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건과 정치: 사건의 양식은 문제 제기다. 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여러 가능태에의 입구이다. 11 ˝인간은 답할 수 있는 문제만 제기할 수 있다˝는 맑스의 생각과는 반대로, 사건에서 출발하여 구축된 문제는 처음부터 그 답을 문제 안에 포함하고 있지 않다. 12 사건의 철학은 세계와 주체성이 구성되는 과정을 정의하기 위해 처음부터 주체(혹은 노동)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서 출발한다. 15 세계란 혼(높은 차원의 단계) 안에 현실화하고 신체(낮은 차원의 단계) 안에 구현화한 하나의 가능태다....들뢰즈에 의하면 세계란 잠재성이고, 관계의 다양체이다. 세계는 언표의 집단적 배치안에서 (즉 혼안에서) 표현되어 가능태를 창조하는 다수의 다양한 사건으로부터 성립된다. 16 우리가 가능성을 ‘가능태/실재화/라는 체제에 의거하여 고찰한다면, 여러 가능태의 배분은 기존의 양자택일 형식(남성/여성, 자본가/노동자,자연/사회, 어른/아이, 지적인 것/육체적인 것 등)에 의거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각과 기호, 정동, 욕망, 역할, 가능 등은 이미 현실화된 것으로서 이항 대립의 틀내에 있게 된다....그와 반대로, 만약 우리가 가능성을 ‘가능태의 창조와 그 달성‘이라는 형식 아래 사고하면, 가능태는 이미 알려진 것들의 양자택일에 의거한 사고와 행동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어야만 하는 것이 된다...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상대는 그 인물이 아니라 그 인물이 표현하는 가능세계이다. 16, 17 양자택일에 대한 거부는, 눈앞에 있는 것의 정당화에 대한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행위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말하자면 거부는 ˝일종의 중단 혹은 무력화로 보이더라도 주어진 것의 저쪽에 주어지지 않는 것의 새로운 지평을 우리에게 여는 것˝이다. 18

[ ] 가능태의 현실화와 달성은 (자연과 타자를) 변형하는 활동이 아니라 세계를 실효화하는 것이다. 가능태의 현실화는 생산하는 것...이중의 개체화, 이중의 창조, 이중의 발명 과정으로 향하는 것이다. 20 기성의 대답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들(그와 같은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은 사건을 경험할 기회를 놓쳤다....사건은 집요하다. 결국 사건은 계속 활동하고 있고 여러 가지 효과를 계속 산출하고 있다. 24, 25 모든 개체는 무수한 다른 개체로부터 합성된 것이고, 각자가 다른 정치형태를 뒤따르면서 믿음과 욕망을 기반으로 하나의 통합을 이룬다...세계가 객체와 주체가 아니라 관계의 짜임새로부터 성립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관계의 짜임새는 무수한 다른 개체의 포획에서 이루어진 위계에 따라 구성된다. 31 역사란 ˝똑바로 뻗어 있는 곧은길이 아니라 매우 깊고 갈림길이 무수하게 있는 도로망이다...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다른 길로의 교차로가 나타난다. 32

[ ] 모나드의 활동은 어느 행위에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개시하는 것과 실효화라는 것에 귀착한다...세계를 창조하고 실효화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믿음과 욕망, 그리고 의지와 지성에 대해 작용하는 것, 즉 정동에 대해 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하나의 세계는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에 기반한 관계의 다양체다...세계의 창조와 실효화는 무엇보다도 느낌에 관계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이데올로기‘의 구축이나 보급과 동일시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거기에서 생기는 감각 양식의 변화는 우리에 의해 ‘실재‘ 세계를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4, 35존재는 자신 속에 차이화를 일으키는 내적 요인을, 즉 잠재력의 차이를 품고 있다. 그래서 존재는 항상 하나의 통일을 넘어서는 것이다. 36 감각 양식의 표현과 구축은 생산양식에 의존하고 있기는 커녕, 경제의 노동보다 이전에 있다. 36 타르드의 모나드는 보편적인 시공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고유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낳고 있다. 모나는 열리고, 문도 창도 지니고 있어서 서로 작용한다...유물론이 점(원자)의 연속에 한정해서만 보려고 할 때, 타르드는 상호 침투하는 작용영역, 즉 믿음과 욕망의 흐름을 확인했다....20세기 사건의 철학에서 각각의 모나드는 하나의 잠재적인 우주이고, 하나의 가능세계이며, 상호 교류하고 만나는 복수의 가능세계이다...우리는 예정조화에서 다성악적인 조합으로, 초월적인 조직화의 과정에서 내재적인 구성 과정으로 이행한다. 38, 39

[ ] 사회 혹은 차이의 공존, 그것은 ˝매우 다채로운 형태로서의 각자에 의한 전원의 상호적인 소유˝이다. 사회는 동료를 소유하고 그리고 동료에 의해 소유되는 방법에 따라 정의된다. 설득에 의해, 사랑에 의해, 두려움에 의해 믿음과 욕망의 공통성에 의해, 그리고 부의 생산에 의해 ˝사회의 제요소는 무수한 방법으로 서로 결합되고 끌어당긴다.˝..사람들은 존재의 다양한 단계의 목록을 만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소유의 다양한 단계를 분류하는 것에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40 각각의 모나드가 서로가 서로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그 모나드들은 많든 적든 서로 전유할 수 있고, 또 더욱 높은 정도의 소유를 바라고 있다. 그 때문에 모나드들은 점점 집중해 간다. 또한 모나드들은 무수히 다른 방법으로 서로가 서로를 전유할 수 있으며, 각각의 모나드는 다른 모나드를 전유하는 새로운 방법을 알고 싶어 한다. 41 결국 집단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행동의 방향을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42 주체의 철학은 다만 하나의 세계만 가능하다는 전제에 서 있기 때문이다. 44

[ ] 결국 사회적 조정 원리는 시장과 가치법칙, 국가, 변증법 등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모나드에 내재적인 구성적작용 안에 있다. 45 각각의 기관은, 그리고 각각의 기관 내의 각 세포와 각각의 세포 내의 각각의 요소는 자신 안에서 자신을 위해 작은 은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6 개인의 등질성과 획일성은 개인의 유동성과 유연성의 또 다른 측면이고, 보다 풍부한 특이화와 다양한 사건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다. 47 이 전체(결국 사회와 제도)를 붕괴시키기 위해서는 모나드들이 이 전체를 재생산하려는 믿음과 욕망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49 모든 발명은 (위대하든지 사소하든지간에) 사건이다. 그 사건은 그 자체 안에는 어떠한 가치도 포함하지 않지만, 가능태를 새롭게 창조하기에 모든 가치의 전제조건이 된다..발명은 일종의 구성적인 힘이기도 하다...발명의 시원에서는 모두가 이 복수의식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 후에 발명은 단수-의식을 통해 드디어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다양한 모방의 흐름(관념, 습관, 몸짓, 지각, 감각) 사이에 일어나는 마주침이고 잡종형성이며 협력이다. 51 발명도 사회적 보급도 명령에 따라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구성 과정은 바로 차이와 반복으로부터 성립한다... 모든 발명은 개인과 사회에 정해져 있었던 규범과 규칙, 습관으로부터의 단절이다. 발명이란 그것을 성취한 자를 역사적 시간의 외부에 두고 그 자를 사건의 시간 안으로 파고들게 하는 행위이다. 52 발명의 작용은, 노동의 작용과는 달리 그 자체로 공공적인 것이다. 이 작용은 만인에 대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발명의 작용은 만인의 눈에, 정동에, 지성에, 의지에 미치기 때문이다. 54 발명에서 가치의 구축으로, 미시에서 거시로, 로컬에서 글로벌로의 이행은 전체를 성립시키는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그 능력은 패치워크들과 네트워크들을 서서히 편성하는 능력이다. 또한 타르드의 어휘를 가져오자면, 그것은 (믿음과 욕망의) 흐름과 집합체를 편성하는 능력이다. 55

[ ] 언어와 과학도 또한 사회적 양과 마찬가지로 추상과 전체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소의 구축주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발명을 무시한다면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재생산밖에 없다. 59 모나드들 사이에는 명령과 복종, 포획의 관계밖에 없다. 시장, 증권 거래소, 자본, 사회는 포획의 포획이다...전체라는 것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실험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61 모나돌로지, 혹은 무한소의 관점에 따라, 우리는 사회적 영역의 구성 과정을 의인론적으로서가 아니라 우주론적으로 사고하도록 유도된다. 62 모든 관계가 생기는 것은 사건으로부터이고, 본질로부터는 아니다. 맑스와 타르드 사이에는 근본적인 단절이 있다. 62 자연은 항상, 그리고 이미 주체와 인간 내부에 있다. 무한의 존재 - 즉 무한의 유기체적 모나드와 무기적 모나드, 모든 의지하는 것, 믿는 것, 생각하는 것 -의 투쟁과 협동이 없다면, 인간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64 이념형 - 혹은 개인 -은 무한의 괴물성을 일시적으로 안정시켜 봉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한한 괴물성이란 각자의 힘을 그 자체 안에, 그리고 다른 힘과의 관계 안에 은폐하여 간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의된 괴물성은 예외적인 형이 아니라 자연(본성) 그 자체다. 주체화의 모델은 괴물이다. 67

[ ] 통제사회에서 삶과 생명체의 개념: 자본주의에 관한 ‘유일한 드라마‘ - 헤겔에게서의 정신과 맑스에게서의 자본의 드라마 -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드라마의 다양체‘를 생각해야 한다. 70 모순의 논리를 ‘유일한 드라마‘의 원동력이지만 그것은 너무 빈곤하고 무력하다. 71 경제구조와 공장은 이미 규율훈련의 메커니즘이 영혼과 신체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71 감금의 기술(규율훈련)을 구성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우선 다양체를 공간에 다시 배열하는 것(바둑판처럼 분할, 감금, 정렬 등) 다음으로 다양체에 시간의 순서를 붙이는 것(몸짓의 분해, 시간의 세분화, 행위의 프로그램화) ..다양체를 특정한 공간-시간 안에 다시 틀 지우는 것. 이상 세 가지다. 생명정치의 기술(공중위생, 가정정책...)은 삶을 관리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다양체에 대해 행사된다. 이 경우엔 규율훈련의 제도와는 달리, 다양체는 다수 (전체 인구) 가 되고 공간은 열린다. (인구의 한계는 국가에 의해 정해진다) 73

[ ] 들뢰즈는 권력관계와 제도를 구별한다. 권력은 여러 힘 사이의 관계이지만, 제도는 여러 힘을 통합하고 계층화하는 심급이다. 제도는 여러 힘의 관계를 명확한 형식 안에 정착시켜 그 힘들 및 힘 관계에 대해 재생산 기능을 부여한다. 74 다양한 권력관계의 현재화는 ˝하나씩 돌을 쌓아 올리˝듯이 진행된다...통합이란 네트워크와 패치워크 또는 흐름과 응집체를 하나로 정리하기 위한 기술이다....일반화, 추상화를 통해 이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통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적분계산을 모델로 하여, 사회유형과 사회적 양을 미소한 차이와 변용의 통합(적분)으로 이해했다. 75 남성/여성이라는 대치는 무수한 성으로의 생성변화 가능성을 분리하여 그 가능성을 이성애라는 규범의 이원론 속으로 결정화했다. 다양체를 계급으로 변환하는 것과 무수한 성을 이성애로 변환하는 것은 특정한 유형을 구성하고 다양체를 억압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 규범을 구성하고 코드화하며, 다른 생성변화를 향한 다양한 잠재성을 무력화하는 기능도 담당하고 있다...사회는 그 생산양식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를 표현하는 언표와 그 사회를 현실화하는 가시성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이다... 76, 77

[ ] 기계적 배치 또는 신체적 배치는 그 형식(감옥)과 실체 (수인)를 갖추고 있다. 표현기계도 또한 마찬가지로 그 형식(형법)과 실체(범죄)를 갖추고 있다. 77 규율훈련이란 ‘몸짓의 잠재성‘을 대상으로 하는 권력이며, ˝잠재성이 현실로 생성변화하고 있는 그 순간에 간섭하는 권력˝이라고 푸코는 말하고 있다. 78 규율훈련과 생명권력이 외부 혹은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차이화하는 차이‘의 역동성으로부터 모든 힘을 분리하고 있기 때문이다...확실히 제도는 과거(전통), 현재(지금 여기서의 다양한 권력관계의 관리), 그리고 미래(진보)를 손에 넣고 있지만, 생성변화와 변용을 결여하고 있다. 사회과학은 이와같은 제도의 구성과 작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균형(정치경제학)과 통합(뒤르켐), 재생산(부르디외), 대립(맑스주의), 생존경쟁(다위니즘), 또는 경합이라는 개념을 활용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회과학들은 생성변화를 무시하고 있다. 79 규율사회는 라이프니츠의 신처럼 작용한다. 결국 규율사회는 단지 하나의 세계만을 현실로 이행시킨다. 그 관점에서 말하자면, 규율사회는 생산적이라고 간주되어도 좋다. 규율사회는 규율사회의 세계를 위해 여러 모나드를 구성하는데, 그 세계는 감금 기술과 생명권력의 기술을 통해 각각의 모나드 속으로 함입된다....균형의 이론(정치경제학과 사회학) 또는 모순의 이론 (헤겔주의와 맑스주의)에서도 또한 그 이론들이 인정하는 실천은 하나의 동일한 공통 지평을 보여 준다. 즉, 단 하나의 가능세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다. 81닫힌 공간 안에서 주체성을 규율훈련할 필요는 없게 되고, 열린 공간에서 주체성을 변조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이리하여 종래의 규율훈련 위에 통제가 새로이 중첩되었다. 82

[ ] 생명권력은 삶의 특유한 과정 전체 (삶, 죽음, 생산 활동, 병 등)를 포괄하는 것이다...생명정치는 ˝생물학적 과정 전체 안에 신체를 위치 짓는다˝..생명권력의 목적은 삶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단지, 생명권력이 인구의 존속 조건을 재생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에 있다. 85 타르드는 ‘미래의 사회집단‘은 군중도 계급도 주민도 아니라 공중(또는 다양한 종류의 공중들)이라고 주장했다. 공중이라는 개념을 통해 타르드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미디어가 만들어 낸 공중, 신문이 만들어 낸 독자로서의 공중이다. ˝공중이란 원거리에서 서로 정신적인 작용을 끼치는, 여기저기 흩어진 군중이다.˝...규율훈련 기술이 기본적으로는 공간에서의 조직화인 것에 비해, 통제 기술과 공중을 구성하는 기술은 시간과 잠재성에 최대한의 중요성을 부여한다. 공중은 시간 속의 현전을 통해 구성된다. 86 통제사회에서 제도는 기계적인 테크놀로지(왕권사회)와 열역학적 테크놀로지(규율사회)가 아니라 원격작용의 테크놀로지를 이용하고 있는 것에 그 특징이 있다. 88 공중에게서 발명과 모방은 ˝정말 한 순간에, 마치 완전히 탄력적인 환경 속으로 파도가 밀려˝오듯이 보급된다....사회는 여러 공중으로 분할되어 간다. 그 분할은 ˝점차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더구나 강력하게, 종교에 의한 분할, 경제에 의한 분할, 미적 가치관에 의한 분할, 정치에 의한 분할로 거듭된다.˝ 89 습관의 지배에 이어 유행의 지배를, 전통의 시대에 이어 혁신의 시대를 수립하고 있다. 90 통제사회의 노예화 기술은 규율사회의 노예화 기술을 대신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 중첩되면서 점차 넓어졌다. 92 ˝생명체의 본질은 기억이고, 그것은 현재에서 과거의 신체를 지속하는 것이다. 생명의 형태는 자기의 재생산을 통해 과거를 현재에 결합하고 미래를 위해 메시지를 기억한다.˝ 94

[ ] 뇌의 협동에 의해 움직이고, 새로운 제도(여론 등)에 의해 포획되는 모든 힘은 기억과 주의력이다. 그것은 베르그손이 ‘지적 협력‘이라고 정의하고 타르드가 ‘뇌의 코나쿠스‘라고 정의한 힘이다. 95 기억과 주의력은 다양한 관계 안에서 현재화하고, 그들 관계와 함께 사회적 경제적 힘들이 된다. 96 통제사회는 (규율사회와 반대로) 신체적 기억보다도 정신적 기억을 둘러싸려고 한다...통제사회에서는 인간정신이 더욱 주요한 대상이다. 97 기억으로서의 삶과 인간이라는 종으로 생물학적으로 특징지어진 삶(죽음, 탄생, 병 등)은 구별되어야만 한다.. 기억과 그 코나투스(주의력)를 대상으로 하는 이 새로운 권력관계를 인지정치라고 정의하려고 한다....(통제기술의 총체).. 98 규율훈련은 신체를 틀에 넣는 일(감금, 학교, 공장 등)을 수행하고, 생명정치는 삶의 관리(복지국가, 건강의 정치 등)를 조직화하며 인지정치는 기억과 그 잠재적인 역능의 변조(전파네트워크, 음향 영상 네트워크, 정보통신 및 여론과 집단적 지각 지성의 구성)를 제어한다. 이들 각각에 대응하는 사회학적 개념은 (감금양식의 하나로서의) 노동자 계급, 인구, 그리고 공중이다. 99

[ ] 사회적 리스크 (실업, 퇴직, 병)를 보장한다는 예전 방침은, 현재 모든 개인의 삶에 개입하고 예속노동에의 종사를 강제한다는 방침으로 변했다. 인지정치의 새로운 모든 장치는 정보기술과 통신기술의 발달에 수반하여 비약적인 진보를 이루었다. 100 냉전기 사회주의 정책과 자본주의 정책의 계획경제는 근본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닌데, 그것은 바로 ‘예정조화‘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102 20세기란 자기와 세계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노동과 주체가 장기에 걸친 불가역적인 위기를 맞이한 시대였다고. 2차 세계대전 후, 주체/노동의 패러다임을 조절 시스템으로 잘 기능시키기 위해서는 완전히 정치적인 결정을 거듭 쌓아올리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것이다. 105 우리가 그려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고용의 대안이다. 노동에서 고용으로의 이행은 노동운동이 쇠퇴해 간 역사의 또 다른 슬픈 페이지다. 노동이 규율사회에서 지배적 지위를 점하게 된 것은 바로 규율사회가 쇠퇴하던 시기였다.(포디즘) 그에 비해 고용은 통제사회에서 조절의 기본적 형태 중의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106

볕뉘

0. 진로집이었다. 오랜만의 연락에 차 한잔이 술 한잔으로 되었다. 다음날 아침, 그의 영화대본을 푹 빠져 읽으니 벌써 도착해버렸다. 그 뒤 몸이 일주일을 앓는 듯했다. 친구는 물었다. 다 괴물이지, 그게 맞는 거지라고 물었다. 주저없이 답했다. 맞아.

1. 어제는 정규뉴스가 끝나갈 쯤 잠이 들었는데, 곧 다시 깨었다. 지진멀미를 하는 것인지 아무 일이 없어도 뱃사람이 육지에 걸음을 떼고 울렁거린다니...타첸의 고야를 보았다. 귀족의 세상과 귀족들이 단두대에 거침없이 사라지거나, 집시의 패션을 부러워하는 일이거나....성직자이거나 거의 게으르거나 시대의 당연한 것들은 이내 그 시간의 흐름에 벗겨지거나 지쳐버리는 모습이었다.

2. 우리는 어느 시대를 살거나 견뎌내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둘로 나누는 습관과 그 둘에 걸려 아무 것도 어쩌지 못하는 주춤에 있는 건 아닐까. 둘로 나누고, 또 나누는 것으로 이루어진 세계. 단 하나의 원칙이 있다면 말을 새로 만들지 말 것. 그러니 늘 낡은 단어를 써야 한다. 이것이나 저것의 세계. 이 것의 삶과 저 것의 삶만 있다. 우리 삶의 양식은 붕괴되지 않는다. 뭐라고 하지 않는다. 진리는 찾는 게 아니라 책을 천의 결로 독해해내듯 달리 읽어내서 펼치는 것. 사랑은 진리가 아니고 목적이 아니다. 끊임없이 새롭게 펼쳐지는 것이다. 그렇게 이항이 다항의 음을 내지 못할 때, 그 현물이 눈 앞에 있지 못할 때 아무 것도 아니다. 주춤거리고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속의 괴물성이 드러날 때만 가시화되는 것은 아닐까. 사건이 만들어진다는 건 공감과 느낌, 따스함이 나누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낡은 단어와 표식은 다 지워진 것으로 없는 것으로 사유해내도 되지 않을까.

3. 사람을 겉의 표식으로 다양한 존재로 나누는데만 익숙하지, 속에서 들끓고 있는 소유의 다양한 결로 사람을 나누지 못하는 우리는 답답하다. 사건도 없는 무미, 아무 맛도 없는 삶, 그 삶의 외부를 곁들여보려는 안타까움이 없다.

4. 늘 등장인물들은 물고 물린다. 덥썩 물었다 싶으면 꼬리에 다른 이가 꼭 물고 있다. 물고물려 어느 것이 새것이고 어느 것이 누구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마에 눈이라는 것이 생겼다면, 그것이 시력을 갖고 있는 것인지, 서서히 눈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갇혀있어도 주장하고 더 장황하게 서술하는 저자의 단순을 품어본다. 어째서, 무슨 상관이라고, 나는 여기까지라고... ... 이 책은 여기서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스트사회주의 정치운동에서 저항과 창조:

[ ] 그 실천은 이질적인 주체성을 만들어 내는 과정임에도 동시에 생성변화하는 주체성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결국, 그 실천은 다양한 생성변화, 괴물적인 생성변화, 분자적인 ‘천개의 성‘의 실현, 인간정신에 잠재해 있는 무한한 괴물성을 현실화하는 과정인 것이다....이성애라는 단 하나의 관계로 한정되어 있었던 ‘남성/여성‘이라는 두 세계의 올가미에서 탈출하게 하는 것이다. ‘기발한 주체 excentriques주체‘(테레사 드 로레티스), ‘단편화한 자기동일성‘(다나 해러웨이), ‘노마드적 주체‘(로지 브라이도티 rosi braidotti) 라는 다양한 개념은 랑시에를가 멈춰 섰던 지점에서 출발한 차이와 반복에 관한 사상과 실천인 것이다. 236, 237 우리는 여성이라는 계급으로부터의 탈주자이다. 그것은 탈주한 미국 흑인 노예가 노예제로부터 달아나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237 정치란 일종의 검증작업이고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는 쫓겨서 저항에 참가하는 것도 아니고 공통적 존재에 관한 ‘항상적‘으로 ‘불변‘인 정의에 멈추는 것도 아니다. 사태에 촉발되어 평등을 요구하는 활동에 참가하는 것 또한 사건의 정치, 즉 생성변화의 정치, 실험으로서의 정치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의 정치인 것이다. 239 68년의 정치 운동 이후, 우리는 제도를 두 개의 종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한쪽은 이미 설립된 제도로서 그것은 기존의 것(계급과 성별의 이항 대립, 소수자를 노예화하는 재생산)을 단순하게 재생산하는 것 이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다. 다른 쪽은 투쟁 속에서 생기는 제도로서, ‘반복‘에 관계된 것으로서의, 즉 새로운 것의 생산이 행해지는 층으로서의 제도, 차이의 캔버스로서의 제도이다. 240 설령 그녀들이 반항했다고 해도 ‘제2의 성‘이라는 다수자적인 자기동일성의 환원되어 버린다면 해방이란 있을 수 없다. 해방되기 위해서는 여성으로 생성변화하는 다양체 속으로 스며들 필요가 있다. ...다수자 모델로부터 탈주하여 무하나게 변용하는 양태 안에서만 우리는 운동의 다양체와 만날 수 있다. 243

[ ] ‘만인을 위한 권리‘의 의미가 전도시키는 것은 ˝우리는 이러한 인간이기 때문에 이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른 존재로 생성변화하기 위해 이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244 이 차이의 정치란, ‘자본과 민주주의의 소란‘이 아니라 대립하면서 다양하게 존재하려는 세계를, 여러 주체성을, 타자에의 생성변화를 발명하고 실현하려는 정치이다. 247 투쟁은 볼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이 ‘치안에 의해‘ 미리 규정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다수의 다양한 새로운 언어와 의미, 언표 형태를 발명한다. 248 평등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평등은 차이를 위해, 모든 사람들의 생성변화를 위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평등은 다양성을 파괴하는 집단주의가 되고, 다양한 주체성의 평균치, 즉 평균적인 주체성(다수자)을 만드는 것으로 전락할 것이다. 257 연대 조직은 정식 대표자를 정하지 않고 성원들 각자가 의견을 표명할 수 있도록 하며, 각자의 주장 모두가 연대조직에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다. 제도적인 분할을 실천적인 이유에서 문제 삼는 것은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여는 일이다. 262 연대조직이 만들어지는 것은 발명이 확장되고 전달되어 가는 예측 불가능한 양태(신뢰와 공감을 바탕으로 한 상호적인 포획)로부터이지, 이상적인 계획의 실현이나 정치적 방침의 자각적 달성으로부터는 아니다. 연대조직은 그 조직이 다양한 특이성으로부터 이루어진 힘을 표현하고, ˝그 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책임으로 움직일˝때 이외에는 성공할 수 없다. 264

[ ] 예전의 노동운동 조직이 보여 주었던 수단과 형태는 옛 공장에서의 협동을 참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들은 정치적 행위를 발영하고 발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단지 처음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것, 즉 조직의 지도자의 생각을 그대로 전개하는 것밖에는 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265 투사란 단순하게, 존재하는 것 안에 불연속성을 도입하는 인물을 가리킨다. 투사는 발화와 욕망, 이미지의 흐름을 분기시키고, 그 흐름들을 다양체를 편성하는 힘으로 이용한다. 그리고 그 흐름들 사이에서 다양한 특이한 상황을 결합하지만, 초월적이고 통일적인 관점에서 자리매김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한 투사는 곧 실험가이다.˝우리는 ‘공통적 존재‘와 ‘대항적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어떠한 제도가 생성변화를 촉진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도 우리는 여러 가지 장치와 기술, 배치, 언표를 통해 그 물음들을 모으고, 검토하고, 실험하고 있다. 269 예전의 주인들은, 옛 배치 방식에 갇혀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새로운 질문을 던지려 하지 않고, 에전의 대답에 매달려 있다. 그러나 사건은 계속 일어난다. 270 자본가들은 1968년 이후, 사회적 정치적 타협을 의미하고 있었던 ‘조절관리‘를 ‘비인격적‘인 테크놀로지 장치에 의지한 ‘변조‘로 치환하려고 했다. 즉, 그것은 금융의 변조이고, 생산의 변조이며 소통, 사법, 제도....의 변조이다.....좌익은 무익하게도, 거의 30년에 걸쳐 임금노동이라는 다수자의 기준을 유지하고 내부에서 안정시키기 위하여 그 바깥의 문제(불안정생활, 실업, 빈곤)에 관해서는 유연한 태도를 가졌던 것이다. 조적관리와 변조라는 두 개의 가치-노동 모델은 모두 상이한 것이지만 우리이 삶을 종속시키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274

[ ] 만인의 소수자로의 생성변화가 성립하기 위한 경제적 조건은 임금노동 체제에 의해서는 보증되지 않는다. 그것을 보증하는 것이 있다면 소득의 정치뿐이다....만인의 소득 보장은 그 이상의 진정한 제도적 혁신인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생성변화를 창조하고 실험하기 위한 조건으로 서 생각해야 한다.....소득이 보장되어 고용시간에 대해 대가가 지불되는 것만이 아니라 활동을 구성하는 다양한 이질적인 시간에 대해서도 대가가 지불된다면, 그러한 소득보장은 노동의 실험장임과 동시에 삶의 실험장이기도 하는 새로운 정치공간에의 길을 열게 될 것이다.... ˝생성변화를 구성한다˝는 말은, 그 말이 적용되는 사물 내용의 변화에 맞추어서, 그 변화를 예측하여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규칙‘과 장치, 제도 전체를 발명하는 것을 지칭한다. ..기업과 고용주에의 투자는 지배적인 다수자의 기준과 그 권력의 논리, 즉 변조나 규율훈련에 투자하는 것이다. ‘만인의 소득 보장‘안에는 복지의 다양한 제도도 포함되어 있다. 그 제도는 임금노동자와는 다른 다양한 종속적 소수자를 ‘재생산‘하는 것에 유용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소수자의 생성변화를 ‘반복‘하는 것에 유용하다. 279

[ ] 저항은 창조 과정인 것입니다. 창조하는 것, 재창조하는 것, 상황을 변형하는 것, 과정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저항입니다...정말로 나는 그렇게 모든 일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저항의 최소 형태를 구성합니다. -미셀 푸코. 286 나와 타자의 관계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서, 또는 주체 간의 관계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서의 ‘가능세계‘ 사이의 관계로서 이해될 수 있다. 타자란, 객체도 주체도 아니고 다양한 가능 세계의 표현인것이다....권력관계를 타자들의 가능적 행위를 구성하고 결정하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다양한 실천과 장치, 권력기술에서 걸리는 내기, 즉 연대조직과 여성운동과 신자유주의적 글로벌화에 대한 반대투쟁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87 권력이 타자의 가능적 행위의 장을 만들어 낼 능력으로 정의된다면, 그 권력의 행사에 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관계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힘들을 잠재적으로 ‘자유‘로운 간주해야 한다. 권력이란 ‘움직이고 있는 주체‘ 또는 ‘자유로운 존재인 한에서의 자유로운 주체˝에 대한 작용 양식인 것이다. ㅜ체가 자유라는 것은 주체가 ˝항상 상황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88 노동조합과 정당, 국가기관은 자신들의 절차가 민주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도 그 조직들은 개인들이 타자의 행위를 이끌려고 하는 시도를 중단시키고 방해하도록 미리 구성된다. 289 권리와 법률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에 관해서밖에 말할 수 없다. 295 통제사회의 경제와 정치를 전복하고 있는 것은 가능세계의 발명과 증식, 분기이다. 통제사회를 위험사회로 정의하는 것에는 사건으로서의 새로운 것의 창조는 이제 예외가 아니며 다양체의 창조적 역능이야말로 현실을 구성하는 원인이라는 것이 부정적이면서 애매한 방식으로만 말해질 뿐이다. 298

볕뉘

0. 고여있는 개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고여있는 존재에도 손을 들고, 타자란 다양한 가능세계의 표현이라는 점에 고개를 들어보자고 한다. 느끼고 공감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키우면서 분기하는 것에 대한 사유. 조금 폭넓은 그림이자 사유의 캔버스. 말미 지나치게 들뢰즈, 가타리에 기대어 설명해서 지루해보였다. 자본주의가 무엇인가? 다시 한번 저자의 시선을 쫓아가며 짚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표현과 소통의 대립

[ ] 언표가 표현하는 것은 항상, 결코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새로운 것, 재생산되지 않은 것, 그리고 항상 가치(진, 선, 미)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177 차이를 창조하는 것은 다양하고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창조하고 다성악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언어표현의 존재방식을 바흐친은 복수언어주의라고 부른다. 그와 반대로 정보와 소통의 실천은 통일과 중앙집권화를 목표로 하는 힘들로부터 성립한다. 그 힘들은 발화, 언어, 의미의 다양성과 이질성을 파괴하는데, 바흐친은 그와 같은 존재방식을 단일언어주의라고 부른다....바흐친은 거의 모든 철학과 언어학이 무시해 왔던 힘들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 힘들이란 ‘탈중심화하는 원심적인 흐름‘이다. 이 흐름에서 우리들은 저항과 투쟁, 창조와 만난다. 그리고 바로 이 원심적인 흐름안에서야말로 언어적 다양성이 구축되는 것이다. 178, 179

[1 ] 대화는 매우 미세한 현상이지만 끊임없이 넓어지는 활동이고, 사회의 모든 형성과 변형의 원인이다. 즉 대화가 야기하는 것은 언어적인 변형이 아니라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심미적, 도덕적인 변형인 것이다. 이를테면 산호 벌레가 산호초를 만들어 가는 것과 같은 대화 과정의 이러한 중요성은 지금까지 완전히 무시되어 왔다. (사회적 변형의 뿌리) 182 대화는 바로 경제학자가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이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고, 글자도 쓰지 않으며, 인쇄물도 전보도 전화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경제적 관계 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83 말한다는 행위는 타자의 말을 전유하는 것에 의해 일종의 대화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말의 의미작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표현과 억양, 목소리에 의해 시작된다. 184 우리의 말 안에는 모든 목소리들이 반향하고 있다...타자의 말과 관계를 맺는 일은 항상 사건과의 만남이어서 단순한 (언어학적인) 교환이나 (간주관적인) 인식인 것은 아니다. 185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발화는 적어도 그 반은 타자가 발화한 말로부터 성립한다. 사람들이 전하고, 생각하고, 사고하고, 논의하는 것은 ˝타자들이 말하는 언어와 여론, 주장, 정보인 것이다. 그것들에 대해 사람들은 반대하기도 하고, 납득하기도 하며 참조하기도 한다. 186 정보와 소통에 관한 현대의 여러 이론들은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론들은 언어의 교환을 대화적인 사건으로서, 또는 다양한 주체성의 협동의 공통적 창조와 공통적 실현으로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6

[ ] 여론은 욕망과 믿음을 형성하고 변형하는 무한소의 힘을 수반하며, 그 힘에 의해 다양화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그 다양성에서 모든 잠재성을 탈취하여 단일 언어를 강조하는 수단이나 정보 소통을 전달하는 수단을 만들어 내고, 다양한 가능세계의 공통적인 창조와 실현을 행하는 역능 모두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187 철도, 여행...상업... 사람들의 행위 사이에, 극히 먼 거리에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견고한 유대(이는 비인간적인 유대여서, 공동체와는 관계가 없다)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유대에서 생겨났던 공중은 이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것도, 식별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존 듀이 188 시간의 테크놀로지 장치는 통제사회에 특유한 동력이다. 그것은 왕권사회의 기계적인 동력과 규율훈련사회의 열역학적 동력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 장치는 떨어진 장소에 있는 다양한 정신적 습관과 그 구성요소인 욕망과 믿음을 움직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198 시장이 가져온 ‘무한‘의 선택은 그러한 정치적 양자택일(선인가 악인가)이 협소한 틈 안에 있다. 왜냐하면 시장도 또한 동일한 전략을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가능성의 창조를 착취하고, 문제를 구성할 능력과 사회적 힘들을 분리하며, 미리 준비된 해결책을 강요하는 전략이다. 201

[ ]지적소유권이라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인클로저를 시도하고 있다. 신경제의 시도는 독점하여 계층화와 중앙집권화를 꾀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상성의 논리가 희소성의 논리와 상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5 네트워크가 현실화하는지 어떤지는, 타르드의 낙관주의에 의하면 배치와 결합을 조금씩 만들어내는 능력에 달려 있다. 그 망의 구성은 이미 언급한 두 개의 축, 즉 네트워크와 패치워크에 의해 조직된다. 거기에서 모나드들은 기호와 소리, 이미지의 흐름에 편입된다. 그 흐름은 분기하는 것도 있다면(발명), 그대로 넓어져 가는 것도 있다(반복) 206 개인을 ‘분할가능한 것‘으로 변환하고 공통재를 시장화하려고하는 계획을 그 눈앞에서 가로막는 것은, 특이성을 만들어 내고 세계를 분기시키며 가능성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원심적 힘들이 사용하는 전략은 매우 단순한다. 그것은 모나들이 고객이 아니라 협력자로서 활동한다는 전략이다..바로 협동 그 자체에 수반되는 역동성이다. 협동은 이제 에고이즘의 균형에 의해 조정되지 않으며, 공감과 우애, 슬픔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기업 논리를 밀어붙인다는 것은 뇌의 협동을 파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주체성에 있어서 활동한다는 것이란 함께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209

[ ]권위주의적 발화 (종교적 발화, 도덕적 발화, 성인의 발화, 교수의 발화...그 발화들은 이른바 ‘아버지들‘의 발화이다...)는 우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자유로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수렴하거나 발산하고, 다가가거나 떨어져 나오기도 하는 유희는 ˝여기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211 설득적 발화의 방법은 ˝타자의 발화가 최대의 상호 작용을 발휘하는 장소를 만들어 낸다. 그곳은 문맥을 통해 대화가 쌍방에 영향을 주는 장이고, ‘낯선‘ 발화가 자유로이 창조적인 혁명을 가져오는 장이며, 이행이 단계적으로 행해지는 장, 경계와 유희하는 장이다. 212 기도할 때에는 교회의 언어를, 영주와 말할 때에는 자신이 속한 사회계층의 언어를,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과 말할 때에는 또한 별개의 언어를 사용하여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언어들은 각각 닫혀 있었고, 상호 교환도 없었으며, 주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비추어 주지도 않았다. 215 바흐친은 자본주의의 힘이 당시의 다양체를 자본/노동의 이항대립으로 환원했다는 점만을 보지 않았다. 그는 또한 그 파괴적 과정이 자본주의 이전 러시아의 생활을 구성하고 있었던 다양한 세계와 충돌하면서 차이의 거대한 에너지와 잠재성을 해방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현대는 비서구적인 다양한 세계를 자본주의에 의한 통일화와 중앙집권화, 단일언어화로 향하게 하려는 의지가 관통하는 시대인 것이다. 216

[ ] 바흐친에게 자기와 타자의 관계는 다양한 가능세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서의 관계로, 또는 언표에서의 다양한 가능성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결국 발화에는 의미내용으로서의 측면(개념으로서 발화)과 표현으로서의 측면(이미지로서의 발화), 그리고 그 감정-의지의 양상을 전달하는 측면(발화의 어조)이 있다. 222 세계와 지각, 정동, 사고, 객관성에 구조가 부여되는 것은 바로 이 타자의 출현에 의해서다. ˝타자만이 유일하게, 나에 대해 타자를 맞이하는 기쁨, 타자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슬픔, 타자를 잃어버리는 고통....을 준다. 의지와 감정에 관한 가치는 모두, 어떤 타자와 관계할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가치들은 나만의 삶에서는 가질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의 중첩을 타자의 삶에 부여한다. 이러한 사건이 가진 성질은 나만의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의 삶은 시간 안에서 타자의 존재를 품으면서 존재하는 것이다....나와 타자 사이에는 원리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 차이는 ...사건적 또는 가치론적 질서에서 유래한다...그래서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나도 아니고 고유의 의미에서의 타자도 아니며 나와 타자 양쪽에 앞서 존재하고 있는 사건적 관계인 것이다. 223

[ ]바흐친은 언어학과 철학이 무시하고 있었던 존재의 새로운 잉여, 즉 그가 ‘대화성‘이라고 부른 영역을 구출한다. 이 영역에서 관계는 의미 관계이다. 의미는 언어와 기호에 의해 표현되지만 언어와 기호로 환원되지 않는다...감정, 가치판단, 표현은 언어에서의 어구와는 많은 점에서 관계가 없고, 구체적인 언표에서 살아있는 사용의 과정에서밖에는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바흐친에 의하면 존재의 영역은 ‘응답과 물음‘의 영역이고, 그것들은 ˝동일한 논리적 관계에 속하지 않는다. 사람은 단지 하나의 동일한 의식 그대로 정지해 있지 않는다. 모든 응답은 새로운 질문을 산출한다. 224 의미는 물리적 물질적 현상을 변화시킬 수 없고, 그것을 바랄 수도 없다. 의미는 물질적 힘으로서 활동할 수 없다. 처음부터 의미는 물질적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미는 어떠한 힘보다도 강한 힘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실존적인) 요소를 털끝조차도 변화시키지 않지만 사건과 현실의 의미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 모든 것은 그대로 머물면서도 완전하게 별개의 의미를 손에 넣는 것이다.(존재에서의 의미 변형) 226

[ ] 바흐친은 외부(잠재성)의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냈다. 즉 ˝모순어법을 이용하여 ‘로부터의-외부‘의 장소를 내부의 장이라고 말˝해야 한다. ˝예술가는 바로 삶으로부터의 외부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로지 삶의 내부에 있는 삶(사회적,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인 실천)에는 참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삶을 그 외부에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부에서는, 삶은 삶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삶은 외부를 향하며, 삶 그 자체의 외부와 의미의 외부에 있는 활동을 요구한다. 이 외부의 삶에 다다르는 수단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작업인 것이다.˝ 227

볕뉘

0. 2시간이 넘는 녹취를 풀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옮겨 놓는다. 하지만 나눈 얘기의 감정의 고저, 그의 삶에서 우러나오거나 응어리진 대목의 호흡은 역시 기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이야기하면서 그가 옮겨 놓고 싶은 감정과 대목, 그 호흡을 이미 알고 있다. 활자화된 녹취록에서는 그 감정의 결을 쉽게 헤아릴 수 없다. 어쩌면 그 녹취는 그 감정의 진도, 그 매듭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재서술될 수 있다. 그러니 여러개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1. 바흐친이 궁금해졌다. 이 친구가 읽는 모습도 그러하지만, 좀더 달리 다른 언중을 느끼고 싶기도 한가 보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에 대한 대목과 달리 더 세밀하고 풍부하게 느껴졌다. 타자에 대한 개념도 레비나스와 달리 손에 쥐어질 듯하다 싶다. 물론 오독일 것이지만 몹시 궁급해졌다.

2. 정보와 소통을 이야기하는 우리는 정작 대화가 무언지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 넘어가다 걸린 가시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 기업과 신모나돌로지 (소통, 소비, 광고, 가능성의 생산,창조, 자본주의): 저 광고 메시지를 텔레비전 시청자에게 수용시키려면 그들 뇌를 활동하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방송은 사람들의 뇌를 활동하지 않도록 만드는 일이다 107 기업은 모나드 (소비자와 노동자)와 세계(기업) 사이의 상응과 조합, 교착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109 통제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세계를 실효화하는 것이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그 조건에 다라서 가치창출을 행한다...자본주의란 생산양식이 아니라 (양식으로서의) 세계의 생산이라고, 결국 자본주의란 일종의 마니에리즘manierisme이다. 110 소비라는 행위는 무엇보다도 우선 어떤 세계에의 소속과 가맹을 의미한다....그것은 어떤 종류의 장식이고 자세이며, 식사법, 소통 방식, 사는 방식, 이동 방식, 태도 방식, 화술 등을 장려하고 요청하는 것이다. 111 오늘날 표현기계에 대한 투자액은 ‘고용‘과 ‘생활수단‘에의 투자액을 크게 상회한다. 113 비신체적 변형이 생산하고 있는 것은 (혹은 생산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감각의 변화이고 가치관의 변화이다. ...광고의 표현은 세계와 우리의 실존을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중합시킨다. 다만 그 ‘가능성‘은 광고에 의해 어느 정도 유혹적인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고 해도 실제로는 명령인 것이다..광고는 우리 마음 안에 마치 음악의 변주 주제와 후렴처럼 반향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새 광고 음악을 흥얼거리는 것에 놀라는 것이다. 114, 115 사람들 사이에는 극단적인 두 개의 주체성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그 주체성 내부에 정신과 신체의 변조가 명확히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변조는 이미 우리가 말했던 논리, 즉 ‘사치스러운 주체성‘과 ‘쓰레기 같은 주체성‘이라는 두 개의 문법에 의해 만들어졌던 것이다....인류의 4분의 3이 비신체적 변형에 용이하게 액세스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체적 변형에서 배제되고 있다.

[ ]현대 자본주의는 공장에 의해 넓혀지는 것이 아니다. 공장은 현대 자본주의에 종속만 되어 있다. 현대 자본주의는 우선 언어와 기호, 이미지에 의해 확장된다. 그리고 오늘날 표현기게가 선도하는 것은 이제 공장이 아니라 전쟁이다. 117 현대 자본주의는 수목 모양의 여러 분기점을 수반하고 있다. 상상도 불가능한 다양한 세계가, 현실 세계와 함께 세계 안에서 주름을 펴나가듯이 전개되고 있다....존재하는 것은 차이화하는 것이다. 117 자본주의는 (단수형의) 주체도 객체도 생산하지 않는다. 그것이 생산하는 것은 변조의 테크놀로지에 의해 관리되고 끊임없는 변조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복수형의) 주체와 객체이다....자본주의가 다양한 주체와 객체의 끊임없는 변용 (뇌의 변조, 즉 기억과 주의력의 포획)을 통해 그 모두를 실행하고 있다....텔레비전이 사람들을 변형시키는 것은 규율훈련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델의 부여에 의해서이고,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방에 의해서라고 말이다. 텔레비전이 부여하고 있는 것은 몸짓의 몸짓이고, 가능한 행위에 관한 행위이다. 118, 119 기업에 의해 표준화된 ‘세계‘를 표현할 ‘가능성‘(상품 혹은 서비스)은 미리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세계와 노동자, 소비자는 사건에 앞서서 존재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그들은 사건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다. 120

[ ]규율훈련이 우선인 곳에서는 사건은 부정적인 것으로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예측과 계획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노동의 표준화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나 기업 활동이 고객과 직접 결부되면, 그 활동은 이제 예측과 계량에 완전히 따르게 될 수 없게 된다. 121 통제란 불확실성과 변화에 관해 이해하는 것이고, 따라서 불안정성에 직면한 활동인 것이며, 모든 것을 ‘소통적‘인 몸짓으로 행하는 것이다....현재 우리는 조작operation의 시대를 지나 작용의 시대로, 집단노동의 시대를 지나 네트워크 활동의 시대로 향하고 있다. 122 모든 생산은 서비스 생산이 되었다. 결국 생산은 ˝고객과 이용자와 공중이 장래 어떠한 활동의 성질과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인가를 정하는 조건˝의 생산으로 변형되었다. 그 궁극 목적은 ‘삶의 양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123 기업은 소비자를 위한 세계만이 아니라 노동자를 위한 세계도 창조해야 한다. 현대 기업에서 일한다는 것은 그 세계에 속한다는 것, 즉 그 욕망과 믿음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124 샐러리맨은 자유로이 고무줄을 늘일 수 있다. 이제 그는 갇혀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이 좋을 대로, 자신의 기량에 따라, 자신의 판단에 의해 돌아다니며 일하고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고무줄이 그를 끌어당긴다. 그를 정기적으로 되돌리는 힘이 발동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해야 한다....일정표와 마감의 압력이 예전의 타임 테이블에 의한 단순 노동 관리를 대신한다...샐러리맨은 그 통제를 항상 고려해야 한다. 결국 그 통제는 밤낮으로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게 된다. 127 우리가 여론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단 한 종류의 여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항상 적어도 두 종류 이상의 여론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거기에는 항상 복수의 힘이, 복수의 모나드가 존재하고 있다. 131 시장은 공중과 고객을 포섭하는 장, 또는 구성하는 장이라고 생각해도 지장이 없다. 132

[ ] 모든 활동은 그 일부에 발명을 포함하며 또한 재생산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활동이라는 개념이다. 어떠한 활동도 이제 도구적 논리에 따르지 않고 사건의 논리에 따르게 되었다. 139 프리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내는 협동의 힘은 그 ‘협력자들‘의 활동에 수반한 인지적 성질보다도 발명의 시공간을 여는 능력에 더 관련된다. 141 기업은 무엇보다 사회로부터 착취를 행한다. 그것을 위해 사회를 위계화하고 공중과 고객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만들어 내고 창조와 실현을 행하는 가능성의 힘을 사회로부터 탈취하려고 한다. 142 다양한 주체성의 협동에 관하여 우리가 주의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 ‘비물질적‘인 성질이 아니라 그 활동의 윤리적 정치적 형식이고 그 조직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가 여기서 지적하는 사실은, 포스트사회주의 운동에서 단순히 아니야라고 답해서 끝나는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그 사실들은 우리가 (제도와 경제, 소통에 관계하는) 발명의 공간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공간은 인지적이며 비물질적인 노동에 의한 특수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이어야 한다. 145 상황의 특수성에서 출발할 때, 실험은 다양한 권력관계로부터 이루어진 전체를 횡단하여 질문하고 그 외부로 열리는 행위가 된다...(제약산업)..노동운동의 논리가 이미 실효성을 잃은 것은, 그 운동이 고전적인 조합정치와 그 코드화된 관계들로부터 탈주할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다. ......맑스의 관점이라면 부의 새로운 기반으로서 ‘노동 그 자체‘를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발전과 테크놀로지의 진보, ‘사회적인 협동과 유통‘의 발전, 요컨데 ‘사회적인 개인의 발전‘을 생각해야만 한다. 요컨대 ˝교환가치에 기반한 생산은 붕괴했다˝는 것이다. 148

[ ]서로 협동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여러 사물과 사건에 관해 함께 느끼고 서로 ‘영향 받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우정, 친애의 정, 슬픔은 전부 공감 관계의 표현이다. 뇌의 협동의 구성과 역동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관계를 전제로 해야만 한다... 대립의 논리의 경우와는 반대로 이질적인 힘을 결합하고 공통으로 생산하고 공통으로 적합하게 만드는 능력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다양한 힘이 공통으로 새로운 관계의 변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내재성의 새로운 평면을 형성하여 ‘서로 이용 가능하기 위한, 아직 발견되지 않은 길‘을 발견하는 것에 의해서다. 150, 151 반복에 의한 발명은, 경제학자와 맑스주의자들이 노동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또한 기쁨은 슬픔과 구별되어야 한다..그것은 규격화되는 반복의 비참으로부터 탈주하고, 발명의 기쁨을 증대시켜 노동의 필요성을 줄이며, 협동의 자유를 증대시키기 위해 새로운 길을 탐색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와 같은 발명과 반복의 존재론, 또는 기쁨과 슬픔의 존재론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대립하는 것이다....뇌의 협동은 스미스적인 또는 맑스적인 공장에서의 협동과는 달리, 공통재를 생산하는 활동이다. 공통재란 인식과 언어, 과학, 예술, 서비스, 정보 등을 말한다..예술작품은 그 반은 예술가의 활동의 결과이지만 다른 반은 공중(감상자, 독자, 청중)의 활동의 결과이다. 153

[ ]공통재는 다양한 주체성의 협동에 의한 공통적 창조와 공통적 실현의 결과이다. 그것은 ˝무상임과 동시에 끝없이 분할 불가능한 것˝이다...(희소재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로 확산되고 공유되면서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153, 154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에 관해 생각할 때, 그들은 신앙을 소비하는 것인가? 사람들이 유명한 예술작품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들은 예술작품을 소비하고 있는 것인가? 모든 공통재의 소비는 그대로 새로운 지식과 예술작품의 창조와 연결된다. 이러한 소비는 파괴적인 행위가 아니라 별도의 새로운 지식과 예술작품을 산출하는 창조적인 행위이다. 155 프리 소프트웨어에서 무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 보다도 원코드의 입수, 수정, 배포와 소프트웨어의 개작의 자유를 가져오는 여러 가능성이 중요하다... 프리 소프트웨어의 창조와 배치, 협동은 고객이라는 틀을 파괴하고 활발한 조직생성을 위한 조건의 창조를 커뮤니티에 가져온다.(이것은 뇌의 협동에 의한 논리다) 그와 같은 방식은 의존적이며 수동적인 고객을 구축하려는 기업의 전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별개의 전략을 만들어 낸다...부가 무료라는 것은 그 부에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의 측정과 분배의 원칙이 경제학적인 것일 수 없다는 (결국 희소성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58 공통재(문화, 교육, 연구)의 창조와 실현의 본질과 그 창조와 실현에 참여하고 있는 공중(학생, 관객, 환자, 소비자 등)의 협동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문제 삼았다. 결국 그 투쟁들은 (공통적인) 부의 창조와 분배, 그 융자, 새로운 협동에 여러 주체성이 참여하는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그것에 필요한 제도적 테크놀로지적 장치를 문제시했던 것이다 162 활동은 발명과 재생산, 창조자와 이용자,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에 지적 소유권이라는 제도가 만들어 낸 벽을 파괴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래서 뇌의 협동을 확대하고, 거기에 참가한 다양한 주체를 새로운 민주주의 개념 안으로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새로운 민주주의는 고객과 이용자, 실업자라는 기존의 틀을 비국가적인 새로운 공공영역에서의 정치적 활동자라는 틀로 변형해야 할 것이다. 164

[ ]기억은 이제 습관도 아니고 무의식의 자동운동도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지적 기억이며, 이질적인 것을 모으고 발명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로부터 타르드는 ˝노동과 발명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67 기억으로부터 생겨난 행위가 노동과 구별되는 이유는, 전자가 감각에 관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시간에 관계된 힘으로서의 차이의 활동(발명)과 반복, 재생산활동(모방)을 혼합하면서 배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기억에 의한 행위는 새로운 것(이미지, 감각, 관념)을 창조할 능력과 함께 그것을 무한하게 반복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그것은 ˝이미지와 감각, 관념의 한없는 연쇄이다˝) 168 자본주의는 일종의 반-생산의 힘이며, 뇌의 협동과 그것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들 - 생물학적 조건도 포함한다-을 파괴하는 힘이 명확해진다. 무엇보다도 우선, 개인적 집단적 특이성을 만들어 내는 재생산의 역능을 파괴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에 의한 차이와 반복이 구성 과정을 계속 측정하기 때문이다...그 상태들은 집단화한 뇌의 협동을 파괴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 수단은 주체성의 조건인 차이와 반복의 사회적 과정을 공격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172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욕망과 믿음의 방식을 자본가의 가치관이 명하는 주체화 형식에 따르도록 하여 사람들의 주체성을 빈약하고 동질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74

볕뉘.

0. 한 밤의 내장을 뒤흔드는 지진의 여파가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행여 면이나 리단위의 지진여파가 궁금하여 검색하다가 다행이다 싶었는데, 여진이 잘개부서져 오지 않고 뜸하다고 했더니, 굵은 여진이 퉁퉁 내장을 두드리고 간다. 구술 녹취를 푸느라 바빴고, 미진한 몸을 가누느라 힘든 여정을 보내다나니 무척 뜸했다 싶다. 읽어놓고 늦게 남기게 된다. 1, 2장은 다음에...이 책의 3장이다.

1. 자본-노동의 관계에 국한시키지 않으면서, 자본주의와 기업의 역동성에 주목한다. 그러면서도 그 한계를 잘 설명해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한계를 짚으면서 창조의 사회적 개인의 발랄함을 얘기하는 것이 압축되면서도 고루하지 않다. 다른 노트와 함께 보면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11-20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0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나 해러웨이

빛낱말: 공의존관계, 실매듭으로서 삶, 상황적 지식, 겸손한 목격자, 사이보그, 질병과 죽음

[ ] 믹소트리카 파라독사(Mixotricha paradoxa) 흰개미의 장 속에 서식하며 상호의존적인 다섯 종류의 박테리아가 공생하는 생물체로서, 흰개미가 먹은 나무 조각을 소화시켜 흰개미에게 영양을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중요한 것은 숙주라 불리는 믹소트리카 파라독사와 여기에 기생하는 박테리아들이 서로 독립해서는 살지 못하는 공의존관계라는 사실이다. 95

[ ] 해러웨이는 자신의 ‘가르치는 일‘을 ‘실뜨기의 놀이 경험의 구현‘으로 설명한다. 생활 속에서,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연속적으로 맞물려지는 매듭들 속에 연루되는 경험이다...새로운 시간과 교차하는 만남에 계속 귀 기울이고 그들과 엮이며 생산하는 한, 그들과 함께 있는 한 106

[ ] 서양과학의 전반이 남성적 원칙에 기초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서구 인본주의 즉 이성중심주의는 정신과 육체를 이분화해 이성과 정신을 ‘남성적 원칙‘의 기초로, 감성과 육체를 ‘여성적 원칙‘의 기초로 삼았고 후자를 비이성적인 것, 문화활동에 저해가 되는 것으로 금기시해왔다. 107

[ 1 ] 상황적 지식: 서구 과학의 이런 남성중심주의를 ˝죽은 백인 유럽 남성들 dead white european males˝이라는 표현으로 풍자하고..이것이 ‘객관적 지식‘의 전제가 되었다로 폭로한다. ‘상황적 지식‘이라는 개념은 모든 사람(그룹)의 비전이 그 사람(그룹)의 시시각각 변하는 정체성에 의해서 구성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자연의 실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며, 좋은 과학과 나쁜 과학은 구별할 수 있고,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자연현상의 물질적 분석과 이를 둘러싼 문화적 분석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말한다. 108

[ 2 ] 겸손한 목격자: 상황적 지식이란, 겸손한 목격자의 지식이다. ‘목격‘이란 보는 것이고, 증언하는 것이며, 서서 공공연하게 자신이 보고 기술한 바를 해명하는 것이며, 자신이 보고 기술한 바에 심적으로 상처받는 것이기 때문이다...목격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야 하는 존재들이고, 틀리기 쉬우며, 무의식적인, 부정적인 욕구들과 두려움들로 가득 찬 사람들이다.......겸손한 목격자는 상황적 지식에 몰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겸손한 목격자는 자신의 영향력, 권력 한계를 인식한다....이때 겸손은 자기 소모적인 낮춤이나 무능력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은 오히려 하나의 특정한 재주인데, 그것은 자신이 처한 위치와 목격 상황이 그 자체로 어떤 유산이자 복합적 구성물임을 인정하면서 이러한 위치성을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109

[ ] 여성주의의 지향이 소위 ‘정상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쟁취하는 데 머무르는 한, 여성주의적 성찰은 가부장제의 반담론에 불과하게 된다. 111

[3 ] 사이보그: 사이보그는 무엇이 자연이고 무엇이 비자연적 인공인지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사이보그는 동물과 기계의 합동적 혈연관계를 주장하고 본질적 정체성을 부인한다...111.. 정말 ‘여성‘으로 자연스럽게 묶일 그러한 본질과 범주가 존재하는가?..젠더, 인종, 계급같은 단일한 정체성은 가부장제, 모순된 사회 현실들이라는 끔찍한 역사적 경험에 의해 우리에게 강요된 성취다.....사이보그에게 묶임이 있다면 이주노동자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 아웃사이더라는 사실일 것이다...페미니스트들은 인간중심주의를 무너뜨리려 노력하고 이 붕괴를 포용해야 한다. 사이보그를 페미니즘의 중요한 성찰로 가져갈 때, 가부장제가 뿌리리박은 불평들을 무너뜨릴 수 있고, 이질적인 것들의 연결과 접합이라는 자산을 얻을 수 있다.....112,113

[ ] 새로운 생산: 이원론의 설화를 전복하고 시작되는 새로운 신화는 이제 타락 이전 순수의 시절을 다루지 않는다. 이것은 ‘새로운 생산‘을 여는 신화다...생성과 소멸로, 다신 생산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를 지향한다...사이보고는 부활을 원하지 않고, 총체성보다는 우리의 경계를 구성하고 다시 해체하는 친밀한 경험 속에서 재생을 희망한다...사이보그의 말은 이교도의 말이자, 이질적이고 다양한 각기 다른 언어로, 복수적으로 복합적으로 다중적으로 말하는 말들이다. 113

[4 ] 질병은 관계다.: 우리가 직면한 사실은 인간은 역사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며, 우리가 병들고 노쇠하는 존재, 생명의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죽음의 긍정이 절대적인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찬미한다는 의미에서의 긍정이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죽어야 할 운명이 아니라며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다.˝...고장은 임무를 성취하기 위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유대관계를 드러낸다....질병의 위협은 건강의 주요 구성요소들 중 하나다. 115 질병을 관계 맺음으로 이해했을 때, 면역체계는 몸속에서 중요한 세포 체계 간의 의사소통 공간으로 작동한다. 세포 간에도 서로를 인식하고 관계 맺는 소통이 이루어진다. 질병은 관계의 문제이고, 관계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맺어지느냐에 따라 서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117 질병과 싸운다라는 표현 자체의 정치 은유가 문제다.

볕뉘

0. 묵혀 두고 읽지 못한 책인데, 다시 눈에 들어온다. 다른 인물을 모두 읽거나 파고 있는분들이기도 한데, 이 분이 생소해서 펼쳐보았다. 출판 번역된 책은 네 다섯권 정도..그 책들을 살핀 것이다.

1. 건강이 생의 주요한 척도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삶은 죽지 않으려고 한다는 데 문제가 심각하다. 죽음과 질병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만이 예외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사회와 닮고, 각박한 세상의 복제품임을 증명해내고 있다. 질병에는 죽음을 스며들어 있다. 그런면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해내고 정상만을 탐하는 사회에 다른 시야와 시선을 가질 수 없다. 죽음과 체념을 통해 그 관계들을 다시 생각해내는 지혜를 통해 삶은 더 성숙해질 수 있다. 나도 병들고 나도 죽기 때문이다. 그 모든 관계들은 삶의 그물에서 출렁이고 서로 매듭으로 맺어지며 살아가야 한다. 서로의 마음과 몸의 시선과 시야 속에 녹아들어야 더 자유롭고 넓은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2. 질병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부족하였는데 이렇게 상기시켜주니 다행이다 싶다. 거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만남들의 출발점을 공유할 수 없음이 늘 안타까웠다.

3. 강박처럼 총체성에 잡혀 있었던 것은 아닌가?이원론과 이분법을 녹아내리게 하는 방편으로 좀더 깊은 읽기를 해보아야겠다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