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은 사실 사유 방식과 관련되는 일종의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 부단히 시도한다는 점에서, 또 사태 자체의 실제 상태에 근거해 스스로를 부단히 수정한다는 점에서 다른 방법과 구분되기도 합니다. 변증법을 정의하려고 시도해 봅시다. 변증법은 개념적 질서에 만족하지 않고 대상들의 존재를 통해 개념적 질서를 수정하는 기술을 수행하는 사유입니다. 바로 여기에 대립성의 계기라는 변증법적 사유의 생명 중추가 있습니다. 변증법은 사람들이 변증법이라는 말로 생각하는 것, 즉 단순한 조작의 기술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개념적 조작을 극복하고 사유와 사유 아래 포괄되는 것 사이의 긴장을 매 단계에 견뎌내려는 시도입니다. 변증법은 사유의 방법이지만 단순한 방법이 아니라 방법의 단순한 자의를 극복하고 개념 속에 개념 자체가 아닌 것을 받아들이려는 시도입니다. 18-19

 

볕뉘. 

 

1. 더위가 맺힌 어제는 습기가 적어 견딜만 했다. 엊새벽에 일어나 설친 연유로 저녁을 챙겨들자 마자 졸음을 견디지 못해 붙인 잠끝이 또 다른 새벽이다. 생각난 책과 펼쳐든 대목 가운데 하나이다. 1958년 5월 8일 첫강의, 그리고 13일 두번째 강의를 듣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가는 길 곳곳이 장미 넝쿨이다. 담장을 기웃거리거나 또렷이 쳐다보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다. 하지만 잎의 끝에 계절의 중간에 불쑥 여름을 매단 모습이 그리 반갑지는 않다. 마음처럼 표현이 되지 않아 장미를 그려넣었다. 여름인가보다.

 

2. "사유와 사유 아래 포괄되는 것 사이의 긴장을 매 단계 견뎌내려는 시도", "단순한 자의를 극복하고 개념 속에 개념 자체가 아닌 것을 받아들이려는 시도"라는 표현은 문학적이기도 하다. 이 표현 속에는 존재의 변화, 실천이 맞물려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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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란 사랑이라는 말과 미움이라는 말을 <솟아나게 하는> 사람, 그리고 그런 말들과 함께, 아직도 제 감정을 정리하지 못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과연 사랑과 미움이 <솟아나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그는 또한 말이란 <탄약을 장전한 권총>인 것을 알고 있다. 말을 한다는 것은 권총을 쏘는 것이다. 작가는 물론 침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총을 쏘기로 작정한 바에야, 어른답게 과녁을 노리고 쏘아야지, 어린애처럼 오직 총소리를 듣는 재미로 눈을 감고 무턱대고 쏠 수는 없는 노릇이다. 33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문학이라는 사물은 야릇한 팽이 같은 것이어서, 오직 움직임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을 출현시키기 위해서는 읽기라고 부르는 구체적 행위가 필요하고, 그것은 읽기의 행위가 계속되는 동안에만 존재할 따름이다. 그 이외의 경우에는 종이 위에 박힌 검은 흔적이 있을 뿐이다. 61

 

창조는 오직 읽기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에, 예술가는 자기가 시작한 것을 완결시키는 수고를 남에게 맡기기 때문에, 그리고 그는 오직 독자의 의식을 통해서만 자기가 제 작품에 대해서 본질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문학작품은 호소이다. 쓴다는 것은 내가 언어라는 수단으로 기도한 드러냄을 객관적 존재로 만들어주도록 독자에게 호소하는 것이다...예술 작품의출현은 그 이전의 여건으로서는 <설명될 수 없는> 하나의 새로운 사건이다. 그리고 이 인도된 창조는 절대적인 시작이기 때문에, 가장 순수한 상태의 독자의 자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68

 

독자의 감정은 결코 대상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어떠한 외적 현실도 그 감정을 제약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근원은 언제나 자유에 있다. 말을 바꾸면 그것은 지극히 고매한 감정이다. 나는 자유에서 우러나는 동시에 자유를 목적으로 삼는 감정을 <고매하다> 부르려는 것이다. 그래서 읽기란 고매한 마음의 실천이다. 74

 

리얼리즘의 잘못은 현실적인 것이 관조에 의해서 드러난다고 믿고, 따라서 현실적인 것에 대한 불편부당한 묘사가 가능하다고 믿은 점에 있었다. 지각 자체가 본시 편파적이고,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붙인다는 행위가 벌써 그 대상의 변용을 가져오는 이상, 그런 공정한 묘사가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87

 

고매성은 책의 바탕 그 자체라야 하고, 인물과 사물들이 만들어지는 원단이라야 한다. 주제가 어떤 것이건 간에 일종의 본질적인 경묘함이 도처에 나타나서, 작품이란 결코 자연적 소여가 아니라 <요청>이며 <증여>라는 것을 상기시켜야 한다. 작가가 내게 부정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그 부정을 냉담하게 바라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분노로서 그 부정을 생동시키고, 부정의 본질, 즉 극복되어야 할 악폐라는 그 본질로서 그것을 드러내고 창조하기 위해서이다. 88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한 작가가 진실로 참여하는 것은 꼼짝없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가장 투철하게 그리고 가장 철저하게 의식하려고 애쓸 때, 다시 말해서 자신을 위해서나 남들을 위해서 무매개적이며 자연적인 연루를 반성적인 연루로 전환할 때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작가란 무엇보다도 매개자이며, 그의 참여는 매개 행위인 것이다. 108

 

작가는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혹은 후하게, 혹은 박하게 부양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의 활동은 <무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통해서 사회가 그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은 결코 <유용할> 수가 없고 때로는 <해로운> 것이다. 유용성은 이미 구성된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그리고 이미 정해진 제도와 가치와 목적과의 관련하에서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14

 

작가는 잠재적 독자가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 작가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바로 그 이데올로기의 내부에서 자유를 위한 호소를 던진다. 그런데 잠재적 독자가 갑작스럽게 나타나거나, 혹은 현실적 독자가 서로 적대하는 파당으로 갈리게 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136

 

봉건사회에서 작가는 생산자의 사회에서 영원한 소비자이며, 기생 계급에 기생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돈에 대해서도 기생자답게 행세했다. 그의 일과 보수 사이에는 어떤 공통적인 척도가 없으니까, 그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쓰기만 했다. 따라서 가난뱅이라도 사치스럽게 살았다. 작가에게는 모든 것이 사치였다. 그의 글까지도, 아니 무엇보다도 그의 글이 특히 사치였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심지어 왕의 내실에서마저도, 그 거친 힘과 대단한 저속성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141

 

17세기에는 글쓰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의 한정된 직업 그 자체의 비결과 규칙과 관행과 그 세계 내에서의 일정한 서열을 지닌 그런 직업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18세기가 되면, 이러한 틀은 무너지고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었다. 정신의 작품은, 성공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겠으나, 모두들 이미 정해진 규범에 따라 제작되는 것이 이미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발명이며, 문예의 본질과 가치와 중요서엥 관한 작가의 결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만했다....18세기의 작가가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 부단히 주장한 것은 역사에 대해서 반역사적인 이성을 행사하는 권리였는데, 바로 이 점에서 추상적 문학의 본질적인 요청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작가의 관심은 독자들에게 더 분명한 계급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있지 않았다. 도리어 정반대로 그가 부르주아 독자에게 던진 호소는 굴욕과 편견과 두려움을 잊어버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귀족 계급의 독자에 대해서는 그 계급적 오만과 특권을 벗어던지기를 호소했다. 작가는 스스로 보편적 인간으로 자처했으므로 보편적 독자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보편성 속으로 합류하라고 채근했다. 145-146

 

종교개혁 이후 처음으로, 작가들은 공적 생활에 개입하고, 불공평한 법령에 항의하고, 소송 사건의 재심을 요구했다....독자층의 격변과 유럽인의 의식의 위기는 작가에게 새로운 기능을 부여했다. 작가는 이제 문학을 고매한 정신의 간단없는 행사 行使로 여기게 된 것이다. 151

 

부르주아지는 작가를 전문가로 취급했다. 만일 작가가 사회 질서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하면, 부르주아는 귀찮아하고 겁을 먹었다. 그들이 작가에게 요구한 것은 다만 인간의 심정에 관한 실제적 경험을 자기들에게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문학은 17세게서처럼 심리학으로 귀착한다.....작가에게 요구된 것, 그것은 세계의 야릇한 모습과 그 불투명성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요소적이며 주관적인 인상으로 분해하여 그것을 더 쉽게 소화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작가의 작품들은 부르주아의 재산목록인 동시에, 엘리트의 권리에 근거를 주고 제도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한 심리학적 감정서였고, 또한 예의 범절의 지침서였다. 결론은 미리 정해진 것이었다. 159-160

 

부르주아 혁명과 동시에 문학은 자기를 발견하자마자, 그것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수상가, 소설가, 시인들이 옹호하게 된 형식적 자유는 프롤레타리아의 깊은 요구와는 아무런 공통성이 없었다. 프롤레타리아가 요구하려던 것은 정치적 자유가 아니다...그들이 지름으로서는 아무 쓸모도 없는 사상의 자유 따위를 요구한 것도 아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이러한 추상적 자유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들은 삶의 물질적 개선을 바라고, 마음속 더 깊은 곳에서는 은연히,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의 종결을 바란 것이다. 165

 

예술가의 고독이란 이중의 속임수였다. 그것은 다수의 독자와의 현실적 관련을 은폐할 뿐만 아니라, 또한 소수의 전문가의 독자가 재구성되었다는 사실도 은폐한 것이다. 인간과 재물을 다스리는 역할을 부르주아에게 전적으로 떠맡긴 이상, 정신적인 것이 다시금 속세적인 것에서 분리되어 일종의 성직이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스탕달의 독자는 발자크이며, 보들레르의 독자는 바르베 도르빌리였다. 그리고 보들레르 자신은 포의 독자가 되었다. 문학적 살롱은 무슨 단체와 같은 분위기를 띠었다. 171

 

플로베르는 인간과 사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글을 썼다. 그의 문장은 대상을 포위하고 사로잡고 꼼짝 못 하게 하고 그 허리를 꺾어놓고 삼켜버리고 스스로 돌로 변하고 또 대상도 돌로 변화시켜 버린다. 그것은 눈멀고 귀먹고 혈맥없는 문장이다.....리얼리즘이란 다름아니라 대상에 대해서 시도한 바로 이러한 대규모의 음울한 사냥이었다. 그 목적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데 있었다. 그것이 지나간 곳에서는 이미 풀이 자라나지 않았다. 178

 

요컨대 그것은 청춘기의 문학이었다. 아직도 부모에 의지하면서도, 쓸모도 책임도 없는 처지에서 집안의 돈을 낭비하고, 아버지를 비판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호해 주었던 근엄한 세계의 붕괴를 조장하는 그런 나이 또래의 청년의 문학이었다...우리는 이 점에 비추어서 19세기의 문학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8

 

19세기가 작가에게 있어서 과오와 실추의 시대가 아니려면 18세기에 전취한 자립성을 간직하면서도, 그 자립성을 다시금 사회와 통합시켰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요구를 밝혀주고 지지함으로써, 글쓰기라는 예술의 본질을 더욱 심화시켰을 것이며, 또한 형식적인 사상의 자유와 정치적 민주주의의 사이뿐만 아니라, 사고의 영원한 주체로서 인간을 선택한다는 구체적인 의무와 사회적 민주주의의 사이에도 일치점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문체는 양분된 독자에게 지향되겠기 때문에, 내적 긴장을 다시 획득했을 것이다. 199

 

작가들이 피억압 계급의 사람들을 독자로 가질 수 있었다면..열리고 서로 모순되고 변증법적인 이데올로기가 대중들 틈에서 자라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아마도 마르크스주의가 승리했겠지만, 그것은 가지가지의 수많은 색조를 띠고, 경합적인 이론들을 흡수하고, 열린 사상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만들어진 것은 백가지가 아니라 단지 두가지의 혁명적 이데올로기였다. 우선 프루동주의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1870년 이전에는 다수파였지만, 파리코뮌의 좌절로 말미암아 분쇄되고 말았다.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가 그 경쟁자에 승리했는데, 이 승리는 외적인 힘이 그것을 그냥 없애버려 주었기 때문에 획득된 것이었다. 한데 이러한 영광 없는 승리는 마르크스주의에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했다.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생명을 잃은 것이다...교회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200-201

 

구체적 보편성이란 특정한 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 전체를 의미한다. ...문학은 그 본질상 영구혁명중에 있는 사회의 주관성이다. 그러한 사회에서의 문학은 말과 행동의 이율배반을 지양할 것이다. 하기야 문학이 행동과 똑같은 것이 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작가가 그의 독자에게 대해서 <행동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작가는 다만 그들의 자유에 호소할 따름이며, 그의 작품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독자가 무조건적인 결심에 의해서 그의 작품을 자기의 것으로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자각을 하고 자기를 비판하고 변신해 가는 사회에서는, 글로 쓰인 작품은 행동의 한 본질적 조건, 즉 반성적 의식의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11-213

 

 


 

 

 

마르크스주의를 부르주아 과학과 결정적으로 구분짓는 것은 역사의 설명에서 경제적 동인에 우위를 둔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총체성의 관점을 취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법론상의 억측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과학에서 혁명적 원리를 담지하는 범주를 총체성에서 찾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총체성이라는 범주의 지배야말로 과학에서 혁명적 원리의 담지자다.” 26

 

 

레닌상을 짧게 요약하면 바로 그의 이론적 강점은 모든 범주들을 비단 그것들이 제아무리 추상적 철학적인 범주라고 하더라도 인간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동시에 모든 행위에서는 항상 그때그때의 구체적인 상황분석에 의거하면서도 이 분석들을 마르크스주의의 원리들에 유기적이고도 변증법적으로 연관시킨다는 점이다. 그래서 레닌은 엄격한 뜻에서 이론가도 실천가도 아닌, 심오한 실천사상가라는 것, 또 열정적으로 이론을 실행에 옮긴 자이며, 이론이 실천으로, 실천이 이론으로 이행하는 바로 그 전환의 저점에서 언제나 자신의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는 자라는 것이다. 42

 

계급의식

 

이러저러한 프롤레타리아나 심지어는 전프롤레타리아트가 일시적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생각하는가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되는 것은 그들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 존재에 걸맞게 그들이 역사적으로 하지 않으며 안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신성가족>> 126

 

자본가가 만들어 내는 것은 상품이지 재화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관심은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부차적인 문제(곧 유통)에만 집착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가는-자신에게는 결정적으로 중요한-가치증식과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경제현상을 고찰하기 위한 시점으로서는, 그로부터는 가장 중요한 현상들을 전혀 간취할 수 없는 그런 시점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자본가의 관심과 시점의) 부적합성은 자본관계 자체 속에서 개인적 원리와 사회적 원리가, 따라서 사유재산으로서의 자본의 기능과 자본의 객관적 경제적 기능이 서로 해소할 수 없는 변증법적 모순상태에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보다 증가된다. 공산당 선언에는 자본은 결코 개인적 힘이 아니라 사회적 힘이다라고 띄여 있다. 150

 

자본주의적 발전의 이러한 무의식적 혁명적 원리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사회적 의식으로 고양됨에 따라 부르주아지는 이데올로기상으로 의식적인 방어태세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부르주아지의 허위의식 내에서의 변증법적 모순은 첨예화된다. 허위의식은 의식의 허위성이 된다. 처음에는 오직 객관적으로만 존재했던 모순이 이제는 주관적으로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곧 이론적인 문제였던 것이 이제, (부르주아) 계급이 모든 생활상황 및 생활문제에서 취하는 모든 실천적 입장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도덕적인 태도의 문제가 된다. 153

 

프롤레타리아트는 지식이나 조직 따위의 다른 점에서는 모두 부르주아지보다 열등하다. 그렇지만 그들이 유일하게 부르주아지에 비해 우월한 점은, 그들은 사회를 중심으로부터, 연관되어 있는 전체로서 관찰할 수 있으며, 따라서 현실을 변혁하면서 중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점, 그들의 계급의식에서는 이론과 실천이 일치한다는 점, 그 결과 그들은 의식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적인 요인으로서 역사발전을 위해 투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러한 통일을 파괴할 때,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론과 행동을 결합하여 통일시키는 힘줄을 잘라내는 셈이다. 그들은 이론을 사회발전의 징후를 과학적으로 다루는 것에서 다시 후퇴시키고, 실천을 어떤 과정의 각각의 성과에 의해서 받침대로 목표도 없이 떠밀려 다니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며 그 과정을 사상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방법적으로도 포기해 버린다. 159

 

모든 기회주의의 원천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로부터, 전체가 아니라 부분으로부터, 사실 자체가 아니라 징후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개별적 이해와 이것을 쟁취하는 것을 최후의 결전을 이 결전의 승패는 심리학적 의식이 귀속되는 의식에 접근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위한 교육수단으로는 보지 않고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어떤 것 내지는 적어도 그 자체로서 목표를 향해 인도하는 것으로 본다. 한마디로 말해 기회주의는 (개별) 프롤레타리아들의 사실적인 심리학적 의식상태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과 혼동한다. 165

 

자본주의의 산물인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을 산출한 것이 갖는 현존형태에 필연적으로 굴복할 수밖에 없다. 이 현존형태란 비인간성 사물화이다. 물론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이러한 생활형태에 대한 비판이요 부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객관적 위기가 초래되기까지는, 또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이 이러한 위기를 완전히 통찰하고 참된 계급의식을 얻기까지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사물화에 대한 단순한 비판에 지나지 않으며, 또 이런 단순한 비판으로, 부정된 것을 오직 소극적으로만 넘어설 수 있을 뿐이다. 실로 비판이 적어도 총체성을 목표로 하지 않을 때의 그 비판은 부정된 것을 절대로 넘어설 수 없다. 169

 

유토피아주의자들의 사상에는 사회적 운동과 이 운동에 대한 의식과의 이원성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피안에서 나와서 사회로 다가가고 사회를 그때까지 걸어온 잘못된 길로부터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아직 자기들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스스로 납득하여 자신을 그 일의 기관 organ으로 만드는 것을 할 수 없다. 171

 

유토피아주의적 사상이 얼마나 극복되어 있지 않은가는 발로트의 이론이나 길드사회주의의 이론과 같은 완전한 유토피아주의적 이론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구조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발전이 아직 총체성을 볼 수 있는 객관적 가능성을 자기자신으로부터 산출해 낼 정도로까지 진척되지 않은 그런 모든 영역에서이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순수하게 이데올로기적 문제인 문화의 문제에 대해 취하는 이론적 태도 및 실천적 태도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프롤레타이라트의 계급의식 내부에서 문제들의 층짓기와 경제적 이익의 층짓기가 어느 정도에 이르는 가 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전혀 연구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이것이 연구된다면 틀림없이 아주 중요한 성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173

 

 

 볕뉘.

 

1. 도련님의 시대 2,3,4권을 읽다가 말미에 1권의 세미나 기억이 올라온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도 그러하다.  근대를 삼키다시피 한 시절은 여전히 지금도 생목이 올라온다.  지난 것을 낡은 것으로 여기는 순간, 지난 날응 여기서 숨쉬지 못한다. 장애와 인종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제대로 느끼게 못하는 것 같다. 역사의 시간차이는 무엇을 하려는가? 무엇을 시도했는가로 읽혀지고 되새김되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어쩌면 유연성도 하고자 하는 것도 보이지도 않는다.

 

2. 루카치와 사르트르는 말한다. 프루동의 흐름이 끊겨 맑스주의는 더 풍부해지지 못했다. 계급의식은 여전히 총체성이나 전체성을 바탕으로 하고 변증법적 사고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문화적, 삶의 근력들이 구체적으로 구현되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3. 낡은 시선을 올려놓고 대유한다. 무엇을 건질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지금과 다른 것과 놓친 것들은 무엇인가.  서로 잇고 이어지고 그물처럼 출렁거리는 묵직한 것을 시야에서 놓쳤다면, 아예 처음부터 사유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4. 문학을 역사화하여 사유하는 사르트르의 탐색은 놀랍고 통쾌하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보다 누구를 위해 쓰는가가 더 날카롭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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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들을 조금씩 들인다. 어떻게 섞일지 잠결에 불쑥 생살이 아리는 긁힘같을 것인지 파도가 모래톱에 스며드는 것인지 생각들을 조금씩 들여 키운다 뒤섞이고 지우고 말걸고 견뎌낼지 모르지만 새벽 다시 걷는다.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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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 파스텔 ㅡ `꽃과 싸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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