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만 밝히는 과학이 내리는 대재앙!!!

 

쓰라린 고통에 깨어나니 집도, 절도 없다. 아이도, 가족도 이웃도 이미 세상을 떠났다. 원전은 연기를 피워올리며 방사능을 누출해대고 있다. 벌써 지구를 한바퀴돌아 낙진이 떨어진다. 소와 돼지 발굽이 달린 동물은 입과 발에 염증이 생기자마자 온동네에 있던 가축들에게 묻지마 살육을 자행한다. 비행기의 속도로 달리던 초고속철도는 주춤주춤 원인도 모른채 내달리고 있다. 오늘도 미국산 등골로 우려낸 음식을 든다. 지진, 쓰나미, 산불, 구제역, 조류독감, 광우병, 슈퍼박테리아, 원전사고, KTX. 유전자조작.. ...

안타깝게도 지금 이땅 저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디스토피아다. 재앙이 살짝 지금을 비껴서고 있을 뿐,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닥쳐올지 모른다. 산업혁명이후 과학은 프로메테우스를 자청했다. 불을 훔쳐다준 과학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화석연료란 불로 이백년남짓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자본주의의 얼굴은 점점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을 닮는다. 돈을 남기는 과학에 브레이크를 달려고 해도 화려한 성찬에 취한 주객은 그저 욕망에 쫓겨 갈채만 보낸다. 내 발등이 섞어 들어가서야 겨우 주춤거린다. 내 온몸이 타들어가고 머리 한쪽만 남아서야 겨우겨우 중독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경쟁과 박멸

이 사회는 여전히 하나밖에 모르는 전문가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사회는 그들에게 묻지 않는다. 그저 개발만 하라고 한다. 대박만을 원한다. 윤리를 묻지 않는다. 그들은 금광을 캐내는 광부처럼, 나노소자를 개발하고, 반도체소자와 백신을 얻기위해 끊임없이 원하는 것만 발라내는 작업을 한다. 그 모습은 흡사 전쟁을 닮았다. 적의 요새를 공격하고 진지를 탈환하고, 포화속으로 돌진에 돌진을 거듭한다. 연구자료와 책장 속엔 온통 전쟁터다. 멸균과 박멸을 해야할 뿐 미생물과 공존을 생각하는 연구는 드물다. 적진으로 가는 길에 내버려두거나 방기해둔 사체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 과학의 담론 속에는 얼마나 이땅에 아픈이들이 있는지에 대한 사회담론, 생태담론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렇게 쟁취한 부가 그들로 피해받은 이들에게 돌아갈 몫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적어도 내이야기가 아니다. 불을 훔친 과학은 이렇게 사람과 자연과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내듯 끝없이 유린하고 군림해왔다.

편리의 이면

사람들은 편리함에 취해 위험함을 잊고 산다. 달콤한 편리함이 서서히 익을 무렵 위험함도 조금씩 자라나 저기 먼 곳으로 모인다. 하나 둘 셋! 돌연 멀어지던 위험함은 방향을 바꿔 돌진한다. 거대한 쓰나미로 편리함의 구석구석 모든 것을 원점으로 쓸어버린다. 사람들은 과학이 위험함까지 해결하는 해결사로 오해한다. 하지만 나노과학은 알아도 그것이 진폐,규폐를 유발하는 인체에 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은 잊거나 관심조차 없다. 생명에 대한 집착은 이종장기가 기계부속품처럼 우리 몸에 끼워넣을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KTX로 인한 급행의 쾌감이 얼마나 많은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지 그 뒷면의 시스템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러다 어느 날 위험이 삶들을 송두리째 낚아챈 뒤에만 한탄한다. 그리고 남들의 일이므로 잊는다. 오늘도 위험함은 지구 반대편을 돌아 이곳 낯익은 거리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집중과 분산

사람들은 세계화를 좋고 친한 것으로 여긴다. 세계화의 콩고물을 얻을 수 있으므로 간도 쓸개도 모두 내주었다. 불과 수백년만에 철도, 고속도로와 인터넷정보망으로 똘똘 무장을 하고 있다. 돈이 가는 길은 거의 광속으로 여기저기 쏜살처럼 날아간다. 하지만 돈이 가는 길이지 건강이 가는 길, 좋은 삶이 가는 길이 아니다. 돈과 과학이 근친해서 그렇게 위험의 고속도로를 뚫어놓았을 뿐이다. 생명에게는 신대륙의 발견이란 빌미아래 중남미 문명이 백인의 세균에 초토화되었듯이, 도시로 도시로 모인 균들은 종과 종의 경계를 넘어 생존하려고 한다. 인수공통전염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매일 식탁에 오르는 5대양 6대주의 먹을거리들은 건강한가? 

시간

자본주의는 길어야 수십년 수백년 동안의 데이터만을 근거로 위험을 계산한다. 홍수가 나고 강물이 범람해도 기상이변의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지 않는다. 하루에 비가 700mm에 가까이 내려도 그것을 바탕으로 도로와 다리의 설계에 넣지 않는다. 끊임없이 똥을 누는 핵폐기물이 후대에 어떤 위험이 되는지에 대한 물음은 없고 그것을 가정하여 연구하지 않는다. 활성단층이라고 해도 과거의 흔적으로만 돌릴 뿐 위험지수로 품어서 활용하지 않는다. 화산이나 지진에 대한 기억도 만일이란 가정은 없다.

이땅위의 굶주리는 이웃과 사회적 약자는 지금까지의 과학에겐 뒷전이다. 이땅위에 굶주려 죽더라도 눈하나 까딱하지 않는 과학은 돈의 그늘에서 벗어난 자신의 시각을 갖지 못해 왔다. 과학만 발라내어 저기 성전위에 있는 놓인 성물로서 그것이 아니라, 굶주린 이웃과 생명을 밝히는 과학이 필요하다. 저기 도시로 도시로 향하기만 하는 과학이 아니라 지역과 헐벗는 이들을 구제하는 과학이 필요하다. 세밀하게 검수해내고 이력을 확인하고 오대양6대주의 식탁이 아니라 그 땅에서 나는 농산물을 먹을 자유와 권리에 과학이 기여하여야 한다. 고속도로가 아니라 지역을 살리는 자전거길, 올레길 같은 과학이 지금의 국면과 또 다른 갈래길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그물망에서 과학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돈의 시녀만이 아니다. 편리를 가장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위험을 연구하게 만들어야 한다. 굶주리는 이들이 더 이상 삶을 빼앗기지 않도록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과학이 필요하다. 돈으로 치장한 과학에 찬사를 보낼 것이 아니라 의심의 눈길을 보낼 줄 알아야 한다. 시간에 바래어 위험을 자초하는 과학이 아니라 당당한 과학으로 만들어야 한다. 찬사를 보내면 보낼수록 그것은 위험으로 변질되어 부메랑처럼 박수를 보낸 이에게 돌아온다. 당신도 부지불식간에 편승을 한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삶에 대한 의심을 보태야한다. 순간의 방심들이 모여 여기까지 왔음을 느껴야 한다. 당대가 아니라 후손도 똑같은 생명이자 한표임을 명심해야 한다. 전문가들일수록 천성산의 도룡뇽이 터널공사로 물기가 빠져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아픔으로 느껴야 한다. 이땅의 아픔만이 아니라 저땅의 아픔도 똑같이 세계화되었다는 진실을 과학이 품도록 만들어야 한다. 과학은 우러러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같이 투명하게 내려다볼 수 있어야 한다. 그 길만이 과학의 고삐를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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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 霧津 기행 o 이상한 나라의 렙츠 lefts

 

 

무진으로 가는 길목

 

그가 하는 일은 시간 지도地圖사이다. 마음 속에 있는 서로의 바램들을 모아 시간이라는 화폭에 조각조각 붙여 그리로 가는 지도(指圖)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움이 봄볕에 바래기 시작한다. 그리움이 한올 한올 벗겨지더니 아질아질 눈앞에서 서성이다 사라지길 되풀이 한다. 문득 그리움을 모아 보았다. 아질거리는 그 녀석은 손을 가까이 대면 촉촉한 습기를 내밀면서 앉는다. 그렇게 바래는 그리움을 모아모아 파릇파릇한 새순들 위에 놓자 그리움은 푸릇푸릇해지더니 곧 끓기 시작한다.

그리움이 끓을 무렵, 서편엔 달이 쫑긋거리면서 달려오는 것이다. 별도 반짝거리며 그리움을 스카프처럼 두르는 것이었다. 

그리운 마을로 떠난 것은 그쯤이다. 그리움이 물밀듯 밀려오다 끓어넘칠 즈음되어서야 그 마을로 향하는 시간의 길이 조금조금 실루엣처럼 비치는 것이다. 이제 이 마을의 시간 지도가 마무리 되어간다. 그리움이 앞으로 열 번 정도 끓어넘치게 되면 안개처럼 묘연했던 시간의 길과 지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리움이 결빙된 듯 바짝바짝 얼기만 할 뿐 도대체 따듯해지지 않는 것이다. 서글픔이 잦게 내리더니 그리움이 조금 조금 지쳐가는 것이다.

시간으로 난 문을 열고, 예전에도 그랬듯이 느낌을 예금하거나 느낌을 사고 팔 수 없는 그 마을을 다녀올 것이다.

 

시간을 접어만난 사람들

 

시간의 틈이 빡빡하다. 꾸깃꾸깃 틈을 몇 번 접을 무렵 매쾌한 냄새가 스며든다. 그렇게 황급히 빠져나오자 투명한 타워가 저 멀리 비친다. 거리가 스산하다. 버스가 날카롭게 다가서자 사람들이 몰려든다. 차창가 불빛들이 춤춘다. 춤추는 불빛들이 차창에 자꾸 튕겨 나간다.

이 도시는 지층에 고이접어둔 석유, 석탄을 이백년만에 모조리 쓴 연유로 해수면의 상승과 지각판에 가하는 압력이 커져 지진이 끊이질 않았고, 중세의 페스트처럼 해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후로 사람들은 모두 몇시간 빨리 지진에 대처할 수 있도록 림프절에 지진감응패치를 붙였다. 

패치를 붙인 이들은 지적감응도 빨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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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는 모든 것들은 흘러가기만 한다. 하수구로 끊임없이 꾸르륵 소리를 내면 느낌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도 느끼는 것에 대해 언급을 피했다. 꼬르륵 빨려들어가며 꼴깍 꼴각 생기는 진공의 틈새처럼 모두 그 느낌을 뱉어낸 덜그럭거리는 아는 것만 이야기해댔다. 아는 것을 날칼로운 칼날처럼 부딪치고 불꽃을 뱉어도 무감하다. 생각들을 필터로 걸러내고 쥐어짜고 조금이라도 느낌의 물기가 빠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봄이 와도 봄을 맞는 이 하나없고, 꽃이 피어도 꽃이 핀 것을 느끼는 이는 여름이 다 다가와서였다. 뜨거운 가슴의 노래를 토해내도 그들의 머릿 속에 들어가자마자 그 느낌과 아픔은 분쇄기처럼 갈기갈기 사그라들었다. 머리만이 표준어였다. 방언으로 이야기하려고 하거나 방언으로 정보를 전달하려는 시도는 무참히 밟혔다.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만으로 느낌이 먼저 불쑥 빗겨나왔다고 해서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그렇게 머리주의자들에겐 불문율처럼 상황이 서로 끼워지면서 느낌들을 물과 기름처럼 밀어내며 마치 공모한 듯 연기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

 약기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홀로 서성거리다가 마음의 외로움이 지쳐 점점 하루의 끝점이 다다라서야 그것이 열쇠가 되어 상자의 자물쇠가 열리는 것이다. 그렇게 느낌은 외진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복용되었다. 다른 상자엔 어떤 느낌들이 스스로 달래는지 도통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실낯같은 느낌의 가닥만이 상자에 따로따로 보관되어 은밀하게 유통되었다. 물처럼 마신다. ....

마음의 말, 떨림, 말이 전하는 음악엔 관심이 없다. 얼마동안 울림을 전하려 애타고 간절했는지도 도통 눈치채지를 못한다. 세상은 마음이 많은 말, 가슴이 전하는 말, 손과 발의 지문이 다 닳도록 만든 삶의 말들로 넘치건만, 세상은 무색무취한 공기처럼 당연하다고만 여긴다. 꿀꺽꿀꺽 마실 수 있는.........................

 

바다로 뻗은 긴 방죽

 

나와 너가 조금씩 회자될 무렵이었다. 우리철학을 하는 모둠에서는 잠깐 잠깐 나오다가 사라지길 빈번했다. 서양철학의 밑둥이 잘리우고, 환원의 사상들이 초라해지길 반복해도 볕이 드리우지 않는 그늘에서 여전히 두터운 빙벽처럼 견고하다. 나를 돋구기만 한 이천년의 역사는 그렇게 독립된 나를 만들고, 독립된 나에게 자유를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평등 또한 저 지평선까지 밀어붙이고, 있지도 않는 미래를 담보를 잡아 신기루처럼 비추는 것이다. 그런데 그 철옹성같은 나 옆에 너가 희미하게 있다는 사실이 이가 흔들거리듯 흔들흔들, 뿌옇게 보이는 것이다. 나 옆에있는 너는 관념속에서 서로주체로 보듬었지만, 또 나-너만 무리지어 나로 보이는 것이다. ....

그 사이를 스며든 복잡계 과학은 서양철학과 학문의 맹점을 여실히 드러내게 되었다. 경제의 합리적인 소비주체로서 개인은 여전히 구석기시대의 야생에서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집단 속에 나로서 파악을 해내지 않으면 무질서는 분석을 해낼 수 없었다. 질서와 무질서의 경계에서 서서히 과학의 성과는 드러나고 사람들의 관계와 복잡의 이면이 조금씩 안개처럼 걷히게 된다. 김하봉 교수와 김명민 교수, 박송규 교수 등 재야의 인문학적 성과는 우연한 기회에 갈래잇는 과학의 성과를 받아들이게 된다. 나와너, 너-나-너 속의 너에 대한 접근은 좀더 개별자 나와 개별자 너로 잇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이웃이란 집단성에 착목하게 된다...............

추구하는 공동체와 나에 대한 인식의 변환은 사회단체의 소비자 개인으로 환원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모임 속의 나에 대한 전환으로 이어져 좀더 다른 접근들이 시도되게 된다. 일회성의 강연은 지양되고 몇 번의 모임의 구성원들로 이어지는 겹침과 노력은 조금씩 공동체와 삶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온다. .......

 

4.

슬픔(이은봉)

살구나무와 통하다(이안)

마음(윤재철)

모르는척, 아프다(길상호)

동그라미(이대흠)

목련(김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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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느낀다는 건 언제나 '둘'에서 시작합니다.
    from 木筆 2014-07-04 09:28 
    목마른 사람은 물에 세상의 모든 맛이 담겨 있음을 압니다. 배고픈 사람은 흰 쌀밥에 최고의 맛이 담겨 있음을 알 거고요...이유를 따지고 논리를 만들기 전에, 마음이 먼저, 발이 먼저 그들에게 도달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세상을 구경하려는 자들에게는 어떤 느낌도 오지 않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는 무시한 채 먼 곳에서 뭔가를 찾으려는 자들에게도요. 잘 느끼는 사람들은 열심히 구하고, 열심히 움직입니다. 그러다 보면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그럴
 
 
 


1.

그의 직업은 시간-지도사이다. 마음 속에 있는 바램들을 모아 시간이라는 캔버스에 조각조각 붙여 그리로 가는 길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움이 봄볕에 바래기 시작한다. 그리움이 한올 한올 벗겨지더니 아질아질 눈앞에서 서성이다 사라지길 되풀이 한다. 문득 그리움을 모아 보았다. 아질거리는 그 녀석은 손을 가까이 대면 촉촉한 습기를 내밀면서 앉는다. 그렇게 바래는 그리움을 모아모아 파릇파릇한 새순들 위에 놓자 그리움은 푸릇푸릇해지더니 곧 끓기 시작한다.

그리움이 끓을 무렵, 서편엔 달이 쫑긋거리면서 달려오는 것이다. 별도 반짝거리며 그리움을 스카프처럼 두르는 것이었다. 

그리운 마을을 떠난 것은 그쯤이다. 그리움이 물밀듯 밀려오다 끓어넘칠 즈음이 되어서야 그 마을로 향하는 시간의 길이 조금조금 실루엣처럼 비치는 것이다. 이제 이 마을의 시간 지도가 마무리 되어간다. 그리움이 앞으로 열 번 정도 끓어넘치게 되면 안개처럼 묘연했던 시간의 길과 지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리움이 결빙된 듯 바짝바짝 얼기만 할 뿐 도대체 따듯해지지 않는 것이다. 서글픔이 잦게 내리더니 그리움이 조금 조금 지쳐가는 것이다.

시간으로 난 문을 열고, 예전에도 그랬듯이 느낌을 쌓아두거나 느낌을 사고 팔 수 없는 그 마을을 다녀올 것이다. 
 

2.


 

시간의 틈이 빡빡하다. 꾸깃꾸깃 틈을 몇 번 접을 무렵 매쾌한 냄새가 스며든다. 그렇게 황급히 빠져나오자 투명한 타워가 저 멀리 비친다. 거리가 스산하다. 버스가 날카롭게 다가서자 사람들이 몰려든다. 차창가 불빛들이 춤춘다. 춤추는 불빛들이 차창에 자꾸 튕겨 나간다. 

이 도시는 지층에 고이접어둔 석유, 석탄을 이백년만에 모조리 쓴 연유로 해수면의 상승과 지각판에 가하는 압력이 커져 지진이 끊이질 않았고, 중세의 페스트처럼 해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후로 사람들은 모두 몇시간 빨리 지진에 감응할 수 있도록 신경절에 지진감응주사를 맞았다. 

주사를 맞은 이들은 지적감응도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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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버튼을 누르자 손전화의 감이 떨어진다. 낯선 번호가 찍히고 예에~란 대답이 두번 나서기 전에 목소리톤을 알아차린다. 뜬금없이 감사를 해달라구?  총회가 목전인 듯한데 상황이 여의치 않은 분위기가 읽힌다. 내일 그리고 간다고 약속을 잡아버린다. 지난해 총회에 나오란 얘기도 듣지 못하구 선임된 감사가 필요하다구? 벌써 일년이 흐르고 아*** 책방 인권 모임들이 이어지면서 건네듣는 소식들이 안타깝기도 했는데 말이다. 점심이라도 할 요량으로 문자를 보내고  나무카페를 확인해본다. 즐찾해논 카페에 들른지도 벌써 서너달이 그냥 흘려버린 것이다. 지난 여름 캠프의 흔적이 인상깊어 동향이 궁금하기도 했는데 말이다.

점심으로 촌돼지 두부찌개에 막걸리를 시키니 주전자로 한되가 나온다. 둘이 마시기엔 그렇기도 한데,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누며 권하고 보탠다. 이야기 속엔 관계가 농축된 회원들과 일들이 함께 붙어나온다. 시의원들과 농도, 그리고 양심 멤버들의 눈높이에서 보는 모임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결이 겹치는 이들과 만남. 일들. 뜨문뜨문 보게된 모습들이 거울조각을 모으듯 이어진다. 비영리법인 등록을 하기위한 서류들, 인권센터 사람에 가입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 인권조례를 의원과 함께 구상하고 광주의 보다 나은 사례를 적용시키면 좋겠다는 이야기. 작년에 이어 캠프를 치르기엔 예산이 없고 빠듯할 수 있다는 말씀. 일들이 잘 농축이되면서 진행되면 좋겠다는 이야기. 독서모임-사진-소모임을 하고파하지만 운영위원들도 많지 않고, 추가 선임도 곤란한 상황들... ...

왜? 흐름과 모임이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일까? 양심과,  인권...자신의 색깔로 움직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해 더디다. 겹침이 필요한 것일까? 몸의 겹침이나 통일에 대한 토론이 있으면 나을텐데 그러지 못한 것 같다고 한다. (김규항의 섣부른 논박이 잡힌다. 여러 시선일 것이다. 단 하나의 동일한 주제의 시선이 아닐 것이다. 습속에 대한 돌아봄과 짧은 글로 다룰 수 없는 넓이에 대한 여유와 숙성된 대응이 아쉽다. 몸과 가슴, 손발의 문제를 머리만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아닐까?) 인권보다는 사회권으로 성원들의 겹침을 만들어내면 어떨까 한다. 박래군샘의 자문을 받아 자료를 모으고 연구를 하고, 축적을 해내면 개인 토대의 인권에서 그래도 기우뚱 중심을 조금은 함께나눌 수 있는 사회권의 제기로 이동해내는 것만으로도 큰 일이 될 듯하다.

성원들의 갈래는 제 맘대로 고삐를 잡고 싶어한다. 하지만 끌려갈 말들이 아니기에 오히려 성원의 색깔이나 몸의 흔적과 함께있지만 날선논의들이 아주 조금 모임을 끄-을-고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란 지금까지의 관행들은 탁상공론의 진수를 보여주며 배경으로만 잡히며 점점 흐릿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한다보다 어떻게 성원을 더 참여시키고 같이 몸을 버무리게 될른지, 고민의 실뿌리를 나누게 될지가 더 중요하다.

민*당 조*통*위 정책위원장이라 인권이 낯설겠다 싶다. 하지만 장애관련 연수를 받고 진하게 토해냈던 경험들이 같이 읽힌다. 정신병, 우울증의 약물경력만 있다면 보험이 되지 않고, 수용시 1인 120만원의 지원이란 고물은 병원감금과 영리의 순환고리를 갖추게 된다. 미쳤다는 딱지는 그렇게 순환되고 장애가 아니라 무권리의 사각지대가 버젖이 활개를 치고 있다고 한다. 정신병 관련 인권이란 영역을 조금 비춰준다. 세상에나? 잔뿌리가 여기저기 있다. 당적의 끈이 움직이는 결에 낯익은 이름들이 호명된다. 밖에서 보는 아***에 대한 이야기, 섞이기 힘든 ㅁ ㅗ ㅇ ㅣ ㅁ의 막힌 곳들이 보인다.

이을 수 있을까? 꽃샘추위 속 한낮의 햇살은 따듯하다. 막걸리로 오른 볼이 더 빠알갛게 익는다. 사월쯤 지*과 술한잔했으면 좋겠다는 말로 얼콰해진 마음을 건넨다. 건네질지 모르지만 감사보고겸해서 흔적으로 남긴다. 아마 관심이 연결된다면 여섯달쯤 지나 사람이 조금 겹치게 될 쯤 회자라도 되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보탠다.

뱀발.  

일관된 동선부족과 일처리에 대한 지적을 몇번 건네 받았다. 누가 누구를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되지 않기는 하지만,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엔 늘 섞인다. 실무에 대한 지적과 바뀌면 좋을 것들이 이상적인 바램과 섞이기 마련이다. 곰곰 생각을 되짚어보면 바램과 할 수 있음의 간극을 크다. 심리적인 연유부터 습관, 성원들의 스타일, 습속, 참여의 정도부터 하나 하나 원인제공을 하며 모임 이란 냇물이 흘러가는 곳의 돌과 바위가 되기도 한다.  이념이거나, 이념 속에 아픈 삶이라거나, 가지고 있는 환원된 모토들이 오히려 모임의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환원된 가치를 주장하므로써 모임은 한걸음도 현실속에서 딛지 못하거나, 잠깐의 열정만을 데우져서 오래가지 못하거나, 대행심리가 지나쳐 사무국의 관전을 바라보는 객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새로운 일들이 고정된 가치에 어긋난다고 시기를 하기도 한다.

그가 민**원의 일원으로 움직여온 생활, 그리고 인권에 자리하며 참여한 동기와 능력은 왜 못움직이는지 왜 움직일 수 있는지가 동시에 느껴진다. 느리지만 챙긴 실무들도 왜 더딘지 실무의 호흡에서야 겨우 어깨너머로 살펴볼 수 있다 싶다. 그리고 연결된 관계의 선들이 굵은 실선인지 가느다란 실선인지, 어디가 끊어졌는지? 그리고 회복의 기미에 대해 가늠하게 된다. 어쩜 몇몇의 몸겹침(체험)의 공유로 어이없이 해결될 수도 있고, 어쩌면 삶이 켜로 쌓여도 전혀 다른 길로 아무런 파장도 미치지 못하며 지쳐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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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ㅁㅇ이 삶을 섞어낸다면
삶의 모퉁이를 떼어내어
아니 삶을 떼어내지 않고
삶이 ㅁㅇ에 스며 ㅁㅇ과  같은 몸이 돼
ㅁㅇ에 떨어진 삶은 외롭고 아플 것이며
삶을 섞지 않은 ㅁㅇ은 불안할 지도 몰라

2. 

그대의 삶이 궁금하지 않아
그대의 이야기가 ㅁㅇ에 닿지 않아
그대의 속 이야기가 회자되지 않아
쌓이기만 할 뿐,  깊이로 만나는 법을 몰라
ㅁㅇ도 삶도 그저 바깥으로 겉돌기만 해
ㅁㅇ은 ㅁㅇ과 만나지 못해, 만날 수 없어

3. 

세상은 돈의 계정만 분할하고  
이중삼중의 안전장치를 두지만
ㅁㅇ은 예민해지거나 삶의 모퉁이를 감싸
별도의 계정을 두려하지 않아
한가닥의 삶은 외롭고 쓸쓸하다.
또 한가닥의 삶은 허전하고 돈의 공기로만 호흡한다.

4. 

ㅁㅇ복식부기가 가능하다면
삶의 하루도 복식부기가 나뉠 수 있다면
대변과 차변에 오늘 마음 만원을 빌리고
3일치 삶의 원기를 갚아 꼭꼭 눌러쓴다.
1년치 ㅁㅇ과 삶이 교차한 계좌도 생겨
ㅁㅇ과 ㅁㅇ이 거래를 튼다. 

뱀발. 참* 모임이다. 모임준비를 서툴게 해 퉁맞는다. 지인의 이야기를 건네듣다 소홀하고 등한히 했던 일들이 밀려온다. 좀더 세심히 짚지 못하거나 의도했던 바를 녹이려하지 못했던 것이 편치 않다. 생각보다 삶도 ㅁㅇ도 급박하다. 기다려주지 않는다. 세상의 속도만큼 낭만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로망을 남기는 것이 가능할까? 로망을 기다려줄까? 현실의 파고에 저만치 바래지는 생각의 흔적을 남긴다. 방법은 없을까?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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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뜬금없기 (1) - 차변과 대변
    from 木筆 2014-04-09 11:43 
    자산=부채+자본 -1. 회계원리로 검색해본다. 회계의 역사라고 하니 나오는 것이 없다. 부기의 역사하는 해피캠퍼스 유료자료만 나온다. -2. 회계란 "기업실체의 경제적 활동과 관련된 거래나 사건을 화폐액으로 측정*기록*분류*요약*정리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기술이다."라는 회계정보의 생산자 측면과 "기업실체의 경제적 활동에 관심을 갖는 여러 이해관계자가 합리적 판단과 경제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회사의 경제적 활동의 흐름과 결과를 추적, 기록하여 유