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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과 사건은 가상계의 속편으로 읽힐 수 있다. 우리는 경험의 강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각각의 지나가는 경험을 물들이며 그 순간에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독창적으로 표현하는 유일무이하고 환원불가능한 성질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가치, 경험이 우리 생명의 펼쳐짐을 위해 자신을 주장하게 되는 그 순간을 산다는 느낌의 가치를?....이 질문은 위의 책들이 공유하는 기획을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교차로에 위치시킨다...이 기획은 작동 중인 사유와 느낌으로의 통합적인 미학적-정치적 접근이다. 6

활동주의 철학과 사건발생적 예술

특수하게 도래하는 활동의 특이한 느낌은 경험의 발생이 갖는 직접적 차원들이다. 그것들은 과정의 이중적 직접성이다. 첫번째 차원은 사건의 발생이 가지는 관계적 차원이다...효과적으로 무엇이-벌어짐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느껴진다는 것, 즉 등록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활동은 그것이 이제 막 도래하고 있는 경험의 문지방에 자리하고 있을지라도 어떤 식으로 유효하며 느껴지는가 하는 것이 ㅇㅣ 책 전반에 걸친 중심적인 질문이다. 두 번째 차원은 사건의 발생이 갖는 질적 차원, 즉 그것이 이와같음이다...사건의 직접적 향유로서 등록된다....겹쳐짐과 중계 속에서 그것들은 동일한 ㅅㅏ건 속에서 자신들의 상호 포함을 공통-지각한다. 그것들은 자신들이 공통-발생안에서 서로에게 속함을 함께-느낀다. 16-17

활동주의 철학의 핵심에 자리하는 관계적-질적 이중성은 이분법적이 아니라 차이생성적이다. 그것은 활동에 있어 동시 발생하는 차이들에 관한 것이며, 그들 사이에서 일이 벌어진다. 19

관여된 차이생성은 이를테면 주체-대상의 이분법 위에 씌워질 수 없다..그것들은 대상-같기보다는 활력적이다. 그것은 대상도 주체도 아닌 사건이다. 20

세계는 대상들의 총합이 아니다. 세계를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은 이행으로서의 자연의 복합성에 대한 환원적 추상에 참여한 것이다. “사물들을 믿지 않는”것은 대상들이 과정의 파생물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며, 그것들의 출현은 추상적 활동의 구체적 양태들이 초래하는, 이행하는 결과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활동주의 철학은 주관주의적 철학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주체를 전제하지 않으며, 다만 “무엇인가”가 일어날 뿐이다. 주체의 지위가 ㅇㅏ니라 사건-활동으로 ㅅㅣ작한다. 21

우리는 자신이 회의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 의심의 여지 없이 하나의 실재적 ㅅㅏ건이다. 회의는 효과를 발휘했다. 우리는 막 결과적으로 회의하는 자가 된 것이다. 활동주의 철학은 전적으로 실재론적이다. 그것은 여하한, 그리고 모든 발효의 실재성을 긍정한다. 23

활동주의 철학은 과정에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사이의 이중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그것들을 부정하는 대신에 활동주의 철학은 그것들을 사건과 그 발효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다른 방식으로 긍정한다....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시간의 물음으로 만든다. 24 경험의 한 계기의 역동적 통일성은 그 “주관적 형상”이다. 사실 “특정한 주체”라는 것은 없다. 사건과 분리된 주체는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그저 자신의 발생함에 종속된 사건뿐이다. 사건 자체는 주관적 자기창조이다. 말하자면 일어나는 변화의 ㅇㅣ 특이한 자기향유의 지금-어떻게 이다. 25 그가 “아는” 것은 그것의 ㅅㅣ작으로, 이는 소급적으로 아는 것이다. 하나의 경험은 오직 그 절정에서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안다. 26

“순수한”이라는 것은 출현적 경험의 단순한-능동적인 최초의 차오름을 가리키는 제임스의 수식어이다. 27 그것은 차고 ㄴㅓㅁ친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혹은 잠세적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모든 경험이 그 시초를 발견하는 고ㅏ정적 풍부함의 당혹함이다.”그것은, 어떤 종류의 무엇이든 될 준비가 되어 있지만, ㅇㅏ직 어떤 명확한 무엇도 아닌 것이다.” 화이트헤드의용어로 이것은 “순수한 느낌”이다....관건은 만들어지고 있는 경험의 풍요로움에 ㄷㅐ한 존중에서 이를 한다는 사실이다. 28

과정의 관계적/참여적 측면은 마땅히 정치적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고 질적인/창조적으로-자기향유하는 측면은 미적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30
활동주의 철학을 위해 그것을 구사하는 또 다른 파생적 구별은 실용적인 것과 사변적인 것 사이의 것이다....실용적이라는 것은 그것은 구성의 동의어로서, 과정적 차이생성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공통-구성하는 형성적 힘들로서 전개되는가를 말한다...이러한 실용적 전개는 그 과정에서 무엇이 도래하게 될 것인지가, 그것이 정점에서 그 자체의 “최종적 특성화”dㅔ 도달할 때까지 어느 정도 열린 물음으로 남아있다는 의미에서 늘 사변적이다./이러한 ㅅㅏ고에 의해서, ㅇㅖ술이라는 분야는 창조적 구성을 독점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치라 불리는 영역은 실재적 존재의 변화를 독점하지 않는다. 31

활동주의 철학의 관심사는 존재론적이라기보다는 개체발생적이다. 32

이 책의 궁극적인 사변적-실용적 도박은, 이 열림이 승계된다고 할 때, 뒤따르는 그 경향의 이어짐들이 그 고유한 실천, 즉 글쓰기의 실천으로부터, 더욱 통상적인 의미의 다른 활동주의의 장들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과정의 맥박이 갖는 정치성이다. 33

가상은 “잠재적 실재성의 경험”을 달리 말한 것이다. 그것은 “잠재적인 것의 경험적 실재”라는 것이다. 잠재적인 것은 추상적인 사건 퍼텐셜이다. 가상은 잠재적인 것이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이다. 그것은 추상화를 체험한 잠재적인 것의 현존재이다....들뢰즈의 “잠재적”은 화이트헤드의 “순수퍼텐셜”에 상응한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순수 퍼텐셜의 활동은 개체 발생적 힘이 경험의 역동적인 확정적-형식을-취함에 협력할 때 그 경험의 계기로 “내입”하는 것이다. 잠세적 활동이 내입하는 것은 “활성화하고” 있는 것이다..36,37 놀라움을 세계의 생성에서 보편적인 구성하는 힘으로 만드는 것이다. 38 쥐의 진입과 물러섬.39

번개의 섬광. 섬광은 관계의 존재이다. 섬광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관계는 결과적으로 없었을 것이다. 활동주의 철학에서 존재하는 것은 느껴지는 것, 즉 유효하게 등록하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발효하는 것이다. 44

비관계의 관계라는 구절은 사건의 개념 속에서 그것을 조건화하는 요소들의 차이생성적 지위와 작은 절대자로서 그들의 순전한 발생의 역동적 통일을 하나로 모으는 방식이다. 그것은 “불균등한 군집에 의해 조건화된, 그리고 개별적-절대적 자기창조적인 것”과 동의어이다. 45

비연접적 관계의 개념은 비관계의 관계가 “참여”의 의미를 변화시킨다는 구절로 요약된다. 일견 참여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배가되었다. 그것은 일단 기여하는 요소들의 군집의 장화fielding로 도래한다. 47 번개의 섬광은 (인과에 따라) 야기된 것이라기보다는 조건화된 것이다.48 과정-사건, 변화, 새로움의 산출,생성-은 모두 지속을 시사한다. 그것들은 시간 개념들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언제나 공통-내포하고 있다. 그것들은 ㅅㅓ로에게 상호 포함된다. 50 쥐-선

활동주의 철학은 존재의 힘들의 생태학을 고려한다. 한가운데서 생성하기. 인간적인, 아니, 인간적이며 그 이상인 자기향유의, 창조적 변화의 일어남. 57

볕뉘.

0. 모임이란 상호작용의 의례사슬들, 그 가운데 정서적 에너지가 높은 방향으로 흐른다고 한다. 그런이유로 감정과 정서에 대한 역할 또는 의례에 대한 책들을 살펴보게 된 것 같다. (사람,장소,환대가 이런 이론들의 흐름을 훨씬 간략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든 것 같다.) 마사누스바움의 감정의 3부작, 주디스버틀러 감정이론 등등 주체의 문제가 관여된 이론들로 (여혐, 그 이후에서 비주체의 개념과 이론동향을 잘 묘사한 것으로 파악한다.) 굵직하게 살펴본 것 같다. 이러한 감정의 흐름들, 정서, 감성에 관한 것은 정동이론으로....또 다시 스피노자를 살펴보게 만들었고.....브라이언 마수미의 책까지 닿게 만들었다.

1. 가상계의 후속작인 이 책 또한 낯선 용어와 읽기 어려운 난해함이 많다. 그나마 비교적 간결하고 핵심이 들어있는 것은 이 책 서론이 아닌가 한다. 밑줄을 남겨둔다. 그리고 나머지 가상과 사건/가상계의 밑줄 흔적을 다 올릴 마음이다.

2. 비주체, 비철학, 세계는 없다, 이분법, 어쩌면 우리는 바닥을 같이 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 허망함에서 우리의 일상과 모임, 사건에 연루된 느낌을 어떻게 보존하고 번지는지는 다시 짚어봐야할 것이다.

3. 어느 날 주체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긴 후, 나는 인생의 의미를 찾고, 그림을 그리고, 내가 하고싶은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그 이후의 나만의 역사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4. 이는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니다. ˝나˝는 없고 ˝너˝도 없다. 그 사이 충만한 느낌들과 사건들....저자는 과정의 특이성을 말한다. 이분법이 아니라 얼마나 달라지는가...물론 깨닫고 앎을 추수리는 것은 이후의 일이다. 황당과 당황 사이......지성은 서로 나누게 쟁점화함으로써 더 나아지는 것이리라. 같이 다르게 읽기, 다르게 나누기가 절실한 시절이다. 정치가 미래를 보증한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우리의 삶은 얼마나 미학-정치적인가? 따져보자....서로...감정이 얼마가 강한 탄력성을 갖고 있는지 자유한국당과 친박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그들이 이 이론에 합당한 행위를 하며 자기 몫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추악-정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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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반드시 말을 통해 의사를 표현하며, 우리의 사유는 대부분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달리 말해서, 언어는 물질적 대상들 사이에서와 같은 선명하고도 명확한 구별, 즉 불연속성을 우리의 관념들 사이에도 확립할 것을 요구한다./혹시 비연장적인 것을 연장적인 것으로, 질을 양으로 부당하게 번역함으로서 답 속에서도 여전히 모순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아닌가/형이상학과 심리학의 공통적인 ‘자유‘의 문제도 논쟁들의 전제속에 지속과 연장성, 계기와 동시성, 질과 양 사이의 혼동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혼동이 일단 걷히기만 하면, 아마도 반론과 정의들...어쩌면 자유의 문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서문에서

제1장 심리상태들의 강도에 관하여

영혼의 어떤 상태들은 옳든 그르든 자기 충족적으로 보인다. 깊은 슬픔과 기쁨, 숙고한 열정, 미적 감동이 그러하다. 25

무한한 가능성들로 가득차 있기에, 미래에 대한 생각은 결국 미래 자체보다도 더 풍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소유보다는 희망에서, 현실보다는 꿈에서 더 많은 매력을 발견한다. 28

기쁨

열정과 마찬가지로 내적인 기쁨은 우선 마음의 한 구석을 차지했다가 점차적으로 그 자리를 넓혀가는 고립된 심리적 사실이 아니다. 가장 낮은 단계에서 그것은 우리 의식의 상태들이 미래로 방향을 잡는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다음에는 마치 그러한 인력이 심리상태들의 무게를 감소시킨 것처럼, 생각과 감각들이 더 빨리 이어지며, 우리의 동작들은 더 이상 동일한 노력을 지불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극도의 기븜에서는 우리의 지각과 기억들이 정의할 수 없는 어떤 성질을 띠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열기나 빛과도 비교될 수 있는 그리고 너무도 새로워서 몇몇 순간에는 우리 자신으로 되돌아와 존재의 경이로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그러한 성질이다. 28

우아함

우아함의 느낌 – 용이한 동작이란 하나가 다른 것을 준비하는 동작이므로, 종국에 ㄱㅏ서는 스스로를 예견케 하는 동작, 즉 앞으로 올 자세가 지시되어 있고, 그것도 미리 형성되어 있는 것처럼 되어 있는 현재의 자세에서 더 고급의 편안함을 발견하게 된다./움직임의 용이함을 지각하는 것은 이를테면 시간의 진행을 멈추게 하여 미래를 현재에 잡아두는 즐거움과 합쳐지게 된다./율동의 규칙성은 그와 우리 ㅅㅏ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의사소통을 확립하고, 박자의 정기적인 반복은 우리가 그 상상적 꼭두각시를 움직이게 할, 그만큼의 보이지 않는 실과 같다./우아함이란 느낌 속에는 일종의 신체적 공감이 들어가 있으며, 그러한 공감의 매력을 분석해 보면, 당신이 그것을 좋아하는 것 자체가, 신체적 공감이 미묘하게 그 관념을 암시하고 있는 정신적 공감과의 인접성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30-31

미적 감정의 점증하는 강도는 여기서 그만큼의 다양한 감정들로 해소되고, 그 다양한 감정들 각각은 이미 그에 앞선 것에 의해 예고되어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볼 수 있게 되지만, 그런 다음에는 그 앞선 것을 완전히 지워버린다. 바로 그러한 질적 진전을 우리는 크기의 변화라는 방향으로 해석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단순한 것을 좋아하고, 우리의 언어가 심리적 분석의 미묘함을 번역하기는 곤란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33

예술, 시

예술의 목적은, 우리 인격의 활동적인 또는 오히려 저항적인 힘을 잠재우고, 그럼으로써 우리를 완벽한 순종의 상태로 이끌어서, 그 상태에서 작가가 우리에게 암시하는 생각을 깨닫게 하며, 표현된 느낌과 공감하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리라고 생각한다./우리에게 음악의 소리가 자연의 소리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면, 그것은 자연이 느낌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표현해 버리는 데 불과한 반면, 음악은 그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시의 매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시인이란 그 안에서 느낌이 심상들로, 심상 자체는 또 운율에 복종하면서 그것을 번역할 언어들로 발전되어 가는, 그런 사람이다...규칙적인 심상의 운율에 따라 우리의 영혼은 아기가 요람에서 흔들리듯 잠재워져 마치 꿈 속에서 처럼 스스로를 잊어버림으로써, ㅅㅣ인과 함께 생각하고 보게 된다. 34

여러 분석으로부터 아름다움이라는 느낌은 특별한 느낌이 아니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느낌이 유발되지 않고 암시되기만 ㅎㅏ면 미적 성격을 띨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예술 작품의 ㄱㅏ치는 그 감정 ㅈㅏ체의 풍부함에 의해 측정된다. 다른 말로 하면, 세기의 정도와 더불어 본능적으로 우리는 깊이, 또는 높이의 정도를 구별한다....감동은 거기에 스며드는 수많은 감각과 감정과 생각들로 가득차 있다....각각의 감동을 그 복잡한 본래의 상태에서 감싸 안으려면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의 삶을 다시 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36, 37

연민

연민의 본질은 따라서 겸손해야 할 필요성이며, 낮아지려는 열망이다. 그런 고통스러운 열망은 게다가 매력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의 자기 평가에서 우리를 높여주고, 우리의 사유가 거기서부터 순간적으로 멀어지는 (바로) 그 감각적 이득보다 우리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ㅎㅐ주기 때문이다. 연민의 증가하는 강도는 따라서 질적인 진전, 즉 혐오에서 두려움으로, 두려움에서 공감으로 그리고 공감 자체에서 겸손함으로의 이행에서 성립한다. 40

크기의 관점에서 신체적 현상과 의식의 상태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 수 있는지 탐구하여야 한다./증가하는 강도의 고통을 점점 커져가는 음계의 한 음에 비교하기보다는 점점 더 많은 종류의 악기 소리가 들려오는 교향악에 비교하는 것이 적절하다. 의식은 특징적인 감각 ㅎㅏㄴ ㄱㅏ운데서 근육수축이나 모든 종류의 신체 기관들의 움직임을 구분해낼 것이다. 그러한 요소 심리상태들의 협주는 한 유기체 앞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상황에 대면한 그 유기체의 새로운 요구를 표현한다....고통이 약할수록 더 정확한 장소에 아픔을 지정한다. 즉 고통이 커지면, 온몸이 아프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통은 커지는 만큼 더멀리 퍼진다...고통의 강도야말로 의식이 보는 앞에서 그 고통에 동조하고 반응하는 신체 부분들의 수와 범위라고 정의해야 한다고 믿는다. 56

쾌락

쾌락의 매력은 자발적으로 시작된 운동과 다른 것이 아니며, 그것을 맛보는 동안의 쾌락의 세기 ㅈㅏ체는 모든 다른 감각을 거부하고 거기에 빠져 버리는 신체의 무기력에 불과하다....어떤 매력에 사로잡힌 사ㅇ태는 거기서 ㅎㅔ쳐 나오려 해도 ㄴㅏ올 수 없는, 즉 몸을 뺄 수 없는 옴쭉달싹할 수 없음, 즉 무기력의 상태이다...그러한 무기력이 없다면 쾌락은 여전히 어떤 상태이나 더 이상 크기는 아닐 것이다. 59

이상을 요약하면 강도의 개념이 외부 원인을 표상하는 의식의 상태를 연구하느냐, 그 자체로서 충족적인 상태를 연구하느냐에 따라 이중적으로 나타난다./ 강도라는 말의 두 의미는 매우 자주 상호침투하는데, 그것은 어떤 감정이나 노력이 포함하고 있는 더 단순한 사실들이 일반적으로 표상적이며, 대부분의 표상적 상태들은 동시에 정조적이기도 ㅎㅏ여 그들 자체가 많은 수의 기본적 심리상태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도의 관념은 따라서 두 흐름의 접합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ㅎㅏ나는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외연적 크기의 관념을 가져오며, 다른 ㅎㅏ나는 의식의 심연에서 내적인 다수성의 상을 찾으러 가서 표면으로 가지고 나오게 한다. 94

볕뉘.

0. 25년전 들른 책방에 들러, 북핑을 하다가 손에 들렸다. 저자별로 전시가 되어있어 궁금증이 돋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선뜻 손이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1.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의 베르그손 부분이 다시 생각나 들추어보았다. 다시 보아도 정리가 잘 되었다 싶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공간화하여 해석하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 순수한 시간을 공간으로 측정될수도 분절되지도 않는다. 오로지 직관에 의해 파악된다. 운동은 제논의 토끼와 거북이의 논리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이다. 시간적인 사건이다. 심리상태의 강도나 크기를 재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생명은 다른 경로를 산다.

2. 만남에서 느낌이 생겨나면 시간은 싹트고 자랄 수 있다. 느낌이 생겨나는 순간은 사건이 된다. 이야기는 탄생한 느낌을 보존하면서 시간을 연장해나간다.

3. 만물은 운동한다. 철학에 불을 질러 폐기시켜 땅에 묻어버린다. 주체를 죽이고,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백지상태로 돌려놓는다고 하자. 세간에는 철학의 아인슈타인이라고....뉴턴의 고전물리학이 아니라 양자역학이라고....정지된 것이 아니라 다 움직이는 것이라고....그래도 남겨놓아야 될 사상가 가운데 베르그손을 든다. 그렇게 하자. 상황, 운동, 느낌, 사건.....이어읽기 가운데 하나. 잠깐 한숨 돌리고 갈 필요가 있다. 그의 감정에 대한 수사가 얼마나 날렵하고 적확한가. 미려하기 그지없다. 아까운 책이다. 읽히지 않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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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4-17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물질과 기억> 주문했는데 반갑네요^^ 여울님과 읽고 싶은 책이 자주 겹쳐 재밌습니다.

여울 2017-04-17 19:29   좋아요 1 | URL
ㅎㅎ 이 책도 다시 봐야하는데요. 반가워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감은 탐색에서 길어 올리는 발견이다. 246

1. 존재하는 모든 특성을 가지는 하나의 대상이 있을까?
2. 대상은 남김없이 모든 다른 대상과 구분될까?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도, 사실들의 총체도 아니다. 오히려 세계는 존재하는 모든 영역이 등장하는 영역이다. 존재하는 모든 영역은 세계에 속한다. 그러니까 세계는 마르틴 하이데거가 정확히 표현했듯 <모든 영역의 영역>이다. 77

칸트와 하버마스는 세계란 일종의 <규제적 이념>이라고 말한다. 이는 곧 우리가 일단 세계 전체를 전제하고,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을 세계 전체의 단면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모순이 없는 통일성을 갖춘 세계관을 보장받을 수 있다...하버마스는 이런 세계 개념을 항상 의사소통의 실천에 의해 실현되는 세계 인식과 결부시켰다. 79

철학도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발전과 퇴보를 거듭한다. 철학이 이룩한 위대한 발전은 세계개념을 보다 더 낫게 개선해 낸 것이다. 82

모두의 질문에 동의하지 않으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밖에 없다. 여전히 세계는 존재하는가? 당신에게 89

존재하다라는 동사는 발생하다, 돌출하다라는 뜻이다. 글자 그대로 옮겨본다면 비집고 나옴, 두드러져 나옴, 혹은 우뚝섬이라고 할 수 있다. 92/단 하나의 유일한 실체, 모든 특성을 가지는 슈퍼 대상이 있다는 주장은 틀렸다. 일원론은 슈퍼 대상이라는 게 앞뒤가 맞지 않은 개념인 탓에 필연적으로 잘못이다/일원론(스피노자)이 틀렸으며, 이원론(데카르트)은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 바로 그래서 단순히 맞지 않는 것을 지워나가는 배제 논리를 이용하더라도 남는 것은 다원론(라이프니츠)뿐이다. 100,101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미장에서 나타난다. 존재는 의미장의 속성이며, 곧 의미장 안에서 나타나는 무엇이다. 115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어떤 단 하나의 대상을 다른 모든 대상과 격리한다면 그 대상은 당장 존재하기를 멈춘다/완전하게 격리된 대상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상은 반드시 의미장 안에서 나타나야만 한다. 그렇다면 의미장 역시 홀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132, 133

존재는 언제나 어떤 특수한 의미장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문제는 그게 어떤 의미장이냐 하는 것이며, 바로 ㅇㅕ기서 우리는 흔히 착각을 일으킨다. 146

과학적 세계관은 인간을 우주에 있는 일종의 돼지라고 가정한다. 존재를 감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영역과 혼동해, 인간이 가지는 감각적 욕구로만 광활한 우주를 바라본다. 인간을 우주의 돼지처럼 바라보면 모든게 무의미하게만 여겨진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울 게 없다./현실의삶과 거리를 두면서 우리는 이미 이론적으로 많은 예단을 하고 만다....우리는 끊임없이 조작된 허블 망원경 ㅅㅏ진과 최신의 입자 모델로 세뇌당한다....오늘날에는 과학자와 전문가가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신의 입자와 힉스 장뿐이며, 우리 인간은 우주의 돼지, 근본적으로 번식과 먹이에만 관심을 가지는 돼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목청을 높인다. 149, 150

형ㅇㅣ상학으로 끌리는 충동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런 충동이야말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154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 무한한 변형으로 무한하게 늘어나는 의미장들만 존재한다는 통찰은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떤 특정한 세계관에 사로잡히지 않고 인간의 자기 인식을 다룰 수 있게 허락해 준다. 모든 세계관은 틀렸다. 세계관은 하나의 세계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전제로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156

자연과학의 세계관

과학은 우리에게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운 태도를 선물하며,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을 선사한다. 과학은 그 방법을 체득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검증할 수 있고 수긍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지식을 이끌어 낸다. 165

과학적 세계관이 좌초하는 첫 번째 이유는 <존재론적>이다. 존재론은 과학적 세계관의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증명해 준다. 그러니까 잘못된 전제로부터 이끌어 낸 결론은 잘못이거나, 적어도 학문적인 근거를 갖지 못한다. 두 번째 이유는 <인식론적>이다. <그 어디도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가질 수 없다. 167

자연, 곧 우주만 존재한다는 이런 주장은 자연주의라 불린다. 그러니까 존재론이 자연 과학의 영역으로 분류하는 것만 존재할 뿐, 다른 모든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자연주의다. 168

근대 초의 철학은 그때부터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실제로 있는 세계와 허구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일이었다. 현실의 세계, 우주는 곧 우리의 상상력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어야만 했다. 그 결과 자연주의는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171

새로운 무신론 역시 하나의 통일적인 전체를 상정하고 이루어지는 주장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굽어볼 수 있어야만 가능한 주장이다. 이렇게 보았다는 전체, 곧 그 자체로서의 세계나 현실은 시공간의 거대한 통과 같다....물질적 일원론은 모든 일원론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슈퍼 대상, 곧 세계를 상정함으로써 무너지고 만다. 174

유명론..본래 모든 말(馬)을 포섭하는 말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은 없다. 단지 무수히 많은 개별적인 말들만 존재한다. 우리는 편의상 단순화해서 그걸 <<말>>이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이렇게 강변하는 게 유명론이다./리얼리즘은 우리가 쓰는 개념(사랑, 국가라는 추상개념도 포함)이 ㅅㅏ실을 단순화하는 공허한 ㅇㅣ름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우리가 ㄱㅐ념으로 ㄴㅏ타내는 것이야말로 구조다./새로운 리얼리즘은 이중의 논제, 곧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물과 사실 그 자체를 인식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과 ㅅㅏ실 그 ㅈㅏ체가 하나의 유일한 ㄷㅐ상 영역에만 속하는 게 아니라는 두 개의 논제를 내세운다. 물질로 이루어진 대상만 존재하는 게 ㅇㅏ니다. 예를 들어 논리 법칙이나 인간의 지식 역시 우리는 물질 ㄷㅐ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알아볼 수 있다. 183-185


새로운 리얼리즘은 주관적 진리, 그러니까 특정 레지스트리를 쓰는 인간이라는 주관의 진리 혹은 보다 더 일반적인 동물이라는 주관의 진리가 존재함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주관적이라고 해서 모두 자의적 환상이라거나, 전부 틀렸다고 주장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까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음매를 넘나들며 얼마든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 202

과학적 세계관은 특정 인간관을 전제한다. 이 인간관은 과학자를 철두철미하게 합리적 존재로 이상화한다. 209

인물이나 정치 문제 혹은 예술 작품의 이해는 생물학이나 수학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완전히 자의적이거나 단순한 취향 문제도 아니다. 과학적 세계관은 우주, 곧 자연 과학의 대상 영역이라는 특권적인 사실 구조만 중시함으로써 인간 실존의 의미는 건너뛰어 버리는 잘못을 저지른다. 213

과학적 세계관은 합리성의 왜곡된 인식에 기초한다. 과학적 세계관은 이해를 ㅇㅟ한 우리의 모든 노력에서 가설을 세우고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거나 폐기하는 방법만 인정한다. 나름 의미를 ㄱㅏ지기는 하지만,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는 없다....가다머는 예술 작품 ㅎㅐ석과 인간 세계의 ㅇㅣ해는 우리의 자연 이해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임을 강조한다. 214, 215

전체로서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은 우리가 현실을 보다 더 바로 보고,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돕는다. 인간은 정신으로 활동하는 존재다. 정신을 무시하고 우주만 관찰한다면, 당연히 인간의 모든 의미는 사라진다. 217

종교의 의미

전체라는 것을 흡사 자연수와 같다고 하고, 최대의 자연수를 찾는다고 가정해보자/최대의 자연수와 똑같이 전체는 존재할 수 없다. 223

베버가 말한 세계의 탈마법화는 사회 질서가 합리적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현상이다...베버는 탈마법화를 반어적으로 <우리시대의 운명>이라고 표현했다. 225 니클라스 루만은 이 유산을 <합리성 연속체>라 부른다. 이 말이 품은 뜻은 전체로서의 세계를 조망하며 세계의 질서 원칙으로 떠받드는 합리성이 단 하나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ㄱㅏ정이다......물신 숭배는 모든 대상에 이 거대한 전체를 투사함으로써 성립한다. 이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야 할 책임을 사회로 떠넘기는 방임이 생겨난다. 227 라캉은 인간은 항상 자신의 의견을 <그 아래에 두며> 일종의 소속감을 느낄 주체를 찾는다..그는 이런 사정을 ~를 안다고 가정할이라는 말로 표현한다....사회 질서는 언제나 이 질서를 잘 알고 ㅈl켜 주는 주체를 전제로 한다. 228, 229 우리는 이런 <위대한 타자>에 의지하는 믿음을 빅브라더 신앙에 빗댈 수 있다. 230

과학을 향한 물신 숭배는 질서를 갈망하는 우리의 소원을 전혀 존재하지 않는 전문가 위원회에 떠넘기도록 조장할 뿐이다. 전문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인생인지 결정을 내려 달라고 매달리는 일은 우상숭배와 다르지 않다. 230 모든 것을 지배하고 질서 ㅈㅣ우는 ㅅㅔ계 원칙을 갈망하는 믿음이 물신 숭배다. 231

슐ㄹㅏ이어마허가 종교에 관하여 하는 책에서 종교 개념을 정의했듯, 무한함을 바라보는 우리의 취향과 의미의 표현이다. 종교란 우주를 대상으로 가지며 인간이 우주와 맺는 관게라고 보았다...그러나 우주만 무한한 게 아니라, 우주를 마주하는 우리의 태도도 무한하다고 강조한다. 231 서로 다른 의견들이 어깨를 ㄴㅏ란히 하고 똑같이 소중한 것으로 보호받아야 할 개별적 관점이 존재한다는 통찰이야말고 실제로 종교 역사가 일궈 낸 위대한 성과 가운데 하나다. 233


과학적 세계관은 무수히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있짇 않은 전체에 의미를 불어넣으려는 또 하나의 시도가 과학적 세계관이다. 233 종교는 ㅎㅏ나의 ㅇㅣ야기를 들려주며, 인간을 포함하는 동시에 인간을 훌쩍 넘어서는 사건의 질서를 알아내려 진력했다. 그러니까 종교는 본래 인간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나아간 의미의 탐색이라고 말할 수 있다./인간의 정신적 진화는..어떤 것도 이미 결정된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활짝 열린 의미다. 245


인생경험은 모두 나 자신을 찾아가는 ㅇㅕ정이다. 그리고 정확히 이것이 정신의 이해 과정, 곧 자아와의 만남이라는 의미의 이해과정이다/실제 존재하는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종교다. 이렇게 본다면 종교는 일종의 의미 탐색이라고 하는 말이 전적으로 옳다. 종교는 최대한의 간극을 뛰어넘어 신에게 나아갔다가 ㄷㅏ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에서 비롯한다. 250, 251 종교는 전체라는 에움길을 통해 빙 돌아 오는 고난의 여정 끝에, 자아를 이해할 때 터져 ㄴㅏ오는 감격의 표현이다. 252

동물과 달리 사람은 정신을 갖는데 정신은 인간이 ㅈㅏ기 자신을 인격체로 끌어올리는 정황이다. 다시 말해서 자아를 탐색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과정에서 정신은 영글어 간다/정신이란 우리가 자기 자신을 다루는 ㅌㅐ도라고 썼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는 방식이 곧 우리 정신을 나타낸다./정신이 ㅈㅏ기자신을 바라보는 자기 ㅇㅣ해라는 점이다. 또 자신을 변화시키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발견이다. 우리는 변화할 수 있다. 255,257 무한함에 빠져 자신을 잃는 게 아닐까 두려워하지 않을 때 정신의 길은 열린다./기독교가 말하는 죄는 어떤 악행이나 음흉한 생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대하는 ㅌㅐ도, 곧 자신의 정신을 지워 버리려는 태도다. 258 종교의 본질은 인간이며, 의미 맥락 안에서 인간이 서야 할 자리를 찾아주려는 안간힘이다. 264

예술의 의미

상상은 정확히 현실과 혼동될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다...상상을 포기한다는 것은 현실과의 접촉을 포기한다는 걸 의미한다. 272 예술의 의미는 우리에게 의미의 양면성 혹은 다의성을 친숙하게 만들어 준다. 275 시는 잘 정리된 수학 명제와 똑같이 진리 능력을 가진다. 중요한 차이는 시가 지닌 특성에서 나온다. 시는 언제나 그 자체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284

프로이트는 농담이 어떤 단어가 가진 심리적 강세를 전이시켜 줌으로써 무의식의 연상을 허락해 주어 우리가 웃어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 심리적 억압에 시달리는 사람은 농담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을 극복할 수 있다는 진단이다. 287

말레비치 작품, 흰 바탕 위에 검은 사각형이라는 작품을 감상할 때 세계, 곧 우리가 그 안에서 움직이는 세계는 예술 작품이 앞으로 나오는 배경이 됨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291 배경은 배경으로만 남음을 의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 293

다른 것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살아가야 한다는 정황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포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극복하는 첫걸음이다. 294

의미장 존재론은 인간의 관점을 존재론적 사실로서 이해한다.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 안에 던져져 있고, 그 사이에서 연결 통로를 만드는 무한하게 많은 의미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관점은 인간 관점 그 이상의 것, 곧 존재론적 사실이다. 298

무한함을 향한 감각의 긴 여행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은 감각을 통해 얻어 낸 지식이다. 감각은 우리 몸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저 바깥>에, 그러니까 생쥐나 사과나무처럼 <현실 안>에 있다./모든 다른 감각과 마찬가지로 생각감각을 더욱 갈고 닦으며 비판적으로 키워 나가야 하지 않을가. 318

볕뉘

0. 우연히 눈에 들어온 책이다. 이어 읽기의 한 권으로 챙겨보다.

1. 계몽, 과학, 예술, 영화, 종교 모두 자신이 원하는 신과 환원할 무엇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있다고 여기는 것과 없다고 여기는 것 가운데 무엇이 더 나은가? 이 분야에 공통사항으로 사람, 인간을 공약수로 두었다. 인간을 위한 과학이고 세계관일까? 종교도, 감각도, 상상도....어쩌면 우리는 무엇에 얽매이거나 발아래 두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사유하는 근저를 다시 생각해보면 어떨까?

2. 저자의 사유는 뭔가 있다고 사유하는 전제를 의심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얽매이지 않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만들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3. 반지성주의라는 책의 한귀퉁이 말이 생각난다. 마찰력을 크게 하기 위해서 그것에 작용하는 모든 힘들이 거스르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지금의 세상이 다양해지려면 마찰력이 커져야 한다. 다른 것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살아가야 한다. 다르게 다르게......그러기 위한 최소한의 선결조건.....당신의 뼛 속 깊이 지긋지긋한 X환원론이다. 차근차근 귀기울여야 할 부분들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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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을 향한 존재(태도)”도 영웅주의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삶을 다 산 것으로서의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것은 나약한 기분(분위기)에 젖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영웅적 태도는 죽음을 마주보고 거기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 을 향해 존재할 때 굳센 “내가 있음(나의 존재)”이 싹틉니다. “그때그때마다 ㄴㅐ가 죽으면서만 경험하는 죽음과 함께 나에게 닥친 것은 나의 가장 고유한 존재, 즉 매 순간 나의 존재가능성입니다. 나는 ㅁㅐ 순간 나의 현존재(삶)dㅢ ‘마지막‘에 있을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ㄱㅏ능성은 나의 가장 고유한 ‘내가 있음‘의 가능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ㄴㅏ는 나의 ㄱㅏ장 고유한 나(자아)로 있을 것입니다. 144, 145

영웅주의와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태연함은 유한성을 거슬러 일하지(슬퍼하지) 않고, 마치 유한성과 보조를 맞추는 것 같습니다. 147

‘삶‘과 ‘죽음‘을 분리하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살고, 전체적으로 죽습니다. 판단 작용에도 들어 있는 구분에서 걱정이 생깁니다./죽음이 죽지 않은 한, 다시 말해서 죽음과 삶이 ㄷㅐ조를 이루는 한, 산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있습니다. 죽음을 죽이고 나서야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살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삶과 다른 것으로 응시하지 않는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삽니다. 155,156

친절

주인도 손님도 아닙니다. 주인이자 손님인 것이 분명합니다./헤겔의 투쟁에서는 각자가 ㅈㅏ기를 비우기보다는 절대적 자아로 정립하기를 ㅅㅣ도합니다./내가 소유한 것에서 한 부분을 조금이라도 의문시하는 것은 나 자신의 전체에 해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ㄴㅏ의 부분들 가운데 하나를 ㅊㅣㅁ해하는 것은 무한한 침해입니다. 그런 침해는 절대적이고, 나의 전체와 나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분으로 인한 ㄷㅐ립은 모두 전체가 걸린 투쟁입니다. 162, 163 성스러운 바보 165 그 친절은 온화하고, 관찰하고(사려깊고), 태연합니다...반면 니체의 귀족적 친절은 “창문”의 친절입니다. 창문 뒤에는 내면성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 내면성은 창문이 달린 단자의 친절입니다. 이런 친절은 다른 곳에서 산책하는 온화한 관찰자의 시선의 고귀함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ㅌㅐ고의 치ㄴ절은 ‘선한‘ 것보다 ㄷㅓ 오래되었고, 모든 도덕법칙보다 ㄷㅓ 오래되었습니다.....모든 법과 규범을 넘어서 자유롭게 놀이를 하는 삶은 설명될 수 없습니다. 167, 168

친절의 공감은 심리적 동일시를 매개로 함께 슬퍼하거나 ㄱㅣ뻐할 자아를 모릅니다. 모든 ‘감정‘이 ‘주체‘에 묶여 있다고 한다면, 공감은 ‘감정‘이 아닐 것입니다. 공감은 ‘주관적‘ 감정도 아니고, ‘경향‘도 ㅇㅏ닙니다. 공감은 나의 감정이 ㅇㅏ닙니다. 아무도 느끼지 않습니다. (무아가 느낍니다) 공감은 ㅅㅏ람들에게 일어납니다. 공감은 친절합니다. / 친절한 함께함(공)은 자아와 다른 ㅅㅏ람 간의 구분이 없는 비어 있음 덕분에 있습니다. 그런 함께함은 자기가 공감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할 자아를 ㅎㅓ용하지 않습니다....이는 증오와 사랑으로부터도 자유롭고, 호의와 혐오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174, 175

선불교의 비어 있음은 부버가 말하는 ㅅㅏ이와 많은 점에서 다릅니다. 비어 있음은 나도 ㄴㅓ도 없는 부차별한 장소입니다. 그와 반대로 사이는 ㅂㅣ어 있음만큼 비어 있지도 개방적이지도 않습니다. 나와너의 ㅅㅏ이는 ㄴㅏ와 너가 굳게 자리한 ㄷㅜ 개의 극점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179

부버는 대화의 끈들을 묶고, 끈들이 하나의 중심을 향해 뻗게 합니다./부버가 ㅁㅏㄹ하는 “너”는 사랑과 긍정의 말로서 강조되어 말해집니다. 감동 혹은 숭고가 근본 분위기를 이룹니다. 이런 근본 분위기는 대화를 나누는 관계의 분위기를 규정합니다. 부버의 말이 친절한 말이라고 불릴 수는 없습니다. 182, 184

볕뉘.

0. 벽암록은 사무실 책꽂이 앞에 두고 가끔 봐주었고, 바쇼의 하이쿠도 보면서 다른 느낌에 놀란 적도 있는데, 그렇게 선불교와 하이쿠를 이어놓은 책이다. 사실은 문지강연 소식를 보다가 스스로 소개한 책이어서 수소문을 해서 보게 되었다.

1. 소승을 너머, 대승....불교의 마음 자리는 혜량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가끔 빡빡한 서양철학의 경계를 지우기 위해 살펴보기도 한다. 주체와 개인, 이분법의 철학과 학문은 이렇게 다시 짚지 않으면 현실을 제대로 보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하이데거의 죽음이 관건인 듯 싶다. 서동진도 최근 감정, 정서 등등 감정이론의 배후가 하이데거의 죽음, 그 존재론에 머물고 있어, 정작 마르크스의 구조를 보지 못하는 누를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 후속 글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일정 일리가 있어 보인다. 진은영 역시 하이데거의 죽음이 지나치게 개인을 돋보이게 만들고, 사유를 거기에 멈추게 한다고 한다.

2. 하이데거와 부버를 다룬 것. 특히 부버를 다른 것이 새롭다. 김상봉교수가 너와 나의 정신적 임신이 필요하다는 말씀이 겹쳐지는데, 어쩌면 부버의 자장인 것을 아닐까하는 의심도 곁들여진다. 이렇게 서양철학의 경계를 지워나가거나 새롭게 사유해보자. 멈추거나 정지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그대로 흐름을 쫓아가며 총체적인 사유를 곁들이다 보면 새로운 깨달음이나 통찰이 생길수도 있지 않을까

3. 한병철은 어쩌면 자신의 책은 쓰레기같다고 자조하는 지도 모른다. 너무도 쉬운 책들을 써내어 부끄럽다고, 그 중에 그래도 덜 부끄러운 책이 이 책이라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4. 지금 여기, 한반도는 섬나라인지도 모르겠다. 어디 철도도 사유도 이어지지 못하고 섞이지 못한다. 서양철학과 서양사고가 횡행한다고 할 수 있다.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확장과 연장이 절실한 지도 모르겠다. 몸에 맞는 옷처럼, 진리와 철학도 계절을 타고, 몸에 맞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어읽기 가운데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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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탄생철학의 고된 탄생에 대하여

미래에 놓인 것으로서의 죽음은 죽어야 할 운명인 자들의 시간을 향해 열린 존재를 근본적으로 동요시킨다. 이러한 죽음과 달리, 탄생은 탄생한 자들이 모두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혼란스런 자유 이전의 과거에 속한 것이다. 17

하이데거의 “죽음으로 미리 달려감”과 쌍을 이루는, 이전에 결정된 “탄생으로 되돌아감”때문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탄생은 반드시 개별자의 죽음과는 달리 처음부터 타자와 결부되어 타자에 종속되는 “사회적 생겨남”(한스자너)을 가리킨다. 18

철학은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탄생보다 죽음에 대해 더 많이 논의하였다. 탄생이 아니라 죽음이 철학의 “뮤즈”가 되었던 것이다. “탄생에 대한 망각”(한스 자너)과 “탄생에 대한 맹목성”(페터 슬로터다이크)은 무의 망각과 “죽음의 심취”에 보완적으로 작용하면서 탄생에 대한 철학의 결핍을 강조한다. 19

2. 철학적 조산술에 대하여

스승은 오히려 인식을 낳을 수 있는 자들 안에 이미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나게 할 뿐이다./단지 자신이 의도했던 깨달음을 제자 스스로 낳을 수 있을 때까지 현명하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참을성 있게 제자에게 질문해야만 한다. 철학적 조산사가 이렇게 함으로써 노예는 인식하는 자로서 자율적이게 된다. 32

3. 한나 아렌트의 출생성 철학

하이데거의 해석은 죽음의 철학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이 사실적인 현존재를 대부분 등한시했다. 사실상 “끝을 향한 존재”가 하이데거 해석의 중심이다./한나 아렌트의 탄생 철학은 궁극적으로 하이데거의 죽음학과 대립되며, 하이데거의 “죽음으로 가는 존재”에 대한 선호는 “탄생하는 존재”(한스 자너)와 대립되며, 죽어야할 운명은 “출생성”과 대립되며,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내던져짐”의 철학은 탄생에서 유래하는 시작함과 대립된다./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시작을 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능력이 ㅂㅏ로 그녀의 “탄생성”의 핵심 개념이다. 43

이 새로운 철학은 하이데거처럼 존재와 무의 긴장으로부터 현존재를 규정하지만, 현존재의 배열에서는 완전히 다른 변화를 시도한다. 48

“가장 최상의 삶은 둘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아는 것이다...제3자의 근원은 둘이 그렇게 하나가 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여기서 복수성이 비로소 시작한다. ‘개체화의 원리‘라는 의미에서의 실존이 여기서 발생한다.” 59/ “사람들과 함께 시작은 세계로 왔다. 여기에 인간의 자발성의 성스러움에 근거한다.” 60 “만약 인간의 창조가 우주 속에서 시작의 창조와 동시에 발생한다면, 자신들이 새로운 시작인 개별적 인간들의 탄생은 인간들의 근원적 성격을 증명한다. 이 근원은 결코 더 이상 과거의 일이 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작들을 기억하는 지속성이 세대의 연속에 있다는 사실은 결코 끝나지 않는 역사를 보증한다. 왜냐하면 탄생은 그 존재가 시작인 피조물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64, 65

죽음은 단지 이 세상의 사건으로서... 한 번 이 세상에 와서 세상의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단 한 번이고 단 한 번의 새로운 것이 단지 단 한 번 발생할 뿐이다. 이에 반하여 한나 아렌트는 출생성을 구원과 결부된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인간으로서의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이라고 이해한다. 단지 한 아이가 탄생한 것이 아니다. – 우리 모두가 아이이듯이 우리에게 모든 아이가 탄생한 것이다. 69 :.

하이데거와 플라톤이 “모든 것을 간직하면서” “더욱더 고향을 추구하는” 입장으로 결코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철저하게 보수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아렌트는 신과 같은 형상이라는 이념에 대해서도 ㅇl렇게 말한다.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유일한 피조물이라면” 인간은 “신에 상응하는 시작하는 능력을 타고나게 된다.” 이는 하나의 상호 관계로서, 신과 같은 형상은 시작하는 능력을 함의한다. 71

“시작이 있기 위해서” 인간이 창조되었다면, 그 인간은 자신의 입장에서는 최초이며 이미 주어져 있는 “원칙적으로” 창조된 세계에서는 새롭고 유일한 “누군가”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누군가는 강조된 의미에서 “시작”이라는 술어를 획득한다. 76

“인간의 조건” 안에서, 즉 행위의 조건은 탄생성이고 사유의 조건은 죽어야 할 운명이다. 삶과 관련된 사유는 죽음에 비해 삶을 우선시하는 조건들을 미리 확정한다.” 뜻밖에 그녀는 다시 경건해진다. “ 이 세계에서 불멸성을 소망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모독이다. 이 소망이 죽음을 제거하기 때문이 아니라 탄생을 부정하기 때문이다./”인간들 사이의 인간으로서의 인간”이라는 복수적 현존재는 죽음이 아니라 탄생에 기초한다. “하이데거는 틀렸다. 인간은 ‘세계로‘ ‘내던져지지‘않았다. 만약 우리가 ㄴㅐ던져진 존재라면 – 동물과 다르지 않게 – 이 지구에 ㄴㅐ던져진 것이다. 인간은 세계로 바로 ㅇㅣ끌어진 것이지 내던져진 것이 아니다. 여기서 바로 인간의 연속성이 성립되며 인간의 귀속성이 개시된다. 우리가 세계에 내던져진 것이라면 슬픈 일이다!” 86, 87

“이해하는 것은 행위의 다른 면이다” 이 행위의 한편으로 제시된 의사소통적 행위인 “말하기”와 마찬가지로 이해는 말하자면 화용론의 쌍둥이이다./”이해”는 정확히 행위와 탄생의 시작성에 부합한다. “시작을 본질로 하는 ㅍㅣ조물은 주어진 범주없이 ㅇㅣ해하기 위해서..그 자체에 충분한 근원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88

4. 시작된 시작에 대하여

슬로터다이크는 “세상에 오는 것”에 대한 분석에서 탄생과, 세상에 와서 자신에게로 오는 것 사이를 구분한다. 하이데거의 선입견과 상관없이 인간이란 차라리 탄생한 “강림한 동물”이지만, 실제로 자신 스스로 이 세상에서 무언가 시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한 번은 이 세상으로 스스로 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105

그는 “스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응답한다./인간이 성숙해지는 날은 결국 주체가 삶의 노고와 위험에 대한 충분한 통찰을 가지고 죽음의 확실성을 파악하며서, 이러한 삶을 이어가게 하는 생식에 대한 위임을 자신의 부모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을 결심하는 날일 것이다. 107

나는 주어진 것이다. 108

5. 탄생의 강제에 대하여

“강제”가 문자적으로 함축하는 의미 말고도, 부과된 존재, 규정된 존재, 운명적인 존재라는 강한 은유로 탄생의 숙명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 111
이러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 탄생을 죽음과 구분 짓는다. 112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영혼들이란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미 항상 순환적으로 돌며 움직이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첨예화한다. “그래서 탄생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이 지니는 어떤 수준에 대한 심판이 된다. 누구든지 자신의 영혼의 완성을 향해 스스로 만드는 인생을 살아간다. 115

탄생 철학의 질문들과 문제들은 시작함을 부정하는 업보설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117

“탄생의” 현존은 현존재의 존재 성격이며, 스스로 “시작을 향한 존재”로서 자기 존재와 관계하는 것이다. 120

사르트르는 내가 갑자기 홀로 어떤 도움도 없이 이 세계에 참여하고 이 세계에 대해 총체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123 스스로 거부하는 내던져짐은 바로 “내던져진 기획”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스스로 기획하는 내던져짐의 총체 개념이 될 수 있는 것이다.125

그들의 미성숙한 자녀가 가능한 한 일찍 성숙할 수 있도록 하고 “세계시민”으로서 지체 없이 자유의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의무인 것이다. 단지 이러한 자유만이 탄생의 강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128

탄생이 활동적 삶의 본질적 차원으로서 생산과 노동보다 우위에 있는 행위를 의미한다면, 그래서 이것을 스스로 시작하는 존재의 행위라는 고유성으로 이해한다면, 생산은 이러한 시작하는 행위를 취소하게 한다...인간공학은 생산자라는 돌연변이가 된 창조자가 자신의 생산물에 대해 가장 지속적으로 구속하는 강제인 것이다. 133

6. 원인이 되는 자의 원칙과 책임의 윤리에 대하여

출산은 불가피하게 책임이라는 구속을 부여한 것이다. 124 부모와 자식 사이에 취소할 수 없는 비대칭적인 책임 관계를 정초한다. 135

지구가 하나의 책임을 지게 하는 유산인 한에서 미래와 연관된 가장 멀리 나아간 윤리의 계명에 따라 지구를 훼손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생겨난다. 81 이상 한스 요나스

7. 삶의 선물과 “세계의 빛”에 대하여

인간은 그 어떤 시작이 아니라면, 죄인으로 탄생한 것이다. 149

왜 탄생한 자들이 희미해진 “세계의 빛”을 바라보는지 그리고 왜 그들의 삶의 “선물”을 부담과 구분하기 힘든지, 그 이유를 고통의 교육학도, 그 어떤 죄 혹은 벌에 대한 구성주의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없고 전혀 정당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151

8. 내던져짐의 거부에 대하여

고대 그리스는 성경의 전통과는 달리 어던 본래의 창조주도, 즉 “무로부터의 창조”도 알지 못한다...창조주와 재판관 사이의 최종 심급의 합치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철저하게 “무엇을 위해서”라는 탄생한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다. 165

“최악의 것은 바로 죽는 것이며 두 번째로 악인 것은 한 번은 죽는 것이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인간들이 그들의 공허함을 탄식한다는 의미에서 죽어야 할 운명인 ㅈㅏ들로 간주되는 것이라면 그들의 죽어야 할 운명을 구제할 수 있는 자는 바로 탄생한 자들이다. 171

우리 모두는 자기 스스로에게 머무르는 무능력을 물려받았다. 이 무능력 때문에 창조자는 유감스러운 입증 방법을 제공했다. 그것이 바로 생식이다....생성이라는 죄를 짓게 하는 요청, 즉 ‘성장하고 증식하라‘는 것은...이러한 요청은 나쁜 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신의 거침없는 나르시시즘이 그의 피조물을 부추겨 가장 효과가 큰 모든 모방 행위를 하도록 했다. 174

9. 금욕에 대하여

오늘날 출산 통제가 쉽게 이루어지는 이 시대에 여전히 “희생‘에 대해 말해야만 하는가? 완전한 포기나 완전한 고된 금욕 없이도 탄생하지 않은 자의 파라다이스로 가는 편안한 치유의 길이 열린 것이 아닌가? 178

10. 마치 선물과 같은 것에 대하여

그 반대의 반응은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근본적인 원한 감정의 의혹에 있다. 탄생한 자로서 탄생을, 살아가는 자로서 인생을 한탄하며 사는 자들은 아마 틀림없이 삶을 미워하고, 창조자를 미워하고, 부모를 미워한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삶에 무력해지고 생기를 잃어 분명히 삶에 감사할 줄 모를 것이라고 추측된다. 180

(탄생이) 강제라는 타당한 근거로서 아이의 미성숙성은 들이닥친 선물과 분리 불가능하게 결합되어 있다....제1의 탄생은 강제적으로 시작된 삶으로서 미성숙하지만, 제2 의 탄생은 칸트적 의미로 성숙한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자발적 능력, 아렌트적 입장에서는 스스로 시작하는 행위의 능력을 지니는 성숙한 인간의 탄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들이닥친 선물) 189

모든 고전적이고 지엽적인 윤리에 맞서서, ...자신의 동의 없이 탄생한 (모든) 존재는 자신이 실존한다는 사실과 화해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삶이 선물인 것처럼, 이 세상이 빛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122

볕뉘

0. 선불교의 철학을 읽은 뒤였다. 궁금하여 몇권을 더 추천받아 읽고 싶었다. 같은 출판사의 이 책을 인상깊게 읽었다는 관계자의 말에 따라, 연관읽기로 제목이 무척 끌렸다. 아래는 읽는 도중 몇 꼭지 생각꼬리다.

1. 한나 아렌트의 말이란 책에서 인터뷰 여러 꼭지에서 흥분되기도 하고, 사유의 긴장을 늦추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다. 아렌트의 박사논문, 하이데거와 다른 사유를 잉태하였다는 점, 그 전개가 놀랍다. 혁명에 대한 사유도 거침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에게는 ‘공화‘의 지평을 멋지게 확장한 이로 마음 속에 다시 박혀있다. 몇 번의 다시읽기가 전제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척 흥미로운 책이었다.

덧말 1. 죽음은 본질적으로 나만 생각하게 한다. 이상하게도 개인에 사로잡히게 하는 장치인 듯하다. 단 한 번인, 단을 붙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삶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탄생으로 사유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우리 삶들을 적절하게 나타낼 수 있다. 말을 하고 ㄴㅏ누는 존재, 복수성을 전제로 하는 우리의 삶을 잘 어루만지게 한다는 점에서 더 낫다

덧말 2. 우리는 세계에 이끌어진 것이다. 아렌트는 정치성의 핵심이 말을 하는 존재라고 했다. 혼자가 아니라 서로 말을 하는 복수성이 아렌트의 핵심이자 공화(주의)의 열쇳말이다. 실존주의는 삶과 존재를 어렵게 설명한다. 다시말하면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내던져지거나, 기투(던져야)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현존재와 나를 고정시켜 세계를 분리시킨 뒤에서나 행위를 하게 만든다. 쓸데없는 논리를 만든 것이다. 이끌어진 존재-손잡아야하는 존재-말해야하는 존재-서로 시작해야하는 존재라는 표현이 삶과 세계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쓸데없는 논리로) 서로를 분리시켜 따로따로 설명해내지도 않으면서, 전체를 감싸안으면서 나아가는 방향을 적확하게 묘사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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