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일기

[ ] [바흐친의 목소리들] 부버에 대해서는 ˝내 생각으로는 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다.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특히 대화라는 생각에 대하여˝라고 말한 바 있다. (1969-1971년 사이) 103 바흐친의 철학적 사유의 기본은 그리스도의 패러다임이다. 그리스도는 신성을 포기하고 일반적인 인간 조건을 수락했으며, 인간의 자의식을 심화시켰다. 그는 차디찬 인간의 자의식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자의식을 심화시켜, 이상적인 인간 조건의 전범이 되었다. 자아와 타자는 연결되어 있으며, 그 매개는 언어이다. 자아와 타자의 관계는 자아와 신의 관계를 반영한다. ...바흐친의 다성악적 소설 이론에서 설명이 불가능한 것은 소설 내의 인물의 절대적 자유가 어떻게 예술 작품의 통일성과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104

[ ]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자기의 욕망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105도스토옙스키의 재능 중의 하나는 인간이란 두껍고 끈적끈적하고 더러운 혼합물이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데 있다. 그가 그리고 있는 인간은 단순하고 명료하지가 않다. 108 인간의 사는 힘은 강하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죽음의 집의 기록] 96

[ ] 원초적 경험의 흔적은 책읽기의 흔적으로 전이되어, 해석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 개인적 흔적들을 완전히 지울 수 있다면 객관적인 책읽기가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거의 무망한 바람이다. 그것은 육체에서 삶을 지우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09

[ ] 천일야화나 불경은 현실은 환영이며 감각은 덧없는 것이라는 것을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다. 거기에 비해 노장은 욕심을 줄이고 자연의 움직임에 맞춰 살라고 권한다. 그 자연으 움직임이 노장에서는 세계의 움직임임에 비해, 논어에서는 인간의 움직임으로 변형되어 있다. ....날으는 양탄자와 달리 표주박 속에 갇힌 마신은 대개 세 가지 소원만을 들어준다. 소원은 한없이 많은데 셋뿐이라니! 그러나 그 셋은 만물을 낳은 모태로서의 삶이다. 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고, 이는 만물을 낳는다. 다시 말해 삶을 낳는다. 113

[ ] 정명환의 학문의 본질은 합리주의이다. 그가 비합리주의적인 모든 것에 날카로운 비난을 퍼붓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때로 그의 생활은 비합리주의적인 것으로 채색된다. 그의 폭음, 폭설...은 그런 면의 표현이다. 인간은 무의식중에 균형을 유지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114

[ ] 난 감잡고 있지/ 이 삶에 대해, 감잡고 있지,/뭔가 삐걱거리는 것을,// 잘 안 맞아 돌아가는 것을..... 김정란 114

[ ]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나는 책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책읽기 역시 전술적이다. 118

[ ]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내가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내 육체가 사유의 주체라는 생각에 더 깊이 사로잡힌다...이제는 내가 추상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사유했다는 것을 나 자신도 믿을 수가 없다. 내 사유의 주체는 내 육체이다. 126

[ ] 김훈 - 아버지에 대한 그의 애정/증오가 그의 글쓰기의 밑바닥에 있음을 알겠다. 그는 깊게 사랑하거나 짙게 미워한다...그의 글은 거침이 없다.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 같으나, 그 생각난 대로 씌어진 것들을 훌륭하게 이음새 없이 붙어 있다. 127

[ ] 가난한 사람들은 눈에 금방 띄는 환부이지만, 진짜 아픈 부분은 몸의 다른 곳이다. 그곳을 보지 못하는 한 총체성은 얻어지지 않는다. 사회라는 거대한 몸속의 가장 아픈 부분은 정치와 돈이 만나는 자리이다. 86

[ ] 우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그 작가는, 바다가 놀라운 것은 거기에 놀라운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좋은 친구가 놀라운 것은 거기에 놀라운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74

[ ] 낭만적 지식인은 조직력의 결여를 그 약점으로 갖고 있지만, 그것은 또한 장점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조직력이 없기 때문에 그는 싸움의 변두리로 밀려나지만, 그렇기 때문에 조직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드러낼 수가 있다. 42

[ ] 원이 사변 철학의, 즉 자기 자신에만 집착하는 사고의 상징이자 문양이라면, 타원은 감성적 철학, 즉 직관에 입각하는 사고의 상징이다 거기에는 머리와 가슴이라는 두 개의 중심점이 있으므로...28

볕뉘.

0 . 어젠 바람이 요란스럽게 불었다. 유독 대나무가 약한 듯 몸전체를 부르르 떨고, 제 몸의 가지를 부러뜨리기도 했다. 수은주가 뚝 떨어졌다. 이른 잠에 이른 새벽에 일어나 책을 집어들었다. 1987년 봄이다.

1. 어김없이 어제 읽던 책들이 저자가 고스란히 뒤를 이어간다. 내가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육체가 사유의 주체라는 말이 박힌다. 1987년의 관통하는 그의 책읽기는 어김없이 날카롭고 전율스럽기도 하다.

2. 어제는 감정 있습니까?의 수치심편을 읽었다. 그리고 현남오빠에게의 김이설작가의 갱년이 아니라 경년을 읽었고, 프레이야님의 고마워 영화의 유리정원, 아가씨, 캐롤, 시인의 의무를 읽어내려갔다.

3. 김수영 전집 시편을 읽고 있다. 삼분의 이정도를 읽고, 절반쯤은 같이 읽는 이들과 소회를 나누었다. 설움이라는 그의 시의 전편에 흐르는 정서와, 불쑥 불쑥 시간이란 결을 쓰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다시 만나는 김수영은 김일성만세를 외치기 이전이었지만, 작금의 풋풋한 시인들의 목소리를 많이 닮아 있다. 그래서 김수영시라고 밝히지 않으면 신인의 시라고 착각할 만한 시들도 여러 편이었다.

4. 글을 쓰는 일은 고독을 달래는 일이기도 하고, 보지못하는 나의 이미지를 어루만지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글쓰기는 외롭다. 나누고 공유하는 찰라의 만남이 없다면, 이렇게 30년, 50년의 시차를 두고 만나는 일은 내밀한 기록이지만 전혀 내밀하지 않다. 그 아둔하고 부끄럽기만 하던 1987년이 더 부끄럽게 여겨진다. 서러움을 더 깊게 새기지 못하고 버둥거린다. 수치심은 어쩌면 과거를 다시 품에 안고 미래로 다시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힘을 갖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들을 읽고, 그 사이 그 거울에 비친 나를 읽고...그들의 마음 사이를 조금이라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 그 틈이 고맙다. 그간 그 어려움을 표현하느라 애쓴 작가의 흔적들을 아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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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유령이 떠돌고 있다. ˝이것이다.˝와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라고 외친다. 어떤 세상인데, 왜 그럴 수 있냐고 되묻지 마라. 나는 아니라고 말하지도 마라. 밟아도 밟아도 되살아나는 것이니 그리 한 숨을 쉬지도 마라. ‘도‘와 ‘모‘만 필요한 윷판인가? 개, 걸, 윷의 목소리는 늘 잊히거나 전체와 관계없는 목소리로 소멸된다. 백색소음이었던 것이다. 백과 흑, 흑백, 검정과 하양을 한 번 경험해본 이를 회색이라고 해보자. 회색이란 사건을 경험한 이만이 흑과 백의 농도를 느끼고 있다.

경주지진에 이어 포항지진은 아직 진행중이다. 지진멀미에 아직도 몸은 여지없이 반응한다. 존 듀이는 국내에 십진법, 실용주의자로 잘못 알려진 것이 많은 것 같은데 사실은 전통적인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무척 애를 쓴 인물이다. ˝삶은 아무런 문제없이 물 흐르듯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경험은 역사적 사건과 유사한 것이다. 경험은 일정한 시간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사건이며, 경험 특유의 줄거리를 가진다. 따라서 언제나 경험은 시작과 과정과 끝이 있다.˝ 고 하면서 ˝경험이란 우리가 살아오면서 직접 겪었던 일을 회상하면서 ˝나는 그러한 (하나의) 경험을 한 적이 있어˝고 말할 때의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고 한다. 물론 여기서 경험은 정서나 감정의 고저를 안고 있다. 한발 떨어져서 지켜보는 관조의 의미만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멀미의 여파와 불안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사건을 보는 것이다. ˝사고를 통해 구분할 수 있는 다양한 성질은 실제 경험 속에서 각각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하나의 통합된 전체를 이룬다.˝ ˝하나의 경험에서 보면 사고한다고 하는 것은 경험에서 지각되는 관념들을 일정한 질성이 드러나도록 계속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존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 1, 89-93 그는 따로따로 떼어놓고 분석하는 사유가 맹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의 완결과 성숙으로 소소하고 미미한 것들의 역할을 포함해서 전체를 느낄 수 있도록 그것이 충만함으로서 경험을 유도하며, 새로운 접근법으로서 ‘하나의 경험‘을 그토록 강조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누고,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는 것이 그리 잘못이냐고 물을 수 있다. 남성과 여성으로, 이성과 감성을 나누듯이 육체와 영혼을 나누고, 자연과 사회를 갈라놓고 어른과 아이를 분별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나누고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알 수 없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과 사물을 인식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이것임을 유념해두고 가자. 이탈리아의 철학자인 랏자라또는 ˝우리가 가능성을 ‘기존 체제에 의해 고찰한다면, 여러 가능태의 배분은 기존의 양자택일 형식(남성/여성, 자본가/노동자, 자연/사회, 어른/아이, 정신/육체 등)에 의거하게 된다.˝ 고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욕망이나, 감정, 지각 역시 그 이항대립의 틀내에 있을 수 밖에 없음을 경고한다. 그러면서 ˝양자택일의 거부는 일종의 중단 혹은 무력화로 보이더라도 주어진 것의 저쪽에 주어지지 않는 것의 새로운 지평을 우리에게 여는 것이다.˝ 16-18 라고 말하면서 이항대립의 문법을 다시 고민할 것을 권면한다. ˝세계가 객체와 주체가 아니라 관계의 짜임새로부터 성립하고 있다. 서로 마주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여러 사물과 사건에 관해 함께 느끼고 서로 ‘영향 받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우정, 친애의 정, 슬픔은 전부 공감 관계의 표현이다.˝ 여러 경험과 사건들이 감정과 관계로 확산될 수 있고, 다른 선택지의 표현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자본주의 역시 끊임없는 발명과 삶의 세뇌를 반복하므로 다른 출발을 할 것을 주장한다. ˝기쁨과 슬픔의 존재론이야말로 발명과 반복의 존재론으로 자본주의에 대립하는 것이다.˝ 32, 150-153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사건의 정치

한편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라는 양자택일 못지 않게 ‘이것이다‘라는 것도 눈여겨 보아야할 지점이다. ‘이것이다‘라는 확신은 모든 문제를 자기 인식의 경계로 불러들여 합리화하는 것으로 한 몫한다. 모든 문제는 ‘남북을 갈라져서야‘, ‘자본/노동의 계급때문이야‘, ‘서울/지방으로 나눠져서야‘, ‘남/여란 가부장제때문이지‘, ‘그래 거봐 생태란 개념이 없어서잖아‘.....그렇게 갈라보는 시선은 끝없이 깊어지기만 한다. 긁어모으는 정보는 한계가 없다. 이것이라는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종북이나 좌파때문이라는 상황과 다르다고만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피셔-리히테가 삶과 예술, 몸과 정신, 관객과 배우의 경계를 허무는 예술-사건을 포괄하는 이론을 제시하면서 경계가 갖는 한계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사유해보는 작업은 참고할 만하다. ˝경계는 서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는 문지방이 된다...오히려 이것은 융통성 없는 대립의 극복에 관한 것이고, 역동적인 차이로 이끄는 것이다. 이분법적 개념쌍을 와해시키고, ‘이것 아니면 저것‘ 대신에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도‘라는 논리를 따른다.˝ 라고 한다. 이것이다라는 경계가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면서 풍부해질 수는 없을까? ˝ 450-452 ˝수행성의 미학은 모든 인간이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도‘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을 장려한다.˝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떨어져서 세상을 분석적으로만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놓치고 있는 것이 많지는 않은가? 456 이상 에리카 피셔 리히테, 수행성의 미학


마지막은 레비나스다. 제자를 자초한 우치다 타츠루는 ˝타자는 빈자, 이방인, 과부, 고아의 모습을 갖는 동시에 스승의 모습을 가지며, 그것이 나에게 자유를 수여하고, 나의 자유를 기초 지우는 것이다... 약함은 타자성 그 자체를 형용하고 있다. 사랑하는 일, 그것은 타자를 위해 마음 아파하는 일이며, 타자의 약함에 도움의 손을 내미는 일이다.˝ 우치다 타츠루, 사랑의 현상학 레비나스는 스승이 존재의 철학에 머문데 비해 숱한 죽음을 목도하며 삶만이 아니라 죽음의 무한을 철학에 들여왔다. 그런면에서 창조의 베르그송 철학도 존재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가졌다고 한다. ˝사랑의 대상은 우리의 외부에 있어, 나의 지배나 파악을 벗어나 있다. 애당초 내가 지배하고, 파악하고, 통제 가능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우리는 사랑할 요건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은 우리의 그런 이성적 판단과는 상관없이 우리를 휘어잡는다.˝ 264 -266 나의 시야에서, 마음에서 벗어나 있는 타자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다르게 읽고 다르게 만나는 책과 사랑받는 사람의 다양성의 철학으로 읽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조금 기존의 철학과 다른 것은 아닌가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보와 소통이 넘친다는 0과 1의 디지털시대에 어쩌면 우리를 놓치고 있는 것은 이런 낡은 사고습관에서 연유하는 것은 아닐까? 눈과 말, 시선과 감정의 느낌을 전유할 수 있는 아날로그의 사유나 사건 부재로부터 나오는 증상은 아닐까? 눈에 드는 물건과 음식처럼 사람도 느낌과 정서의 새로운 공유로서 사람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낯선 이를 만나도 환대할 수 있는가? 어쩌면 전도하기에 급급해 다른 이의 감정과 그 줄기에 붙은 많은 지혜와 사랑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들의 경계를 더 튼튼히 하고, 자신을 흔들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와 도뿐인 나만의 생각에서, 너로 이어지는 개 윷 걸의 시선으로 겨우 다가서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온전한 사유와 삶은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빠이거나 까인가? 아니면 꼰대인가? 생각이나 삶을 의탁한다는 것 자체가 선과 악, 좋고 나쁨에 기대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이것도, 저것도,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뿐만 아니라는 특이함이 있다. 그래서 겨우 전체를 향해가는 사유를 시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과 저것이 결코 보지 못하는 달의 이면을 같이 볼 수 있는 사유를 향해 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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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바흐친

1.

[ ]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식의 질문과 답변은 서로 꼬리를 물고 도는 영원한 순환을 면하지 못할 성싶다. 바흐친 사유의 핵심은 혼성과 혼류를 유심히 관찰하고 그것을 삶의 생성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혼성과 혼류, 그리고 생성은 상대주의나 불가지론 같은 게 아니며, 항상 특정한 맥락 속에서 가동되는 삶의 실재이다. 14

[ ] 바흐친이 구사하는 개념과 논리가 통상적인 아카데미의 규준 안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그의 사유는 이 모든 것들을 뒤섞고 재배치하며 ‘다른‘ 방식으로 전용함으로써 새로운 질문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요컨대 어떻게 사용하는가, 곧 용법만이 문제다. 사유의 스타일이 문제인 것이다. 472 그는 능수능란한 소피스트 철학자였다...이런 신비주의는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기독교적 신앙에 대항하고, 형이상학 및 모든 상식에 대한 도전을 뜻한다. 481 서구에서 널리 회자된 소위 ‘분열된 사상가‘의 이미지를 거절하고, 바흐친의 사유를 하나의 전체로서 조감하는 일이야말로 이후 연구의 생산적 향방을 결정짓는 관건이 된다는 것이다. ‘관여의 사회적 존재론‘.바흐친은 단자적인 문화의 성립 가능성을 애초부터 부정했다. 모든 역사적 문화적 현상들은 본래적으로 시공간적인, 후기의 용어를 빌린다면 ‘크로노토프‘적인 조건들에 의해 구성되는 산물인 까닭이다. 이로써 바흐친의 사유는 근대적 분과 체제를 극복하는 유일하고 강력한 돌파구로 상정된다. 484 구체적인 체계성, 자율적인 관여, 참여적 자율성 486 모든 사유는 맥락 의존적이다....자아 이외의 존재, 타자라는 조건을 인정하는 것. 유아론에 대항하는 바흐친의 사유틀이 바로 외부성이다. 항상 나의 바깥에-있음이 그것이다. 488 바위를 깎고 모래톱을 형성하는 물의 능력은 다양한 속도와 압력을 만들어 내는 환경의 차이, 그 조건에 달려 있다. 바흐친은 사유의 물길을 만드는 조건의 한 이름인 셈이다. 494 그에기 민중이 근대사회의 인민, 계급, 대중과는 다른 역사성 위에 놓여 있으며, 비근대적이며 반근대적인 힘으로서 표현되었던 것은 (역사 외부적이거나 비역사적인, 심지어 반역사적인 조망을 함축한다) 이러한 맥락이다. 이러한 역사 외부의 역사, 혹은 비역사나 반역사로서의 역사를 실재로서의 역사라 불러도 좋을까? 상징화를 비껴가는 힘으로서의 시간, 비공식적 시간의 흐름이자 민중적 삶이 지속되는 비공식적 영토가 바로 실재로서의 역사이고, 문화인 셈이다. 반문화를 문화와 역설적으로 일치시키고, 문화를 가동시키는 원천으로 보았던 이유도 그와 다르지 않다. 496 작품은 그 속에서 종종 자기 시대에서보다 더욱 강렬하고 충만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498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 실존의 조건이 진정 문제적이다 499 모든 이데올로기적 생산물은 그 자체가 현실의 일부분을 이룰뿐만 아니라, 또한 그러한 여타의 현상들과는 달리 이데올로기적 산물의 외부에 존재하는 현실을 반영하고 굴절시킨다. 500 현재하는 모든 문화적 양식은 특정한 시공간적 조건에서 발현되어 현실화된 잠재성이다....잠재성의 장을 바흐친은 ‘거대한 시간‘이라고 명명했다. 502

[ ] 동력학이라는, 힘의 운동에 대한 사유만이 이러한 주제들을 담아내고 촉지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506 창조적 이해는 아무것도 망각하지 않는다. 이해를 위해 중요한 것은 이해자가 창조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과 문화 속에 놓인 이해자의 외부성을 확보하는 일이다.....하나의 의미는 낯선 다른 의미와 마주치고 접촉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깊이를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이 사이에서 의미와 문화의 폐쇄성과 일면성을 극복하는 대화와 같은 것이 발생하는 것이다. 508 이상 민중과 그로테스트의 문화정치학 부제 미하일 바흐친과 생성의 사유에서

2.

[ ] 예술은 미학적인 목적을 위해서 감각적이거나 지적인 것을 인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리시즈]는 한 인간이 인간 세계를 관찰한 후 그것을 ‘인간적으로 처리‘한 결과물이다. 13 울프가 ‘수많은 인상들‘과 ‘반짝이는 후광‘을 인상주의로 묘사할 수 있었다면 조이스는 사소한 삶의 경험에서 의미를 포착하는 인식의 순간을 꼼꼼한 문체로 추적함으로써 세속성의 미학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 삶의 물리적 리듬을 억압하고 인간과 세계를 단일한 추상적 원리나 체계로 환원시키는 전체주의, 권위주의에 대한 그의 거부감과 맥을 같이 한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스티븐이 벗어나고자 하는 역사 국가 종교는 예술가로 하여금 현실 속의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며, ˝우리를 그토록 불행하게 만드는 엄청난 말˝을 통해 인간을 단일한 이데올로기로 묶어두려 한다. 20 초월적 지혜, 종교의 권위, 귀족 등 특정 사회 계층의 관점이 아닌, 남녀를 포함한 모든 계층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경험을 통해 세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인물에 대한 작가 시점의 우월성을 주장하지 않았다. 인물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대했으며 그들의 인간적 한계를 인정했던 것이다. 21

[ ] 현대의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면서 인간을 추상화, 규격화시키고 체계 속으로 흡수하여 단일한 시각과 목소리만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개별성을 가지는 존재로서 비록 추상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체계를 통해 사고한다 하더라도, 삶의 의미는 언제나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장인 혀실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인간의 삶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22 관찰자 자신은 자신의 이미지를 볼 수 없다....타인은 ‘나‘의 외부에 존재함으로써 ‘나‘에 대한 전체적 이미지를 조망하고 ‘나‘를 ‘완결‘시킨다....만남과 대화는 하나의 의미 있는 ‘사건‘이 된다. 그런데 이 ‘사건‘은 시공상의 독특함을 가지므로 결코 추상적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의 가치를 지닌다. 24

[ ] 바흐친의 세계는 미완의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대화와 ‘사건‘들의 공간이고, 그 어느 인간이나 ‘사건‘도 다른 것에 절대적 우위를 점할 수 없는, 그러므로 끊임없이 상호 침투와 수용이 이루어지는 ‘완결‘되지 않은 공간이며 미래와 변화에 대해 열려 있는 장소이다. 25 바흐친의 말은 자의식과 타의식이 만나는 장소이다. 인간의 구체적인 말 속에는 타인에 대한 의식, 즉 ‘곁눈질‘이 내포되어 있기 마련이며 따라서 말 소에 드러나는 타인의 존재는, 구체적인 인간의 말은 언제나 대화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26 바흐친이 자신의 언어 이론은 ˝초언어학˝이라 칭한 것은 그것이 구조주의 언어학이 다루지 못하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위치와 그 특수성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27 그의 말은 닫힌 체계와 단일한 원리만을 주장하는 독단주의를 거부하고 인간과 삶의 본질적 가치를 주장하는 살아 있는 외침이다. 27 이상 조이스와 바흐친 부제 스타일과 미학의 만남에서

3.

[ ] 고독하다는 것은 다 말하거나 드러내지 못한 나만의 무엇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드러내고 나누고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다면 고독이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인간 존재의 고독함이란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말해도 또 남는 자신만의 무엇이 존재하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잉여의 자아, 혹은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고독한 인간이야말로 타인과의 대화와 소통을 절실히 요구한다. 모든 것을 다 드러내고 그리하여 더 이상 남은 잉여의 자의식이 없는 인간에게(혹은 그렇게 믿는 자에게) 대화와 소통은 도대체가 불필요한 것이거나 형식적 장치, 혹은 수다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고독한 자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란 말 아닌가. 대화와 소통은 바로 그 고독한 인간에게 가장 절실할 것이다. 11 미하일 바흐친과 폴리포니야에서

볕뉘.

0. 절판이 된 것들이 있지만 읽어보니 어느 정도 독서욕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드문드문 읽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책들 사이 큰 문턱이 없는 듯싶다.

1. 최진석은 러시아의 최신 바흐친 연구동향을 이야기하면서 철학자나 사상가로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한다. 공감한다. 책방에서 책을 읽다가 말미 페미니즘??도서 신간들이 눈에 띄여서 구입하고 애슐리 마델의 [LGBT+첫걸음]이 손에 잡혀 읽었다.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이 아니라 성적/로맨틱/젠더 정체성으로 나뉘며 무수한 스펙트럼(색조견표)으로 나누는 성과 새로운 말들을 발견해낸 것이 들어왔다.

2. 어떻게 섞이고 어떻게 사유를 비틀어갈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러가지가 혼입되었다는 점. 생각들이 서로 소용돌이 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이 과격하게 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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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80년대 중반의 독서비평집을 읽고 있다. 머리맡에 두고 새벽 이른 잠이 깨거나 잠이 오지 않을 때 아껴보고 있다. 1986년이 지나고 1987년 겨울에 머무르고 있다. 날카로움에 대한 감탄보다는 그 당시 낯부끄러움이 외려 밀려올라와 곤혹스러웠다. 안목과 시선이 부럽기도 했지만, 그 날카로움의 끝은 비평이 무엇인가 잘 드러내어준다. 몽매의 시절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젊음은 늘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그래도 무언가를 하는 것이 대견하다고 할 것인가.....인물과 작품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갖게 만드는 것 같다.

2. 고야 - 지난 주 다큐멘터리 <고야>편을 보았다. 예술 영화라고 하루에 한 편만 상영하였다. 물론 관객이 혼자인 것 같아 내심 독차지하는구나 싶었는데 상영 몇분 전에 몇 분이 더 관람했다. 마침 책들을 읽고 있기도 하고, 그 이력도 살피고 있는 참이어서 더 강렬하게 다가온 듯하다. 화면은 천천히 그리고 그 이력을 온전하게 전달해주었고, 시선은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어 고마웠다. 울컥거리는 것을 뒤에 있던 관람객이 눈치챌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였다.

3. 감정 - 강준만의 책을 사두고 짬짬이 보고 있다. 이성이 아니라 감성, 그에 대한 사유의 진척인 셈이다. 이에 공감한 저작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연구논문의 결과물들을 보기 쉽게 옮겨놓고 있다. 조금 더 구체성이 있고 현실성이 있어 하나하나 챙겨보려 하고 있다. 언제, 어떻게 감정이 감성이 사람들을 옭죄는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 조금 더 치밀하고 풍부한 사유가 필요하다. 실망시키지는 않을 듯 싶다.

4. 비장소 - [장소와 장소성상실]이라는 책을 통해 ‘비장소‘의 개념을 얻었지만, 다시 심층 강도를 더하고 싶기도 하다. 술을 좋은 술과 나쁜 술로 구별하지 않고 좋은 술과 더 좋은 술로 구분하는 짓, 장소 또한 좋은 장소와 나쁜 장소를 나누는 것이 은연 중에 좋은 것만 헤아리게 한다는 점. 이것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온전히 전체를 읽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법의 착각인 셈이다. 좋은 장소와 더 좋은 장소로 사유하는 기초가 된다. 여백처럼 있는 비장소성이 오히려 우리의 안온함을 갖게하는 편안함의 힘이 있다는 것이다. 도시와 시골 역시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도시화율이 90%가 넘은지 오래된 우리 현실에서 귀촌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다 들여다볼 수 있다는 갑갑함은 그리 향수어린 것이 아니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건축의 경험]은 스피노자와 베르그송을 부분 부분 연상하게 한다. 기쁨과 슬픔의 요소로서 건축, 스칼라가 아니라 벡터로서 운동을 포함한 힘으로 다시 읽어보는 것은 새롭다. 건축만이 아니라 여러 분과학문도 다시 시선처리를 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볕뉘.

0. 한 소설가의 증정본 [컬트 포르노 탐정 소설의 장르적 우울과 클리셰]는 이동 중 가지고 다닌다. 뭔가 들킬 것 같아, 그 다음 관계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아껴두면서 책장을 넘기지 않고 있다.

1. 어제 서울갈 일이 있어 과천관 현대미술관에서 균열전을 관람하였다. 이 역시 이성이 아니라 감성, 아니 ‘몸‘에 관한 다시보기였다. ‘층과 사이‘의 판화전도 색다른 안목을 더할 수 있어서 좋았다.

2. 읽어야할 시인들이 늘었다. 읽을 책들로 풍요로운 년말이다. 녀석들이 눈을 치켜뜨고 있어 걱정이긴 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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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로 나눈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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