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기회주의자를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삶이란 영원한 투쟁의 삶, 특히 자신과 투쟁하는 삶이라 생각한다...행복하게 지낼 양이면 쪼다로 살면 된다. 행복은 노예들의 범주이다. 15

 

인민이여 안녕, 민주주의여 안녕

 

우리는 촛불집회에 참여하면서 전연 겹쳐질 수 없는 이질적인 주체이면서 생뚱맞게 자신은 하나라고 자처하는 풍경을 마주한 바 있다. 그 때 거리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치며 헌법1조가를 불렸다. 자신을 해방의 주체로 내세우는 보편적인 인민이라는 외양을 취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사회적 집단의 묶음에 불과했다. 실은 그 시위대를 조직하고 이끈 것은 16백여 개가 넘는 각각의 사회적 욕구와 이해에 따라 결집한 시민사회단체들이었다. 그리고 이 인상적인 장면은 이른바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상대함에 있어 좌파정치가 얼마나 무력하였는지를 보여주었다. 43-44 (촛불은 왜 무력한가? 무엇을 바꾸었나?)

 

1990년대 이후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민들의 모임과 같은 형태를 띤 사회운동이 범람하는 것을 목격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운동에서 사회를 총체화하는 정치적 결정을 스스로 떠맡는 주체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순간 사회운동은 국회를 쳐다볼 뿐이다....우리는 어느 새인가 청문회와 감사의 전문가 및 스타가 되어 맹활약을 떨치지만 사회운동을 조직하고 그것을 정치적 결정의 주체로 구성하는 일에는 무력하기만 한 진보정당의 패주를 이미 지난 십 년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좌파 세력이 자유민주주의적 대의민주주의를 위해 가장 열정적으로 애쓰는 야릇한 시대에 살고 있었던 셈이다. 44 ( 왜 사회운동은 대의제만 강화시키는가?)

 

달아나는 사회, 그리고 사회-주의 이후의 정치

 

사회적인 것을 사회로 변환시킬 수 있도록 했던 주요 조건들(조직화된 노동자운동의 등장과 테일러주의, 포드주의에 기반을 둔 경영자본주의의 정착, 국민국가의 일반화, 현실사회주의의 존재 등)이 소멸한 지금, 과연 사회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합리성의 원리를 발견했던 정치가 소생하거나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65 이제 더 이상 국민이란 이름으로 제공되는 집합적인 연대가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안전에 따라 시장이 제공하는 사이비 연대를 구입하는 산산이 흩어진 개인들의 연대이다. ....시민연대는 국민연대의 추상적이고 얼굴 없는 익명성을 대체한다고 자처한다. 숱한 협동조합, 대부조합, 생활공동체, 화폐공동체 같은 것이 유행하고 장려되고 있다...이것이 연대의 해체인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연대의 조직인지 단정하기 어렵다....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시민연대가 신속하게 시장에 의해 납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66-67(대안공동체, 대안 모색은 왜 삶과 진정한 변혁을 어렵게 하는가? 바꾸는 것은 무엇이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 변화의 지점을 고민하고 있는가?)

 

우리가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들을 때 퍼뜩 떠오르는 것은 그들의 법률적 고용 조건보다 흔히 한국에서 ‘4대보험이라고 불리는 사회보장의 바깥에 있다는, 불안한 처지이다. 사회국가가 만들어 놓은 사회의 이미지, 즉 국민연대의 체계로서의 사회는 그 연대를 사회보장을 통해 물질화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사회보장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회에 속하지도 않는다. 그는 타인과의 연대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이고, 연대에의 가입과 소속은 사회에의 가입과 소속이란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87 ( 왜 비정규직과 실업자는 국민이 아닌가? 국민일 수 없는가? 왜 시민일 수 없는가? 왜 인간이 아닌가? )

 

프랑스대혁명은 일체의 봉건적인 특권을 폐지함으로서 부르주아에게 자신의 뜻에 따라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에 의해 비참한 삶으로 몰리게 된 자들이 요구하는 끊임없는 변화로부터 부르주아는 끊임없이 위협을 겪도록 예정되었다. 프랑스대혁명이 선언한 인권과 시민권은, 언제나 변화란 가능하며 그를 위해 누구나 행동할 수 있음을 적어도 이념적으로 약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우리가 인간이라면 나아가 시민이라면 나 또는 우리에게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권리 없는 정치란 말은 정치가 없다는 것과 동일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정치의 잘못을 고치기 위한 가능성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변화를 조직하는 행위로서의 정치, 그리고 그것에 참여할 수 있는 주체의 권리 즉 주권은 처음부터 자신의 이율배반,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을 품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77-78 ( 혁명의 관성은 어떻게 150년을 견딜 수 있었는가? 그 조건은 무엇이었나? )

 

동즐로 같은 이는 주권의 모순이 어떻게 사회를 발생시켰는지 추적한다. 그는 권리와 필요를 중재하는 대상으로서 사회란 것이 출현하였음을 밝혀준다. 그리고 그것이 초래한 부정적 효과를 제어하려 억압했던 주권의 모순이 거듭해서 되돌아온다고 말한다. 그건 사고의 방향에서 그는 68혁명의 반란을 사회국가가 만들어낸 사회가 한계에 봉착하면서 마침내 다시 되돌아온 주권적인 개인의 반란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바라본다. 그렇지만 그러한 주권적 개인의 반란은 새로운 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전략으로 흡수되어버리고 만다. 지금 그러한 주권적 개인의 모습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낸 사회 없는 개인의 연대, ‘기업가적 개인의 연대 아닌 연대로 대체되어버린다. 83-84

 

제거할 수 없는 정치의 불변항, 노동

 

정리해고, 비정규직, 더욱 팍팍해진 노동강도, 재병영화된 일터의 문화, 실질임금의 감소 등은 그냥 사회적 현상일 뿐이다. 사람들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노동은 힘들고 고통스럽고 비참하고 박탈당해 있으며 불안정하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사회주의자도 그렇게 말하고 자유주의자도 그렇게 말하며, 노동조합운동가도 그렇게 말하고 자선기관이나 인도주의기관의 활동가도 그렇게 말하고, 마침내 바티칸의 교황도 그렇게 말한다. 모두가 자본주의가 초래한 악에 대하여 말한다. 실업과 빈곤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비참한 삶에 관하여 모두 개탄한다. 노동 그리고 노동하는 자의 사회적 삶은 언제나 우리를 화나게 하고 눈물짓게 하고 또 미치게 한다. 그러나 그뿐이다. 94 가나의 시학을 위한 재료가 될 수 있을진 몰라도 정치의 연료가 되기에는 불충분하다.

 

자본은 영속적인 실업과 빈곤을 통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결국 자본이 존속하려면 그러한 노동권은 제거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노동권은 인권과 시민권이 적용된 이차적이거나 하위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시민이라는 추상적인 이름의 권리에 구체적인 낯을 부여한다. 노동의 자기 영유, 자기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통해 형성된 인간-시민이야말로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시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권은 인권과 시민권의 하위 집합이 아니라 거꾸로 인권과 시민권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노동권을 제거하면 권리를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인간도 제거하는 것이 된다. 109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가 이뤄지는 유동의 영역은 사실 천부인권의 진정한 낙원이었다. 이곳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자유·평등·소유 그리고 벤담이다.”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은 자유, 평등, 소유라는 천부인권의 신조가 기만일 뿐이며, 그것은 벤담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즤적 관념을 은폐하는 관념이라는 것이 아니다. 외려 벤담을 추가함으로서 소급적으로 앞의 자유, 평등, 소유라는 세 가지 낱말이 전연 다른 의미로 채색된다는 점을 말한다. 물론 벤담이 추가될 수 있는 조건은 그것이 바로 상품교환의 세계, 노동이 상품이 되어버린 세계일 때이다. 따라서 덧붙여진벤담은, 결국 사후적으로 노동을 상품으로 만들어내면서 자유, 평등, 소유라는 개념들을 새로운 사슬로 묶어낸다. 114

 

우리는 게토나 방리유, 파벨라 대신에 자신의 얼굴을 숨긴 채 세계를 향해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원한을 드러내는 개인을 볼 뿐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에겐 게토나 방리유가 없는 것일까 물어보아야 마땅하다. 120

 

어쨌든 사회문제라고 명명된 문제, 무엇보다 실업과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는 나선다. 그리고 나아가 국가는 실업과 결부된 사회문제들, 폭력, 범죄, 알코올중독,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병리현상 따위를 해결하도록 종용받는다. 이 과정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답을 알고 있다고 자처하는 정치세력(대개는 극우 포퓰리즘 정치집단)이 부상한다. 그들은 인종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를 내세워 사회문제의 해결을 내세운다.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은 알다시피 실업의 위험에 직면한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의 세계가 보여주는 끔찍한 풍경에 겁을 집어먹은 중산층들이다. 극우 국수주의 정치집단이나 포퓰리즘 정치세력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이를 문화적인 문제 혹은 사회병리적인 문제로 가늠하려는 시도를 거부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에 고유한 실업문제이기 때문이다. 121

 

안전이 사라진 세계에서 번창하는 불안의 분위기는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전염된다. 우리 역시 덩달아 노령화 시대, 백 세 시대에 온갖 질병과 불안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지킬 것이냐고 위협하는 보험업자들과 금융업자들의 공갈에 벌벌 떤다....자본이 노동을 () 생산할 수 없을 때, 국가는 그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본을 위한 것도 자본에 반하는 것도 아니다. 123

 

노동의 편에 설 때에 비로소 실업은 자신을 재현할 수 있으며 아울러 자신을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실업이 노동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여겨질 때, 그것은 그저 비참한 삶의 상태에 불과할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자신을 대표할 어떤 내용도 가지고 있지 않은 지리멸렬한 사회적 사실에 머물고 말 것이다. 이럴 때 실업문제란 환경 문제, 고령화 문제, 가정폭력 문제 같은 수많은 사회문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그렇지만 그에 연루된 사람들이 조금 많다는 이유로 조금 더 중요해진 문제일 뿐이게 된다. 127

 

한 낱말이 정서적으로 쇠락한다는 것은 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김지하의 신 새벽 뒷골목에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라는 시구에 나오는 민주주의란 낱말은 정치학 교과서에 나오는 평범한 용어가 아니었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말을 뇌면서 떨거나 전율했던 이들에게,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사물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128

 

노동의 새벽에서 노동은 그저 세상사의 한 부분, 즉 객관적인 사태가 아니라 세상에 관한 시점의 차이를 낳는 대상으로 주관화된다. 노동은 바깥 세계에서 벌어지는 삶의 사태가 아니라 갑자기 내가 세상을 응시하는 입장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주관화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노동에 관한시가 아니라 노동이란 대상을 통해 촉발된 새로운 주체의 시점을 표상하는 시가된다. 그러나 지금 노동이란 말은 시체말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아무 감응을 주지 않는다. 130

 

인간-시민이란 범주의 등뒤에는 항시 노동이라는 유령이 붙어 다닌다. 그것은 결코 제거할 수 없다. ...다른 한편 우리는 오직 정치적 공동체와 권리의 주체만이 있는 정치학을 요구하며 노동 없는 해방의 정치를 강변하는 주장이 부쩍 관심을 얻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들 역시 평등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평등이란 착취와 그를 대신할 평등이 아니라 시민 됨의 자격이라는 문제를 둘러싼 평등이다. 특히나 사회국가에서처럼 포용하면서도 불평등을 생산하는 세계가 아니라 배제가 문제되는 세계에서 평등을 더욱 그런 평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자신의 지위에서 영영 벗어날 길이 없어 보여 마치 특수한 정체성을 가진 자연스런 인구학적 집단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이들...결국 이들에서 배제란 현실은 노동의 정치에 앞서 시민권의 정치가 우선시되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한다. 132

 

무엇이든 권리의 가면을 쓰고 등장할 수 있는 권리의 낙원이 나타났을 때, 전적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부르주아적 권리이다. 우리는 분명 권리의 낙원에 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공교육을 거부하고 무력화할 수 있는 학습자-소비자의 권리, 파업이라는 노동자의 단결권을 제어하는 희대의 권리로 등장한 손해배상청구권 등만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정체성의 정치를 비롯한 소수자 권리와 같은 것은 인권-시민권은 실체가 없는 순수한 형식일 뿐이라는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것처럼 보인다. 135

 

노동을 통해 매개된 민주주의의 전환, 인권-시민권의 제도화야말로 진정으로 민주주의의 재민주화란 이름에 부합하는 것이 될 수 잇다. 한국 사회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민주화란 바로 그러한 사회적 시민권을 합당하게 규정하고 현실화하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민주주의의 재민주화는커녕 민주주의의 탈민주화라고 부를만한 사태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 그 어떤 정치적 민주화도 그들이 말하는 경제의 민주화, 탈국가화, 규제완화 등의 이름에 의해 손쉽게 무효화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137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상품 소유자의 사적 소유를 언제나 우위에 둔다. 그리고 노동 역시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그런 세계는 언제나 터무니없는 불평등과 착취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사라지고 있는 사회국가가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연대의 다른 이름인 사회를 통해 고용된 노동자는 물론 실업자, 여성, 아동, 노년, 질병에 걸리거나 재해를 입은 자 등의 삶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오직 시장에 입장할 수 있을 때, 즉 고용될 수 있을 때에만 그런 보호와 안전을 제공받는다는 데 익숙해져 가고 있다. 권리의 토대는 오직 시장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인권과 시민권을 쇠퇴시키고 민주주의를 타락시키는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실업은 사회문제도 아니고 노동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다시 노동의 정치가 돌아와야 한다. 민주주의로서의 정치가 돌아오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141

 

종합할 수 없는 두 가지, 정치와 경제

 

경제가 정치를 결정한다는 것은 결국 경제가 정치의 궁극적 대상이라는 말이 아니다. 정치는 사고된경제, ‘반영된경제가 아니다. 제임슨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한 번만 제곱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제곱해야 한다. 경제는 직접 정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외려 정치가 스스로의 대상을 갖도록 함으로서 정치를 결정한다. 따라서 정치의 비밀은 정치 자체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자신의 비밀을 갖는 것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정치 자체의 차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다른 곳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비밀을 풀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정치란 순전한 형식에 속하고 그것의 실질적 내용은 경제에서 찾아야 한다는 식의 아둔한 경제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경제에 의한 결정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앞서 말한 것을 떠올리자면 경제와 정치를 종합할 수 있는 제3의 자리를 찾고자 애쓰지 않으면서, 즉 두 사이의 불가분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양자의 전치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길, 그것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159-160

 

알튀세르는 전체와 총체를 구별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헤겔이 총체를 주장했다면 바로 그것을 전체란 범주로 전환한 것이 마르크스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말한다. 실은 이 두 개념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그의 평생의 목표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문제이다. “최종심급, 구조화된 전체, 과잉결정, 모순을 불균등성같은 명제들은 실은 바로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된 것들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총체와 전체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를 우리는 총체란 중심과 기원을 갖는 반면 전체란 탈중심성과 불균등성 그리고 원인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자본의 한계는 자기 자신인 것처럼, 자신을 총체화할 수 없는 자본의 한계를 전체라는 개념으로 나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경제는 정치를 결정한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다. 경제는 근본적으로 모순에 의해 시달리기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총체로서 완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정치로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177-178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결정하는 경제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시에 흔히 현실경제, 경제현상이라고 부르는 경제도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경제는 두 가지 대립적인 규정의 결합이다. 지젝은 이런 대립적 규정 사이의 차이, 두 가지 경제 사이의 간극이 정치를 낳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지젝은 전부는 아닌다시 말해 그것을 완결적인 총체로 닫아버리지 못하게 하는 적대, 모순(=경제+으로 인해 정치가 등장하게 된다고 말한다. 179

 

박근혜 정권이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대표하기는커녕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이해를 대표하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권은 과도한 특권을 누리는 나머지 집단에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보통 국민을 대립시킨다. 그리고 사람들은 순순히 그렇게 믿는다. 그러므로 현정권을 비판하는 사회운동에 대한 대중의 전반적 반응은 야박하게 말하자면 짜증스럽고 성가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을 포퓰리즘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자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모두를 대표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우리는 성실하게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착한 국민과 조금도 특권을 내려놓지 않으려고발버둥 치며 우리에게 기생하는 사회의 공적이라는 대립을 통해 더할 나위 없이 인기를 누리는 정치권력과 마주하고 있다....포퓰리즘은 바로 그런 두 제곱된 사고가 불가능할 때 불투명하게 보이기만 하는 정치를 그리기 위해 만들어낸 무력한 표상일 뿐이다. 184-186

 

 

 

 

볕뉘. 어젯밤 치통이 파도처럼 밀려와 애를 먹는 와중, 다시 한번 완독한다. 저자 스스로 비망록으로 쓰고 보여주기 부끄럽지만 애써 읽어주신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한다. 몇달 책 속의 책과 고민을 섞어본다. 서재 속 변증법의 낮잠을 강독한 분들이 함께 들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눈다는 것은 책만이 아니다. 경험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또 다른 사유의 방법을 문득 가져가는 것이기도 하다. 책 읽는 이들에게 골방은 그런대로 봐줄 만도 하지만 이렇게 외유를 하는 것도 더 좋은 방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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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5-06-24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개인적으로 서동진 님 좋아해요.
어려운 철학적 얘기를 쉽게 풀어가려고 애쓰신달까?
아쉽네요, 좋은 강좌가, 그것도 평일에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곳에서 있군요~!

여울 2015-06-25 08:53   좋아요 0 | URL
그쵸 비교적 쉽게?
하지만 어렵게 어렵게 배워야 철학은 남는 거 아닌가요? ㅎㅎ

독자로서 질문과
저자로서 견해가
서로 섞여 새로운 출발이 될 수 있다면 더 좋겠어요.

이상적인 만남이긴 하지만요....저에게도 멀리 떨어진 곳이네요~~
 

볕뉘.

 

1. 가끔 책이 다가서는 느낌을 받는다. 밀쳐두고 있었는데 오늘만을 나를 챙겨달라는, 챙기고 싶은 날이었다. 그 책은 하루를 멍하니 버림받고 일요일 바닷가 옆 한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 시선을 끈다.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 자연과 인간의 네덜란드-영국-미국의 상업-산업-금융의 순환구조가 잔상처럼 남아있기도 하다. 제임슨의 언제나 역사화하라는 명제도 그러하다. 경제와 형식을 눈치채지 못하면 전체에 근접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늘 염두에 두어야할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예전에 읽은 리오리엔트가 생각이 난다. 동양이 유럽보다 훨씬 더 큰 부를 가지고 있었다라는 자각 뒤 여운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러면서에 이 책은 그 궁금증을 잔뿌리처럼 내리면서 이어주고 있다. 울프는 1400년이후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 인물을 통해 전대륙을 옮겨다니게 한다. 삶의 흐름으로 이어진 전체적인 조망을 우선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공납제적 생산양식, 다소 헷갈리겠지만 원시적 생산양식이 아니라 친족적 생산양식을 염두에 둔다.

 

2. 마르크스를 오해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그의 변증법적이 접근방식이다. 예술가의 독특한 그림의 문체를 읽을 수 있듯이, 삶의 문체가 있다면 평생 유지한 관점이 이것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전체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에는 예단이 없다. 그가 만일 지금 다시 재현한다고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과물이나 한 말을 두고 단정짓는 것은 평생 피하고자 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속류마르크스주의자들은 늘 밑줄에 경도되어 있다. 경도되어야 할 것은 현실이다. 현실에서 전체, 총체를 향하는 노력이 조금 더 낫게 보는 이를 늘릴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야 강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좋은 책이 아니라 디딤돌로서의 책과 사실들... ...

 

3. 인디언 수많은 종족들이 모피교역에 어떻게 연루되면서 바뀌어나가는지, 왜 유독 아프리카가 노예무역으로 이어졌는지, 역사에 잡히지 않는 많은 흐름들이 융기하고 대륙을 잇고 뼈에 살점을 붙이고 혈액을 순환시킨다.  전체를 볼 수 없다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4. 정치경제학에서 정치를 발라내어 정치학이라, 사회를 발라내어 사회학이라,  경제를 발라내서 경제학이라 이름짓고 결국 모르쇠로 일관하는 학문의 말로는 어쩌면 지금 여기 삶의 흐름이란 맥을 잡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는 반증에 늘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과학기술도 똑 같다.  그 총체라는 것, 전체라는 것, 실체라는 것, 또 다른 사고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전체를 맛보는 기술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학문이라는 것은 분과학문의 덧셈이 아니다.  통찰이나 깨우침같은 것이 학문을 살아있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껍다 아직 1/3을 남겨두고 있다.

 

 

울프의 연구에서 크게 관심이 가 있는 것은 경제적·정치적 힘의 격차가 존재하는 상황들에 사회적 관계들이 포섭되는 방식들이다. 자본주의를 다룬 이론들을 가져다가, 연구를 진행하면서 지역의 상황에 맞도록 이 이론들을 수정해서, 울프는 이 지금은 거의 보편적이 된 생산, 소비, 분배 체제가 갖는 거대한 변형력을, 그러니까 어떻게 교역이, 또 나중에는 대규모 산업적 생산이 세계 전역의 지역 공동체들을 변형시켰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19

 

학문적 연구에서는, 국경을 넘는 송금들을 지금껏 주로 개발이론의 틀 안에서 다뤘다. 지금까지 그 문화적·사회적인 총체적 배경 안에서 연구한 경우는 채 몇 명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태만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데, 송금이 문화적 의미로 사실상 넘쳐나고 또 중요한 사회적 관계들의 성격을 매우 정확한 방식으로 반영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러하다. 송금이 도덕적인, 증여적인, 또 사회를 조직하는 측면들을 가진다는 점을 크게 강조할 경우, 세계화 인류학이 사회 분석의 분명한 한 형식으로서 인정을 받는 데 도움이 되리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23

 

우리는 지구 크기의 당구장 같은 세계 모형을 만들어, 그 안에서 국가, 사회, 문화라는 저 실체들이 같은 수의 딱딱하고 둥근 당구공들처럼 서로 떨어져 돌아간다. 그리하여 세계를 색깔이 다른 공들끼리로 분류하기가, “동양은 동양, 서양은 서양, 결코 이 둘은 만나지 않으리라고 언명하기가 쉬워진다. 이렇게 해서 어떤 순수한 서양이 똑같이 순수한 동양에 마주 놓이게 되거니와, 이때의 동양이란 생명이 값어치가 없으며 노예적 대중은 여려 형태의 전제정 아래 굽실거리던 곳이었다. 나중에, 다른 지역 사람들이 서양과 동양 둘 다로부터 자기네의 정치적·경제적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하자, 우리는 역사적 지위를 구하는 이 새 신청자들을 저발전 상태의 어떤 제3세계에 할당하고는, 발전한 서양과 발전 중인 동양과 또 대비되는 것으로 취급했다. 54

 

전문화된 사회과학들은 전체론적 시각을 저버렸던바 그리하여 각각 밑이 빠진 물통에 물을 길어다 부어야 하는 끝나지 않는 형벌을 받은 저 고대 그리스 전설 속 다나에 자매들을 닮게 된다. 62

 

마르크스는 보편사를 주장한 역사가도, 사건사를 다룬 역사가도 아니었다. 물질적 관게들의 결합구조 또는 작동 양식을 연구한 역사가였다. 마르크스는 활동력의 대부분을 써가며, 당연하거니와, 한 특정 생산양식의 역사와 작동방식을 이해하려 노력했으니, 자본주의였고, 이것은 자본주의를 옹호하려고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혁명적 변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전문화된 학문적 담론은 혁명과 무질서에 대한 해독제로서 발전했던 만큼, 충분히 이해 할 수 있거니와, 이 유령 같은 질문자가 학문의 전당들에서 환영받지 못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유령은 우리에게 불가결한 가르침을 준다. 첫째, 우리가 세계 시장의 성장사와 자본주의적 발전의 경과를 추적하지 않으면, 현재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둘째, 이 성장과 발전을 설명할 가설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셋째, 우리가 이 넓어져가는 흐름에 관한 역사와 가설 둘 다를 각 지역 인간집단들의 삶을 결정하고 바꾸는 흐름들에 다시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82-83

 

네덜란드 연합주는 산업을 발전시키는 쪽으로 돌아서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해운, 조선, 또 여기에 맞물려 있던 활동들이 계속 중요했고 계속 수지도 맞았다. 둘째, 상업활동 쪽의 수익이 높은 수준을 유지했는데, 사실 직물 생산에 투자하는 쪽의 수익보다 놓았다. 셋째, 네덜란드 연합주의 농업은 이미 자본집약적이고 전문화돼 있었으며, 거기다 높은 임금을 주고 있었고, 이런 까닭에 낮은 임금을 받고 산업노동력을 제공해줄 가난한 농촌 사람들이, 잉글랜드에는 있었으나, 여기에는 없었다. 넷째, 네덜란드의 발전상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모두 기술이나 용역을 활용하는 능력에서 궁극적으로 비롯된 것이었지, 자체의 튼튼한 자원 기반 같은 것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네덜란드 연합주는 인구가 적었다. 네덜란드 인구는 1514275000명에서 1680년에는 883000명까지 늘어났다가, 1750년에는 783000명으로 떨어졌다. 사실, 인력이 해운 쪽에서조차 부족해서, 18세기에는 스칸디나비아나 북독일 사람들이 갈수록 더 많이 고용돼 네덜란드 선박들에서 선원으로 일을 했다. 게다가 네덜란드 연합주는 석탄도 철도 나지 않았으니, 둘 다 풍부하게 묻혀 있던 잉글랜드와는 사정이 달랐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이 공화국은 거의 자치적인 도시국가들이뭉친 정치적 단위였고, 도시들 각각에는 자체의 과두적 상인 지배집단이 있었다. 257

 

유럽 상인들은 심지어 판매를 목적으로 생산할 때 채용되던 작업 조직이며 노동 조건까지도 여기서 또 저기서 바꿨다. 하지만 이네들이 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자기네 부를 자본으로 사용해서 생산수단을 획득해 변형시키고, 다시 노동자 계급이 팔려고 내놓은 노동력을 구매해 이 생산수단을 돌리는 것이었다. 264

 

이 공무-종교 조직은 생활단위를 초자연적 존재와 이어주는 의식들도 집행했다. 이런 의식들은 대체로 이중적 성격을 지니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기독교적이었고 한편은 이교적이었다. 기독교는 종교적 공간을 정하는 쪽으로는 종교적 시간의 경우보다 관심이 덜하다고 할 텐데, 예루살렘이나 로마, 아시시, 루르드 같은 종교적 장소들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타락, 구속, 심판, 부활을 통한 시간의 누적이라 하겠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에스파냐 지배 이전 종교들은 고도로 공간을 중심으로 조직돼 있어서, 공간상의 구획들을 가지고 시간의 구획들을 구별하고, 사회집단들의 속성들을 규정하며, 자연의 국면들을 구분하고, 초자연적 존재들을 분류했다. 이제 기독교 전례력과 에스파냐 지배 이전 종교들이 융합괴면서 기독교적 구원의 시간 틀이 기도교 이전 전통들의 이런 자연 대상들과 연결됐다....이 구조물을 조직하고 유지한 것이 포괄적인 정치단위인 잉카나 멕시카, 치브차였다. 정복은 이 더 큰 이념적 구조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기독교의 구원 계획을 들여놓았다....이렇게 해서 생겨난 종교적 구조들은 생활단위, 생활단위마다에서 서로 달랐거니와, 이념적 지역중심주의를 띠었던 점에서는 생활단위들이 정치적으로 분리돼 있던 양상과 비슷했다. 314 인디언 생활단위들은 이렇게 보면 더 큰 정치적·경제적 체제에 예속된 부분들이었으며, 이 체제가 바뀌는 데에 따라 같이 바뀌었다. 이 생활단위들은 에스파냐 지배 이전 과거의 부족적흔적들도 아니었고, 어떤 불변의 속성들로 특징지어지는 정태적 유형의 소농 공동체도 아니었다. 315

 

탈주노예들은 무리사회를 이뤘으며, 환경상의 조건들이 도와줬던 경우에는 더 안정적인 생활단위를 이루기도 했다. 마로나주는, 프랑스인들은 이 탈주 현상을 이렇게 불렀거니와, 재식농원 생활의 일관된 또 주요한 특징이었으니, 재식농원 체제로서는 서서히 그러면서 그치지 않는 일종의 출혈이었다. 탈주 노예들의 반란 공동체들은 어디서나 나타났다. ...이런 집단들은 밀수나 해적질에도 자주 손을 대서 자기네 생존형 농경을 보충했고, 남아메리카 북쪽 해안의 에스파냐 방어시설을 찔러노븐 무장 약탈 세력들에게 힘을 빌려줄 때도 많았다. 329

 

저지대 해안들과 섬들에 조성된 재식농원 지대에서, 유럽인 재식농원주들과 그 후손들은 기존의 친족질서적 사회들과 공납제적 사회들의 저항을 꺾고, 이제 이 사회들을 아프리카인 노예 작업대들로 대체해, 강제 집단농경 체제 아래서 일을 시켰다. 이 체제는 수출용 작물을 생산하기 위해 작동했던 것이지만, 또 재식농원 지대를 격리시키기도 했으니, 내륙으로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고 이 해안 지대의 노동자들이 내륙 변경으로 탈출하지 못하게도 했던 것이다. 수출용 작물들을 생산하면서 이 지대는 유럽 쪽 시장들에 단단히 매이게 됐고, 거기다 새 노예들을 끊임없이 필요로 하게되면서, 재식농원 아메리카는 세 대륙이 참여하며 확대돼가던 노예무역에 직접 통합됐다. 이렇게 해서, 아프리카인 노예들과 그 후손들은 브라질의 대서양 해안지대에서 지배적 인구집단이 됐고, 카리브 해의 섬들이며 해안 지대에서도, 또 콜롬비아, 에콰도르,페루를 잇는 해안을 따라가면서도 마찬가지였다. 331

 

이런 식으로 말과 총이 조합되고, 거기다 상업적 관계들이 확대되는 상황이 맞물리면서 대평원 인디언식 결합구조가 출현하는 조건이 갖춰졌으니, 길지 않은 몇 년이 지나는 동안의 일이었다. 이 결합구조는 빠르게들 채용하는데, 말을 쓰지 않던 수렵-채집민들이나 경작민들이나 차이가 없었다. 여기에다, 이 다양한 인간집단들은 서로를 사회적으로도 문화적으로 닮아갔으며, 서로의 기원이 달랐던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수렴이 일어난 이유들 가운데 일부는 새로운 생태적 적응 방식이 내재했다. 들소 떼는 겨울 동안에는 흩어졌는데, 작은 무리를 이뤄 무리를 이뤄 이동해 산속에서 겨울을 났고, 봄에 풀 많은 평원으로 돌아왔다가 7월과 8월 짝짓기 철 동안 다시 거대한 떼를 이뤘다. 들소사냥도 이 주기에 맞춰가야 했다. 373-374

 

포틀래치가 경쟁이나 동맹 맺기에서 가졌던 정치적 기능들은 더 강화됐다. “피의 강을 재물의 강으로 막았다포틀래치가 일종의 저축하기였다면 친족질서적 관계들을 저축했던 것이지 공납제적 부나 자본의 저축은 아니었다. 391

 

백인 하인들이나 아메리카 원주민 노예들은 자기네 집단으로부터 어느 정도까지는 도움을 끌어낼 수 있었던 반면, 아프리카인 노예들은 탈주 노예들의 지원받을 기회를 강제로 차단당했다. 이 교역의 한쪽 끝인 아프리카에서 팔리거나 잡히면서 이네들은 친족들이며 이웃들과 관계가 끊겼거니와, 아메리카 항구들에 도착해서는 부족이나 언어상으로 출신이 다른 노예들끼리 의도적으로 섞어놓아 연대하지 못하도록 했다. 주인들한테로 넘어가고 나서는, 이네들은 백인 하인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로부터 또 분리됐으니, 법률상의 차별이 이런 분리를 확인했다면 인종주의적 정서의 발달은 이를 더 강화시켰다. 만약 탈주를 했을 때는, 이네들의 피부색은 보상받는 일을 바치던 모든 노예단속반에게 식별표시가 돼줬다. 결국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았을 경우 얻을 수 있었던 노동력은 이런 것이었으니, 한 소유주의 통제 아래 두고 고되고 지속적인 작업에 동원할 수 있었으며, 여기에 따르는 법률상의 또 관습상의 제한은 최저선까지 완화돼 있었다. 이것이 신세계에서 다른 노동 집단들이 대안으로서 갖고 있던 가능성을 닫아버린 것이다.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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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지금까지 논한 바와 같이, 감정을 배제한 냉철한 자기반성과 분석은 대다수 동료 사회 과학자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독자적인 지적 전통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가 쓸 수 있는 사상적 개념적 자원이 서구의 것밖에 없다는 슬픈 현실을 노정한다. 즉 우리는 서구의 개념적 자원과 이론적 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서구의 지적 지배를 인정하고 그에 도전함으로써 뭔가 새로운 것을 변증법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우리의 학술문화에서 하기 어려웠던 지적 도발을 하고 싶었다. 250-251

 

개인의 느낌이 다루는 주제라면 굳은 강의실에서 세미나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집에서 읽고 느낌을 가지면 될 것이다. 토론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느낌혼잣말이 부유하는 가운데 대체 무슨 놈의 접점이 생기겠는가? 접점에서 갑론을박해야 쟁점이 발화할 텐데 여기저기서 갑론을박만 무성하다. 60 ( 볕뉘 1. 조한혜정교수가 학생들과 수업하는 내용을 지적하면서 하는 내용이다. 그렇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세미나가 그렇기도 한다. 인상비평에 가깝고, 혼자도 인상만 남기고 만다. 이론의 맥을 잡고 서로 다투는 것도,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도 희귀한 일이다. 자칫 논쟁을 발화하자고 하면 비판이 아니라 비난으로 느끼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의 지적풍토의 현실이 이렇다. )

 

윌리엄스는 반영매개대신 한계짓기압력 가하기라는 은유로써 언어를 통한 인간의 상호작용 영역에서 결정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는 토대와 상부구조는 서로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토대가 이미 사람의 일상세게에 스며들어 그들의 언어와 인식, 상호작용을 가능케하는 틀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토대가 압력을 가하고 한계를 짓는다는 그의 주장을 문화유물론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윌리엄스에게 토대(물질적인 것)는 상부구조(문화)배여 있거나 녹아들어가 있는것이지,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상부구조를 원격조종하는 게 아니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역사의 진정한 전제라고 부른 물질적 삶의 조건인 토대는 속류 마르크스주의 추종자들의 주장처럼 언어나 역사적 자료와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66 ( 볕뉘 2. 80년대 학생운동은 무엇을 지향했을까? 89년 소련의 몰락과 함께 마르크스주의마저 내동댕이친 것이 우리의 실수는 아니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외치고 이해하던 것은 대부분 속류마르크스주의였을 것이다. 토대와 상부구조를 도식적으로 이해하고, 변증법이라는 것도 정반합으로 암기하고 마는 소련동구류의 인식에 그쳤는지도 모른다. 그런 몰이해와 지적인 전통과 다른 흐름을 붙잡으려는 노력은 부족하거나 현실을 보는 눈을 통해 드러나지 않았는 것 같다. 김경만저자가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은 핵심에 대한 몰이해다. 인식의 확장을 위해 깊이 들어가지 않는 사회학에 대해 내놓으라는 교수들의 지적단절이 아닌가 싶다. 더 이상 학문을 하거나 지적흐름을 살피려고 하지 않는 그 지점에 마르크스가 서 있다. 복기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속류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이러한 일련이 지적흐름을 살피는 것이 또 다른 현실에서 김경만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론을 모색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쿤에게 패러다임은 추상적인 이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소위 예시라 부른 실제 문제풀이 과정에 녹아들어가있다. 또한 그는 주어진 문제들을 풀어가는 행위/실천의 과정 자체가 바로 실재라고 주장한다. 실재 역시 문제풀이 행위에 녹아들어가 있다는 말이다. 결국 과학자들은 문제풀이라는 실천 행위와 실재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습득한다. 과학자들은 이렇게 문제풀이를 통해 습득한 실재의 경계 안에서(한계짓기!) 문제풀이, 즉 가설을 수립하거나 실험을 진행하고, 이 과정에서 쉽사리 그 경계선을 넘지 못하게끔 제약을 받는다(압력 가하기!) 67

 

생산력에 조응하는 생산관계 속 위치, 즉 주어진 계급구조 아래 특정한 계급에 위치한 사람들은 계급 하비투스를 몸에 체화하고 있는데, 이것이 일상의 모든 국면에 판단 기준으로 작동해서 사람들의 언어와 사고를 제한하고 압력을 행사한다. 69 (볕뉘 3. 계급의 특성이 달리나타난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 스펙트럼을 계층으로 포함해서 더 형식의 관점에서 넓게 봐야할지도 모른다. 그 한계를 보거나 사유할 수 있을 때 현실은 또렷하게 상이 맺히기도 하고 더 유연하게 상황을 헤쳐갈 수 있는 여력도 생기게될지 모른다. 계급에 매개하거나 녹아있는 다양한 삶의 양태들에 대한 학문의 결과물이 없다. 인식조차 없으니 그런 결과를 바란다는 것도 의아할 것이다. 문화분석이라는 형태로 뭉둥그려 해석하고 마는 것이 지금은 아닌가 싶다. )

 

윌리엄스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수정분화시켜서 지배문화’ ‘잔여문화’ ‘부상문화같은 일련의 개념들을 내놓는다. 속류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헤게모니는 피지배 계급의 동의를 전제하지만 당대 사회의식 전체를 완벽하게장악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지배적 의식에 편입되길 거부하는 과거의 지배적 사유가 잔존하고, 한편으론 지배적 의식에 대항해 새롭게 부상하는 의식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헤게모니가 있는 지배적 의식이 존재하지만, 당대 사회의식 전체는 항상 이 세 힘의 역동적 관계, 즉 지배와 저항의 동력학적 관계에 따라 형성하고, 변화하고, 이행한다. 70

 

최재천과 그를 따라하는 학자들은 이미 30년 전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논쟁을 폐기물 재생업자처럼 지금수입해 재생하는 걸까?” 80 위키피디아와 식탁류의 책들은 내용의 간략함이란 공통분모가 있다. 간결함이 왜 문제가 되는가? 어떤 주제든 간에 깊이 파고들어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학자가 논문을 쓸 때 위키피디아를 보고 짜깁기해서 쓸 수는 없다. 논문을 풀어가다 보면 반드시 깊이 파고드는논의가 필요한데, 이런 식의 짜깁기로는 깊이 들어가기는커녕 금세 바닥이 드러나고 말기 때문이다. 78 과학의 대중화니,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이니 하는 온갖 구호를 갖다붙이겠지만, 나는 이런 행태가 지적 거인들과의 힘겨운 싸움은 회피한 채 세속적인 성공을 향한 쉬운 길로 가려는 기회주의의 소산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81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미명하에 저자-출판사-미디어와의 관계를 공고히 해온 학자들은 자신이 대중적 지식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교묘히 감추고, 오히려 글로벌 지식장에서 상당한 상징자본을 획득한 저명한 학자인 양 행세한다. 85

 

한국 사회과학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서구이론이 한국에 적실성이 없는데도 무차별적으로 차용한 데 있는 게 아니라, 애당초 적실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황소걸음같은 진득한 탐색과 고구가 전혀 없다는 데 있다 92

 

항해 도중 고장난 배를 수리하려면, 배 전체를 바다 한가운데서 전부 해체해 다시 조립할 수는 없기 때문에, 배의 다른 부분들은 괜찮다고 가정하고 당장 필요한 부분을 배가 떠있는 상태에서 수리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또다른 부분을 다른 모든 부분은 괜찮다는 가정 아래 고쳐야 한다. 이 과정이 하버마스가 제시한 의사소통행위를 통한 언어게임/전통의 변화를 예시해주는 적절한 은유다. 100

 

우리는 이미 서구 사회과학의 개념적 자원과 틀에 젖어 있고 그 언어게임 안에서 움직여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현재 주어진 전통은 유교가 아닌 서구 사회과학임을 강조한다. 유교를 재해석하는 것은 여러 문제가 있고 비용면에서도 현실성이 없는 작업이다. 매몰비용을 생각하면 서구이론과 개념에 따라 연구해온 우리의 과제는 내재적 비판을 통해 서구 사회과학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지, 고비용 저효율이 거의 확실한 유교의 재활용은 아니다. 101-102

 

자료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111

 

이론은 실재나 현실을 잡아내거나 담아내기 위해 고안된 유기적으로 연결된 개념들의 망이다. 118

 

낮은 봉우리들은 최정상의 거장들을 추격하고 있는 학자, 예컨대 랜들 콜린스, 조너선 터너, 악셀 호네트, 존 오닐 등이라고 할 수 있다. 122

 

상아탑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고통이며, 지금까지 진화해온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의 망을 통해 형성된 계보나 전통 에서 논쟁해 창의적 이론을 정립하는 것만이 고통스럽지만 글로벌 지식장에서 상징이익을 거둘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129

 

하버마스나 부르디외 같은 서구학자가 방한하면 정작 자신의 주장은 까맣게 잊은 채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양 법석을 떨며 세계적인 학자이니 한국 현실에 대해 한마디 해달라고 간청하는 양면적인 모습이 우리 학술문화의 자화상이다. 우리가 글로벌 지식장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국제 미아로 전락해버린 데는 이러한 병적인 풍토와 서글픈 자화상이 한몫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131

 

볕뉘 4. 글로벌 지식장도 중요하지만 학문을 하는 사람, 학문하려는 태도와 지속성을 존중하고 지켜주는 분위기가 우선인 듯하다. 그것이 지켜진다면 관심사를 이어나가고 심화시켜 나가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사실에 기대를 걸 수 있지 않을까. 가라타니 고진을 지금을 120년전 청일전쟁의 전야와 같다고 말하면서 남북을 쇄국과 개화의 두 흐름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해서 다소 의아했다. 하지만 어찌보면 그렇게 봐도 딱히 할 말이 없기도 하다. 외부의 흐름을 소화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크게 달라진 것도 없으며 풍토또한 단 한발자욱도 나아가지 못한 것 같다. 횡행하는 반지성주의나 대중과 뒤섞여버리고자하거나 가르치고자 하는 표풀리즘이 제 살을 더 깊숙이 찌르거나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은 아파해야 할 것 같다. 지적전통이라는 것은 이렇게 바닥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현실을 읽지도 못하는 현실 안에서...볕뉘 5. 담론과 해방이후 너무 오랜만이라 지적인 단절이 있었나보다 했다. 그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어 다행이다. 독자로서 이것저것 바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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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뉘.

 

1. 매슬로우의 가장 아래단계인 안전의 욕구마저 실현시키지 못하는 상징적인 일이 지금 이땅에서 벌어지고 있다. 국가가 경제논리에 사로 잡히거나 다른 국가를 경쟁대상이나 적으로 규정하는 일이 어김없이 재현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럴 경우 정치인은 국가의 시녀가 되며, 시녀의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나라밖의 안전은 자기나라의 이익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일단 우리라도 잘먹고 잘살아야 정치수명도 연장할 수 있는 것이다. 오바마정부의 군사적인 헤게모니 전략으로 '아시아로의 귀환'은 조바심까지 보태는 듯하다. 옴 진리교의 탄저균 살포사건은 늘 대중들에게 지나간 사건으로 사라지지만, 생화학적 무기를 실험과 오용은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바이러스 폭풍]의 저자 네이션 울프는 크게 바이러스에 의한 리스크를 두가지로 보고 있다. 인위적인 보관과 살포, 실험으로 인한 것과 인수공통전염으로 인한 위험을 말하고 있다. 2011년에 쓴 책이다. 영장류나 인간이란 종은 한정되어 있지만, 바이러스는 매년 새로운 종이 출현한다. 착한 바이러스, 나쁜 바이러스라는 개념도 그렇지만 박멸을 목표로 삼는 연구개발 방향도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지 않은가싶다. 지구는 너무나 좁아져있다. 앎을 대하는 태도도 너무나 이기적인 것은 아닌가. 편의대로 정보를 끌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극단의 경우의 수를 가정하고 그 위험을 줄여나가는 것이 보다 현명하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정치인이든 생활인이든 모두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닌가 싶다. 저자는 신종플루와 동물독감이 같이 걸리는 경우의 위험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똑같이 탄저균이나 생화학무기의 전략적 실수 역시 씻지 못할 오명이 이 땅에서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우려스럽기도 하다.

 

 


 

 

그 짐승은 멈춰 서서 몸의 균형을 잡는 듯하더니 의사를 향해 달려오다가 또다시 멈추어 섰고 작게 소리를 지르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다가 마침내는 빠끔히 벌린 주둥이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져 버렸다.” 알베를 카뮈의 <<페스트>> 339

 

2009, 나는 물론이고 많은 과학자들이 유전자 재편성 reassortment을 우려했다. H1N1바이러스가 세계 곳곳에 폭발적으로 확산되면서, 동시에 사람이나 동물의 체내에서 H5N1을 만난다면 천지개벽을 일으킬 가능성이 적잖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조기에 이런 가능성을 알아내어 돌연변이를 일으킨 바이러스들이 확산되는 걸 신속히 차단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나 동물이 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동시에 감염된다면, 그는 효과적인 혼합용기 mixing vesseel가 되어, 바이러스들이 유전자를 교환할 최적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돼지독감인 H1N1에서 확산성을 물려받고, H5N1으로부터 치사율을 물려받는다면, 결국 지독한 치사율을 지닌 채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는 바이러스가 될 것이다. 23-24

 

1만 달러 이하로 인간 게놈 전체의 배열 순서를 정리하고, 휴대폰을 지상 어디에서나 사용할 만큼 거대한 텔레커뮤니케이션 기반시설이 조만간 구축될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긴 하지만, 놀랍게도 판데믹과 그 원인이 병원균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판데믹이 작은 마을에서 대도시로, 다시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기 전에 이를 미리 예측하고 예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는 것이 없다. 27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판데믹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천연두는 유력한 후보인 건 분명하다. 보유숙주로 추정되는 낙타를 가축화한 이후에 천연두는 구세계 전역에 확산되었지만, 신세계 토착민들에게는 천연두가 없었다. 그러나 약 500년 전부터 서서히 세계여행이 시작되면서 구세계와 신세계가 만나자 천연두는 신세계까지 넘어갈 기회를 얻었고, 그 결과로 면역력이 없는 수백만명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런 대륙 간 이동 덕분에 천연두는 최최의 진정한 판데믹으로 선정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147

 

항공기의 도래로 인간의 교류는 더욱 빈번해졌고, 더불어 병원균의 교환도 훨씬 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병원균의 잠복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잠복기는 한 개체가 병원균에 노출되어 감염되거나 병원균을 다른 개체에게 옮길 때까지의 기간을 뜻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병원균 중에서 잠복기가 하루 이하인 병원균은 거의 없다. 대다수의 병원균은 잠복기가 일주일 혹은 그 이상이다. 167

 

존과 그이 동료들은 1996년부터 2005년까지의 계절별 인플루엔자 자료를 분석해서 그 결과를 항공기 여행패턴과 비교했다...흥미롭게도 추수감사절이 낀 11월의 여행 성수기가 특히 중요한 듯한다. 물론 해외여행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해외여행자의 수가 줄어들면 계절별 인플루엔자 극성기가 그만큼 늦게 찾아온다. 여행자 수가 적을 때는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169

 

2004년 린더츠와 그의 동료들은 코트리부아르의 타이 국립공원에서 탄저균 때문에 침팬지들이 유사하게 떼죽음한 사건을 보고한 적이 있었다. 드야 보호구역에서 고릴라의 죽음은 이런 사례는 처음이었지만, 탄저균은 숲 유인원들의 킬러로 이미 악명 높았다. ..탄저균 포자는 오랫동안, 심지어 100년까지 생존가능하다. 만약 탄저균 포자가 수원지를 오염시켰다면 유인원들이 호수나 냇물을 통해 탄저균에 감염되었을 수 있었다. 226

 

현존하는 모든 영장류의 공통조상이 약 7,000만 년 전에 하나의 포말상 바이러스를 지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영장류가 다양하게 분기하며 종을 형성하자 그 바이러스도 따라갔다는 뜻이다. 놀랍게도 포말상 바이러스들의 진화나무와 영장류의 진화나무가 실질적으로 똑같다는 점이다. 246

 

현재 DARPA프로페시라는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며,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모든 바이러스의 자연진화를 성공적으로 예측하는 것이다. 프로페시는 세계 곳곳의 바이러스 빈발지역에서 해당 지역 현장 전문가팀의 협력과 첨단 테크놀로지를 적절하게 결합함으로써 지엽적인 집단 발병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것인지 예측하려는 프로그램이다....현재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와 판데믹에 대한 지식수준을 고려하면 DARPA가 추구하는 목표는 분명히 가능한 세계이다. 264

 

제너는 인류에게 최악의 천형이었던 천연두를 예방하는 백신을 개발해냈다. 일부 역사학자의 평가에 따르면, 천연두 백신은 역사에서 어떤 발견보다 많은 생명을 구한 최고의 발견이었다....우리에게 천연두의 박멸이 백신 덕분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천연두 박멸이라는 승리를 안겨주었던 백신은 실제로 순수한 바이러스였다. 우리는 그 바이러스를 제대로 이용하고 활용했을 뿐이다. 게다가 백신vaccine’이라는 단어도 라틴어에서 우두를 뜻하는 바리올레 바키네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리올레는 두창을 뜻하고 바키네소의라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백신이란 개념은 어떤 바이러스를 생산적으로 이용해서 다른 바이러스와 싸운다는 뜻이다. 280-281

 

겨울철에는 호흡기 질환의 전염경로를 항상 염두에 두고, 호흡기 질환에 걸리지 않으려 애쓴다. 그래서 지하철이나 비행기에서 내린 후에는 손을 씻거나, 알코올을 기반으로 한 간단한 손세정제를 이용한다. 또한 많은 사람과 악수를 나누면 곧바로 손을 씻거나, 쓸데없이 코나 입을 만지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한다. 언제나 깨끗한 음식을 먹고 깨끗한 물을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 안전하지 못한 섹스로 인한 위험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어떤 직업에 종사하고 어디에서 사느냐에 따라 대답은 달라진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만이 아니라 부자도 피해가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로 이어진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306-307

 

손을 맞잡는 대신에 팔꿈치를 맞대는 식으로 악수법을 바꾸자는 제안도 있다. 이렇게 하면 손바닥보다 팔뚝에 대고 재채기를 하는 셈이기 때문에 감염성 질환의 확산을 막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악수 대신에 한국이나 일본처럼 허리를 굽히는 인사법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한 학자는 한명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분명 한국식의 인사법이 감염성 진환의 확산을 줄이는 효과가 있으리라 예상된다. 또 독감에 걸리면 수술용 마스크를 쓰는 관습도 병원균의 확산을 억제하는 데 효과가 있다....현재의 습관을 유용한 방향으로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323

 

 


 

 

3. 호환마마도 이렇게 다시 또아리를 트는 세상에 살고 있다. 각자도생도 어려운 세상이다. 어쩌면 근본적인 것을 다시 물어야하는지도 모르겠다. 안전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그 환경을 다시 묻고 확인하는 일도 다른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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