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적인 방법은 언제나 내재적 비판의 방법입니다. 즉 전적으로 내가 여러분에게 방금 설명한 의미에서 사태에 외적인 기준을 사태에 적용해서는 결코 안 되며, 어떤 단언이나 단순한 착상이어서는 안 되고, 사태 자체에 도달하기 위해, 사태 자체에, 사태 자체의 개념에 근거해 평가해야 합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할 경우, 이는 결코 그가 자본주의 사회에 맞서 이른바 이상적인 사회 예컨대 어떤 사회주의적인 사회를 내세움으로써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를 어디서나 세심히 피했습니다. 이는 헤겔이 어디서도 유토피아나 실현된 이념 그 자체를 그려내는 일에 관여한 바가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이 사회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교환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회가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지 보고자 한다.....이 사회는 계약당사자로서 자유롭게 교환하는 주체들의 사회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요구가 어떤 상태인지 보고자 한다...” 66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라는 사고를 마르크스가 비판할 경우, 변증법적 방법에서는 자유와 정의의 이념이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이념과 대질되는 현실에서는 그 이념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이 제시될 뿐이며, 이로써 물론 이제까지 통용되고 있는 자유와 정의의 개념들 자체도 수정됩니다. 즉 그것들은 이제 처음 사유와 맞설 때처럼 그렇게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화됩니다. 이 모두는 아주 대수롭지 않은 듯하며, 여러분은 이 자리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변증법은 그렇게 끔직하게 나쁜 게 전혀 아니며, 모순이라는 것도 결코 그렇게 진지한 뜻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군, 그렇다면 오히려 전체는, 어느 정도 편협하지 않고 제한된 사고들을 확장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식으로 바로 전체에 도달한다는 상식의 규칙으로 귀결되는군.” 변증법에는 사실상 이러한 상식의 요소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사태가 그렇게 완전히 멋지고 그렇게 완전히 매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67

 

사태는 이렇습니다. 비판적 사고, 즉 사태를 그 자체에 비춰 평가하고 그 자체와 대질하고 사태를 더욱 밀고 가는 사고는 자체의 부정적 행위만을 주목하고, 자체의 진행과 결과를 그 긍정적 측면에서도 의식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의 표정으로 여유만만하게 사고를 넓혀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고가 정말 무조건 무자비하게 변증법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내가 지난 시간에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한 바에서, 즉 전체는 결코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며, 진리는 경직된 것 혹은 우리에게 보장된 것이 아니라 어떤 생성되는 것, 생겨나오는 것이자 결과라는 데에서 나오는 귀결입니다. 67

 

변증법적 사유에서는 우선 완성된 이론 체계가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일단 훌륭히 이론 전체를 아주 평온하게 파악한 다음 이로부터 실천적 결론들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고, 사유의 모든 단계에서 불꽃이 일면, 이 불꽃은 이론적 성찰의 극에서 실천적 행위의 극으로 옮겨붙는다는 점에서, 변증법적 사유는 전통적 사유와 근본적으로 상이합니다. 70

 

최초의 명제 혹은 최초의 원리는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는 우선 아주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들릴 수도 있고, 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어떤 제일 명제를 얻었다면 점차 더욱 풍요로운 것을 추가로 얻기 위해 그것을 더욱더 실행해가야 하지그러나 이 경우에도 나는 단지 하나의 시작일 뿐이라는 등의 개념들이 헤겔의 경우 여러분들에게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 훨씬 더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야겠습니다....헤겔의 경우 추상적이라는 개념 역시 단순히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유리된 것 혹은 개별규정이야말로 그것이 속해 있는 전체로부터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추출된’, 공제된 한에서-추상적입니다. 그리고 전체를 향한 운동인 사유의 운동 자체는 헤겔의 의미에서 구체적인 것’, 즉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향한 운동입니다....시작자체가 본질적으로 진리가 자체에 도달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71-72  19580522

 

볕뉘.

 

1.  일터 분들 가운데 동네 인근에 있는 분들과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또 다른 편견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이를 키우는 경험은 그것이 갖는 삶의 자장이 있는 것 같다. 근처의 맛집이며, 세세하기 돌아가는 장소의 이력까지...소개받은 물회집만 여러 곳이다.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부터 사람을 챙기고 대하는 것에서 단순한 능력의 차이라고 볼 수 없다. 혼자 일터-집-건강이란 동선에서 맛볼 수 없는 또 다르게 삶의 질을 결정하는 시선을 갖게 만든다. 현장과 사무실의 문턱, 사무실이 들르는 곳이 아니라 머물며 나누는 양념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전한다. . . 토스트, 만든 딸기쨈, 버터 오렌지 한조각,  쥬스 아직 아침에는 낯설다.  5월 22일의 제4강을 읽어본다.

 

2. 마르크스는 유토피아나 절대원리가 있다고 가정하여 이야기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이것은 마르크스 말투(문체)에서도 나타납니다. " 이 사회가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사회가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지 보고자 한다"로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진보는 늘 자유와 평등이 선험적인 것 마냥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주의자가 생기고 전진과 발전에 발목을 잡혀, 처지고 버려지는 것에서 사유를 시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진보는 없습니다.

 

루쉰은 늘 이런 주의자들을 경멸했습니다. 진보나 보수나 그 흘리는 변들을 감당하기도 벅차 모두 똑같다라고 했습니다. 이념과 원리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는 것에서 아도르노는 또한 처절하고 아픈 삶을 살아냈습니다. 이땅은 온갖 혁명이 존재하고 있다. 평균적인 이상의 삶을 사는 저자의 책은 보지 않는다는 정희진도 빼어 닮았다고 여깁니다. 진보가 그림에 사로잡히고 그 그림자를 잡으려고 애를쓴다고 해도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면에서 이 땅에는 진보가 없습니다. 아예 없다고 해야합니다. 어쩌면 시작을 달리해야 할 것입니다. 정의와 평등과 자유는 없다라고 말입니다. " 이 무리들은 스스로 진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진보가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지 보고자 한다"로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낮잠이 아니라 묘지에 비석같은 변증법 타령 이제 그만 하겠습니다. 하지만 1958년 6월 3일 [변증법 입문] 제5강이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2015년 6월 3일도 있으니 말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죠.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시작하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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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3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4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리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이 과정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사유과정의 끝에서야 비로소 등장하지만, 이러한 등장은 과정에 대해 단순히 외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결과 속에는 그 과정이 지양되어 있고, 이 전체 과정 자체는 본질적으로 이 진리에 속하며, 마치 그것이 단순한 예비학인 것처럼, 여러분이 이제 얻어내고 찾아낸 그 결과에서 간단히 빼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51

 

 

변증법은 현상이 자체에 근거해서는 이해될 수 없어서 도식적으로, 또 기계적으로 전체를 밖에서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아니라, 개별 현상을 조명하고 이 개별 현상에 머물면서 개별 현상을 규정하되, 바로 이 규정을 통해 그것이 자체 내에서 스스로를 넘어서고, 이로써 바로 그 전체, 바로 그 체계에 이르기까지 투명해지도록 하려는 시도입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변증법적 사유가 일단 실제로 순진한 과학자라고 할 수 있는 우리에게 제기하는 요구, 즉 한편으로 완고한 전문가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개별 현상들에 머물지 말고 그것들을 총체성 내부에서-그 속에서 비로소 그 현상들은 기능하고 의미를 얻게 됩니다-인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또한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총체성, 이 전체를 실체화하지 말고, 즉 독단적으로 외부로부터 끌어들이지 말고, 이러한 이행을 언제나 사태 자체에 근거해 수행하라는 요구입니다. 53...변증법은 어떤 처방이 아니며 진리 스스로가 드러나게 하려는 시도라는 점이야말로 바로 변증법의 본질인 것입니다. 54

 

 

볕뉘. 어제는 마음이 착잡하였다. 산재교육 겸해서 울렁거리는 사진을 봐서인지, 근거없이 돌변해서 부는 선선한 바닷바람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무작정 걷고 싶기도 하였다. 걷다보면 바다가 나올까 하고 단촐한 차림에 휴대용 물병을 들고 어슬렁거렸다. 천변을 걷다보니 공사중인 다리에서 마음도 멈추어 버렸다. 바다에 가는 길은 없다. 냉천은 흘러가지만 나는 더 갈 마음이 막혔다. 그래서 돌아선다. 돌아서고 길을 건너고 시끄러움을 후회하면서 걸었다. 그리고 문화 몇호 몇호라고 적혀있는 도로가 아주 넓은 단층 주택가를 거닐었다. 저 집에 살아볼까, 나무가 제법이고 아담한데  아니 시끄럽지는 않을까. 시끌벅적하기에는 너무 조밀한데 이러면서 완보를 즐겼다.  그렇게 걷다나니 맥주 한잔이 필요하다.  맥주한잔에 정치학의 자본론이라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과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만지작거렸다. 짧고 굵은 단문들은 그때 그때 긴장감이 넘쳤다. 순간순간을 넘어가지 않았다. 긴장이 맺혔다. 역시 대가들의 글이란....프루동과 논쟁하는 모습의 마르크스,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가 빠진 메이지인의 일본을 상상할 수 없다. 세상은 시대와 논쟁하지 않는다. 시대를 뚫고 가려하지 않는다. 어디서 들은 절대원리를 빌리거나, 떨어진 진리를 줏어다가 시늉을 한다.

 

진리는 하루하루를 산다. 진리는 과정이자 결과이다. 진리는 결과이다. 결과의 한점으로 사태는 빛을 발하기도 하고 달라지기도 한다. 묵묵한 긴장들 사이사이 팽팽함이 결과의 한점으로 구체와 맥락을 살린다. 1958년 5월 20일 제3강을 듣고보다.

 

모임일로 긴통화를 했다. 진리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상황을 묵묵히 살아내고 또 다른 지점에서 또 다른 긴장을 불러내고, 주문한 나도 바뀌고 그리고 그 결과의 마지막 지점에서 모두 다시 한번 바뀌는 것이라고 진리는 과정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냥 잘해보자고 말했다. 존재, 주체, 객체, 나와 너 모두에 관여되기에 괜찮은 사유다라고 여긴다. 나에 대한 주문, 너에 대한 주문, 진리에 대한 주문이 다르지 않다. 방법을 달리해야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아직까지는, 이것이 오늘 느낀 소회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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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뉘.  상상002호가 발간되고, 이회영, 한용운, 정약용을 만나는 답사가 몇 좌석 남지 않았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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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네트워크, 사물인터넷, 데이터 마이닝, 빅데이터, 관계, 권력,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 사람 한병철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금속 을 만지고 다루는 것을 좋아하던 그가 사고로 독일로 건너가 철학을 한다. 디지털 무리가 왜 좋아요의 현상학에 잠식되어 나르시스트, 우울증, 정보과잉증후군에 시달리는지, 왜 시민이 아니라 소비자에 머물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게된다. 빅데이터로 돈? 벌고 싶다면 일괄독서를 추천한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당신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네/요를 깔고 아주 가벼운 이불을 덮고 있네/한층의 재가 당신의 몸을 덮은 듯하네/눈도 입도 코도 가늘어지고 작아지고 낮아졌네/당신은 아무런 표정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네/서리가 빛에 차차 마르듯이 숨결이 마르고 있네/당신은 평범해지고 희미해지네/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의 몸이 된 당신을 보네/오래 잊지 말자는 말은 못하겠네/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네/우리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네

 

우리는 가볍게 웃었다

 

시골길을 가다 차를 멈추었다/백발의 노인이 길을 건너고 있었다/노인은 초조한 기색이 없었다/나무의 뿌리가 뻗어나가는 속도만큼/천천히 건너갈 뿐이었다/그러다 노인은 내 쪽을 한번 보더니/굴러가는 큰 바퀴의 움직임을 본떠/팔을 내두르는 시늉을 했다/노인의 걸음이 빨라지지는 않았다/눈이 다시 마주쳤을 때/우리는 가볍게 웃었다

 

볕뉘. 창가에 햇살이 곱다 커튼 사이로 비추는 사선, 저자 한병철을 읽다가 스마트폰과 IT에 광분?하는 사람들과 미리 나누고 싶단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 자화상이면 좋겠다 싶다. 마지막을 발판 삼아, 디지털의 심연이 깊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 또한 욕심일 것이다. 가볍게 씩 웃는 때가 다시 올까. 말하지 않아도 많은 말을 하는....말끝과 돌아섬의 이유를 헤어지고 난 뒤 곰곰이 삭힐 줄 아는 때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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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사회

 

게오르그 짐멜은 “...생산적인 관계의 깊이는 드러난 모든 마지막 진실 뒤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궁극의 최종적 진실이 있음을 예감하고 이를 존중하는데서 나오며,......인격 전체로 연결된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조차 내면이 사유재산을 존중하고 질문의 권리를 비밀의 권리로 제한하는 섬세함과 자제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투명성의 강제에는 바로 이러한 섬세함, 즉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다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 18

 

긍정사회는 부정적 감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괴로움과 고통을 대하는 법, 그러한 감정을 형식에 담는 법을 잊어버린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 영혼의 깊이, 위대함, 강인함은 바로 부정적인 것에 머무름으로서 나온다. 인간 정신도 산고의 결과이다. 21

 

전시사회

 

전시되는 사회에서는 모든 주체가 스스로를 광고의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것이 전시가치로 측정된다. 전시되는 사회는 포르노적 사회이다. 모든 것이 겉으로 나오고, 벗겨지고, 노출된다. 과도한 전시의 결과로 모든 것이 어떤 비밀도 없이 즉각적인 소비에 내맡겨진상품으로 전락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모든 것을 전시의 강제 아래 복속시킨다. 오직 전시적 연출만이 가치를 생성한다. 사물의 고유한 형태는 폐기된다. 사물들은 어둠 속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조명 속으로 사라진다. 32

 

명백사회

 

비밀의 해석학은 투명성을 위해 어떻게 해서든 폐기해야만 하는 악마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술, 다시 말해 설사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할지라도 뭔가 깊이를 창출하는 문화적 기술이다. 47

 

포르노사회

 

아감벤의 포르노적 벌거벗음에 희생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품이다. 아감벤에게 기품은 신학에서 기원한 것이기에 의심스럽다. 기품은 은총과 가까운 사이다. 아감벤은 몸의 기품이 몸을 도구로 만드는 목적 지향적 운동을 통해 생겨난다는 사르트르의 테제에 의존한다. 하지만 도구는 목적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결코 기품을 지닐 수 없다. 도구는 목적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고 달려든다. 반면 기품에는 뭔가 굽은 것, 우회적인 것이 내재한다. 기품은 몸짓과 형식의 자유로운 유희, 행동을 슬쩍 돌아 나가며 목적의 경제에서 이탈하는 유희를 전제한다. 52

 

보들리야르에 따르면 에로틱한 유혹의 힘은 타자 자신에게조차 영원히 비밀로 남아 있게 될 어떤 것에 관한 예감, 내가 결코 알 수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밀의 봉인 속에서 매촉적으로 느껴지는 타자의 어떤 부분과의 유희 속에서 발휘된다. 포르노적인 것은 매력적이지도 않고 암시적이지도 않다. 포르노적인 것은 전염시키고 자극할 뿐이다. 여기에는 유혹을 위해 필요한 거리가 없는 것이다. 애로틱한 매력에는 박탈의 부정성이 필수적이다. 57

 

많은 경우 푼크툼은 즉시 발현하기보다는 뒤에 가서야 머물러 회상하는 의식에 나타난다. “그러니까 푼크툼이 대단히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나중에 가서야, 내가 사진을 더 이상 눈앞에 두고 있지 않은 채 다시금 사진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에서야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음악은 눈을 감을 때 비로소 발생한다. 60

 

가속사회

 

목적을 초과하여 가속화되는 과다활동, 과다 생산,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외설적이다. 이러한 과다한 가속화는 진정한 활동성과는 거리가 멀고, 또한 그것을 통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도 없다. 과다한 속도는 그 과도함 때문에 본래의 목표 지점을 지나쳐버린다. 64

 

이야기는 선택 작업을 수행한다. 서사의 궤도는 좁다. 오직 특정한 사건만 서사의 궤도 속에 들어올 수 있다. 이로써 긍정적인 것의 마구잡이 증식과 대량화가 방지된다. 오늘의 사회를 지배하는 긍정성의 과잉은 이 사회에서 서사성이 사라졌음을 방증한다. 기억 또한 그러한 변화의 영향을 받는다. 기억은 서사적이라는 점에서 그저 덧붙이고 쌓기만 하는 저장과 구별된다...데이터에는 역사가 없다. 고물가게는 기억도 망각도 하지 못한다. 69

 

친밀사회

 

소셜미디어와 개인화된 검색엔진은 네트워크 내에 외부가 제거된 절대적인 인접공간을 수립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에는 변화를 가능하게 할 어떤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디지털 이웃 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체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린다. 인터넷은 친밀성의 영역, 혹은 아늑한 지대로 변모한다. 모든 먼 것이 제거된 가까움 역시 투명성의 한 가지 표현 형식이다. 74

 

친밀성의 독재는 모든 것을 심리화하고 개인화한다. 정치도 친밀성의 지배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행동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일반의 관심은 오히려 정치인 개인에게 쏠려 있고, 이는 정치인들로 하여금 이미지 연출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공론의 상실 뒤에 남은 빈자리 속으로 내밀한 것, 사적인 것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공론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사적 개인의 공개다. 이로써 공론의 장은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공동의 행위를 위한 공간이라는 본래의 의미는 점차 퇴색되어간다. 74

 

친밀사회는 제의화된 동작과 격식을 갖춘 행동을 불신한다. 그런 것들은 겉치레이고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제의는 탈개인화, 탈인격화, 탈심리화를 촉진하는 외면화된 표현 형식들로 이루어진다. 제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표현적이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전시하거나 노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친밀사회는 심리화되고 탈제의화된 사회다. 그것은 고백의 사회, 노출의 사회, 거리를 모르는 포르노의 사회다. 76

 

친밀성은 감정적, 주관적 흥분을 위해 객관적 놀이의 공간을 파괴한다. 제의와 예식의 공간에서는 객관적 기호들이 유통된다. 이러한 공간은 나르시시즘적 자아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텅 빈 부재의 공간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과의 거리 없는 친밀성, 즉 자신에 대한 거리의 부재에서 온다. 친밀사회의 거주민은 나르시시즘적 친밀성의 주체들로서, 이들에게는 연극적 거리두기의 능력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 이에 대해 세넷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경험을 찾지 않는다. 그는 체험하고자 한다 무엇을 대면하든지 거기에서 자기 자신을 체험하려는 것이다. 그러하여 그는 모든 상호작용, 모든 연극적 장면을 폄하한다.” 세넷에 다르면 오늘날 나르시시즘에서 기인하는 심적 장애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의 사회가 내적인 표현 과정을 심리학적으로 조직화하고, 개개인의 경계 밖에서 일어나는 의미 있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의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친밀사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제의적, 의식적 상징들을 제거한다. 경험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반면 체험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볼 뿐이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지 못한다. 그에게 현존재의 경계는 흐릿하다. 그런 까닭에 안정적인 자아의 이미지도 생겨나지 못한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과 너무나 밀착되고 융합되어버려서, 그에게 자기 자신을 데리고 노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울해진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친밀성 속에서 익사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자기와 거리를 두게 해주는 공허와 부재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76-77

 

통제사회

 

신뢰는 오직 지와 무지의 중간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신뢰는 타인에 대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그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게 한다. 신뢰는 무지에도 불구하고 행동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신뢰란 것은 아예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투명성이란 모든 무지가 제거된 상태를 뜻한다. 투명성이 지배하는 곳에서 신뢰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98

 

투명사회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단지 공동의 관심을 좇거나 하나의 상표를 중심으로 모인 여러 에고의 집합(브랜드 커뮤니티)처럼, 고립된 개인들의 우연한 무리가 생겨날 뿐이다....무리에는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브랜드 커뮤니티와 같은 무리는 어떤 내적 응집력도 없는 가산적 구성체일 뿐이다. 소비자들은 자발적으로 그들의 욕망을 조종하고 충족시키는 파놉티콘적 관찰의 시선에 몸을 내맡긴다...결국 사회적인 것의 착취로 되돌아온다. 소비자가 누리는 가상의 자유에는 어떤 부정성도 없고, 시스템을 의문시할 어떤 외부도 만들지 못한다. 100-101

 

무리 속에서

 

격분사회

 

디지털적 격분은 행동도 이야기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강력한 행동의 힘도 펼치지 못하는 감정적 상태일 뿐이다. 전반적인 산만함을 특징으로 하는 오늘의 사회는 분노의 서사적 에너지를 생성하지 못한다.....분노는 기존 상태를 중단하고 새로운 상태를 시작하게 하는 능력이지만 오늘날 격분하는 군중은 극도로 덧없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다. 그들에게는 행동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질량과 중력이 조금도 없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하지 못한다. 126

 

무리 속에서

 

디지털 무리는 그 속에 영혼, 정신이 없다는 점에서 이미 군중과 다르다. 영혼은 모여들고 통합되는 성질이 있다. 반면 디지털 무리는 고립된 여러 개인으로 이루어진다. 군중의 구조는 이와 전혀 다르다. 군중은 개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특성을 드러낸다. 개개인은 하나의 새로운 통일체로 융합되며, 그 속에서 자기만의 특징을 잃어버린다....디지털 무리는 하나의 목소리로 표출되지 않는다. 악플도 하나의 목소리는 아니다. 그 때문에 악플은 소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129

 

탈매개화

 

대표는 종종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 필터의 기능을 담당한다. 대표는 선별 작업을 통해 정선된 것을 내놓는다. 이를테면 출판사는 수준 높은 도서목록으로 사회의 문화적, 정신적 발전에 기여한다. 이로써 언어의 문화적 수준이 높아진다. 기자들은 최고의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때로 생명의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면 탈매개의 경향은 많은 분야에서 대중화를 초래한다.....“나는 곧 나의 독자라는 말은 나는 곧 나의 유권자라는 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말은 진정한 정치가, 즉 자신의 관점을 고수하면서 유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나름의 비전으로 유권자를 한발 앞서 가는 정치가의 소멸을 의미한다. 정치적인 시간으로서의 미래는 사라져간다. 139-140

 

영리한 한스

 

커뮤니케이션에서 언어의비중은 매우 작다. 몸짓이나 얼굴 표정과 같은 비언어적 표현 형식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더 본질적이다. 이러한 요소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은 촉각적 특징을 띠게 된다.여기서 촉각성이란 단순히 신체 접촉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각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들도 관련되어 있는 인간 지각의 다차원성과 다층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디지털 매체는 커뮤니케이션에서 촉각성과 육체성을 제거해버린다. 145

 

스마트폰은 복합적이지 않은 입력-출력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디지털 기기다. 스마트폰은 모든 부정성을 제거한다. 이로써 사람들은 복합적인 방식으로 사유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스마트폰은 상당한 시간적 넓이 또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는 행동 방식도 위출시킨다. 스마트폰은 즉흥성과 근시안적인 태도를 장려하고 긴 것과 느린 것을 소외시킨다. 빈틈을 알지 못하는 좋아요버튼은 긍정성의 공간을 생성한다. 타자의 침입으로서의 경험은 거울 앞에서의 상상적 자기 반영 과정을 중단시킨다.그러나 디지털에 내재하는 긍정성은 그런 경험이 가능성을 축소시킨다. 디지털의 긍정성은 동일한 것을 이어갈 뿐이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아니 모든 디지털적인 것으로 인해 부정성을 대하는 능력이 약화되어간다. 146

 

손에서 손가락으로

 

디지털 기기는 이동성을 무기로 모든 곳을 일터로, 모든 시간을 일의 시간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착취한다. 이동성이 가져온 자유는 어디서나 일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강제로 돌변한다. 기계의 시대에는 기계가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미 일과 일이 아닌 것이 명백히 구분되어 있었다. 일하기 위해서는 일부러 일터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모두가 일터를 몸에 지고 다닌다. 이동식 노동수용송를 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더 이사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63

 

주체에서 프로젝트로

 

오늘의 사회는 서로를 돕는 이웃 사랑의 사회가 아니다. 이 사회는 우리를 따로따로 떼어놓는 성과사회다. 성과주체는 쓰러질 때까지 스스로를 착취한다. 또한 성과주체에게서는 자기 공격성이 자라나며, 이는 드물지 않게 자살로 귀결된다. 아름다운 프로젝트로서 자아는 자기를 겨냥하는 탄환임이 드러난다. 182

 

대지의 노모스

 

정신은 타자를 대면할 때 깨어난다. 타자의 부정성이 정신의 생명을 유지한다. 자기 자신과 관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 자기 속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은 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정신의 특별한 능력은 자신의 개별적인 직접성에 대한 부정을, 무한한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타자의 부정성을 완전히 떨쳐버린 긍정성은 죽은 존재로 쪼그라든다. “자기 자신과의 단순한 관계에서 탈출하는 정신만이 경험을 할 수 있다. 고통이 없고, 타자의 부정성이 없고, 긍정성만 과다한 경우에 경험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어디나 돌아다니지만 경험에는 이르지 못한다. 사람들은 끝없이 수를 세지만 이야기할 줄 모른다. 사람들은 온작 것에 대한 정보를 얻지만 어떤 깨달음을 얻지는 못한다. 타자에 직면할 때 찾아오는 문턱의 감정, 즉 고통은 정신의 매체다. 정신은 고통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고통스러운 삶을 묘사한다. 반면 디지털의 현상학은 정신의 변증법적 고통과 무관하다. 그것은 좋아요의 현상학이다. 187

 

디지털 유령

 

데체 어떻게 편지를 통해 사람들의 교제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멀리있는 사람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가까이 있는 사람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다 인간의 힘을 벗어난 일입니다.” 카프카는 편지조차 비인간적인 매체로 보았다...인류는 유령과 맞서싸우기위해 철도와 자동차를 발명했다. 하지만 영혼의 평화를 얻는 방편과 달리 전화와 전신이 발명되었다. “유령들은 굶어죽지 않을 테지요. 하지만 우리는 멸망할 겁니다.”라고 카프카는 결론을 내린다. 188-189

 

정보의 피로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로 인해 사물을 본질적인 부분으로 축소하는 능력에 손상을 입은 것이 틀림없다. 사유를 위해서는 구분과 선별의 부정성이 필수적이다. 사유는 언제나 배제하는 작용이다. 197

 

정보피로증후군에서는 우울증에 특징적인 증상도 나타난다. 우울증은 무엇보다도 나르시시즘적인 질병이다. 우울증을 낳는 것은 병적일 정도로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태도다. 나르시시즘적 우울증의 주체는 자기 목소리의 반향밖에는 듣지 못한다. 그러한 주체는 어떤 면에서는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것에서밖에는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에게 세계는 자아가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신에 의해 소진되고, 녹초가 되어, 자기 속에서 익사하고 만다. 오늘날 사회는 점점 나르시시즘적으로 된다...소셜미디어는 나르시시즘적 매체다. 198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 또한 IFS의 증상에 속한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일정한 정신적, 시간적 조건에 결부되어 있는 행위다. 책임은 우선 구속되어 있음을 전제한다...약속이나 신뢰와 마찬가지로 책임 역시 미래를 묶어둔다. 199

 

 

재현/대표의 위기

 

예전에 정당이나 협회를 통해 스스로를 조직하고 일정한 이념의 정신 속에서 뭉치던 군중은 순전히 단독자들, 즉 각자 고립되어 있는 디지털 히키코모리들의 무리로 해체되었다. 그들은 공중을 형성하지 않고 공적인 논의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자기지시적 시스템과 대면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고립된 개인들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행동할 수 있는 정치적주체로서의 우리는 해체되어버렸다. 203

 

시민에서 소비자로

 

쇼핑은 토론을 전제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마음에 드는 것을 사면된다. 그는 개인적 취향을 따른다. 좋아요는 소비자의 구호다. 그는 시민이 아니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시민을 시민으로 만든다면, 소비자에게서는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통치도 마켓팅에 가까워진다. 정치에 관한 여론조사는 시장조사를 닮아간다. 유권자들의 분위기는 데이터 마이닝으로 탐색된다. 부정적인 흐름이 발견되면 곧 좀더 새로운 상품이 투입되어 분위기를 바꾸어준다. 이때 우리는 더 이상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시민이 아니라 수동적인 소비자일 뿐이다. 208-209

 

볕뉘.

 

1. 시간이 한참 지난다. 메모를 남겨두는 책들이 늘어나다보니 이렇게 기억을 더듬는다. 나르시시즘의 구조와 맥락이 명쾌하여 몇번을 되삼켜본다. 타자의 경험이라는 말도, 체험과 경험의 차이라는 것도 고정관념에 비켜있어 쉽지 않다. 이렇게 아둔하게 되짚고 남겨두고 나서야 조금 느낌이 온다.  삶의 격에서 존엄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내가 남을, 남이 나를 되보는 시선을 말한다. 그리고 내가 나를 보는 시선이 추가되었다.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2. 나르시시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존엄을 지킬 방법을 강구하지 못한다.  디지털에 낚이지 않았다고,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다. 소셜네트워크 중독이자  과잉증후군을 앓고 있는 나르시시트이다.

 

3. 디지털 무리는 나-너가 없다. 나밖에 있을 수 없다. 저자가 좋아요의 현상학을 헤겔의 정신의 현상학에 대유하여 끝없이 짚는다.

 

4. 나속에 침잠하는 나, 디지털 무리에 익사지경에 빠진 나.......공허와 부재도 타자도 없는 나만의 나, 디지털 히키코모리임을, 그럴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는 것이 먼저이지 않을까.

 

5. 진화의 과정은 어쩌면 늘 단순한 것일 수 있다. 산위에 물방울이 내려오면서 나뭇가지, 돌부리 하나가 진화의 계통도를 바꾼다. 어쩌면 우리도 그런 지점에 서 있다. 돌부리나 나뭇가지 하나에 우리의 인성이나 사고패턴, 대응까지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이다.  첨언하여 사회-경제적 맥락의 차이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까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6. 상황에 너무도 빠르게 떠내려가고 있다. 어느 것 하나라도 부여잡아야 할 것이다. 부표나 통나무일지라도...그리고나서 다시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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