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는, 역사적 실재이든 사회적 실재이든 개별적 실재이든, 반립적 역동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서로 반립하지만 서로를 반대방향으로 나가게 함으로써 스스로가 존재하는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자신에게로 환원시킨다든지 양자를 통일시킨다든지 하는 것은 이미 실재와 거리가 먼 설명이 되고 만다. 마치 막대 자석같다고 할까? 양극이 음극을, 또는 그 반대로 음극이 양극을 자신에게로 통합시키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자석이 아닐 것이다. 한낱 쇠막대기일 뿐이다. 같은 논리는 세속주의적 정치적 극단과 메시아주의적 종교적 극단의 관계에서도 주장된다. 양자는 역설적 전도의 관계에 있다. 12

 

인간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 때,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제 그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럴 때 그의 절망적 삶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침몰한다는 것은 언제나 사물의 근저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4

 

인문주의의 유럽 대륙을 떠나 절대의 바람을 돛폭 가득히 안고 역사의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는 그 배는, 애태우는 천사의 암묵적 의도의 명시적 시행이기라도 한 듯이, 인문주의의 유럽 대륙을 떠나 잃어버린 낙원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구원을 향해 재난을 넘으며 지그재그이 항해술을 발휘해야 하는 이 빈곤호의 진행 방식은 부정의 부정을 연속해야 하는 부정의 변증법을 형상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천사의 발 앞에 쌓이는 재난의 파편더미들과 함께 빈곤호의 앞길에 놓인 재난들은 치유를 기다리는 과거의 한과 원망들인 것이다. 16

 

로티에 의하면 우리가 우리의 맥락 연관을 뛰어넘는 일은 전혀 있을 법한 일이 아니다. 사리가 이러한 한, 자신의 맥락 연관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하며, 타인의 맥락 연관을 자신의 것보다 열등하지 않은 것으로 존중해 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양한 학문과 문명의 표상들을, 이들 간의 어떤 위계 질서를 만들려는 강박감을 느끼지 않고, 단지 인간 조건의 상이한 기술들로 여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심지어 학문과 철학이 진리의 문제에 직면하여 어떤 특권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회화와 시작에 못지 않게 음악에도 진리가 있다. 그리고 더 이상 철학에는 진리가 있지 않다. 155

 

리요타르가 포스트모던의 지식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의 기본적 사유가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계몽, 관념론, 마르크시즘 등의 대서사이다. 이들에 담겨 있는 정치적 억압, 무지, 빈곤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이라는 의도는 실제에 있어 실천적으로 더 많은 테러를 되풀이하여 유발시켜 왔다. 156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한계에 대한 불쾌감은 동시에 우리가 이성적 존재라는 사실과 관련한 쾌감을 동반한다. 리요타르는 독특하게 인간의 자아 실현을 이러한 비주관적 차원에서 찾는다. 이런 까닭에, 더 나아가 그는 의사 소통이 도덕적 행위의 전제라고 주장하는 로티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간은 도덕적인 의미에서도 개별적으로 격리되어 있다...우리 자신의 문제들을 능동적으로 우리의 통제 아래 두고 있다는 생각과, 우리가 특정 규범의 타당성에 관하여 타인과의 논증적 담론을 통해 의견 일치에 도달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때에야 비로소 인간의 행위는 성공할 수 있게 된다. 158

 

벤야민은 언어를 일차적으로 어떤 의사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세계의 길항적 본성을 말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용어로 본다. 이것은 현재의 현상들을 그들의 과거에 입각하여 탐구할 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대도시, 파리의 회랑 상가, 바로크 시대의 독일 비극, 그리고 계단 밑 어두운 구석에서 울리고 있는 전화, 이 모든 것들은 언제나 선사의 고전적 시대로부터 들려오는 원형 현상을 가리키는 구체적 전거로 읽혀질 수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세계를 텍스트화함으로써 일찍이 씌어진 것이 없는 것을 독해한다라는 도전적 프로그램의 차원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이 텍스트에 다가가는 것은 곧 그 대상 못지 않게 길항적 성격을 지닌 방법을 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을 통해 뭔가를 전달하는 한편 이름을 통해 자기 자신 즉 영적 본질을 전달하는 언어의 모호성은 세계를 가로지르는 틈새이다. 이 근본적 가설이 벤야민의 방법론을 규정하고 있다. 160

 

볕뉘. 몇권을 같이 읽고 있다. 비가 오늘도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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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사상사 세미나

 

2015-07-04

 

21세기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미래지향적 대전략에 관한 보다 객관적인 토론의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이를 위해 이미 정치화되어 있는 과거와의 새로운 대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10

 

 

이 책을 관통하는 필자의 문제의식이나 관점을 몇 가지 밝혀둔다. 첫째, 과거 2천 년간 한반도인들이 상대했던 중국대륙의 실체는 단일하지 않으며 복합적이라고 하는 개념을 보다 분명히 하고자 했다. 노마드 또는 북방민족 세력들이 중국사의 정체성 형성에 개입하고 참여한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둘째, 흔히 중화질서로 불리는 중국적 세계질서에서 중화제국과 한반도를 포함한 주변 국가들 사이에 존재했던 국제관계를 지배와 종속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반적인 경향을 비판하고자 했다. 조공과 책봉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제관계 양식은 강대한 세력과 약소사회들 사이의 전쟁과 평화를 규율하기 위해 전통시대 동아시아가 창안해낸 국제적 규범과 제도였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셋째, 중국대륙이 하나가 아니라면 한반도인들의 지정학적 정체성 역시 하나가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고조선과 고구려 등 한반도 북부 세력의 지정학적 정체성은 내륙 아시아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한다. 넷째, 한반도에서 중화권적 세력이 패권을 장악한 8세기 이래 한반도인들이 전쟁의 참화를 겪게 되는 것은 중화제국이 아니라,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 북방 노마드 세력이 제3의 세력을 형성한 삼각구조에서였다. 중국이 강할 때가 아니라, 중국 중원이 약해지고 혼란에 빠질 때마다 한반도의 국가는 삼각구조의 함정에 빠졌다. 다섯째, 한반도가 중화제국과 북방의 제3의 세력 사이에 끼는 삼각구조하에서는 언제나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결정론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결정론은 한반도인들이 전쟁과 평화에 대해 어떤 전략과 외교적 노력을 벌이든 전쟁은 피할 수 없다는 논리로 흐르게 된다. 이 논리는 전통시대 동아시아에서 중국대륙과 한반도 사이의 전쟁과 평화를 모두 외세의 침탈과 그에 대응한 민족적 항쟁이라는 논리적 구조로 이해하게끔 몰아간다. 11-13

 

 

5장 고려시대 아시아 대륙과 한반도 마의 삼각구조 속의 전쟁과 평화

 

우리 역사 서술의 문제 중국대륙의 국가들과 한반도의 전쟁은 무엇이든 침략에 대한 항쟁이라는 차원으로 인식한다. 전쟁이 초래된 원인과 관련해 한반도 국가의 외교적 또는 정치군사적 정책에 책임을 묻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둘째, 특히 북방민족들과의 전쟁에 대해서 그 전쟁의 예방을 위한 한반도 국가의 노력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는다. 예방외교 등...339

 

고려시대 동북아 질서이 핵심적인 특징은 한반도의 국가가 끊일 새 없이 마의 삼각구조에 놓였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대륙은 중원을 지배하는 중화세력과 만주를 포함한 북중국을 지배하는 세력이 분리되어 패권을 다투며 각축했다. 고려는 그 둘 사이에 끼인 삼각관게 속에서 거의 놓여나지 못했다.....조선 오백 년의 역사에서 조선이 중국대륙과의 관계에서 그러한 마의 삼각관계에 빠진 것은 명청교체기인 17세기 전반의 일로 국한되는 것이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시기가 바로 그러하였다. 반면에 고려조 470여 년은 그 대부분의 기간인 350년에 걸쳐 마의 삼각관계가 동북아에 형성되어 있었다. 327-328

 

고려시대 만리장성 이북 또는 북중국의 지배자가 거란에서 여진으로 그리고 다시 몽골로 이동하면서 중원-북방-고려 사이 삼각관계는 세 차례에 걸쳐 반복된다. 이 셋 중에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것을 몽골족의 침략이었고 그 다음이 첫 번째 거란의 연달은 침략이었다. 328

 

후삼국 통일 수 고려-중원-북방의 삼각구조의 성립(-서하-거란)

 

고려의 원교근공전략과 거란과의 전쟁 고려가 송과의 관계에 집중한 이유는 거란에 대한 경게도 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란의 동태도 면밀하게 살폈어야 한다. 고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거절에 대해 거란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방심하였다. 고려의 방심은 북방에 이웃해 있던 여진이 거란의 거병 소식을 여러 차례 전해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래서 993년 소항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 왔을 때에야 황황히 군사를 모아 대응하였던 것이다. 고려의 대전략은 원교근공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멀리 있는 나라를 숭배하되 가까운 이웃은 멸시하는 원숭근멸의 자세에 불과한 것이었다. 343 서희의 담판

 

고려의 정변과 거란의 2차 침략

거란의 3차침략 천리장성, 강감찬

 

고려는 10세기 초에 건국한 이래 11세기 말까지 100여 년간 송과 거란 사이에 끼인 삼각구조에 놓여있었다. 고려는 이 시기의 전반 시기에는 중화주의와 함께 무모한 원교근공전략의 틀에 갇혀 새로이 강성해지는 북방의 요과의 관계를 외교적 지혜로 경영하지 못했다. 군사적 대비도 제대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 결과 수차례에 걸쳐 심각한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했다. 11세기에 들어서 고려는 비로소 중국 중원과 북방세력 사이에 끼인 한반도의 국가로서 조공책봉의 외교적 의례를 중화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실용적으로 인식하고 활용하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53

 

금의 흥기 이후 동북아 삼각관계와 고려의 대외 경영

- 12세기 여진족의 흥기와 북방형 삼각관계 이제는 두 개의 북방 이민족 세력인 요과 금의 각축으로 북방형 삼각관계가 성립하였다. 발해가 흥성한 기간에 여진은 발해의 지배하에 있었다. 발해가 망하자 여진족은 고려와 거란을 상국으로 섬겼다...12세기 여진족이 흥기하자 별무반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1107년 예종과 윤관은 여진정벌에 성공하고 9성을 쌓고 군사를 주둔시킨다. 하지만 11099성을 다시 넘겨주게 된다. 1115년 완안의 아골카는 황제를 칭하며 대금을 건국한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125년 요를 멸망시키고 1126년 송나라 수도 개봉을 함락시킨다. 북송은 끝이나고 남송시대가 시작한다. 353-355 당시 고려에서 이자겸은 대외적 평화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화평과 조공을 선택한다. 356

 

몽고 제국의 흥기와 동북아 국제관계: 새로운 북방 삼각관계

 

1279년 남송을 멸하고 중국 전체에 북방민족에 의한 첫 번재 통일제국을 건설한다. 몽골은 원래 몽이라 불리는 씨족집단을 중심으로 조직된 세력이다.

 

몽고-고려 관계의 네 국면들

 

1국면 4국면 텍스트 참조

 

6장 일본과 동아시아 그리고 전쟁

 

일본의 경계인적 성격

 

중국에 조공은 하되 책봉은 없다: 조공과 책봉의 분리 일본 왜왕은 608년 견수사를 통해 수 황제에게 보낸 국서는 동천황경백서황제 동쪽나라 천황이 서쪽나라 황제에게라는 표현에 주목해왔다...그로부터 1세기가 지나 내실을 갖춘 천황제가 등장하였지만 자신과 중국왕조를 대등하고 보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한다. 중국황제에게 조공을 하되 책봉관계를 꺼렸던 것은 이와 무관히지 않을 것이다. 425-426

 

중국에 대한 조공도 책봉관계도 일본 자신의 선택 일본의 권력자가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아들인 것은 시기적으로 극히 제한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조공을 포함한 외교관게 단절을 임의로 단행한 시기가 많았다. 책봉관계를 맺은 경우에도 그 주체는 일본의 상징적 최고권위가 중국에 대해 신속의 관계를 수용하는 일은 없다. 일본의 정치군사 실권자가 중국과 조공관계를 맺는 경우에도 일본의 필요와 의지에 따라 적극적이기도 하였고 또 때로는 아예 단절하기도 하였다. 428

 

1392년은 한반도에 조선이 건국된 해이다. 같은 해에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막부가 마침내 일본판 남북조 통일에 성공한다. 무로마치 막부가 성립한 것은 1336년이다. 무로마치 막부가 일본을 통일하기 전인 1368년 명이 중국을 통일한다....1374년과 1380년에 사자를 명나라에 파견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신속을 의미하는 상표문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래서 정식 국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391년 일본통일을 이룬 무로마치 막부의 우두머리 아시카가요시미쓰는 명나라와 외교관계 수립에 힘을 썼다. 1402년 마침내 명 황제에게 일본 국왕으로 책봉을 받는다...통일신라 시대에 속하는 8세기 후반 이후 일본은 한반도와 국가 간 교류가 단절된 상태엤다. 요시미쓰는 1404년 일본국왕을 자처하며 조선국왕 앞으로 국서를 보낸다. 그에 응해 국교가 600면 만에 회복된다. 428-429 일본 통치집단에게서 명에 대한 책봉관계 수용은 조선이 중국에 대해 인식했던 것으로 보이는 정치적 문화적 종속의식과는 다른 차이가 있다. 경제적 외교적 실리와 편의에 따른 선택이라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정명향도라는 침략적 도전의식은 그러한 정신적 지향을 떠나서는 이해되기 힘들 것이다. 429-430

 

천황의 존재와 일본의 대외인식 황이라는 칭호가 정립된 것은 7세기 말 덴무조이후의 일이다. 한반도에 통일국가가 등장하고 발해가 건국된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그 1세기 전부터도 일본의 지배자들은 이미 천황을 자칭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호칭의 문제가 아니었다....일본으 입장에서는 신라과 백제는 서번이었다....일본이 율령제 국가로서 체제를 갖추고 내실을 충분히 다진 상태가 되는 것은 700년경에 가서이다....이것을 고려할 때, 많은 세월이 흐른 후이긴 하지만 16세기말 일본의 전국통일을 이룩한 새로운 군사실력자가 한반도를 침공하는 명분으로 명을 정벌한다는 목표를 공공연히 내세웠던 사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그로부터 3백년이 흐는 19세기 말 일본이 다시 중국대륙을 상대로 침탈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사태의 정시적 연원을 더 쉽게 납득할 수 있다. 432...한반도 지배층의 대외인식은 일본의 존재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역외자인 동시에 역내자에 대한 외교적 경영의 논리가 부재했다. 432

 

일본의 정치전통과 대중국 태도 일본의 무사란 여러 가지 요소를 함께 가진 존재였다. 무예에 능하면서 주로 토지 소유를 통해 경제적 기반을 가진 무가의 일원을 가르킨다. 경제기반이 있는 무가의 출신이 아니더라도 무예에 능한 자로서 일정한 기간 지방 또는 중앙에서 공직에 있었던 사람도 무사로 분류되었다. 전투기술, 경제적 기반, 사회조직과 정치의 측면에서 함께 고려하기도 한다. 그 문화는 중세로부터 근세에도 이어지게 된다. 433

 

경계인 일본의 존재와 중국의 한반도 인식

 

임진왜란 때 명이 군사개입한 것은 조선을 구원한다는 목적보다는 조선이 일본에 넘어갈 경우 중국 자신이 위기에 처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요동이 위험해지고, 북경이 위험에 직면하고자 하는 사태를 피하고자 했다. 435 이홍장은 만주 동3성과 북경의 일차 방어선으로서 조선의 중요성을 갖조하며서 순망상의론을 편다...모택동의 인식은 한반도는 요동의 울타리라는 개념이었다...순망치한의 관점이 오랜 세월을 관통하고 있는 이유는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지정학의 문제였다. 전략문화의 구조이다. 437

 

중화질서의 경제중심적 이해와 일본의 위치

 

정치적 차원에서 동아시아 질서는 중화질서의 안과 밖으로 구분된다. 경제적인 차원에서는 그러한 구분선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일본이 정치적인 중화질서의 안에 있던 조선보다 더 활발하고 의미있게 중국과 역동적인 경제적 교류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게된다...사무역 밀무역...포함..경제적인 네트워크로서 하나의 역동적인 세게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주목할 때, 동아시아 질서에서 일본의 안에 있음와 밖에 있음의 동시성이 이해된다...일본의 위치가 내포한 잠재적인 폭발적 성격의 근원을 다양하게 포착하는 것이 가능하다. 439-440

 

고대 말기에서 중세에 걸친 일본 정치질서 파편화와 천황 일본 이적관과 소국관

 

15세기 중엽에 일본에의 통신사 파견이 중단되어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의 국내 정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였으며, 변경의 정세가 안정된 것도 겹쳐서 일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강해졌다. 중종대 이후 조정은 조선시대 초기와 같은 적극적인 정보수집에 기초한 능동적 대일본 정책보다는, 명분론과 고식적인 대응책에 안주하게 되었다...이처럼 이해가 결여된 가운데, 일본이적관이 고정화되었던 것이다. 442

 

백촌강전투에서 나당연합군과 사우는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수만의 군대와 수백척이 전선을 파견하고 천황이 지배하는 중앙집권적인 율령제국가는 고대국가 말기인 8세기 중엽에서 14세기 중엽에 이르는 6백년에 걸친 일본 정치사의 파편화 현상에 이른다...1180년대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은 중앙집권이 성공한 것이라기보다는 원심적 추세의 절정에 달한다고 볼 수 있다. ..유성룡이 1368년 일본 국왕이 된 인물로 가리키는 적은 가마쿠라 막부를 수립한 요리토모를 말할 정도로 인식이 어두웠다....1336년 천황이 남북으로 갈려 둘이 존재하는 남북조 시대가 열리게 된다....이후 1392년 요시미치의 천황이 하나로 통합된 해이고, 근세와 근대를 거쳐 지금의 천황에게까지 그 황동이 어어지고 있다. 446-447

 

전국시대 일본의 혼란과 조선의 일본 인식

 

1467오닌의 난이후부터 일본이 전국시대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조선의 통신사는 일본을 방문하지 않게 되었다....일본이 중화지서에 충격을 주며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힘의 첫 번째 조건은 국가적 통일이었다. 조선이 건국될 무렵인 14세기 말은 일본에서도 무로마치 막부가 남북조를 통일하여 전국 통일정권을 수립한 시기다. 그로부터 70여 년 후인 1467년 응인 문명의 난(오닌의 난)으로 불리는 대전란이 일본을 휩쓸었다. 쇼군 가와 막부에서 중직을 맡았던 유력 집안들이 둘로 나뉘고 끝내는 모두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놓인다. 오닌의 난은 남북조시대의 대결구조가 재부상한 것으로 풀이되기도 하다. 쇼균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수많은 다이묘들과 무사집단들 사이에 서로 영토를 차지하려는 전란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로부터 전국시대가 100년 이상 계속되었다. 다이묘는 주군에게 가신이 반란을 일으키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하극상이라 불렀다. 다이묘는 쇼군을 무시했으며, 천황도 존재가 희미해졌다. 451

 

이와 같이 8세기 중엽에서 14세기 중엽에 이르는 오랜 기간의 파편화된 일본 정치사적 전통과 함께, 임란 직전까지 1세기에 걸쳐 지속된 일본의 전국시대 혼란상은 한반도인들이 일본을 인식하는 태도에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조선에서 일본을 왜구의 소굴정도로 인식하는 소국관을 고착시켰다고 할 수 있다. 452

 

일본의 전국통일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장이머우의 영웅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 임진왜란의 실상에 대한 연구는 터무니없이 적고 이순신에 대한 각종 글만 봇물을 이루는 현실을 정두희는 지적한다. 지배층의 무능 등으로 초래된 임진왜란이 실상은 조선왕조를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게 한 전쟁이었음에도, 이순신에 집중된 임란기억을 통해서 그것이 승리한 전쟁으로 상상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 평한다. ..사람사냥전쟁....메이지 유신을 전후로 한 시기에 일본의 정한론의 중심인물이었던 요시다 쇼인은 천황이 막부에게 실권을 상실하기 이전 친정을 하던 고대에 한반도국가들은 일본 천황에게 조공했다고 믿고 잇다....정복전쟁사이 관점...해방후 역사학계는 이런 반동으로 의병연구와 이순신 승리에 초점을 맞추었고 북한도 비슷했다. 1990년 이후 새로운 시각에 기초한 수준 높은 연구물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500-501

 

이이와 조헌

 

 

7장 명청 교체의 동아시아와 한반도 전쟁

 

여진의 팽창과 후금-청의 건국, 그리고 조선침략

 

우리는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느냐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미 진행된 사태 전개의 필연성을 논구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이미 진행되어버렸지만 그 사태에 관련된 인간의 사상과 행동, 지도자들의 가치관과 선택이 결광 미친 영향을 탐색하는 것, 결국 인간의 행동과 역사 사이의 가능한 연관성을 반성하는 것 역시 역사연구가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하고 영원한 테마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528

 

전란이후 19세기까지 조선을 이끈 지도적 이념은 김상헌의 척화론과 반청론이었다. 명이 사라진 이후에도 명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였다. 조선이 청이 지배하는 중국보다 문명국임을 자처하는 소중화주의는 조선후기 집권층의 사상적 기반이었다. 529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의 시차와 그 의미

 

명나라는 1619년 살이호 전투에서 패하긴 했으나 산해관에서 두 차례에 걸쳐 후금의 군대를 막아내고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었다. 후금의 서쪽으로 여전히 몽고족의 나라들이 명조와 연결을 맺으며 버티고 있었다. 따라서 섣불리 후금에 외교적 복속을 선택하는 것은 명분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반드시 올바른 판이 아닐 수 있다.....1623년 광해군을 몰아내고 등장한 인조정권이 노골적인 친명정책을 벌임으로써 후금과의 무력 갈등을 촉진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병자호란은 비판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532

 

폐위되기 전까지 광해군이 벌인 외교에 대해 이기백은 여진의 후금이 만주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국제정세에 처하여 현명한 외교정책을 써서 국제적인 전란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피했다.” 반면에 쿠데타로 집권해 인조를 옹립한 서인세력은 공해군의 대외적인 관망태도를 버리고 향명배금의 정책을 뚜렷이 하였다.”고 서술했다....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쟁의 참화가 나라와 민중에게 어떠한 고통을 강요하는가를 절실하게 체험한 위정자였다. 명이 조선을 도왔다고는 하나 명이 자신의 국익을 위해 보였던 독선적인 행위들과 횡포를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이 또한 광해군이었다. 538 후금의 침공가능성을 염두에 둔 군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지와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방에 유의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태세는 그와 달랐다. 541

 

1636년 후금의 홍타이지는 청을 세우고 칭제건원을 하여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다. 위원은 이때 오직 조선만이 거부했기 때문에 홍타이지가 조선에 대한 친정을 결정했다는 분석을 남겼다..조선 춘신사로 나덕헌과 이확을 파견했지만 배례하는 것을 거부한다. 청의 군사들에게 무수히 구타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버티었다. 축하사절은 보냈지만 황제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재를 뿌린 것이다. 545-546

 

1636년 청 태종이 조선에 사절단을 파견했을 때, 조선 조정은 척화론이 강성하여 사절 접견 자체를 거부했고 백성들은 가는 길목마다 막아나섰다. 어린애들은 돌덩이를 사절단에 던지며 모욕했다...인조정권이 전쟁에 임해 유일하게 준비한 것은 강화도로 피신할 채비를 하는 것이었다. 다만 길이 차단되자 방향을 돌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것이었다. 550

 

척화론자뿐만 아니라 주화론자인 최명길의 주장도 정묘호란 강화의 조건처럼 서로 형제의 나라로 칭하면서 화친을 끊지 않아야 한다는 데 그쳤다. 신하국이 되라는 청의 요구와는 거리가 멀었고, 자진해서 명을 등지고 청을 군주국으로 섬기자는 주장은 결코 아니었다. 청의 신속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취한 점에서 척화론자들의 주장과 별차이가 없었다..인조정권의 대외정책은 대명사대를 기본으로 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553

 

광해군은 자신의 정권 성립 과정에서 명에게 신세진 것도 없었지만 조선 사림 세력에게도 특별히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할 일도 없었다. 그는 임진왜란의 경험을 통해서 체득한 국제관게 인식의 바탕 위에서 맹목적 사대를 경계하면서 나름대로 주체적인 판단에 따라 외교정책을 폈다. 반면에 국왕 인조와 그 정권은 소수 공신세력에만 신세를 진 것이 아니라 사림세력 전반에 빚을 지고 있었다. 주화파 공신세력들 역시 일반 사림세력들의 비판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 범사림세력이야말로 자신들의 광해군 축출을 이념적으로 정당화하는 정치적 기반이기도 하였다. 554

 

민주의 고통은 생지옥이나 다름 없었다. 수많은 남녀노소가 청나레 끌려갔다. 이렇게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은 청나라에서 풀려나기 위해 돈을 주어야만 했는데 이를 속환이라 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다. 특히 여성의 처지는 더욱 비극적이었다. 청나라에 돌아온 여성들이 환향녀로 낙인 찍혀 더 큰 불행을 겪여햐 했던 것은 우리가 잘아는 일이다..국가와 사회는 감싸주기는커녕 죽음의 벼랑으로 내몰곤하였던 것이다. 송파 석촌동에 있는 삼전비는 청나라의 전승비다...남한산성의 충절사에는 척화파들의 이름만 남아 추앙을 받고 있다. 이른바 삼학사와 김상헌 등만 아름다운 이름으로 빛나고 있다. 주화파였던 이경석은 삼전도비 글을 짓고 임금에게 궤장을 받았지만 우암 송시열과 노론파는 그를 삼전도비로 개인적인 형화를 추구한 소인배로 낙인찍었다. 582-583

 

북벌론의 실체: 영토적 환상과 중화주의의 결합

 

고구려의 회복을 운위했던 사유 속에는 영토적인 회환만 있을 뿐 그 땅의 인간에 대해서는 기억도 관심도 애정도 없는 것은 아닐까...고구려가 이로 불리고 취급받았다고 한반도인들도 중화세력의 관점에서 보면 동이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591

 

 

 

8장 청의 융성과 200년간의 평화

 

청사를 서술하는 역사가들이 만주족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가장 먼저 드는 것은 덕치이다. 태조 누르하치부터 주도면밀하고 일관되었다. 그것은 한족 백성에 대한 메시지였던 동시에 명의 엘리트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태조부터 한인 학자들을 중용했다. 이들을 통해서 명의 관료들이 자신들에게 항복하도록 회유했다. 그리고 약속을 지켰다. 특히 북경 입성 전 청에 항복한 한인 고위인사들을 중용했다. 604

 

청이 중국통일을 완성하고 장기간 안정과 융성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청의 북경 입성 이후 4명의 황제들이 연이어 모두 개화된 전제군주로 통할 만큼 탁월한 리더십을 보인 데에서 기인했다. 순치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그들이다. 순치제는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불교에도 깊은 흥미를 지니고 있었다. 강희제는 남방을 순행하던 시골 어느 포구에서 정박한 뒤 한밤중이 되도록 독서에 열중 하던 일을 신하들이 잊지 못하였다. 옹정제의 업적 가운데는 천민해방이 있다. 전통적으로 사회적 법외인으로 천대받던 집단들을 해방하는 칙령들을 잇달아 선포했다.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없었지만 장기적으로 의도했던 효과들이 나타났다.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는 강희제와 마찬가지로 시인이자 학자였다. 건국 후 150년에 걸친 시기들을 이들 네 황제가 통치했다. 606-608 청조 황제들 자신부터 한어와 교양을 익히는 데 들인 노력은 순치제의 치세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통역이 필요없는 존재가 되었다. 황제는 중국어에 능숙해졌기 때문이다. 611

 

만주족의 기원은 만주 동북부지역이지만, 이들이 팽창하여 중국정복의 기초를 닦은 것은 남만주지역이다. , , 당을 거쳐 명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 통일왕조들은 요동을 포함한 남만주지역에 대한 패권을 중원의 안정에 사활적인 것으로 인식했다. 농업지역으로 관료적 지배체제를 부과하기 적합한 곳이 되었다..만주족이 도약하기 위해 그들은 땅과 연계된 민간행정단위를 군사조직과 결합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남성은 자신에게 할당된 땅을 관할하는 행정구역과 연계하여 저마다 팔기군이라는 군사조직의 어는 하나에 소속되었다.. 명조가 일찍 남만주의 효과적 통치를 위해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을 결합해 운영하면서 수립한 관료체제를 전략적으로 계숭하여 활용한 것이었다. 609-610

 

청의 지배자들이 이처럼 중원문화를 자기화하고 한인을 포용하는 정책을 추구했다면, 원의 지배자들은 중국인들을 불신했다. 대부분 주요관직을 맡을 적당한 몽고인이 없을 때 색목인이라 불린 이슬람교토나 유럽인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마르코폴로가 궁정관리로 머물러 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612

 

청은 자신들의 상무적 전통과 군사적 우월성의 상징들인 사냥과 말 위에서 활쏘기등 무예를 연마하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청황제들은 자신의 조상인 여진족이 금을 세워 북중국을 호령했으나 쉽게 무너지고 말았던 12세기의 전철을 반면교사의 교훈으로 삼았다. 한족 문화에 동화될 경우의 위험성을 경계한 것이다....청이 의도적으로 주변 몽고족들과 동맹을 추구한 것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고 유목민적 정체성을 지키는데도 일조했다. 613

 

13세기 세계체제

 

아부-루고도에 따르면, 13세기 세계체제는 12세기 말에 태동하여 14세기 초에 전성기를 구가했다...이 체제 안에 존재한 사회조직들은 매우 다양한 문화체제들이 공존하고 협력한 질서였다. 당시의 문화와 종교는 다양성과 함께 개방성이 특징이었다. “기독교, 불교, 유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종종 이교도라 추방되었던 수없이 많은 다른 종교들은 상업, 생산, 교환, 모험감수 등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촉진했다. 이 가운데 기독교는 미미한 역할에 불과했다. 616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그 세계체제의 근본적인 성격은 그후에도 수세기간 지속된 것으로 이해된다. 대서양권이 여기에 덧붙여진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다. 지중해권과 발틱해권을 압도하며 유럽 무역의 중심권으로 부상한 것은 한참 지난 18세기였다. 18세기에 이르러서도 대서양권은 세계경제에서도 무역에서도 아직 중심이 되지 못햇다. 인도양권과 중국해 지역에 여전히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617 당시 세계 무역의 중심은 아시아의 무역항들이었다. 합법적이든 밀무역이든 어디에서 오가는 화물이든, 유통을 담당한 선박들의 압도적인 다수는 아시아의 원자재와 아시아인들의 자본으로 건조된 것들이었다. 618

 

케네스 포메란즈는 평균수명에 있어서도 더 낫거나 유럽인들 못지 않은 수명을 누렸다는 것을 17-8세기 연구에서 확인해준다. 620-621

 

동아시아 3국의 외교, 경제 교류

 

슈인센은 동남아시아로 건너간 것이 17세기초 31년간 356척에 달했다. 이 일본 선박들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중국의 선박들과 경쟁하지만 1635년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폐기되고 쇄국체제를 완성한다.

 

조선이 에도 막부시대 일본에 보낸 통신사는 12차레였다. 원칙적으로 일본에서 쇼균이 교체될 때 이를 축하한다는 의미였다. 보통 300-50명에 이르는 대규모 사절단이었다. 영조때까지 11차례에 이르지만 47년뒤인 1811년까지 반세기가 넘게 공식적인 사절을 보낸 일이 없었다. 633-634

 

이유가 어떻든 조선정부 차원에서 일본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노력이었던 통신사 파견이 중단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 공백을 다른 방식에서의 관심과 노력으로 대체하거나 보완하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였다. 634

 

조선의 소중화주의와 송시열 사단

 

조선 왕조의 지배층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중국의 통일과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의 안정으로 동아시아에 찾아온 평화의 시대에 무엇을 배우고 무엇에 힘썼는가 이 시기 조선의 정치와 사상을 지배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 성리학의 풍미와 사림파 내부이 당쟁과 사화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 둘은 불가분한 관게를 가지면서 조선 후기 정치사상의 경직성과 정치 퇴행을 가중시켰다. 638

 

이 기원은 젊은 사림파들이 중앙정치에 진출하기 시작한 성종(1469-94) 시대 이후의 일로 평가된다. 조선왕조 수성기로 불리는 그 이전 시대의 정치 담당자들이었던 훈구파에게는 학문이란 경세유용과 불가분한 것이었다. 따라서 공리공론에 빠지기 쉬운 경학에만 머물지 않고 실학을 겸수하는 기풍이 강했다. 이들으 때로 유학을 넘어 불교에 대한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반면에 사림파는 경학과 실학을 구분할 뿐만 아니라 실학을 잡학으로 칭했다. 파벌끼리 공리공론을 펴고 자기주장을 하는 데에 이용된 개인문집들을 양산했다. 조선 전기의 훈민정음,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선과 같은 기념비적인 성과들과 크게 대비되는 것이었다. 639

 

사대부들이 잡학을 기피하면서 실용적 학문들은 중인계층만 세습적으로 하는 학문으로 굳어져갔다. 그 시점이 서인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옹립한 인조 때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두고 곱씹어 볼 일이다. 640

 

조선 지배층의 국교이다시피 했던 정치사상으로서의 성리학은 16세기 이황과 율곡 이이를 양대 산맥으로 했다. 이들을 정점으로 사상논쟁과 당쟁이 서로 연결되었다. 이황의 계열은 영남학파인 반면 이이의 계열은 충청도와 서울 경기를 기반으로 하는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영남학파가 동인일 때 기호학파는 서인이었으며, 영남학파가 남인일 때, 기호학파는 노론과 소론의 당파를 형성했다. 1680년대에 서인들은 남인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스승인 송시열과 제자인 윤증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 노론과 소론으로 갈린 것인데,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송시열이 노론의 영수였고 윤증이 소론을 이끌었다....대명의리론은 17세기 이후 조선사회를 대변하는 시대적 코드였다. 하지만 북벌론과 존명배청을 주자학 절대주의와 함게 배타적으로 내세우는 데 특히 앞장선 것이 송시열을 영수로 하여 정립된 노론의 전통이었다. 641

 

송시열은 숙종때 민씨폐비를 반대한 기사환국으로 제주도 유배를 가고 남인이 집권했다. 전라도 정음세서 사약을 받으며 그 자리에서 그의 수제자 권상하에게 유언했다.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주로 하고, 사업은 효종이 추진하고자 했던 뜻을 주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 이후 송시열이 반대했던 장희빈이 방자해짐에 따라 숙종은 그녀를 폐하고 민비를 복위시켰다. 그와 함께 남인정권은 붕괴하고 송시열의 파벌인 노론과 소론의 세상이 되었다. 이를 갑술환국이라 하였다. 송시열의 유언이 조선의 학문과 정치의 지도원리로 고착되는 것이 가능해졌다. 642

 

18세기 이후 동아시아 학문세계의 진화

 

조선순조 26년 신재식은 청조지식인과 교류하며 필담을 나눈다. 이 필담에서 조선으 학자는 모두 주자를 학문의 올바른 방향을 정하는 지남철로 삼고 있기 때문에, 공자 이후에는 오직 주자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주장을 완고하게 고집한다. 그는 근래의 중국학자들을 한명도 거론하지 못했다.....

 

일본의 고학파들은 주자학과 그것을 비판한 양명학 모두를 극복하고자 했다. 송대에 정립된 주자학은 명대에도 관학으로 인정받은 유교의 주류학풍이었다. 양명학은 중국 명대의 사상가 왕수인이 수립한 것으로 주자학과 상벽을 이루었다.....일본 고학은 주자학의 사변적 형이상학적 성격을 부정하고, 양명학이 실천윤리만 강조한 채 내면을 응시하지 않는 경향을 비판했다. 이런 점에서 휴머니즘의 학문으로 평가된다....고유한 비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주희가 공자의 저술로 간주하여 사서에 포함시킨 대학에 대한 이토 진사이는 대학은 본래 예기 속에 들어 있던 한 편의 글이었는데, 주자가 자신을 수행하고 남을 다스리는 데 좋은 책이라 하며, 따로 독립시켜 상세히 주석을 붙여 논어, 맹자, 중용과 함께 사서의 하나가 되었고, 그후 동양의 사상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선비의 필독서였다.” 진사이는 이것이 공자의 저술이라는 주의의 입장에 의문을 품었다. 그가 이해한 논어의 공자는 애제자 안회가 죽었을 때 통곡하는 인간이었다. 반면에 대학은 인간의 희로애락의 정념을 부정하고 있었다...중용에 대해서도 문헌비판을 행하여 그 안에 이본의 내용이 기어들어 있음을 밝혀냈다.....이와 달린 소라이는 진사이가 휴머니즘으로 읽은 데 비해 치국안민의 정치학으로 읽었다....이후 이런 실증연구를 통해 모든 사상을 상대시하는 도미나가 나카모토와 같은 사상가로 이어진다. 651-652

 

김정희가 청조의 새로운 문화운동에 스스로 투신하여 그것의 도입에 동참함으로서 새로운 중국 조선 문화질서를 형성하려고 하였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1세기 이상을 앞서서 전개되고 있던 학문적 경향에 비해 아주 뒤늦은 관심이었다. 653

 

 

  볕뉘. 방대한 규모다. 이어 읽으며 언듯언듯 비치는 조망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본다. 등산의 묘미가 느껴진다. 여전히 눈길을 받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1500년을 훑고 이으려고 노력한 댓가가 있는 듯싶다. 여기에서부터 가지치기도 이어질 것 같다. 함께 참여하고 고민을 나눠준 이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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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삶의 핵심 기제가 무엇인가? 콜린스는 상호작용 의례의 기제라고 한다. 그 이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은 정서적 에너지 추구자 이며, 정서적 에너지는 개인의 구체적인 일상 삶의 현장, 즉 미시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 의례에서 생산된다. 둘째, 성공한 의례는 집단 소속의 상징을 창조하며 개인에게 정서적 에너지를 생성시키거나 높여주지만, 실패한 의례는 정서적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의례에서 창조된 상징은 후속 의례, 개인들의 연결망에서 순환되며 집단의 통합과 유대를 산출한다. 상징은 홀로 있을 때 개인의 내면에서도 재순환되며 집단 소속감과 정서적 에너지를 유지시킨다. 셋째, 개인은 자신이 지닌 문화적 자본에 비해 정서적 에너지 보상이 가장 큰 상호작용에 이끌리며 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사회적 삶은 무수히 많은 상호작용 의례들의 사슬 로 구성된다. 5-6

 

일반 이론의 수준에서는 공통분모 없이 각기 구별된 영역의 동기로써 인간 행위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하는지 그 방법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론적 해결책은 고강도 상호작용 의례 시장과 물질적 재화 시장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통합된 시장으로 개념화하는 방법이다. 궁극적 동기를 물질 추구에 있다고 보면 거기서 사회적 동기를 도출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적 동기에서 시작하면 두 영역을 통합할 수 있다. 22

 

상호작용 의례는 보통 신경체계가 리듬을 맞추고 상대의 반응에 대한 상호 기대가 조율될 정도로, 그리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한 사람의 신체적인 생리작용이 다른 이의 몸을 관통해 되돌아오는 상호반응의 순환 고리가 형성될 만큼 충분히 밀착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적어도 그 순간은 사회적 상호작용이 생리적 반응을 자극한다. 이는 술, 담배, 마약, 카페인 따위를 섭취하지 않아도 일어나는 인간 상호작용의 기초이다. 상호작용의 의례에 기호 식품의 섭취가 곁들이면 생리적 효과는 사회적인 효과와 뒤섞이며 사회적인 형태를 띤다. 나는 여기서 단지 정신적 과정과 정서뿐만 아니라 우리 몸이 섭취하는 물질이 무엇이건 그 체험 효과는 같다고 주장하는 강력한 사회적 구성주의 입장에 선다....대중적인 음식물은 대개 사회적 맥락에 따라 효과가 다양하게 나타나며, 효과는 사회적 용법으로 결정된다. 26-27

 

볕뉘.

 

1. 나, 너 너가 있는 것인지. 관계들은 늘 소진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말라버리는 것은 아닐까. 막다른 길 우연히 펼친 서문이 반갑다. 옮긴이의 상호작용 의례 interaction ritual  , 상징, 정서적 에너지란 말들의 사슬이 날렵하고 상쾌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문화적 자본보다 정서적 에너지 보상이 큰 쪽으로 상호작용하며 움직인다'는 말이 여운이 많이 남는다. 우리들의 관계라는 것은 기껏 리츄얼도 드물뿐더러, 정서적 에너지를 유도하지도 보상도 되지 않고 갉아먹는데 너무 익숙하다.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비난이 난무하며, 챙겨준다하며 끼리끼리의 리츄얼만 있고, 좀더 다른 열린 리츄얼은 부재하다. 정서적 에너지는 흐를리 만무하며 그 소진의 그늘에 말라버리고 만다.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룹에 갇혀있다. 사회적 삶을 확장하고 열어가는 것이 아니라 수성하지도 못하고 아성을 쌓지도 못한다.

 

2. 저자는 상호작용 의례와 물질적 시장을 통합한다. '개인은 이기적인 존재다. 물질적 가치를 추구한다'라는 추상이론과 환원이론에 빠지지 않는다. 사회적 시장이라는 생생한 그물에 넣어버리는 것 같다. 거시와 미시를 구분해서 나누지 않는다. 느낄 수 있는대로 놓아두지만 잣대로 다시 들여다 볼 수 있을 것 같다. 개인과 사회라는 이분법에 말려들지 않는다.

 

3.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느낌이 좋다. 옮긴이는 친철하게도 두꺼우니 전부 보기 부담스러우면 제2부 이론의 적용부터 보라고 권면한다. 성 상호작용의 이론, 상황적 계층화, 흡연 의례와 반의례, 사회적 산물인 개인주의와 내면 지향성을 말한다.

 

4. 이론의 정합을 따질 여유가 없다. 늘 분석이란 그림자처럼 뒤에 따라 오는 것이기도 하고, 갈증에 목말라있기도 한 연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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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뿐만 아니라 이론의 부재 역시 대중을 손에 넣지마자

물질적인 폭력이 될 것이다



「포스트모던한 시대의 아도르노의 가치」라는

마지막장의 마지막 구절이다.



물론 저자는 포스트모던의 광분을

★후기마르크스주의★라는 책제목으로 명한다.



그리고 시종 ♥아도르노를 복귀시킨다.

저자 !!프레드릭 제임슨은

소련의 몰락인 1989년을 이론의 시작이라는 징후로 읽었다.

그 시점에 백낙청교수와 나눈 대담이 시선을 충분히 끈다.


 


그때부터

지금여기의 진보?!는 이론을

손에 놓은 것에 비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경제도 정치도 밀물과 썰물같다고 하니,

운명은 그래도 준비한 자의 편이란 말이 남는다.

 

 

 

 

 부드러운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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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던져야하는 질문은 이 모든 구분이 무엇을 위한 것이냐, 즉 사회에서 그것이 어떤 실질적인 목적에 봉사하느냐라는 질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구분에 좀더 정확성을 기하려고 새로운 공식들을 제안한다. 다른 사람들은 과거의 계급에 관한 설명을 수정하여 이를 현대적 경험과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입장은 이러한 구분을 대부분 없애도 된다는 것이며,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대개는 필요없는 노력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471 우리는 여전히 태생에 근거한 사회적 계층 구분에서 돈과 실제적 지위에 의한 계층 구분으로 이행하는 단계에 있다.

 

나는 소상인의 집단과 함께 앉아 있을 때, 그들이 어떻게 저 계층의 사람들(상점의 조수들)을 믿을 수 없는가를 설명하려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가장 원색적인 어조로 하면, 그들은 늘 온갖 일에 참견을 한다는 것이다. 그 특별한 토론의 절정은 구성원 중 한 명이 스스로를 정상의 비즈니스맨이라고 묘사한 것이었다. 이는 매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사실 이것은 한 집단의 사람들이 가정한 중산계급의 소속과 구분인데, 그들은 동일한 중산계급 내에서 조금만 위로 이동하더라도 자기들이 가게 점원들의 위치를 정하고 경멸했듯이 바로 그렇게 위치가 결정되고 경멸당할 것이다. ---상승하는 중산계급의 힘을 배경에 둔 근본적인 계급 체제가 사회적 의미를 유지하려면 하층계급이 필요하다. 이 하층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사실 계속 돌아가면서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한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영국의 중산계급이 비현실적인 이유며, 그 모호성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475

 

영국의 모든 계급 구분은 부드러운 황혼에 가려진 맨 꼭대기에서 아래로 향한다. 그것이 그냥 사라질 것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사회적 설명과 경제적 설명 사이의 혼동이 이미 설명한 대로 체제 자체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돈이나 권력, 지위를 향한 욕구는 자수성가의 특권적 지위라는 별개의 이상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히 오래된 체제로 향하였고, 그 대가로 우리는 혼란스러움 속에 빠져 있다. 476

 

수많은 봉급생활자들은 경제의 다른 부문에 종사하는 다른 봉급생활자나 고용주에 비해서 비용에 대한 세금 공제 등의 측면에서 자신들이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집단들 사이에는 여러 세대 동안 냉소적인 공동체들 형성할 만큼 원한이 서려 있다. 나는 엄청난 어려움이 있지만 급여에 대한 특수한 주장들이 준거로 삼을 만한 일반적인 형평의 원칙을 확립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경제학자들을 지지한다. 현재의 원한, 그리고 그것이 투쟁으로 드러나는 조야한 방식은 건강한 공동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480

 

보통 봉급생활자는 이미 언급된 임금 노동자와 자신의 차이 때문에 자신을 중산계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넘어서서 실제로, 지속적으로 그를 착취하고 있는 진정한 계급을 보지 못한다. 공개적인 차별이라는 제한된 관점에서만 계급 구분을 봄으로써 그는 자유의 상실에 순응하고 심지어 분투하는 중산계급이 흔히 사로잡히기 쉬운 일상적인 상류층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무산계급의 일원이면서도 마치 그것이 자신의 체제이며 자랑거리인 양 그 자신의 실제 곤경에 동의하기도 한다. 481

 

중산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 선을 긋기는 어렵지만, 이제는 남아있는 차별로 인해 은폐될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애초에 의도적으로 은폐된 공동의 운명에 연루되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노동계급의 조건이 나아졌으니 그들은 중산계급이 되는 것일까? 중산계급은 대부분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생활해야 하고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도 자산이 없다는 특징으로 보아 사실은 노동계급이 되어버렸다. 전통적인 규정이 붕괴되었고 그 결과 나타난 혼란은 의식의 심각한 축소로 이어진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설명이 될 것이다. 새로운 일, 새로운 형식의 자본, 새로운 소유 체계는 그러한 것들과 관련하여 인간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요구한다. 482

 

진정한 조건은 아직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복잡한 경제적 사회적 조직과 연관하여 우리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상류, 중간, 하류라는 등급을 부여받고, 이러한 등급을 끈질기게 고수하거나 그에 분개하는 하인이라는 것, 그러나 대부분의 하인들이 그러하듯이 전반적인 기존의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내부의 용어로만 언쟁을 벌이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482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를 토론하던 누더기 차림의 집단들은 아마도 그들의 지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잘 차려입은 노동자들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끊임없는 변화는 실제의 역사적 과정이며,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사실상 1930년대의 누더기 집단 시절보다 옷을 잘 차려입은 우리 시대의 노동당 투표자가 더 많다. 사실은 그 과정이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한 상승 그래프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변화하는 정치적 조건과 전체적인 사회 변화의 국면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 시대에 대한 진지한 분석도 결국은 이러한 실제 역사의 맥락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487

 

수백만의 임금 노동자들과 아내들은 여전히 그 이전 선거에서와 마찬가지로 보수당에 투표한다. 중요한 질문은 이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냐 하는 것이며, 그들을 형성하는 새롭고도 영구적인 사회적 패턴이 존재하는가이다. 이러한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하기는 힘들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두드러진다. 성별에 의한 투표 성향의 분리는 통상적인 계급 분석을 가로질러 나타나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정치적인 범주 내에서는 쉽사리 조정되지 않는 문제를 야기한다. 489-490

 

나로서는 노조의식과 혼합된 공동체와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생겨나는 좀더 넓은 의미의 노동의식 사이에 균열이 생겨난 몇몇 증거들에 관심이 있다. ...이러한 변화의 조건은 엄연히 존재하며 만들어진 것이다..이렇듯 다양한 흐름에 휩싸인 새로운 공동체의 남녀들은 명시적으로는 전체로서의 사회와 연관되어 있는 학습과 반응의 패턴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나는 현대의 보수주의가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복합체를 향하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에게 이에 대한 해석을 설득력 있게 제공한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시점에서 진보?는 제시할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새로운 학습, 새로운 반응은 우리가 아직 그려보지 못한 형식으로 구현될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새로운 사회에서 그러하듯이, 새로운 공동체의 남녀에 관한 절대적인 사실은 다른 사람의 해석이 아니라 인간의 이미지에 따라 그들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494-495

 

차별이란 단지 특수한 사회의 작동 기능일 뿐이며, 한 부류의 노동자를 다른 부류와 대조하여 그 내부에서 좀더 치열한 경쟁을 장려하는 것은 전체적인 시스템을 영속화하는 형식으로 사회의식을 이끄는 효과를 지닌다. 내가 생각하기에 차별은 수정되어야 하지만, 이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기반은 진정한 공동체의식 우리가 자신과 서로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진정한 앎 이다. ...이러한 대안들 사이의 결정은 계급에 대한 중대한 결정이될 것이며, 우리가 계급 체제를 종결시키려고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결국 그것들을 지탱하고 있는 견고한 경제적 중심을 볼 때까지 다른 구별이 남아 있게 해서도 안되고 부적절성이나 혼란을 제거해야 한다. 498

 

문화적 형식은 어쨌거나 변화하지만, 교육을 통해서는 의미 있는 반응의 능력을 깊이 있고 세련되게 하기 위한 작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변화하는 사회, 따라서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우리는 비평의 방법만이 아니라 행동의 형식도 배워야 한다. 500

 

가치있는 성장의 요소를 장려하지만 그것으로 문제의 뿌리까지 다다르기 어렵다. 왜냐하면 저급하고 파괴적인 요소들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선전되고 있다는 사실, 예를 들어 관현악단이나 화랑을 지원하는 일보다는 새로운 비누를 광고하는 데에 더 많은 돈을 쓰고 듣기 좋은 어구를 붙인다는 것, 그리고 새 잡지를 두 가지 창간하려고 할 때 하나는 진지하게 새로운 작업을 하려고 하고, 다른 하나는 단지 이미 알려진 대중 시장의 한몫을 잡으려고 경쟁하는 것뿐인데도, 두 잡지의 투자액을 비교해보면 터무니없게도 전자에 대한 투자는 바닥이고, 후자에는 엄청난 양의 돈을 쏟아 붓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흔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501

 

순수한 새 잡지의 경우 보통 헌신적인 사람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지지만, 실제로는 누군가가 들춰볼 수 있을 정도로 평균적인 책 가판대에 놓여 있는 상태에서 구매를 기다릴 가능성조차 없는 반면, 새로운 상업 잡지는 널리 전시되어 거의 그것을 피하기가 어려운 지경이 된다. 그러니까 진정한 경쟁이 없는 상태에서 직접적인 결과만을 가지고 대중의 천박성이 변함없다는 증거로 삼는 것은 바보 같고 심지어 악의적인 일이다. 대중들의 문화적 조건에 대한 의례적인 분개와 절망 대신 문화제도 대부분이 사회의 건강과 성장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부족한 경험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이윤을 챙기는 데에만 관심 있는 투기꾼들의 손 안에 있다는 중대한 사실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 501-502

 

우리는 투기꾼과 관료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 것 같다. 503

 

아무리 민주적인 나라라도 지나치게 큰 조직은 결국 경직되고 어떤 면에서는 뚤고 들어가기 어렵게 되어버린다는 위험이 여기에 상존한다. 모든 적절한 문화 조직은 공개적이고 유연해야 하며, 진정한 표현의 다양성에 헌신해야 한다. 다양한 문화 조직을 운영하는 최상의 사람들이란 자신의 작품 생산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간단해 보인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 그 조직을 유연하고 개방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할 가장 심오하고도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504

 

괜찮은 서점이라 불릴 만한 것이 없는 도시가 수백 개나 된다는 것은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다. 좋은 독립적인 서점은 특히 소중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운이 좋지 않으며 파산하게 된다. 현존하는 체인식 서점은 책이나 정기 간행물에 단순히 양적인 기준만을 적용한다. 즉 어떤 숫자 이하가 되면 그들은 특정한 품목을 다룰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이것을 자유, 혹은 입수 가능성의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가? 우리는 한편으로는 출판업자와 서적상, 저자들을 대표하고, 다른 편으로는 의회를 대표하는 출판 위원회를 만들어서 출판의 지속적인 독립성을 보장할 의무를 갖게하고, 동시에 국내외에서 최상의 서적과 정기간행물 배급을 담당할 책임도 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507

 

공공 자원을 분별 있게 사용하여 문화적 생산자들이 지배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기능적으로 쓸모없는 재력가 집단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를 단절하고, 공적 자금을 사용하는 데 책임감을 유지하면서도 생산자들에게 그들의 실제 작업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계약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문화적 생산자들의 자유를 엄청나게 확장해줄 문화적 조직을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512

 

기나긴 혁명에서 인간의 에너지는 사회의 낡은 형식에 주는 압력과 제한을 뚫고 새로운 공동의 제도를 발견함으로써 인간이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이러한 과정은 반드시 성공과 실패를 모두 포함한다. 514

 

이걸로 충분해라는 목소리는 변화를 멈추거나 늦추고 싶어하는 부자들, 지배적이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일 뿐 아니라, 더 이상 관심이 없으며 자신의 실질적인 소득을 걸고 싶어 하지 않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516

 

우리는 기나긴 혁명을 지속적으로 제한하고 방해하는 세 가지 사고방식을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여러 특권 집단이 그들의 특별한 지위에 영향을 줄 만한 부, 민주주의, 교육, 문화의 확산에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직시할 배짱만 있다면 그들이 선 곳에서도 엄청난 천박성과 편협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게 점원들, 공산주의자, 혹은 기사 작위를 받은 노조지도자.....스스로를 대중화에 내맡기는 것...대중은 스스로를 만들어내고, 그들에게 제공된 열등한 위치도 받아들이는데, 이것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희망의 종말을 의미한다. 517-518

 

사회적 빈곤의 정의에서 문화적 빈곤과 부적절한 민주주의에 관한 정의 또한 활발하게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새로운 사회 분석뿐만 아니라 인간적 기대에서 새로운 관계 해석과 새로운 감성을 필요로 한다....의식은 변화하고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해석을 찾는다. 이것이 영속적인 창조의 과정이다....새로운 세대가 수행한 가장 유용한 봉사는 사회로 하여금 그 이상과 실천을 비교해보도록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것이다.....나는 우리 모두가 주변부의 여백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가 배운 것이고 살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불균등하게, 잠정적으로 우리는 움직임을 느끼며 의미와 가치관들이 확장되는 것을 느낀다. 523-524

 

볕뉘.

 

1. 계급, 그것 도대체 필요한가? 그 분석도구를 써서 분석할 필요가 있는가? 세상은 쳇바퀴처럼 상층,중간,하층을 나뉘어서 끊임없이 밟고 일어서고 그 순환을 반복하는데 말이다. 대부분이 중간층이라고 얘기하고 할 수밖에 없고, 더 못한 낙인을 찍어두는 층이 있어야 살 수 있는데 말이다. 무산계급도 보라는 듯이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말이다. 사회를 낫게 만드는데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해왔는가 말이다.

 

2. 계급,  그것은 필요하다!  살림살이가 나아졌다고 중산계급은 노동계급과 다르다고 한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먹고 살 수밖에 없는데도 그렇다고 한다. 노동계급 의식조차 희미해져 자신이 어떤 맥락에 위치해있는지도 못해 두려움에 판단력이 흐려진 중산계층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

 

3. 새로운 일, 새로운 자본, 새로운 소유체계가 자리를 잡고 있어도 무감각하다. 낡은 의식의 도구란 잣대로 재고 재단한다. 잘라버리는 남는 것이 천지다.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다. 새로운 것을 새롭게 바라보려고 하지 않으니 맨날 그모양이다. 투기꾼에게 발목이 잡혀있는지 관료에게 발목이 잡혀있는지조차 눈치채질 못한다. 아둔하다. 역사는 늘 창조되어왔다. 새로운 인간의 이미지를 창조해내지 못하면 늘 낡은 그림에 잡혀 그 그물을 헤어날 수 없다.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에서 살고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한 것은 없다.

 

4. 저자는 출간 반세기가 훨씬 더 지난 지금에 살고 있어도 똑같이 이렇게 새로운 흐름을 잡으려고, 소화시키려고 안간힘을 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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