 진입한 집단 중 일부가 자신의 정치적 발언권을 특권화하며 그 진정성을 인정받기 위해 만들어낸 자기 정체성의 판타지였던 것은 아닐까? 58 ˝아파트와 전자 칩, 자동차를 제외한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린 그 세계에서 청춘의 자아는 ˝지나치게 얄팍˝해 ˝셀로판지 같지만 셀로판지가 아닌˝ ˝셀로판지가 되기엔 너무 두껍고 또 인간이 되기엔 너무 얇은 뭔가˝로 존재하며 아무런 희망도 없이 게임의 규칙을 묵묵히 견뎌내야 했던 것이다. 59 나는 인간인 동시에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곡선의 평면이다. 화려한 풍경 속에 창백한 백지로 남는, 고선으로 이루어진 어떤 하얀 평면...닳고 닳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셀로판지와 아무것도 그릴 게 없어 휑하게 남겨진 백지라는 은유의 유사성. 김승옥과 달리 김사과 주인공은 가족의 로망스 자체가 시효가 끝난 시점에서 ‘납작한 반투명 주체‘라고 할 수 있다. 60

[ ] 제3막은 그 무대에서 ‘정치‘가 ‘저성장‘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고안해내지 못하고 중산층이 욕망의 구조조정을 단행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아파트가 여전히 주인 행세를 계속한다면 세상은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65

[ ] 실제로 저금리를 앞세운 은행의 영업 방침, 금융 자본의 지원 사격을 받는 건설사의 사업 전략, 그리고 경제적 불확실성에 노출된 중산층의 재테크 전략, 이 삼각관계의 역동적인 흐름 안에 바로 ˝그녀의 프리미엄˝ 광고전략이 자리잡고 있었다. 93

[ ] 참여정부 집권 직전 시중의 유동 자금은 이미 400조 원 규모였던 데다가, 집권 이후 가계대출로 시중에 풀린 돈만 200조 원이었고, 국토균형발전정책으로 인해 시중에 풀린 토지보상비의 규모도 2003년부터 2006년가지 70조 원을 넘어선 상황이었다. 97

[ ]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정치 개혁의 열망이 자본 소득의 욕망에 패배했음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확실히 두 번째 자각이었다. 대통령 덕분에 2002년에는 ‘중산층 소비자‘에서 ‘참여하는 시민‘으로 깨어났고, 집권 후반기에는 또다시 ‘참여하는 시민‘에서 ‘자산 투자자‘로 깨어났다. 103

[ ] 1977년부터 자리 잡은 분양가 상한제는 선분양제와 짝을 이루고 있었다. 이 두 제도 덕분에 정부는 주택 공급시장의 통제력을 거머쥘 수 있었고, 공급자는 상품을 만들기도 전에 금융비용을 들이지 않고 구매자로부터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구매자는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었다. 109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부도 위기에 처한 건설업계의 요구로 분양가 상한제가 폐기되었지만...선분양제는 고스란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아파트는 이전보다 더 기묘한 상품이 되었다. 이전까지는 정부가 공급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조율하는 박리다매의 공동구매 상품이었던 반면, 이제는 공급자가 직접 나서서 주도하는 시세와 동일한 가격의 선 입금 예약 상품으로 둔갑했던 것이다. 110 한국만의 독특한 민간 임대 제도인 전세제도는 호황기에는 부동산 시장의 최전방 공격수인 다주택 보유자에게 유동성을 공급하는 ‘미드 필더‘로 대활약을 펼쳤다. 일종의 ‘사금융‘이나 다름없던 이 제도는 불황이 닥치자 재빨리 후방으로 되돌아가 ‘최종 수비수‘로 전환한 뒤 가격 하락세를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다. 그러니 이런 표현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파트 시장의 진정한 ‘리베로‘라고 말이다. 112...그들의 유일한 자산인 아파트 한 채가 담보물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기 전까지는 희망을 버리려고 하지 않으리라.......아파트 하락세와 자영업자의 위기...자녀 세대는 부모님이 사는 아파트 한 채는 그래도 물려받을 수 있으리나는 기대가 빚더미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113 1960년대 후반부터 외환 위기가 발생한 1990년대 후반까지 약 30년의 시간대가 오히려 비정상적인 시기였던 것이 아닐까? 115

[ ] 정치학자 전인권은 ˝한 아이가 다른 형태의 아버지, 여러 명의 아버지를 체험한다는 것은 그만큼 세계로 나가는 여러 개의 창문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세상을 보는 눈도 여러 개 가지게 되니 그만큼 유연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주지하다시피 농경사회에서 성장한 변방의 청년들 대부분은 여러 개의 창문을 갖지 못했다. 그들에게 ˝세상으로 나가는 창문은 아버지 하나뿐이었다.˝ 141

[ ] 2000년대 초반부터 건설 산업은 강남의 재건축과 강북의 뉴타운 개발을 거치면서 점차 금융 산업과 밀월관계를 맺었다. 이전의 고도성장기에는 정부, 건설업, 중산층이 삼각편대를 구성해 수도권의 창공을 마음껏 활강했던 반면, 이제는 금융업, 건설업, 중산층이 삼위일체의 신성동맹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67

[ ] 마린시티는 분양가 상한제 폐지와 함께 용인에서 시작된 포스트-강남의 흐름이 2000년대 초반에 주상복합 아파트와 재건축 아파트를 거점으로 삼아 강남으로 입성했다가 다음 행선지를 저울질하기 위해 잠시 송도의 모델하우스를 둘러본 뒤 결국에는 경부선 고속철을 타고 내려와 해운대에 똬리를 튼 것 같은 모양새였다. 170

[ ] 이전의 10년이라는 시간차는 이제 5년 정도로 좁혀졌고, 그 시간차의 발현 양태도 지방 중상류층이 한발 늦게 수도권 부동산에 투자하는 식이 아니라 지방의 부동산 시장이 수도권의 꺼져가는 불씨를 이어받아 군불로 되살리는 식으로 바뀌었다. 174 역세권을 기본으로 하되, 자량보다는 보행자의 이동이 자유로운 곳, 기존의 상권이 등락 없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곳, 토박이들의 텃세가 심하지 않는 곳, 개발 호재 없이도 상권의 확장이 가능해 보이는 곳 등등. 176 1970년 1971년에 백만명 넘게 태어난 2차 베이비붐의 정점을 찍었던 이들은 저성장과 저금리 사이에 낀 채로 비정규직 노동의 증가와 아파트 가격의 폭등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부모의 도움 없이는 중산층 진입이 요원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아이를 하나만 낳거나 아예 부모가 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매우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였다. 186 인구 감소의 쓰나미가 닥치는 시점은 이들이 50대에 진입하는 시점 2021년은 아닐까?..그 행선지는 2022년 대통령 선거를 향해 돌진할 것이다... 이 때는 50대가 845만 명, 60대 이상이 1,298만 명이 된다. 결국 대선의 승패는 50대 이상의 유권자에 의해 판가름 날 공산이 매우 높다. 187

[ ] ˝팔자가 갈라지는 대목까지는 운수 놀음이지만 갈라진 다음부터는 현실 놀음˝이라는 점이다. 193

[ ] 나는 사회를 사회로 이해할 수 있는 인식의 기회를 얻지 못했으며, ‘사회‘를 ‘사회‘답게 만드는 집단적 경험조차 제대로 공유해본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194

[ ] 신세대: 로봇 프라모델의 조립 과정을 통해 대상과 밀착된 관계를 맺고 거기에 기대어 자아의 확장과 심미안의 향상을 꾀할 수 있었다...그것은 독특한 이중구속의 구렁텅이로 그 소유자를 밀어넣고 자아의 변형을 강제하기도 했다. 207이런 태도는 결국 ‘단일한 자아‘에 대한 포기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도덕적 판단과 미적 판단의 주체가 반드시 동일한 ‘나‘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각각의 차원에 최적화된 형태로 사안에 따라 대응할 수 있도록 자아를 쪼갰던 것이다. 208 일본 에니메이션은 이 세대의 소년들에게 프로트타입 형태의 문화적 인터페이스를 인스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212 신세대 일부는 처음에는 ‘자아의 분열‘로, 그 다음에는 ‘메타 자아의 구성‘으로 두 번에 걸친 이중구속의 상황을 돌파한 소년들이었다. 당연히 이런 경험을 해본 영민한 소년일수록 자기만의 패턴을 체계화하는 데 익숙했고, 자기만의 쾌락을 추출하는 데도 능수능란했다. 213 프라모델이 그들의 자아를 쪼갰다면, 워크맨은 그들의 감각을 쪼갰다. 워크맨은 감각의 재조직화를 통해 당시 청소년이었던 신세대의 문화적 인터페이스를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215 헤비메탈 자체가 이 시기의 중고등학생들이 간단한 패턴 알고리즘을 프로그래밍해볼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의 실험실이었던 셈이다 217 될 수 있으면 남들이 듣지 않는 희귀한 음악을 찾아들으려고 한다. 219 연습생 트레이닝 시스템을 눈여겨볼 만했다. 그것은 일종의 실험실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청춘‘을 말소한 뒤 소년기와 성년기를 바로 이어 붙여 새로운 타입의 인간형을 양산하려는 시도가 거듭되는 실험실 말이다...그들은 제각각의 데이터베이스와 패턴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아돌의 생산 시스템을 운영,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 240 내가 상상한 이 세계가 청춘의 테마파크라고 생각했다. 장기 경기 침체의 덫에 걸린 신세대가 호황의 기억을 소환해 복고와 추억, 자기 위안을 상품 형식으로 소비할 수 있는 테마파크 말이다. 막장극과 버라이어티 쇼와 오디션 프로그램이 판치는 텔레비전 화면의 가상계에 손바닥만 한 빈자리라도 있다면 별 어려움 없이 터전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243

[ ] 집으로 향하던 ‘사다리‘가 사라진 이후 큐브는 기존의 거주용 방과 집의 기능을 외부화한 방, 즉 주거 공간과 상업 공간이 이원화된 방향으로 계속 증식했다.....284.. 서울의 입장에서 보자면 임대료는 주기적으로 맞아야 하는 호르몬 주사제나 다름없었다. 만약 다른 지방 도시였다면 큐브 일부는 빠르게 슬럼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독 대학교가 많은 서울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대학생이나 취업 준비생 같은 산업예비군들이 큐브에 거주하면서 도시의 노화 속도를 늦추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격랑에 맞서는 인간 방파제라고 할까? 285

볕뉘

0. 이 책을 읽다가 [빚으로 지은 집]이라는 2008년 리먼사태이후의 미국상황을 추적한 책이 떠올랐다. 있는 사람, 부자동네가 아니라 변두리의 삶과 관계가 급속히 망가지는 모습이 기억난다. 말미 가계부채 탕감이란 정책이 오히려 유효하고, 경착륙이 아니라 연착륙이 가능하다 말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인상깊게 보았는데 이렇게 다시 만났다.

1. 이 책 역시 시도가 엿보인다. 소설의 인용과 소설 작법을 활용하였고, 귀에 쏙쏙 박히기도 한다. 다소 산만한 감은 없지 않지만....

2. 진보란 무엇일까란 생각도 해보았다. 삶을 걸지 않는 이상, 삶이라는 기간의 진보를 한묶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쌓인 보수와 핑계의 무덤에서 한발도 나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무거운 마음이 들게 했다.

3. 경제란 살림살이를 전면에 세우면서 정치관계를 파헤쳐야 한다. 그런면에서 박해천교수의 진화된 탐색은 눈여겨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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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꽃마차는 울며 간다

[ ] 과메기 - 푸른 바다 물빛 털며 돌아가는 생이다. /지느러미 흔들고 흔들리며/삶을 부린 저 바다/노대바람 뚫고 명주바람 건너온/아비처럼 어미처럼 돌아가는 길이다/서글픈 속내일랑 뒷산에 묻고/그리운 사랑일랑 가슴에 묻고/시누대에 눈을 꿴 몸뚱이들/덕장마다 환원의 문장을 쓰고 있다/화르르 비늘 돋는 구룡포/차디찬 겨울 빛나는 율동/샛바람이 읽고 있다

[ ] 구름의 손목 - 등나무넝쿨 터널처럼 이어진 식당이었어/사람들이 꽃을 굽고 있었지/손을 뻗어 잘 익은 꽃 한 점 집으려는데/어머나, 시커먼 구름이 내려와 두 팔을 확 잡는 거야/뭉글뭉글한 구름에도 손목이 있더라구/시멘트 위로 끌려가는 내 어깨는/강판에 갈리는 햇감자 같았어

[ ] 11월의 저녁 식사 - 뱃공장 언덕 조광상회 검둥이 눈매 깊은 국/끄무리한 먼 산 지느러미 조림/덕장 시누대 비늘 볶음/수평선 총총 오징어배 집어등 무침/제일 먼저 불 켠 제일교회 첨탑 위 벌건 십자가 구이//그러고도 빌어먹을,/그리움 한잔

[ ] 오해를 풀다 - 너를 닥나무로 알고 베겠다/가늘고 길게 자란 오후에다/터억 무쇠솥 걸고/백피 될 때까지 삶고 또 삶겠다/까칠한 말이 끓어/입안 가득 백태가 끼면/초경처럼 붉은 꽃무릇 닥풀 삼아/풋대질 하겠다/네가 으엉으엉 말문 열면/나도 어응어응 대답하겠다/말과 말이 부둥켜안은 부벽/투명한 화해 한 장/허리 세우는 소리 듣겠다.

[ ] 돌림노래 - 니끼미 시발 지랄났다꼬 내가 수그리나 시발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 야마가 확 돌아뿌네 시발 타고 싶어 탔나 목구녕이 포도청이라 자존심 확 구기뿔고 시발 선금 땡겨 오줄없는 짓 안 했나 시발 문디 지랄 같은 기 마 화딱 디비 엎어 뿔고 에이 시벌컥벌컥벌컥컥 컥 // 아지매요, 도루묵 없능교/감자 삐지 옇고 벌겋게 해다 주소 퍼뜩// 니끼미 시발 지랄났다꼬 내가 수그리나/사람 나고 돈 났지 시발 돈 나고 사람 났나//

2. 우아함의 기술

[ ] 우아함은 세상과 편하게 지내는 것이다. 삶이 그대의 바지에 포도주를 쏟을지라도! 14 21세기의 삶은 급하고 서투르고 불만스럽기 일쑤이다. 우리가 서로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대하는 방식 때문이다. 16 우아함은 그 자체로 야단법석을 떨지 않으면서 분위기를 미묘하게 따스하게 만들어준다. 본질적으로 우아함은 침착하고 편안한 사람으로부터 주변 사람들에게로 행복이 전이되는 것이다. 19 마치 떠다니듯 움직이고, 모난 데라고는 보이지 않고, 온통 하늘거리며 부드러운 것이, 마치 나지막이 떨리는 우주의 진동에 조율되어 있는 듯한 사람 말이다 19 우아함은 외모나 세련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전적으로 연민과 용기의 문제다. 23 매끄러움에 대한 감탄이 우리 뇌의 쾌락중추에 일찍이 자리를 잡았다. 24 ‘밝은 얼굴로‘ 주변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너그럽게 굴라고, 그들의 기분을 편안하게 해주고 인정받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충고했다. 25 우아함은 변형작용을 한다. 평범한 순간을 특별한 어떤 것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우아함은 우리가 편안하고 침착하고 용기 있는 인생을 만나도록 도와준다. 264

[ ]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대감은 몇 분 동안 예기치 않은 기쁨을 선사한다. 그런 유대감은 규모가 클수록 더 큰 기쁨을 안겨준다. 실수해선 안 되는 바쁜 일터에서....조화롭고 효율적인 그들의 움직임은 일종의 춤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자체에 숨겨진 안무를 볼 수 있다. 150 우아함의 핵심에는 편안함이 있다. 그것은 중력에 저항하고, 행동을 매끄럽게 하고, 마찰을 줄인다 세상에 당신의 선물을 풀어놓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다. 그것은 동적인 실천이다......당신 자신도 편안하게 해주어라. 깐깐하게 굴지 마라...다른 사람들이 베푸는 친절을 다 받아들여라. ...다른 사람에게 우아해질 기회를 주는 것이니까. 382 우아함은 내면적 강인함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연약함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의 인간성을, 마찬가지로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성을 지닌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과 관련된다. 그것은 조금이나마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문제이고, 몸과 정신을 결합하는 문제이다. 376

[ ]사회적 우아함은 신체적 우아함과 마찬가지로 노력을 요한다. 사람들과 지내는 것은 여타의기술들처럼 하나의 기술이자 훈련이다. 다시 말해 요리나 자전거 타기와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야 일이 매끄럽고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지 알수록, 우아해지기를 원하고 우아해지는 연습을 많이 할수록 더 잘 그리고 더 확실하게 그렇게 될 것이다. 92 카리테스 charites, 로마인들은 이들을 그라티아이 gratiae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움과 풍요 그리고 기쁨의 화신들을 불렀는데, 여기서 영어의 grace 즉 우아함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매력, 쾌활함, 기쁨을 선사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이 젊은 세 여신이 하는 일은 단 하나, 삶의 즐거움을 고양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것. 15


볕뉘.

0. 한 편은 무용비평가의 글이다. 또 한 편은 10년만에 시집을 낸 구룡포로 간다의 권선희시인의 시의집이다. 우아함을 평하기에는 그리 순조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밖으로 난 길이 아니라 안으로 뻗어있는 길이라 여기고 짚어보았다. 감정을 표출하라고 하지만, 아직도 어떻게를 말하지 않는다. 몸짓과 맘짓은 이것에서 자유롭지 않다.

1. 꽃마차는 울며 간다를 읽다 콕콕 배이는 말. 그 말에 걸려 언어에 가까운 다른 시집에 손길이 덜 갔다. 마음이 뻥 뚫린다. 때로는 언어가 아니라 말이 이 역할을 단단히 한다 싶다.

2. 그리움 한잔 마시고 싶은 가을. 11월. 단풍이 곡선을 그리며 날아든다. 툭...꼭지 떨어지는 소리도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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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젠더전과 퓨리오숙의 탄생: 한국 여성들의 생존 문제다. 한국 여성의 노동 조건은 점점 열악해지고 있으며, 실질적인 경제권이 보장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극심해진 여성 혐오 문화는 한국 사회의 강간 문화를 강화시키고 있다. 경제, 정치, 문화는 분리되지 않은 채로 여성의 삶의 조건을 형성하면서 생존을 위협한다. 105

[ ] 미국 대중 문화: 메리다와 마법의 숲 2012, 겨울왕국 2013, 말레피센트 2014, 헝거게임 시리즈 2013-2015, 주토피아 2016, 모아나 2016에서 새로운 여성의 재혀늬 만개 105

[ ] 매드맥스:분노의 도로 주인공인 퓨리오사.....갓숙이자 퓨리오숙인 그는 말한다. ˝여자들 웃음소리가 담장 밖을 넘어가야, 그게 사는 맛이지˝ 107

[ ] 가모장과 문명남에 대한 열광은 일면 ‘이성애 섹슈얼리티에 기반한 대중문화의 열풍‘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을 초과하는 것이 있다. 남성과 공존해야 하는 여성의 ‘생존 문제‘다. 2015년 한 언론에서 조사한 것처럼 ‘여혐혐‘을 추동하는 가장 큰 힘은 공포/두려움이었다. 그리고 그 공포는 범죄 공포, 결혼 공포 그리고 시선 공포의 세 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09

[ 1] ‘느낀다‘라는 전쟁: 느낀다라는 것 자체가 정치이자 일종의 전쟁인 것이다. 126 낡은 습관의 해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 습관의 폐기는 새로운 습관의 창조와 결부되어야 한다. 습관은 우리가 기대고 있는 하나의 체제이며, 삶을 조직하고 유지하는 체제는 어느 공동체에나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습관의 해체는 무가 아닌, 새로운 것에 대한 지향이다. 체제의 구성과 유지를 둘러싼 적대의 형성을 정치라고 본다면, 그런 의미에서의 정치는 욕망 및 정동과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다. ....같은 사건을 두고서 ‘여성 혐오 살인사건‘ 혹은 ‘묻지마 살인사건‘이라는 각기 다른 평을 하면서 각자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이 사회가 구성원을 길들여온 습관의 문제와 관련된다. 그런데 ‘페미니즘 리부트‘가 이 습관의 고리를 끊어내고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장을 구성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정동이 이데올로기적 매트릭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지만, 거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 논의될 수 있는 사례다.....여기서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에 다시 주목해보자. 습관의 변용은, 인터넷이라는 버추얼에 흐르고 있던 순수기억으로서의 ‘페미니스트 버추얼(잠재성)‘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새로운 페미니스트 주체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친 트위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페미니즘 학습과 의식화의 경험은 잠재적인 것으로 부유하고 있던 과거 논쟁의 기억이 특정한 계기들에 의해 표면으로 올라오는 것, 그런 일련의 지속 안에서 축적된 것이다. 127

[ 2] 미국 최초의 아프리카계 대통령 선출로 이어졌던 미국에서, 8년 후 소수자 혐오와 신자유주의적 천박함을 선거 전략으로 내세운 트럼프가 승리했다. 이런 현실로 미뤄본다면, 마모루가 야심차게 분석하고 있는 ‘정동의 힘‘은 일견 순진해 보인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등장했던 ‘핑크 코끼리‘가 표상하는 것처럼, 부대낌, 정동, 오염은 어떤 의미에서도 당위적으로 ‘선‘만으로 정향되지 않는다. 마모루가 자신의 책에서 다루지 않았던 모멸과 혐오, 불행의 감각 등은 향후 좀더 폭넓게 탐색되어야 할 것이다. 133

[3 ] 여성 혐오에 기반한 남성들 간의 ‘평등‘이라는 도착적인 상상력, 마녀사냥이라는 여성 젠더에 대한 대대적인 거세 작업, 이를 바탕으로 했던 여성들의 ‘가정주부화‘ 과정. 이는 새롭게 등장한 정치경제 체제인 자본주의가 지금까지의 습관이었던 가부장제라는 강력한 지배 체제를 이용하면서 동시에 이에 복무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가부장제적 자본주의 혹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라 할 수 있는 가부장체제가 등장했다. 이는 곧 자본주의의 시초 축적 과정이기도 했다. 마르크스가 규명했던 자본주의 시초 축적은 젠더 중립적이지 않은 과정이었던 셈이다. 137

[ 4] 신자유주의란 모든 것을 사유화하여 공유지를 박탈하고, 그렇게 공동체와 그 내부의 사회적 관계를 박살내서 강도 높은 노동 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각자도생, 무한경쟁, 먹고사니즘의 등장은 이런 공유지 박탈의 원인이자 결과인 것이다. 1980-90년대에 새로운 영토로 등장해 사이버 공유지로 상상되었던 인터넷에서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점증한 것 역시 바로 이 시기였다. 서로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동떨어진 섬이 되어버리는 단절의 공간. 이는 사이버 인클로저라 할 만하며, 이것이 강력한 타자화의 동학인 혐오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이런 흐름이 감정의 인클로저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지금 목도할 수 있는 ‘온라인 지옥‘은 바로 이런 인클로저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137

볕뉘

0. 간헐적인 독서다. 사실은 의도가 있는 오독을 하고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대신에 ‘사회운동‘이란 말로 대신한다.

1. 아이엠에프의 파고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경제의 흐름 속에 가장 약자인 여성들의 틈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세세한 결들을 잡아내는 것이 놀랍다. 여러 이론들의 결합도 그러하다.

2. 권력의 결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힘을 부리는 자의 언어가 아니라, 새로운 말을 찾아내고 표현한다는 것. 이것이 운동이나 활동의 결이 살려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을 가지고 될 때만 표현이 가능하니 말이다.

3. 풀처럼 바람의 결을 느끼고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가슴과 마음을 울리는 새로운 말들로 하나하나 모두 새로이 무장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힘이 되는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4. 오늘도 여전히 페미니즘 리부트의 단어를 오독한다. 오독해내야 한다. 늘 가진 자의 언어만 쓰는 세상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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